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15. 길

오늘의 쉼터 2015. 8. 30. 00:13

15.

 

진열대에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책들은 마치 영민을 흘겨보며 손가락 질을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항상 책을 읽고 시를 쓰셨던 그 얼굴이 스르르 다가와서 영민을 꾸중하는 것 같다.

'책은 읽었니?'하는 표정으로.

영민은 그대로 굳어진 채로 책방의 앞에 서있었다.

이렇듯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지식에 대한 갈망이다.

가끔 중국집 앞으로 지나치는 교복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부러웠던 것은 그들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그런 환경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환경에 들어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행님아, 또 예 와있나?"

영민은 장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서 그를 쳐다본다.

세월이 흘러 이제 장현은 완전히 건장한 청년으로 변해있다.

"행님은 말이다. 공부를 해야 하는기라."

"자식, 별소리를 다하네. 우리 같은 놈들이 공부는 무슨 공부냐."

영민은 장현에게 이렇게 말해보지만 그 지식에 대한 잔인한 유혹을 견딜 수가 없어서 흐드득 몸을 떨어본다.

"이 담에 말이다. 나가 돈 많이 벌믄 행님 공부부터 시킬끼라 안카나."

영민은 대답없이 그저 장현의 어깨를 툭하고 쳐준다.

그 말이 얼마나 고맙던가.

벌써 또 몇 년이 후딱 지나갔다.

영민은 이제 식당 보이의 짓이 이골이 날만큼 났고,

장현은 주방장 보조지만 그래도 왠만한 음식은 모두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서히 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장현의 팔딱거리는 성미가 주방에서 느긋히 있을 정도로 잔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식당에 들어가니 주인이 소리친다.

"어디 갔다 왔니. 배달이다."

주인이 커다란 철가방을 탁자위에 턱하고 올려놓았고,

영민은 장현이가 바삐 내오는 음식을 받아서 철가방 안에 넣고는 다꽝과 양파를 집어 넣는다.

철가방을 위에서 아래로 눌러 뚜껑을 닫고는 위에 솟아오른 둥근 손잡이를 잡고 주소를 받는다.

우체국이 삼각형의 꼭지점 부근에 위치해 있고,

길은 그 우체국을 중심으로 해서 사선으로 산쪽을 향해 쭉 나있다.

영민은 두 길 중에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쭉 올라간다.

초저녁이라 그런지 상큼한 바람이 몰려왔지만 환락가의 뒤편이기에 스산한 면도 있었다.

영민은 아까 낮에 책방에서 보았던 그 아름다운 표지의 시집을 꿈꾸고 있다.

이제 기술이 발전해서인지 시집도 예전처럼 투박하지 않고,

마치 곱게 꾸민 여인의 얼굴처럼 온갖 치장을 하고서, 금장 은장을 두른 채 진열대에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영민은 아버지의 시집을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집도 그렇게 예쁘게 치장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보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환상이었다.

배달을 끝내고 돌아오는데 무언가 영민의 눈에 척 들어온다.

응?

영민은 그 어슴푸레한 골목길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눈여겨 본다.

불량기있어 보이는 청년 세명이 교복입은 한 여학생을 빙둘러 서있다.

여학생은 너무나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쩔쩔맨다.

으슥한 뒷골목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완전한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불량배문화는 이렇게 뒷골목마다 숨어서 약소한 자를 괴롭히고 있다.

흔히 볼 수있는 일이었고 그냥 지나쳐 왔던 일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불량배들의 행패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영민은 그 여학생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서 철가방을 땅바닥에 소리나게 놓았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아마 그것은 그 여학생의 눈빛이 누구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 속 한쪽에 몰래 숨겨두었던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치 시위라도 하듯이 철가방을 내려놓자 사내들이 흠칫 영민에게 눈길을 준다.

그러다 영민을 보더니 여유로운 미소를 띤다.

"야, 꼬마야. 까불지 말고 저리가라."

영민은 이럴 때 미소를 지어야 한다고 장현에게 배웠다.

천성적인 싸움꾼인 장현은 영민에게 살기 위해서 싸워야하고, 싸우는 것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었다.

각설이패에 있을 때 영민은 장현에게 어느 정도 싸우는 것을 배웠고,

또한 살기 위해서 이겨야 하는 그 환경때문에 영민도 어느 정도 제 몸막이는 할 수 있었다.

