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세상사 덧없어 삭발중이 되어
이 서방이란 사람은 일찍이 홀아비가 되어 몇 년 동안 서당의 훈장으
로 지냈다. 인생이 재미없고 허망하게 느껴져, 마곡사로 가서 중이나
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형도 나처럼 중이 될 생각이 없소? 세속에서 아등바등 사는 것보다 편할 것이오."
김구는 이 서방의 말에 선뜻 대답을 못했다.
중이 된다면 세속의 인연을 모두 끊어야 하는데,
인연을 끊기에는 맺은 것이 너무 많았다.
"글쎄올시다."
"깊게 생각해 보시오."
그들 두 사람은 하루 온종일 걸어 마곡사의 남쪽 산정상(頂上)에 올랐다.
황혼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단풍잎은 벌써 붉게 물들어 한 편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아, 인생도 이러하겠지. 단풍이 떨어지면 겨울이 오고,
찬바람에 나뭇잎만 외롭게 굴러다니고‥‥
김구의 마음은 비감에 젖어 있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즐거운 마음이 즐거워야 할 텐데 서글픈 생각만 드니
웬일인지 몰랐다. 인경 소리가 '뎅그렁 뎅그렁' 들려 왔다.
그리고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둔탁하게 들려 왔다.
'참으로 풍진 인생이도다.
사람을 죽이고 감옥을 가고, 못된 놈들과 만나고,
그리고 또 어이하란 말인가?'
김구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문득 자신의 몸이 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모든 번뇌를 해탈 하고 입문하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한세상 사는 것은 마찬가지요.
여기서 보내는 시간이나 속세에서 보내는 시간은 마찬가지요.
속세에서는 때만 더 묻을 뿐이오."
이 서방이 김구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찌하겠소. 세상사 모두 잊고서 함께 중이나 됩시다."
그러나 김구는 선뜻 응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노형과 뜻이 맞아 결정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절의 주지와 만나 상담을 해봐야지, 안 그렇소?"
"그건 그렇소."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곡사로 향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하고 더러운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정토로
세간(世間)에서 발을 옮겨 출세간(出世間)의 길을 간다.
두 사람이 마곡사에 도착해서 대한 건물은 매화당(梅花堂)이었다.
시냇물이 콸콸콸 흐르고 있고, 그 위에 다리가 하나 걸려 있었다.
이 다리를 건너면 강원(講院)이 나왔다.
스님들의 교육당 이었다 이곳에 들어가니 박박 머리를 깎아 햇볕에 반짝이는
머리를 한 노스님이 인사를 했다.
"안녕 하시 온지."
"예,"
두 사람은 합장을 했다.
노승은 말을 걸지 않았는데도 자기소개를 했다.
"소승은 포봉당(抱鳳堂)이 라 하오."
이 서방은 이 절의 구조를 잘 아는지 김구를 심검당에 앉혀 두고 자신은 다른 방으로 갔다.
조금 있더니 밥상이 나왔다. 허기진 창자에 허겁지겁 밥을 떠 넣고 있으려니
또 다른 백발 노승이 나왔다.
그 노승이 자기소개를 했다.
"이 보잘것없는 노승은 개성 출생으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로운 몸으로 강산구경이나 하려는 생각으로 중이 되었소.
거처가 따로 있는 중이 아니라 객승(客僧)이오."
그 노승은 속성이 소씨요,
익산에서 살았는데 삭발한 지가 벌써 4~50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은근히 자신의 상좌가 되길 청했다.
김구는 노승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거절했다.
"전 원래 학식이 모자라고 태생이 빈천해서,
노 대사(老大師)께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노승은 김구의 겸손한 말이 맘에 와 닿았는지 다시 권했다.
"선생의 상을 보아하니 크게 될 인물이오.
내 상좌가 되면 나보다 더 고명한 스님에게 불학(佛學)을 배우고 익힐 수 있게 주선하겠소.
부디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리고 삭발하시오."
그러나 김구는 주저했다. 한번 불문에 들어서면 웬만해서는 파
속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속세의 인연을 과감히 단절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이 스물 서넛에 속세의 얽히고설킨 인연을 끊는다는 건 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날 밤이 뒤숭숭하게 지났다. 아침에 이 서방을 보니 삭발을 해서 민둥 머리가 되었다. 이 서방이 김구에게 다시 권했다.
