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08. 애한의 감정

오늘의 쉼터 2015. 8. 29. 13:31

08. 애한의 감정

 

마음에 검은 그림자가 한없이 덮여 있어서 가슴 속이 마냥 어둡기만 한데,

찬란한 햇살이 비치는 것은 어쩐지 뭔가 불합리하고도 억울하다는 마음이 든다.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어두울 때면, 최소한 눈은 오지 않더라도 날이나 우중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윤경은 청소당번에 의해 치워지는 영민의 빈자리를 안타깝게 쳐다보고만 있다.

이제 영민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반에서 뿐 아니라, 이 학교에서 깨끗이 지워지는 것이다.

단 한 학기동안 짧게 왔다가 그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윤경은 뭔가가 가슴을 자꾸 찔러대는 것 같다는 느낌에 손을 가슴에 올려본다.

이제는 영민의 자욱을 현실에서 지운 채 그저 가슴에만 새겨놓을 뿐이었다.

윤경이 보거나 느낄 수 있는 영민의 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이다.

영민은 이렇게 먼 곳으로 희미한 미소만을 남긴 채 떠나가 버렸다.

흑! 왜 눈물이 날까?

가슴을 찌르던 감상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북받침으로 올라와 눈물 샘을 찔러댄 것일까.

윤경은 누가 볼까봐 창밖을 내어다 본다.

창밖에 남아있는 잔설이 왜 그렇게도 처량해 보이는 것일까.

그 창문으로 눈덩이를 던지는 영민의 영상이 새겨지고, 윤경은 그 영상을 잡으려고 주춤 창문으로 다가간다.

손을 대니 영상은 소스라쳐 사라져 버리고 그저 싸늘한 창문의 감촉만이 윤경의 가슴을 얼려 놓는다.

영민의 자리는 치워졌다.

아주 깨끗하게.

이제 영민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리도 없다.

하지만 윤경의 마음속에는 영민의 빈자리가 영원히 남아있었다.

이제 봄방학이 끝나면 학년이 올라가고, 돌아올 수 없는 영민은 그대로 머무를 것이다.

가슴속에서.

윤경은 성급한 여자아이들이 벌써 고무줄 놀이를 하는 것을 무심히 보면서 학교를 빠져 나간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면 유관순 누나가 생각납니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명랑해서 가슴이 더욱 아파온다.

윤경은 이층 자기 방에서 밖을 내어다 본다.

아랫동네가 아련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윤경의 방은 그저 밖을 내어다만 보아도 가슴이 상쾌하게 뚫려 있다.

아랫동네 윗동네 전쟁이 나서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돌을 던져, 가끔 유리창이 깨지는 수가 있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소동도 없는 조용한 동네였다.

봄날의 아지랭이가 마치 환희의 춤을 추듯이 끓어 오르고, 그 아지랭이의 윤무속으로 윤경은 아스라이 봄날의 꿈을 쫓는다.

윤경의 손에는 검은 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만년필이,

마치 깨끗한 눈동자의 영민이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처럼 윤경을 쳐다보고 있다.

윤경은 만년필의 중간을 돌려서 빼본다.

아직 한번도 잉크를 넣지 않은 고무튜브가 깨끗한 순결을 간직하고 있다.

윤경은 거기에 잉크를 넣으려 하다가 그만둔다.

그것은 자신이 아닌 영민이 처음 잉크를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윤경은 사각으로 투박하게 만들어진 모나미 잉크병을 쳐다보다가 책상 서랍에서 다른 만년필을 꺼낸다.

검은 만년필과 똑같이 생긴 빨간색 만년필.

윤경은 뚜껑을 열어서 글 한줄을 써본다.

'고영민! 언젠가 너는 이 만년필에 잉크를 넣을 거다.'

윤경은 무언가를 써보려 한다.

가능하면 시를 써보고 싶었다.

영민이가 읊을 수 있는 그런 시를.

'아지랑이는 내 마음도 모르고 한없이 피어 오르고....'

이렇게 쓰다가 글이 되지 않는다.

그저 '아지랑'이라고 수없이 써본다.

그러다가 만년필을 놓아 버린다.