사내들이 영민이 기가 죽어서 갈 줄 알았는데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니, 그들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영민은 세명을 천천히 쳐다본다.

이럴 때 모든 것을 파악해야 된다.

그리고 파악이 되는 순간 무심해져야 하는 것이다.

감정의 동요가 있어서는 제대로된 싸움을 할 수가 없다.

사내들의 얼굴에서 불량기를 발견했지만 살기는 없었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거지패나 양아치들, 넝마주이 패들은 모두 얼굴에 극도의 살기를 품고 있다.

그들의 가까이만 가도 그들이 흘려대는 독기에 중독될 지경으로 엄청난 살기를 품고 있는 것이 그들이다.

사회, 인간에 대한 분노와 살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이 그들에게 그런 독기를 품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엄청난 살기를 품고 죽자사자 덤벼드는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각설이의 생활을 한 영민이, 단순히 불량기를 보이고 있는 이들의 분위기를 이미 파악해 버렸다.

"새끼, 겁이 없구만."

한놈이 건들거리며 영민의 앞으로 다가오지만 영민은 그자의 행동에서 아직 흥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살기가 없다는 사실이 영민에게는 아주 당혹스럽게 생각되기 까지 했다.

하긴 이들은 이짓을 장난으로 하고 있지만, 예전에 각설이들은 생존을 위해 싸움을 했으니,

그때와 분위기가 틀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타!"

왼쪽에 있는 자가 어디 영화에서 봄직했을 듯한 모양새로 기합을 지르며 앞발을 날려 올리는데,

영민은 그 높이 올라간 사내의 한발을 그대로 낚아잡은채로 앞으로 밀고 들어간다.

그러니 사내의 중심이 흐뜨러질 수 밖에 없었고 영민은 사내의 낭심에 정확하게 정권을 맥인다.

억!

나동그라지며 헉헉대는 자를 그대로 내두고는 두명을 휘둘러 본다.

동네 불량배 정도는 이정도에서 도망을 치는데,

아직도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놈들은 혹시나 하는 느낌으로 막무가내로 덤벼들기도 한다.

다른 한 사내가 권투폼을 잡으며 재빨리 스윙을 날리는데,

영민의 왼팔뚝이 그것의 공격점을 끊어 막으며 텅빈 안면 공간에 영민의 오른 주먹이 날아들었다.

으헉!

사내의 안면이 망가졌는지 사내는 침을 길게 뿌리며 나가 떨어져 버린다.

그것이 끝이다.

다른 한놈이 후다닥 도망을 치고 다른 사내들도 엉거주춤 기어서 사라져 버린다.

영민은 이미 사라져 버린 여학생을 두리번거려 찾다가 이내 철가방을 들고는 자신도 어둠속으로 걸어가 버렸다.

일을 끝내고 청소마저 마친 다음 식당 옆 골방에 누워서 영민은 장현에게 말을 건넨다.

"장현아, 자니?"

"어데? 와?"

"나 아까 배달나가서 오랜만에 주먹질 좀 했다."

"참말로?"

"응. 동네 불량배들인 것 같더라."

"헤헤, 문디 놈들, 씨겁했겠네."

장현이가 낄낄댔다.

영민은 아까 그 일을 생각하면서 그 여학생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것은 오래 전에 잊혀졌던 그 눈빛이다.

멀리 과거의 한 곳에 있었던 그 뚝방.

그 뚝방 위에서 혜진은 영민을 한없이 부르고만 있다.

장현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웅얼댔지만 영민은 혜진의 영상이 보이는 꿈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어갔다.

다음 날, 막 식당문을 여는데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 하나 들어왔다.

영민은 이른 점심을 먹으러 온 손님인지 알고서 소리쳤다.

"어서오세요."

그런데 그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영민을 노려보고만 있다.

나이는 약 30세 정도인데 눈에는 아주 매서워보이는 안광이 빛났다.

영민은 그 안광이 싸움을 위한 것이나, 아니면 독기같은 안광이 아니라는 사실을 퍼뜩 감지한다.

그리고 그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것이었다.

"무슨 일로 ...."

영민이 이렇게 물으려 하는데 식당 밖에 여학생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 학생을 구해주었다는 말을 듣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왔어."

말하자면 이 사람은 학교 선생인 것이다.

남자가 영민의 손을 덥석 잡는다.

"나는 손창석이라고 해. 산밑에 우일실업고등공민학교를 맡고 있지."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알 수없다고 영민은 생각한다.

