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16. 부서지는 별

오늘의 쉼터 2015. 8. 30. 10:23

16. 부서지는 별

 

모닥불은 타는 것이 아니라 살라지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불꽃으로 태워 처절한 환희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에 어쩔 수 없이 불살라져서 그 아픔을 하늘에 대고 절절히 호소하는 것이다.

흐르륵 흐흐륵.

그래서 모닥불은 이런 소리를 내며 흐느낀다.

자신이 살라지는 것이 못견디게 슬퍼서 울어대는 것이다.

일렁이는 불꽃의 아픈 춤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비쳐졌다가 이내 사라졌고,

그 얼굴은 확실한 실체를 내보이지 않았기에, 딱히 그것이 누구의 얼굴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혜진이 뭐하니?"

혜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상념을 거둔다.

혜진을 부른 사내는 스스럼없이 혜진의 옆에 앉았고, 혜진은 그런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거두었다.

"모닥불이 참 아름답지?"

남자의 낮은 음성은 촉촉히 젖어 있다.

그를 보면 가슴이 마구 뛴다.

혜진은 그저 모닥불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모닥불의 열기 때문인지 그녀의 옆얼굴이 발그스레하다.

진호.

혜진은 처음 그를 써클룸에서 보았을 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을 느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그는 아주 푸근한 사람이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자러 갔는지 모닥불가에는 혜진과 진호만이 따닥이는 모닥불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참, 밤이 곱기도 하지."

진호는 혼자말처럼 이렇게 중얼댔고 혜진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 본다.

수많은 별들이 혜진을 내려다 보고 있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진호가 기타를 잡고는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노래소리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긴 여운을 남기면서 높은 하늘의 별을 따라 스르르 스르르 날아 올라갔다.

대학 입학 후 처음 오는 MT인데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아마 진호가 옆에 있어서일 것이다.

"자, 따라 해봐."

진호가 기타를 퉁기면서 혜진을 재촉했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별빛이 물들은 밤같이 까만 눈동자,...."

혜진이 입을 벌리려고 하다가 기어코 쑥스러움에 입을 다물자 진호가 그 모습을 보고 싱긋이 미소짓는다.

"자식...." 모

닥불은 다닥거리는 하소연을 하면서 하염없이 자신의 몸을 태우고 있었고,

혜진은 그 모닥불 속에 누군가가 함폭이 숨어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야기 하나 해줄까?"

진호는 기타를 옆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밀어 놓으며 이같이 말했고,

그 말이 주는 성스러움에 혜진은 숨을 헉하고 멈춘다.

'이야기.'

그것은 너무나 오래전에 잊혀졌던 단어인 듯 느껴진다.

아니 그 단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감이 옛날 어느 순간에 가슴속에

성스러운 비밀어로 간직해 두었는데,

그 감정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 같았다.

아, 그것은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둘만이 나눌 수 있는 의미였다.

가슴에 소록이 담아진 성스러운 밀어.

진호는 밤이 하염없이 높아지는 밤하늘을 우러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뭍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섬이 하나 있었다네.

아침이면 해면 위로 신화의 첫장같은 안개가 홀홀 피어오르고,

그 신화의 이야기를 가르는 아릿한 무적(霧笛)소리.

등대는 한없이 앞서간 세월을 불러댔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련한 안개뿐이었네.

마치 인간세가 아닌 것 같은 그 곳에 고기잡은 늙은 아비와 어린 딸이 하나 살고 있었다네.

혜진의 머리 속에 그 아련한 정경이 아스라이 잡혀진다.

은색의 안개가 엄청나게 세상을 덮고서 너울너울 춤추고 있고, 영혼을 일깨우려는

무적소리가 흐적흐적 들려왔다.

그리고 그 안개 속으로 마치 소꿉장난을 하듯이 살고 있는 늙은 아비와 어린 딸.

흑! 이같은 생각이 떠오르자 혜진은 그 아득함에 숨이 멈춰지는 것 같았다.

아비는 매일 아침 조각배를 몰고 고기잡이를 나가고, 어린 딸은 해변에서 아비를 기다리며

조개를 줍는다네.

아침 안개가 찬란한 햇살에 스르르 물러가고, 햇살이 하날피 고개를 들면,

해변의 모래는 보석같이 빛나고 세상은 신화의 처음처럼 찬란하기만 했다네.

