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김구의 몸값
계집은 사랑하는 서방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 있다.
난세(亂 世)에는 가끔 협객이나 지사(志士)가 등장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한다.
당시 간수 가운데 두령 격인 최덕만(崔德萬)이란 사람이 있었다.
최덕만은 강화 읍내 김 우후(金處候)의 집에 계집종으로 있던 여자의 남편이었다.
우후(處候)란 조선시대의 무관을 통칭하는 것인데, 그의 본명은 김주경(金周卿)이었다.
최덕만은 아내가 죽은 후 인천으로 와서 경무청 사령으로 오랫동안 복무를 하여
사령들의 두목이 되었다.
그 최덕만이 어느 날 강화, 옛 상전의 집으로 가서 김 우후에게 김구의 이야기를 했다.
"인천옥에 이인(異人) 사형수가 있습니다.
이름은 김창수이고 나이는 스물두 살밖에 안되었는데 그 죄명이 국모보수입니다.
사람이 재기가 뛰어나고 담력이 세어서, 모든 죄수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최덕만의 말에 김 우후는 귀가 뜨였다. 그렇지 않아도 협객이나 지사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던 삭막한 시절에 이런 인물이 있다는 건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가. 내가 한번 만나보겠네."
김 우후, 즉 김주경은 최덕만에게 인천옥에 가면 김구에게 의복을 한 벌 주라면서 그것을 전했다.
어느 날, 감리서의 주사가 김구에게 말했다.
"창수, 자네에게 이 의복을 전하라는 사람이 있소."
"누구요?"
"강화에 사는 김주경이란 사람이오.
그러니 이 의복을 입고 있다가 김주경이란 사람이 면회를 오면 만나 보시오."
주사의 말대로 얼마 후에 김구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김 주경이었다. 나이는 마흔 가까이 되어 보였고,
체구가 단단해 무인(武人)이란 것을 대뜸 알아볼 수가 있었다.
김구는 이 사람 역시 어떤 부탁을 하러 온 줄 알고 떳떳이 대했다.
"나 김주경이란 사람이오. 여기 있는 동안 목숨이나 잘 보존하시오. 훗날을 기약합시다."
김주경은 이렇게 말하고 물러갔다.
김구의 어머니가 그날 저녁 밥을 갖고 와 말하기를,
"김 우후라는 양반이 찾아왔다.
네 의복을 지어왔다면서 우리 양주 옷 해 입으라면서 옷감을 끊어 왔단다.
또 돈 2백 원을 주면서 필요할 때 마음대로 쓰라고 하더라.
네가 보니 사람 됨됨이가 어떠냐?"
김구는 그 말에 얼른 할말이 없었다.
다만 어려운 처지에 돈 2백 냥을 갖고 왔다면 우선 고마운 일이다.
더구나 사형수에게 무슨 기약이 있다고 그만한 돈을 갖다 주겠는가.
"고마운 분이시죠."
김구는 나중에 최덕만에게 김주경의 내력을 자세히 알아보았다.
"참으로 용기 있고 덕이 있는 분이네. 요즘 세상에 그만한 인물도 드무네.
그 어른의 자는 견득(卿得)이라 하고, 원래 강화 관아의 서리 배(吏屬)이었네.
병인양요 후에 대원위 대감(대원군)이 강화도에 3천 명의 별무사를 양성하고
섬 주위에 석루를 쌓고 진무영을 세울 때 포량고지기(군수품 창고지기)의 일을 맡았었네."
최덕만은 김주경의 내력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김주경은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쩨쩨하지 않고 호방하고 쾌활했다.
초립동이 시절부터 공부를 하지 않고 도박을 일삼았다. 일종의 한량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제멋대로 놀아나 그의 부모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부모는 김주경의 도박습성을 끊게 하기 위해 곳간에 가둬 두었다.
그런데 곳간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투전(도박)에 대한 연구를 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터득했다. 곳간에서 풀려난 김주경은 서울로 올라와
투전(화투와 같은 도박기구)을 몇 만목이나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만 알 수 있는 표시를 하여 강화로 가져 와 판매했다.
강화는 육지와 거리는 가깝지만 섬이라서 포구마다 고깃배들이 들어와 있었다.
김주경은 이 투전기구를 친구들에게 나눠 주고 고깃배 선주들에게 팔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선주들을 상대로 노름을 하여 이들로부터 상당한 돈을 땄다.
자신이 만든 투전기구에 표를 해줬으니까, 노름을 해도 어느 것이 맞는가 하는 것은
마치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었다.
김주경은 투전기구를 판돈 이외에 투전으로 막대한 돈을 긁어모아 수십만 냥이나 벌었다.
일종의 사기행위였다.김주경은 이렇게 번 돈으로 관청의 하급관리들을 매수하여
자신의 명령에 따르도록 했다.
그는 지략과 용기가 있다는 자들은 모두 자기 식구로 만들어 놓고,
어떤 양반이 권세를 갖고 횡포를 부리거나 비리를 저지를 경우 혼을 내주었다.
