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구걸
멀리 누렁 황소가 달구지를 끌고 덜그럭 덜그럭 오고 있다.
툭박하게 만들어진 달구지는 끼르륵 끼륵 바퀴소리를 내면서 일렁일렁 끌려온다.
쩔그렁쩔그렁 울리는 황소의 방울소리는 두고온 아기 송아지를 하염없이 불러대는지
애잔하기 그지없고,
퉁방울같은 두눈에는 누군가를 한없이 그리워하는 염원이 깃들어져 있는 것 같았다.
방울소리는 영민의 귓바퀴를 아련한 그리움으로 물어뜯고는 속절없이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영민은 그 아련한 안타까움에 그만 울어버린다.
왜 황소가 떠났는데 이렇게도 슬퍼지는 것일까.
영민은 이제 자신이 운다는 사실이 더 슬퍼져서 마냥 울어 버렸다.
짤랑 짤랑. 짤랑 짤랑.
어디서 나타났는지 방울소리는 다시 귓전에 가득하고 영민은 그 소리에 반가와
그저 후닥 눈을 뜨고 만다.
새벽의 어스름 달빛이 영민의 얼굴로 성큼 다가서고,
그 어스름 여명 사이로 지게를 진 사람 하나가 새벽 공기를 가르고 걸어가고 있다.
"두부 사아려! 따끈따끈한 두부 사아려!"
영민은 그 소리를 듣고 침을 삼킨다.
아직도 침을 삼킬만한 감각이 남아 있던가.
그의 눈에 나무 모판에 들어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두부가 삼삼하게 그려진다.
하얀 광목으로 싸여진 두부모판을 거꾸로 놓은 다른 모판 위에 올려놓고,
모판만을 위로 올리면 광목무늬가 새겨진 약간은 누런 빛깔의 두부가 빠져 나오고,
영민 엄마는 그것을 한모나 두모만 사서 잘라, 정성껏 간장에 졸여내곤 했다.
아니 졸이지 않아도 두부는 그저 생것을 간장에 찍어 먹어도 맛이 있는 음식이었다.
영민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는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벌써 새벽을 깨우는 온갖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골목길을 헤집고 지나쳤다.
조간신문을 돌리는 아이들, 두부장사, 숯이나 연탄장사,
콩나물장사들이 골목길에 흔적을 남긴 채 여명속으로 바삐 사라진다.
청소 구루마를 끄는 청소부의 몸짓이 새벽길에 가득찬다.
컥컥!
한 데서 잔 탓인지 잔기침이 나왔다.
영민은 이제 쪼그라질대로 쪼그라져서 허기도 느끼지 못하는 배가죽을 한번 추스려 보았다.
움푹 들어간 배안에서 내장이 잡힐 것도 같다.
여명을 등뒤로 하고 영민은 거의 쓰러질 듯이 비틀대면서 비탈길을 내려갔다.
싸한 새벽 바람이 우하하하고 다떨어진 넝마옷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뜨거운 햇살이 마치 영민을 말려 죽이려는 양 잔혹하게 내리쬐었고,
영민은 허기와 피곤에 절은 상태로 이대로 북어처럼 말라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늘에 노랑나비가 아롱다롱 돌아다닌다.
그것은 현기증의 색깔이었다.
영민은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하늘에는 노랑나비와 함께 잔솜같은 풀씨들이 서로를 놀려대며 깔깔거리고 날아다닌다.
그것이 영민의 어지럼증을 더욱 심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한참을 담벽에 기댄 채로 그렇게 앉아 있었다.
갈증이 난다.
하지만 일어설 힘도 없이 모든 것이 귀찮기만 했다.
이대로 몸이 스르르 꺼져버려, 저 하늘에 나는 솜털같이 변해서, 가고 싶은 곳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다.
영민의 눈에 어떤 눈동자가 하나 보인다.
하지만 영민은 그 눈동자에 초점을 맞출 수가 없어서 몇번이고 고개를 흔들어야 했고,
마침내 그 눈동자는 어떤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는 빡빡머리에 기계충에 파먹은 데다가 비듬이 엉켜붙어 있었고,
검은 물을 들인 바지는 몇번씩이나 기웠는지 너덜너덜했으며, 커다란 워커를 신었다.
