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스승의 말씀은 옳지만
"이 사람, 창수 아닌가?"
고 선생은 돋보기안경을 쓰고 서적을 뒤적거리다가,
김구가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반색을 했다.
고 선생과 헤어진 지 5,6년, 고 선생은 몸이 그리 쇠약해진 것 같진 않았으나
노안(老眼) 때문인지 돋보기가 없으면 글을 못 보는 것 같았다.
이때 사랑 안쪽 문이 열리더니, 열 살 남짓 된 계집아이가 뛰어와 김구에게 안겼다.
청계동 시절에 늘 김구에게 어리광과 재롱을 부리던 원명의 둘째 딸이었다.
원명의 맏딸과 약혼이 성립된 후부터 이 아이는 김구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부모가 호열자로 죽고 숙모의 손에 자라는 그 아이가 직 불쌍해 보였다.
그러나 원명의 딸과 파혼을 하고부터 웬일인지 아저씨의 호칭을 받는 것이 어색했다.
고 선생 역시 김구를 보자 지난날에 있었던 감희가 서렸는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시 김구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던 둘째 며느리가 김구와 원명의 딸이
파혼을 한 후, 자신이 아는 어떤 집의 자제와 서둘러 통혼을 하자는 걸 고 선생이
마땅치 않게 여겨, 청계동의 농부 김사집(金士集)에게 자청해 통혼을 했다는 것이다.
"김구는 상놈이고 집안이 가난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옛날 혼처에서 말꼬리를 잡으니 후환이 있을 겁니다."
둘째 며느리는 김구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고 선생과 김구는 당시를 회상하는지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고 선생이었다.
"자네 소식은 바람결에나 인편에 간혹 들어서 알고 있네.
왜놈을 죽여 국모보수를 했다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송구스럽습니다. "
"내가 유의암(柳毅菴) 선생에게 자네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이 쓰신 '소의신편 속편(昭義新編 續編)'에 '김창수는 의기남아' 라고
기술하신 것도 보았네."
고 선생은 김구의 저간 행적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고 선생의 이야기는 이랬다.
지금의 형세로는 어디에고 발붙일 데가 없으니,
압록강을 건너서 적당한 곳을 택해 장래를 도모함이 상책이라고
의암에게 건의했다는 것이다.
의암 선생 역시 좋게 여겨서 그곳에 의암이 몸소 들어가,
한편으로는 공자(孔子)의 성상(聖像)을 봉안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숭모 심을 갖게 하고,
한편으로는 조선에서 종군하던 군사들을 소집, 훈련 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김구도 의암을 찾아가 함께 장래를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김구는 고 선생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잘못하다가는 고 선생의 심기를 거슬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법이 어느 나라에나 있게 마련입니다.
코가 오뚝하고 눈알이 파란 오랑캐가 사람의 행실을 하면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선비들, 탐관오리들이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오랑캐만도 못한 행실을 하고 있으니 이것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는지요.
또 지금, 임금이 벼슬에 값을 매겨 팔고 있으니(매관매직),
이것이 오랑캐의 소행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는데,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못됐다 할 수 있겠습니까?"
고 선생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깃들여 있었다.
김구가 이야기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저 바다 건너에는 우리가 오랑캐라고 여기는 자들이 국가 제 도도 확립시켜 놓고,
문명도 발달시켜 놓았습니다.
그들은 공자, 맹자를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오랑캐라고 배척만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 선생은 담배를 연신 피우다가 김구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네, 그 동안 개화꾼들을 많이 만나 보았군.
대부분의 개화꾼들이 같은 말을 하더군. 경계할 일이네."
"선생님이 보시는 장래 국가의 대계(大計)는 어떠한지요?"
고 선생은 김구가 이미 개화파에 깊숙이 빠진 것을 알고 짧게 이야기했다.
"모든 법은 선왕(先王)으로부터 나오네. 선왕의 법이 아닌 것은 오랑캐의 법이네."
김구가 이에 답변했다.
고 선생은 김구의 계속되는 이야기가 자신의 의견과 점차 맞지 않아지자 낯을 찌푸렸다.
"사람의 머리카락은 그대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피가 곧 양분이요,
피는 음식이 소화되어 만들어진 결정(結晶)입니다.
그러니 음식을 위하지 않으면 머리털로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설령 머리를 한 길이나 길러서 크고 훌륭한 상투를 머리 위에 얹었다고
문화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놈이나 양놈이 과연 그 상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창수 자네는 완전히 사상이 달라졌네."
