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07. 빈자리

오늘의 쉼터 2015. 8. 29. 13:28

07. 빈자리

 

 

"오오오 세에드 무비, 올 웨이스 ?미 크라이...."


축음기에서 알지도 못하는 여자 가수가 쉰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고,

창에 서린 성애가 마치 보석의 단면을 확대경으로 확대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윤경은 방안에서 엄마와 아빠가 하는 대화를 엿듣고 있다.


"허허, 그 사람 참. 사람을 함부로 쓰는 게 아니라니까."


"하지만 여보, 수위 정도야 아무나 써도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소사도 아무나 하나? 또 지금있는 소사는 어떡하고?"


아빠가 입맛을 쩝쩝 다시지만 아무래도 엄마의 고집을 꺽을 수 없다는 것을 잘알고 있다.


"그럼 잡역부라도 써볼까?"


"그래요. 그거라도 괜찮아요."


윤경은 그말을 듣고 좋아서 박수를 치려다가 그만 멈춘다.

밖에서 엿들었다는 것을 들키기 때문이다.


'영민 아빠가 일을 하게 되면 영민이도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래서 학교도 같이 다닐 수 있고.'


윤경은 이렇게 생각한다.

영민의 집사정을 모르는 윤경으로써는 영민과 혜진이 친남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혜진아빠가 일자리를 갖게 되면 가정이 나아져 영민이도 학교에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학식날 윤경은 영민이 없는 텅빈 자리를 가슴에 구멍이 뻥뚫린 채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왜 저렇게 그애의 자리가 마냥 처량하게만 보일까?

윤경은 영민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곧 돌아올 거야.

영민 아빠가 돈을 벌거니까.

윤경은 이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종내 영민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윤경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 같아 주저했지만 할 수없이

혜진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겨울 햇살이 교실 담벽에 바로 비치지도 못하고 어긋나 창백한 은빛으로 빛날 때,

윤경의 물음에 혜진은 그저 눈물만 흘린다.

그것을 보면서 윤경의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오빠는 안와. 내가 언니에게 말했잖아."


갑자기 눈에 노랑나비가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노랑나비는 곧장 윤경의 머리속으로 파고 들어와 온통 머리 속을 노랗게 물들인다.

어지럼증이 몰려온다.


"왜? 왜 못와?"


윤경은 그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확 토해냈다.


"네 아빠가 취직이 되었잖아."


혜진은 벌써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제 아빠가 윤경의 도움으로 취직을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도 오빠는 안와. 오빠는 영원히 안와."


혜진의 눈물방울이 굵어진다.

겨울 햇살의 잔영이 혜진의 얼굴에 안타까이 머문다.


"언니 몰랐어?"


무엇을?

윤경은 이렇게 눈으로 묻고 있다.


"영민오빠는 우리 친오빠가 아니야."


쿵!

윤경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내 명찰을 봐, 언니."


여태까지 한번도 유심히 보지 않았던 혜진의 명찰이다.

윤경은 그것을 보면서 마치 자신의 눈이 잘못되었나 생각하며 눈을 크게 뜬다.


'오혜진.'


영민의 이름은 고영민, 혜진은 오혜진. 둘이 성이 틀리다.

그러니 영민은 다시 올 수없는 것이다.

친자식이 아닌 아이를 형편이 풀렸다고 다시 불러들이지는 않을 것이 뻔하다.


"그,... 그럼, 이제는...."


윤경이 미처 끝내지 못하는 말에는 헛헛함이 묻어났다.

혜진의 눈물은 겨울햇살에 더욱 반짝이며 굵어진다.

겨울 하늘이 가을 하늘보다 더 차갑고 파랗게 보이는 것은,

겨울 하늘은 창백한 슬픔을 품고 있어서일 것이다.

깊고 푸른 하늘이 마냥 슬퍼보이는 까닭은

그것을 올려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슬픔을 하늘에 보태기 때문일 것이다.

슬픔을 느끼는 사람마다 하늘을 올려다 보는 이유는 아래를 내려다 보면

눈물을 보일까봐 그런 것일 게다.

그리고 겨울 하늘이 그렇게도 높아 보이는 것은 슬픈 눈망울로 아득히 올려다 보기 때문일 거다.