시보다 자신의 감정이 더욱 짙었기에 차마 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모나미 잉크병의 뚜껑을 연다.

삐이하는 마찰음이 나며 잉크병은 고무마개만을 남긴 채로 속내를 보였다.

윤경은 조심스럽게 그 납작한 고무마개를 떼어서 뚜껑안쪽에 밀어 넣었다.

그러나 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무마개에 묻어있었던 잉크가 검지 손가락 끝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

하얀 피부에 묻어진 검은 잉크는 나름대로 완벽한 대비를 이룬 채 불길한 징조처럼 남아 버렸다.

그것이 불안해서 윤경은 후다닥 종이로 그것을 닦아내지만, 이번에는 잉크가 다 닦아지지 않은 채 넓게 묻어났다.

그것은 불길한 느낌이다.

마치 자신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심술을 부리는 마귀할멈처럼....

윤경은 고무튜브를 누르게 되있는 은색의 쇠붙이를 눌러 잉크를 넣어본다.

푸룩후룩 소리를 내며 마치 배곯은 아이마냥 만년필은 잉크를 잡아삼켰다.

포만감은 느끼는지 만년필은 약간의 잉크를 밀어내서는 앞에 있는 종이를 더럽혔다.

만년필에 잉크를 가득넣고서야 윤경은 약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조금전에 났던 만년필의 헛헛한 소리가 마치 영민의 배에서 끊임없이 들렸던 꾸룩대는 허기의 소리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잔뜩 먹어 포만감에 찬 느긋한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영민이 잉크를 넣지 않은 것은 그것을 받기 싫어서가 아니라 잉크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연필도 남이 버린 몽당연필을 주워 쓰던 형편이니, 잉크를 살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윤경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가 자신이 준 만년필을 쓰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싫기 때문이다.

윤경은 영민이 쓰던 몽당연필을 기억한다.

그의 손에서 간신히 잡혀있던 그 몽당연필은 '2H'라고 쓴 부분까지 깍여져 있었다.

윤경은 자신의 필통에 수없이 많이 채워져 있는 '문화연필'들을 노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윤경아, 노올자."

아랫집 인선이 목소리다.

하지만 윤경은 대답을 하고픈 마음이 없다.

그저 창밖만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인선이가 부르는 소리가 몇번 이어지더니 사라졌다.

잠시후 방문이 열린다.

"아니, 윤경이 너 여기 있었구나."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윤경이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하지만 윤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손여화는 딸애의 앞에 놓여진 노우트에 깨알같이 쓰여진 '고영민'이란 이름을 보고 애써 외면한다.

"윤경아, 사람이란 말이야. 잊을 것은 빨리 잊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단다."

손여화가 딸의 어깨를 두손으로 짚는다.

그녀는 딸의 마음속 떨림을 두손으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애는 그 애의 갈길이 너는 너의 갈 길이 있는 거야."

손여화는 이렇게 말하다가 흠칫한다.

예전에 했던 똑같은 말.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눈길은 바로 자신이 그 사람을 버릴 때 보여주었던 그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책망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가 없지 않았던가.

현실은 현실이고 낭만은 낭만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도 가슴이 쓰린 것일까.

손여화는 딸애의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는다.

"잊어라, 윤경아. 그 애는 멀리 떠났어. 하지만 먼 훗날 네가 큰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윤경이가 엄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 물기어린 눈동자가 '정말 그럴 수 있어요'라고 묻고 있었다.

"암, 그럴 수 있고말고."

이렇게 말할 수 밖에 더있겠는가.

하지만 손여화는 그것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희망이란 사실을 안다.

손여화 자신도 그런 부질없는 희망을 가져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것은 헛된 망상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면 마음도 옅어지고 그 당시 그렇게 간절했던 느낌도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다.

어떨 때는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아주 오랜 옛날에 꾸었던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희망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손여화가 그 극심한 열병을 속에다 숨긴 채, 문학이라는 열정을 끊어 버리고 그저 일상에 자신을 잊고 살고 있을 때,

그녀는 그 사람의 이름을 한 신문에서 읽고는 온몸의 피가 꺼꾸로 서는 것을 느꼈다.

'한지림.'

그 이름 석자는 그대로 비수처럼 그녀의 가슴을 쑤셔댔다.