"선생도 어서 삭발하시오. 어제 찾아온 분은 하은당(荷隱堂)이라고 하는데,
이 절의 갑부인 보경대사(寶鏡大師)의 상좌요.
그러니 노형이 공부를 할 때도 학과금 걱정은 없을 것이오."
하며 이 서방은 김구의 이야기를 하은당에게 모두 했다고 했다.
김구는 혼란스러웠다. 만 가지 생각이 모두 들었다.
속세란 참 더러운 곳이다. 욕심 때문에 재물을 탈취하고,
그 재물로 못가진 자를 억압하고, 남녀간의 욕정 때문에 살인을 서슴지 않게 하고,
그리고 또 권력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면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었다.
장가를 들어 자식을 낳으면 자식 때문에 평생을 근심 걱정 속에 살고,
결국 늙어 죽는 몸이 아닌가.
김구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불문에 입교할 생각을 가졌다.
"좋습니다. 삭발을 하겠습니다. "
이 서방은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아주 잘한 결단입니다."
얼마 뒤 사제(師弟) 호덕삼(雇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削刀)을 가져왔다.
냇가로 나간 김구는 삭발 식을 겸해 염불을 하고 이어서 상투부터 댕강 잘랐다.
상투가 힘없이 모래 바닥에 툭 떨어졌다.
마치 모든 번뇌 덩어리가 떨어진 것 같았다.
"마음이 심상치 않을 것이오."
그러나 김구는 눈물을 흘렸다
마음을 단단히 가졌으나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윽고 민둥 머리가 되었다. 김구는 맨머리를 두 손으로 만져 보았다.
마치 덮고 있던 지붕이 날아간 것 같았다.
법당에서 종이 울렸다.
공양주가 불공밥을 짓고 ,여러 개의 암자에 가사(승복)를 입은 스님 수백 명이 모여 들었다.
속세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김구는 속으로,
'저 스님들도 속세의 인연이 많았겠지. 속세의 인연을 끊을 때 나와 같은 심경이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달렸다. 승려의 길을 가기 위해선 정진을 해야만 한다.
이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스님들을 보면서 그들이 존경스러웠다.
김구는 검은 장삼과 붉은 가사를 입고 대웅보전으로 인도 되었다.
처음이라 여간 낯설지 않은 의식이었다.
곁에서 호덕삼이가 부처님께 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은사 하은당이 김구의 승명을 지어 주었다.
"이제부터 원종(圓宗)이다. 세속 명 김창수는 없어졌다."
그리고 수계(受戒)를 받았다.
용담 스님이 경문을 낭독하고 오계(五戒)를 일러 주었다.
오계란 불교 계율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생명을 죽이지 말 것이며,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 것이며, 간음하지 말 것이며,
사사로운 거짓말을 하지 말 것이며, 술을 마시지 말라는 다섯 가지 금기사항이었다.
예불을 마친 김구는 노스님 보경당을 위시하여 절 내의 노사(老師)들에게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절을 올렸다.
김구는 절하는 예법을 몰라 호덕삼에게 지도를 받았다.
호덕삼은 어릴 적부터 절에 들어와 각종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언집(眞言集)'과 '초발자경(初發自警)' 등 간단한 규칙을 익혔다.
'진언집'은 여러 권의 다라니를 한글과 한문, 범어(梵語) 순으로 적은 책으로 초보경전이다.
"중이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낮춰야 한다.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짐승이니 하잘것없는 곤충에게도 마음을 낮춰야 한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비천 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오만이란 재물과 권력에서 나오는 법이다.
오만한 마음을 죽이는 일이 급선무이다
이렇게 하지 않을 경우, 지옥고의 고통을 받는다."
하은당 스님은 김구에게 대뜸 해라를 불가에 입문했으면 불가의 법도를 따라야하는 법이다.
김구는 과거에 가졌던 호칭을 깨끗이 벗어 버리는 것이 다소 서운 했으나 생각해 보면
홀가분했다.
선생님이나 형, 서방님 같은 호칭은 호칭에 담겨 있는 내용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은당은 김구에게,
"얘야, 원종아 생긴 것이 떡판 같아서 고명한 중은 아예 글렀다.
얼굴이 어찌. 저렇게 못났을까.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전생에 무슨 업보를 지고 태어났는지 , 쯧쯧‥‥‥"
하며 김구의 인격은 아예 묵살하고 화나는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해댔다.