고 선생이 혀를 찼다.
고 선생은 평생 동안 진리로 믿었던 공맹(孔孟)사상을 고수하고 있었다.
김구에 대한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김구가 다시 말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학문과 도덕을 공부했다는 상류층들이 오히려 이 불쌍한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온 나라의 백성들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쟁이라서 자기의 권리와 의무는 모르고,
마땅히 탐관오리와 토호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자기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왜놈과 양놈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필경 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도 세계 문명 각국의 훌륭한 교육제도를 받아들여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국민으로 양성해야합니다."
김구는 우리나라의 병폐인 탐관오리의 처단과, 학자연하는 위선자들의 탐학,
그리고 현대교육을 통한 국민계몽을 주장했다.
그만큼 시야가 넓어지고,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뜬 것이다.
당시에는 궁궐을 중점으로 친러파, 친일파 등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대신들로 가득 찼다. 김구는 이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고능선은 김구의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더욱 안타까운 생각을 했다.
"자네가 이야기하는 것은 박영효, 서광범 등 역적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네.
만고천하에 끝없이 존속하는 나라가 없고, 백년이상 사는 사람이 없네.
이 나라도 급기야 망할 텐데, 왜놈과 양인에게 배우다가는 이것저것 모두가 끝장이네 .
나라도 구하지 못하고, 절의(節義)까지 배반하고, 죽어서 선왕선열들을 어떻게 대하겠나?"
고 선생의 의견은 확고했다.
다시 한번 고 선생은 김구에게 의암 선생에게 가서 후사를 도모하라고 했다.
고 선생이 말하는 의암 유인석은 1896년 5월 의병운동의 거점인 제천 성을 왜놈에게 뺏기자
서북지역으로 이동했고, 서북 지역도 여의치 않자 아예 간도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해 9월 회인현재(愼仁縣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자 파저 강에서 의병을 해산했다.
그 후 그는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통화현 오도구에 정착,
1897년 고종에 의해 귀국했으나 다시 오도구로 돌아갔다.
이때 유인석의 문인사우(門人士友)들도 망명했고, 고능선도 수행했다.
그는 오도구에서 인근 팔왕동(八王洞)으로 이동, 공자, 주자, 송시열, 이항로 등의 영정을
모신 성묘(聖廟)를 세워 의병들의 정신적 귀의처로 삼았던 것이다.
고 선생은 김구를 오도구로 보내 유인석과 함께 후사를 도모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김구가 자신과 유인석의 사상과 일치해야 하는 것인데,
김구가 이야기한 사상은 전혀 딴판이라 실망감이 컸던 것이다
고 선생은 외국물건이라면 성냥 한 개비도 쓰지 않았다.
김구가 보기에 너무 고지식해, 과연 이런 사상으로 나라의 미래를 도모할 것인가.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외국 오랑캐의 좋은 것은 받아들일 줄 아는 아량이라곤 손톱만치도 없었던 것이다.
고 선생과 함께 잠은 자면서도 김구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이튿날 김구는 하직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 부디 편히 계십시오."
이때 김구가 올렸던 절이 마지막 절이 되었다.
고 선생은 제천(堤川) 동문의 집에서 결국 객사를 했다.
김구는 고 선생의 죽음에 애통해했다.
생각해 보면 고 선생을 통해 의(義)와 도(道)를 깨우쳤고, 인간의 법도를 알게 됐던 것이다.
학문의 위대함을 전수해 준 고 선생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고 그의 일지에 기록하고 있다.
고 선생과 헤어져 텃골 본가에 도착하니 벌써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농촌은 여전히 가난했지만 정감이 있었다.
손바닥만 한 안마당에 들어서니, 그의 어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왔다.
요 근래 주름살이 훨씬 많아졌다.
"네 아버지가 아까 헛소리로,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뭐하느냐고 하더니 정말 네가 왔구나."
하면서 아들 김구를 잡아끌었다
김구가 들어가 보니 아버지의 병세는 첫 보기에도 위중했다.
시탕(侍湯)으로는 약효도 못 내고, 김구의 아버지는 열사흘 동안 아들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가 경자년(1900년) 12월 9일, 김구의 손을 풀고 영면했다.
김구의 아버지는 평생 동안 상놈으로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소원이 양반대접 한번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유완무나 성태영 같은 양반을 만나 그들의 도움으로 연산(連山)으로
이사했다면 그곳에서 양반대접을 받았을 것인데 하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강씨나 이씨 등 토호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 것이
뼈에 사무쳤던 것이다.