이른바 그는 토호로서 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만일 자신의 관내에서 도둑이 들어 서울의 경포(서울 포졸)가 오면,
군수에 게 신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김주경에게 보고부터 하게 되어 있었다.
"관아에 도적사건이 났는데 수색하게끔 허락을 해주십시오."
만일 김주경의 비위에 거슬리면 거절을 했다.
"안된다. 그냥 가거라."
그러면 그 포졸과 대장은 그대로 돌아가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당시 강화에는 두 인물이 있었다.
양반 가운데 이건창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대문장가(大文章家)로서 양명학 (陽明學)의 권위자였다.
그는 여러 차례 유배생활을 하다가 만년을 강화에서 보냈다.
그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인근은 물론 서울까지도 그 명성이 높았다.
또 한 사람, 상놈 가운데 이름을 날린 사람이 김주경(경득)이었다.
대원군이 강화에 포진지를 세울 때 김주경을 친히 접하고 포량 고지기를 맡겼다.
"생김새는 상놈 같은데 그 지략이 뛰어나 버리기가 아까운 인물이군."
이런 김주경이 김구를 살려내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는 비록 상농 출신이었지만 김구를 살려내 그에게 큰 임무(?)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최덕만은 김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하루는 그 어른이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하며 이런 이야기를 했네
자네를 꼭 살려야 할 텐데, 지금 정부관리란 놈들은 타락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돈밖에 없으니,
이놈들에게 돈벼락을 내려 자네를 방면하게 하겠다고 말일세.
자신의 가산을 전부 팔아다가 자네의 부모님을 모시고 경성 (서울)에 가서,
관리들에게 손을 써 자네를 살려내도록 하겠다고 했네."
이 말을 들은 김구는 난세에도 이런 사람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지'나 '수호지' 같은 소설에 보면 의(義)를 위해 재산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의인을 따르는 사람들이 등장 하는데,
요즘 세상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훗날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 같지가 않았다.
"고맙소.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재산을 모두 버린다니 감격할 따름이오."
김주경은 최덕만의 말대로 열흘 후에 찾아왔다.
김주경은 김구의 어머니를 데리고 서울로 갔고, 김구의 아버지는 인천에 머물렀다.
김주경은 서울로 가 한규설을 찾았다 한규설은 을사조약에 반대한 우국지사였다.
당시 그는 법부대신을 맡고 있었다.
김주경은 한규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상놈으로서 당돌한 태도였지만 그의 말이 당당해서 한규설은 귀담아 들었다.
"대감, 김창수는 뛰어난 사람이오.
조선에 이런 인물이 있다는 것은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오.
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조선 민중 전체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요."
"무슨 말씀이오?"
"김창수가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오.
조선 민족을 대표해서 원수를 갚은 것이오.'
"음,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한규설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 역시 김주경의 말에 공감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공사는 김구의 사건이 국제문제로 비화될까 봐 염려하여,
대신들 가운데 이 사건을 임금께 주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위해를 가하더라도
막을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의 일본공사는 '백범일지'에 의하면 하야시 곤스케 (林權助)라고 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김구가 탈옥한 후인 1899년 부임했기 때문에 이 사건과는 관계가 없다
당시의 일본공사는 기록에 의하면 하라와 가토이다.
김주경은 어떻게 됐던지 공식적으로 청원서나 내보자고 생각 하여 법부(法部)에 청원서를 냈다.
그러자 '국모의 원수를 갖는다는 취지는 가상한 생각이지만 사건이 중대하여
여기서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답변이 내려왔다.
김주경은 이곳저곳의 관청에 모조리 탄원서를 냈으나 차일피일 미를 뿐,
뾰족한 대담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가 소송에 진력하기를 7~8개월, 송사에는 원래 재산이 바닥나게 마련이다.
김주경의 그 많던 재산이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그 동안"
김구의 부모는 혹시나 아들이 무사히 귀가할까 생각해 인천과 경성을 오르내렸다.
요즘에야 전철이 있어서 한두 시간이면 왕복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이렇다 할 교통수단이 없어서 상당한시간이 소요되었고, 돈도 많이 들었다.
결국 김주경은 소송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는 김구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자신의 심경을 읊은 시를 써 보냈다.
진실로 좋은 새는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하며 예사롭지 않은 큰 물고기는 그물을 떨쳐야 한다.
충은 효에서 비롯된다.
그대는 반드시 어머니를 생각하라.
김구는 이 시를 읽고, 자신을 위해 마음을 써준 김주경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김구는 답서를 보냈다.
한때 구차하다고 해서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수가 없는 법, 과히 우려치 마시옵소서.
김주경의 그 후는 이랬다. 김주경은 집에 가서야 재산이 바닥난 것을 알았다.
그는 새로이 동지를 규합하고자 했으나 이미 힘이 달려 있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는 해적질을 해서라도 돈을 모아 김구를 살리려고 했다.