그가 선생이라는 사실에 마치 옛날에 어떤 스승을 만난 것 처럼 가슴 가득 어떤 정겨움과 반가움이 솟아 오른다.

"좀, 앉으세요, 선생님."

그러나 손창석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아마 부담을 주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아니, 곧 가봐야 해. 참, 이름이 뭐지?"

"고 영 민."

영민은 한자 한자 똑똑 끊어서 말한다.

마치 옛날 국민학교때 하던 식으로.

"응, 고영민이구나. 영민아, 너 혹시 공부하고 싶지 않니?"

공부.

아,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말.

영민의 가슴이 무언가 콱하고 치밀어 오른다.

"밤중에라도 괜찮고, 아침에 시간이 있으면 아침도 좋아. 아무 때나 시간이 있으면 하면 되거든."

영민은 그 말에 그저 눈물만 글썽이고, 뒤늦게 무슨 일인가 해서 나온 장현이가 냉큼 대신 대답한다.

"합니다. 한다꼬요."

손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영민은 다시 산아래에 위치한 거의 허물어져 가는 야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손창석선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뜻한 바가 있어 어려운 아이들의 진학이나 공부를 돕는 야학교 교장이자 선생이었다.

그는 어떡해든 어려운 아이들에게 공부하기를 권했고,

누구든지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으면 찾아가서 설득했다.

학생이라봤자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근처에서 잡일을 하는 아이들이거나,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피곤과 가난에 절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공부했고,

영민도 그들 사이에서 눈을 반짝이며 손선생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후닥 몇달이 지났고, 영민은 이제 공부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

하루는 손선생이 영민을 부른다.

"영민아, 이제 2달 후면 고검이 있어."

"고검이요?"

"그래. 고등학교 입학 검정고시지.

너같은 아이들을 위해 중학교 졸업장과 동등한 자격을 얻는 시험이야.

고검에 합격하면 다시 대검에 응시할 수 있어."

대학입학 검정고시.

정말인가.

대학에 갈 수 있는 길이 있단 말인가.

마치 꿈같은 말이었다.

"그러니 요번에 고검을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영민은 고개를 수그리고는 곰곰 생각에 잠긴다.

장현은 영민이 공부하는 시간을 내게 하느라고 자신이 식당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고,

주인에게 들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영민은 정말로 고검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2달후에는 정말로 고검에 응시해서 당당히 합격했다.

야학에서 공부한 학생들 대부분이 거의 고검, 대검에 합격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에 대한 대가가 이루어졌다는 생각에 마냥 기뻐했다.

서로가 기뻐해주고 칭찬해주다가 영민은 멀리서 조용히 서서 자신을 쳐다보는 희선과 눈이 마주쳤다.

희선은 이번에 대검에 합격했으니 대학입학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영민은 그날 이후로 희선이 자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다.

하다못해 고맙다는 단순한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 당시 많이 놀랐기도 하고 수치스러운 기억이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영민도 구태어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그것을 핑계로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서로가 바쁘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파란 것이 너무도 슬픈 색깔이었다.

왜 사람들은 파란 것을 슬프다고 표현하는지 모른다.

희선은 한숨을 쉬어 본다.

모두들 떠나는 인생들이다.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각자의 사연을 안고서 뿔뿔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 보지만 종내 용기가 나지 않는다.

희선은 그저 중국집 앞을 왔다갔다만 하고 있다.

이제 말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꼭 말을 해야만 하는데.

중국집 문앞에 섰다.

가슴이 뛴다.

꼭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 아이마냥 그저 가슴이 뛰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장현이 후닥 문을 연다.

아마 밖을 쓸려고 했든지 그의 손에는 빗자루가 들려있다.

장현이 희선을 보고서 의아해 한다.

그녀의 어색한 몸짓이 너무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식사할라꼬요?"

장현이 이렇게 물었지만 희선은 얼굴만 빨개져 있었다.

"누구 찾능교?"

"저, 영민이라고...."

희선이 비로소 말하는데 그녀의 말이 떨리고 있었다.

"아, 행님말입니꺼. 좀 기다리시소."

장현도 괜히 열쩍어서 좀 커다란 몸짓을 보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영민이 안에서 나온다.

"희선이구나."

처음 말을 거는데도 그리 스스럼이 없었다.

서로가 그런 처지라서 그런지 몰라도.