어린 딸은 아버지를 위해 점심을 준비하면 작은 오두막에서는 연기가 피어 오른다네.

진호의 한손이 스스럼없이 혜진의 어깨를 감쌌고,

혜진은 그 서러움에 취해 헉헉대며 자신의 머리를 진호의 가슴에 기댄다.

누군가가 흑흑하고 느껴 우는 듯했고, 마치 새로운 신화의 장이 이곳에서 벌어지는 듯도 했다.

비가 몹시도 내리고 바람이 무진장 불었다네.

세상은 마치 혼돈의 장처럼, 악귀의 추한 아가리처럼 컴컴해져 갔고,

몰아치는 폭풍은 섬을 한입에 삼키려는 양 험악해졌지.

늙은아비는 고기잡이를 나가지 못해 걱정했지만,

어린 딸은 혼자서 있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지.

항상 혼자 남아 섬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너무나 외로운 일이었거든.

폭풍은 며칠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어. 마침내 양식이 떨어지고 있었던 거야.

늙은 아비는 걱정이 되었지. 자신은 굶어도 되지만 어린 딸을 굶기는 것은 견딜 수 없었어.

급기야 늙은 아비는 폭풍이 멈추지 않아도 고기잡이를 나가기로 결심을 했어.

어린 딸은 아버지의 결정이 무엇인지 잘알고 있었다네. 그것은 바로 자살행위야.

조각배은 험악한 폭풍에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뒤집힐 것이 뻔했지. 어린 딸은 울면서 애원을 했다네.

양식을 아껴서 먹으면 아직도 며칠은 먹을 수 있으니 제발 고기잡이를 나가지 말라고 말이네.

아버지는 딸의 애원을 듣고서 마음을 바꾸었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하늘이 무심해서인지 며칠이 지나도 폭풍이 자지 않는 거야.

아버지는 이제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어. 어린 딸은 아버지의 굳은 결심에 너무나 슬퍼서 밤새 울었다네.

비가 몹시도 뿌려대고 천둥 번개가 마구 세상을 때려대는 통에, 늙은 아비는 그 흐여멀건한 잠에서 깨어났다네.

그리고는 자기 옆에 잠자고 있어야 할 딸애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비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딸애의 잠자리에는 딸애는 없고 그저 여태까지 모은 양식만이 소담하게 놓여있었어.

늙은 아비는 허둥지둥 어린 딸을 찾으러 밖으로 나갔지만 밖은 칠흑같은 어둠과 폭풍만이

그를 보며 으르렁댔지.

늙은 아비는 섬 전체를 헤매며 딸아이를 찾으려고 돌아다녔지만 어린 딸은 어느 곳에도 없었지.

그런데도 늙은 아비는 넋이 나가서 미친 듯이 섬을 찾아 헤맸던 거야.

그렇게 무섭게 세상을 찢어놓을 듯이 불어왔던 폭풍우는 그치고,

늙은 아비는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폭풍우에 밀려 온 딸애의 신발 한짝을 발견하고는 통곡을 했다네.

섬모퉁이 바위사이에 그 험한 폭풍우에 씻겨 다 찢겨진 신발 한짝을 가슴에 부등켜 안은 채,

늙은 아비는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었다네.

그 통곡소리가 너무나 슬퍼서 섬주위의 바위들이 파도를 받아 노래를 불렀다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늙은 아비는 신발을 가슴에 안은 채 딸애가 갔을 것 같은 바다로 바다로 자꾸만 자꾸만 걸어 들어갔다네.

파도는 아직도 노래를 불러준다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혜진이 기어이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고, 진호가 슬픔에 떠는 혜진의 작은 몸을 꼭 껴안았다.

별빛이 마냥 푸르렀고 모닥불은 하냥 타오르고 있었다.

혜진은 진호를 생각한다.

훤칠한 키에 시원하게 느껴지는 서글서글한 눈동자.

그리고 약간은 얇아보이지만 단정한 입술이 그의 미남형의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그 때문에 캠퍼스의 여학생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혜진에게는 그런 외모보다는 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그 가슴아픈 이야기때문에

 더욱 그가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라는 것은 동심의 소리였다.

그것은 훌쩍 커버린 사고때문에 가슴속에 밀어두어야만 할 그런 순수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누구와도 함께 공유할 수 없는 먼 과거의 감정의 흔적이다.