당시엔 관청에서 운영하던 배가 세 척이 있었는데, 청룡환, 현익호, 해룡환이 그것들이었다.
이 배들은 윤선(輪船)으로, 배의 좌우에 물갈퀴를 설치하고,
배 안에서 그 축에 달린 쇠막대를 사람의 힘으로 돌려서 가도록 만들었다.
김주경은 이 세 척의 배 가운데 한 척을 탈취해서,
이 배를 끌고 바다로 나가 해적질을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실행 직전에 김주경의 모의 사실이 당시 강화군수에게 발각되어 김주경은 도주했다.
김주경은 화풀이로 강화군수가 상경하는 것을 엿보아 실컷 두들겨 주었다고 한다.
그 후 김주경의 소식은 끊어지고 말았다.
아무튼 김구의 인생에서 김주경은 인상 깊은 사람의 하나였다.
김주경이 비록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바람직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았으나
그 돈을 보람 있게 썼다는 것은, 돈과 권력만 탐닉하다가 일생을 더럽게 마치는
탐관오리들에 비하면 값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김구는 함께 고생했던 인천옥의 죄수들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억하고 있다.
'백범일지' 에 기록된 사람들은 이렇다.
기시(其時) 옥중에 동고(同苦)하는 장기수인 조덕근 10년, 양봉구 3년, 김백석 10년,
기타 종신수도 있었다.
이 사람들이 내게 대하여는 감히 말은 못하나 내가 하려는 마음이 없어 그렇지,
만일 자기네들을 살리려는 마음만 있으면 자기들을 한손에 몇 명씩 쥐고 공중에
날아가서라도 족히 구하여 줄 재주가 있는 것처럼 믿고 있는 듯했다.
종종 내게 그런 식으로 종용하기도 했고 잠깐씩 그런 말뜻을 비추었다.
김구와 함께 복역하고 있던 죄수들은 한결같이 김구가 신통력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자기들을 감옥에서 석방시켜 줄 수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조덕근이란 장기수가 김구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을 했다.
"김 서방님이야 언제든지 황제께서 특전(特典)을 내리시면 감옥에서 나가셔서 귀하게 될 몸이 아닌가요. 저도 전생의 인연이 있어선지 서방님을 감옥에서 근 2년이나 모시고 고생을 했지요.
그런데 서방님이 나가시면 우리들은 간수들의 괴롭힘 때문에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 10년 동안 이 감옥에서 지탱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자신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은혜에 감사한다고 했다.
이들 죄수들은 상놈이라서 까막눈이었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김구는 이들에게 국한문을 가르쳐 줘 편지까지 쓰게 만들었다.
"서방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글자를 바깥에 나가서도 쓰게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김구는 이 말에 단호히 대꾸 한다
"나는 죄수다. 우리는 각자 살아가는 길이 틀리다."
"그렇습니다만, 서방님은 곧 이 감옥을 나갈 분이 아닙니까?
그러니 저를 살려 주시면 꼭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
조덕근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고종황제의 특명을 받아서 김구가 나가면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을 빼달라는 이야기가 되겠고,
김구가 나가기 전 신통력을 발휘해 탈출시켜 달라는 이야기도 된다.
김구는 조덕근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어떤 의미로 보아서 우리의 국법을 어기지는 않았다.
그것은 황제께서 특명을 내려주신 것으로 증명되었다.
왜놈을 죽이고 내가 죽어도 좋다고 한 것은 내 힘이 부족해서였다.
왜놈에게 죽든지, 조선 관리에게 죄인으로 몰려 죽든지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내가 죽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인천항 내에서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죽어 준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김구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탈옥(脫獄)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탈옥이란 대사(大事)가 아닐 수 없었다.
탈옥할 마음이 있다고 해도 내색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음날, 조덕근을 보고 조용히 물었다.
"자네가 내 말을 따르면 나 역시 자네를 살려 줄 방도를 강구 하겠네."
조덕근은 김구의 말에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넙죽 절을 했다.
"정말입니까?"
"그럼 ."
"서방님이 시키면 죽는 시늉까지 하겠습니다."
"자네 집에서 밥을 가져오는 하인에게 편지를 보내게, 돈2백 냥만 보내오게."
"잘 알겠습니다. "
그 당시 김구와 함께 감옥 안에 지내던 죄수 가운데 황순용이란 자가 있었다.
이자는 절도죄로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출옥일이 I5일밖에 남지 않았다.
감리서에서는 이자에게 죄수의 감시를 맡겼다.
황순용은 비록 절도죄로 수감을 당했지만,
감옥 내에서는 간수 못지않은 세력을 갖고 있었다.
황순용은 남색 (男色)꾼이었는데, 그 상대가 김백석이란 17,8세 되는 미소년이었다.
남색이란 동성연애를 말한다.
동성연애는 간혹 감옥이나 군대 또는 남사당패 같은 남자들의 집단 거주지에서
저희들끼리 상대를 정해 놓고 연애를 했는데, 황가는 김백석을 독점했다.
