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개똥지바퀴
영민과 장현은 자신들이 쓰던 온갖 잡동사니를 한 곳에 모았다.
덮고 자던 거적떼기같은 이불, 넝마옷 몇벌,
걸레조각같은 헝겊들, 휴지, 개다리 밥상, 양말쪼가리, 수건으로 쓰던 천조각들이 수북히 쌓였다.
영민은 어디서 주웠는지 딱성냥을 딱하고 켜서는 그 잡동사니의 아래에 불을 붙였다.
하르륵 하르륵 하고 허접쓰레기들은 한많은 몸짓으로 항거하듯 불타오르고,
영민은 그것을 보고는 흐드득 몸을 떨었다.
치솟는 불길 사이로 누군가가 피터지게 절규하는 듯한 영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것은 바로 나다.
과거의 나, 현재의 나가 이제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연기와 불꽃으로 살라진 채 사라져 가는 것이다.
더 이상 한도 슬픔도 지니지 못한 채 그대로 훨훨 불꽃이 되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행님아, 인자 그만 가제이."
장현도 가슴에 뭔가 치밀어 오르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쿨적이다가 말한다.
"그래. 가자."
다 버리고 가는 것이다.
마음에 맺히고 가슴에 남은 것 모두를 몽땅 태우고, 자신은 재가 된 채로 회색빛 가슴을 안고
가야만 한다.
영민은 등을 보인 채 자꾸만 헛헛한 마음이 들어서 헛된 대답만 하고는 그대로 물끄러미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만 본다.
세상은 그리 슬픈 것도 아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뭐든지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세상이다.
하지만 인간이 슬픈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살상하고 무시하고 있다.
세상은 뭐든지 안온하게 품으려 노력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만이 품에 안기려고
자신들을 위해서만 아둥바둥할 뿐이다.
장현은 본능적으로 어디를 갈지 알고 있다.
남대문쪽 아니면 서울역쪽에는 항상 일꾼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특히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니 일손이 무척이나 부족했다.
모처럼 경제는 활력을 찾아 사회에는 일거리가 넘쳐났고,
값싼 노동력을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무작정 상경자나 가출자들을 노리며 이런 곳을 어슬렁대고 있다.
"야, 너희들 일할래?"
약간은 다리를 저는 중년의 사내가 영민과 장현에게 스스럼없이 접근했고,
영민은 그저 고개만 까닥했을 뿐이다.
몇 푼에 팔려가는 송아지가 된 기분으로.
중년사내를 따라 간 곳은 용산 근처에 있는 중국음식점이었다.
영민은 홀에서 보이로, 장현은 주방에서 잡일을 하러 들어갔다.
이제 모든 것은 이렇게 청산된 것이다.
과거의 모든 것이 이 취직을 하는 순간에 몽땅 잊혀진 과거가 되어서 사라졌고,
영민과 장현은 이제 컴컴한 식당의 안에서 일을 하며 지내게 된 것이다.
먼 산에 곱게 지는 저녁 노을은
님의 볼가에 흐르는 그리움을 닮아
한없이 한없이 붉어만 가는데
나무가지 끝에 걸린 그 이름
아쉬워 부르다 부르다 밤이 되었네
시란 슬픈 것이다.
마음을 담을 수 있기에 정녕코 슬픈 것이다.
시는 가끔 눈물이 되어 정많은 이들의 눈시울에 잠간 머물다간,
한없는 그리움에 견디지 못해 그대로 이슬이 되어 굴러 떨어지곤 한다.
하아!
한숨을 크게 쉬어 보지만 무언가가 징하게 울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지 가슴 속이
하나도 시원해 지지가 않는다.
윤경은 그 답답한 마음을 한손으로 가만히 누르면서 책상 서랍을 살며시 열었다.
언제나 이런 심정이면 습관적으로 행하는 동작.
서랍안에는 작은 상자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마치 가지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항의를 하듯이.
윤경은 이제는 아주 촌스럽게 변해버린 작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집어든다.
요즘 만년필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전부 볼펜이나 아니면 이런 투박한 만년필이 아닌 세련된 만년필을 사용했다.
이것은 잉크를 빨아들이지 않은 순수한 만년필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몸에 생명의 액체를 넣어줄 주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윤경아!"
갑자기 손여화가 방문을 벌컥 열었고,
그 바람에 윤경은 후다닥 만년필을 감추었다.
손여화가 그 어색한 표정을 보고는 묻는다.
"뭐하니?"
윤경이 자신이 했던 행동에 열쩍어서 그저 만년필을 다시 상자에 넣는데
그녀의 귀밑이 발그레 물들어 있다.
손여화가 다가와서는 책상 위에 놓인 시집에 눈길을 준다.
'아, 벌써 이렇게 자랐단 말인가.'