"얘야, 가서 나무나 한 짐 해오너라."
김구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천한 몸으로 살아왔지만 감옥 안에서는 서방님이었고,
동학시절에는 '접주님' 그리고 일반적으로 형, 선생이란 호칭이 자연스럽게 오갔는데,
이런 산골짜기의 절에서 '얘야 ,재야' 하고 호칭을 당하려니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구는 속으로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형이나 서방님 같은 호칭은 공명심에 눈이 어두웠을 때 불리어지길 원하던 것들이었다.
김구는 마음을 다져 먹었다.
"고맙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놈입니다
이 못난 놈을 받아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김구는 이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그는 장작을 패고 물을 길었다.
초보중 노릇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앞내에 나가 물을 지고 오다가 그만 물통 한 개를 깨뜨렸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균형이 맞지 않아 비틀대다가 깨뜨려 버린 것이다.
이때 은사인 하은당이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야 이놈아, 밥값도 못하는 이 못난 놈아!"
김구는 이 말에는 그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디다 대고 이놈 저놈인가!'
그러나 꾹 참았다.
보다 못한 노사주 보경당이 혀를 찼다.
"전에도 저렇게 야단을 치고 못살게 굴어 상좌승을 내쫓았데,
원종이도 잘 배겨날까 걱정이다."
아마 하은당은 몇 명의 상좌를 야단을 쳐서 내쫓았던 것 같았다.
낮 동안에는 사역을 하고, 밤에는 예불을 올리고 천수경(千手經) 등을 외웠다.
수계사인 용담 스님은 '보각서장'을 가르쳐 주었다.
용담 스님은 마곡사에서뿐만 아니라 인근 사찰에서도 이름 높은 고승이었다.
불가 식 학식뿐만 아니라 유불선을 두루 이해하는 학승이었다.
용담 스님 밑에 상좌로 혜명 (慧明)이란 불자가 있었는데,
혜명은 김구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하은당의 가풍(家風)이 괴상망측하오.
그러나 이 가풍에 익숙할 때까지 참으시오.
견월망지 (見月忘指)가 그것이오."
견월망지, 즉 달을 보되 그 손가락은 생각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김구에게,
"인(忍)의 깊은 뜻을 새기시오."
했다.
김구의 정진은 계속되었다. 마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식이었다.
정진을 하기 위해서는 주위를 살펴서는 안 된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들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으로서 얼마나 힘든 일인가.
6개월이 지났다. 마곡사의 1백여 명 스님들 가운데는
김구를 은근히 부러워하는 중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이랬다.
"원종대사(김구)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노사와 은사(하은당)가 모두 연세가 많으셔서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는 분들입니다.
그분들만 열반하면 이 많은 재산이 원종대사의 것이 될 겁니다."
김구는 어느 날 추수책(추수를 정리한 책)을 보니,
소작인들에게 받은 백미만도 2백여 석이나 되었다.
대부분의 사찰은 땅을 많이 소유하여서 이 땅을 경작시키게 하고,
그 대가로 추수가 끝나면 곡식을 받는 것이었다.
이외에 시줏돈이나 보살들에게서 들어오는 돈만도 엄청났던 것이다.
김구는 곰곰이 생각했다. 여기서 일신을 평생 의탁할 것인가?
그러나 김구는 아직도 세속의 인연을 끊지 못했다.
탈옥범의 일시 망명 처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다시 한번 헤아렸다.
'부모님은 살아 계실까? 살아 계시다면 외아들인 나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계실까?'
또 있었다.
자신 때문에 재산과 몸까지 모두 망쳐 버린 김주경의 소식도 알고 싶었다.
해주 비동의 고능선 선생도 보고 싶고, 청계동의 안태훈 진사도 그리웠다.
김구는 당시 안 진사가 천주학을 하는 것을 보고 일세의 반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반역인가.
천주학은 미워할는지 모르나,
자신을 가꾸어 준 안 진사의 후덕한 마음을 미워해선 안 된다.
그러다 보니 보경당 노사의 절 재산을 보고 절에 있겠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재산이란 오다가다 만날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하루는 꾀(?)를 냈다.
당장 하산한다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경당에게,
"제가 그 동안 중 생활을 했지만 아직도 미진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經) 공부를 더 해야만 하겠습니다."