김구는 조덕근에게 일러주었다.
"김백석이를 충동질해, 서방인 황가놈에게 살려 달라고 조르게 하게. 황가가
백석의 청을 못 이겨 백석에게 어떻게 살려 주느냐고 물으면,
그 방법이 김창수에게 있다고 하게."
황가는 김백석의 청을 물리치지 못했다.
더러운(?) 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황가가 김구를 찾아와 사정을 했다.
"우리 백석이를 살려 주십시오."
"백석이를 사랑하느냐?"
"그렇사옵니다. "
"자네의 출옥일이 멀지 않았으니,
사회에 나가서 좋은 일을 할 줄 알았는데 백석이를 살려 달라고 하니
그게 사리에 맞는 말인가?"
"그건 잘 아옵니다. "
"피차 죄수의 몸인데 내게 그린 능력이 있겠나."
백석은 절도죄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황가는 백석을 데리고 나가서 함께 살 궁리를 한 것이다.
백석이를 감옥 안에 그대로 두면 이놈 저놈이 집적거릴 것이고,
그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황가는 계속 조덕근이를 찾아와 졸랐다.
"자네가 김 서방님을 잘 아니 내 청을 한번 들어 주게. 결초 보은 하겠네."
"내가 알아봄세."
그 이튿날 황가는 예측한 대로 김구를 찾아왔다.
"백석이 징역을 대신 제가 받도록 하겠습니다.
서방님의 능력으로는 백석이 정도는 능히 살려낼 줄 믿습니다."
황가는 눈물까지 흘리며 애원했다
김구는 남색 꾼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이런 자들은 마음에 더러운 정이 충만해
그 정을 떼어 버리면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기 일쑤였다.
근본적으로 남색 꾼이나 포주, 같은 조직이라도 조직을 배반한 자 등은
경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백석이는 어린놈이다. 너는 더러운 정 때문에 당장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그럴지 모르나 만일 그 일이 성사되거나 할 경우,
순검청에 오히려 고발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실 그랬다.
이순보란 자가 탈옥하였을 때 감옥의 죄수가 모두 불려가 매를 맞았다.
그런데 유독 김구만은 제외되었다.
그만큼 김구는 감옥 안에서도 인망이 높았다.
"만일 백석이를 살리려다가 안 될 경우, 그땐 어떻게 하겠는가?"
황가는 김구에게 여러 가지 말로 자신의 신의를 다짐해 보였다.
"맹세를 하겠습니다."
김구는 황가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배신의 그림자가 어려 있나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좋다. 그렇게 해주겠다."
김구는 그제야 승낙했다.
이들 죄수들, 조덕근, 양봉구. 황순용, 김백석은 자기들을 무사히 탈출시켜 주고
김구는 그대로 있을 줄 믿었다.
무술년(1898년) 3월 9일, 김구의 나이 23세 때였다.
김구는 아버지를 옥문 밖으로 오시라고 했다.
"아버님 제 말에 묻지 마십시오."
"그래, 무슨 말이냐?"
"대장장이에게 삼릉창(모서리가 세 개인 창)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그걸 새 옷 깊숙이 넣어 갖고 오세요."
김구의 아버지 김순형은 아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짐작했다.
탈옥을 준비한다는 것을 안 아버지는 아들의 말대로 했다.
아들의 심지가 깊어서, 이래라 저래라 할 계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김구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쇠창을 품속에 감췄다.
물론 동료 죄수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구는 어머니가 저녁밥을 갖고 왔을 때 은근히 말했다.
"제가 오늘밤 탈옥을 할 테니 , 부모님은 이곳에 머물지 마시고 고향으로 가십시오."
그러자 어머니는
"그럼 우리 두 늙은이는 네 말대로 하겠다."
하고 작별했다.
그날 오후 김구는 간수를 불렀다.
그리고 돈 1백 50냥을 주었다.
"내가 오늘은 죄수들에게 한턱을 내겠소. 그동안 죄수들에게 덕을 많이 입었소."
하며 쌀과 고기와 술을 사오라고 했다.
이런 일은 전에도 가끔씩 있었기 때문에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김구는 동료 죄수들 보다 사식 차입 량도 많았기 때문에 종종 죄수들에게 음식을 베풀었다.
그날 밤 담당 간수는 아편쟁이였다.
"당신이 오늘밤 당번이니 아편을 사갖고 실컷 피워라."
당시의 감방 규칙은 담당 간수 한 명이 함께 죄수들과 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자는 아편을 피울 돈이 없으면 죄수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행동이 양순치 못해서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날 저녁, 김구로부터 받은 돈으로 50여 명의 징역수와 30여 명의 잡범들이 모처럼 만에
포식을 했다.
"노래자랑이나 합시다. 도둑, 죄수와 간수를 떠나 흥겹게 놀아 봅시다."
간수가 기분이 좋아서,
" 김 서방님이 기분 좋게 너희들이 위로해 드려라."
