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11. 영원한 방관자

오늘의 쉼터 2015. 8. 29. 14:13

11. 영원한 방관자

 

충격이 컸다.

시가 아닌 소설이란 형식의 책이 이렇게도 가슴을 쥐어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껴본 것이다.

그 소설은 음울하게 떠올라서 흐르륵 가슴을 찢어놓고서 쌩쌩 부는 바람으로 사라져 버린다.

암담하고 음울하고도 슬픈 소설이다.

남자 주인공의 고뇌와 고통이 영민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져서 눈물을 뿌릴 때도 있었다.

밤새 뒤척이며 영민은 폭풍의 언덕에 올라가 울부짖는 악몽에 시달린다.

영민의 작은 몸을 날려 버리려고, 아니 영민의 감정을 말려 버리려고,

언덕에서는 쉴 새없이 폭풍이 불어오고,

영민은 자신의 감정이 꼬치꼬치 말라 그대로 폭풍과 함께 회색빛 골짜기로 팽개쳐질 것같은 느낌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영민은 그 언덕에서 쪼그리고 앉아 마냥 엄마만을 불러댔다.

늦게 잤고 또 악몽에 시달린 탓인지, 영민의 얼굴은 마치 오래 띄어 놓아 부르튼 된장처럼 보였다.

제대로 잠을 못잔 탓에 머리 속에 마치 안개가 낀 양 어리벙벙한 채로 영민은 머리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책방이 가까와 오자 언제 그랬는지 정신이 맑아지고 가슴이 두근댔다.

영민은 책을 다시 한번 쳐다본다.

금방이라도 그 책속에서 남녀 주인공이 뛰쳐나와 이국적인 모습으로 눈물을 뿌려댈 것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방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영민은 책을 돌려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때문에 근처를 어슬렁댄다.

하지만 소녀가 온다는 아무런 약속도 없었는데 그저 이렇게 기다린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행동이다.

그리고 책방앞에서 소녀를 기다리려고 어슬렁거린다는 자체가 수치스러워서 영민은 얼굴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한참 그렇게 서성대다가 그대로 발을 돌린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며칠이 지나도 소녀는 보이지 않았고,

영민은 매일 들고 다녀서 이제 책장에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책을 허전하게 쳐다만 본다.

한 계절이 깨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계절이 때가 되면 돌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계절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오는 계절에 의해 밀려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리고,

그 빈자리에 다른 계절이 선뜩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진 계절은 허리를 부여잡고 꺼억꺼억 울면서 오는 계절을 원망하며 세월의 궤적을 따라

사라지는 것이다.

밀려나지 않으려고 바둥대며 안간 힘을 쓰는 계절이 세월의 문턱에 걸려 허덕이는 바람에,

이미 나뭇가지에는 계절의 상흔이 시작되었는데도 영민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진다.

아니 그때문이 아니라, 극도의 긴장감이 영민에게 땀을 강요한 것이리라.

영민은 처음으로 책방으로 머뭇머뭇 들어선다.

마치 유령이 미끄러지듯 문턱을 넘듯이 스르르 영민은 아득한 정신으로 책방으로 빨려 들어갔다.

책방 주인은 영민을 보자 마치 무엇을 살피는 듯한 눈빛으로 노려본다.

영민은 그 눈빛에 이미 주눅이 든 몸이 더욱 움추려졌다.

"무얼 찾니?"

그 말은 네가 들어올 곳이 아닌데 왜 들어왔느냐 하는 비난의 말처럼 들렸다.

책방에 들어온 것은 책을 찾기 위함이 아니던가.

영민은 언뜻 책 한권을 뽑아 들었다.

어려운 한문 글자가 눈에 어지럽다.

'花蛇集.'

영민은 그저 책장을 넘긴다.

너무 당황해서였다.

주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민은 은근히 마음은 켕기지만 그대로 책을 들여다 본다.

"너는 그를 아니?"

주인의 말이 다소 위협적인 것 같이 들렸다.

영민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영 말이 생각나지 않아 답답했다.

그때 주인의 손이 가만히 영민의 어깨에 올라왔다.

"갖고 싶으면 가져가."

영민이 깜짝 놀라 주인을 돌아본다.

그의 미소가 인자했다.

자신은 책방 주인이 자신의 외모때문에 책을 훔쳐가지 않나 의심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미당은...."

주인의 얼굴이 영민이 하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변한다.