6.25의 상흔이 이제는 가끔씩이라도 찾지 않는 포화맞은 오래된 건물의 흔적만으로 남아 있을 때,

손여화는 그녀의 작은 희망이 전혀 헛된 것이란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월북작가 명단의 중간 정도에 작은 글자로 적혀있던 그의 이름.

그것이 왜 그리 빨갛게만 느껴졌을까.

그래도 한 시대 카프문학을 대표했던 그의 이름은 이제는 입에 조차도 올리지 못하는 그런 것이 되어 버렸다.

손여화는 그가 활약할 당시 조악한 글자로 나왔던 신문에서 그를 평가했던 그 귀절을 잊을 수 없다.

'지림, 천재적 이념시인.'

그게 어쨌단 말인가.

차라리 순수문학보다도 더욱 못할 것이 이념시였다.

그리고 이제 그의 이름은 손여화의 가슴속의 시퍼런 무덤 안에서만 잠자고 있는 헛된 것이었다.

차 한잔을 마셔본다.

여태까지 꼭꼭 숨겨왔던 그 마음이 더 이상 숨을 곳을 찾지 못하고 난동질을 쳐대는 것 같다.

딸애의 감정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그 추억은 가슴 속 무덤에서 풀을 헤치고 나타난 것이다.

시는 옷을 입는다.

가슴 가득한 상처를 감추기 위해 옷을 입는다.

깨지고 터진 이념의 상처를 눈만 가리기 위해 옷을 입는다.

상처에서는 가식의 고름이 희망보다는 타협과 선택의 피가 우리의 선택은 항상 정당하지만

이미 그것도 선택된 가식의 옷일 뿐이다.

<한지림, 1948>

손여화는 그 시를 받으며 그것이 시가 아니라 손여화가 앞으로 갈 길을 예견해 준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손여화는 그 시에 걸맞게 타협과 선택으로 한지림을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어떠할 방도가 없지 않았던가.

그래. 6.25때문이었다.

한지림과 갈라서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그것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군사 분계선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그 시퍼런 총칼로 조국의 가슴을 두동강이로 난도질했던 그 분계선 때문이다.

그전에는 그래도 남과 북의 왕래가 가능했는데,

그 참혹한 이름의 군사분계선이 사상과 이념의 단절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남은 남, 북은 북으로 자신들의 진실을 만들어 갔다.

이념간의 대립이 극대화되어 가고 있을 때,

남한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하나의 이유만 가지고 대대적인 좌파의 탄압이 시작되었고,

그런 와중에 정권이나 권력, 또는 정치와 하등의 관계도 없는

많은 문학가들이 이념문학을 했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체포, 구금당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손여화는 그 서슬 퍼런 수색과 고발의 와중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를 버렸던 것이다.

아니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그런 위기의 시간에 손여화의 앞에 나타났던 진평산의 안전한 거처가 한지림보다도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이 사회가, 그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험악한 분위기가 손여화를 이끌었던 것이리라.

손여화는 눈을 꽉 감아본다.

잊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이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던가.

아니, 그게 아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자신은 그것을 잊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눈을 꽉 감아도 보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보기도 했지만

기억은 잔인하게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머리 속에서 떨쳐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정말로 오랜 만에 되뇌어 본다.

"한지림!"

그가 스르르 나타날 것도 같은 느낌으로 흐르륵 흐느껴본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다.

그가 나타날 수는 없다.

이미 뒤숭숭했던 6.25이후의 분위기에 못견디어 그는 자진 월북을 했고,

지금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없었다.

손여화는 딸애를 다시금 생각한다.

정말로 정감도 많고 감수성이 강한 애다.

오만철씨의 말을 상기한다.

'그놈이 말이지요. 아,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착한 놈인지 알았는데, 일하는 집의 물건을 슬쩍해가지고 도망을 쳤다지 뭡니까.'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손여화는 그 영민이란 아이를 생각한다.

왜 그 애를 생각하면 고상순과 한지림이 떠오를까?

이상한 연상작용이었다.

이제 오만철의 혈육이 아닌 이상 그 애를 찾을 길은 없다.