한참을 들여다 보던 아이는 영민이 자신을 쳐다보자 말을 건넨다.
"행님아, 니 배고프나?"
영민이 그저 힘없이 아이를 쳐다보았다.
"잠간 기다리레이."
아이가 쭈그리고 있던 몸을 펴는데 덩지는 영민이보다도 더 컸다.
아이는 후다닥 사라지고 영민은 다시 노랑 현기증에 시달린다.
아이는 다쭈그러진 깡통에 자장면 등속을 가져왔다.
영민은 먹을 것을 보고도 식욕이 일지 않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묵으라, 행님아."
아이가 적극적으로 권하지만 영민은 헛구역질만 해댔다.
"니 많이 굶었제?"
말도 할 수없이 영민은 꺽꺽댔다.
아이가 안쓰러운 표정을 짓더니 말한다.
"예서 쬐메만 기다리라."
서있을 힘도 없는데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다시 사라졌다.
한참만에 아이는 손에 병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칠성사이다'란 글씨가 현기증을 일으킬 만도 했다.
별이 일곱개나 돌고 있으니 말이다.
"이거 마시레이."
먹는 것은 잘 안되었지만 마시는 것은 조금 나았다.
영민은 한모금을 마시고 톡하고 쏘는 사이다의 매콤함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만다.
"다 마시라."
영민은 마치 그것이 엄마의 젖인 양 쫄쫄 빤다.
눈에서는 철철 눈물이 흐른다.
왜 우는지도 모르는 채로. 사이다를 한 병 다마시고 난 후
얼마 기다린 다음 아이는 다시 손에 들고 있던 깡통을 건넨다.
"인자 쬐메 묵어봐라."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다.
영민은 아이가 건네는 깡통을 들고서 손을 그 안에 담근다.
손가락에 이미 불어터진 굵은 면발이 걸려 나왔다.
영민은 그것을 잡고서 쫄쫄 몇가닥을 빨아 먹었다.
아이가 물끄러미 영민의 먹는 양을 지켜보면서 말한다.
"내는 장현이다."
영민은 아이를 쳐다보지 않는다.
쳐다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울 아부지는 6.25때 꾀뢰군과 쌈하다 다쳤다 아이가.
그라서 일도 몬하고 집에만 계시다가 뱅이 나서 돌아가셨다 아이가. 나가 태어나던 해에 말이다."
장현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다.
"나가 5살인가 되던 때에, 울어무이랑 나캉 옷을 살라꼬 시장에 가지 않았나.
근데 억수로 사람이 많았는데, 근데...."
장현이가 숨을 고르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어무이 손을 놓았던기라. 사람이 억수로 많았는데."
영민이 자장면 먹던 손을 멈추었다.
"그라서 어무이를 찾을라꼬 점도록 시장을 돌아다녔다 안하나.
울면서 울면서 어무이를 불렀는데도 어무이는 아무데도 없었던기라."
영민이 장현의 손을 덥석 잡았고, 장현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청계천 다리 아래에서 그들은 모여 살고 있다.
질서없이 마구 모여 살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그들에게도 엄연한 규율과 질서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리는 그런 아이들.
바로 거지들의 세계였다.
장현이 영민을 데리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자, 처음 보는 외부인을 보고 아이들이 몰려 들었다.
영민은 감히 그들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만한 용기가 없었다.
아이들은 마치 금방이라도 영민에게 달려들 듯이 그를 노려보고 서있었고,
그중에 나이든 듯한 청년 하나가 으르렁댔다.
"그 새끼 누구냐, 짱현아."
장현은 그저 씨익하고 웃는다.
"야는 내 행님이다. 깡행님."
깡이라고 불리운 약간은 마르고 성깔있게 생긴 청년은 영민을 잡아 먹을 듯이 노려본다.
"정말이냐?"
"맞다 안카나. 나가 어릴 때 헤어졌던 행님이라카이."