이렇게 되자 감옥 안은 노래와 춤으로 흥청댔다.
간수는 자기 방에서 아편을 실컷 피우고 쓰러져 꿈나라를 헤맸다.
김구는 도적 죄수들이 흥에 겨워 노래하는 틈에 마루 속으로 들에가,
깔아 놓은 벽돌 몇 개를 창끝으로 들추고 땅속을 팠다.
그리고 감옥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캄캄해 인기척이 없었다.
이제는 감옥의 담을 넘으면 되었다.
줄사다리를 담에 놓고 막 넘으려 할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나 혼자서 탈옥할까?
조덕근이나 다른 죄수들은 한 때의 동료였지, 내 동료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하니 혼자만 탈옥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다. 저들도 인간이다. 저들에게 신의를 지키지 못하면 저들에게 죄인 취급을 당한다.
죄인의 죄인이 어찌 큰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김구는 두 번째 생각을 택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오던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 감옥 안으로 갔다.
그리고 조덕근과 다른 죄수들에게 눈짓을 했다.
조덕근과 동료 죄수들은 김구의 시선을 받자하나 둘씩 일어서 감옥 바깥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김구가 나가 보니 이들은 감옥 담 아래서 벌벌 떨고 있었다.
감히 겁이 나서 감옥의 담을 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아, 이것도 못 넘나?"
"예, 서 방님."
"그래 갖고서야 사내라고 할 수 있겠나 "
김구는 이들을 앞장세워 하나씩 그들의 엉덩이를 받쳐 주었다.
이들을 모두 내보내고 마지막 김구의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먼저 나간 자들이 바깥에서 저희들끼리 소란을 부리고 있었다.
즉 감리영과 옥을 통합하여 용동 마루를 송판으로 둘러막은 데를 넘는데 소리를 낸 것이다.
밤중에 요란한 소리가 나니 즉시 호각 소리가 들렸다.
김구가 만일 감방 안에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미 담 밑에까지 나온 후였다.
다시 들어갈 수는 없는 처지였다.
급히 탈주하는 것이 최상책이었다.
남을 받들어 넘겨주기는 쉬웠으나 혼자 넘기에는 높이가 만만치가 않았다.
'모든 것은 신령님께 맡기자.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벌써 옥문 바깥에는 간수들이 도착했는지 웅성거리고 있었다.
또 감방 안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구는 옆의 몽둥이를 집어 들고 몸을 솟구쳤다.
장대높이뛰기 식으로 그 몽둥이를 의지하여 담 꼭대기를 손으로 잡고 냅다 뛰어내렸다.
김구는 죽기 살기를 결심했기 때문에,
누군가 앞길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쇠창을 손에 들고 정문으로 바로 나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파수 순검도
비상소집에 불려갔는지 개미 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김구는 정문을 나서자 그대로 달렸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옥문 안에서 벌어질 일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안개가 자욱한 밤이었다.
감옥 안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길이 생소했다.
언젠가 서울 구경을 하고 인천을 지나가 본 적이 있으나,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작정 뛰었다.
감옥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봄날이라 날씨는 그리 싸늘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가 어디인지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발에 밟히는 것이 사각사각 하는 것으로 보아 모래가 분명했고,
이곳이 다만 백사장이라는 것만 지레 짐작될 뿐이었다.
밤새도록 앞만 보고 뛰어갔으니 그 거리로 보아 상당히 멀리 왔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먼동이 터왔다.
비로소 살펴보니 감리서 뒤쪽 용동 마루터기에 당도해 있었다.
수십 걸음 앞에서 순검 한 사람이 두리번거리면서 군도를 질질 끌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아마도 탈옥한 죄수들을 수색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어이쿠, 죽었구나.'
김구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형수로서 고종황제의 은전을 받은 것만도 황공한데 그걸 못 참고 탈옥까지 했으니,
잡히면 영락없이 남의 목숨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은신할 곳을 찾아보았다.
당시 서울이나 인천의 상점에는 방문 밖에 아궁이를 만들어 놓고,
방문 앞에는 아궁이를 가릴 긴 판자를 놓고 거기에 신을 벗고 점방(店房) 출입을 하게 되어 있었다.
김구는 순검이 다가오자 얼른 그 판자를 들어내고 아궁이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순검의 서슬 퍼런 눈이 노리는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댔다.
하늘이 밝았다.
이때 천주교당의 고딕식 지붕이 보였다.
인천에 들어왔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지은 천주교당이었다.
그곳이 동쪽이라고 생각하고 걸었다.
한참 동안 걷자 집이 보였다. 문 앞에서 주인을 불렀다.
"누구요?"
"아저씨 , 잠깐 나와 보십시오."
그러자 안에서 의심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새벽에 주인을 부르니 그렇다.
"도대체 누구요?"
김구는 주인에게 짐짓 말했다.
"나는 김창수란 사람이오. 감리가 비밀리에 보내 주어 출옥 했소.
그런데 허기가지고 다리가 아파서 걸을 수가 없으니 댁에서 좀 쉬어가고 싶소."
