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17. 평양에서

오늘의 쉼터 2012. 12. 26. 15:19

17. 평양에서

 


김구의 평양유람은 그의 '백범일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전 그대로 소개해 본다.

 

 

  5월 초4일 평양성에 도착하여 여관에서 밤을 지새우고, 익일 단오일에는

모란봉 추천(그네뛰기)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에 관동(貫洞)골목을 지나며 본즉,

 어느 집에 '두대치포관'하고 '신착심수의' 한 학자가 염슬위자한 것을 보았다.

수작을 좀 하라하고 '소승 문안드리오.' 했다

그 학자는 숙시지하다가 입좌를 청한다.

방안에 들어가 담화를 개시했다.

  그 학자의 성명은 최재학이요,

호는 극암인데, 간재 전우의 제자였다.

'소승은 마곡 한승으로 금차 서행도하에 천안 금곡에 가서 간재 선생을 배방코자 하였으나

마침 그때 전 선생이 부재중이므로 미기제봉이더니

금(今)에 선생을 봉배 한 즉 심히 반갑다' 하고 도리 연구에 다소 문답이 있었다.

  그때 최재학과 동좌한 노인 일위가 있으니 장수미염에 위풍이 품연하더라.

최재학은 나를 소개하여 이 영감에 뵈이라 한다.

나는 합장 배례했다.

그 노인은 전효순이니 당시 평양 진위대 영관이요,

그 후에 개천군수를 지냈다. 최재학이 전효순에게 청한다.                                      

<이하 약(略)>

 

 

 

  김구는 모란봉에 가서 그네뛰기를 구경했다.

돌아오는 길에 어떤 학자를 만났다.

학자의 용모가 범상치 않아서 김구는 말을 청했다.

그 학자의 이름은 최재학이고, 호는 극암인데 전우의 제자였다.

김구는 자신의 소개를 했다.

이때 최재학의 곁에 앉아있는 노인이 있었는데,

이 노인은 전효순이라고 했다.

당시 평양 진위대의 영관인데, 뒤에 개천군수를 지냈다.

  최재학이 전효순에게 김구를 소개했다.

  "이 대사(김구)는 상당한 식견이 있는 스님입니다.

영천사 방주 자리를 내주시면 아이들과 외손자들의 공부에 큰 보탬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전효순은 무척 기쁜 얼굴이 되었다.

  "대사의 언행을 보아하니 범상치 않은 인물 같소.

어쩌시겠소. 내 청을 들어 주시겠소?"

  노인은 김구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온지 ‥‥‥?"

   "최 선생에게 내 아이들과 외손자들을 부탁해 영천사란 절에서 공부를  시키는데,

주지승의 성행이 몹시 불량스러워 술이나 처먹고 행패를 부리니

곤란히 막심하오.

대사께서 최 선생을 보좌하여 내 자손들에게 글공부를 맡아 주시오."

  김구는 이 말에 사양했다. 어디 한 곳에 머무르는 체질이 아닌 그로서는,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눌러앉았으면 마곡사가 오히려 더 편했다

그 많은 재산을 소유한 채 편안한 생활로 여유작작할 수 있었잖은가.

 


  "소승은 원래 역마살이 끼어선지 방랑벽이 있습니다.

약속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니오. 대사께서는 능히 할 수가 있소."

  최재학은 전효순에게 영천사 방주의 임명장(差皓)을 받아 달라고 했다.

당시 평양의 서윤(미장의 관리)인 홍순욱을 움직여 임명장을 받아야 하는 절차였다.

  전효순은 홍순욱에게 찾아가 설득을 했다.

  '승 원종으로 하여금 영천사의 방주로 임명하라.'

이런 첩지를 가져와 김구에게 보인 후 당장 취임해 줄 것을 간청했다.

  김구는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영천사의 방주라면 우선 신분 보장이 되었다.