윤경은 겨울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 보면서 눈물이 흐를까봐 고개도 돌리지 못한다.

한순간에 몰려왔다가 슬픔만을 남긴 채 말없이 사라져가 버리는 그런 파도처럼,

그렇게 영민은 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윤경처럼 이렇게 저 하늘 아래에서 하늘을 한없이 올려다 보고 있을 것이다.


안돼.

윤경은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는다.

그저 허무하게 떨어져 버린 낙엽과도 같이 바람이 부는대로 나둥그러지는 그런 모습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최소한도, 최소한도 잘가라는 인사말이라도 해야 했다.

윤경엄마는 딸애의 표정이 마치 이미 다 커버린 여자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흠칫했다.

생각이 많으면 나이가 든다고 했던가.

요즈음 아이들은 마냥 성숙하기만 했다.

손여화 자신이 첫사랑을 느낄 때가 중 2학년때였는데,

지금은 국민학교 때에 첫사랑을 느끼는 소녀들이 많다고 한다.

세대가 변하고 있는지 아니면 인간의 사고가 변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왜, 영민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니?"


윤경의 커다란 두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하다.

그러나 윤경은 기어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손여화는 그런 딸애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너무도 슬플 때면 오히려 그 슬픔을 꾹 눌러 참아 눈물을 보이지 않는 강한 기질.

하지만 손여화는 자신의 그런 기질을 혐오할 때도 있었다.


"곧 돌아올 거야. 그 애 아빠가 직장을 잡지 않았니."


손여화는 이렇게 윤경을 달랬지만 윤경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는다.


"고영민은 안와요."


안와?

왜?

손여화의 눈이 이렇게 묻고 있다.


"걔 아빠는 친아빠가 아니래요."


"그래?"


손여화가 비로소 영민이 돌아올 수 없다는 의미를 알았다.


"엄마가 어떻게 좀 해봐요."


딸애의 얼굴이 그렇게 처량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손여화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옛 생각이 나서였다.

그래, 그런 것이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이렇게 간절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마치 변색되는 색갈처럼 그렇게 마음도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간절하고 짙은 감정이 마냥 물색처럼 옅어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감정은 아주 오래묵은 퇴적물처럼 가슴속에 깊숙히 쌓이는 것이다.

손여화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상처입은 딸애를 위해서.

진평산씨는 자신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오는 손여화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아, 아니? 당신?"


손여화의 빨간 캐시미어 롱코트가 눈이 부실 지경이다.


"왠 일로 회사에 다 오고 ...?"


회사는 속물 냄새가 난다고 절대로 발도 들이지 않았던 아내였다.

그런 아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스스로 회사에 들렸다는 사실이

진평산에게는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다.

손여화는 차를 마시면서 불쑥 남편에게 묻는다.


"그 사람 일 잘해요?"


진평산이 밑도 끝도 없이 묻는 말에 그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왜 요전에 제가 부탁해서 취직한 사람 말이에요."


"아하, 오씨 말이군."


손여화는 그가 고씨가 아니라 오씨라는 것을 새겨 듣는다.


"착실하더구만. 그래서 다른 일을 주려고 생각하고 있지. 헌데 그건 왜?"


"아니에요. 그저 먼 친척이기에 물어봤어요."


손여화는 이렇게 얼버무려 버린다.

돈과 권력만을 제일인 양 아는 남편에게 딸애의 애틋한 마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어쩐지 맞지 않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럼, 한번 만나보려오?"


"그럴까요?"


손여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한 채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오만철은 작업복에 토시를 낀 채로 나타났는데,

낡은 면장갑이 구멍이 나서 손가락이 몇개 장갑밖으로 나와 있었다.


"부르셨다고요?"


오만철은 자리가 불편한지 두손을 맞잡고 그저 머리를 숙인다.


"그래. 앉게."


오만철이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괜찮다고 하지만 진평산이 권하자

그저 엉덩이만 살짝 붙인다.


"우리 안사람일세."


오만철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꾸벅한다.


"어이구, 사모님이셨군요."


그 모습이 너무나 어색해 보여서 손여화가 손을 젓는다.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그냥 앉아 계세요."