반드시 그 느낌을 살았던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는 그 마음속의 공감대.

그것이 진호를 통해서 흐득 마음속 깊은 곳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오혜진."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든다.

"경미구나."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있었니?"

경미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짓고 혜진의 얼굴이 붉어진다.

경미가 혜진의 앞에 스윽 앉았다.

"나 너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

혜진의 얼굴이 노을 빛으로 변하면서 입술을 비죽인다.

"기집애, 네가 어떻게 아니."

"너, 진호선배 생각하지."

흑! 혜진이 숨을 멈추고는 경미의 얼굴을 쳐다본다.

"다 알아, 기집애. 벌써 캠퍼스에 소문이 쫙 났는데."

무슨 소문?

혜진이 당황해서 눈으로 이렇게 묻는다.

"그 날밤 MT가서 말이야. 너와 진호 선배가 둘이 꼭 껴안고 밤을 샜대메?"

누군가가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관계라도 되는 양 소문을 퍼뜨린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그래, 어떤 관계야?"

경미의 이같은 물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혜진은 그날밤의 그 모닥불과 그 안개와 그 밤하늘과 그 섬이야기를 눈동자로 쫓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왜 이렇게 마음은 텅빈 서랍처럼 허전할까.

고독감은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망령처럼 흐느적대며 감정의 틈새를 파고 들어,

온 마음을 온통 슬픔으로 적신 다음에, 흘흘흘흘 자조감에 찬 웃음을 흘려대면서 온 몸을 비틀어 놓는다.

혜진은 그 한적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저 넋나간 망자처럼 캠퍼스를 방황하는데,

저쪽에서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서 혜진이 우뚝 발을 멈춘다.

그 남자는 마치 세월의 중앙을 밟으면서 성큼 혜진의 앞으로 다가서는 것 같았다.

약간은 장발처럼 늘어뜨린 생머리가 가지런히 보기 좋았다.

혜진은 그가 다가서는 시간이 영원히 현실에 도착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그만큼 그와 혜진 사이에는 영원히 좁히지 못할 시간의 틈새가 있는 것 같다.

"어, 혜진이구나."

진호의 목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부터 그 시간의 틈새를 메우며 들려오는 것 같이 다정하기만 하다.

그의 몸에서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그것은 강한 향수보다도 더욱 짙은 정감을 품고 있다.

마치 늙은 아비의 몸에서 은은히 풍기는 정의 냄새처럼 구수했다.

그 정감을 견디지 못해서 혜진의 마음은 무너진다.

아니 무너지고 싶은 것이다.

"진호 선배, 저 술 한 잔만 사주실래요."

진호가 그 말을 듣고는 씩 웃는다.

혜진은 그 미소에서 어쩐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마치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그런 익숙함.

진호가 걸음을 옮기자 혜진은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인 양 스르륵 그의 뒤를 따른다.

하늘에서 별이 부서진다.

아삭바삭 깨어지는 별들은 슬픈 미소만을 남긴 채로 별먼지 (stardust)로 사라져가고,

그 처연히 남아있는 창공만이 텅빈 마음을 웃고 있다.

"춥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까?"

진호가 쌀쌀한 밤기운이 걱정이 되는지 이렇게 물었지만 혜진은 그저 고개를 젓고만다.

아직도 여름이 시작되기 전이라 바람은 풋풋한 기운을 안고서 차가왔다.

그러나 혜진은 그 바람을 사랑했다.

갑자기 밀려들어서 온몸을 그리움의 불꽃으로 살라놓은 채 피시시 사라지는

그 바람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그 밀려오는 바람에 취해 혜진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절규하고 싶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이다.

무엇을 향해 그런지 실체를 알 수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커가는 것이다.

속절없이 인생을 밟고 지나가는 세월의 잔혹함이다.

이런 세월의 잔인함 앞에 그저 고독도 정감도 사랑도 슬픔도 모두 부서지는 별처럼 스러지고 만다.

"혜진이, 너 취했니?"

진호가 따스한 눈길로 혜진을 응시했다.

취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기분, 이런 분위기에 안 취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진호가 응시하는 그 얼굴에 어떤 상념이 겹쳐졌다가 흐르륵 사라진다.

"자식, 넌 너무나 예뻐."

스스럼없이 내뱉는 진호의 말이 마치 흐느적대는 꿈속과도 같이 들려왔다.