깡이 영민에게서 무엇을 찾으려는 듯이 훑어 보았고,
영민은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그저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다.
"좋아, 네 형이라니 봐준다."
그 말은 영민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장현이 그말을 듣고 이내 영민의 손을 잡아 끈다.
온통 연탄재와 쓰레기로 채워져 있는 그런 곳에 거적떼기로 바람막이나 해놓은 곳이
장현이 자는 곳이다.
영민은 그런 곳으로 장현을 따라 기어 들어갔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인들 하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살아남는 것에 있었다.
구걸, 도둑질, 날치기, 폭력도 마다 않는 것이 이들이 하는 일이다.
장현은 영민을 위해 동냥을 해서 먹을 것을 구해왔고,
가끔 도둑질이나 쓰리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주워오기도 했다.
영민은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장현이만을 따라다녔을 뿐이다.
"행님아, 음식점을 가도 맛이 택도 없는 집에 가야 한다 아이가. 그런 집에는 말이다,
배리는 음식도 억수로 많은기라."
장현은 영민에게 하나하나 사는 법, 아니 살아 남는 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영민에게는 장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의 공기는 수정같은 이슬을 함박 머금고 있다가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에게
여지없이 습기를 나누어줄 정도로 청명했다.
영민은 장현을 따라 아침을 짓는 집으로 구걸을 떠난다.
새벽의 골목길은 마치 자신이 헤쳐 나가야할 인생의 혼잡한 미궁과도 같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비웃음을 보였다.
영민은 그런 미로가 보기 싫어 가끔씩 눈을 찔금찔금 감아 보지만 자신은 여전히
미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굴뚝을 잘보레이. 얜기가 막 올라오는 집은 파이다.
안즉 밥이 안된기라. 얜기가 쬐메만 나고 굴뚝이 땃땃한 집이 기인기라."
장현이는 이렇게 가르쳐 주면서 한 집을 골라 문앞에 선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소리를 흉내내어 소리친다.
"한 술줍쇼, 네?"
영민은 장현이가 내는 그 처량한 소리에 뼈가 시려 흐드득 떨어 버린다.
장현은 몇번 더 소리치다가 영민을 쳐다본다.
"행님아, 같이 좀 해 도!"
하지만 영민은 종내 입을 다물고 있고, 장현이가 할 수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소리친다.
"한 술줍쇼, 네?"
잠시 후에 삐꺽하는 소리를 내며 나무대문이 열렸고, 장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깡통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혀차는 소리와 함께 밥 한덩이가 퉁하고 깡통안으로 떨어진다.
"고맙슴다!"
장현이 고개를 꾸벅댔다.
영민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이런 일들이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왕밤같이 불거져 나온 보리밥풀을 손으로 떠서 입안에 넣으며 영민은 눈물을 훔친다.
왜일까?
모든 것이 자신과 벗어난 별도의 일처럼 자꾸만 자꾸만 주위에서 헛돌고 있다.
구걸을 하고 혹시 뭐 얻어 먹을 것이 있나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 버렸다.
항상 그렇듯이 점심에는 집집마다 찬밥으로 점심을 떼우기 때문에 밥얻기도 쉽지가 않았다.
영민은 장현이를 따라 그저 묵묵히 걷고만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된다는 생각도 없이.
갑자기 장현이가 우뚝 멈추어섰고, 아무런 생각없이 뒤를 따르던 영민이 그의 등에 부딪혔다.
응?
무슨 생각을 하긴 했던 것 같은데 부딪히는 통에 모든 생각들은 후다닥 사라지고 말았다.
영민이 그대로 멈춰어 선 장현이가 왜 그랬나 알아보려고 하는데 앞에서 험한 소리가 들려온다.
"야, 씹새들."
영민은 그 소리를 듣고 이미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장현이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와 이라노, 행님들."
길을 막아선 아이들은 제법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그 중의 한명은 어깨에는 넝마망태를 한 손에는 커다란 집게를 들고 있다.