영민은 책장을 넘기는 통에 그 안에 화사집을 지은 지은이가 서정주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조그만 아이가 이런 식으로 말하자 주인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해방전에는 유학생계열의 시인으로 해방후에는 청년 문학가 협회의 일원으로

김동리, 조연현 등과 청록파 시인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후에 자연 서정파인 청록파와는 구별되게 생명파의 시를 주로 썼고,

이 생명파에 속하는 시인으로는 이형기, 박재삼, 김남조, 고은 등이 있습니다."

주인의 얼굴이 놀람에서 찬탄으로 바뀌고 있다.

"너, 너 몇살이니?"

영민은 말없이 다시 책을 바라보고 있고, 주인은 얼른 자신이 그런 것을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지?"

영민은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주인은 영민이 침묵하자 그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읽고 싶은 책이 있니?"

아, 정말로 책이 읽고 싶었다.

몽땅 다.

"이것 한번 갖다 읽어라."

영민은 주인이 건네주는 책을 보고는 화사집을 다시 꽂아 넣는다.

갑자기 주인이 걸죽한 목소리로 시를 암송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정지용의 향수였다.

갑자기 혜진이의 생각이 밀물처럼 몰려든다.

얼뚱한 황소가 왕퉁같은 눈망울을 말뚱대며 내는 음메하는 소리,

그리고 그 곁을 흐르는 냇물, 뚝방 길에는 이름모를 풀꽃들과 잔목등속들이 파릇파릇 얼굴을 내밀고,

뚝방 저쪽 편에 벌판에서는 농부들의 몸동작이 느엿느엿 길게만 이어가는 그런 광경.

'오빠, 울지마!'

금세 귀여운 혜진이가 불쑥 등뒤에서 세월을 딛고 나타나 이렇게 말할 듯도 한데,

뚝방 길을 따라 하염없이 멀어져 간 엄마의 손짓이 마냥 서러웁게 나타나 어른대고,

멀리서 동무 하나 없이 혼자서 노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마냥 눈물에 어린다.

흑!

주인이 내미는 책에 영민의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영민은 그것을 보고 당황해서 후다닥 손등으로 책위에 떨어진 눈물자국을 지우는데,

벌써 누런 각대기로 만들어진 시집의 책장은 몇줄기 눈물이 주욱 그어져 있었다.

시집도 눈물을 흘렸는가?

"가져 가서 읽어 보렴."

주인의 말소리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다만 영민의 마음에 나타난 방어반응일 뿐이었다.

주인의 목소리는 오히려 자애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의 '향수' 낭송이 아직도 귀에 얼얼하게 들려오는데,

영민은 그가 내미는 책을 그저 말없이 받아 들었다.

어떤 감정이 싸아하고 시집을 건네받는 손길에 전해진다.

'광복후 대표 시인선'이라는 조금은 애매한 제목의 시집에는

정말로 시인 중에서는 대표라고 할만한 시인들의 작품이 빼곡히 수록되어 있었다.

영민은 그것들을 읽으면서 만해의 '탄식'보다는 김춘수의 '의미'가 더 좋았고,

이상의 '난해 모호함'보다는 윤동주의 '기원'이 더욱 감미롭게 느껴졌다.

시집을 건네는 영민의 눈동자를 책방 주인은 아주 지그시 바라본다.

그리고는 시험이라도 하는 듯이 시 한구절을 암송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그것은 대구를 하라는 것이다.

영민은 자기 아버지가 종종 이렇게 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책방주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영민은 자신이 그 시를 읽기만 했는데 벌써 암송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시는 그런 것이란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아름다운 것."

그렇다.

시란 깨끗한 풍경화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보는 것과도 같다.

턱 한눈에 그 풍경화를 사진찍어 눈을 돌려도 머리속에서 그 풍경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그런 것.

"이름이 뭐지?"

"고, 영, 민."

띄엄띄엄 말한다.

주인이 다시 시 한 수를 암송한다.

"황량한 벌판에서 들쥐를 잡아 그 꼬랑지에 불을 붙인다.

꼬랑지에 불이 붙은 들쥐는 뜨거움을 참지 못해 줄행랑을 치고

우리는 그 모습이 우스워서 마냥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들쥐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벌판에서 몸부림을 치고,

끝내 불쥐가 되어 빵소리를 내며 산채로 터져 버린다.

벌판은 불쥐가 지펴놓은 불에 의해 날름날름 불혀를 내밀며 타오르고

우리는 불붙은 벌판에서 고래고래 악을 써댄다.

그렇게 우리의 산하는 불타고 있었다."

무언지 모르지만 굉장히 잔인한 느낌이 드는 게 시도 아닌 것 같았다.

"한지림이라고 들어봤니?"

한지림?

