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조선

매천야록 제3권

오늘의 쉼터 2016. 11. 6. 17:20

매천야록 제3권

 

광무 3년 기해(1899년) ①

 

1. 민병석을 농부대신에 임명

 

기해년(1899) 광무 3년 정월, 민병석을 농부대신, 권재형과 민종묵 등을 찬정, 원우상을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2. 금석규 등을 공사에 임명

 

금석규를 주일공사, 주미공사리범진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주재공사, 민영환을 주미공사로 임명하였다.

 

3. 전주에 조경단을 신축

 

전주의 건지산에 조경단을 신축하였다. 고종은, 제위에 오른 것은 조종의 상운이 발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각 릉소로 지관을 보내 봉심하게 하였다. 그러나 모든 신료들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며, 건지산에 도착하여 재배하고 이곳이 천자의 발상지라고 하면서 고종에게 선조에 대한 추모의 도를 다하도록 하였다.

이 산은 전주부 북쪽 10리의 거리에 있는데, 옛날부터 태조 이상의 의총이 있다는 전설이 있으므로 국초부러 그 경계를 정하여 금호하였다.

그러나 세대가 오래되고 법령은 해이되어 많은 민총이 들어섰으므로 이때 모두 발굴하고, 의총마다 봉축하여 시조인 신라 사공의 묘를 알리기 위해 거창한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이 역사는 너무 거창하여 원성이 행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지관인 북관인 주가는 남모르게 참서를 묻어 놓았다가 그것을 발굴하였다. 그는 “제로 칭한 후 300년 동안 국조가 이어진다”고 하였다. 고종은 크게 기뻐하여 그 역사를 중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경관으로는 리호익, 침상황 등이 감독하였고, 본도에서는 관찰사리완용이 주관하였다. 그러나 재정이 궁색하여 금창석, 정귀조 등을 별감역으로 임명하여 그 비용을 지불하게 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전주의 거부이다.

그리고 삼척의 로동과 동산에 있는 의총의 축단을 건지산과 같이 하기 위해 리중하를 보내 감독하게 하고, 노동의 묘는 준경, 동산의 묘는 영경이라고 하였다.

 

4, 민병한과 침상훈 등의 유배

 

민병한은 철도, 침상훈은 지도로 유배하였다. 민병한은 내부의 서리로 있을 때 내비를 받아 군수 100여 명을 제수하였는데, 심상훈은 그 일을 시행하지 못하도록 간청하였다. 민병한은 고종 앞에서 그와 싸우며 서로 상투를 쥐고 주먹으로 구타하자, 고종은 조정의 법도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모두 유배를 명하였다.

 

5. 의학교 설립과 지석영의 역할

 

의학교를 설립하여 고 금홍집의 집을 교숙으로 하고, 지석영을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지석영은 일본으로 들어간 후 종두법을 배워 기묘년(1879)과 경진년(1880) 사이에 우리 나라에 종두법을 전하여 어린아이들이 마마병으로 인한 요절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양의 의술에도 능통하므로 의학으로 소문이 나 훈장까지 받았다.

 

6. 려형섭 등의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 설치 간청

 

려형섭 등이 해삼위에 영사관을 설치하여 서북도의 류민을 보호하자는 소장을 올렸다.

 

7. 신현표, 장상윤 등을 체포, 신문

 

신현표와 장상윤을 체포하여 신문하였다. 이해 떠도는 유언비어는 박영효가 나라를 배반하여 리준용을 추대하고 고종을 태상황으로 받든다고 하였다. 이 사건이 신현표 등에게 연루되어 신현표는 도주하고 장상윤은 종신역을 받았다.

 

9. 현릉 제찬의 도난

 

3월, 현릉문종의 릉호. 편자주 의 한식절 제찬을 도난당했다.

 

10. 함균관에 박사제를 설치

 

3월, 성균관에 박사 10명을 두었다. 이것은 향유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고종은 사교가 만연하여 유술이 점차 쇠퇴하므로 조서를 내려 종교를 부식하고 공맹의 학설을 숭상하여 성균관의 관제를 개편하게 하고, 초현당을 신설하여 숙학, 은륜의 사류를 맞기 위해 이때 선발하였으나 그것은 문구일 뿐이었다.

이때 국내에는 서양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 4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들은 서로 선동하여 한결같이 야소교(야소교)기독교. 편자주 에 의존하였으나 부군에서는 모두 불문에 부쳤다.

그리고 민영주는 일생 동안 악행을 쌓아 물의를 면할 수 없었으나, 그는 종현교당으로 투신하여 일당의 후원을 바라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더욱 미워하였고, 신문사 사장 남궁억은 불교인으로서 천주교로 들어간 것이 화제가 되어 신문에 보도되었다. 대체로 민영주가 불자의 안목이 있다 하는 것은 백성의 재산을 착취하여 사는 것이 부채와 같았기 때문이다. 이에 민영주는 크게 화를 내어 그의 일당에게 사주하여 그들의 상투를 거머쥐고 욕을 보였다.

 

11. 종현학당

 

남부의 종현은 명동과 저동 사이에 있고 그곳은 지형이 높아 조망하기에 매우 편리하였다. 그곳은 윤정현의 구제로 그 높은 곳을 점하고 있다. 10년 전에 서양인이 그 집을 산 후 집을 헐어 평지로 만든 다음 교당을 신축하여 6년 만에 준공을 보았다. 그 교회는 산이 깎이는 것처럼 높고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종현학당이라고 한다.

세례를 받은 남녀들이 주야로 왕래하여 시장을 가듯 사람들의 수가 많으므로 길을 가던 노인들은 지팡이를 짚고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떠날 줄 몰랐다.

 

12. 청국인과 서양인의 걸인 이출

 

임오년(1882), 청국인들은 우리 나라를 후원할 때 서울에 있는 걸인들을 데려다가 중국으로 팔아 넘겼다. 그 수는 해마다 천 명, 만 명을 헤아렸다.

그리고 종현학당이 건립된 후 서양인들은 영아원을 설립하여 그들을 양육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버려진 류걸들을 모아 1대를 편성한 후 배에 가득 싣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그 수는 청국인들이 했던 것에 비해 몇 배나 더 많았다.

 

13. 삼남지방의 량전

 

삼남지방의 전답을 측량하였다. 이때 민활한 지방 수재를 택하여 감리관으로 임명하였는데 남만리, 금성규, 리태정, 정도영 등이 그 전형에 응모되었다.

 

14. 한강의 철교 가설

 

한강에 철교를 가설하였다. 경인간의 철도를 개통하여 인천항에 행궁을 운영하기 위함이었다.

 

15. 각군의 군지 편찬

 

13도의 각군에 군지를 편찬하여 내부로 올리도록 하였다.

 

16. 러시아 특명서리드미트리프스키의 알현

 

러시아 공사파블로프가 휴가를 얻어 귀국하고, 참찬관덕밀(드미트리프스키 : P. Dmetrevsky)이 특명서리의 자격으로 고종을 알현하였다.

 

17. 기부령의 반포

 

기부령의 10조를 다음과 같이 반포하였다.

1, 현재 관직에 있는 사람이라도 이 기부이 가하다면 100일 이후에 허할 것.

2. 칙임관은 특지를 내릴 것.

3. 주, 판임관은 본부의 장관이 해원의 자격, 사상 등을 정부에 보고하여 재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릴 것.

4. 무관학교를 졸업한 령관급과 법학교를 졸업한 재판관급은 3년 이상인 자로 하며 순검이 점차 승진하여 경무관으로 있는 사람은 일체 허락할 것.

5. (생략)

6. 관아에 나올 때와 대궐에 나올 때는 길복을 입되, 공청에서 퇴근한 후에는 다시 상복을 입게 할 것.

7. 현재 직무를 띠고 있는 사람은 조하, 공연, 제향 등에 참여하지 말게 할 것.

8. 관직을 띠고 부모상을 당한 사람은 해관청이 수시 통첩하여 <관보>에 게재할 것.

9. 현재 기복된 사람은 형편에 따라 재임할 것.

10. 5조와 대충 같음.

