23. 한인애국단과 한국광복군 23. 한인애국단과 한국광복군 이 사건이 있은 후 1932년 4월 29일에는 김구 선생이 이끌고 있는 상해의 한인애국단 소속의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일으켰다. 윤봉길 의사는 이날 아침 김해산의 집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최후의 만찬’과 같은 아침식사를 마친 후 조국이 있는 .. 소설방/백두대간 2012.12.28
22. 의열사단 조선혁명선언과 6·10만세운동 22. 의열사단 조선혁명선언과 6·10만세운동 일본은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토히로부미 뿐 아니라 그에 동조한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을사오적」이라 불리며 민중의 분노의.. 소설방/백두대간 2012.12.28
21. 조선은 먹이감 21. 조선은 먹이감 이즈음, 열강들은 조선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특히 일본이 그랬다. 1904년 1월 6일, 일본 군함 60여척이 사세보항을 출발했다. 8일, 일본군은 요동반도의 여순항을 기습 공격하는 동시에 인천 앞바다에서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 코레즈호와 와리아크호를 격침시켰다. .. 소설방/백두대간 2012.12.28
20. 또다시 물거품 된 혼약 20. 또다시 물거품 된 혼약 이 당시 교육계의 사정은 대략 이렇다. 김구는 공립학교의 교원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황해도에서 학교라는 명칭이 , 공립으로는 해주에 설립된 것과 장연에 설립된 것이 있었는데, 해주에서는 사서삼경의 구학문을 가르쳤다. 강사가 칠판 앞에서 산술, 역.. 소설방/백두대간 2012.12.27
19. 스승의 말씀은 옳지만 19. 스승의 말씀은 옳지만 "이 사람, 창수 아닌가?" 고 선생은 돋보기안경을 쓰고 서적을 뒤적거리다가, 김구가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반색을 했다. 고 선생과 헤어진 지 5,6년, 고 선생은 몸이 그리 쇠약해진 것 같진 않았으나 노안(老眼) 때문인지 돋보기가 없으면 글을 못 보는 것 같.. 소설방/백두대간 2012.12.27
18. 동지 규합 18. 동지 규합 김구의 나이 25세, 2월이었다. 작은 아버지 준영은 김구를 순수한 농사꾼으로 만들기 위해 무한 애를 썼다. 새벽녘이면 와서 김구의 단잠을 깨우고, 먹기 싫은 새벽밥을 먹이고 가래질을 시켰다. 며칠 김구는 하는 체하다가 몰래 집을 나섰다. 고능선 선생이나 안태훈 진사를 .. 소설방/백두대간 2012.12.26
17. 평양에서 17. 평양에서 김구의 평양유람은 그의 '백범일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전 그대로 소개해 본다. 5월 초4일 평양성에 도착하여 여관에서 밤을 지새우고, 익일 단오일에는 모란봉 추천(그네뛰기)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에 관동(貫洞)골목을 지나며 본즉, 어느 집에 '두대치포관'하고 '신.. 소설방/백두대간 2012.12.26
16. 세상사 덧없어 삭발중이 되어 16. 세상사 덧없어 삭발중이 되어 이 서방이란 사람은 일찍이 홀아비가 되어 몇 년 동안 서당의 훈장으 로 지냈다. 인생이 재미없고 허망하게 느껴져, 마곡사로 가서 중이나 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형도 나처럼 중이 될 생각이 없소? 세속에.. 소설방/백두대간 2012.12.26
15. 만고강산 유람할 제 15. 만고강산 유람할 제 김구는 탈옥수의 신분을 잊은 채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마음이 울적했다.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죄스러웠고, 또 부모님을 뵙고 싶었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생각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암담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세가 처.. 소설방/백두대간 2012.12.26
14. 김구의 몸값 14. 김구의 몸값 계집은 사랑하는 서방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 있다. 난세(亂 世)에는 가끔 협객이나 지사(志士)가 등장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한다. 당시 간수 가운데 두령 격인 최덕만(崔德萬)이.. 소설방/백두대간 201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