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한많은 생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씨구나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왔네.
시전서전을 읽었는지, 대문대문 잘한다.
논어맹자를 읽었는지 조막조막 잘한다.
기름동이나 마셨는지 미끈미끈 잘한다.
일자나 한 자를 들고나 보니 일월성신이 개총총,
이자나 한 자를 들고나 보니, 이 내 신세가 서글퍼,
삼자나 한 자를 들고 보니....
장현이 구성지게 뽑아내는 각설이 타령을 들으며 자신도 몇번 깡통을 퉁겨준다.
이제 이렇게 된 것이다.
보다 나은 일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버린 채로 완전한 밑바닥 인생이 된 것이다.
배고프면 구걸하고 배부르면 그대로 자빠져서 자면 그뿐이다.
아직도 사람들은 거지들에게 연민의 정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구슬프게 뽑아내는 가락에 사람들은 기꺼이 밥덩이를 깡통에 던져주지 않나 말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사회가 서서히 각설이에 대해 연민을 품기 보다는 혐오를 내보이고 있다.
모두가 못살 때에는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한창 시행되면서, 사람들은 일터에 나가 바쁘게 일했고,
정부는 부랑자, 조직 폭력배, 거지들을 모두 일제히 단속하기 시작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우리 모두 일어나 새마을을 만드세. 살기 좋은 새마을...'
녹쓴 스피커에서 발악을 하는 소리가 아침 공기를 다 박살냈고,
청계천 다리 아래의 각설이들은 금방이라도 닥쳐올 단속을 걱정한다.
잘산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못살 때는 정을 쪼개 나누어 줄 수있는 인정이 있었는데,
조금 살게 되니까, 자기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 배타적인 저항심으로 정을 나누어주는 것을 거부한다.
"장현아."
"와, 행님아?"
장현은 식은 밥덩어리를 한덩이 깡통에 담으면서 묻는다.
벌써 아주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듯이 느껴진다.
원래 컸던 장현의 몸집이 그 사이에 영민보다는 머리 하나는 커졌다.
"얼마되지 않아 단속반이 들이 닥칠 거야."
그럴 것이다.
이제 이 사회에서 거지나 부랑자들은 발붙이고 살 수 없을 정도로 핍박을 하니까.
언제부터 잘살았다고....
"그러타꼬 해도 우야겠노."
대책은 없었다.
그리고 그 험악한 소리가 들려왔어도 그건 소문뿐이라고 위안하고 있는 터다.
거지들은 잡히면 그대로 지옥과도 같은 훈련소로 보내진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어떤 소문은 단속반이 거지들을 단속하는 과정이 마치 짐승사냥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우리 어디 중국집이라도 가서 뽀이나 할까?"
그러면 오히려 나을 지도 모른다.
"아고, 행님. 누가 울같은 걸 써주겠노. 그라꼬 깡행님이 우리를 순순히 내보내겠노?"
맞는 말이다.
각설이패들은 하나의 조직이다.
그 조직을 함부로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철칙이다.
"아무튼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어. 한번 깡형님과 의논이라도 해봐야겠다."
"안된다카이. 깡행님이 월매나 깐깐한디...."
하지만 영민은 무슨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것은 생에 대한 본능적 불안감이다.
장현이 내미는 양은 숟가락을 깡통안에 밀어넣어 식은 밥을 뜨며 영민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다.
깡은 싸늘한 눈초리로 영민을 노려봤지만 영민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본다.
1년여의 각설이 생활이 그의 성격을 이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살아야 하겠다는 집념이 장현이를 만나고,
또 각설이 생활을 하면서 필히 지내야만 했던 그 억척스런 삶이,
그에게 내성적인 성격을 버리게끔 만들었다.
아니 내성적인 성격을 내버린 것일 뿐만 아니라, 대담성과 담력도 키워냈던 것이다.
"깡형. 잘들어야 해. 분명히 이번 주 아니면 다음 주에 단속반이 들이닥칠 거야.
그때는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거야."
그것은 깡도 잘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조직을 자신이 허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조직을 허물어야 마땅히 갈 곳도 없는 그들이었다.
"영민이, 그럼 너는 어떤 대책이 있다고 생각하냐?"
당연한 질문이었고, 아주 간절한 물음이다.