이제 그의 아버지는 이런 한을 풀지 못하고 떠났고, 남은 것은 김구와 어머니뿐이었다.
한 세기가 지나가고, 다시 또 다른 세기(1901년)가 찾아왔다.
'인생이란 얼마나 한심한가.
고작 1백년도 못 사는 인생, 그동안 사람다운 일을 해야 할 텐데.'
김구는 아버지의 죽음을 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부모란 자신을 존재하게 한 분이다.
낳아 주신 은혜 하나만을 갚고자 평생을 효도하여도 부족한 것인데,
부모도 잘 모시지 못하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인간의 최소한의 도리도 행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지금 아버지에게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이 안타까웠다.
가난한 시골 살림으로 유명한 의사를 부르는 것도 무리고,
그렇다고 할머니 임종시 아버지처럼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린다는 것은
어머니가 울며 반대할 것이기에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김구는 생각한 끝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내기로 했다.
어머니가 알면 상심할 것 같아 몰래 왼쪽 허벅지에서 살 조각을 칼로 베었다.
고기는 구워서 약이라고 잡숫게 하고, 흐르는 피를 드시게 했다.
그러나 양이 적은 것 같았다. 다시 칼을 들어 허벅지의 살을 베려 할 때,
처음보다 천백배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살 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더욱 가중되었다.
그 고통이란 얼마나 심했던지 필설로 적을 수가 없었다.
김구는 탄식했다.
'나는 결코 효자가 될 수 없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는 효자만 이 베어 내는 것인데
어찌 나 같은 불효자가‥‥‥ '
김구는 그 생각을 하며 울었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오히려 비과학적이며 원 시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김구가 보인 효행은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한 것인가.
병든 부모를 몰래 길거리에 내다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요즘, 문명은 발달했다지만
그 행위야말로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어찌 김구의 행위에 대해 입술을 움직일 것인가.
초종(初終)은 조용한 가운데 끝냈다. 초혼(招魂)과 시신 거두기,
그리고 관 준비 등을 마치고 염습을 한 다음 성복(成服) 때에는 멀리서 조객(弔客)들이
찾아들었다.
상주인 김구는 잠시도 상청 (喪廳)을 비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살을 건드린 자리가 덧나서 고통이 심해 맞절조차 할 수 없었다.
유완무와 성태영에게 부고(訃告)를 냈다.
성태영은 경성에서 말을 타고 5백리 길을 달려와 조문을 했다.
김구의 아버지 장지는 직접 김구가 골라 텃골 오른쪽 산기슭 에 안장했다.
상중이라 아무데도 가지 않고 칩거했다.
그의 작은 아버지 준영은 이런 김구가 기특하게 보였는지 2백 냥을 주었다.
2백 냥은 신부를 사오기 위한 돈이었다.
"창수, 요 근처 사는 상놈의 딸이 있는데,
얼굴도 반반하고 엉덩이도 큰 것이 꽤 쓸 만하다 장가나 가거라."
엉덩이가 크다는 것은 아이를 잘 낳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양하겠습니다."
"창수야, 이젠 네가 이 집안의 기둥이다.
어서 장가가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지."
준영 삼촌은 아버지 없는 집안에 조카를 장가보내는 일을 의무로 알고 있었다.
"싫습니다. 더구나 재물이 오가는 결혼은 죽어도 싫습니다."
그러자 준영 삼촌이 노해서 곁의 낫을 들고 김구에게 달려들었다.
"너 이놈! 어른 말을 뭘 로 아느냐!"
간신히 어머니가 나서서 진정 시켰다 그 틈에 김구는 빠져나왔다.
902년, 임인년(壬寅年) 정월이었다.
여기저기 세배를 다니다가 장연 무산의 먼 친척 댁에 갔다.
친척 할머니는 김구가 삼십 가까운 나이에 장가들지 못한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제 곧 삼십인데 , 사내 나이 삼십이면 손자 볼 나이가 아니냐?"
당시는 조혼(早婚) 풍습이 있었기에 삼십이면 만만치 않은 나이다.
"제 중매는 할 사람도 쉽지 않겠고, 저 같은 사람에게 딸을 줄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간혹 있다고 해도 제 마음이 통하는지 의문이구요."
할머니가 웃었다.
"네 뜻에 맞는 처녀는 어떤 처녀인가?"