하긴 오만철이 한 말도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고 해도 그 애를 탓할 마음은 없다.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서 어떠한 짓도 할 수있는 동물이니까.

그 환경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그 환경을 이기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손여화도 그랬지 않았던가.

자신이 살기 위해 한지림을 헌신짝처럼 버리지 않았던가.

동심에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아이들은 어린 마음에 마치 그때의 감정으로 인해 자신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세월이라는 해결사는 그 새겨진 마음의 감정을 훌륭한 솜씨로 희석시켜 준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감정이 싹트면서 오래된 감정을 하나씩 죽여간다.

그러니 지금 딸애의 그런 감정을 통째로 도려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내버려 두면 그 꽁꽁 뭉쳐진 마음이 스르르 세월에 녹아 내릴 것이다.

손여화는 이미 식어버린 차 한모금을 입에 머금다가

차향이 막 입안에서 깨어지는 순간에 무언가를 느끼고는 흑 하고 숨을 멈춘다.

무언가가 마치 스쳐가는 전류처럼 머리속을 헤집고 지나간다.

그 연상작용.

영민이란 아이를 생각하면 고상순이란 시인이 생각나고,

그리고 한지림이 기억나는 그 연상작용이 확실한 해답이 되어 다가온다.

그 애의 눈동자였다.

그래. 그 영민이란 아이의 눈동자와 고상순시인과 한지림의 눈동자가 그렇게 닮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고상순이란 시인을 처음 보는 순간에 느꼈던 것이었다.

그 시인의 눈빛이 한지림과 닮아있었다는 사실은 아주 기묘한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갑자기 한지림의 체온이 순식간에 손여화의 가슴에 느껴져서 그녀는 비틀댄다.

흑! 강렬한 그의 체취가 그녀를 혼절시킬 듯이 다가왔다.

그 당시 손여화는 한지림이 고상순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던 것이 그의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인지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한지림은 자신과 똑같은 눈빛을 가진 고상순을 자신의 연인인 손여화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손여화는 각각 다른 부류의 두 시인이고, 서로 다른 얼굴과 체격을 가지고 있던 둘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동일한 느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느끼기는 했다.

아마 그 둘의 감정이 똑같은 세계를 지향하고 있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애한(哀恨)!

그것이다.

둘의 느낌,

아니 영민이란 소년이 보여준 느낌을 합하면 모두 셋의 느낌이 동일한 것이다.

가슴 속 깊이 깔려있는 인간 본성의 비애를 느끼고, 그것을 고도의 감정으로 승화시킨 그런 눈빛들.

그들만이 공유하는 세계에 대한 그들만의 눈빛이었다.

그렇기에 손여화가 한지림을 처음 만났을 때에 빠져들었고,

그렇기에 자신의 딸 윤경이 영민이란 소년을 보았을 때 그렇게 좋아했던 것이다.

하아!

손여화는 참을 수 없어서 숨을 크게 내쉬어 보지만

가슴에 막힌 것은 절대로 뚫리지 않은 채로 그녀에게 아픔만을 강요하고 있다.

혜진은 아이들이 노는 양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한고개 넘어갔다, 아이고 다리야. 두고개 넘어갔다, 아이고 허리야. 여우야, 여우야, 뭐하아니?"

"잠자안다."

"잠꾸러어기."

"세수하안다."

"멋재앵이."

"밥먹느은다."

"무슨 바안찬?"

"개구리 바안찬."

"죽었니, 살았니?"

아이들이 이렇게 물어놓고 숨을 죽이며 무슨 대답이 나올까 술래만 쳐다본다.

"살았다!"

술래가 후다닥 앞으로 뛰어 나왔고, 아이들이 와악하는 소리를 지르며 흩어져서 도망친다.

낄낄대는 웃음소리, 유쾌한 말소리.

하지만 혜진은 그런 것들이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혜진은 거의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혜진을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다.

단순히 죽을 뻔 했다는 이유 하나가 아이들에게는 마귀라도 낀 양 놀이에 끼워주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혜진은 약간 손이 시린 듯 깜장 스커트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본다.

뭔가 허전했다.

내려보니 구멍이 뚫려 손가락 두개가 댈롱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혜진은 그것을 보고 손가락을 고물고물 움직여 본다.

