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전지 칠중성(七重城)
한강(漢江) 하구를 끼고 자유로를 달리면 왼쪽으로 「통일전망대」가 올라앉은 오두산(鰲頭山)이 보인다. 오두산의 서쪽은 한강과 임진강(臨津江)이 합수(合水)되는 해역이다. 자유로를 계속 달려 문산IC(파주시 문산읍 당동리(堂洞里)에서 37번 국도로 빠져나와 동진(東進)하면 임진강(臨津江)의 역사와 동행(同行)할 수 있다.
오늘날의 남북 대치 현장인 임진강 유역은 1300여 년 전에는 羅唐(나당)전쟁의 決戰場(결전장)이며, 韓民族(한민족)을 지켜 오늘에 이르게 한 방파제였다. 그때 임진강에서 唐軍(당군)을 막지 못했다면 한민족은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지도 모른다.
고랑포대대 OP에서 대대장 하영재 중령(왼쪽)과 필자. |
37번 국도를 동진(東進)하면 임진강 남안(南岸)에 임진왜란 때(1592년 4월30일) 몽진하던 선조(宣祖)의 도하지점인 花石亭(화석정)이 보이고, 화석정에서 8km쯤 東進하면 도로변에 西人의 본거지였던 坡山書院(파산서원)이 보인다. 파산서원은 西人의 영수였던 牛溪 成渾(우계 성혼)이 나라 지키는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朱子學(주자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곳이다.
파산서원 남쪽 栗谷里(율곡리)는 성혼의 盟友(맹우)이며 서인(西人)→노론(老論)의 정신적·학문적 스승이었던 栗谷 李珥(율곡 이이)가 만년을 보냈던 동네인데, 이 마을에는 李栗谷의 묘소와 그를 모시는 紫雲書院(자운서원)이 있다.
파산서원에서 다시 6km쯤 더 나아가면 이제는 4~5층 건물이 즐비한 積城面 馬智里(적성면 마지리)이다. 마지리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37번 국도 변에 「七重城(칠중성)」의 위치를 표시하는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여기서 좁은 진입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重城山(중성산) 자락에 자리 잡은 積城鄕校(적성향교)가 보인다.
매소성 및 칠중성 전투 상황(675년 9월) |
중성산 위에는 羅唐전쟁 시기의 격전장이며, 주인이 자주 바뀐 칠중성(七重城)이 자리 잡고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 문무왕 15년(675) 2월조에는 『劉仁軌(유인궤: 唐將)가 우리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했다』고 되어 있고, 같은 해 9월 조에는 『唐兵이 거란·말갈병과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승용차를 적성향교 앞마당에 세워 놓고 농토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좀 걷다가 중성산 기슭에 붙으면 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중성산 정상부에는 현재 軍예비진지가 들어서 있다.
중성산은 높이 149m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오르면 그때 왜 칠중성을 彼我(피아)가 모두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前方의 임진강과 후방의 감악산을 모두 관측할 수 있는 지점인 것이다. 임진강은 北方勢(북방세)가 한반도의 中心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전략적 요충이다.
칠중성에서 굽어보면 임진강 中流(중류)의 물길이 크게 彎曲(만곡)을 이뤄 마치 호리병(瓠蘆·표주박) 두 개를 나란히 진열해 놓은 듯한 모습으로 흐른다. 이런 모습 때문에 임진강 중류의 옛 이름이 「瓠蘆河(호로하)」라고 불렸던 듯하다.
호로고루城과 고랑포
당나라 무사상. |
칠중성은 소규모 山城이지만, 바로 이웃에 위치한 六溪土城(육계토성)과 연계해 임진강을 도하하는 적군을 쉽게 관측·저지할 수 있는 지형이다. 칠중성과 육계토성은 임진강 北岸의 瓠蘆古壘城(호로고루성)과 마주 보고 있다.
육계토성 부근에 걸린 다리를 건너가면 연천군 白鶴面(백학면)이고, 백학면에서 임진강 北岸의 지방도로를 따라 西行하면 곧 고구려부흥군이 南下하던 唐軍과 격전을 벌였던 호로고루성에 도달한다.
이곳은 南北(남북) 분단 전에만 해도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호루고루성은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현무암 절벽 위에 축조된 고구려의 平地城(평지성)인데, 비교적 보존이 잘된 서쪽 성벽의 높이가 약 10m이다.
호로고루성에서 하류 방면으로 조금 西行하면 高浪浦(고랑포)이다. 고랑포는 철책선(GOP) 지역이어서 민간통제선이 북상한 이후에도 낚시꾼이나 가끔 찾는 쓸쓸한 곳이지만,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상선이 거슬러 올라왔던 임진강 水運(수운)의 終着(종착) 나루였다.