다른 손은 천천히 흔들고 있는데 손가락 사이에는 더러운 담배꽁초가 누런 진액을 보이며 타들어간다.
"니들 어디있냐?"
아이 중 몸집이 약간 큰 아이가 어슬렁 다가오며 이렇게 물었다.
그애의 손에는 넝마를 줍기 위한 갈고리가 들려있다.
아마 이들은 근처 넝마주이패들인 것 같다.
장현이가 그 상황에도 얼굴에 미소를 띠며 능글맞게 말했다.
"조 아래 산다 아이가."
몸집이 큰 애가 으르렁댄다.
"야, 이 씹새야. 여기가 누구 구역인데 함부로 들어오냐?"
장현이는 상황을 가늠해 본다.
큰 청년 이외에도 애들이 모두 다섯명.
자신은 기회를 봐서 후다닥 들고 뛰면 되지만, 길도 모르는 영민은 아마 잡혀서 반쯤 죽을 것이다.
이 구역이 그들 구역이라면 함부로 도망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장현이가 작은 소리로 영민에게 말한다.
"행님아, 뒤로 냅따 뛰거라."
그러나 영민은 자신이 장현이를 두고 혼자 도망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행님아, 모하나?"
그래도 영민은 그대로 장현의 뒤에 서있다 .
마침내 아이들이 다가왔고 둘을 빙 둘러싼다.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몸집 큰놈이 앞에 서있다가 기회를 보고서 먼저 긴 갈고리를 장현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으럇!"
장현이 직선으로 자신의 얼굴을 향해 험하게 그어져 오는 갈고리를 몸을 굽혀서 피했고,
갈고리가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는 순간 장현의 몸이 그대로 공중으로 차올랐다.
그리고는 그의 앞발이 정통으로 놈의 턱주가리를 갈겼다.
우헉!
"행님아, 내빼라!"
그 기회를 이용해서 도망치라고 소리치지만 영민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다시 동그랗게 둘을 둘러싸고, 장현이 거친 욕을 뱉어 냈다.
"이런 씨발."
영민은 도망은 치지 않았지만 겁이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의 마음 속에는 두 마음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
차라리 아까 장현이의 말대로 도망칠 걸 하는 후회심도 들었다.
넝마주이들은 제각기 한손에는 집게나 갈고리 또는 꼬챙이를 들고 있다.
한번이라도 맞으면 살점이 찢겨져 나갈 것이다.
장현이는 미제 분유통에 철사로 연결시켜 만든 동냥깡통을 마치 흉기처럼 들고서 주위를 노려본다.
어차피 도망치기는 글른 일이니 한판은 벌여야만 했다.
하지만 영민이 걱정이었다.
"행님아, 잘보다가 내뺄 수 있으믄 퍼떡 내빼야 한데이."
그 말에 긴장감이 배어있다.
장현이가 흘끗 영민을 쳐다보았는데 영민은 자신이 겁을 먹고 있는 얼굴이 들킬까봐 숨을 멈춘다.
하지만 이미 장현이는 알아챘을 것이다.
"이 새끼!"
왼쪽에서 먼저 찝게가 날아왔고 장현이는 먼저 그것을 깡통으로 돌려치며 막는 순간
재빨리 찝게를 휘두른 아이의 몸쪽으로 바싹 파고든다.
본능적인 동작.
한번 공격이 빗나가면 언제나 헛점이 노출된다는 것을 장현이는 잘알고 있었다.
너무 갑자기 자신의 몸에 가까이 다가오니 아이가 깜짝 놀라는데 장현이의 주먹이
그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퍽! 아야이!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질 때, 오른쪽에서 다른 한 명이 몸을 휙 날려온다.
그러나 그 아이가 다리를 차기도 전에 장현이의 오른발이 그 아이의 무릎을 턱하고 막는다.
아이가 공격의 단이 끊어지자 땅으로 비칠대며 내려서는데,
순간적으로 장현이의 옆차기가 그 아이의 배에 사정없이 꽂혔다.
으헉!
영민은 그것을 보고 있다가 장현이의 싸움솜씨에 경탄을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불이 번쩍 일며 정신이 띵해져서 땅바닥에 꼬꾸라졌다.