혼자 몸이 아니라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야 할 인데 더 이상 거처할 곳도 없고,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또 학자와 같이 지내다 보면 학식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의식주에 대한 걱정도 사라질 것이고, 망명(亡命)의 본뜻에도 위배되지 않을 것 같았다.

  "소승을 생각하시는 그 뜻을 받들겠습니다."

  "승낙하겠단 이야기요?"

  전효순은 김구의 두 손을 잡았다. 김구가 무척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김구는 혜정 스님과 부모님을 모시고 최재학을 따라서 평양 서쪽에 소재한

대보 산의 영천 암으로 갔다.

암자이지만 제법 큰 규모였다. 절 안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주지승이란 자가 매일 술에 취해 돌아다니다 보니

사찰 내의 분위기는 물론, 기물들이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절의 정돈을 마치고 방 하나를 따로 정해 부모님을 모셨다.

 


  전효순은 부자답게 아이들 공부도 열심이었다.

아들 병헌, 석만, 전씨의 사위 김윤문의 아들 형제, 장손, 중손 그 외에 몇 명의 학생이 더 있었다.

 이만한 인원이면 선생 하나를 고용해도 무방했다.

  전효순은 하루걸러 한 차례씩 절로 진수성찬을 차려 보냈다.

김구는 스님으로서 하지 않아야 할 육식도 하고 염불하는 대신 좋은 시를 읊고 지었다.

푸줏간은 산 아래 있었는데, 그곳 에서 매일 고기를 한 짐씩 지고 왔다.

김구는 승복을 입은 채 고기를 뜯었다. 한 마디로 땡초였다.

몸만 절에 있었지, 생각은 세속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김구는 원래 갇혀 지내는 것을 싫어했다.

또 사람들이 까다롭게 만들어 놓은 계율에 얽매어 지내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김구는 최재학과 함께 황경환 등 시객들과 율(律)을 짓고 시를 읊었다.

'손에는 돼지 머리를 들고, 입으로는 거룩하게 경전을 외운다.'는 말과 가깝게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최재학과 학자들은 평양 시내로 나갔고 김구 혼자 있으려니,

대보산 앞 태평시 내촌의 서당 훈장 한사람이 학동 수십 명을 인솔하고 왔다.

절에서 시를 읊는 모임을 갖기 위해서였다.

시인 몇 명도 동행을 했다.

  이 사람은 재산을 과시하려는 듯 푸짐하게 술과 안주까지 장만해 왔다.

시집회가 시작되자마자 시객 한 사람이 방주승 김구에게 호출령을 내렸다.

김구는 공손한 태도로 답변했다.

시객은 평양에서 꽤 세도가 있는 사람 같았다.

그자는 오만불손 하게 언성을 높였다.

 


  "너 이놈, 네가 방주 승이냐! 선배들이 오시는데 거행이 왜 이리 소홀한가?"

  "예 , 소승이 미처 선배님들이 오시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이놈, 말은 잘한다. 네가 이 절의 방주가 된 지 얼마나 됐냐?"

  "서너 달 됐습니다."

  "이놈아, 그럼 이 마을 유지들에게 인사를 드려야지."

  "예, 소승이 그만 절의 업무정리를 하다보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시객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훈장이 시객의 행동이 과격한 것을 보고 김구를 조용히 불렀다.

  "저 사람이 취했으니 너그럽게 양해하시오."

  그리고 시객에게는,

  "내가 잘 타일렀으니 심기를 가라앉히시오."

하며 적당히 구슬렸다.

  전 같았으면 이런 행패를 당했을 때 그냥 놔두지 않았을 텐데,

그 동안 수양을 많이 했던 탓에 참을 수가 있었다.

  술이 어지간히 취하자,

훈장 김우석으로부터 시작하여 거기 모인 시인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시를 짓거나 쓰면서 떠들어댔다.

  김구가 가만히 엿보니 이들의 시가 어설프고 촌티가 나며,

천박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었다.

글 솜씨가 짧은 자들이 풍류를 읊는다고 거들먹거리는데 ,

김구가 그냥 있기에는 한도가 있었다.

