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조선은 먹이감
이즈음, 열강들은 조선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특히 일본이 그랬다.
1904년 1월 6일, 일본 군함 60여척이 사세보항을 출발했다.
8일, 일본군은 요동반도의 여순항을 기습 공격하는 동시에 인천 앞바다에서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 코레즈호와 와리아크호를 격침시켰다.
이어서 일본은 서울로 들어와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일전쟁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이 당시 세계는 자본주의 열강의 식민지 분할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만주, 한반도를 둘러싸고 열강들의 팽팽한 힘겨루기가 계속되었다.
뒤늦게 자본주의 대열에 끼어든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손에 넣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히
하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한반도에서 청의 세력을 몰아내고 요동반도까지 얻어
만주 진출의 문을 여는데 성공했지만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동원, 일본의 만주 진출을
견제하는 바람에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해야만 했다.
이 사건을 뒤에 삼국 간섭이라 한다.
한편 일본이 러시아에게 밀리는 것을 본 당시 민씨 정권은 러시아에 밀착하기 시작했고,
이 같은 상황을 일변시키려는 목적으로 일본은 민씨 정권의 태두인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잔악무도한 일을 자행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을미사변, 아관파천, 대한제국 선포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 변화과정에서
득세한 것은 러시아와 미국이다. 열세에 몰린 일본은 호시탐탐 세력 만회를 노렸다.
1897년 이후 러시아는 보다 적극적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침투해 들어왔다.
그러자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 영국, 일본은 서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1898년 미국의 극동정책이 바뀌었다.
이른바 문호정책을 표방하면서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필리핀을 식민지고 갖고,
중국 침략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키우고자 했다.
그때까지 일본에 가장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온 영국도 일본에 우호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러시아의 세력 팽창을 몹시 경계, 극동에서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은 일본뿐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1902년 1월,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청국에 대해, 일본은 한(韓), 청(凊) 양국에 대해 각기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타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에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서로의 권익을 보호하기위해 상호원조를 약속한 것이다.
영일 동맹으로 일본은 외교상으로나 재정상으로 막강한 보호막을 얻었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공포증에서 벗어나 전쟁열에 불타기 시작했다.
불리해지 러시아는 일본에 다음가 같은 협상안을 제시했다.
일본이 한반도 영토를 전략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 것,
39도 선을 분할하여 양국의 한반도 개입을 한정지을 것.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는 한편 약 1년 전부터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친 일본은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결국 개전(開戰)한지 보름만인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했다.
한일의정서는 대한제국을 보호국화 하는 제1단계 조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대 일본제국 정부를 확신하고 시설의 개산에 의한 충고를 받아들인다.
이와 같은 한일의정서에 따라 대한시설강령이 만들어졌다.
일본군의 한국주둔, 외교 감독, 재정 감독, 철도와 통신기관장악, 농업을 비롯한
산업 각 분야에 대한 척식(拓植)계획 등이 강령의 골자이다.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시켰다.
일본이 추천한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채용하고 주요한 외교문제를 협의한다는 내용이다.
이 협약은 보호국화의 제2단계 조치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은 미국에 중재요청을 했다.
1905년 7월, 미 국무장관 태프트가 일본에 건너가 외상(外相) 가쓰라(桂太郞)와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 비밀 조약이 맺어졌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친일적인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게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떤 침략적 의도도 갖지 않는다.
2. 극동의 전반적 평화유지에 있어서는 일본, 미국, 영국 3국 전부의 상호 양해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다.
3.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으로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평화에 직접 공허할 것으로 인정한다.
밀약이 있은 후 11일 만에 포츠머드 강화회담이 시작되었다.
회담이 진행 중인 8월 12일, 영국도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은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의 특수한 이익을 가지며
영국은 일본이 이익을 옹호증진 시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감리 및 보호의 조치를 한국에 대해 추하는 것을 승인한다.」고 선언했다.
1905년 9월 5일 전문 15조의 강화조약이 러, 일 간에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일본의 한국에서의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의 특별권리를 승인할 것.
2. 요동반도의 조차권과 장춘, 여순 간의 철로를 일본에 넘길 것.
3.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 화태를 일본에 할양할 것.
4. 연해주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허락할 것.
이로써 일본의 한반도 보호국화는 국제적인 승인을 얻게 된 셈이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905년 11월 7일 이토오 히로부미는 일본헌병의 포위 하에
내각회의를 열게 하여 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한반도는 사실상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반도는 열강 세력 다툼의 제물로써 일본에 넘겨진 셈이다.
미국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쓴 총 경비 19억 8천 4백만원가운데 12억은 미국과 영국이 지원했다.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이렇게 말했다.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책임을 져서는 안 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만인을 위해 보다 좋은 것이다.”라는 것을 확신한다.”
을사(乙巳)년에 소위 신조약이 체결되었다.
사방에서 지사들이 구국의 도(道)를 강구하며 산림학자들이 의병을 기하여
경기, 충청, 경상, 황해, 강원등지에서 전쟁이 계속하여 동패서기(東敗西起)하나
허위, 이강년, 최익현, 신동석, 연기우, 홍범도, 이범윤, 강기동, 민구호,
유인석, 이진용, 우동선 등이 군사지식이 없었으나,
애국 충정으로 도처에서 궐기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쉬지 않고 궐기 하였다.
을사조약이란 우리나라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협약이었다.
이에 반발한 산림학자들과 의병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거했다.
그러나 현대적인 군사지식이란 전무(全無)한 상태였다.
의기충천한 의분심만 갖고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것은 마치 달걀로 바위 깨는 것과 같았다.
구학문에 익숙한 선비들은 입으로만 분노할 줄 알았지 행동이 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김구는 이런 사실을 뼈아프게 느꼈다.
그래서 신학문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했었다.
스승 고 선생과의 대화에서도 김구는 강력히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었다.
그러나 고 선생은 선왕(先王)을 내세우면서 오랑캐라 칭하는 양인(洋人)과 왜놈을 무조건
배척하기만 했었다.
