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부서지는 별 16. 부서지는 별 모닥불은 타는 것이 아니라 살라지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불꽃으로 태워 처절한 환희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에 어쩔 수 없이 불살라져서 그 아픔을 하늘에 대고 절절히 호소하는 것이다. 흐르륵 흐흐륵. 그래서 모닥불은 이런 소리를 내며 흐느낀다. 자신이 살라.. 소설방/그리운 세월 2015.08.30
15. 길 15. 길 진열대에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책들은 마치 영민을 흘겨보며 손가락 질을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항상 책을 읽고 시를 쓰셨던 그 얼굴이 스르르 다가와서 영민을 꾸중하는 것 같다. '책은 읽었니?'하는 표정으로. 영민은 그대로 굳어진 채로 책방의 앞에.. 소설방/그리운 세월 2015.08.30
14. 개똥지바퀴 14. 개똥지바퀴 영민과 장현은 자신들이 쓰던 온갖 잡동사니를 한 곳에 모았다. 덮고 자던 거적떼기같은 이불, 넝마옷 몇벌, 걸레조각같은 헝겊들, 휴지, 개다리 밥상, 양말쪼가리, 수건으로 쓰던 천조각들이 수북히 쌓였다. 영민은 어디서 주웠는지 딱성냥을 딱하고 켜서는 그 잡동사니의 .. 소설방/그리운 세월 2015.08.30
13. 한많은 생 13. 한많은 생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씨구나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왔네. 시전서전을 읽었는지, 대문대문 잘한다. 논어맹자를 읽었는지 조막조막 잘한다. 기름동이나 마셨는지 미끈미끈 잘한다. 일자나 한 자를 들고나 보니 일월성신이 개총총, 이자나 한 자.. 소설방/그리운 세월 2015.08.30
12. 구걸 12. 구걸 멀리 누렁 황소가 달구지를 끌고 덜그럭 덜그럭 오고 있다. 툭박하게 만들어진 달구지는 끼르륵 끼륵 바퀴소리를 내면서 일렁일렁 끌려온다. 쩔그렁쩔그렁 울리는 황소의 방울소리는 두고온 아기 송아지를 하염없이 불러대는지 애잔하기 그지없고, 퉁방울같은 두눈에는 누군가.. 소설방/그리운 세월 2015.08.29
11. 영원한 방관자 11. 영원한 방관자 충격이 컸다. 시가 아닌 소설이란 형식의 책이 이렇게도 가슴을 쥐어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껴본 것이다. 그 소설은 음울하게 떠올라서 흐르륵 가슴을 찢어놓고서 쌩쌩 부는 바람으로 사라져 버린다. 암담하고 음울하고도 슬픈 소설이다. 남자 주인공의 고뇌와.. 소설방/그리운 세월 2015.08.29
10. 그리움 10. 그리움 그리움은 마음 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곤한 여름날에 화드득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소나기처럼, 이미 눈앞엔 존재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흙탕물흘렀던 고랑처럼 가슴속에만 깊히 새겨져 있는 것이 그리움이다. 어린 날의 추억이라든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 엄마에 대.. 소설방/그리운 세월 2015.08.29
09. 불타버린 동심 09. 불타버린 동심 하늘은 가없는 높이를 가지고 점점 푸르러 가고, 산들바람은 기대감에 부푼 마음을 슬쩍 휘저어 붕붕 띄어 놓았다. 하양 나비가 마냥 날개를 펄럭이며 하얗게 세상을 물들이는데, 하늘을 나는 민들레 홀씨들도 나비의 그 새하얌을 시샘이라도 하듯이 앞다투어 허공에 떠.. 소설방/그리운 세월 2015.08.29
08. 애한의 감정 08. 애한의 감정 마음에 검은 그림자가 한없이 덮여 있어서 가슴 속이 마냥 어둡기만 한데, 찬란한 햇살이 비치는 것은 어쩐지 뭔가 불합리하고도 억울하다는 마음이 든다.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어두울 때면, 최소한 눈은 오지 않더라도 날이나 우중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윤경은 청소.. 소설방/그리운 세월 2015.08.29
07. 빈자리 07. 빈자리 "오오오 세에드 무비, 올 웨이스 ?미 크라이...." 축음기에서 알지도 못하는 여자 가수가 쉰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고, 창에 서린 성애가 마치 보석의 단면을 확대경으로 확대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윤경은 방안에서 엄마와 아빠가 하는 대화를 엿듣고 있다. "허허, 그 사.. 소설방/그리운 세월 2015.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