"벌써 왕십리쪽은 단속이 되어 쑥밭이 되었고, 왕십리 각설이패와 넝마주이들도
모두 잡혀갔거나 뿔뿔이 흩어졌다고.
그러니 우선 우리도 흩어져서 제 살길을 찾다가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뭉치자 이거지."
별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
깡이 쪽 찢어진 눈으로 영민을 노려본다.
하지만 달리 묘책도 없었다.
"일단 생각을 해보자."
이런 말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구공탄재와 온갖 쓰레기들이 널려있지만, 그래도 청계천의 물빛은 깨끗한 곳이 많았다.
가끔 송사리들이 뾰롱뾰롱 물위를 희롱하듯 장난을 치는 것이 보이고,
어디서 내려오는지 맑은 물줄기가 양쪽 개천가의 더러운 물의 중간을 가르며 흐르고 있다.
영민은 쌓여진 연탄재의 잔해에 털썩 주저앉아
이제 형체도 남아있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잡으려 하다가 그저 실하고 웃음을 지어버린다.
지금의 영민은 과거의 영민이 아니다.
과거의 영민은 죽었다.
그의 영혼은 영민이란 육신을 벗어 버리고 허울럭 너울럭 먼나라로 날아가 버렸고,
지금은 다른 영혼이 영민의 육신을 차지해서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엄마, 아버지, 혜진, 윤경이의 얼굴 조차도 그 험한 세월을 살면서 이제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그때의 그 상황, 그 마음만이 가슴 속 귀퉁이에 조금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가끔씩 상념의 위로 떠오르며 영민에게 아릇한 향수 비슷한 것을 뿌렸다간 이내 사라지곤 했다.
누군가가 놓아 키우는 것인지 염소새끼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마 쓰레기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문득 어미 염소가 생각나서 고개를 들고 매헤헤 매헤헤
우는 것이리라.
그 우는 소리가 마치 웃음소리같아서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영민은 자신의 주위에 널려있는 연탄재 중에서 타다가 만 거뭇거뭇한 것을 손으로 줍는다.
그리고 그것을 청계천의 가운데로 힘껏 집어 던졌다.
퐁하는 소리가 누구의 웃음소리처럼 포르르 물방울을 일구며 솟아오른다.
혜진이?
물빈대떡을 만든다고 동그랗고 납작한 돌을 들어 잔잔한 수면위로 쨍 소리가 나게 던지면,
물위로 돌멩이가 마치 물을 타고 미끄러지다가 물을 차고 날아가는 제비와도 같이
몇번을 솟구치며 달리다 포르르 물속으로 사그러든다.
혜진이와 영민은 그 물탕이 몇번인가를 세어 보면서 까르르 낄낄 까르르 낄낄 웃어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한번의 물탕도 일으키지 못하는 검은 연탄재만이 물속에 뽀르르 꼴꼴 뽀르르 꼴꼴
빠져 버리는 것이다.
마치 옛날의 모든 추억을 가슴속에 빠뜨려 버리듯이.
응?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아주 불안한 붉은 색의 기운을 띄고 있다.
영민이 후다닥 뒤돌아 보는데, 거지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마구 흩어지고 있고,
호루라기 소리가 마치 세상의 마지막 신호인 양 험악하게 들려왔다.
짙푸른 정복의 사내들이 머리에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경찰봉을 든 채,
마치 짐승을 사냥하듯이 우르르 다리밑으로 몰려들어온다.
거지아이들이 황망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정복의 사내들은 눈에 보이는 거지아이들을 들고있는 경찰봉으로 사정없이 난타를 한다.
경찰봉에 맞은 아이들이 비명을 울리며 머리가 깨어진 채로 그 자리에 널브러지고
아이를 쓰러뜨린 정복은 마치 사냥물을 잡은 만족감에 의기양양하게 아이를 끌어잡는다.
이 순간에 아이는 인간이 아니라 한마리의 짐승이었다.
인간 사냥꾼들.
법을 빙자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무리들.
영민이 퍼뜩 생각한 것은 도망쳐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사냥꾼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죽어라고 도망쳐야 한다.
영민은 마구 발광하듯이 뛰어다니는 정복들 때문에 뒤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면 방법은 한가지뿐.