그즈음 김구는 진남포 에버트청년회 총무의 직책을 맡고 있었고 그 회의 대표로 뽑혀
경성에 파견, 상동(尙洞)교회에 가서 에버트 청년회의 대표 위임장을 제출했다.
당시 상동교회는 일면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모임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애국운동의 산실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산림학자들을 구시대 사상이라 한다면 예수교인들은 신사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상동교회를 주축으로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그 면모를 엿보면 한결같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선각자들이었다.
전덕기, 정순만, 이준, 이석, 치재학, 계명륙, 김인집, 옥관빈, 이승길, 차병수, 신상민, 김태연,
표영각, 조성환, 서상팔, 이항직, 이희간, 기산도, 전병헌, 유두환, 김기홍, 그리고 김구 등이었다.
회의 결과 임금께 상소를 올리기로 했다.
문장에 능한 이준이 상소문을 지었다.
이준은 나중에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돼 순국한 순국열사였다.
최재학이 상소의 극동인물로, 그 외 세 사람을 더해 다섯 사람이 신민(臣民)의 대표명의로 서명했다.
왜 많은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았는가 하면,
다섯 사람이 상소하면 반드시 사형을 받을 것이오,
남아있는 사람이 다시 또 상소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순만의 인도로 교회에서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덕수궁 대한문(大韓門)앞으로 나갔다.
상소장은 이미 별감의 협조로 상감께 전달되어 있었다.
이때다 갑자기 왜놈 순사들이 호각을 불면서 무리지어 달려왔다.
“너희 놈들은 무엇이냐! 안된다! 어서 해산하라!”
왜놈수사들의 일본도가 햇볕에 번쩍였다.
“왜놈들은 물러가라! 남의 나라에 들어와 내정 간섭하는 것은 불법이다”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흰옷을 입은 무표정한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구경하다 말고 왜놈들의 고함소리에 혼비백산, 도망했다.
순사들은 긴 칼을 함부로 휘젓고, 다섯 지사들에게 위협하고 있었다.
다섯 지사는 맨손으로 이들의 총검과 대항해서 결투를 벌였다.
근처에서 호위하던 김구 일행은 소리를 벽력같이 질러 이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왜놈들은 물러가라!
국권을 강탈하고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왜놈들은 금수만도 못한 놈이다!
이놈들에게 노예로 살 것인가,
의롭게 죽을 것인가!
동포여 모두 일어나라”
이곳저곳 사람들이 모인 장소를 찾아다니면서 고함 섞인 연설을 하자 인심이 뒤숭숭해졌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한일의정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마침내 힘에 굴복한 다섯 지사는 경무청으로 끌려가 감금되었다.
그런데 심문하는 모양을 살피니 훈방할 것 같았다. 김구 일행은 상소하는 것을 그만두고
종로일대에서 공개연설을 하기로 했다.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순사들과 육박전을 벌이기로 했다.
종로에서 연설을 하던 청년은 칼을 찬 순사가 제지하자 청년이 순사를 발로 걷어차 꺼꾸러뜨렸다.
그러자 왜놈들이 발포를 시작했다.
“탕탕탕!”
화약 연기가 진동했다.
군중들이 흩어지자 왜놈들은 의기양양해 연설원들을 구타했다.
이때 마침 어물전(생선가게)앞에 기왓장이 널려있었다.
화재(火災)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왓장과 벽돌조각들이 연기를 머금은 채 쌓여있었다.
김구는 그 기왓장을 집어 왜놈 순사에게 던졌다.
“어이쿠! 이 조센징 봐라”」
왜놈 순사들은 중국인 가게에 숨어들어 총을 쏘아댔다.
“탕탕탕!”
콩 볶듯 총소리가 들리자 구경하던 인파들이 달아났다.
왜놈들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조선 사람들을 잡아 마구 후려 팼다.
콧잔등이 깨어져 피가 흐르는 사람, 넘어져 뒹구는 사람,
왜놈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 패듯 후려쳤다.
그리고 밧줄로 잡힌 사람들은 굴비 엮듯 묶었다.
바로 그날 민영환(閔泳煥)이 자결했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역시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효과가 없자 11월 30일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김구가 민영환 집에 가서 조문을 마치고 큰길로 나서는데 나이가 사십 안팎쯤 돼 보이는
사내가 흰 무명 저고리에 갓망건도 없이 상투바람으로 의복에 핏자국이 찍힌 채
인력거에 실려가고 있었다.
“억울하다.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데, 왜놈들은 물러가라”
김구가 곁의 사람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참찬으로 있는 이상설이요”」
“참찬이라면 꽤 높은 벼슬인데?”
“나라가 망하는데 그까짓 벼슬이 무슨 소용이요”」
이상설은 나라일이 꼬여가고, 점차 왜놈의 나라가 되가는 것에 분개,
의분을 못 이겨 자살하려다 실패했던 것이다.
여기서 잠간 이준, 전덕기 등이 속해있던 상동교회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상동교회에는 최초의 민족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상동교회에서는 이준의 헤이그 밀사사건도 계획부터 성공까지 진행되었다.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이회영 선생도 상동청년학원에서 2년 간 학감으로 있으면서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주었다
그 당시 이회영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에 주필로 있던 양기탁에게서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을사보호조약은 대한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조약이기 때문에 무효하고 선언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임을 세계만방에 외치고자 하여 은밀하게 계획하였고,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는 이에 앞장섰다.
이회영 선생은 그의 친척이며 의정부 참찬인 이상설과 전 평리원 검사인 이준을 추천 하였다.
이준은 독립협회운동 1904년에 입교하여 전덕기 목사와 함께 을사보호조약 반대투쟁을 주동한
인물이었다.
고종황제의 밀서는 황제의 고문이며 민족 독립운동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우리 민족의 은인인 힐버트 박사의 손을 거쳐 극비리에 이회영 선생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이준은 네덜란드 헤이그로 달려가 세계만방에 알렸으나 분사하였다.