기복을 시행한 이후 상법이 크게 해이되어 아침에는 상복을 입다가 저녁에는 관복을 입은 사람이 있었으며, 또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기복을 시도한 사람도 있고, 서울 사람들은 종종상복을 입지 않고 백립을 상복 대신 쓰고 다니다가 100일 만에 탈복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대(여대)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시속배들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매우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신기선이 이 여론을 제창하여 시행하자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광범위하게 개방되고 있으니 어떤 사람이 상제를 지키겠는가? 저지할 수도 권할 수도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18. 서울의 기우제

 

봄날씨가 가물어 밀과 보리가 고사하자 서울에서는 우제(우제)기우제. 편자주 를 지냈다.

 

19. 영선사의 화재

 

영선사에 화재가 발생하여 이미 베어 놓은 목재 수천 그루를 모두 소실하였다.

 

20. 주일공사리하영의 출국

 

4월, 주일공사리하영이 출국하였다.

 

21. 지방관의 임기

 

금석규를 충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병신년(1896)에 내린 칙령 중에 「지방관허임사년」이란 문구가 있다. 이때 고종은 사인들의 직위를 높이려고 하였으나 전례를 파기할 길이 없으므로 이달 중에 그 하명을 고쳐, 지방관을 부득이 전보발령할 경우에는 옛 제도에 의하여 2년 만기가 되면 전직을 허락한다고 하였다.

 

22. 조동윤의 량처 간청

 

조동윤이 상소하여 그의 당제 조동윤이 량처를 거느리도록 간청하자 이를 윤허하였다.

갑신정변 때 조녕하가 홍영식에게 살해되었으나 조영하의 아들 조동윤이 홍영식의 형인 홍만식의 딸에게 장가들어 애정이 매우 돈독하였는데, 이때 조동윤은 원수 집안의 딸이라고 하여 그와 이혼하고 금상준의 딸에게 재취를 하였다. 그러나 홍만식의 딸은 본가로 돌아간 후 머리를 다시 땋아 처녀로 단장하고 “생전에 다시 조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모든 역신들은 신원을 하였지만 조동윤은 물의를 의식하여 다시 전처와 합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조동만이 려성제의 고사를 인용하여 두 아내를 거느릴 수 있도록 하자는 상소를 올려, 윤허한다는 교지를 받아내었다.

 

23. 홍릉에 전차 신설

 

홍릉에 전차를 신설하였다. 고종이 자주 행차하므로 신속하게 가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전차가 매우 빨라 날마다 력사한 아동의 수가 수명이나 되었다.

 

24. 공주 유생 리건중의 징소

 

공주 유생 리건중을 징소하여 중추원의관으로 임명하였다. 이건중은 곽종석과 같이 징소되었으나 곽종석은 응하지 않고 이건중만 왔다. 그는 논리가 시대에 맞지 않아 사람들은 서로 전해 가면서 그를 비웃었다.

 

25. 평리원과 특별공원 설치

 

고등재판소를 평리원으로 개칭하고, 특별공원을 설치하여 황족의 범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26. 리근용을 함북관찰사에 임명

 

리근용을 함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27. 선원보 중수

 

선원보를 중수하였다.

 

28. 경주 석촌리 지층 균열

 

경주 석촌리에서 산이 3일 동안 벽력소리를 내다가 정상에서부터 기슭까지 140장이나 균열되고, 땅이 계속 뒤바뀌어 들가운데에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났다.

 

29. 윤용선을 의정에 임명

 

5월, 윤용선을 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남명선은 경무사로 임명하였으나 10일 만에 리유인을 대리 임명하였다.

 

30. 독일하인리히 왕자의 래한

 

독일의 현(형)리친왕(하인리히 폰 프레센 : H. von Prsssen)이 내한하여 그의 공관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고종은 태자와 함께 그곳을 행차하여 그와 접견하고, 다시 경희궁으로 가 조련을 관람하려고 하였으나 리도재가 간하여 가지 않았다.

 

31. 군수해유법 제정

 

군수의 해유법을 제정하였다.

세부를 정리하지 않으면 해유관리가 경질될 때 전임관이 후임관에게 관청의 수지관계의 문서를 인계하고 소관 물품과 금전출납에 착오가 없을 때 호조에서 발급하는 증명서. 이 해유상을 받아야 다른 관직에 전보될 수 있음. 편자주 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이때 량세를 모두 금전으로 받아 조정에서 우려하는 것은 운반해 올 때 언제나 10분의 1을 빼내어 그것을 태비(태비)로 지출하였으나 그것을 군수가 챙기었고, 혹은 내외의 고관들이 권력을 빙자하여 그것을 챙겼기 때문에 군수는 조금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리고 돈으로 바꿔 납부할 상인들도 태비를 잃을 뿐 아니라 본전까지 축을 내어 서로 도주하므로, 이로부터 국가에서는 앉아서 손해를 본 경비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중간에서 모두 착취하여 세부를 정리하지 못한 군이 있었으며, 관리들도 이를 연유로 공공연히 범장을 하여 쌓인 포세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법령이 아무리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조종할 기준이 없으므로 종종 해유를 거치지 않고 전임한 관리가 있었다.

 

32. 황의수의 교수형

 

교인 황의수가 함녕전으로 들어가 큰 소리로 “나는 천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란언률에 연좌되어 교형을 당하였다.

 

33. 권귀가에 폭탄 투척

 

서울의 권귀가에 폭탄 투척사건이 밤마다 발생하였다. 하루는 신기선의 사랑채가 소실되자 그 사건을 규명하기를 간청하였으나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이때 고종은 크게 두려워하여 남몰래 러시아공관으로 도피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 후 림병길이란 자를 체포하여 조사한 결과 그가 대궐을 침범하려는 음모가 있었으나, 결국 그 범죄를 규명하지 않고 밤에 순찰만 하여 묘사, 전궁 및 중용된 재상의 집을 수호하였다.

 

34. 윤용선의 시찰관 소환 제의

 

윤용선이 시찰관을 소환하자고 간청하자 고종은 사헌을 바랐으나 매우 강력히 간쟁하여 윤허를 받았다.

 

35. 선혜청 별창의 화재

 

선혜청의 별창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36. 표훈원 설치

 

표훈원을 신설하였다.

 

37. 채회 금지

 

채회를 금지하였다. 이 채회는 일명 만인계라고도 하는데, 외국으로부터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돈내기를 가장 많이 하는 도박이다.

 

38. 금영수의 사망

 

금영수가 사망하였다. 그의 시호는 문헌이다.

 

39. 서울에 대우

 

서울에 많은 비가 내렸다.

 

40. 민영주를 경기관찰사로 임명

 

그리고 민영주를 경기관찰사로 임명하였다.

 

41. 사족계

 

미국 뉴욕에서 사족계가 태어났다.

 

42. 주한일본공사림권조의 내한

 

6월, 일본 공사가등증웅이 해임되고 신임공사 림권조가 내한하였다.

 

43. 리건하의 면직과 민영주의 유배

 

윤용선이 간청하여 리건하를 면직하고 민영주를 유배하였다.

이건하는 아내의 큰 역할로 인하여 내비를 받아 군수 100여 명을 제수하고, 민영주는 명을 받들어 왕래하면서 절반은 그의 농간으로 제수하였으므로 윤용선은 그들의 비행을 아뢰어 폄손(폄손)하였다.

그 후 민영주의 아들 민경식이 상소하여 윤용선을 저훼(저훼)하고 그도 아울러 면직시켰다.

 

44. 일본의 조선 망명인사 사환 요구

 

일본인이 우리 나라의 망명인을 사환하여 일체 서용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고종은 정부로 하여금 응하지 못하게 하였다.

 

45. 금영덕을 충남관찰사에 임명

 

금영덕을 충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46. 미국인 보시의 어진 진상

 

미국인 보시(미상)가 어진과 예진을 그려 와 상금 1만원을 하사하였다.

 

47. 허치슨에 이품 금장 하사

 

영어교사 할치신(허치슨 : W.F. Hutchison)에게 이품 금장을 하사하였다. 교육에 대한 공로이다.

 

48. 일본의 동전 구입

 

일본에서는 동이 귀하여 동질이 많은 우리 동전을 구입하였다. 그 가격은 120문이다. 그들은 동전을 용해하여 동을 얻었으므로 인근 사람들은 동전을 가지고 모여들어 6개월이 되지 않아서 17만5천여 냥이 용해되었다.