그러니 그것은 마치 검은 주머니에서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벌레같이 보였다.

혜진은 한참 동안 그렇게 그것을 바라보다가 그저 발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자그만 텃마루에 무슨 상자들과 보자기들이 잔뜩 쌓여있다.

응?

혜진은 무언가 해서 후다닥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여니 엄마가 무언가를 싸고 있다가 혜진을 보더니 활짝 웃음을 보낸다.

"혜진이 오니. 엄마 좀 거들어라."

"뭐 ..., 뭐 하는데?"

"우리 이사간다. 이런 지긋지긋한 철거민촌도 이젠 끝이야.

우리는 집으로 이사가는 거야. 방이 세개나 되는 집이야."

그말을 듣는 혜진이의 아래턱이 더덜더덜하고 떨렸다.

정신이 아찔해진다.

"기와집이라고."

엄마의 말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 그럼. 영민오빠는 ...?"

엄마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한다.

"또 그놈 소리냐. 그놈이 네게 뭐간디?"

혜진의 눈에서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가 주루루 굴러 떨어진다.

이사를 가면 영민이 돌아온다고 해도 절대로 다시 볼 수없을 것이 아닌가.

"엄마, 나 안가! 나 이사 안간다고!"

바락 소리를 질러본다.

하지만 소리를 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이곳에 머물러 있다면 영민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이 혜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사를 가면 영민이 돌아온다고 해도 혜진이 간 곳을 몰라서 찾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면 어떡하나. 이렇게 이사를 가면 어떻게 하나?

오만철은 구루마에 짐을 가득 싣고서 헉헉대며 이사짐을 날랐고,

혜진은 그나마 이사를 멀리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언젠가 영민이 돌아온다면 동네 아이들이나 동네 어른들이 혜진네 집을 가르켜 줄 수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이사가는 것이 신기한지 자꾸만 안쪽을 기웃댔고,

혜진은 기웃대는 아이들마다 자기가 이사가는 곳을 알려준다.

그래야만 영민이 찾아 올 수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진 채.

이사를 끝내고 나니 벌써 캄캄한 밤이었다.

혜진이 아직도 도배가 덜말라 풀냄새가 풋풋하게 나는 자그만 방에 누워 영민을 생각해 본다.

그때 일이 마치 허공에 떠다니는 작은 깃털과도 같이 스르르 스르르 부유하고 있다.

영민이 봉투붙이는 풀을 먹고 널브러져 죽어가고 있을 때,

밤새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이 흐륵흐륵 영민의 생명은 속절없이 약해져 갔고,

혜진은 안타까운 마음에 간절히 하늘에 기도를 했었다.

혜진은 손을 들어 손바닥을 쳐다본다.

그때 등불에 데어 상처가 난 곳은 이미 아물어 거의 흔적도 없지만,

혜진의 가슴에 난 상처는 너무나 큰 흔적을 남기고 혜진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육체는 항상 상처를 잊지만, 그 상처를 죽어도 못잊는 것은 육신이 아닌 정신이었다.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의 빈정대는 소리와 아빠의 후회어린 목소리.

"그렇게 말한 것이 잘한 거라니까요. 그래야지 다시 찾으란 소리를 않죠."

"하지만 영민이 놈이 그런 짓을 했다고 말했으니 영 마음이 찜찜하구만."

"그런 생각하실 거 없어요. 그놈이랑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나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할 것은 없었는데. 그 놈때문에 이렇게 살게 되었는데 그런 말을 했으니 ...."

"그놈때문에 살다니요? 이게 어째 그놈때문이에요. 우리 복이지."

엄마의 앙칼진 목소리가 혜진의 가슴에 쑤셔박히고

혜진은 가슴이 아파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모로 누워서 몸을 웅크린다.

어디선가 있지도 않는 기러기가 끼룩끼룩 울어대는 것만 같았다.

   

'소설방 > 그리운 세월'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그리움  (0) 2015.08.29
09. 불타버린 동심  (0) 2015.08.29
07. 빈자리  (0) 2015.08.29
06. 첫발  (0) 2015.08.29
05. 그대 마음에 별이 보일 때  (0) 2015.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