이상하게도 한방을 맞았는데 아프지가 않고 그저 정신만 멍했다.
그런데 영민이 쓰러지자 다시 한 명이 영민을 통째로 밟으려는 듯이 몸을 붕 날렸고,
영민은 위험하다고 느끼면서 옆으로 마구 몸을 굴렸다.
그런데 다른 쪽에 있던 아이가 영민의 옆구리를 냅다 걷어찼다.
어억!
숨도 쉬지 못할 것 같다.
온 세상이 노래졌다.
허리가 결려서 마치 새우처럼 구부린 채로 웅크리고 있다.
"행님아, 야, 이 존마새끼가!"
장현이가 몸을 날려서 다시 영민을 공격하려던 애의 면상을 두발로 갈겨버렸다.
으다아고!
영민이 핵핵대며 숨을 골랐다.
"행님아, 뛰라!"
점점 더 일행이 불어나고 있다.
아마 근처에 있던 패들이 연락을 받고 모여드는 것 같았다.
"빨리 내빼라 안카나!"
영민이 후다닥 한쪽으로 달렸고,
그를 막으려고 하는 아이가 장현이의 공격을 받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영민은 죽어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하늘이 노래지고 창자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에 영민은 그 자리에서 푹 꼬꾸라져 버렸다.
어디로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눈앞에는 노랑 개똥벌레의 불빛같은 불꽃들이 아롱댔다.
영민은 헉헉대며 땅바닥에 길게 누워 버렸다.
옛날에는 개똥벌레가 그래도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아버지와 풀밭에 나가 놀다가 하염없이 먼 곳만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등뒤에서
노랗게 켜지는 그 신비스러운 불빛.
영민은 그때 살며시 아버지의 등으로 다가가
아버지의 등에 앉은 그 개똥벌레가 사라질까봐 조심하며 떼어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해도 손을 대자마자 개똥벌레의 불빛은 그대로 사라졌고
영민은 사라진 불빛이 안타까와 눈을 감고 말았었다.
응?
영민이 후다닥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이미 밤이 오고 있다.
아늑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요한 밤이 그저 스르럭 스르럭 거리에 뿌려지고 있다.
장현이는?
갑자기 장현이가 걱정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나자마자 자신이 장현이를 거기에 홀로 내버려 두고 혼자 도망쳐 왔다는
죄책감이 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않았던가.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의 몸도 지킬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장현이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영민이 후다닥 일어섰다.
한번 가보아야만 한다.
장현이가 거기서 피를 뿌리고 쓰러져서 영민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만약 장현이가 어떻게 되었다면 각설이패들을 끌고 그들에게 쳐들어가야 한다.
영민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는 자신이 달려왔다고 생각되는 길을 따라서 부지런히 뒤짚어갔다.
간신히 길을 찾을 무렵 누군가가 골목에서 후다닥 뛰어나왔다.
미로형 도시의 골목에서 누가 뛰어나오는 것은
마치 아무 것도 없었던 공간에서 뭔가가 확하고 나타나는 놀라움을 준다.
"행님아!"
"장현아!"
장현이었다.
그가 바삐 영민의 손을 잡고서 달린다.
"빨리 온나."
영민도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다.
백열등이 희미하게 켜있는 가로등 아래에서 비로소 멈춰서서 장현이를 쳐다본다.
싸움이 치열했든지 장현이의 얼굴도 많이 상해있었다.
"행님, 니가 그리로 올 쭐알고 나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많이 다쳤구나."
갑자기 영민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이런 밥통 행님. 가자 마."
장현이도 마음이 이상한지 고개를 돌렸고
영민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장현이를 따라 걸어갔다.
'소설방 > 그리운 세월'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 개똥지바퀴 (0) | 2015.08.30 |
---|---|
13. 한많은 생 (0) | 2015.08.30 |
11. 영원한 방관자 (0) | 2015.08.29 |
10. 그리움 (0) | 2015.08.29 |
09. 불타버린 동심 (0) | 2015.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