영민이 후다닥 일어나서는 청계천 물을 바라고 그대로 죽어라 뛴다.
"어, 저놈 봐라."
이런 소리가 들려왔지만 영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청계천 물에 몸을 던진다.
정복들이 그를 쫓아왔지만 일단 물에 이르자 옷이 젖을까봐 그저 소리만 지르고
영민은 청계천물에 마냥 몸을 밀어넣었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반대편에 도착해서도 다른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대로 죽어라고 뛰었다.
이왕 단속이 시작되었으니 이제 아무 데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 단지 거지라는 이유로,
남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몇몇 권력자의 권력유지용 시행령에 의해,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감화원으로 끌려들어가야만 하는 것이 거지들의 운명이었다.
사회는 이다지 있는 자들의 일방적인 횡포에 의해 밑바닥 인생의 삶조차 위협하는
받는 형상이 되어 있었다.
있는 자들은 거지들의 생을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이 희롱을 했다.
심지어는 거지들의 목숨까지 그들에게는 하찮은 것이 되고 말았는데,
이것이 바로 경제개발계획이라는 미명으로 찾아온 인권유린인 것이다.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마을 운동인지 뭔가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정을 주기를 꺼렸다.
아니 꺼리는 것이 아니라 정을 줄 만한 여유가 없는 것이다.
시간적 여유, 마음적 여유가 없기에 사회는 점점 더 인간적인 미가 없어져 갔다.
영민은 불현듯 장현이 걱정되었다.
분명히 잡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괄괄한 성미때문에 더 호된 악행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그가 순순히 그 정복들을 따라서 감화원으로 끌려가지는 않으리라.
그러면 거지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그들에 의해 반항하는 장현은 거의 반죽음이 되었을 것이다.
"거지같은 세상! 빌어먹을 놈들!"
영민은 이렇게 소리쳐 보지만 바로 자신이 거지였고,
자신이 빌어먹는 자였으니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저 모든 것을 과거라고 묻은 채 앞에 버티고 있는
세월 속으로 쑤욱 들어가 버릴 수는 없었다.
최소한 자신과 형제처럼 지냈던 장현의 소식이라도 듣고 사라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이 그를 찾아보는 시늉정도는 해야겠지 않는가.
따지고 보면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것도 장현이 아니었던가.
영민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휫 다리밑으로 스며들었다.
모든 것이 그 인간사냥의 아우성속에 엉망이 되어 있다.
밥을 얻어먹던 깡통들이 온통 구겨져서 비명을 지르며 이쪽 저쪽에 나동그라져 있고,
냄비뚜껑이며 양은 숟가락, 거적떼기들이 마냥 어지러이 흩어져있었다.
영민은 그런 것이 마치 자신의 몸에 당한 악행인 양 치를 떨며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이곳 저곳을 기웃대 보지만 이미 거지패들의 삶터는 움직이는 것 하나 없이 삭막하기만 하다.
싸늘한 바람이 살풍경하게 폐허를 휩쓸고 지나간다.
아무리 쓰레기장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거지들이 왁자할 때는 온기가 있었는데,
이제 그들은 한명도 남아있지 않고 그저 찬바람만이 쓰레기장을 감아 돌아간다.
영민은 다리 아래 가장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고서 쭈그리고 앉았다.
이젠 어떡해야 하나.
모든 것은 떠났다.
영민 혼자만을 남긴 채.
그것이 강제였건 자발적이였건 간에 말이다.
여기에 머물 수는 없었다.
이제 나름대로의 삶을 찾아 떠나야만 한다.
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훌쩍 떠나듯이 떠날 때가 이른 것이다.
영민은 팔로 턱을 고이며 생각한다.
어차피 이런 것이다.
자신의 과거 추억을 몽땅 가슴속 한켠에 밀어둔 것과도 같이,
이제 이 거지패의 생활도 가슴 한켠으로 밀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앞에 있는 생에 다리를 드밀어야만 한다.
응?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다는 생각에 영민은 순간적으로 긴장한다.
또 단속반이 온 것일까.
하지만 귀를 기울여도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람소리였을 것이다.
바람이 쓰레기를 휘돌아가다가 부스럭 소리를 낸 것이다.
영민이 다시 생각에 빠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소리가 들렸다.