 

49. 전남 함평 등지의 해일과 충북, 경남지방의 우박

 

전남의 함평, 무장, 령광 등 여러 군에 해일이 일어 익사한 사람이 많았고, 충북의 청주군에는 계란같이 큰 우박이 내려 일화야를 지난 후 녹았으며, 경남의 금해군에는 얼음과 우박이 많이 내렸다.

 

50. 민병석 등의 대신 임명과 조종필 등의 관찰사 임명

 

7월, 민병석을 내부대신, 리건하를 학부대신으로 임명하고, 조종필은 경기관찰사, 리근용은 경남관찰사, 민형식은 황해관찰사, 안동군수정세원은 평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51. 각도에 안렴사 파견

 

안렴사리도재를 전라도, 조병호는 경상도, 금종한은 함경도로 파견하고, 이어 한규설, 침상훈, 박정양, 조병직, 신기선 등을 각도로 파견하였다.

 

52. 고성, 통천에 지방대 설치

 

고성, 통천 지방에 지방대를 설치하였다.

 

53. 민종렬의 사망

 

전담양군수민종렬이 사망하였다.

 

54. 의화군리강과 황자 리은의 일본체류

 

의화군리강의 유학비 2천원을 일본으로 보냈다.

황자 리은이 조금 장성하여 엄귀인은 바라는 꿈이 있으므로 제귀인들은 금영준, 민병선 등과 함께 이강에게 붙어 누차 귀국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황실에서 무슨 화가 일어날까 싶어 아직 체류하고 있으라고 잇달아 하명하였다.

 

55. 청국인의 룡천 탄광 개광

 

청민이 룡천군에 탄광을 개광하자 동!!비 류패진, 손량한, 로귀시 등이 후창, 장진 등 여러 군을 침범하였다.

 

광무 3년 기해(1899년) ②

 

1. 장종, 정종의 추존과 윤숙, 임성 등의 치제

 

28일, 장헌세자를 장종대왕으로 추존하여 시호는 신문환무장헌광효, 능호는 륭릉, 전호는 경모전이라고 하였으며, 혜빈 홍씨의 휘호는 인철계성왕후, 정종대왕의 존호는 경천명도홍덕현모, 효의왕후는 장휘로 추상하고 홍봉환은 영풍부원군, 그의 부인 리씨는 한산부부인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윤숙, 임성, 림덕제, 권정침, 리이장, 한광조, 조중회, 리익원, 리종성, 리천보, 리  , 민백상, 금종수, 유언호, 윤시동, 채제공, 박종악, 금조순, 서유린 등의 사우에는 제사를 지내고 특진관서상조에게는 한 자급을 올려 주었다.

이것은 6월에 서상조가 상소하여 장헌세자를 추존하자고 간청하자 고종은 종친문무 2품 이상 및 시원임대신, 유현 등의 여론을 청취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청양에 있던 침순택은 다음과 같이 헌의하였다.

“신은 로병으로 곧 죽을 날이 가까워도 날마다 옥부가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사온데, 뜻밖에 례조의 랑관이 와서 하문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대례에 관계되므로 이 목숨이 끊기지 않는 이상 어찌 침묵을 지키고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제폐하의 풍공과 대덕은 삼황, 오제를 능가하시고 또 새로 천명을 받아 대보를 응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예의에 맞게 하시어 모두 기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선조의 유업을 계승, 조술하는 일에 있어서도 성의를 다하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경모궁의 의절은 정조 25년의 정의가 있을 뿐더러 영조의 어서로 쓴 <금등편>이 운한처럼 소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아, 이 두 성조의 측달한 교지는 백세 후에도 신하가 된 사람들은 어찌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재신의 소장은 집안 대대로 지켜 온 의리이온대 어찌 한 사람 한 집안의 사론이라고 하겠습니까? 참으로 온 나라의 대동론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두 성조의 영령도 기뻐하실 것이며 렬성들에게 은전을 추상할 겨를이 없었던 것도 오늘을 기다리는 듯하오니 속히 욕의를 거행하여 전대의 공적을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봉조하금병국과 송근수, 특진관신응조, 조병세, 송병선 등은 발언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면서 신병을 칭하여 의견을 말하지 않았고, 또 영남 유생들은 소장을 올려 속히 전례를 시행하라고 간청하였다.

영남 유생들은 정조 이후 누차 장헌세자를 추숭하자고 간청하여 이것을 일대의리로 여겨 왔다. 처음부터 말하자면, 영조가 장헌세자를 살해한 후 100세 후에 그를 추숭하자는 여론이 일어 자신을 대악으로 몰아세울까 싶으므로 진종을 그의 세계로 내세워 종묘에 부제하고, 정조를 거느리고 태묘에 서고한 후 후세에 만일 사론과 영합하면 역률로 논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심순택이 말한 <금등편>이다.

그러므로 정조는 평생 동안 감히 고치지 못하였고 그 일을 들먹이는 사람만 있으면 즉시 사형으로 처하여, 이때부터 그에 대한 추숭론은 세상에 금지되어 왔다.

그러나 고종은 장헌세자의 자손 집과 사친이 되는 사이여서 임오군란 때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는 데다가 이때 또 황제가 되어 당연히 4대를 황제로 추존해야 하기 때문에 서상조에게 상소를 하게 하고, 심순택에게는 여론을 수렴하게 하여 안팎으로 호응하게 한 후 단연 결행한 것이다. 그러나 장종은 이미 부제하였으므로 축문을 쓸 때 「황고조」로 칭하면 진종은 어떻게 칭해야 할 것인가? 아무리 허문과 류례로 일시적인 위장을 한 것이지만 그것은 영조에게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임오군란 이후 시속배의 싸움은 승부가 나지 않아 서로 충신과 역적이라고 배척하고 있는 판국에, 지금 그들에게 모두 포유를 내려 다 같이 사제를 하면 이것은 공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 제도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아버지는 과거를 볼 수 없으므로 서상조는 나이가 늙도록 음사를 하고 있으면서 언제나 대과가 있을 때는 그의 아들에게 시권을 주지 말라고 하며 “내 나이 70세도 안되었으니 과거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임오년(1882) 가을에 상소하여 명성황후를 복위하자고 간청한 덕으로 다시 대과에 발탁되었는데, 이때 또 그에게 특별히 자급을 더해 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가 공교롭게 관직을 지속한 데 대해 꾸짖었다.

 

2. 채제공의 비함

 

채동술은 채제공의 증손으로 안기영의 옥사 때 처형되어 그 가족들이 충청도로 이거하였는데, 이때 제전이 하사되자 그 가족들은, “채제공이 지은 <비함>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데 금년 모월 모일에 열어 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은 「장이유의차효 계문손기만억 신배장공사백」 씩씩하고 여유가 있으며 아름답고 효성스럽다. 훌륭한 자손이 태어나 만억년의 터전을 마련할 것이니 신은 이것을 잘 간직하여 100년을 기다리겠습니다. 편자주 이라고 하고 그 끝에는 「기미원일」이라고 하였다. 그 년월을 헤아려 보면 100년이 다 되었다.

이 사실을 아뢰자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제호를 받아 장종을 추숭하는 일이 모두 전대에 정해져 이미 100년 전에 그 징조가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3. 술사 성강호와 고종의 사후

 

충주에 사는 성강호란 사람은, 자신이 귀신을 본다고 하므로 고종은 그를 불러 명성황후를 보여 달라고 하였다.

하루는 경효전에서 다례를 행하고 있는데 성강호는 갑자기 계단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고종이 그 까닭을 묻자 그는 “황후가 림하고 있습니다. 지금 탑에 오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은 탑을 어루만지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때 성강호는 “그렇게 요란하게 애통해 하시면 신령이 임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고종은 억지로 눈물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어느 궁전이나 능에 일이 있으면 고종은, “황후가 오고 있습니까? 안 옵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유명이 달라 혹 강림하기도 하고 강림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은 언제나 명성황후가 생각나면 반드시 그를 불러들이었으므로 그는 1년 사이에 협판이 되어, 그의 문전은 항시 시장처럼 붐볐다.

 

4. 엄세영의 사망

 

초3일, 전판서엄세영이 사망하였다.