"일어나자. 밤이 늦었다."

어디선가 야경꾼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고,

딱따기 소리도 나는 듯 하지만 이미 그런 것이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혜진이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술기운에 비틀댔고 진호가 그런 혜진을 스스럼없이 감싸 안는다.

별이 깨지고 있다.

무엇이 서러운지 하늘에서는 별이 하염없이 깨진다.

얼마나 깊기에 그 커단 그리움이 다 담길까, 마음은 얼마나 맑기에 그 숱한 추억이 다 비칠까,

두눈은 마음에 어리는 그리움 어리랑 두눈에 비치는 추억은

아리랑 아림풋풋 아리랑 아롱다롱 어리랑 혜진은 얼마전 자신이 썼던 시 한 수를 외워본다.

가슴이 아릿아릿 저려왔다.

자신의 가슴을 이렇게 아릿하게 만드는 그 확실한 실체도 모르면서 혜진은 무작정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창백한 백열등, 조그맣게 하늘을 향해 뚫린 들창문, 그 창문에 박혀있는 것 처럼 보이는

보석같은 작은 별들.

그 알알한 설움이 혜진의 가슴에 오색실로 수를 놓는다.

누군가가 보고싶다. 누군가를 꼭 껴안고 싶다.

아니 누군가의 품에 꼭 껴안기고 싶다.

아주 꼬옥.

진호가 들어온다.

계산이 끝난는지 그의 손에는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마리가 달랑 들려있다.

왜 한 병과 한 마리일까?

혜진은 모든 것이 하나라는 사실에 흐느낀다.

진호가 혜진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구름이다.

먼 동산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그 어린 시절에 보았던 양떼구름이다.

만지면 갓 틀어낸 목화솜처럼 푹포근한 느낌을 주는 그런 구름이다.

혜진은 두손을 벌려서 그 구름을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충동은 그대로 감정에 멈추어 선 채로 나오는 것은 눈물뿐이었다.

그 눈물을 보고 진호는 혜진이 첫경험이기 때문에 두려워서 그런다고 생각하고는 술을 권한다.

그러나 이미 혜진은 무언가에 흠뻑 취해 있었다.

진호가 술을 한잔 마신다.

그 술잔에 별빛이 어리고 그 별빛은 덩그마니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 진다.

별이 진다.

술잔에 지는 별은 아득한 슬픔을 담뿍 품은 채로 흐르륵 지고 만다.

혜진은 그 지는 별이 안타까와 손을 내민다.

그 수없이 많은 사연을 안고 스러져가는 별이 슬퍼서 그저 두손으로 그것을 잡으려 한다.

그때 진호의 두손이 혜진을 거칠게 껴안았고, 그 바람에 와락 별이 까무러져 간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몽땅 까무러져 갔다.

새벽이 별빛을 밟고 성큼 창문가에 다가서고, 혜진은 그 새벽빛에 사라져가는

별빛이 애처로와 눈물 짓는다.

모든 것은 변한다지만 세상은 항상 그대로였다.

아침도 별도, 새벽도 모두 그대로이고, 변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뿐이다.

인간은 세월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 채로 하나씩 하나씩 다른 형체로 변모해 간다.

한때는 소녀였다가 조금씩 조금씩 소녀의 티를 벗어버리고,

기꺼이 다른 유혹에 물들 준비가 되어간다.

그래서 다른 것을 받아 들인 다음에 한숨지며 말한다.

'어차피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마음일 뿐이다.

진호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혜진을 보고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의 벗은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진호는 구태어 자신의 알몸을 감추려하지 않고 그저 담배갑을 찾아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다.

칙하고 성냥이 새벽빛보다도 더 잔인하게 별빛을 짓밟았고,

그 바람에 혜진의 눈에 맺힌 눈물이 더욱 아롱져 보인다.

"나 책임질 수 있어."

진호는 이런 말을 내뱉았다.

마치 중대한 결심을 한 양.

하지만 혜진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무엇을 책임지겠다는 것인지 조차도 모르겠다.

아마 혜진이 울고있자 후회심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했는 모양이다.

혜진이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는데 진호가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 끄더니

갑자기 혜진의 몸을 다시 껴안는다.

혜진은 그의 뜨거운 애무에 견디지 못하고 그저 속절없이 무너지는데

들창문에서는 새벽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진다.

찬란한 아침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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