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10. 그리움

오늘의 쉼터 2015. 8. 29. 13:38

10. 그리움

 

그리움은 마음 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곤한 여름날에 화드득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소나기처럼,

이미 눈앞엔 존재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흙탕물흘렀던 고랑처럼 가슴속에만 깊히 새겨져 있는 것이 그리움이다.

어린 날의 추억이라든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모두 한군데 뭉뚱그려져서 지금은 그 감정이 딱히 어떤 것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다만 남은 것은 그리움이란 감정만이 가슴 속 깊숙히 숨어있다가

이따금씩 이빨을 드러내 그의 마음을 할퀴어 대곤 하는 것이다.

이런 그리움이 몽땅 내면 속으로 감추어진 이유는, 사회에 너무도 빨리 발을 디디뎠고

그리고 그것에 익숙하게 적응해야만 하는 간절함때문이었다.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나이가 어렸기에 금은세공일은 본격적으로 하지는 못하지만,

이제 영민은 이미 세공해 놓은 브로지 등속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 도금을 해온다든지,

아니면 광을 내는 정도의 일은 했다.

오늘도 영민은 브로지 등속을 갖고 나가면서 그때 철성이의 유혹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 유혹을 이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돈을 갖고 싶다는 유혹보다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욕구가 더욱 강했던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시를 쓰고 싶었다.

윤경이도 혜진이도 그리고 계선생님도 보고 싶었다.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그렇게 쉽게 되돌아갈 수있다는 말은.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엄마의 눈동자도.

그리고 영민은 그 잔인한 유혹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며칠 후에 철성이는 혼자 돈을 훔쳐 달아났고, 그 이후로 철성이를 본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벌써 3년 전.

영민은 자신의 공장일에 충실했고, 그저 먹고 자는 것뿐이 안되는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가끔 영민은 세공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는 기술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자신도 돈을 가질 수 있다면 사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책들이었다.

활자로 되어서 지식을 전달해 주는 책들.

왜 그것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영민은 그토록 책을 읽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다.

하지만 여태 영민은 월급을 받은 적이 없었다.

도금하는 집은 청계천 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위치해 있었고,

영민은 그 중간쯤에 위치한 책방을 늘 기웃거렸다.

서점의 창가에는 마치 건드릴 수도 없이 먼 거리에 있는 듯, 근엄하게 정리된 채로 꽂혀있다.

영민은 그 간절한 염원과도 같은,

아주 깊은 바램을 가지고 손을 뻗어 밖에서는 만져질 수 없는 그 책들을 어루만져 본다.

하지만 항상 닿는 것은 차가운 유리창의 감촉 뿐이었다.

'시를 읽게 될 때 너는 세상을 알게 되고, 시를 깨달을 때 너는 너무나 속된 인간이 되고,

시와 숨쉴 때 너는 더이상 돌이킬 수없는 길을 갔고, 그리고 시를 쓸 때에 너는 너를 알게 될 거다.'

아버지가 영민에게 했던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영민은 시를 읽고 싶었다.

아니 지식을 읽고 싶은 것이다.

아니 그것도 아니라, 정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먼 거리를 가진 바램이다.

아득히 멀어서 포기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아쉬운 그런 바램말이다.

영민은 고개를 떨구고서 그저 발길을 옮긴다.

누군가가 등뒤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깔깔 웃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바로 운명일까?

도금하는 커다란 유리상자 안에서 브로지가 뽀글뽀글 물방울을 토해놓으며 금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영민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자신도 저렇게 쉽게 금으로 입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이 초라한 모습을 벗고 찬란한 모습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

도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책방앞에 멈추어 선다.

어디선가 '아이스께끼'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 소리는 영민에게 아무런 흥미를 주지 못했다.

그래도 옛날에는 그 소리만 들어도 뛰어나갔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환청일 따름이다.

거친 멜빵이 달린 파란 나무통을 메고 아이가 하나 지나간다.

그 흐느적거림이 처량하게 느껴진다.

"아이스께끼나 하드 사려!"

아이는 악을 쓰고 있고, 영민은 아이의 처량한 뒷모습에서 자기의 모습을 비쳐본다.

다떨어진 검정 고무신, 기계충때문에 땜통이 군데군데 나있는 짧은 까까머리,

반바지도 긴바지도 아닌 잠방이가 잘못 깁은 탓인지 비뚤빼뚤 꿰메져 있고,

때굿물에 얼룩진 종아리 아래로 까맣게 낀 때.

으흑!

영민이 숨을 크게 들이 마시며 눈을 멀뚱 뜨니 텅빈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빈 거리에 아이 하나가 혼자서 놀고 있다.

가끔씩 주위를 살피는 아이의 눈에는 외로움이 배어난다.

굳게 다문 입술에 어리는 가혹한 절망감.

아이의 몸에서 아우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아이는 절망감을 못견뎌서 온몸으로 놀고 있었다.

영민은 눈을 지그시 감아본다.

아이의 눈동자가 뚜렷이 자신에게 각인되어 오고

영민은 그 눈동자가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알고 있다.

영민은 처량한 눈빛이 되어 허적허적 골목을 따라 공장으로 돌아간다.

저녁상에 왠일인지 동태찌게가 올라왔다.