아니, 조금 더 큰 소리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조금 크게 들린 것이리라.
영민이 후다닥 쓰레기 더미 뒤로 몸을 숨기고 바싹 웅크린다.
만약에 남아있던 단속반이 있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잡히고 말 것이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 그들의 목표는 자신 하나일 것이니까 말이다.
영민은 그자리에서 숨도 쉬지 않고 그대로 숨어있었다.
다시 정확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으 으 응."
아주 작은 소리.
영민은 그것이 무슨 소리라는 것을 대번에 알았다.
바로 누가 앓는 소리.
그것도 보통으로 앓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는 소리다.
이런 험악한 인생을 살다보면 그정도쯤은 쉽게 판별할 수 있다.
분명히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어가는 것은 각설이 중에 한명일 것이다.
만일 단속반이 다쳤다면 동료들이 끌고 갈 것이니까.
영민의 몸이 순간적으로 빨라진다.
그들은 단속의 와중에서 얻어맞아 거의 죽게된 거지를
그대로 쓰레기 더미에 파묻어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하긴 거지를 쓰레기 더미에 묻어 죽게해도 그들의 잘못은 없는 것이 이 사회가 아닌가.
거지는 이미 그들에게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쓰레기더미 아래서 얕은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생채로 매장했다는 사실이 치가 떨린다.
하지만 쓰레기는 흙과는 달라서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영민은 후다닥 쓰레기 더미를 치우며 그 안에 생매장되어서 죽어가고 있는 거지를 꺼낸다.
그의 얼굴이 보이자 영민은 너무나 놀라서 그대로 혼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으아아!
영민의 입술이 자신의 이빨에 걸려서 비명을 질러댔다.
입술은 그 부들부들 떠는 분노에 못견뎌 그대로 울컥 피를 토해냈다.
거지는 거의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맞은 인육처럼 변해있다.
그렇다.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고 인육이었다.
개도 먹지 않는 그런 인육.
그 무자비함.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더욱 영민의 가슴을 처절하게 도려내는 것은 그 인육이 바로 장현이었다는 사실이다.
"장현아!"
영민은 그 캄캄한 쓰레기 장에서 마치 목구멍에서 피라도 토할듯이 길게 절규했다.
만일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골이 송연했을 것이다.
영민이 와락 장현을 껴안는데 이미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피는 이미 흐르기를 거부해서 온몸에서 끈적끈적 붙어 있다.
"장현아, 장현아. 눈을 떠봐. 장현아."
필사적으로 불러대지만 장현은 미동도 없다.
그저 얕은 신음만을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개새끼들! 이 악마같은 놈들!"
악을 써본다.
지랄 발광을 해본다.
하지만 도저히 어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과연 거지들이 이렇게 맞아 죽을 만큼 나쁜 짓을 그들에게 저질렀는가.
왜, 거지들은 이렇게 되야만 하는가?
누구냐?
누구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한단 말이냐.
영민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바람뿐.
허탈했다.
악을 써도 몸부림을 쳐도, 이왕에 이렇게 된 것은 도저히 되돌려지지 않는다.
영민은 그저 눈물만을 흘리고 있다.
증오심도 이제는 흘흘거리며 시들어지고 있다.
그때 영민은 자신의 손에 어떤 느낌을 받고는 흑하고 숨을 멈춘다.
분명히 축늘어진 장현이 자신의 손을 잡았다고 느꼈다.
거짓말처럼.
그리고는 아주 희미하게, 귀를 그의 입에 가까이 대야지만 들릴 수 있는 아주 조그만 소리가 들렸다.
"행 ... 님 ...."
헉!
영민이 다급히 장현의 손을 쥔다.
"그래, 장현아. 나야. 나라고."
영민이 간절히 그를 불렀지만 그는 다시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그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정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영민이 그를 내려놓고 후다닥 일어섰다.
무언가를 해야한다.
그래서 그를 살려야 한다.
쓰레기더미에 생매장되었던 그 운명을, 그 악착같은 운명을 한번 돌려보아야만 한다.
깡통을 들고서 청계천 물쪽으로 냅다 달린다.
첨벙첨벙 물속으로 들어가서 아주 깨끗한 물을 받는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물밖으로 덤벙거리며 뛰어나와서는 다급히 장현에게 달려온다.