했더니 보경당은,
"그럴 거다. 내 짐작은 했다. 어디로 갈 것이냐?"
하고 다정히 물었다.
"금강산으로 가겠습니다."
"네 원이 그런 데야 잡을 수가 있나."
보경당은 하은당을 불렀다.
"이 원종이가 공부를 하러 간다는데 차비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소."
두 사람은 숙의를 하더니 백미 열 말,그리고 가사와 바리때(밥그릇)를 챙겨 주었다.
바리때는 중이 늘 소지해야 하는 필수품이었다.
김구는 두 노사에게 큰절을 하고, 백미를 지고 하산을 했다.
이때부터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백미 열 말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여비를 만들어 곧 경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사와 바리때는 그대로 입고, 들고 다녔다.
중의 신분이란 편했다.
누구 하나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경성에 도착했다.
그 당시에는 중이 경성 문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었다. 배불(排佛)책 때문이었는지, 중을 금기시 했다.
성곽 바깥에는 여러 개의 절이 있었다.
김구는 새 절, 즉 지금의 봉원사(태고종)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봉원사는 현재 이대 후문 쪽에 있는 제법 큰 절이었다.
거기서 마곡사에 있던 혜명을 만날 수가 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혜명의 지도를 많이 받은 바 있어서 , 김구는 그동안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어쩐 일이오? 이곳까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사형 (師兄)은 또 어쩐 일이오?"
혜명은 은사가 장단(長湍)의 화장사에 있기에 찾아뵙고,
이에 들러 며칠 묵으려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소승은 금강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스님과 스님의 작별이란 원래 행선지를 묻지 않는 법이다.
두 사람은 이렇게 헤어졌다.
새 절은 규모도 컸지만 스님들도 넘쳐났다.
김구는 새 절에서 몇 명의 스님을 사귀었는데 그 중 한 스님이 혜정(慧定)이었다.
그는 유람 승이었는데, 평양의 경치가 좋다기에 구경을 간다고 했다.
"우리 동행하기로 합시다."
"좋소."
두 사람은 며칠 후 임진강을 넘어 개성의 송도(松都)를 구경 했다.
그리고 해주 감영을 거쳐 평양으로 가기로 했다.
수양산(首陽山)의 어떤 말사(末寺)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면서 김구는 혜정에게 부탁 했다.
며칠을 같이 다니다 보니 웬만한 속사정을 털어놓을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혜정대사에게 할 이야기가 있소. 텃골 본가에 가셔서 내 부모님을 만나십시오.
그저 안부 정도만 묻고 내가 건재하다는 말씀만 전하시오.“
혜정은 약속을 꼭 지키겠다면서 길을 떠났다.
그런데 4월 29일 저녁 무렵, 혜정은 부모님을 앞세우고 돌아왔다.
사연은 이랬다.
혜정이 김구의 소식을 전하자,
그의 부모님은 안부만 듣지 않고 끝까지 물었다.
혜정을 따라가면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님이 내 아들의 거처를 알고 있을 테니 같이 갑시다."
이렇게 되어 혜정이 청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부모님은 중이 된 아들을 보자 붙들고 울었다.
"아들아, 네가 중이 되다니, 그러나 괜찮다. 살아 있는 것만 보아도 원이 풀렸다."
처음엔 중이 된 아들을 보고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중이 된다는 것은 사회에서 퇴출된 인간만이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북암에서 닷새 동안 휴식을 취한 김구는,
혜정과 함께 부모님을 모시고 평양구경을 떠났다.
가는 도중 부모님은 그 동안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네가 탈옥을 하고 나서 인천을 곧 떠났지.
그런데 집에 도착 하자마자 순검들이 들이 닥쳤단다.
아들을 내놓으라. 행방을 가르쳐 달라, 공범이 아니냐는 등‥‥‥‥
그래서 결국 우리 늙은이들은 인천옥에 갇히게 됐단다.
거기서 그놈들이 어떻게나 고문을 하는지 죽을 뻔했다."
어머니는 여자인 관계로 금방 석방되었는데,
아버지는 3개월 후에야 석방이 되었다.
2년 만에 만나는 부모님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2년여 동안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끼니도 거르고 해서인지
건강이 형편없어졌다.
김구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양으로 향했다.
다행히 노잣돈은 아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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