손여화는 이렇게 세월의 빠름을 안타까와 한다.
자신의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을 에미에게도 숨기려고 하는 윤경의 그 부끄러워 하는
표정을 보고는 손여화는 약간 서운한 감도 가졌다.
윤경은 이미 자신의 비밀을 엄마에게 감출 만큼 자란 것이다.
손여화는 시집의 제목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또 그 시집이다.
고상순의 것.
그 어릴 적의 동심은 세월이 지나가면 잊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윤경은 그것을 잊지 못하고 있다.
손여화는 그런 윤경을 안쓰럽게 쳐다본다.
하긴 자신도 그 오랜 세월 전에 있었던 사랑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지 않던가.
"주희왔다. 나가봐라."
윤경이 그 말을 듣고 만년필을 서랍에 넣고서는 방을 빠져 나갔고
손여화는 고상순의 시집을 멍한 눈동자로 집어 들었다.
바퀴도 개똥도 아닌 것이 개똥지바퀴란다
그 이름이 우스워 푸하하 푸하하
지똥지똥 날아가는 통에 푸하하 푸하하
개똥지바퀴라는 새를 노래했다.
그런데 왜 이토록 심한 설움의 빛이 스며나오는가.
시어는 전혀 설움의 느낌이 없는데도 말이다.
아마 그것은 그 조그만 새가 전혀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얼뚱한 모습으로
그저 지똥지똥 날아가는 모양이 한없이 슬프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조그맣고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새는 바로 시인 자신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흑! 손여화는 숨을 멈추고는 그 얼굴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생각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은 이렇게 부유한 계층으로 살면서 우아하게 일생을 지내면 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암울했던 과거를 다시 생각하려 하는가.
남편 진평산은 경제 개발 계획에 힘입어 이제 재벌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자신은 온갖 것들로 호화롭게 치장을 하고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가끔씩 이런 호화스럽고 사치하게 꾸며서 사는 것들이 혐오스러워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 이제 접어 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지 않던가.
가슴 속의 비밀상자에 꽁꽁 숨겨둬야 한다.
만일 육신이 타버린다면 그 가슴속의 비밀상자는 그대로 한많은 이야기를 묻고는
훨훨 하늘로 타오르겠지.
손여화는 시집을 다시 책상 위에 살며시 놓는다.
어쩐지 놓아버린 손끝에 헛헛함이 시리도록 맺혀지는 것 같다.
비가 올 듯 올 듯 하다가 끝내 오지는 않고 오히려 날이 다시 맑아져 버렸다.
아직은 봄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나무들은 초록으로 빛날 뿐
아직 울창하다는 느낌은 주지 못하고 있다.
윤경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 보다가,
마냥 즐거운 듯이 동동거리며 지나치는 사람들의 유쾌함에 약간은 시샘을 느끼기도 한다.
그윽한 커피향이 코끝을 아롱아롱 간지럽히는데,
윤경은 그 향기에 취했는지 그저 멍하니 창밖만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자 윤경은 흠칫 현실의 세계로 다시 정신이 돌아온다.
수수한 차림의 사내가 씽긋 미소를 짓는다.
"진윤경씨죠? 주희 소개로 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앉으세요."
윤경이 살포시 웃어 보인다.
남자가 그 웃음을 보고서 자신감을 갖는 느낌이다.
"성낙준입니다. K대 경제학과 3학년이고요."
윤경은 대답없이 그저 미소만 보였다.
레지가 다가왔고 그는 커피를 시켰다.
"주희를 통해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윤경이 그저 말없이 커피 한모금을 입에 문다.
커피향이 혀끝이 아닌 코끝에서 깨어져 나간다.
"워낙 주변머리가 없어서 이번 봄축제에는 파트너나 하나 얻어보려고 부탁을 했죠.
그런데 이렇게 킹카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낙준의 말투에는 능글한 3학년의 느끼함이 배어 있지만,
윤경은 그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하긴 여태까지 만난 남자들이 전부 그랬으니까 말이다.
특히 아빠가 소개시켜준 남자들은 한결같이 느끼함이 뻑뻑하게 묻어나왔다.
거만하고 무례하고 그러면서도 예의는 꼭 따졌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간교함.
윤경은 그것이 싫었다.
그들의 타산적인 간교함이 말이다.
그리고 아빠의 그 계획성있는 의도도 싫긴 마찬가지다.
윤경은 자신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 아빠가 베풀었던 그 거대한 파티를 혐오했다.
느끼한 남성들이 보여주었던 쉴 새없이 굴리던 눈망울에 찬 그 간교한 타산적 이해를.
윤경은 찻잔을 들다말고 불쑥 낙준에게 물었다.
"카스테라 좋아하세요?"