그는 영욕에 부침하며 쓸쓸히 지내 아무 일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었으나, 갑자기 귀족이 된 엄씨들은 엄세영을 명문 거족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순정효황후순종의 비이며 윤택영의 딸임. 편자주 를 통해 통보를 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불응하여 두문자폐하면서 간혹 건이나 삿갓도 쓰지 않고 주점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안주를 손에 들고 길을 다니며 먹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지목하였다. 그는 이런 생활을 5, 6년 동안 하다가 사망하였다.

 

5. 금원동의 신통력

 

통천에 살던 금원동은 방탕한 생활로 그의 아버지에게 사랑을 잃어 동구릉까지 전전해 왔다. 그는 길을 가다가 조그마한 병 하나가 무슨 소리를 내며 훌떡훌떡 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꼭 사람의 말소리 같았다. 그가 병의 입을 막고 두들기면서 “나는 어디로 가면 밥을 얻어먹겠느냐?”하고 묻자 응답하기를, “모방으로 가면 된다”고 하므로 시험삼아 그 방향으로 가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금원동은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여 한 번 두들겨 본 후 옷 속에 넣고 서울로 들어갔는데, 점을 치러 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는 강석호의 집에서 문객으로 있으면서 리원근으로 변성명을 하고 있었다. 이때 영친왕이 병을 앓고 있어 강석호가 그의 신통력을 말해 주었다. 그는 병이 나을 시기를 정확하게 맞추어 크게 총애를 받았다. 고종은 즉시 그를 금화군수로 임명하고 대내의 기양을 주관하게 하여 그의 위복은 온 도내에 선풍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버지가 찾아오자 거절하여 쫓아버렸다.

 

6. 윤두수 신주의 도난

 

절도가 문충공윤두수 1533~1601.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자앙이며 호는 오음으로, <기자지>, <함인록> 등 많은 저서를 남겼음. 편자주 의 신주를 훔쳐서 숨겼으나, 그의 집에서 7천냥을 주고 반환하였다.

 

7. 리선득의 사망

 

의정부의 찬무인 미국인 리선득(리젠드르 : C W. Legendre)이 사망하였다.

 

8. 러시아공사드미트리프스키의 장례

 

러시아공사덕밀특(드미트리프스키 : P.A. Dmitrevsky)이 사망하므로 양화진 위에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9. 함남, 평남지방의 폭우피해

 

함남의 함흥군은 큰 화재로 인하여 만세교가 유실되고, 장진군에는 사흘 밤 동안 된서리(엄상)가 내렸다.

그리고 경북의 경주와 영천군에는 큰 비바람과 우박 등이 심하였고, 평남의 녕원군에는 비가 많이 내리어 800여 호가 물에 떠내려가고 익사자는 700여 명이나 발생하였다.

 

10. 호남의 우역

 

호남에서 소(우)들의 열병이 크게 발생하였다.

 

11. 일본의 포우피해

 

일본은 폭우로 인하여 가옥이 9,800여 호나 파괴되고 사망자는 7천여 명이나 발생하였다. 그리고 적리(적리)도 유행하여 7,600여 명이 사망하였다.

 

12. 리희로의 유배

 

8월, 특진관리희로가 상소하여 금종수의 추탈을 간청하고 민경호, 조희영, 리필구, 리문구 등도 그와 동조하여 그는 결국 유배되었다.

이때 이미 난리가 일어날 징조가 나타났고 조정에서도 지난 일을 가지고 서로 알력을 일삼아,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이(치)가 시림을 느꼈다.

 

13. 종정원의 직제 증설과 리재원 등의 군호 임명

 

8월, 종정원에 명하여 군, 도정, 정, 부정 등 직책을 더 늘리도록 하였다. 이것은 경모전을 추숭한 후 사친들이 관직을 승습하기 위한 절차이다.

그리고 리재원은 완림군, 리재긍은 완영군, 리재근은 인양도정, 리재덕은덕안도정, 리재완은 완순군, 리재순은 청안군, 리재각은 의양도정, 리재성은 경은도정, 리재규는 례양부정을 봉하여 각국 황실의 규범에 맞에 시행할 것을 명하고 행정직은 허락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종전의 직첩은 주게 하였으므로 그들은 그 직첩을 받았다.

 

14. 평악정 건립

 

선희궁에 평악정을 건립하였다.

 

15. 영보당의 화재

 

경복궁에 있는 영보당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16. 리승오의 가산 적몰

 

금영준을 경무사로 임명하고, 리승오의 가산을 적몰하였다.

 

17. 일본의 울릉도 점거

 

일본인이 울릉도를 점거하자 도감배계주가 일본으로 가서 담판을 벌였다.

 

18. 서울의 폭우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꺾이고 많은 비가 왔다.

 

19. 신응조의 사망

 

9월, 전령의정신응조가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는 96세였다.

그는 임오군란 후 서울을 들어오지 않았고, 광주에서 진잠(진잠)으로 이거한 후 두문불출하여 손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정력이 쇠퇴하지 않아 94세의 나이에 사적을 근거로 저술을 중지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중망을 받아 진정한 재상이란 말을 들었다.

그가 사망한 후에는 원근 사람들이 경탄하였고, 고종은 그가 임오군란 때 나오지 않는 것을 대절로 생각하여 사후의 은전을 매우 우악하게 하였다.

 

20. 일본인의 통영 군기 약탈

 

10월, 일본인이 통영의 군기를 약탈하여 선박에 싣고 가다가 사용할 수 없는 군기만 골라 바다에 모두 던져 버렸다.

 

21. 영국 녀의 전류 초빙

 

영국 여의사 전류(미상)를 고빙(고빙)하여 부인들의 질병을 치료하였다. 그의 월급은 300원이었다.

 

22. 마중군과 맹감역

 

서울의 김씨라는 여자가 엄귀인의 교지를 받아 금해로 가서 기도를 하다가 화적인 마중군에게 잡혀갔다.

마중군은 호서 사람으로 갑오년(1894)에 동비로 활약하다가 병신년(1896)에 의병이 되어 망명한 사람들을 취합한 후 수백 리를 순식간에 질주하므로 관군은 그들의 종적을 탐지할 수 없었다. 그는 조정의 고관들과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신을 보내어,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여 효과적으로 기용하면 각 지역이 소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어 그들은 다시 적도가 되었다. 이때 적의 우두머리 중에는 마중군과 맹감역이란 칭호가 있었다.

 

23. 태조 및 사조의 추존

 

11월, 태조대왕을 태조고황제(광계천전를 태, 조기립극을 고.)로 추존하였다. 그리고 신의, 신덕왕후 및 고황후와 그 4세도 추존하여 장종대왕을 장조의황제, 헌경왕후를 의황후, 정종대왕을 정조선황제, 효의왕후를 선황후, 순조대왕을 순조숙황제, 순원왕후를 숙황후, 익종대왕을 문조익황제, 신정왕후를 익황후라고 하였다.

그리고 리종성과 민백상을 장조의 신실에 배향하고 리천보, 리  , 민백상은 불조묘를 지어 제향하도록 하였다.

 

24. 인조의 추존

 

인조의 존호를 추존하여 개천조운 정기선덕이라고 하고, 인렬왕후는 정유, 장렬왕후는 숙목, 효종은 흠천달도 광륙홍렬, 인선왕후를 정범, 명성황후를 홍공, 명헌태후를 강수, 대황제를 외훈홍업 계기선력이라고 하였다.

 

25. 고황제 배천

 

동지에 고황제를 남교에서 배천하고 대사령을 내렸다.

 

26. 금사철의 엄귀인 봉비 청원상소

 

금사철이 상소하여 엄귀인을 비로 봉하자고 간청하였다.

 

27. 진주의 약령 설치

 

진주에 약령을 설치하였다. 우리 나라 풍속에 약재시장을 령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봄가을로 대구, 공주 등지에서 설치하였으나 민응식이 청주에서 통제사로 있을 때, 공주의 약령을 청주로 옮겼다가 다시 폐지하였다.

그 후 조시영이 경남관찰사로 있으면서 진주의 잔폐상을 민망히 여기어 그곳에 약령을 설치하기 위해 조정으로 보고하여 강력히 설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대구처럼 성황을 이루지 못하였고, 리근용이 그의 후임으로 임명하였을 때는 관애(관애)마다 칙명을 내려 상민들을 체포하라고 첨정처럼 짖어대므로, 이로부터 교역의 길이 막혀 상민들은 큰 곤란을 겪었다.