저 정도의 시와 문장이라면 나 역시 뒤지지 않겠구나 하면서 끼어들 기회를 노렸다.


시골 선비들이란 원래 멋만 좋아하고 거들먹거리기나 할 줄 알지 글 솜씨는 그리 튀지 못한다.

김구는 최재학과 만나 같이 다니면서 당대의 유명인사들의 글귀와 접할 수가 있었다.

호정 노동항, 왕파 황경환, 김성석등이 그들이었다.

이들과 사귀게 되자 자연 글씨와 시를 알게 되었고,

웬만한 촌 선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김구는 기회를 엿보다가 훈장에게 넌지시 청했다.

  "소승의 글도 버리지 않으시다면 시축의 끝자리에 혹시 끼워 주실 수 있는지요?"

  훈장은 녀석 별소리 다한다는 얼굴로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너도 시를 지을 줄 아느냐?"

  하며 허락을 했다.

  "소승이 여러 귀하신 분들에게 무례를 범한 죄로 운(韻)자나 채워 보겠습니다."

  "그래라."

  김구는 즉석에서 이런 시를 지었다.

마치 오만방자한 시골 선비에게 김병연 (삿갓)이 대작한 시 같았다.

 

 

  유가 천년이면 불가도 천년이요(傭家千歲佛千歲)

  내가 보통이면 그대들도 보통이다(我亦一般君一般)


  이 시를 돌려본 훈장과 시골 선비들은 얼굴색이 달라졌다.

자기들을 조롱하는 시가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최재학 일행이 도착했다.

촌객들의 풍축(시를 짓고 풍월을 읊음)을 구경하다가 제일 끝에 있는 김구의 글에

 이르러서 박장대소를 했다.

  "걸작이로다! 걸작이오! 역시 원종대사요!"

  이 통에 촌객들의 객기가 수그러지고 창피한 얼굴이 되었다.

이 글귀는 나중에 평양 기생들의 노래 곡조로 유행됐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김구는 '걸시승 원종' 이 란 별명이 붙었다.

  지방 토호들의 거드름은 이제나 그제나 알아줄 만했다.

땅뙈기나 좀 있는 자들은 안하무인격으로 못 가진 자를 업신여기는 버릇이 있었다.

머릿속에는 똥밖에 들어 있지 않은 자들이 걸음걸이는 팔자라,

김구는 이들이 여간 못마땅하지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김구는 평양 성내의 전효순의 편지를 갖고 갈골이란 마을로 갔다.

갈골에는 김강재 선생이 있었는데, 평안도 내에서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그 김 선생을 찾아가는데, 주점이 있어 그곳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때 주점 안에서 큰 호령 소리가 들려 왔다

  "이놈, 이 땡 중놈아!"

  그 당시 중이라면 가장 빈천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특히 시골 선비들에게는 시비의 대상이기도 했다.

  김구는 그 소리가 자기를 호칭하는 줄 알고 문 앞에서 공손히 합장 배례했다.

이때 주점 안에서 한 놈이 비틀걸음으로 나 오더니 김구에게 거만하게 물었다

  "이놈아, 너는 어디 사는 누구냐?"

  "예, 소승은 마곡사에서 왔습니다. "

  "마곡사는 충청도에 있는데, 충청도 중놈은 버르장머리가 그 그러냐?"

  "예?"

  "양반님들이 있으면 문안을 드리고 지나가야지. 원, 중놈들이 란‥‥‥‥"

   

  "소승이 크게 잘못했습니다. 갈 길이 바빠서 그만 인사범절을 잊었습니다."

  "이놈, 지금 어디를 가느냐?"

  이자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김구를 향해 이놈 저놈 함부로 욕질을 했다.

그러나 김구는 절에서 수양한 적이 있어서 꾹 참을 수가 있었다.

  "예, 갈골을 찾아갑니다."

  "갈골 뉘 집?"

  "김강재 선생 댁입니다."

  "중놈이 김 선생을 알더냐?"

