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 388

부여

우리는 고대를 삼국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야를 포함하면 4국시대고, 거기에 부여까지 더하면 5국시대가 된다. 부여는 한국 고대사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와 성격을 지니는 나라다. 원조선을 빼놓고는 가장 먼저 국가로 등장했고, 무려 900년 가까이 존속했다. 우선 부여를 표방하거나 계승한 나라들을 살펴보자. 첫째, 북부여다. 414년 세워진 광개토태왕비의 첫머리에는 추모(주몽)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물신인 하백의 따님이라고 새겼다. 또 직전에 만들어진 모두루총의 묘지석에는 추모성왕이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썼으며, 그 밖에 여러 기록이 해모수를 북부여 천제라고 했다. 둘째, 제1 동부여다. 부여의 왕 해부루는 동쪽으로 이전하고 국명을 동부여라고 변경했다. 아들 금와왕은 해모수의 부인인 유화부..

조국을 멸망시키려던 고구리의 민족반역자들

조국을 멸망시키려던 고구리의 민족반역자들 신대왕 장남 발기에 대한 기록은 명백한 오류 우리 역사상 가장 악질 민족반역자를 꼽으라면 단연 고구리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淵男生)을 들 수 있다. 그 죄질은 대한제국의 매국노 이완용보다 훨씬 큰 매국적 민족반역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고구리의 대막리지가 된 남생이 도성을 비운 사이 동생 남건과 남산이 정변을 일으켜 도성을 장악하고는 형인 남생을 죽이려하자, 갈 곳이 없어진데다가 생명의 위협마저 느낀 남생은 아들 헌충을 당나라로 보내 망명을 신청한다. 게다가 조국을 칠 군사를 요청하고는 그 선봉에 서서 고구리로 쳐들어와 멸망시킨 인물이다. 고구리에 그러한 연남생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민족반역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발기(發岐)이다. 발기는 ..

삼국통일 완성한 나당(羅唐) 7년전쟁

격전지 칠중성(七重城) 한강(漢江) 하구를 끼고 자유로를 달리면 왼쪽으로 「통일전망대」가 올라앉은 오두산(鰲頭山)이 보인다. 오두산의 서쪽은 한강과 임진강(臨津江)이 합수(合水)되는 해역이다. 자유로를 계속 달려 문산IC(파주시 문산읍 당동리(堂洞里)에서 37번 국도로 빠져나와 동진(東進)하면 임진강(臨津江)의 역사와 동행(同行)할 수 있다. 오늘날의 남북 대치 현장인 임진강 유역은 1300여 년 전에는 羅唐(나당)전쟁의 決戰場(결전장)이며, 韓民族(한민족)을 지켜 오늘에 이르게 한 방파제였다. 그때 임진강에서 唐軍(당군)을 막지 못했다면 한민족은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지도 모른다. 고랑포대대 OP에서 대대장 하영재 중령(왼쪽)과 필자. 37번 국도를 동진(東進)하면 임진강 남안(南..

문무왕의 대당(對唐) 무력시위

문무왕의 대당(對唐) 무력시위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壬申誓記石. 신라화랑의 맹세가 새겨져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문무왕은 674년 9월 영묘사 앞 광장에서 거행된 대대적인 열병식에 임석했다. 여기서 아찬(관등 제6위) 설수진(薛秀眞)은 육진병법(六陣兵法) 시범을 실시했다. 그 직전, 唐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취소하고 유인궤를 총사령관으로 정벌군을 충돌시켰는데, 육진병법의 시범은 그에 대한 무력시위와 군사연습이었다. 육진병법은 唐의 병법대가(兵法大家) 이정(李靖)이 對돌궐戰에서 실행한 육화진법(六花陳法)의 신라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唐은 對신라전에서 한병(漢兵) 이외에 기마전에 능숙한 말갈·거란병을 대거 투입했던 만큼 신라 전쟁지도부로서도 육화진법이 유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