진평산이 그 모양을 보고서 농담처럼 말한다.


"우리 집사람이 그러는데 오씨가 먼 친척뻘 된다는구만."


오만철이 자신이 그런 친척이 있었나를 생각하며 어리둥절해 하는데 손여화가 묻는다.


"그런데 아저씨 댁에 영민이란 아이가 있었지요?"


오만철이 후딱 정신을 차리고서 손을 부빈다.


"그랬지요."


진평산이 아이이야기가 나오자 지루하다는 듯이 밖으로 나갔고

손여화는 말하기가 편해졌기에 그저 솔직히 묻는다.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죠?"


"잘 모르겠습니다. 제 아내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오만철이 자신없다는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린다.


"아저씨가 월급을 더 받는다면 그 애를 다시 데려와서 공부시킬 수 있나요?"


오만철의 눈이 확 떠진다.

지금 받는 월급으로도 전보다 확 다르게 생활이 나아지고 있는데

월급을 더 받는다면 생활이 아주 나아질 것이다.


"그러믄요, 사모님."


오만철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저 고개를 주억댄다.

오만철은 집으로 가면서 돼지비게 한덩어리를 사서는 입맛을 다셨다.

기름기있는 것을 먹어본지 꽤 오래되었기에 돼지비게의 맛을 기억하고는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김치를 쑹덩쑹덩 썰어서 함께 넣고 바글바글 끓이면 기막힌 김치찌게가 될 것이고,

소주를 한잔 걸치면 아주 좋을 것이다.

철거민 촌으로 들어서는데 아이들이 말타기를 하고 있다.

마부가 된 놈은 민첩해 보였지만 말이 된 놈은 어쩐지 둔해보인다.

말은 뒷발질도 하지 못하고 벌써 등위에는 세명의 아이들이 올라타서 곧 찌부러질 듯이 보인다.

오만철은 행여 아이들이 노는데로 가로질러 가다가 뒷발에 채일까봐 길가로 붙어서 걸었다.

우거지 김치찌게가 구수하게 냄새를 풍기며 개다리 소반에 오르자,

오만철은 입맛을 다시며 막소주 한잔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 구부러진 양은 숟가락을 들어서 국물을 퍼먹었다.


"아, 뜨!"


짜릿하고도 싸릿한 맛이 혓바닥을 톡 쏘면서 입안에 가득찼다.

오만철이 한술을 더 뜨면서 옆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그 영민이라는 놈 말이요."


갑자기 영민이 이야기가 나오자 아내는 인상을 쓴다.


"그 놈 얘기는 왜 또 꺼내요?"


가뜩이나 영민이 이야기가 나오면 혜진이에게 시달려서 죽을 것 같은데

왜 그 이야기를 꺼내냐는 표정이다.


"그 놈 데려와야겠어."


"뭣하러요?"


아내의 말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오만철은 다시 김치찌게를 뜬다.


"오늘 우리 회사 사모님을 뵈었어. 아마 영민이 놈과 친척인 것 같더라고."


아내가 그 말을 듣고는 난감해 한다.


"그래요?"


"그놈을 데려다가 공부시키래. 내 봉급을 올려주겠다고."


아내의 얼굴이 그말을 듣고는 창백하게 질린다.


"이, 이거, 어떡하지요."


"왜 그래, 당신?"


오만철은 돼지 비게 한조각을 입안에 넣고 우물댔다.


"어디 있는지 몰라요."


"뭐야? 아니 왜?"


오만철은 아내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묻는다.

아내의 말로는 근처 공장에서 먹고 자며 일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영민이를 데리고 간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런 일이?

오만철이 못믿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무나 일할 아이가 필요하다고 해서 골치아픈 놈이니 처분한 거지요."

 

"뭐라고? 이런 맹추같은!"


갑자기 언성이 높아지고 입맛이 싹 가신다.

아내가 자신을 속인 것보다는 내일 당장 회사 사모님에게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봉급을 더 받기는 고사하고 회사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어떡해든 알아봐!"


오만철이 숟가락을 소반에다 탁하고 내려 놓는다.

방밖에서 혜진이는 자기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훔쳤다.