김구가 평소 생각을 말했다.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고, 둘째 처녀가 학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서로 만나서 마음이 맞아야 됩니다."
그 할머니는 첫째와 둘째는 별 의문이 없지만 셋째는 매우 곤란하다며 난색을 했다.
"내 본가(本家) 사촌의 딸이 올해 열일곱인데, 과부 홀 어머니를 모시고 지낸다네.
생활은 빈한하나 배움이 있어서 농투성이에게 주기엔 아깝다고 하기에 상대를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있네, 어떤 기준으로 남자를 택할는지 알 수 없으나,
네 말처럼 대면하여 마음을 엿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가 하네."
"그렇다면 조금 곤란하네요."
"일찍이 형님(사촌)께 너의 됨됨이를 말한 바 있었네.
형님이 자네를 한번 보고 싶어하는데 동행할 수 있겠나?"
김구가 말했다.
"처녀를 만나 볼 수 있게 해준다면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돼 김구와 할머니는 할머니의 사촌이 사는 장연 속내(東內) 및골의 오막살이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오막살이였다. 그 집 늙은 과부댁은 아들이 없고 딸만 넷이었다.
위로 셋은 출가시키고 막내딸 여옥(如玉)을 데리고 지냈는데,
글은 국문을 깨우치고 바느질과 길쌈을 가르쳐 살림 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다.
김구가 안방에 앉아 기다리는데, 세 사람,
즉 할머니, 신부의 어머니, 신부가 무슨 의논을 하는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할머니가 김구의 구애조건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가 꽤 진전이 됐는지 잠시 후 할머니가 들어왔다. 할머니는 김구에게,
"네 말대로 거반 되겠으나 규중의 처녀가 생면부지의 남자와 대면을 하겠느냐.
병신은 아니고 인물도 중간 이상은 된다는 것, 내가 보증하겠다."
"아닙니다. 대면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건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할머니가 웃었다.
"창수, 이제 보니 까다롭기가 그지없구나. 뭔가?"
김구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지금 약혼을 한다고 해도 결혼하기 위해선 탈상(脫喪)까지 간이 있으니,
그 동안 공부를 시켜야겠습니다.
또 공부 도중에는 약혼녀를 낭자로 부르고, 저를 선생님으로 호칭해야만 합니다."
"혼인을 하면 자네 사람인데, 공부를 시키건 말건 그건 자네 뜻대로 아닌가?"
"1년의 세월이 허송될까 봐서 입니다."
과부댁과 할머니가 눈웃음을 치더니 처녀를 불렀다.
그러나 종내 무소식 한참 있다가 들어오더니 자기 모친 뒤에 앉았다.
"나, 김창수라 하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외간 남자와 함부로 대화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김구가 다시 물었다.
"처녀는 나와 혼인할 생각이 있소?
또 혼인하기 전에 내게 학문을 배울 생각이 있소?"
김구는 부연해서 설명했다.
지금 세상은 달라져서 여자도 눈을 떠야만 하고,
그러자면 학문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고,
공부는 그 시기가 있어서 반드시 20세 전이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처녀의 말소리가 김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과부댁과 할머니는 처녀가 승낙을 했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김구는 집으로 돌아와 준영 삼촌에게 약혼을 보고했다.
어머니가 처녀의 집에 다녀와 확인을 한 후에야 삼촌은 믿었다.
삼촌은,
"세상에 참 어수룩한 사람도 다 있군."
하며 잘됐다는 것인지 안됐다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했다.
김구는 약혼자에게 가르칠 책들을 뽑았다.
'여자독본(女子讀本)' 은 당시 장지연이 편찬한 여성용 국어책으로,
본문은 한글로 되어 있으나 간혹 뜻이 어려운 곳은 한자를 곁들였다.
그러나 장지연이 편찬한 '여자독본'과 김구가 여옥을 가르친 '여자 독본' 은
연대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즉 장지연은 1908년에 이 책을 편찬했는데, 김구가 여옥을 가르친 해는
1902년과 이듬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장지연 이전에도 이런 내용의 책들이 민간에 많이 유통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구는 지필묵을 준비해 미혼 처를 가르쳤다.
김구는 미혼처의 공부 말고도 당시 신교육 사상을 갖고 있던 인사들과 접촉했다.