"왠일이야?"

영민이 이렇게 묻다가 자신의 질문이 너무나 야박스러운 것 같다는 느낌에 퍼뜩 입을 다문다.

희선의 얼굴에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하다는 표정이 인다.

"야, 장현아."

장현이 안에서 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며 대답한다.

"응, 와?"

"나 좀 나갔다 올께."

"알겠데이. 퍼뜩 갔다 오이라."

영민이 발을 옮기자 희선이 말없이 뒤따라 온다.

길이란 참으로 슬픈 것이다.

방황이나 방랑을 해본 사람은 아득한 환상을 찾아서 그 길로 떠난다.

그리고 그 환상은 절대로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아쉬움을 가득 안고 있다.

아무리 가도 닿지 못할 그 아득한 이상의 나라를 향해 길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영민은 가다가 흠칫 뒤를 돌아본다.

자신이 현실에서 완전히 떨어진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때문에 놀란 것이다.

희선이 그대로 따라오고 있었다.

"좀 앉자."

영민은 역전앞 광장에 만들어져 있는 화단 근처에 앉았다.

희선이 그 옆에 약간 거리를 두고 앉는다.

그러더니 불쑥 말했다.

"고마와."

응?

뭐가?

"그때 말이야. 벌써 진작에 이말을 해야했는데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었어."

영민은 그저 씩 웃어주기만 한다.

희선은 자신이 하는 감사의 말이 마치 첫사랑의 고백인 양 마냥 얼굴이 발그레져 있었다.

역전앞 광장에는 기차가 막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오고,

멀리에는 3류극장의 대형 포스터가 아물아물 보인다.

"나 곧 이곳을 떠나."

떠나?

어디로?

희선의 말이 아득하게 느껴져 영민은 고개를 돌려서 희선의 얼굴을 쳐다본다.

"다시 올지도 몰라."

그말은 다시 안온다는 말이다.

영민은 그것을 안다.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은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도 그랬지 않은가.

그런데 왜 희선은 이런 말을 하는가.

그리고 그녀가 떠난다는 말에 왜 자신의 가슴이 허전해 지는가.

"마지막으로 이말을 하고 싶었어. 고맙다고 말이야."

어디선가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구슬프다기 보다는 그 정제된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한 목소리였기에 더욱 애처롭게 들리는 느낌이다.

희선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녀가 떠난다니 왜 그렇게 슬프게 느껴지는 것일까.

"잘가. 그리고 열심히 살고."

영민은 간신히 이 말을 입밖으로 뱉어냈다.

마치 옛날에 못했던 말을 하는 것처럼.

영민은 길을 되짚어 오며 갑자기 심한 충동을 느낀다.

이 끝이 없는 길로 영원히 달려서 현실에서 사라지고 싶은 충동을 말이다.

뭐든지 다 버려버리고 저 아득하고 영원한 끝없는 길로 한없이 달려가고 싶었다.

있을 지 없을 지 모르는 그 아픈 꿈을 향해 무작정 가고 싶었다.

그래서 영원히 이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희선은 영민의 뒤에서 그대로 굳어져 있고 영민은 무심히 길을 간다.

모든 것은 떠나는 것이다.

영원이란 이름의 과거를 안은 채 허여멀건한 추억속으로 하염없이 떠나가는 것이다.

지는 것이 슬프듯 떠나는 것도 또한 슬픈 일이다.

그러나 세상 하늘 아래 머무는 것이 없듯이, 또한 남는 것도 없다.

하나씩 하나씩 세월의 압력에 굴복해서 스르르 흐르르 떠나야만 한다.

인연이, 사랑이, 정이, 아픔이, 그리고 설움까지도 몽땅 떠나가고,

남은 것은 그저 빈 쭉정이처럼 허물어가는 가슴뿐이다.

길이란 간다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진 아픔이다.

무작정 길기만 한 길은, 가다 보면 저만큼 멀리 있고, 뒤돌아 보면 아득히 멀어져만 간다.

그것이 인생이다.

미래가 저만큼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어느 새 성큼 뒤로 달아나 버리고,

보이는 것은 아련한 추억뿐이지 않는가.

영민은 길을 뛰쳐 가고픈 충동을 애써 눌러 참았다.

이제 자신이 길을 떠나고 싶었다. 세상에 펼쳐져 있는 그 긴 길의 끝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충동이고 현실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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