상동교회는 일찍이 민족운동은 교육기관 양성에 달렸다고 보고 공옥학교를 설립했고,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해 민족운동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주시경 선생을 초빙하여 야간 국어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907년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신민회를 상동교회에 두고,
민족지도자들이 모여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철저히 비밀조직으로 한 이 조직은 전덕기, 이동연, 양기탁, 안창호, 김구, 이갑,
이준, 이동휘, 김지호, 김영, 이관직 등이 중요 직을 맡아 일했다.
이때 양기탁 선생이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는 신민회 기관지 역활을 했다.
나라가 망함을 한탄하며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뱡성대곡’(是日也방聲代哭)이란 논설을 쓴 것도 이즈음이다.
‘이날에 목 놓아 통곡한다. 는 이 논설은 국내외로 큰 충격을 주고도 남았다.
그 전문(全文)을 소개한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지난번에 이토가 조선에 오매 우리 인민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토는 동양 3국의 정족(鼎足)의 안녕을 담당하여 주선하던 인물이라
금일 내한함이 필시 우리나라 독립을 공고히 부식할 방략을 권고하리라.
하여 경향 간에 관민상하가 환영하였더니 천하이 일이 측량하기 어렵도다.
천만뜻밖에도 5조약을 어떤 연유로 제출하였는고?
이 조약은 비단 우리나라만 아니라 동양 3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나타낸 것인즉
이토의 본래 뜻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우리 대 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거룩한 뜻으로 거절하고 말았으니,
이 조약이 불성립함은 상상컨대 이토가 스스로 알 수 있을 바이어늘 오호라.
개돼지 새끼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대신이라는 작자들이 영리에 어둡고
위협에 떨어서 이를 따르고 굽실거려 나라를 팔아먹는 적이 되기를 서슴지 않았으니,
4천년 강토와 5백년 종사를 타인에게 바치고 2천만 생령을 노예로 만들었으니,
저들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재순 및 각 대신은 타인 책망할 여지도 없으려니와
이름을 소위 참정대신이라 하는 자는 정부의 우두머리라,
겨우 부(否)자로 책임을 면하여 이름을 남기고자 꾀하였는가?
청음(淸陰) 김상헌(金相憲)이 책을 찢고 곡(哭)하에도 이기지 못하겠고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할복함도 이기지 못하겠으니,
아연히 살아 세상에 남아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성 폐하를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를 대하겠느냐?
오호라 찢어질 듯한 마음이어!
우리 2천만동포여! 죽겠느냐! 살겠느냐.
단군기자이래 4천만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멈추지 않았는가?
아프고 아프도다. 동포여!
당시 상동교회에서는 다섯 또는 여섯이 한조가 되어 계속하여 상소를 올리라고 했다.
그러나 죽일 줄만 알았던 상소자들은 겨우 구류에나 처해 살다나오게 하니 일이 싱거워졌다.
김구는 생각했다.
‘이 시점에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자각이다.
국민들이 주인의식이 없는 한 아무 일도 못한다.
국가의 소중함을 알아야한다.
민중이 따라줘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김구는 국민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시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국가가 자기 집안이며, 왜놈들이 생명을 뺏고 재산을 탈취하고,
자손을 노예로 삼는다는 걸 가르쳐야 한다.’
김구는 동지들과 협의,
새로운 교육을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며 국민교육 방법을 구상하였다.
김구의 나이도 30줄에 들어섰다.
30이라면 사나이로서 만만치 않은 나이였다.
그때 김구는 33세였고(1908), 문화초리면 종산에 살면서
그 동네의 사립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사로서 농촌 아이들을 지도했다.
그 후 양산(楊山)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서명의숙에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의병장으로 있던 우동선(禹東鮮)이 10리쯤 되는 산비탈에 진을 치고 있다가
왜병의 야간 기습으로 달천 부근에서 패해 17명의 의병시체를 두고 퇴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 마침 왜병3명이 총기를 휴대하고 종산에 들어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계란과 닭을 약탈하고 다닌다며 동장이 김구에게 보고했다.
김구가 동장의 집으로 가보니 사실과 다름없었다.
김구는 왜병에게 필담(筆談)으로 물었다. 먼저 김구가 한자로 썼다.
“이 물건은 돈 주고 사는 것이냐?”
“그렇다.”
“돈 주고 산다면 시장으로 갈 것이지 왜 촌민을 협박하는가?”
그러자 왜놈의 낯색이 변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서명의숙 교사다.”
“믿지 못하겠다.”
“선생이 거짓말하는 것 보았나? 너희들 나라의 선생은 거짓말쟁이?”
그러자 더욱 얼굴이 벌개 진 왜놈은 연신 거칠게 숨을 쉬었다.
한 놈이 김구와 필담을 주고받는 사이 한 놈의 왜병이 밖으로 나가
앞뒷집의 닭들을 모아 마당으로 들여보냈다.
‘꼬꼬댁 꼬꼬댁’소리를 치며 날개를 푸드득대는 닭들의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니
부인과 어린이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이구, 우리 닭 죽는다. 저놈이 우리 닭을…….”
김구는 동장에게 소리쳤다.
“왜놈 도둑이 쳐들어오는데 당신을 뭘 했소? 실태도 파악치 못하고.”
김구와 필담하던 왜놈이 주머니에서 호각을 꺼내 불자,
닭 도적질 갔던 놈들이 닭을 두세 마리씩 들고 나타났다.
그놈들은 저희들끼리 뭐라고 하더니,
이윽고 김구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닭을 버리고 도망을 했다.
김구는 동네사람들에게,
“후환을 두려워 말고, 내게 이야기 하시오.”
하고 말해 그들을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당시 백성들은 정부의 관리들을 아예 믿지 않았다.
관리나 왜놈이나 하는 짓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관리들은 돈독이 올라 갖은 불법을 자행하면서 사욕을 채웠다.