그래. 영민 오빠는 그렇게 간 거야.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혜진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먼 하늘에서 깜박 영민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혜진은 한아름 설움을 안고 제 방으로 사라지듯이 기어들어 갔다.

어른들은 이상했다.

별거 아닌 것 때문에 영민오빠를 보내 버린 것이다.

영영 못돌아 오는 곳으로 말이다.

혜진은 방에 웅크리고 앉아 영민과 함께 불렀던 노래를 조그만 소리로 불러본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사알자, 뜰에는 반짝이는 그음모래빛...."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이제 밤마다 해주던 영민오빠의 이야기도 둘이 같이 불렀던 노래도 다 떠나간 것이다.

학교도 혼자 다녀야만 한다.

혜진은 흑하고 눈물짓다가 방안에 흩어진 공기알을 주워본다.

친구가 없었던 영민이와 혜진은 가끔 방안에서 공기놀이를 하곤 했었다.

그 공기돌이 차가운 느낌으로 손에 다가온다.

영민의 온기가 떠났기에 그렇게 차가운 것이리라.

혜진은 꺽기를 해본다.

무심하게.

영민은 꺽기를 할 때 꼭 5개를 몽땅 손등에 올렸었다.

그리고는 한번에 5년씩 먹어갔다.

혜진은 기껏해야 3년.

눈물이 난다.

혜진은 눈물을 손등으로 문지르고는 다시 공기돌을 굴린다.

1단, 2단, 3단....

하염없이 집어 올려지는 공기돌은 혜진의 슬픔들인 것만 같다.

누런 창호지가 무엇이 슬픈지 혜진보다도 더욱 울어대고 있다.

잉잉잉잉. 잉잉잉잉.

혜진은 공기돌을 스윽 밀면서 방바닥에 누워 버린다.

어디선가 추위에 지쳐 울부짖고 있는 강아지의 비명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온다.

아침에 깡보리밥에 어제 끓였던 김치찌게를 먹는데,

입안이 껄끄러워 혜진은 그저 한술을 뜨다가 숟가락을 놓아 버렸다.


"왜 그러냐?"


아빠가 훌훌 날아가는 보리밥을 양은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뭉치다가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혜진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밥상머리에서 물러났고, 엄마의 퉁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저 년이 요즘 배가 불렀다고요. 먹지도 않고, 말도 안하고, 참 내."

엄마는 혜진이 왜그런지 잘알고 있었기에 빈정대 본다.

혜진은 그런 엄마가 미워서 눈을 흘겼다.


"저 년이 어디서 흰눈을 뜨고 그래!"


엄마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혜진은 모른 체 밖으로 나와 버렸다.

오른손 엄지검지의 끝에 물을 묻히는데

그 차가움이 마치 유쾌함처럼 혜진의 온몸으로 달려든다.

아, 아픔은 기쁨인가?

이런 이상한 생각이 든다.

굵은 왕소금을 물이 묻은 엄지검지에 꾹 찍어 묻히고는 입속에 집어 넣어 이빨을 푹푹 닦는다.

금세 얼었던 손가락이 입안의 온기에 싸아하고 녹아내렸다.

혜진은 마치 누구에게 화풀이라도 하듯이 사납게 손가락으로 이빨을 문질러댔다.

거품은 하나도 일지 않았지만 혜진은 입안에 양칫물을 그대로 펍하고 뱉아냈다.

혜진은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펌푸 대가리를 만져본다.

쩍하고 손바닥이 펌푸에 붙어 버린다.

그것은 마치 아주 불길한 징조와도 같아 소름이 쫙 끼쳤다.

손바닥을 급히 떼자 그 위에 하얀 성애가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진다.

그리고 펌푸에는 자신의 지문이 그대로 얼음이 되어 박혀있다.

지문은 어떤 성스러운 부호와 같았다.

그것도 하얀 성애로 남아있는 그 지문들.

영민이 있을 때 수없이 많이 펌푸질을 했으니 저런 지문들이 펌푸에 수없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혜진은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영민의 지문이 남아있을 법한 곳에다 대본다.

쩍하고 손바닥이 달라 붙었고, 그 아픔이 찌르르 혜진의 가슴에 전달되어 온다.