 

28. 청국인의 강북류입

 

강북대원을 위원으로 파견하여 청인의 류입가옥을 관할하게 하였다.

 

29. 삼남지방의 화적

 

기호와 량남 지방에 화적이 치성하였다. 성주 사람 금기준이 대구영장으로 있을 때 화적 50여 명을 살해하였는데, 이때 그가 하동군수에서 면직되어 귀향하자 화적들은 그의 집을 포위하고 있다가 그의 아들을 불에 태워 살해하였다.

 

30. 일본인에게 포경권 허락

 

일본인에게 강원, 함경, 전라, 경상 등 4도 해상의 포경권을 허락하였다.

 

31. 금종한의 매장납전

 

금종한을 함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안렴사로 임명되었으나 고원과 하습지대를 두려워하여 대충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므로 고종은 크게 노하여 “종한은 삼수갑산에서 몇 년이나 있고 싶으냐?”고 하였다. 그것은 장차 먼 곳으로 유배하겠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는 매우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자기 전장을 팔아 수만 냥을 상납한 후 무사하게 되어 다시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32. 청국 도둑떼의 약탈

 

청국의 도둑떼들이 삼수군을 크게 약탈하였다.

 

33. 일본공사림권조의 휴가

 

일본 공사림권조가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10여 일 만에 귀환하였다.

 

34. 민영찬을 만국박람회에 파견

 

박물대원민영찬을 프랑스 수도 파리로 파견하였다.

 

35. 금창석의 사망

 

금창석이 하옥된 후 사망하였다. 경무사금영준은 날마다 돈 1만민을 갖다 바치므로 경향 부호들은 그에게 걸려들어 파산한 사람이 수백 호나 되었다.

그리고 김창석은 전후에 걸쳐 징수액이 60만민이나 되므로 고문을 하였는데, 그는 고문에 못이겨 사망하였다. 상여가 그의 향리로 돌아갔으나 아무도 그를 불쌍하게 여긴 사람이 없었다.

 

36. 대구 약령의 화재

 

대구의 약령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37. 조한국 등을 관찰사에 임명

 

12월, 조한국을 충북관찰사, 정일영을 강원관찰사로 임명하였다.

 

38. 침상훈을 주청공사에서 면직

 

12월에, 침상훈을 주청공사로 임명하였으나 곧 면직되었다.

 

39. 황태자의 칭경 청원

 

황태자는 명년에 고종의 수가 49세이므로, 세번째 상소하여 칭경을 간청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40. 샌즈를 찬의관에 임명

 

미국인 산도(샌즈 : W. F. Sands)를 궁내부찬의관으로 임명하였다.

 

41. 윤태흥의 과거제도 복원 간청

 

전참판윤태흥이 상소하여 과거제도의 복원을 간청하였다.

 

42. 청국인 상점 화재

 

서울의 청인 상포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고, 전주 서문 밖에 있는 상전에서도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43. 윤용선을 의정에 임명

 

윤용선을 의정으로 임명하였다.

 

44. 파블로프의 귀환

 

러시아 공사파블로프가 귀환하였다.

 

45. 대원군 사우를 건립

 

흥선대원군의 사우를 건립하였다.

 

46. 금양현당의 교장 임명

 

호를 양현당이라고 한 김씨 여인이 여학교 교장이 되었다.

 

47. 한국의 발명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신학을 연구한 사람 중에 공예품을 발명한 사람으로는 리여고, 리태진, 리인기, 리태호 등이 있다. 자직기를 발명한 사람은 유긍환으로, 그는 자도련기를 발명하였다.

한욱은 전보기, 고영일은 량지기, 민대식은 류성기와 사진판, 서상면은 구주에 유학하고 있을 때 1년에 7, 8차례나 양잠하는 법을 발명하였다.

양주 구선동민들은 소련, 항주, 구미 등의 뽕나무(상목) 십만 그루를 심어 그 사실을 신문에 게재하였으나 위에서 권장하는 사람이 없어 다시 폐지하였다.

 

광무 4년 경자(1900년) ①

 

1. 망명인사 안경수의 귀국

 

경자년(1900) 광무 4년(청국 광서 26년, 일본 명치 33년) 1월, 망명인 안경수가 일본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자수한 후 수감되어 신문을 자청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있으면서 울분을 품고, 일본의 후원을 받아 환국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 이에 그와 함께 망명한 사람들은 그를 만류하였으나 그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의젓이 자수를 하였다.

이때 상민 라유석 등은 상소하여 그의 신원을 위해 관사에 거처하게 하라고 간청하였고, 시배들도 그를 위로하기 위해 서로 줄을 서서 방문하여 술을 실컷 마시었다. 그것은 안경수가 갑오경장 때의 겁맹(겁맹)과 을미년의 행시, 무술년의 내선 등 사변이 있을 때마다 주창하지 않는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백성들은 고종의 실덕을 원망하였으나 죄를 돌릴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안경수도 자신을 경범으로 자처하여 그가 이미 수감된 후에도 민영준, 민영환, 한규설 등이 저지른 내선의 음모를 인거하므로 여러 사람들의 상소를 불문에 부쳤다.

 

2. 강성형, 윤세용 등의 유배

 

강성형, 윤세용, 박희댁 등을 유배하였다. 강성형 등은 박영효와 내통하여 고종을 경복궁으로 이어한 후 정부를 전복하려다가 그 일이 발각되었다. 이것은 모두 극형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그 사건이 박영효와 관련되어 앞날의 성패를 점칠 수 없으므로 모두 경형을 적용하였다.

 

3. 윤웅렬을 경무사에 임명

 

금영준을 아산군으로 유배하고 윤웅렬을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4. 윤용선의 상소

 

윤용선이 상소하여 2차 사안을 논하였다. 첫째는 궁금을 엄숙하게 하자는 것과, 둘째는 잡세의 정지와 파원 개혁으로, 그의 상소는 대충 다음과 같다.

“궁금을 엄밀하게 해야 함에도 과연 어떻게 해서 요즈음 기강이 해이되고 있습니까? 공사를 핑계로 사사를 꾀하고 있어 그 폐단이 매우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승후관이 내전을 진찰하기 위해 들어간 후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아무리 종척이라도 촌수를 한정하고 혹 문학을 겸비한 현명한 선비로서 악대(악대)를 빈번히 하는 사람이라도 특명으로 부르지 않으면 감히 알현하지 않는 것은 조종조의 옛법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조신들은 돈녕부사의 직함도 없는데 사방의 부잡배들은 그들을 인연하여 마음대로 출입을 하고 있지만 아무 방지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밀을 누설할 뿐 아니라 위복을 절취하고 요행의 문을 크게 열고 있어 모든 폐단이 속출하고 있으니, 엄하게 금지하여 종척과 승후관이라도 옛날 법을 적용하시어 범법자가 있으면 신의 부내에서 논죄를 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갑오경장 이후 누차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아직까지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매기어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 다방면으로 세금을 징수하여 그 명목이 한결같지 않은 데다가 사방으로 관원을 파견하여 그들이 백방으로 침해하고 있습니다. 민심이 한 번 흔들리면 비록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도 그 뒷일을 잘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가 재물을 생산하는 데도 다만 어느 정도의 수가 있을 뿐이며, 생산하는 힘도 이 나라에 있지 않으면 백성에게 있습니다. 백성들이 부유하게 살면 그 나라의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부족을 느끼고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속히 칙령을 내리시어 모두 개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일 경비가 궁색할 때 이 잡세로 보충하려고 하면 그 권리를 차라리 탁지부로 전속을 시키는 일은 없게 하고, 시일이 오래 걸리고 지역이 가까운가를 잘 참작하여 간혹 관직 제수도 하고 혹은 직첩을 거두어 들여 그 수입금을 경비로 활용하면 오히려 탕진하거나 중간에서 독식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이때 별입시의 명목이 날로 늘어나 청별입시, 계별입시, 지별입시 등의 차별이 있었다.