김구가 결혼한 지 얼마 안돼 첫딸을 낳았으나 태어 난지 얼마 안돼
바람을 많이 쏘였는지 안악에 도착해서 그만 죽고 말았다.
“참으로 자식 복마저 없구나.”
김구는 죽은 딸아이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아이가 죽게 된 것 역시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죄 많은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김구가 있던 안악군에는 상당히 많은 인재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국민의 의식을 깨우치는데 전력을 다했다.
당시 국민들은 나라가 무엇민족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먹고 사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그러나 많은 선각자들이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을 걱정했다.
이 가운데 김구와 만나 교제 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김홍량, 최재원 등은 경성과 일본에서 유학했고,
이들의 선배들은 그 읍내 예수교회에 제1차로 안신(安新)학교를 설립했다.
그 다음 사립 양산(陽山)학교가 설립했다.
또한 박혜명은 연전에 김구와 함께 중 생활을 한 사람으로
당시 그는 패엽사의 주지승을 했었다.
강습회에서 김구와 마주치자 너무 반가워 김구는 그를 형님이라고 소개했다.
혜명은 김구에게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영도사에서 헤어진 후, 나는 본사인 마곡사에 돌아갔어요.
원종스님(김구)의 노스님이던 보경당과 하은당 스님 두 노인이 석유 한통을 사서,
그 좋고 나쁨을 시험해 보기위해 불붙인 막대기를 석유통에 넣자
곧 폭발하여 거기 있던 보경, 하은, 포봉 세 스님이 죽었습니다.
절의 총회에서 재산을 관리하고 우리 가문의 명성을 이어받은 사람은
원종 스님이라 생각하고, 원종 스님을 찾으려 덕남 스님을 금강산까지 보냈습니다만
찾지 못해 거대한 절의 재산은 절의 공동재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혜명은 이렇게 말하고 김구를 만난 기쁨에 젖었다.
김구가 기억할만한 인물로는 김효영 선생이 있다.
김효영은 김홍량의 조부였다. 어렸을 때 한학을 공부했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상업에 종사했다.
그는, 포목을 사서 어깨에 메고 강계, 초산 등지로 행상, 배가 고플 때는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어 참고 견뎠다.
그래선지 많은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김구가 보았을 때 김 선생은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범상했으나
허리가 몹시 굽어 지팡이를 늘 짚고 다녔다.
그러나 정세에 민감하여 젊은 사람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박식했다.
그는 안민학교를 열었을 때 경비의 어려움 때문에 모금함에
‘무명씨 벼 일백 석 걷힘’ 하고 적었다.
무명씨는 김효영 자신이었다.
장손 김홍량은 일본에 유학시킨 것도 선견지명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비록 극악무도한 법도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지만
그들이 배운 신식교육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면서 노년을 보냈다.
또 한사람이 있다.
해주 서촌(西村)의 강경희는 대대로 거부(巨富)였다.
그런데 술과 노름을 즐겨 젊었을 때 파산했다.
김 선생과 바둑 친구로 지내게 되었는데 하루는 선생을 문안하고자 사랑에 갔다.
강씨는 김구가 어릴 때부터 알던 노인이었고,
그의 선조를 업신여기던 양반이었지만 김구의 아버지와는 친분이 두터웠었다.
그래서 김구는 옛정을 생각해서 절을 올렸다.
그 며칠 뒤의 일이다.
바둑을 두다가 두 노인이 언쟁이 붙었다고 한다.
강 노인이 먼저 김효영에게 비아냥댔다.
“노형은 참 팔자가 좋네. 노년에 가산도 풍족하고 자손도 번창하고, 효자들이니.”
김효영은 이 말에 노기충천하여 바둑판을 팽개치며 강씨를 꾸짖었다.
“이 사람아 칠십 노구로 황천길이 내일 모레인데 왜놈의 노예문적에 편입될
운명이 놓인 내가 팔자가 좋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김효영은 국사를 생각하며 비분강개를 했다.
김효영의 아들과 동년배인 김구에게 그는 꼭 며칠에 한번씩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
“선생님 평안하시오?”
하고 안부를 전했다.
김구에게 대하는 성의는 가히 가상했다.
그는 애국자에게는 노소를 불문하고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아들 뻘 밖에 안 되는 김구에게 깍듯이 경칭을 썼다.
김효영은 금구뿐만이 아니라 다른 서생들에게도 깎듯이 경칭을 썼다.
교육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란 애국자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김구의 삼촌 준영은 전형적인 농사꾼으로서 늙어가고 있었다.
김구가 성묘 차 고향에 갔을 때 준영은 이렇게 말했다.
“너 같은 팔 난봉꾼을 누가 도와주어서 그렇게 사느냐?”
아마도 준영은 농사 외에 다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난봉꾼이라고 알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준영이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는 김구를 팔 난봉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작은 아버지가 보시기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 너를 따라간 사촌형이나 매부들도 함께 산다니, 어떻게 사는 것이냐.”
준영은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김구가 돈이라도 넉넉하다면 별문제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데야
김구를 믿고 따라간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서 하는 소리였다.
김구는 준영삼촌에게 그 동안의 이야기를 알기 쉽게 모두 했다.
“사람의 재산이란 눈에 보이는 재산이 있고 보이지 않는 재산이 있게 마련입니다.
제게는 물질은 없지만 훌륭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제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오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준영삼촌은 놀란 얼굴이었다.
그에게 돈이란 채소를 가꿔서 팔든가,
아니며 남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받는 새경 같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후덕한 사람도 있더냐."
“있습니다.”
준영은 부러운 얼굴로 다시 한번 김구를 쳐다보았다.
준영은 김구가 무슨 협잡질이나 하고 다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 부호의 자식이나 조카들이 왜놈에게 100냥을 빌려줄 때,
증거에다 1천 냥이라 쓰게 하고 돈을 받을 때는 1천 냥을 모두 받아냈던 것이다.