낙준이 아닌 밤중에 왠 홍두깨같은 질문이냐고 눈을 둥그렇게 뜨다가
이내 표정을 누그러 뜨리며 농담조로 대꾸한다.
"카스테라보다는 곰보빵이 맛있죠."
윤경이 그 말을 듣고 배시시 웃는다.
하지만 윤경의 가슴은 서릿발보다도 더 차갑게 굳어졌다.
만약에 영민이었다면 분명히 곰보빵보다는 카스테라를 더 좋아할 거다.
왜냐하면 카스테라에는 그 아득한 추억이 함박 담겨 있으니까.
밖으로 나서려는데 낙준이 아주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따라 나섰다.
"술 한 잔할까요?"
윤경이 낙준의 제의에 어이가 없어서 쳐다본다.
이 대낮에 술이라니.
"분위기 좋은 집을 알아요. 동동주가 그저 밥알이 동동 떠서 입에서 사르르 녹습니다."
술?
입에 한번도 댄 적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마치 마법사의 생명수 같은 것.
윤경이 그 의미를 음미하고 있는데 그것이 승락인줄 알고 낙준이 재촉했다.
"얼마 멀지 않다고요."
하긴 이곳에 나온 이유가 뭔가에 흠뻑 취해보고 싶어서이지 않던가.
대학촌의 동동주 집답게 아주 투박한 미를 살리고 있었다.
통나무 의자에 그저 막만들어진 탁자들.
그리고 탁자 중간에는 성냥곽과 재털이가 놓여있다.
윤경은 그저 앉아만 있었고 낙준이 양은 주전자에 담겨진 우유빛 액체를
윤경앞에 놓인 사발에 벌컥벌컥 따른다.
그 소리가 아련해서 윤경은 잠시 눈을 감아야만 했다.
수도가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허기를 채우는 조그만 아이가 떠오른다.
자신이 부르자 그저 얼굴이 빨개져서 한없이 어디론가 내빼는 아이.
만약에 가능하다면 그 아이는 하늘 저끝까지 도망쳤을 것이다.
"자, 건배!"
낙준이 이렇게 말하자 윤경이 사발을 두손으로 받쳐든다.
이것은 수도물이다.
영민이가 벌컥벌컥 들이마시던 그런 것.
윤경이 사발을 들고는 입에 댄다.
향기가 난다.
옛날의 향기가.
윤경은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시큼한 동동주의 맛과 털털한 막걸리의 맛이 윤경의 입안에 가득찼다.
낙준은 그것을 보고서 씩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꿀꺽꿀꺽 술을 들이킨다.
그리고 낙준은 무엇이 좋은지 헤 웃음짓고, 윤경도 괜히 웃음이 나와서 키득거려본다.
이른 시간이었기에 텅빈 술집안에 그저 기괴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두 사발을 마셨는데 기분이 아주 좋았다.
마치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살풋 들어서 허공에 둥둥 띄워놓은 느낌이 들면서,
정신은 아득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낙준이 한 사발을 더 따르고는 한 주전자를 더 시킨다.
일렁일렁 봄날의 아지랑이가 얼굴을 샐샐 간지럽힌다.
아니 그것은 아지랑이가 아니라 그냥 감정이었다.
못다 핀 감정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술기운에 까르르 까르르 일어나서는
얼굴에 붉은 빛으로 맺히는 것이다.
그 간지러움을 참기 어려워 윤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무언가 짜르르 머리위로 돌아간다.
어헉!
윤경은 어지럼증이 파도처럼 밀려오자 그것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비틀대는데 낙준이 후다닥
그녀를 부축했다.
윤경은 그의 손이 닿자 그 손길을 뿌리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낙준의 얼굴이 영민으로 바뀌었다.
헉!
윤경은 숨이 막혀서 꼼짝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다.
영민이 아주 따듯한 미소를 보낸다.
'윤경아, 잘있었어?'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부축한 손길에는 감정의 떨림이 윤경의 팔로 고스란히 전해온다.
윤경은 부르르 부르르 그 감정의 떨림을 견디지 못해 자신도 하염없이 떨고만 있다.
그의 얼굴이 윤경의 얼굴로 다가왔고 윤경은 입술이 타는지 자꾸만 자신의 입술을 침으로 축인다.
아, 얼마나 기다렸던 것인가.
윤경의 가슴이 마구 뛰어댔고, 그녀의 온몸은 그의 품에 꼭 안기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푸르륵 푸르륵 감정의 떨림이 고조되었고, 윤경의 머리속에는 하얀 안개가 가득차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영민아, 안아줘. 아주 꼭.'
윤경은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윤경에게 다가왔다.
드르륵!