정성껏 그를 씻긴다.
미끈덕거리며 그의 몸에서 핏덩이가 지릭지릭 떨어진다.
입에 물을 흘려 넣어준다.
다시 정성껏 그의 몸을 닦고, 물이 모자라면 헉헉대며 물을 받으러 뛰어갔다.
이제 터져서 상처가 된 부분만 빼놓고는 살갗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민은 이제 부리나케 거적떼기며 이불쪼가리,
헝겊등속을 모아서 장현이가 눕기 편한 곳으로 만들고는 그를 그곳에 눕혔다.
그런 다음 그의 몸위에 다시 거적떼기들을 덮어주었다.
가장 위급할 때 엄마나 아버지가 해주었던 그런 일처럼 영민도 정성스럽게 그일을 했다.
아하 아하 바람이 분다.
미친 듯한 개바람이 분다.
한많은 이 세상 가져갈 것이 많아 바람은 그렇게 미친 듯이 분다.
맺혀진 가슴 속에 고통마저 짊어지려고 몸부림치며 분다.
아하 아하 피가 운다.
개같은 인생살이 슬픈 피가 운다.
물도 술도 아닌 것이 그저 무조건 울기만 한다.
아하 아하 세상을 날리려고 미친 바람이 분다.
영민은 그저 장현의 옆에 쭈구리고 앉아 있을 뿐이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기다림 뿐이다.
운명의 기다림.
거기에는 그것 하나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다리 아래로 허영청 달빛이 들어온다.
아직도 비출 것이 남아 있는지, 그 더러운 다리 아래를 비집고 달빛은 무심히 들어왔다.
영민은 자신의 무릎팍에 살포시 내려앉은 그 달빛을 두손으로 담아본다.
이 빛속에는 슬픔이 없겠지. 저 달속에는 슬픔이 없겠지.
두손에 퍼담은 달빛이 너무도 슬퍼보여 영민의 눈가에 벌써 이슬이 고인다.
장현이 깨어난 것은 거의 이틀이 지나서였다.
모진 것이 인간의 목숨인지라, 그저 남길 것도 남은 것도 아무 것도 없는데,
그래도 그대로 가지 못하고 기어이 살아남는 것이, 그 끈끈한 잡초의 인생이었다.
영민은 아직 얼굴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끔 부어올라 있는 장현이
잔잔히 보여주는 미소를 보고는 어헝하고 울어버린다.
"행님아, 나 괘안테이."
그가 쭈빗쭈빗 이렇게 말을 하고는 영민의 손을 꼭 잡는다.
영민도 그 손을 마주 잡고는 그만 통곡을 해 버렸다.
워낙에 건강한 몸이라 회복이 빨랐다.
영민은 장현을 위해 부지런히 구걸을 해왔고,
아무 거나 먹어치우는 장현의 식성과 살려고 하는 의지가
그를 점점 죽음에서 삶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더 이상 단속반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긴 싹슬이하듯이 단속을 했는데 다시 올 필요가 없었으리라.
여름이 오고 있다.
아무리 한많은 세상이라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영민은 아직도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여름의 앞가에서 그 신선한 바람을 받으며 옷을 벗는다.
장현도 옷을 벗었다.
이미 어른으로 자란 두 아이의 건장한 몸매가 쓰레기더미 위에 피어나는 잡꽃처럼 성스럽게 보인다.
두 아이는 낄낄대면서 청년의 몸을 비웃는다.
그리고는 물속으로 첨벙하고 들어간다.
여태까지 못했던 목욕을 하는 것이다.
겨울, 봄에 차가움을 견디지 못해 목욕을 하지 못한 것을 지금 씻어버리려는 것이다.
아니, 그들의 과거를 씻고 싶은 것이다.
물에 들어가 성스러운 물로써 자신을 씻고,
그래서 이 엄청난 한을 품은 생의 떼를 말끔히 씻어버려야만 한다.
물속에서 영민은 꿈을 꾼다. 이제 버려야만 할 그 수많은 꿈들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그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꿈을.
물속에 번져지는 그 수많은 이야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떠내려 보내면서
이제 청년으로 성장해서 동심을 벗어야만 하는 것이다.
장현도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고,
청계천의 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염없이 흘러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