만약 당사자의 자산(資産)이 부족하면 족징(族徵)까지 했다.
족징이란 친척들에게 거두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말이다. 네가 혹시 왜놈에게 빌붙어 그놈들의 고리대금업이나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다.”
준영은 성품이 꼬장꼬장해서 올바르지 못한 것을 보면 돌아앉는 버릇이 있었다.
조카인 김구를 서먹서먹하게 대한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해 가을, 준영 삼촌이 장련에 왔다.
김구가 거처하고 있는 사직동 집은 대궐 같았다.
준영은 이 집을 둘러보면서 혀를 찼다.
난생 처음 이런 집에 들어가 본 것이다.
추수한 곡물이나, 늘어놓은 가재도구 등이 자신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창수가 참으로 뛰어난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동안 오해를 했습니다.”
준영삼촌은 김구의 어머니, 즉 형수에게 이렇게 칭찬을 했다.
이후부터 준영은 조카인 김구를 더욱 사랑했다.
안악으로 이주한 뒤에도 김구는 가끔씩 성묘 차 고향에 갔다.
여러 해 만에 고향을 찾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노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어렸을 때 본 아이들은 이미 성장해 상투를 틀고 다녔다.
성장한 청년들 가운데 실망한 인재가 있나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없었다.
생김새만 상놈인줄 알았더니 정신까지도 상놈, 노예근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국가가 무엇인지, 나라와 민족이 무엇인지,
그저 짐승처럼 먹고사는데 급급해 이야기할 놈이 없었다.
김구는 이들에게 교육이야기를 꺼냈다.
“그저 예수교나 천주교 아닙니까? 그런 것은 잘 몰라요.”
김구는 다시 동네 어른들 가운데 양반으로 행세하던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강진사가 그런 사람이었다.
강 진사에게 절을 하고, 모든 예의를 갖추었더니, 오히려「황공」한 태도를 보였다.
강진사가 보기에 김구는 엄연히 상놈이고 근처에 범접도 못할 위인인데
김구는 부르는 호칭이 어중간한 말투였다.
“자네 그동안 무고하셨나?”
와 같은 공대도 아니고 비하도 아닌 말투였다. 김구는 그것이 가슴이 아팠다.
이미 양반의 기(氣)는 모두 꺾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나 당당했던 그들인가.
그들이 상놈인 김구는 ‘이놈, 저놈’ 하며 호칭할 때,
그것이 오히려 바람직했는데 그렇질 못하니 오히려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나라를 망친 것은 바로 이들 양반들이었다.
국가와 민족보다도 알량한 구학문을 무기로 무지한 백성위에 군림하다보니
강력한 적을 맞아 기가 꺾이게 된 것이다.
‘내가 양반의 학대를 좀 받더라도 양반들이 나라를 다스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강성춘(姜成春)이란 재사(才士)를 찾아갔더니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라 망한 책임은 정부대신들에게 있다고 했다.
“우리야 무슨 잘못이 있겠나?
시골에서 처박혀 사는 양반들이야 시국 돌아가는 것을 알 수가 있어야지.”
김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양반중의 상놈이오. 나 역시 상놈이지만 상놈 중에 깨인 상놈이오.”
김구는 그에게 이렇게 권해보았다.
“자제들에게 구식교육도 좋지만 세계의 대세가 이러하니
신식교육을 시키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그는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깎아야하는데,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고 했잖나.”
“머리 깎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신교육을 통해서 머리를 트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재를 양성하고, 양성된 인재가 약한 나라를 부강케 하는 일,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구 교육에 인이 박힌 그는 도대체 쇠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양반들에게 나라와 민족이 어쩌고 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김구를 멀뚱히 쳐다보면서 저 나름대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예수교나 천주학이나 하라는 소리도 아는 모양이었다.
“내 집안 가운데서도 천주학하는 놈들이 더러 있기는 있네.”
하며 김구에게 빨리 나가보라는 듯 고개를 외면해 버렸다.
김구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해주 서촌의 양반들이여! 그대들을 저주한다.
당신들은 충신 자손, 공신 자손을 미끼로 백성을 소나 말처럼 업신여기고 노예시했다.
그런데 그 활기차고 당당하던 기염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나라가 망할 때 생쥐처럼 구멍을 파고 숨거나 내가 아니라며 손짓하는 비굴한 자들이여!
해주 서촌의 상놈들이여! 조선개국 오백년 동안 양반 앞에서 담배 한대,
큰 기침 한번 마음 놓고 못하다가 이제는 썩은 양반보다 신식, 활기찬 양반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구식양반은 임금 일개인에게 충성하는 것만으로도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렸거니와,
신식양반은 삼천리강토의 이천만 민중에게 충성보국 하여 이천만 민중모두에게 자손대대로
복음을 남길 것이다.
김구는 언젠가 환등(幻燈)시켜 기구를 갖고 고향에 간적이 있었다.
교육홍보를 하기위해 서있다. 이때 난생처음 보는 환등기가 신기한 듯
인근 고을에서 사람들이 떼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양반이나 상놈이나 가릴 것 없이 먼저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김구는 이런 양반들의 꼴이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구학문에서는 환등기란 말조차 나오질 않았다.
환등기란 물건은 신교육안에 있는 것이고, 과학이란 신교육을 통해서 배워지는 것이 아닌가.
일본이나 서방 열강들은 군함이나 대포 같은 신식 무기로 무장하여 조선을 노리고 있는데
딱총만도 못한 고작 화승총으로 대항을 하자니 그것이 어찌 나라를 방어하는 수단이겠는가?
김구는 환등회석상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깨인 자만이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할 수가 있다!”
환등기 앞에 모인 촌사람들은 환등기 안의 화면 속에 나오는 물체들이 신기한 듯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것서 참 신기한 물건이로군. 온갖 짐승들이 튀어오는군”
김구는 마을 사람들은 쳐다보면서 혀를 찼다.
개중에는 양반들이 더러 보였다.