어헉.

참을 수없는 고통. 이것이 바로 영민의 고통이 그대로 혜진의 가슴에 전달되어 오는 것이다.

혜진은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그대로 펌푸를 잡고 있다.

몸이 저절로 흐드득 떨어댔다.

뚝방을 지나는데 멀리 눈밭에서 따오기 한마리가 외로이 서있다.

새하얀 눈밭에 멀뚱히 서있는 잿빛 따오기는 철을 잃었는지 길을 잃었는지 그저 슬프게만 보인다.

혜진은 불현듯 그 따오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고픈 충동을 느꼈다.

얼마나 외로울까, 저 따오기는.

마치 그 새는 혜진엄마가 떠나 보낸 영민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는 그런 슬픔을 간직한 모습.

흑! 다시 눈물이 솟는다.

혜진은 뚝방 아래로 내려가서 자신도 모르게 불쑥 발을 눈밭에 디민다.

눈 아래 숨겨져 있던 빙판이 혜진이 발을 디밀자 반항하듯이 찡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따오기가 흠칫 뒤를 돌아본다.

혜진은 넋이 나간 듯 다시 한발을 더 내민다.

찌찡하는 소리가 마치 어떤 잔혹한 운명의 계시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혜진은 오로지 영민과 닮은 그 따오기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찌찌직.

얼음판은 아스라히 비명만 질러댄다.

그것은 엄마에게 두드려 맞는 영민의 신음소리이다.


"오빠, 울지마. 오빠 울지마."


혜진은 이렇게 중얼대며 자꾸만 자꾸만 따오기에게로 다가간다.

그때 기어이 빙판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치 허방다리처럼 밑으로 쑤욱 꺼져내려간다.

흑! 혜진은 그제서야 제 정신이 돌아오는지 신음을 훅 삼켰다.

그러고 보니 어느 새 눈위에 있었던 따오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혜진은 얼음판 한 가운데 서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뚝방에서 와르르 몰려 내려오는 것이 희미한 꿈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다리가 후둘후둘 떨렸다.


쨍! 쨍!

얼음이 갈라지려는지 발밑에서는 얼음이 질러대는 비명이 요란하게 들린다.

아이들이 마구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는데 혜진의 다리는 움직일 수도 없이 얼어붙었다.

세상이 온통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고, 시간은 이 순간에 영원히 멈춰버린 듯 하다.

혜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몰려들었고 아이들이 안타깝게 소리친다.

하지만 혜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빙판은 서서히 아래로 꺼져 들어갔다.


허허헉!

혜진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없었다.

이렇게 쑤욱 꺼져 들어가면 그대로 깊은 내에 빠져 죽을 것이다.

하늘이 빙빙돌며 영민의 모습이 노랑노랑 나타났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혜진은 그것이 영민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혜진아, 납작 엎드려. 그리고 기어가는 거야. 오빠가 있잖아. 힘을 내.'


혜진은 귓가에 윙윙거리는 환청을 들으며 몸을 빙판에 납작 엎드렸다.

섬뜻한 차가움이 얼굴에 다가왔다.

몸을 엎드리자 하중이 약해졌는지 빙판은 더이상 꺼져들어가지 않았다.


'자, 기어가는 거야. 오빠가 있잖아.'


혜진은 온몸을 얼음판에 붙인 채로 마치 미꾸라지가 진흙밭은 꿈틀대 빠져나가듯이

꿈틀꿈틀 앞으로 나아간다.

뚝방아래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저 혜진을 바라보며 손을 모으고 있다.

혜진의 입에서 더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그리고 혜진은 오로지 앞으로 가야한다는 마음으로 그저 꿈틀꿈틀 기어갔다.


야아!

마침내 아이들이 환호성이 들렸고 보고 있던 어른 한명이 후다닥 혜진의 손을 잡아 빙판에서 끌어냈다.

그제서야 혜진은 울음이 터졌다.


흑흑! 흑흑흑! 엉엉!

아득히 먼 어떤 곳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고, 모든 것이 전부 낯설게만 느껴진다.

엉엉!

혜진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고, 어른들의 혀차는 소리가 환청같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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