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들어오는지 문이 열리고
그 문이 열리는 순간 윤경의 앞에 나타났던 환상이 퍽하는 소리를 내면서 깨어져 버린다.
윤경은 자신이 낙준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을 알고서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악!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윤경은 죽어라고 그냥 낙준을 밀쳐내고 후다닥 밖으로 뛰쳐 나간다.
낙준은 그 바람에 당황해서 얼굴이 벌개질 여유도 없이 윤경을 잡으려고 하는데
뒤에서 주인 여자가 계산을 하고 가라고 성화였다.
밖으로 나온 윤경은 비칠대면서도 앞으로 죽어라고 달렸다.
세상이 사악한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사악한 것인가.
윤경은 자신이 한 짓인지 아니면 낙준의 계획에 넘어간 것인지 몰랐지만,
아무튼 자신이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뛰어가는 옆으로는 더러운 개울물이 자신의 비웃듯이 흘러가고 있다.
너는 얼마나 깨끗하냐 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다.
처음 본 남자의 품에 그렇게 안길 수가 있단 말인가.
윤경은 마치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낙준의 끈적끈적한 손길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미친 것 같이 뛰었다.
그러다가 술에 취해 쓰러지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서 뛰었다.
하늘이 노랗게 변했고 눈앞에는 별이 보인다.
왜 그런지 마구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도 입으로는 깔깔거리고 있다.
윤경은 마구 웃으면서 눈물을 철철 흘려대며 넋을 잃은 듯 뛰어다녔다.
집으로 들어서니 손여화가 유령같이 변한 윤경의 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니, 윤경아? 무슨 일이야?"
하지만 윤경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손여화가 허둥지둥 따라 들어오는데 윤경은 혼이 나간 듯이 손여화가 보고 있는데도 옷을 벗는다.
"윤경아! 정신차려. 뭐하는 거야."
윤경은 손여화의 외침에 동요도 없이 자신의 할 일만을 한다.
온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훅하고 욕실로 뛰어 들어가서는 문을 철컥하고 잠가 버렸다.
헉헉 흐흑. 헉헉 흐흑.
눈물이 엄청나게 쏟아져 내린다.
어디에 숨어있었던 눈물인지 그저 밑도 끝도 없이 솟아오르고, 윤경은 찬물을 욕조에 받는다.
쏴아 찰찰 쏴아 찰찰 하는 소리가 윤경을 한없이 비난하는 것 처럼 들린다.
"아니야. 아니라고. 분명히 영민이었단 말이야."
윤경은 이렇게 외쳐본다.
하지만 물소리만이 긴 여운을 남기며 그녀의 가슴에 돌아왔다.
찬물에 몸을 풍덩하고 담군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이 온몸의 감각을 얼려놓지만 그것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진다.
윤경은 옆에 놓인 수세미를 잡고는 낙준의 손이 닿았을 만한 곳마다 수세미로 박박 문질렀다.
지워야만 한다.
그 더러운 흔적을 말이다.
윤경이 얼마나 박박 문질렀는지 피부가 발갛게 성이나서는 피를 토해낸다.
하지만 윤경의 손은 멈추지 않고 수세미질을 계속한다.
윤경은 입술을 꼭 깨문채로 그 성스러운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더럽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더럽혀진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뿐이지 않는가.
어헝! 그저 목놓아 울 수 밖에 없었다.
수세미를 쳐다보다가 그냥 냅다 벽에 던져버린다.
수세미가 팍하는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에 꼰아 박힌다.
이제 싸늘한 찬물의 냉기도 피가 흐르는 피부의 아픔도 느낄 수 없다.
밖에서는 손여화가 죽어라고 잠긴 문을 두드렸지만 그 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윤경은 욕조안에서 머리만을 남긴 채 물 속에 죽은 듯이 잠겨있다.
무언가 스물스물 밀려온다.
그것은 처음에 피부에 닿더니, 점차 온몸으로 온 정신으로 감각 전체로 밀려왔다가,
가슴 한가득 차가운 냉기를 머금고는 머물러 있다.
그렇다.
그것은 눈덩이였다.
섬뜻하리 만큼 차가운 눈덩이.
자신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쳐진 증오심을 담은 그 눈덩이였다.
그리고 그 눈덩이에 맞는 순간 윤경은 아픔보다는 오히려 짜릿한 쾌감을 느꼈었다.
코피가 주루루 흐르는 와중에도 윤경은 그 쾌감에 취해 그대로 멍하니 있었지 않았던가.
보통 아이들이라면 코피가 난다고 울고불고 했을 그 순간에
윤경은 영민의 눈만을 응시하며 조용히 그 쾌감을 즐기고 있었었다.
영민의 당혹해 하던 표정이 윤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인다.
그리고 윤경은 그저 욕탕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그를 불러 본다.
'고영민. 고영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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