그들은 헛기침을 하면서 체면을 차리느라고 뒷짐을 짚고 환등기의 장면이
바뀌는 것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김구는 속으로,
“저런 사람들이 어찌 이 나라의 양반들이며 어찌 이 나라를 지킬 수가 있는가.
사서삼경을 경전처럼 여기고, 그의 학문은 모조리 상놈이나 오랑캐의 학문이라
경멸하면서 정작 이 나라가 오랑캐의 발굽에 차이게 되자
자기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손을 내젓는 양반들,
그들에게 깨우침을 준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고 느꼈던 것이다.
김구는 안악에서 사범강습을 마치고 양산학교를 확장하여 중학부와 소학부를 나누었다.
양산학교는 거부(巨富)거) 김효영이 낸 3천원과 지방유지의 의연금 3천원을 합해 설립한 학교였다. 김효영의 손자 김홍량이 교장 겸 교주(校主)가 되어 모든 업무를 맡았다.
여기서 김구는 최광옥 등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해 학부총감을 맡았다.
그리고 도내에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는 책임을 지고 각 군을 순행했다.
김구가 배천읍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군수인 전봉훈이 각 면에 여락을 취해 사람들을 모아놓았다.
이중에는 깨우친 사람들이 꽤있었다.
김구가 하는 일에 모두가 긍정적으로 협조하는 사람들이었다.
김구가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꽤 많았다.
군수인 전봉훈이 김구가 도착하자
“김구 선생 만세! 김구 선생만세”
하며 선창을 했다.
그리고 이어서 운집한 사람들이 따라서 ‘김구 선생 만세!’를 제청했다.
김구는 깜짝 놀랐다.
만세(萬歲)란 말은 만수무강이란 뜻과 같은 것으로서 왜놈들이
저희들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세는 황태자에게 하는 것이 아닌가.
김구는 전봉군수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만세라뇨,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그러자 전 군수는 김구의 손을 잡으며 빙긋이 웃었다.
“안심하십시오. 내가 김 선생을 환영하며 만세를 부르는 것은 통례요.
결코 망발이나 아첨이 아니오.
친구 간에 맞이하고 보낼 때도 만세를 부르는 것이오.
안심하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말이나 하시오”
“아 그런가요. 몰랐습니다.”
김구는 사고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김구의 솔직한 성품이었다.
전봉훈은 본시 재령의 서리 배 출신으로서 해주 읍에서 총순(摠巡)으로
여러 해 동안 근무하면서 교육에 투신했다.
그는 해주에 정내(定內)학교를 설립하여 야학을 권장했는데,
만일 시내의 각 점포에 근무하는 사환을 야학에 보내지 않는 주인은 처벌을 했다.
뒤 배천 군수가 되어 그 군내에 교육시설을 여러 개 설립했다.
그의 외아들은 일찍 죽고 장손인 무길(武吉)이 대여섯 살이었다.
그 당시왜놈이 수비대나 헌병대를 군마다 주둔시켜 관아를 빼앗았지만
전군수가 관리하고 있던 배천군만은 뺏기지 않았다.
그는 김구에게 이런 말로 심중을 헤아리게 만들었다.
“군수가 결코 영화로운 자리가 아니오.
군수의 권한을 잠시 빌려 이 땅의 무지한 백성들을 가르치려는데 목적이 있소.”
그는 군수자리에 있으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했다.
또 군수라는 직함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위에 군림하거나 함부로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그는 최광옥을 초빙하여 사범강습소를 열고 청년들을 모아서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최광옥은 너무나 열성적으로 강연하다가 강연장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참으로 아까운 인재였는데, 안타까운 일이오.”
“최광옥은 나라를 위해서 일하다 죽었소.”
인근 사람들은 뜻도 펴보지 못하고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최광옥은 애도했다.
그래서 임시로 배천읍 남산 위 학교 운동장 곁에 장사를 지냈다.
황해 평안도 인사들이 최광옥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장지를 사리원 근처로 정하고,
비석을 평양역의 이토히로부미 기념비보다 더 훌륭하고 크게 세워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게 했다
안태국(安泰國)은 자신이 직접 비석의 모양까지 만들어 평양에서 축조하도록 했으나
합병조약이 체결되어 안타깝게도 이를 이루지 못했다.
그의 유해는 아직도 그가 열성적으로 교육에 전념했던 배천에 그대로 묻혀있다.
김구는 그 후에도 교육현장을 발 벗고 돌아다녔다.
송화 수교(水橋)시장에서의 일이다.
감승무(甘承武)등 몇몇 유지의 요청으로 몇 군데의 소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을 불러
환등회를 개최했다.
요즘으로 치면 시청각 교육인 셈이다.
환등회가 끝나고 떠나려할 즈음 송화 군수 성낙영이 김구에게 사람을 보냈다.
“너무 섭섭하오. 초면인 장연군수는 인사만 하고도 각 면을 순회하여 강연까지 해주었는데
친한 나는 만나보지도 않고 떠납니까?”
그래서 김구는 부득이 송화군 읍내로 들어갔다.
이 소문을 접한 성낙영은 즉시 각 면에 10여 곳 학교와 군내 유지인사와 부인,
아동까지 모두 불러 모았다.
몇 년 만에 송화를 와보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수비대 헌병대, 경찰서, 우편국 등 왜놈의 기관이 모두 들어서있고 개인집이 군청이 돼 있었다.
김구는 이 모습을 보자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나라가 마침내 왜놈 것이 돼 버렸구나.”
김구는 눈물을 흘렸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걸 깨달은 그는,
교육이야말로 잃은 나라를 다시 찾는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운집하자 환등회를 열었다.
스위치를 누르면 장면이 바뀌고 물체가 선명하게 나왔다.
요즘에야 천연색이지만 당시에는 흑백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사진이 귀하던 시절, 마치 살아있는 물체처럼 장면이 바뀌며 비취어 나오는
사진 영상이 신기해서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맨 처음 화면에 등장한 것은 황제(고종)의 용안(龍顔)이었다.