전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우리는 이념의 대립이란 허울좋은 이름으로 이렇게 우리의 산하를 불지르고,

아직도 불타고 있는 우리의 산하에서 그 뜨거움에 아우성을 치고 있다는

그의 외침이 생생한 '불쥐'란 시지."

영민은 그 시가 주는 충격이 흉칙해서 싫었다.

그것은 너무나 잔인한 얼굴을 하고서 이를 드러낸 채로 낄낄대는 악당같은 것이다.

"이런 시들은 어떤 잔혹한 감정을 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전달하지.

그와 함께 어떤 경계심을 일깨우게 하려는 이념적 계몽시야.

특히 지금같이 사회적 모순이 팽배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시들이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키거든."

영민은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멀뚱히 뜨고 있다.

사회적 모순이 어떤 의미를 말해주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나라를 남의 나라에 넘겨주는 어리석은 일을 거듭하고 있어."

영민은 그가 하는 말이 약간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북에서는 소련에게, 남에서는 미국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그들에게 빌붙어 사는 자들에게만 엄청난 부가 주어지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거지.

그래서 부를 얻은 자들은 우리 힘없는 국민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거야."

영민은 그의 비애어린 통념이 싫었다.

그의 얼굴은 시가 아니라 이제는 비난섞인 싸움꾼의 모습인 것 같다.

영민은 그저 방관자인 채로 책방 주인을 바라볼 뿐이다.

그는 영민의 방관에 열이 식었는지, 아니면 영민이 어려서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자신의 말을 그치고는 그저 책 하나만을 건넨다.

"너는 공부를 해야 될 놈이야. 기억해라.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꿈이다.

어떻게 공부를 하겠는가?

이미 영민은 학교와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지 않은가.

영민은 책을 받아들고 표지를 본다.

여태까지 본 것과는 영 틀린 책이었다.

이상한 문자가 구불구불 쓰여져 있다.

영민은 책장에 조그맣게 쓰여있는 한글을 읽었다.

"펜맨쉽?"

전혀 생소한 말이다.

"네가 공부를 하려면 꼭 필요한 책일 거다.

그리고 앞으로는 영어를 모르면 잘살기 힘들거야. 하지만 꼭 알아두어야 한다.

모든 공부는 그것을 받아 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야.

영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영어를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이야."

책방 주인이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고, 영민은 터덜터덜 책을 들고 밖으로 나선다.

무언가가 강력하게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그것이 무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며칠 동안 도금할 것이 없어 그저 공장안에서 일하던 영민은 가끔 어두컴컴한 공장의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다 본다.

창밖에는 홍건히 세상에 가득한 햇빛이 조그만 공간에 까지

자신의 햇살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듯이, 마냥 창문가에만 머물고 있다.

풀무에 불을 붙여 도가니로 가져가던 한 기술자가 공장안으로 들어서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을 보고

손을 멈춘다.

사내들은 아무런 인사도 없이 그저 묵묵히

그러나 아주 위압적인 자세로 공장안으로 들어서서는 마치 시위를 하듯이 서서 있다.

"누구신지?"

한 기술자가 조심스럽게 묻는데 한 사내가 되레 묻는다.

"여기 고영민이란 아이있나?"

사뭇 위협적인 말이고, 그 말을 들은 영민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는다.

"왜 그러시는데요?"

주인여자의 말이 아주 조심스럽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조사할 게 있어서 그래."

숫제 반말이었다.

영민이 여기 나있어요 하고 나서려고 하는데 옆에 있는 기술자가 그의 옷을 잡아 당긴다.

어두웠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의 행동이 그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 임마."

속삭이는 소리가 긴장에 차 있다.

"그 애 여기서 일 안해요."

주인여자가 눈치 빠르게 대답한다.

"일 안해?"

"그래요. 이런 곳에서는 아이들이 하루에도 몇번씩 바뀐다고요."

사내는 무엇을 더 알아내려는 듯이 주인여자를 노려보았지만

주인여자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아서 마주 쏘아본다.

"혹시나 오면 이곳으로 연락해."

사내가 쪽지를 남기고는 다른 사내들에게 고개짓을 하자

사내들이 위압적으로 공장안을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국가 보위부 안전 수사과 XXX.'

주인여자가 가슴이 쿵덕쿵덕 뛰는지 자신의 가슴을 한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렸다.

"영민이 너 무슨 잘못한 일있니?"

하지만 영민은 자신이 무엇을 해서 그런 사람들이 찾아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짚히는 것이 있었다.

영민이 후다닥 밖으로 뛰어 나갔다.

역시 그랬다.

서점은 마치 빗장이라도 지른 듯이 굳게 닫혀 있었고,

유리창에는 시뻘건 글씨로 경고문이 부착되어 있다.