그러나 주인은 한 마디로 거절했다.
"내가 당신이 누군지 알고 허락하겠소."
다시 사정을 했으나 주인의 대답은 같았다.
김구는 이번에는 화개동(花開洞)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한참을 걷자니 어떤 막일꾼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상놈 같았다.
아마도 막일 나가기 전에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고 싶어 주점으로 가는 것 같았다.
"여보시오?"
"왜 그러시오?"
"나는 김창수란 사람이오."
김구는 감리서에서 석방된 사유를 설명했다.
만일 이런 사람에게 탈옥했다고 하면 어떤 불상사가 닥칠지 몰랐다.
"길을 좀 가르쳐 주시오."
그 사람은 김구의 말에 자세하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리로 가면 수원이 나오고, 저쪽으로 가면 시흥이오.
시흥 쪽으로 가는 것이 빠르오."
김구는 그 사람과 헤어져 경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의 행색은 누가 봐도 도둑이나 부랑자 같았다.
감옥에서 장질부사를 앓아 머리털이 몽땅 빠져 새로 난 머리카락이
겨우 몇 가닥 남아 있어 볼썽사나웠다.
이 머리카락을 노끈으로 졸라매고, 수건으로 동여맸다.
두루마기가 있을 리 없었다.
홑 저고리 바지 차림으로 길을 걷자니,
마치 촌닭 시장에 나온 것처럼 눈에 꼴사납게 들어왔다.
의복으로 치면 그리 천한 것은 아닐진대,
탈옥 도중에 진흙이 여기저기 묻어 싸움하고 나온 부랑자 같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범인(凡人) 같지가 않아 보였다.
인천항 쪽으로 가다 보니 아침 해가 덩실 떠올랐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온통 자기를 잡으러 다니는 사람 같았다.
들리는 소리라곤 모두 호각 소리 같았다.
인천항에 인접한 산(아마도 만석동 근처)에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모두가 횐 옷 입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해괴망측한 옷차림으로 경성까지 가다간 무슨 변고가 벌어질지 몰랐다.
산속에 은거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길지 못할 것 같았다.
김구는 차라리 그대로 걷기로 했다. 걷다가 숨을 만한 곳을 찾기로 했다.
일천에서 시흥까지는 족히 50여리가 넘었다.
대로변으로 나가니 길가에 어린 소나무를 키워서 자라게 한 방석솔 포기가 드문드문 서 있었다.
김구는 그 솔포기 밑으로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다리는 괜찮지만 얼굴이 문제였다. 혹시나 수색 나온 순검들에게 발각될까 봐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얼굴에 덮었다.
가만히 누워 있자니 이곳 역시 포위망이 압축되는지,
순검과 간수가 떼를 지어 시흥 쪽으로 가면서 저희들끼리 지껄였다.
"이번 탈옥사건으로 감리청 사람들이 큰 고역을 겪게 됐지."
"담당 간수는 바로 감옥으로 들어갔지. 재수가 옴 붙었지."
아마도 아편을 피우다가 그대로 잠든 간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김구는 함께 탈옥한 자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조덕근은 서울로 갔겠고, 양봉구는 배를 탔을 테고, 김창수는 어디로 갔을까?
그중 김창수가 제일 당돌하지. 아마 잡기가 힘들 거야. 창수는 잘 생각했지.
그 용기가 대단해 , 아주 잘 했어."
아마도 김구를 빗대어 하는 말 같았다.
이들은 부근 숲 속을 모두 뒤지고 난 후 같았다.
이윽고 저녁이 되었다. 배가 고팠다.
해가 서산에 걸릴 때쯤 바로 곁을 지나갔던 간수들이 도로 몰려왔다.
모두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김구에게 조금도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김구의 입장을 동정했다.
"나 여기 있소!"
하고 나선다고 해도 결코 잡아갈 것 같지 않았다.
새벽 이른 아침을 먹고 하루 온종일 굶었기 때문에 현기증이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모래밭을 헤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근처 동네로 들어가 어떤 집을 찾아갔다.
"서울 청파(청파동) 사람인데, 황해도 연안에 가서 곡식을 옮겨오다가
배가 파선을 당해 오갈 데 없어 그러니 밥 한 술만 주시오."
그랬더니 그 사람은 김구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이거라도 괜찮겠다면 요기나 하슈."
하며 멀건 죽 한 그릇을 떠다 주었다.
김구는 그 죽 한 그릇을 단숨에 비웠다.
그렇게 달고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김구는 주인의 호의가 고마워 정표로 조그만 거울을 하나 주었다.
그 거울은 언젠가 누구에게 정표로 받은 것이었다.
김구는 그 거울을 주고 주인에게 하룻밤을 자고 가게 해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거울의 시가가 엽전 한 냥 정도였으니까,
죽 한 그릇을 스물 닷 냥이나 주고 먹은 셈이다.
아마도 주인은 김구의 언행에서 심상치 않은 점을 발견했던 것 같았다.