황제의 용안은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걱정 근심이 떠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김구는 구경꾼들에게 외쳤다.
“모두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시오! 대황제 진영(眞影)이오.”
그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조선인뿐만이 아니라 한인 벼슬아치와 왜놈 장교,
순사를 비롯한 여러 직책의 사람들이었다.
김구는 왜놈 장교와 순사들까지 모두 기립시키고 경의를 표하게 만들었다.
개중에는 낯살을 찌푸리는 왜놈들이 있었으나 김구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일어서서
경의를 표했다.
김구는 이어서 시국강연을 했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배척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 인가’ 라는 제목의 긴 강연이 시작되었다.
이 강연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불어 넣어 주기위한 것이었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왜놈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강연의 내용은 이랬다.
“여러분, 왜 일본을 한국인이 싫어하는 줄 아십니까?
과거 러일전쟁 당시만 해도 일본과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킬 야욕을 갖고서 강압조약을 강제로 체결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인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갖고 있는 힘으로 강제로 조약을 체결, 차근차근히 한국을 식민지화하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조그만 예에 불과하지만 제가 직접 목도한 것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 왜놈들의 얼굴에 노기가 어려 있었고, 칼집에 손을 대는 자도 있었다.
나란히 앉은 성낙영과 구자록을 보니 얼굴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이때였다. 참다못한 왜놈 경찰이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꺼라! 중지하라! 김구는 발언을 중지하라!”
환등기를 왜놈 경찰이 입수하고 김구는 경찰서로 연행 당했다.
김구는 순사들의 숙직실에서 하룻밤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자 이를 안 각 학교의 학생들이 면회를 와 위로를 해주었다.
“선생님 저희들이 있습니다. 용기를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튿날이었다.
신문에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 은치안(응칠)에게 피살되었다는 기사가 큼직하게 실려 있었다.
김구는 은치안이 누구인가, 민족의 원수를 갚은 위대한 사나이가 누구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은치안」은 중국말로서「응칠안」이 아닌가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안응칠, 안응칠은 안중근(安重根)의 아명(兒名)이 아닌가.
안중근이라면, 바로 안태훈 진사의 맏아들이 아닌가. 문득 옛 생각이 난다.
안태훈 진사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안중근, 안명근, 안공근, 그중에 안중근이
큰 아들로서 쾌남아였다.
사냥도 잘하고 호기가 넘쳐 일찍이 그 아버지 안태훈 진사 역시 아무런 잔소리 없이
그의 행동을 묵과했던 것이다.
그 다음 다음날, 마침내 안응칠의 본명이 나타났다.
역시 안중근이었다.
‘역시 안중근이야. 그가 해냈구나.
그 거만한 늙은이, 몇 천 년 산 것처럼 동양 삼국을 돌아다니며 거만을 떨던 이등박문,
그놈을 격살했구나. 장하다. 대한의 남아여.’
김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움츠려 들대로 들어 기한 번 펴보지 못하고 노예 생활을 하리라 믿었던 왜놈들은,
저들이 신(神)처럼 모시던 이등박문이 격살 당하자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저 숨만 헐떡거릴 뿐이었다.
그제야 김구는 생각했다.
그가 구류를 당하는 원인은 바로 안중근의 의거 때문이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김구는 그동안 환등회 때마다 일본 놈들의 만행을 규탄하고 다녔지만 별탈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송화경찰이 김구에게 손을 댄 것은 안중근의 의거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얼빈 사건와 연계가 된다면 김구의 구류생활은 꽤 여러 날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며칠 후 일본 놈 형사가 간단히 물었다.
“김 선생은 왜 일본을 미워하시오?”
“너희 놈들은 죄 없는 우리 백성을 노예로 만들어 부려먹고 재산을 뺏으려하기 때문이다.
힘이 있다고 약한 자를 마구 압박한다면 그것이 인간의 도리인가?”
김구는 이 말을 끝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한달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해주 지방 재판소로 이송되었다.
재판소로 압송당할 때 많은 교육계 인사들이 나와서 왜놈 형사에게 요청했다.
“김 선생은 교육계의 사표요. 절대로 재판에 회부시키면 안 됩니다.”
“법대로 집행할 뿐이오. 나중에 석방되었을 때 맘껏 위로해 주시오.”
김구는 해주에 도착한 즉시 투옥되었다. 하룻밤을 보낸 그 이튿날 검사가 김구를 불렀다.
“안중근과는 어떤 관계요?”
“안중근과 특별한 관계는 없소. 다만 그 아버지 안태훈 진사와는 긴밀한 관계였소.”
일본경찰은 김구가 안중근 사건에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불기소로 풀어주었다.
그러나 김구의 뒷조사를 한 일본경찰의 기록이 백여 페이지가 넘었다.
그것은 수년동안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행한 연설내용,
특히 일본의 만행을 규탄한 것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김구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총살 사건에 대한 진상을 살펴보았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경, 만주의 하얼빈역, 일본 추밀 언의장 이토히로부미는
러시아 대무상 코로체프와 열차 안에서 비밀회담을 마치고 플랫폼에서 내렸다.
환영 나온 각국 외교사절과 인사를 나눈 그는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다.
이토는 승전국의 대신답게 거만하게 흰 수염을 날리면서 걸어 나갔다.
사열을 마친 이토는 다시 되돌아서서 열차로 향했다.
그 순간, 의장대 뒤쪽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이토의 앞을 가로 막았다.
두 사람 사이는 불과 열 걸음, 청년의 손에서 권총이 불을 뿜었다.
3발의 총탄이 정확히 이토의 가슴과 배에 명중하고 나머지 3발을 수행하던 비서관,
영사, 만주철도 총재를 쓰러뜨렸다.
청년은 소리 높여 외쳤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나를 체포하려는 자는 나를 잡으라.”
그는 가슴에서 태극기를 꺼내들었다.
“조선독립만세!”