청은 승청한 사람, 계는 뜨락에 나열해 있는 사람, 지는 땅에 서 있는 사람으로, 위로는 대관으로부터 아래로는 녀무, 남무와 백정, 거간꾼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고종은 그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이 알현할 때마다 수만 세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입시한 사람들은, 고종이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회를 노려 서로 알현하곤 하였다. 일설에 모지에는 광산, 모지에는 수리, 모물은 대충 들추어내고 모사는 당연히 설립해야 한다고 하면 고종은 제가를 해주었다.

그러나 서북도에는 백성들이 강한하여 파견된 관원들이 누차 낭가에 실려 쫓겨나거나 혹은 구타를 당하였으므로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고, 오직 량남만 화를 당하여 원성이 날로 드높았다. 이때 윤용선은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억지로 이 상소를 하였다.

 

5. 민병석, 금규홍 등의 입각

 

침상훈을 탁지부대신, 금규홍을 학부대신, 민병석을 농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6. 의화군리강과 리준용의 학자금

 

의화군리강과 리준용의 학자금 1,375원을 일본으로 보냈다.

 

7. 홍릉의 개정

 

홍릉을 양주 금곡의 청량리로 다시 정하였다.

 

8. 진주와 상주의 동학 잔당

 

동비의 잔당들이 진주와 곤양 사이에 둔취(둔취)해 있자 관찰사리근용이 전화로 그들의 토벌을 청하였고, 또 보은의 보고에는 상주 지방에서 신분을 알 수 없는 100여 명의 인원이 속리산 천왕봉으로 올라가면서 자칭 기도를 드리러 간다고 하고, 그들이 들고 간 깃발에는, 「천지합덕 척왜양창의기」라고 씌었으며 그들은 3일 동안 머무르다 떠났다고 하였다.

 

9. 영남지방의 소작료 관행

 

경남지방에는 반복을 가지고 소란을 피운 일이 있었다. 영남의 풍속은 옛날부터 지주(지주)와 소작인이 추수가 시작되면 그 소작을 동일하게 나누었는데, 만일 2석이 나오면 각 1석씩 나누어 갖고 매결마다 1부를 공제하여 그 1두조로 결세를 충당하였다.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매 1부에 30전이었다.

그러나 조가는 계속 앙등하여 매두마다 100전이 넘으므로 지주는 소작인을 위협하여 매부마다 조 5승을 거두어들여 그 30전을 납부하고 그 남은 이익을 챙기므로 마을마다 원성이 자자하였다.

그러므로 궁내부에서는 관원을 파견하여 부민들의 이윤을 모두 환수하려고 하자 그들은 서로 소동을 일으켜 떼를 지어 다니며 비방하고 속이므로 격변이 일어날 조짐이 있었으나, 이때 리은용이 그들을 효유하여 겨우 진정되었다. 구습을 바꾸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10. 일본인의 금옥균 묘비 건립

 

일본인 견양의 등이 모금하여, 금옥균의 묘비를 건립하였다.

 

11. 열병의 유행

 

이해 겨울과 봄 사이에 열병이 유행하였다. 열병의 증세는 가벼웠지만 감기는 매우 심하여 1개월 사이에 경향 각지로 번져 종종 사망하는 사람이 있었고, 약포에는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반하 천남성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 30cm 가량으로 여름에 얇은 황백색 꽃이 핌. 잎줄기는 약용함. 담, 구토, 해수 등의 약재로 쓰임. 편자주 와 백지(백지)어수리의 뿌리 편자주 는 그 가격이 3배나 뛰었다.

외국 사람들은 이것을 흑사병이라고 하면서 예방을 매우 엄하게 하였다. 상해, 향항, 일본 등지에도 수만 명이 사망하였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우리 나라는 그 여세를 만나 증세가 가벼웠으므로 치료하기가 쉬웠다고 한다.

 

12. 태조 어진의 흥덕전 이전

 

2월, 윤용선을 파견하여 영흥 선원전(선원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을 흥덕전으로 옮겼다.

 

13. 신묘, 갑오 식년사마방의 간행

 

2월, 신묘, 갑오 양년의 <식년사마방>을 간행하였다. 처음에 이 량시방은 난리를 겪은 후 간행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리재순, 금종한 등이 간행하여 생원, 진사들에게 그것을 팔아 큰 이익을 챙기므로, 궁내부에 간행소를 설치하려다가 이제 수진방에 간행소를 개설하였다. 이때 생활이 궁색한 생원, 진사들은 모두 머리를 움츠리고 있었다.

 

14. 러시아, 프랑스 등 각국에 훈장 송부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미국, 청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 훈장을 보냈다.

 

15. 조병식, 권재형 등을 대신에 임명

 

조병식을 탁지부대신, 권재형을 법부대신, 침상훈을 찬정으로 임명하였다.

 

16. 리규환의 동학교도 추격

 

해서제군에 동비들이 다시 일어나고 량호의 잔당들도 덕유산에서 천제를 올렸다. 이때 상무사원리규환이 그들을 추격하자 그들은 전도차첩, 념주, 투서(투서) 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17. 경흥, 원산 지방의 민란

 

경흥부에 민란이 발생하여 감리남명직을 수감하였다. 남명직은 도처에서 탐혹하여 그의 별호를 「남주뢰」라고 하였다. 그리고 원산항에도 민란이 발생하여 경무서를 파괴하자 경무관류한원을 해임하였다.

 

18. 금종한과 박봉빈의 임지 맞바꿈

 

함북관찰사금종한과 함남관찰사박봉빈의 임지를 상환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임지 상환은 이때부터 시작하였다.

 

19. 경인철도의 개통

 

경인철도가 개통되어 하루에 네 번 왕복하였다.

 

20. 충청남북도의 활빈당 활동

 

충청남북도에 도둑이 발생하여 자칭 「활빈당」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대낮에도 약탈을 자행하여 내포에서부터 관동지방까지 만연하므로 그들을 토벌하라는 전화가 계속 쇄도하였다.

 

21. 주청공사의 파견 보류

 

박승조를 주청령사관으로 임명하여 연대로 파견하였다. 이때 청국의 대란으로 인하여 공사의 파견을 중지하고 먼저 영사를 파견하였다.

 

22. 서울에 호랑이 출몰

 

호랑이가 밤마다 서을 삼청동을 침입하였다.

 

23. 미국의 타조

 

미국에는 수레를 끌 수 있는 타조가 있다고 한다. 그 높이는 9척 6촌이나 되며 일보의 거리는 18척이나 된다고 한다.

 

24. 독일참찬관라인도르프의 알현

 

3월, 독일참찬관뢰은덕(라인도르프 : F. Reindorf)이 고종을 알현하였다.

 

25. 충북관찰사조한국의 면직

 

충북관찰사조한국은 공전이 체불되어 면직되었다. 이때 파직된 수령들도 매우 많았다.

 

26. 청명일의 묘사향례

 

한식절에 묘사와 전궁에 지내던 제향을 지금부터 청명일로 정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한식절은 개자추 춘추시대의 진인. 일명 개지추라고도 하며 진문공이 19년 동안 망명생활을 할 때 계행하였으나 문공이 환국한 후 소원하게 대하자,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면산)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에 문공은 그를 찾기 위해 면산에 불을 질렀으나 그는 끝까지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으므로 주민들은 그를 애도하기 위해 그날은 밥을 지어 먹지 않아, 이날을 한식절이라고 하였다. 편자주 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며 임금이 행해야 할 례는 아닌 것이다.

 

27. 서상룡을 경무사에 임명

 

서상룡을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28. 리도재의 박정양 해임

 

호남안렴사리도재가 량무총재박정양을 해임하고 조병식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이도재는 매우 청백하여 탐묵리 수명의 비리를 아뢴 후 그들을 파직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권력가였다. 그 후 그를 비방하는 소문이 날로 들리자 고종은 그에게 불만을 품어 그의 권리를 조금 꺾었으나 결국 이도재의 복권을 명하였다.

 

29. 속리산 동학당의 제룡왕문

 

전감찰최재호는 관군을 인솔하고 속리산을 수색하여 동학도 40명을 체포하고 그들의 문서를 빼앗아 보고하였는데, 그중 제룡왕문은 다음과 같다.