"저쪽 집 사랑에 당신 같은 사람들이 가끔씩 자고 가니 거기 가서 사정을 해보슈."
이렇게 말하고 집에서 나가 달라고 했다.
김구는 다른 집으로 가서 사정을 해보았으나 사정은 같았다.
인심이 고약한 동네였다.
김구가 가만히 동네 집들을 살펴보니 숙식을 할 곳이 나타났다.
제법 산다는 집 같았는데 디딜방아가 있었고, 그 옆에 볏 짚단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볏 짚단을 안아다가 방앗간에 펴놓고 누웠다.
훌륭한 잠자리가 된 셈이다.
김구는 벗 짚단을 베고 누워서 '손무자'와 '삼략(三略)'을 낭송했다.
그랬더니 동네사람들이 수군댔다.
동네 사람들은 김구가 거렁뱅이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거지가 글을 읽다니 ."
"아니오. 저 사람은 행색은 초라하지만 꽤 배운 사람인 것 같소."
김구는 당장 일어나 뭐라고 항변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이런 사람들에게 객기를 부린다는 것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옛날 한(漢)나라 때 장량이 흙다리 위를 조용히 걸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김구가 깬 것은 새벽녘 , 반달이 걸려 있었다.
그는 바로 일어나 길을 걸었다. 벼리고개(옛날 중국의 사신들이 이 고개 위에서
조선의 관리들과 이별을 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를 향해 걷다가 어떤 집 문전에서 걸식을 했다.
김구는 옛날 생각을 했다.
고향에 있을 때 활인소(活人所)의 거렁뱅이패들이 집집마다 10여 명씩 몰려다니며
장타령을 부르고 밥을 얻어먹었다.
활인소란 조선시대에 병든 사람이나 거지들을 구호하는 기관으로서,
태종 14년에 활인원(院)으로 처음 설치, 세종 때 활인서로 개명했던 거지 집단처였다.
거렁뱅이패들은 나름대로 장타령을 흥겹게 부르면서 걸식을 했는데,
김구는 그런 노래를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다만,
"밥 좀 주시오."
하고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이때 사람은 듣지 못하고 기척을 눈치 챈 똥개가 먼저 기갈나게 짖어댔다.
이쯤 되면 주인이 고개를 내민다.
주인은 김구에게,
"이놈아, 걸식을 하면 순서대로 해야지. 미리 시켜 놓지 않았으니 무슨 밥이 있겠느냐!"
하면서 눈알을 부라렸다.
"여보, 숭늉이라도 좀 주슈. 인심 참 고약타!"
"했다, 그 녀석! 꼬장 부리기는."
김구는 자신을 거지 취급해 주는 것이 오히려 고마웠다.
자신의 신분이 탈옥수라는 걸 눈치 채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거렁뱅이패들이 많았다.
이들은 각설이라고 불렀는데, 이들 나름대로 룰이 있었다.
이들은 남사당패와는 달리 어떤 예술적인 장기는 갖고 있지 않았으나.
장타령 같은 것을 만들어 걸식에 보답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얼씨구절씨구 들어간다.
하면서 연결되는 가사는 재미있기도 하려니와,
세속의 위선을 빗대어 밥을 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다.
김구는 멀건 숭늉 한 그릇을 얻어 마시고 일어나 다시 걸었다.
대로를 피해 시골의 소로를 걸었다.
인천에서 부평을 거쳐 시흥으로 들어갔다.
그 동안 감옥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 모두가 신기할 뿐이었다.
그는 감옥 안애서 배운 시조와 타령을 흥얼거리면서 길을 걸었다.
그날, 양화진 나루터에 도착했다.
날도 저물었고, 배도 고프고, 그러나 뱃삯을 줄 돈이 없었다.
도선장에 가기 위해전 선가(뱃삯)가 있어야만 했다.
그는 어떤 서당에 들어가 선생을 면담하기로 했다.
그 선생은 김구의 행색을 보더니 대뜸 경어를 사용치 않고 '해라' 하는 낮춤말을 썼다.
김구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내 행색이 이리 초라하다고 인격까지 빈천하다는 건 아니오.
남의 사표가 될 사람의 마음이 그토록 교만하니,
어찌 아동들을 잘 가르칠 수가 있겠소?
내가 일수가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이 꼴이 됐는데,
결코 선생에게 멸시받을 사람은 아니오."
선생은 김구의 말에 인격이 밴 것을 깨닫고 즉시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내력을 물었다.
"나로 말하자면 경성에 사는 사람이오.
인천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 오던 차에 그만 도적을 만났소.
그래서 의관과 행장을 모두 빼앗겼소.
집으로 가는 도중 혹시 아는 사람이 있나 하여 찾아왔소."
그러자 선생은 김구를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의 말투로 보아 그리 많은 배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김구가 아침밥을 모두 먹자,
선생은 아동을 시켜 편지 한 장을 나루 주인에게 전하게 했다.