고랑포 동쪽에는 임진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도섭 지점이 많다. 1968년 1월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휴전선을 뚫은 북한 124군 소속 게릴라부대(김신조 일당)도 고랑포에서 걸어서 임진강을 건너 청와대 외곽 자하문까지 침투했다. 고랑포의 對岸(대안)은 탱크戰이 벌어질 만한 전략적 지점이다.
작년 10월, 필자는 고랑포 지역의 철책선(GOP)을 지키는 장병들을 위문하러 간 김에 고랑포대대 제3소대 막사에서 1박을 하면서 특히 임진강 북안과 임진강 지류 砂尾川(사미천) 일대를 답사했다.
칠중성→임진강→ 고랑포→사미천을 잇는 통로는 문무왕 2년(662) 1월 金庾信(김유신)이,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다 군량이 떨어져 전멸의 위기에 빠진 蘇定方(소정방)의 唐軍을 구원하기 위해 北上했던 기동로이다.
이때 김유신은 김인문·김양도 등 신라의 여덟 장수와 함께 군량미를 수레에 실은 수송부대를 이끌고 사미천변을 따라 북상하면서 상류의 白峙鎭(백치진)의 고구려 수비군을 돌파하고 토산→신계→수안을 거쳐 대동강 남안 中和에서 소정방 軍과의 연결에 성공했다. 아사 직전의 唐軍을 구원한 김유신 軍은 귀로에 임진강 북안에서 추격군을 역습해 고구려 장수 阿達兮(아달혜)를 사로잡고 1만 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다.
육상의 최후 결전장(決戰場) 매소성(買肖城)
고구려 부흥군이 唐軍과 싸웠던 호로고루城의 서쪽 성벽(높이 10m). |
고랑포 지역을 둘러본 필자는 임진강 위에 걸린 飛龍橋(비룡교)를 건너 다시 적성면 마지리로 내려왔다. 마지리에서 323번 지방도로를 타고 4km쯤 남하하면 길가에 「英國軍 전적비」가 보인다. 이곳은 6·25 전쟁 때(1951년 1월) UN軍으로 참전한 英國軍 글로스터聯隊(연대) 소속 1개 대대가 감악산 계곡(적성면 설마리) 양쪽에 매복한 中共軍의 포위공격을 받고 전멸했던 곳이다.
감악산은 높이 675m이지만, 파주 일대에서 가장 높고 몸피도 굵은 산이다. 감악산 정상에 올라가면 임진강 남안과 북안에 위치한 칠중성·육계토성·호로고루성이 내려다보이고, 동북쪽 멀리로는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이 보인다.
지금 감악산 계곡은 유원지화하여 곳곳에 음식점과 산장에다 가요주점까지 들어서 있다. 334번 지방도로로 달려 감악산 계곡을 빠져나오면 연천군 신산리이고, 이곳에 飛龍師團(비룡사단) 본부가 주둔해 있다. 지금, 비룡사단 정문 앞에는 라이브카페의 간판까지 보인다. 적은 핵무기까지 개발해 「불바다」 운운하는 공갈을 거두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최전선 接敵(접적)지역마저 긴장감이 사라져 버렸다.
동두천市에 진입해 3번 국도를 타고 북상하다가 保山(보산) 전철역 앞에서 군사문제연구소 연구원 권승진씨와 만나 함께 買肖城(매소성)으로 출발했다. 매소성은 漢灘江(한탄강) 유원지에서 우회전해 포천 가는 322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왼쪽에 보이는 야산(연천군 靑山面 大田里)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지도에는 「大田里山城(대전리산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매소성은 地利를 살려 쌓은 요새이다. 북동쪽에서 흘러내리는 한탄강이 매소성 앞에서 급격히 꺾어져 임진강 본류로 합수된다. 한탄강 너머에는 은대리성과 전곡리土城을 껴안은 全谷邑(전곡읍)이 펼쳐져 있고, 서북쪽 멀리로는 開城의 鎭山(진산)인 송악산이 육안으로 보인다. 10여 년 전 이곳에 올라왔을 때 전곡읍은 허허벌판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삼국사기」 문무왕 15년 9월29일조에는 『李謹行(이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자, 우리 군사가 그들을 격퇴시키고, 戰馬 3만380필과 이 정도의 병기를 획득했다』고 쓰여 있다. 이후 唐軍은 신라군에 대한 육상전을 포기한다.