일본 헌병들이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나는 도망치지 않으며 도망치려고도 않는다.”
그는 곧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나이는 30세, 이름은 안 중근,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는 유학을 공부하고, 16세 무렵에는 서양문물을 배워 개화청년이 되었으며
천주교에 입교했다.
아명은 안응칠, 영세명은 도마이다.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뛰어 들었던 그는 1907년 정미7조약으로 일본이 내정감독권을 쥐자,
무장투쟁이외에는 구국의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만주를 거쳐 불라디보스톡에 자리 잡은 그는 의병부대의 참모장이 되었다.
1909년 1월 안중근은 12명의 동지들과 단지 동맹(손가락을 잘라 맹세하는 서약)을 맺었다.
독립 항쟁에 목숨을 바치기로 하고 모두 왼쪽 무명지를 자른 것이다.
그 무렵 일본은 러시아에 압력을 넣어서 연해주에서의 조선인 독립운동을 금지케 했다.
안중근은 재기의 기회를 기다렸다.
이때 이토가 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토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케 하고 초대통감자리에 올라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앞장서서
추진해온 침략의 원흉이다.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禹德淳), 조도선, 유동하등과 이토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실패하지 않도록 세 곳을 저격지점으로 정해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이 각각 처단에 나섰으나
그중 안중근이 거사를 성공시켰다.
1910년 2월 7일 오전9시, 여순에 있는 관동조독부 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서 안중근과 3명의
동지들에 대한 제1차 공판이 열렸다.
죄목은 안중근은 살인, 우덕순과 조도선은 살인예비, 유동하는 살인방조였다.
재판장과 담당검찰관 모두가 일본인이어다.
‘일본인 아닌 외국인 변호사 선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일본정부의 지침에 따라 변호인까지
일본인 관선 변호사로 채워졌다.
그 해 2월 9일 자(字)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보면 이렇다.
안중근씨 사건에 대해 각국 변호사를 허가치 아니함은 그 범죄원인(피고의 행위)을 변호 할까
꺼려해서 라더라…….
법률적용은 반드시 사전 내정해둔 대로 될 것이니 이번 공판은 한 형부에 불과한지라,
이란 10일경에 결심하여 즉시 판결 언도한 듯 하더라.
역시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토를 죽인 것은 나 일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다.
나는 여러 곳을 유세했으며 가는 곳마다 싸웠고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전쟁에도 나갔다.
이토를 살해한 것도 독립전쟁의 의병중장 자격으로 한 것이다.
오늘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바로 그 전쟁에 내가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 심문 받을 이유가 없다.”
자서전에 실린 그의 심경을 보자.
…… 오늘 내가 당하는 일이 생시인가. 꿈속인가.
나는 당당한 대한국민인데 왜 오늘 일본 감옥에 갇혀있는 것인가.
더욱이 일본 법률의 재판을 받는 까닭이 무엇인가.
내가 언제 일본에 귀화한 사람인가.
판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꿈속의 세계이냐,
만약 꿈이라면 어서 깨고, 확실히 깨려무나……
2월 14일, 일본 관동도독부 법원은 안중근에게 사형,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안중근은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탈고했다.
이어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일본, 한국, 청 삼국이 각각 자주 독립국으로서 연합하여
서구열강의 침략을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동양평화론의 골자이다.
이는 일본이 자신의 침략정책을 숨기기 위해 내세웠던 ‘아시아 연대주의」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러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했다. 총론과 각론 각1절을 마친 후 현장의 이슬로
사라져야했기 때문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기 5개월 전의 일이었다.
여기에서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사형집행에 앞서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한다.’
라는 글을 살펴본다.
안중근은 대한 남자답게 여수 감옥소에서도 의연한 태도로 일관했다.
죽음에 입해서 간혹 흐트러지기 쉬운 사형수의 모습이 아니라 침착하게
자신의 평소 생각을 글로 옮겼다.
여기에 소개하는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 한다’라는 글 역시 이 가운데의 하나이다.
안중근은 이 짤막한 글에서 사람의 올바른 길을 제시했으며.
이토의 야만적이면서 교활한 행위를 낱낱이 설파했다,
안중근은 살아서 아무런 물질적 재산도 갖지 못했으나,
그의 나이답지 않은 도량과 생각은 시대를 뛰어넘는 무한한 정신적 재산을 남겨 놓았다.
이토 같은 교활한 인간을 척살하고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 안중근은
너무나도 아까운 보배 같은 존재였다,
즉 이토를 죽이고 자신도 죽기에는 안중근의 삶의 크기가 너무나 컸던 것이다.
다음의 글은 안중근이 감옥에서 단지(斷指)하며 쓴 마지막 글이다
“하늘이 백성을 내셨으니 온 세상은 모두 형제이다. 각각 자유를 지키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함은 인간의 본성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문명의 시대라고 하나 우리만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탄하고 있다.
문명이란 동서양의 똑똑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각자 천부의 본성을
지니며 도덕을 숭상하고 경쟁심을 없애며 편안한 땅에서 직업을 즐기며 태평을 함께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문명이다.
지금의 시대는 그렇지 못하다. 상등사회에 고등 인물들은 논하는 것이 경쟁이요,
탐구하는 것이 살인기계이므로 동서양 육대주가 포탄의 연기와 빗발치는 탄환으로
어느 날이고 편한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치 않겠는가.
오늘 동양 대세로 말해보면 참상이 극심하여 진실로 기록하기가 어렵다.
이토란 놈은 천하의 대세를 헤아리지 못하여 잔혹한 정쟁을 남용하니
동양전역이 짓밟히고 깨어지는 장소로 변할 것이다.
슬프구나 천하대세를 깊고 멀리 생각해야 할 뜻있는 청년들이 어찌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죽기를 기다림이 옳은가?
이 한탄스러운 생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하얼빈 만민의 눈앞에서 한방 쏘아 늙은 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고 뜻있는 동양청년의 정신을 경고하고 각성시키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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