  "아직 뵙지는 못하옵고 평양 성내 전효순 씨의 서찰을 소지 하고 갑니다."

  이자가 전효순 씨란 말을 듣자 갑자기 얼어 버렸다.

입이 다 물어지지 않는 듯 그냥 벌리고 있다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방 안에 앉아 있던 자들도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이때 한 사람이 나오더니 김구에게 시비 걸던 자를 꾸짖었다.

  "예끼, 이 사람! 저 대사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함부로 욕질을 하나 .

길 가는 중이 가게마다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다간 길을 언제 가겠나?

취했군. 대사께서는 어서 가십시오."

  전효순이 진위대의 영관임을 알고 나자 은근히 겁이 났던 모양이다.

  김구는 중재하던 사람에게 물었다.

  "저 양반의 택호가 무엇인지요?"

  택호(宅號)란 고향과 벼슬 이름을 뜻한다.

  "저 양반은 이 안마을 이 군노(軍奴) 댁 서방님이네. 어서가게“

 


  김구는 속으로 웃었다.

 시골에서는 조그만 벼슬 부스러기만 있어도 세도를 부리는 자들이 많았다.

군노란 군아에 소속된 종을 말한다.

  황혼녘이 되었다. 농부들이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군노 댁이 어디요?"

  농부가 대답 대신 손짓을 했다. 산기슭에 있는 무너져 가는 흙집이었다.

  "이 군노 양반은 집에 있나요?"

  "이 군노는 죽고, 지금은 그 손자가 집을 지키고 있네."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벼슬도 아닌 것을 갖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많으니

나라가 제대로 될 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강재 선생을 찾아가 하룻밤을 지내면서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재 선생은 그 후 강동군수를 지냈다고 하는데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한편 김구를 따라왔던 혜정 스님은 김구가 불심이 얕아지고 세속으로 기우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나 역시 그랬소.

중 생활이 싫어서 막상 가사와 바리때를 던져 버리고 산 입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도 수차례였소.

원종대사도 중 생활을 하려면 더 정진하시오."

  혜정은 김구에게 이런 말을 하고 경상도로 돌아갔다.

경상도로 가기 전에 김구는 약간의 노잣돈을 쥐어 주었다.

 


  중 행색으로 서도(황해도와 평안도)에 내려온 김구에게 아버지는

다시 삭발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장발승이 되었다.

장발승이란, 머리를 길렀으나 가사와 바리때를 들고 다니는 중을 말한다.

그해 10월에 가까스로 상투를 틀어 의관을 정제하고 고향인 해주로 돌아왔다.

중 생활을 아예 청산한 것이다. 양반들과 친척들은 김구가 돌아왔으니

또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렇듯 그는 바람을 몰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술주정뱅이 삼촌 준영은 그 동안 무례했던 일들을 반성한 가운데,

형님인 김구의 아버지를 깍듯이 형님으로 모셨다 그러나 김구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식자우환이라고, 너는 온통 파란만 일으키고 다니느냐. 농사꾼이 농사를 지어야지.

또 난봉기까지 있다니 그게 말이 되냐?"

  준영 삼촌은 김구가 순순히 농사를 짓고 장가들어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

글이나 읽었다고 난체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미워했다.

또 김구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쓸데없이 바람이나 피우는 줄 잘못 알고 있었다.

  준영 삼촌은 형님인 김구의 아버지에게,

  창수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간청을 했다.

  그러나 김구의 아버지는,

  "창수가 어린 몸도 아닌데 스스로 알아서 하게 놔둬라."

했다.

  '형님은 아직도 저놈에게 속고 있어요.

글공부 조금 시킨 죄로 형님은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잖습니까?"

 


  준영 삼촌은 김구를 잘 꿰뚫어 본 것이다

김구가 만일 글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동학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고,

인천에서 탈옥하는 사건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랴.

  사람이란 눈을 떠야 하는 법,

텃골 바닥에서 농사꾼으로 늙어 죽기에는 김구의 가슴 속에 든 사연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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