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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또다시 물거품 된 혼약

오늘의 쉼터 2012. 12. 27. 23:08

20. 또다시 물거품 된 혼약

 

 


이 당시 교육계의 사정은 대략 이렇다.

김구는 공립학교의 교원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황해도에서 학교라는 명칭이 , 공립으로는 해주에 설립된 것과 장연에 설립된 것이 있었는데,

해주에서는 사서삼경의 구학문을 가르쳤다.

강사가 칠판 앞에서 산술, 역사, 지리 등을 가르치는 곳은 장련 공립소학교뿐이었다.

이 학교 설립 시초의 교원은 허곤(許坤)이었다.

이어서 장의택, 임국승(林國承), 그리고 김구가 교원으로 근무했다.

평양에서 예수교 주최로 사범강습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선생을 교육하는 공부였다.

당시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기독교장로회의 최초 7인 목사 가운데 방기창(邦基昌)이란

사람이 있었다.

김구는 방기창 목사 집에 장기 투숙하고 있을 때 숭실 중학생이었던 최광옥(崔光玉)과

친밀히 지냈다. 어느 날, 최광옥이 김구에게 물었다.'

  "김 선생 (김구)은 나이가 꽤 됐는데 아직도 혼자 몸이오?"

  그러자 김구는 어찌된 영문인지 여러 차례 혼사가 성립되지 않았다고 했다.

 

 


최광옥은 대뜸,

"그럼 좋소. 안신호 양과 약혼하시오. 내가 주선하겠소."했다.

안신호(安信浩)는 도산 안창호(安昌治)의 누이동생으로 그때 20여 세였는데,

활동적이고 트여 있는 신여성이었다.

김구가 한번 대면하자고 하자,

안창호의 장인 이석관(李錫寬)의 집으로 안신호를 오라고 했다.

최광옥이 김구에게,

"어떻소. 괜찮소?"

하고 대면한 결과를 묻자,

김구는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만난 여성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됐네. 신호와 당장 약혼을 하고 고향에 가게."

그러나 이 혼사 역시 어그러지고 말았다.

김구에겐 여자 복이 없었던지,

잘나가다가 일이 틀어져 버려, 이번 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튿날 아침, 도산의 장인 이석관과 최광옥이 김구를 찾았다.

"문제가 생겼네. 안창호가 미국에 갈 때 상해를 거쳤는데,

거기서 모 중학에 다니던 양주삼(梁柱三)과 혼사를 마쳤다는 것01다.

안신호는 오빠가 정한 양주삼과 김구 둘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해야 되는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 빠졌다.

두 사람 모두 아까운 인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안신호는 두 사람 모두를 버리기로 했다는 결정을 내렸다.

 

안신호는 김구에게,
"저는 한 동네에서 자란 김성택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당신을 오라버님으로 대하겠습니다.

인연이 애초부터 없었다고 너무 심려하지 마옵소서."

하며 미안해 했다.

 

김구는 안신호의 이야기에 매우 실망을 했다

그러나 모두가 지나간 일이었다.

김구는 자신이 여복이 없다는 걸 알고 일찌감치 단념을 한 채

교육에 모든 것을 투신하기로 했다.

한편 강화 김주경의 소식을 알아본 김구는 유완무에게 좋지 못한 소식을 들었다.

"김주경은 강화를 떠난 뒤, 특유의 장사 솜씨로 큰돈을 모았었네.

붓 행상을 했는데, 그 돈을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그만 연안(延安)에서 객사를 했네.

김주경이 돈을 모아 둔 것은 나름대로 큰일을 도모하려 했다는 것인데,

이미 그가 죽고 난 후 그 뜻을 알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네."

김주경은 자신이 거액을 모아 둔 것을 일가친척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돈으로 어떤 경륜을 펼쳐 보이려 했을 텐데,

그가 죽었으니 그의 흉중을 어떻게 알 것인가

"참으로 아까운 분이었습니다."

 김구는 눈물을 흘렸다.

김주경은 비록 생전에 돈을 많이 벌었으나,

그 돈을 큰 뜻에 쓰려고 했던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대체로 사람의 가치란 그 행동의 면모에 있는데,

김주경의 출신이 상놈이었지만, 양반보다 더 큰 이상을 품었었다.

돈을 쓸 줄 아는 큰 인물이었다.

돈을 옳은데 쓴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졸부(猝富)나 파렴치 하게 돈을 긁어모은 자들은 엄두도 못내는 일이다.

김구가 김진경, 즉 셋째 동생의 소식을 묻자

그 역시 전라도에서 객사하여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다고 했다.

 

 


김구에게 또 한번의 혼사가 성립된 것은,

신천 사평동 예수교회의 영수(領首) 양성칙 (梁聖則)의 권유에서 였다.

"교회의 여학생 가운데 최준례라는 처녀가 있소.

최준례의 모친은 경성사람이고 과부인데 예수교 열심 신도요.

신창희(申昌熙)가 첫째 사위인데 의사요.

어떻소?

다소 문제가 있으나 정리하면 될 것이오.

문제란 다름 아닌 이런 것이었다.

최준례의 모친이 이웃동네에 사는 강성모란 청년에게 허혼을 했는데

최준례가 이를 거부 교회에서 들고 일어났다.

최준례는 자유결혼을 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일생을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었다.

김구는 준례를 만나 본 후 마음이 동해 곧 혼약을 했다.

한편 강성모측에서 반발하자

김구는 최준례를 아예 사직동의 집으로 데려왔고,

경성의 경신(敬信)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이렇게 되어 김구는 드디어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다.

1904년 최준례와 결혼할 때 김구의 나이는 29세, 최준례의 나이는 18세였다.

처음 교회는 이들의 결혼을 반대했다.

조혼(早婚)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교회는 이를 허용했던 것이다

아무튼 최준례와의 결혼은 이렇게 해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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