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69

삼국통일 완성한 나당(羅唐) 7년전쟁

격전지 칠중성(七重城) 한강(漢江) 하구를 끼고 자유로를 달리면 왼쪽으로 「통일전망대」가 올라앉은 오두산(鰲頭山)이 보인다. 오두산의 서쪽은 한강과 임진강(臨津江)이 합수(合水)되는 해역이다. 자유로를 계속 달려 문산IC(파주시 문산읍 당동리(堂洞里)에서 37번 국도로 빠져나와 동진(東進)하면 임진강(臨津江)의 역사와 동행(同行)할 수 있다. 오늘날의 남북 대치 현장인 임진강 유역은 1300여 년 전에는 羅唐(나당)전쟁의 決戰場(결전장)이며, 韓民族(한민족)을 지켜 오늘에 이르게 한 방파제였다. 그때 임진강에서 唐軍(당군)을 막지 못했다면 한민족은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지도 모른다. 고랑포대대 OP에서 대대장 하영재 중령(왼쪽)과 필자. 37번 국도를 동진(東進)하면 임진강 남안(南..

문무왕의 대당(對唐) 무력시위

문무왕의 대당(對唐) 무력시위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壬申誓記石. 신라화랑의 맹세가 새겨져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문무왕은 674년 9월 영묘사 앞 광장에서 거행된 대대적인 열병식에 임석했다. 여기서 아찬(관등 제6위) 설수진(薛秀眞)은 육진병법(六陣兵法) 시범을 실시했다. 그 직전, 唐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취소하고 유인궤를 총사령관으로 정벌군을 충돌시켰는데, 육진병법의 시범은 그에 대한 무력시위와 군사연습이었다. 육진병법은 唐의 병법대가(兵法大家) 이정(李靖)이 對돌궐戰에서 실행한 육화진법(六花陳法)의 신라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唐은 對신라전에서 한병(漢兵) 이외에 기마전에 능숙한 말갈·거란병을 대거 투입했던 만큼 신라 전쟁지도부로서도 육화진법이 유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

문무왕의 비석에 '투후(秺侯)가

문무왕의 비석에 '투후(秺侯)가 7대째를 이어져 내려왔다'는 말은, 중국에서 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기원전 86년)가 초대 투후가 된 후, 그의 후손이 투 지방의 제후로 7대째 내려왔다는 것이다. 김일제(金日磾)라는 글자는 우리나라 비석에 보이지 않으나 투후에 대한 것이 한서(漢書)에 나와서 그 내력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발표 때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전한을 멸망케한 왕망과 힘을 같이 했던 투후가 세훈 신(新)나라는 후한에 의해 사라지면서 金씨의 기록도 사라진다. 결국 전한(前漢)에 의해 멸망한 훈 제국의 후예가 전한을 멸망시킨 셈이다. 그리고 그 후예가 쿠테타에서 실패한 후 신라에 와서 삼국을 통일시키는데 단지 그 후예라는 것을 비석에 명시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으로는 '훈 제국'을 부활시..

신라 화랑도

◎ 설치와기원 화랑도의 설치에 대한 기록 내용들은 사서에 따라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37년(576) 봄에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삼국사절요』·『동국통감』에는 진흥왕 원년(540)에 풍월주를 설치하고 선사(善士) 즉 좋은 사람을 구하여 무리로 삼았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에는 화랑도의 설치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들이 나오고 있다. 우선 그 서문에는 신라에서 여자를 원화로 삼았는데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고 나오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와는 다른 내용이다. 오히려 『삼국사절요』·『동국통감』과 같은 내용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풍월주의 설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에 앞서 삼산공의 딸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