소개장이었던 것이다.
김구는 편지 덕분에 무료로 나루를 건너 경성에 도착 할 수가 있었다.
그가 발걸음을 경성으로 돌렸지만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김구는 인천옥에 있을 때 같이 수감됐다가 먼저 풀려 나간 사람들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들 가운데 경성 남영희궁(南永讀宮) 청지기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지금의 퇴계로 근방에서 살았는데, 해상에 배를 띄우고 백동전 위조를 했다.
그러다가 체포당해 인천옥에서 1년 남짓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이 사람이 김구에게 신세를 많이 져, 출옥할 때 꼭 한번 찾아오라고 한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김구는 출옥을 했지만 어디 한 군데 의지할 데가 없었다.
당장 남루한 옷이라도 바꿔 입고 싶었지만 자기를 반기는 사람이 한 군데도 없었다.
김구는 그 사람을 찾고, 함께 탈옥한 조덕근도 만나 볼 요량이었다.
당시에는 탈옥을 하게 되면 대부분 그것으로 끝나 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누가 신고를 하지 않으면 그대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요즘처럼 행정기관이 세분화돼 탈옥 범들의 인상 기록이 과학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주먹구구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남대문 시장에 들어서서 남영희궁을 찾았다.
남영희궁은 지금의 소공동 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다.
영희궁전이라고도 한 이 건물은 조선조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의 영정을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날이 저물고, 간신히 청지기 집의 방문 앞에 이르러 청지기를 호명했다.
"이리 오너라!"
청지기 방문 앞에서 기척이 났다.
누군가 미닫이를 반쯤 열었다.
그리고 맞대꾸를 했다.
"편지를 가져왔으면 두고 가거라."
목소리의 주인공이 친근했다. 바로 청지기 그 사람이었다.
"편지는 없고, 편지를 친히 받으시랍니다."
하며 청지기 집의 들어 들어갔다.
그러자 주인 진씨가 마루에 나와서 김구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반색을 했다.
"이게 누구요? 김 서방님이 아니신가요?"
하며 눈물까지 글썽이며 버선발로 뛰쳐나와 두 손을 잡았다.
"아니 서방님, 그런데 행색이 이게 뭐요?"
"그렇게 됐소."
"안으로 들어갑시다. "
진씨가 방으로 안내했다.
김구는 이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괜찮다고 생각돼 그간의 경위를 전부 이야기했다.
진씨는 급히 자기 패거리를 불러 모았다.
김구의 행색이 초라한 것을 보고 걱정이 됐던지 갓과 두루마기, 망건 등을 하나씩 사주고,
"자, 어서 의관을 갖추십시오. 귀하신 몸이 행색이 이리 초라해서야."
하며 패거리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자, 이분은 아주 훌륭하신 분이다. 이 기회에 잘 알아 두어라
너희 같은 상놈들에게 범접치 못할 분이시지만 이분은 그런 걸 상관 않는다.
도량이 있으신 분이다. "
패거리들은 엎드려 김구에게 절을 했다.
김구가 오히려 민망 할 정도였다. 3,4년 만에 망건을 쓰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들과 며칠 동안 놀다가 헤어져 청파동의 조덕근의 집을 찾아갔다.
"이리 오너라!"
그러나 조덕근의 큰 마누라는 김구가 온 걸 꺼리는 눈치였다.
"집주인께서 옥에서 나왔다고 기별을 했으나 아직 연락이 없으십니다.
아마도 이모 댁에 가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연락이 닿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다시 한번 오시지요."
김구는 웬일인지 조덕근의 집에 간 것이 후회되었다.
원래 그 직업이 색시 장사를 하던 놈이라 품성이 교활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조덕근이란 자는 이미 탈옥을 했으니 김구가 이젠 필요 없게 됐고,
오히려 거추장스럽다고 느낀 것 같았다.
마누라와 이미 상의를 끝내 김구를 따돌리는 것이 역력했다.
"괘씸한 놈, 배은망덕한 놈."
김구는 이런 하찮은 것을 탈옥시켜 준 것이 후회스러웠다.
"참으로 세상에 믿지 못할 건 사람의 마음이다. "
김구는 이렇게 되뇌었다
"내가 혼자 탈옥하려다 애걸하는 놈의 모습이 딱해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
탈옥을 시켜 주었는데, 이제 와서 금전상의 손해가 날까 봐 모른 체하다니."
그러나 꾸짖을 것도 없었다.
이런 인간을 깊이 신뢰 했다는 잘못이 컸기 때문이다.
김구는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조덕근의 집이 아니더라도 편히 쉴 집은 많았다.
이집 저 집을 돌아다니면서 성찬을 대접받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자, 이젠 이만 신세지겠소. 팔도강산 유람이나 하겠소."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이들은 추렴을 해서 김구에게 푸짐한 노잣돈을 만들어 주었다.
모처럼 떠나는 유람 길은 상쾌하기만 했다
유람을 떠나니 자기의 신분은 잊어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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