영민은 누가 보지는 않나 경계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경고문을 읽는다.

몇몇 사람들이 경고문을 읽고 있었기에 그리 표시가 나지는 않았다.

'서점 폐쇄 공고'

'서점주인 양영주는 불온문서 은닉 살포와 판매 혐의로 구속되었고,

그 불온서적 판매의 온상인 서점을 폐쇄함.'

영민이 천천히 몸을 돌리는데 그 앞에 한 사내가 막아선다.

흑!

영민의 가슴이 덜컹 무너진다.

아까 그 사내들 중에 하나였다.

영민은 자신이 왜 이렇게 성급하게 달려왔을까를 후회한다.

사내의 손가락 사이에 이글거리는 담배불꽃이 금방이라도

영민의 눈동자를 태워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민은 긴장감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이 그대로 막힐 것같은 생각에 그저 눈을 감는다.

하지만 사내는 말이 없이 그저 영민을 막아서만 있었다.

"이름이 뭐니, 꼬마야?"

한참만에 꺼낸 사내의 질문이다.

아마 사내는 영민을 찬찬히 살펴본 뒤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리라.

"혁이에요. 김혁."

신기하게 거짓말이 나왔다.

사내의 싸늘한 안광이 썬글라스를 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얼쩡대지 말아라."

아마 사내는 이런 쪼그만 아이가 서점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영민은 사내가 몸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조사하는 사이에 걸음을 옮긴다.

뒤가 켕겼다.

마치 누군가가 쫓아올 듯이.

영민은 공장쪽으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만약에 공장에 돌아간다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것이다.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마치 험악한 죄를 지은 것처럼 몸이 떨리고 불안했다.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 속으로 한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한 세월을 넘어서 이곳에 온 것과도 같이 다른 세월을 향해 한 걸음을 가는 것이다.

안개가 이는 것 처럼 왔다가 바람이 부는 것처럼 가는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남산의 곁 사면으로 기울어 가는 황혼은 엄마의 고운 붉은 볼을 닮아 있다.

곱지만 왠지 모르게 서러웁게 보이는 그런 고요 속에서 황혼은 자애로운 온기가 느껴질 만도 한데,

그저 석양은 자꾸만 멀게만 멀게만 사라져 간다.

잡을 수가 없기에 안타깝고 느낄 수가 없기에 서럽고 들을 수가 없기에 슬픈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져 버려진 느낌이다.

누구도 영민을 기억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저 영민은 이 세상의 한켠에서 아무도 느낄 수없이 그렇게 있는 것이다.

가슴에서 마냥 타고 오르는 극심한 외로움에 영민은 헉헉하고 눈물짓는다.

갈 데도 머물 곳도 없엇다.

이 세상에서 한 군데도 갈 곳은 없는 것이다.

그저 하늘을 날아가는 이름모를 새처럼 그렇게 잊혀져 가는 것이다.

아니 새가 아니라, 그 새가 떨어뜨린 깃털보다도 못한 존재다.

꺼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허공을 날다가 그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떨어져서 썩어지는 것이다.

아무도 안개가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듯이 영민이 사라지는 것을 서러워할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렇게 땟국 꾀죄죄한 몰골로 남산의 기슭을 허위적 허위적 올라갔다.

남산의 밤은 물빛 안개와도 같이 순식간에 다가선다.

아니 물빛이라기 보다 더욱 짙기에 서러운 빛이다.

그 침침한 물빛 어둠은 오갈 데 없는 영민의 온몸을 마치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려는 듯이

영민의 주위에 가득찼다.

그리고 극렬하게 다가오는 헛헛한 외로움. 목 을 트려고 캑캑대 보지만 아무 것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아니 누군가라도,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이라도 옆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이렇게 슬프지는 않을텐데.

말할 수 있는 대상, 감정을 줄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있다면 이렇게 섧지는 않을텐데.

땅바닥에서 부스스 일어난다.

노을은 한없이 슬프게만 보이는데, 그 래서 자꾸만 자꾸만 영민을 잡으려고 끌어대는데,

영민은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든 가야만 한다.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면,

영민도 노을 빛에 물들어, 온몸이 설움으로 바뀔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었다.

바람처럼, 성난 야생마처럼.

하지만 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 처지 아니던가.

더우기 며칠 굶은 탓에 허기가 져서 발을 내디딛기 조차도 힘이 들었다.

그러나 영민의 등짝을 밀어대는 그 매몰찬 밤에 못이겨서, 영민은 허영청 허우적 앞으로 발을 옮긴다.

그의 등뒤에서는 노을이 아주 고운 자태로 영민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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