小國 신라가 당시의 슈퍼파워 唐에 開戰(개전)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大義名分(대의명분)에 대해선 文武王이 적군의 최고사령관(행군총관)에게 보낸 서한 「答설인귀書」를 통해 이미 설명했다. 이제는 開戰 이후의 전투상황과 羅唐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당시의 국제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고랑포.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임진강 하구로부터 이곳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
신라가 선제(先制) 공격할 수 있었던 국제정세
임진강 중류의 단애. 임진강은 한반도의 中心지역을 지키는 민족의 방파제였다. |
고구려의 패망 후 唐은 평양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故土(고토)는 물론 그때까지의 동맹국 신라까지 병합하려는 움직임을 노골화함에 따라 新羅의 문무왕은 對唐(대당) 선제공격을 결심했다. 그것이 670년 4월에 전개된 압록강 북방의 요새 鳳凰城(봉황성) 공격이었다. 이때 공격군의 지휘관은 신라의 사찬(관등 제8위) 薛烏儒(설오유)와 고구려부흥군의 태대형(관등 제1위) 高延武(고연무)였다. 연합군의 병력은 신라군·고구려부흥군 각각 1만 명이었다.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압록강을 건너 4월4일 봉황성에서 이근행 휘하의 말갈군에 대승한 직후 唐軍 주력이 대대적 반격을 개시하려 하자 바로 압록강을 건너 南下했다. 그렇다면 신라가 唐에 선제공격을 감행할 수 있게 했던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문무왕은 669년 9월의 唐-吐藩(토번: 티베트) 전쟁 발발 정보를 일찌감치 입수했던 것 같다. 당시 唐의 수도 長安(장안)에는 문무왕의 동생 金仁問이 당의 벼슬을 받고 常駐(상주)하고 있었으며, 김유신의 동생 金欽純(김흠순)과 중국어에 능통한 파진찬 金良圖(김양도)가 謝罪使(사죄사)란 명목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사죄사는 신라의 백제 故土 잠식에 대해 唐고종이 분노하자, 그간의 경위와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외교사절이었지만, 唐고종은 김흠순과 김양도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唐고종이 외교사절을 투옥시킨 사유는 무엇일까? 역사의 기록은 누락되었지만, 김흠순과 김양도는 당연히 실크로드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전개된 唐-토번 전쟁 추이를 주시하며 정보를 수집했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국가안보에 관한 한 僧俗(승속)이 따로 놀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때 長安 남쪽 終南山(종남산)의 至相寺(지상사)에서 華嚴學(화엄학)을 공부하던 義相(의상) 스님이 갑자기 귀국해 문무왕을 만난다.
토번의 융성기를 이끌었던 송첸칸포. |
義相은 唐의 감옥에 갇힌 김흠순·김양도 등과 접촉해 서역을 향한 唐軍의 병력 이동상황을 청취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의상 스님은 中國華嚴宗(중국화엄종)의 제3祖(조)에 오르기 직전의 시기에 개인적 출세를 포기하고, 급거 귀국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최고사령관(都護)이었던 薛仁貴(설인귀)는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으로부터 靑海(청해)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무려 1만3000리나 되는 머나먼 행군거리였다. 靑海는 바다가 아니라 지금의 靑海省의 省都(성도)인 西寧(서녕·씨닝)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이다.
당시 세계의 메인 트렁크(主 교역로)였던 실크로드는 섬서성-감숙성-청해성을 西進해 新疆(신강)위구르自治區 중심부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의 오아시스 도시를 거쳐 東로마제국까지 연결되었다. 따라서 靑海는 실크로드의 「허리」 부분으로서 이곳이 막히면 唐으로선 東西무역의 이익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唐고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설인귀를 부랴부랴 靑海까지 이동시켰다는 것은 설인귀가 唐의 최정예부대를 거느린 제1급 장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설인귀의 唐軍은 670년 7월 大非川(대비천: 靑海湖 남쪽) 전투에서 토번군에게 전멸당했다. 최고지휘관인 설인귀만 겨우 빠져나와 도주한 참패였다.
그 결과 서역, 즉 지금의 신강위구르自治區에 있던 唐의 安西4鎭이 모두 토번군에게 떨어졌다. 신강위구르自治區라면 우리나라 광역시의 西區나 東區의 규모가 아니라 한반도 면적의 6배에 달하는 광활한 사막(南部)과 초원(北部)지대이다. 필자는 2003년 신강의 南部지역을 답사했는데, 여객기·전세버스·기차를 번갈아 타고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 오아시스 도시를 한 바퀴 도는 데만 13일간이나 걸렸다.