“경자년(1900) 3월 15일 자시오후 11시부터 익일 1시 편자주 에 선봉대원수, 중봉삼황후봉오제는 행차하여 장차 한강을 건너 경성을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북해 룡국에 제물을 바치오니 주인이 제향한 후 용왕은 선봉, 흑제장군은 후봉이 되어 수군병마 3천명을 거느리고 3월 15일 인시오전 3시부터 5시 편자주 에 한양을 도착하기 바랍니다. 만일 이 령을 어기면 별도로 답형 300대를 가하여 어별(어별, 물고기와 자라)의 불순한 죄를 적용하여 북방의 불모지로 유배하고, 흑룡국을 모두 혁파할 것입니다.”

그리고 깃발에는 「남조선산여곡사명후봉」이란 11자를 큰 글씨로 써 놓았다. 그들은 비루하고 망령스럽기가 이러하였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들을 신종하여 끝까지 단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은군의 군리리한호는 청주대와 합류하여 활빈당 30여 명을 쫓아내고 청산군에서는 동비 3명을 체포하였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 수천 명은 한식일 천왕봉에 모여 최제우의 제사를 지내고 경성으로 향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제각기 효복 한 벌씩을 가지고 다녔는데 제사 때 입는다고 하였다.

 

30. 일본인의 갑오전역비 건립

 

일본인들은 서울왜장대에 「갑오전역기념비」를 건립하였다.

 

31. 종가의 전등

 

서울종로에 전등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32. 마산포를 러시아인에게 매도

 

외부의 관원 정대유, 량종언을 과견하여 마산포 10리 지역을 러시아인에게 매도하였다.

 

33. 경기, 강원지역에 천주교 전도

 

천주교 교사 일약명(미상)과 유세환이 경기, 강원 지방 및 량서 지방에 전도하였다.

 

34. 의화군 강의 학자금 송금

 

의화군리강의 학자금 750원을 일본으로 보냈다

 

35. 궁례 탄룡성에게 성씨 하사

 

궁예(궁례) 탄룡성에게 최씨 성을 하사하였다.

 

36. 러시아인이 월미도에 매탄고 설치

 

러시아인이 인천 월미도에 매탄고를 설치하였다.

 

37. 훈장조례의 반포

 

훈장조례를 반포하였다. 그것은 금척대수장, 리화대훈장, 태극장, 자응장(자응장)이다.

 

38. 청국인의 삼림도벌

 

청인들이 압록강 연변을 침입하여 삼림을 도벌하자, 경성 사람 금진수가 자신을 삼림보호위원으로 추천하였다.

 

39. 일본에서 흑사병 병균을 규명

 

일본에서 흑사병이 발생하였을 때 그들은 검역소를 설치하여 그 병균을 규명하였는데, 그 병균은 쥐에서 전염된 것으로 예상되어 쥐를 잡아 실험해 본 결과 과연 그 예상이 맞았다. 전후에 걸쳐 잡힌 쥐는 3만여 마리가 되었다.

그리고 잉어에도 균이 있어 모든 사람에게 잉어를 먹지 말도록 금지하였다. 그 병균은 장티푸스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그 균은 실오라기처럼 미세하여 현미경으로 보아야 알 수 있었다. 일본인들이 물리에 유의한 것은 모두 이와 같이 정교하였다.

 

40. 영국의 인도 구제금 제공

 

인도에 기근이 들자 영국에서 진휼금 수십만 파운드를 주었다.

 

41. 남아메리카에 기형아 출생

 

남미주에서 몸 하나에 머리가 두 개 달린 아이가 출생하였다.

 

42. 리재순과 민영환 등에 훈장 하사

 

리재순, 민영환, 권재형, 조병식, 박제순, 리윤용 등이 공로가 있어 3등 서훈을 하고 태극장을 하사하였다.

훈장을 추서한 것은 서양에서 시작한 것으로, 혹은 군주에게 주기도 하고 혹은 신하가 특별한 공로가 있을 경우 하사하였다. 또 비록 외국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근로를 할 경우에는 그것을 보내 주었다. 그리고 그 훈장을 주는 사람도 명예가 있고 받은 사람도 영광스러웠다.

고종은 외국을 흠모하여, 표훈원을 설치하고 훈장의 격식도 정하였으나 세상 사람들은 매국자들이 모두 훈장을 하사받았다고 하였으며, 1년 후에는 병졸과 시역(시역)들도 훈장을 달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이 훈장을 달고 있는 사람들도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간혹 훈장을 외국으로 보냈지만 거절을 당하기도 하였고, 일본 사람들은 그 훈장을 받을 경우 수일 동안만 달고 다니다가 그것을 용해하여 돈을 받고 팔기도 하였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지만 그런 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로는 훈장 하사에 관한 것은 기록하지 않는다.

 

43. 량호비류 정사제 등 수감

 

4월, 량호비류 정사제 등이 진주부로 정문을 올려 자칭 창의병이라고 하자 관찰사리은용이 그를 수감하였다.

 

44. 진남군 설치

 

전통영에 진남군을 설치하고 고성의 지방대를 폐지하였다.

 

광무 4년 경자(1900년) ②

 

1. 망명인사 권형진의 자수

 

망명 죄인 권형진이 일본으로부터 와서 자수하여 평리원에 수감되었다.

권형진은 을미년(1895) 8월 사변이 발생한 후 일본으로 도주하여 안경수에게 성원을 보내며 서로 의지하다가, 이때 안경수가 자수를 하므로 그는 다른 길이 없는 데다가 살길은 자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의 뒤를 이어 온 것이다.

 

2. 금성근, 금규홍 등의 토역 상소

 

금성근, 금규홍, 리건하, 민병석, 권재형, 윤정구, 박제순, 침상훈, 민종묵, 리윤용, 민치헌, 리재극 등은 다음과 같이 연명토역소를 올렸다.

“갑오년(1894) 이후 란신적자들이 줄을 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 저 안경수는 곧 을미년(1895)의 란적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때 군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전군의 동작과 진퇴를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몰라서 금지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불명죄에 해당되며,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은 불충죄에 해당되므로 그도 혼자 생각하면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는 해당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신이 들은 말에 의하면 변란이 발생한 그날 밤 훈련대 병정들은 10명 내지 100명이 떼를 지어 그의 집에 모여 있었고, 그가 즉시 대궐로 온 후 그 변란이 대궐에서 일어났으니 그가 병력을 풀어 반격한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해 10월 의거가 있을 때 그가 의병으로 투신한 것은 일시의 명예를 빌려 8월의 죄적을 은폐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보면 너무도 교활하고 혹독합니다.

그리고 그는 무술년(1898) 5월에 신하로서 감히 할 수 없는 말을 퍼뜨려, 신하로서 감히 이행할 수 없는 일을 꾀하다가 급기야 전기처럼 빠른 여러 사람의 눈과 많은 사람들의 입을 가릴 수 없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죄를 알고 법망을 빠져나가 해외로 도피하였습니다.

그가 만리 밖에서 무슨 음모를 누구와 3년 동안이나 꾸미고 있었는지 알 수도 없는 일인데 하루아침에 와서 자수를 하였으니 왕법이 있는 이상 그를 당연히 처형해야 할 것입니다. 그에게 시일을 늦추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 머리를 보존하게 한다면 법망이 서지 않는 것은 이미 생각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를 것이며, 난적의 길을 열어 주는 결과가 되어 어떤 형태의 변란이 어el에 잠복하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며칠 전만 보아도 적신 권형진이 우리의 예상처럼 그의 뒤를 이어 왔는데, 다른 적신이 또 그의 뒤를 이어 오는 것은 불일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형진의 범죄는 어찌 우리 나라 사람들만 다 아는 사실입니까? 이것은 천하 각국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모두 그를 살해해야 한다고 하며, 사람들마다 그를 죽이려고 한 것도 이런 사실 때문입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많은 흉도들과 내통하여 백방으로 죄를 내어 당일의 변란을 일으켰으니 이것은 만고에도 얼는 극악무도한 일입니다. 전일에 잠적한 것은 어찌 그리 흉측한 일이며 지금 자수를 하는 것은 어찌 그리 무엄한 일입니까?

이것을 종합해서 생각하면 그의 행동은 못할 일도 없고, 그의 생각은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사람이 어찌 안경수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그 가운데 용사를 하는 사람들은 장차 권형진 같은 사람이 백 배도 넘을 것입니다.