기술자들이 재빨리 건더기를 확보했고,

영민은 그나마 국물이라도 기름기가 있는 것을 먹게 되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보리밥을 동태국물에 말아 후루룩 쩝쩝 후루룩 쩝쩝하고 먹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영민은 고개를 든다.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고, 모두들 오랜만에 밥상에 오른 기름진 국물을 떠먹기에 정신이 없다.

영민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숟갈을 뜨다가 헉하고 숨이 멈춘다.

윤경이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아니 윤경이의 얼굴이 아니라, 아버지의 얼굴이다.

아니 그것도 아니라 엄마의 측은한 눈빛이었다.

그들은, 아니 한얼굴은 영민이를 연민의 눈동자로 쳐다보았고, 영민은 그것이 슬퍼서 흑하고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개돼지처럼 코를 먹이에 처박고

오로지 살기 위해 허겁지겁 주린 창자를 채우는 짐승같은 몸짓이 서글퍼진 것이다.

하지만 영민은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눈물이 떨어진 국물을 입안에 가득 넣고는 먹는다.

그리움이 입안에서 소스라쳐 부서져 버렸다.

책방 진열대 앞에 한 소녀가 앉아 있다.

소녀는 쎄라복을 입고 머리는 양갈래로 곱게 땋아 앞쪽으로 늘여 뜨렸다.

소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입가에 미소가 풋풋했다.

영민은 소녀를 그대로 마주 보지 못하고서 눈길을 내리는데

소녀의 무릎에 거칠게 만든 책 하나가 놓여있었다.

영민은 진열장을 쳐다볼까 하다가 소녀가 앞에 있기에 고개를 숙이고 그저 지나친다.

소녀가 무슨 말을 할듯 할듯 하다가 입을 다물고

영민은 소녀의 얼굴에 핀 바알간 홍조를 지나가는 눈길로 훔쳐본다.

아마 날씨가 더워서 그럴 것이다.

화선지에 싸인 자색 수정 알이 큼직하게 박혀있는 반지 서너개를 꺼내서 기계를 돌린다.

우웅소리가 나며 기계는 회전을 시작했고, 영민은 반지에 광약을 약간 묻혀 기계에 댔다.

파다닥 소리가 나며 반지는 시꺼먼 광약을 밀어내면서 찬란히 빛을 발했다.

영민은 반지에 광을 내면서 아까 보았던 쎄라복의 소녀를 생각하고는 얼굴이 뜨거워 진다.

분위기가 닮아서인지 꼭 윤경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휴!

영민의 입에서 안타까운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그것은 마치 지금의 삶에서 이루어졌던 일이 아니라,

아득한 전생에 있었던 도저히 명확하게 기억할 수 없는 추억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어린 날의 기억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는 세월때문에, 그저 현실이 아닌 환각처럼 생각되어진다.

윤경, 혜진.

그들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을까.

아마 윤경이도 지금은 아까 본 것과 같은 쎄라복을 입고 여학교에 다니고 있겠지.

혜진이도 졸업할 때가 되었고.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영민은 반지에 광을 내야만 하고 잠시 후면 어두컴컴한 공장으로 기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들은 찬란한 햇볕 아래서 그들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 아닌가.

'탱'하는 소리와 함께 반지가 손에서 튀어나가 벽에 부딪힌다.

"이런!"

정신을 빼고 있는 사이에 손을 잘못 놀려서 반지를 놓친 것이다.

'이런 실수는 없었는데....'

영민은 이렇게 생각하며 반지를 주워든다.

거세게 돌아가는 기계에 퉁겨나갔기에 반지는 한쪽이 우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영민은 이내 그것을 잊고 다시 윤경을 머리에 떠올려 본다.

돌아오는 길에도 소녀는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득한 세월을 밟고 그래온 것과도 같은 모습으로.

영민은 시선을 돌린 채로 소녀의 앞을 지나친다.

소녀가 빤히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귀밑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그런데 그의 귀에 소녀의 소리가 들려왔다.

"얘!"

영민이 무의식 중에 고개를 들다가 소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급히 눈길을 돌린다.

가슴이 콩닥콩닥하고 뛰어댄다.

"너, 이 책 읽어 보지 않을래?"

책을 읽어보라는 말에 혹해서 소녀를 쳐다본다.

해맑은 미소가 싱그럽게 다가온다.

영민은 소녀가 들고있는 책에 눈길을 준다.

'폭풍의 언덕.'

처음 들어보는 책 제목이다.

영민은 갈증을 느낀다.

그것은 지식에 대한, 아니 글을 읽고 싶다는 엄청난 목마름이다.

소녀를 다시 쳐다본다.

웃고 있고 영민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녀는 마치 윤경이와 똑같은 모습으로 장갑을 내밀고 있었다.

탁 뿌리쳐야만 한다.

하지만 영민은 허깨비처럼 스르르 다가가서 소녀가 내미는 장갑을 받아든다.

장갑은 어느 새 딱딱한 책으로 변해 있었다.

냅다 달린다.

소녀가 무어라고 하려고 하다가 그저 손만 흔든다.

영민은 마치 소녀가 따라오는 것 같아서 무작정 달렸다.

뒤에서 송아지의 울음소리가 음머하고 길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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