고랑포대대 작전참모 金소령(오른쪽)과 호로고루城 답사. |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패망
670년 5월, 唐고종은 左監門(좌감문)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동주도)행군총관, 말갈의 장수 李槿行(이근행)을 부총관으로 삼아 4만 병력을 한반도로 투입했다. 6월 고간과 이근행의 唐軍은, 일시 평양의 安東도호부를 점령했던 고구려부흥군을 밀어내고, 황해도로 남하했다.
이때 임진강 이북 지역의 전투는 고구려부흥군이 담당하고, 신라군은 백제 故土 점령작전에 전념했다. 6월, 文武王은 고구려 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 전북 익산)에다 집단이주시키고, 8월에는 보장왕의 庶子인 高安勝(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해 公州의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그러면서도 대아찬(관등 제5위)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해 和議(화의)를 요청했다. 和戰(화전) 양면책의 구사는 문무왕의 常用수법이었다.
이해 7월, 신라는 백제 故土의 82개 城을 점령함으로써 지금의 호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유민들을 대거 신라 內地(내지)로 이사시켰다. 백제 유민에 대한 徙民(사민)정책은 웅진도독부가 백제 유민들을 선동해 對신라戰에 동원하려는 기도를 분쇄하려는 의도였다.
671년 7월, 문무왕은 서역戰線에서 한반도로 막 복귀한 唐의 행군총관 설인귀로부터 항의 서한을 받고 이를 반박한 「答설인귀書」를 보냈음은 앞에서 썼다. 唐고종은 669년 7월의 大非川 전투의 패장인 설인귀를 귀양보냈다가 功(공)을 세워 명예회복을 하라며 한반도 전선에 再투입했던 것이다.
671년 9월,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安市城(안시성)이 고간이 지휘한 당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그러나 10월, 신라의 水軍은 예성강 어귀로 진입하던 唐의 보급선을 습격하여 70여 척을 노획했다. 이로써 당군은 海路에 의한 병참선 확보에 실패했다. 예성강 전투의 패전으로 兵站線(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당군은 이후 약 1년간 南下할 수 없었다. 文武王으로서는 신라군을 재정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문무왕은 당군의 主力이 고구려부흥군과 전투를 전개하던 사이에 백제 故土를 지배하던 당의 직할 통치기관인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축출하고, 長槍幢(장창당) 등 對 騎兵부대를 창설해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그해 10월, 웅진성에 파견되어 있던 唐의 관원과 백제 유민 2000여 명이 47척의 선박에 분승해 왜국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신라의 공세 때문에 웅진도독부가 더 버티기 어렵다는 전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어 672년 2월, 신라군은 대대적인 포위 섬멸작전을 전개해 웅진도독부를 사실상 소멸시켰다.
당군도 결전을 벌일 의도를 노골화했다. 672년 7월에 東州道행군총관 고간이 漢人(한인) 기병 1만 명, 李槿行이 말갈·거란병 3만 명을 이끌고 평양에 再진입했다. 이때 고간-이근행 軍은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평양 근교 韓始城(한시성)과 馬邑城(마읍성)을 쳐서 빼앗았다.
唐나라 기마무사木俑. 신라는 唐 기병군단에 맞서 장창당을 조직했다. |
신라군, 석문(石門) 전투에서 대패(大敗)
그해 8월, 당군은 南下하여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白水城(백수성: 황해도 白川)을 포위 공격했다. 이때 신라군이 당군의 배후를 급습해 전황이 급반전되었다.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은 앞뒤에서 당군을 협격해 수천 명을 살상하고 수많은 전리품도 획득했다. 고간의 당군은 황해도 서흥으로 퇴각해 石門 들판에 진을 쳤는데, 신라군은 勝勢(승세)를 믿고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步騎(보기) 합동작전에 능숙한 당군의 유인작전에 빠져 신라군은 開戰 이래 최대의 참패를 당했다. 신라군이 적을 가볍게 본 결과이기도 했다. 다음은 당시의 패전상황을 기록한 「삼국사기」 김유신傳(전)의 기록이다.
< 당군이 石門의 들판에 진을 치자 (문무)왕은 장군 義福(의복)·春長(장춘)을 보내 방어하게 하여 帶方(대방) 들판에 진을 쳤다. 이때 長槍幢(장창당)만은 별도로 진을 치고 있다가 당병 3000여 명과 싸워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에 보냈다. 이에 여러 幢(당:부대)들이 함께 말하기를 「長槍營(장창영)은 홀로 있다가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도 한데 모여서 헛되이 수고만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마침내 각자 군대를 분산시켰다. 당병이 말갈과 함께 우리 군사가 아직 陣(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오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장군 曉天(효천)·義文(의문) 등이 여기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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