문화의 우종서 (禹鍾瑞) 목사, 송종호(宋種鎬), 은은률의 김태성(金泰聲),
장연의 장의택(張義澤), 오인형(吳寅炯), 정창극(鄭昌極) 등이 김구가 접촉한 사람들이다
당시 김 선생이란 별칭 (?)을 갖고 있던 손경하(孫景夏)는 원산사람으로,
박영효와 여러 해 일본에 체류하다가 귀국, 정부에서 체포령이 내리자
구월산으로 은둔하여 우종서, 송종호 등의 보호 하에 지냈다.
박영효가 귀국하자 그는 손영곤(孫泳坤)이란 이름으로 행세했다.
또 한 사람, 장련의 선비집안으로 구학문과 신학문에 두루 박학다식한 장의택은
해서지방에서 으뜸가는 인재였다.
장의택은 구학문보다는 신학문으로써 국민을 계도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
자신의 아들도 경성과 일본 등지로 유학시켰다.
따라서 구 선비들에게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예수교는 신교육 풍조를 몰고 왔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신교육 풍조에 예수교가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런데 예수교를 신봉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중류 이하였다.
이들은 우리말에 익숙하지 못한 서양 선교사들이 이야기하는 신앙심 이외에도
애국사상도 알게 되었다.
예수교를 신봉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애국자였다는 것이 이를 증명했다.
우종서가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종서는 김구에게 예수교에 입교할 것을 여러 번 권고했다.
"서양 종교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좁은 소견이네.
좋은 건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갖게."
하며 예수교의 기본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김구 역시 마음이 움직여, 탈상 후에는 예수도 믿고 신교육 장려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1903년 2월, 김구의 나이 28세 되던 해, 어머니는 김구의 성혼(혼인)준비를 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란 말이 있듯이, 미혼처의 집에서 급보가 왔다.
낭자의 병세가 위중하니 급히 와 보라는 것이었다.
김구가 즉시 처가에 가보니 낭자의 병세가 위중한데도 반갑게 맞이했다.
만성 감기였는데, 산골이라 약을 구하기가 힘들어 결국 이틀 후에 영면하고 말았다.
김구는 비록 성례는 못했지만 생전의 인연으로 믿고 낭자를 직접 염습(驗襲)해 주었다.
장모는 김구에게,
'이제 자네도 예수를 믿게.
이 세상이란 허망하게 지나는 꿈과 같은 것이네. 보았지 않나."
하며 예수교에 입교할 것을 권했다.
김구는 미혼 처를 염습한 후 곰곰이 상념에 젖었다.
삼십도 안 된 나이에 벌써 범인(凡人)의 백배, 천배도 더한 시련을 겪는 것이,
앞으로 더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지,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김구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해 2월 김구는 장련읍 사직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장련읍의 진사 오인형이 자신의 소유로 되어 있던 사직동 집과 산림, 과수,
그리고 30여 마지기의 전답을 모두 김구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오인형이 김구에게 당부했다.
"무릇 대장부는 잡일에 신경을 써서는 대사를 그르칠 수가 있소.
재물이 빈약하면 사람이 초라해지게 마련이오.
그래서 내가 비록 가진 것은 변변치 않지만 그대에게 이것을 맡길 테니,
그대는 여기서 나오는 재물로 맘 편히 공부나 하시오."
당시만 해도 사람이 사람을 알아주는 시대였다.
물질이란 사람 위주로 관리되는 것이고,
그 중에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오인형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에는 존경한다고 흉허물 없이 지내다가도,
물질이 매개돼 이해관계가 성립되면 송사(訟事)를 서슴지 않는
요즘의 소인배들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 오인형이었다.
김구는 해주 고향에서 사촌형 태수(泰流) 부부를 데려다가 가사를 주관케 하고,
오 진사 집 사랑에다 학교를 개설했다.
오 진사의 큰딸 신애(信愛), 아들 기수(基秀), 오봉형(吳鳳炯)의 두 아들,
오면형(美勉炯)의 자녀, 오순형(吳衆炯)의 두 딸 등 학교에 뜻을 같아하는
사람의 자녀 몇 명을 모집, 칸막이를 해서 남녀구별을 했다.
인형의 셋째 동생 순형은 김구와 함께 예수교에 전력하기로 결정하고,
학생들 지도 틈틈이 예수교를 선전했다.
김구의 노력 때문에 1년도 안돼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 당시 색주가나 드나들며 주색잡기에 골몰하던 백남훈(白南蒸)을 인도했다.
"자네는 예수를 믿어야 하네. 색주가나 드나들며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되네."
김구의 말에 감화된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후 봉양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해방 후 그는 정치 거물로 정계를 주름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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