형법이라는 것은 천하의 공법입니다. 그러므로 법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고 형벌이 있어도 시행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나라꼴이 되지 못하여 난적들의 출현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충분이 복받쳐 조용히 있지 못하고 이와 같이 호소하오니 황상께서는 용단을 내리시어 속히 방형을 바르게 하시고, 그들이 지은 과거의 죄를 징계하시어 후일의 화를 미연에 방지해 주시면 국가가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3. 안경수, 권형진의 처형

 

5월, 경무사리유인이 안경수, 권형진 등을 처형하였다. 그들이 이미 자수를 하였으나 국내에서 모두 울분을 터뜨리고, 또 을미사변의 내용이 모두 탄로되었으므로 고종은 그들의 처형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반대를 두려워하여 오랜 시간을 끌다가 이유인을 시켜 살해하였는데, 이때 그가 자의로 살해한 것처럼 위장하였으며 이유인은 그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한밤중에 그들을 교살하였다.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살해될 줄 모르고 있다가 꼼짝도 못하고 살해되었다.

그리고 이유인은 다음날 아래와 같은 방문을 내걸었다.

“세상에 어찌 남의 자식이 되어 어머니의 원수를 갚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 너무도 가슴이 아픕니다. 란신적자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우리 나라 을미사변처럼 참혹한 사변은 천지개벽 이래 그리고 만고에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흉측하고 참혹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자들은 당일에 함께 죽지 못하고 가냘픈 그 잔명이 살아남아 홍릉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피눈물은 눈을 가려 초목은 참담하고 해는 빛을 잃고 있습니다. 이때 발호(발호)한 그들은 궁궐을 들어와 호위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대역불도한 안경수, 권형진 등이 자칭 자수를 한다면서 의젓이 귀국하였습니다. 그들이 전후에 걸쳐 지은 범죄는 모두 탄로되어 몸이 백 개라도 속죄를 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의법처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절차를 행하다 보면 또 며칠이 지나가 하루 이틀 그와 함께 한 하늘 아래 있자니 피가 끓어 미처 아뢰지도 못하므로 내 마음대로 교살하여, 위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성모의 영령에게 고하고 아래로는 만고에 망극한 분통을 느낀 우리 동포들을 위로하오니 우리 국내의 혈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의분을 함께하기 바랍니다.”

이 사건을 논평한 사람들은 국법을 바로잡지 못한 것과, 또 왕령이 떨치지 못한 것과 이유인을 혈기인으로 만든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하였다.

 

4. 리유인의 철도 유배

 

리유인을 철도로 유배하였다. 안경수와 권형진이 사망한 것은 뜻밖의 일이었으므로 도민들은 서로 놀라 물어 보고, 각국 공사들도 그 이유를 물은 후 의사를 대동하고 그 시체를 검사하여 질책하는 소리가 날로 들리자 고종은 그 죄를 이유인에게 돌렸다.

그러나 그가 유배된 후 신료와 서민들은 서로 상소하여 그를 구제하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5. 일본공사림권조의 해임

 

일본인들은 그들의 공사림권조를 체직한 후 그를 일본정부로 끌어다 놓고 많은 여론을 일으켰다. 림권조가 우리 나라에 있을 때 안경수와 권형진이 사망하였으나 그는 어떻게 된지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나라를 욕되게 하는 동시에 직무유기를 한 것이므로 그를 불시에 소환한 것이다

이때 각국에서는 공사가 실직을 하면 금액으로 속죄를 하라고 하였으나 림권조는 웃으면서 “한국 조정이 있는데 내가 어찌 걱정을 하겠느냐?”고 하였다.

 

6. 리준용 체포령

 

리준용을 치죄하기 위해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일본인들은 그를 저지하여 보내지 않았다. 이준용이 안경수와 권형진의 초대를 받았기 때문에 고종은 그를 체포해 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주일공사리하영이 보낸 답전에는 “일본인들이 보내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하므로 결국 그의 학자금을 중지하였고, 이준용도 감히 귀국하지 못하였다.

 

7. 윤용선 등의 리재면, 금윤식 처형 요구 상소

 

윤용선 등이 연명소를 올려 리재면과 금윤식을 처형하자고 간청하였다. 그들은 을미사변 때 민후를 폐위하자고 간청하였는데, 그중 다른 여러 신하들은 사망하거나 혹은 도주하였지만 이재면 등은 이때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8. 부수청 설치 상소

 

리정로, 유진만 등이 부수청을 설치한 후 상소를 하여 을미사변 때 허위조서에 서명한 대신과 폐후고유문을 지은 사람 및 고유를 할 때의 제관을 모두 의법처리하자고 간청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정만조가 그 고유문을 지었으므로 법조상 그를 체포하여 심문해야 한다고 하였다.

 

9. 헌병대 창설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 등을 통합하여 헌병대로 칭하고 무관학도 200여 명을 선발하였다. 이들은 모두 칙임관의 아들과 제질들이었다. 이때 응모하였으나 발탁되지 못한 사람이 500여 명이나 되었다.

 

10. 각도 관찰사의 백성 착취

 

현재 관찰사로서 전북의 리완용, 전남민영철, 경북금직현, 경남리은용, 평북조민희, 평남정세원, 강원정일영, 황해민형식 등이 공금이 없다는 핑계로 백성들에게 착취하므로, 이들을 모두 면직하여 조사를 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결국 그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11. 동학 수령 손숙개 체포

 

영남의 동비 우두머리 손숙개가 어사금화영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그가 통솔한 동비는 28대로 그 군중을 합하면 모두 4,800명이나 되었다. 그가 체포된 후 그의 일당들은 점차 해산되었다.

 

12. 기우만을 중추원의관에 제수

 

전참봉기우만을 중추원의관으로 제수하였으나 그는 부임하지 않았다.

 

13. 리규원을 함북관찰사에 임명

 

6월, 리규원을 함북관찰사로 임명하여, 그가 부임할 때 편한 길로 떠나게 하였다. 그는 안무사로 있을 때 북관에서 선정을 하였으며 이때 그는 금화의 향제에서 있었다.

 

14. 의화군리강의 미국행

 

6월, 의화군리강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갔다.

 

15. 경부 설치

 

경무청을 경부로 개칭하여 독립아문으로 하고 다른 부의 예와 같이 대신과 랑관을 두었다.

 

16. 상비대 설치

 

상무사를 상비대로 개칭하여 군액 100명을 두고 부상을 모집하였다.

 

17. 천릉도감 설치

 

천릉도감을 설치하여 윤용선을 총호사로 임명하고 양주조씨의 무덤 40여 기를 금곡으로 이장하였는데, 천릉비 3만원을 미리 지불하였다.

 

18. 경기와 충남의 기우제

 

오랫동안 한발이 계속되어 경기와 충남의 산천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19. 박용대와 조종필 등을 관찰사에 임명

 

박용대를 경남관찰사, 조종필을 전남관찰사, 조한국을 전북관찰사, 윤상연을 평남관찰사, 리도재를 평북관찰사 겸 찰변사, 리성렬을 경북관찰사, 주석면을 강원관찰사, 윤용식을 충북관찰사, 윤길구를 황해관찰사, 금영덕을 충남관찰사, 리재극을 경기관찰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중 박용대는 사직소를 올리자 김영덕과 서로 임지를 바꾸라고 명하였고, 이성열도 강력히 사양하므로 엄한 교지를 내려 외직으로 임명하였으며, 조종필은 명년이 회갑이므로 고종은 그를 염려하여 관찰사의 봉급으로 그 회갑연의 비용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때 료동과 심양에서 활약하던 비도들이 우리 나라를 침범할 기미가 보이자 고종은 변방을 잘 방어한 리도재를 변방으로 임명하였다.

 

20. 서북지방에 진위대 설치

 

서북 지방에 진위대대를 설치하여 함북의 북청, 종성과 평북의 의주, 강계에 각 1천명을 두고 북청과 종성 지방의 지방대를 폐지하였다. 이때 청나라의 변방은 기근이 날로 심하여, 만일 그들이 불의에 압록강을 건너오면 지방대로서는 방어할 수가 없으므로 군제를 개편하여 더욱 강화하였다.

 

21. 주일공관의 신축

 

주일공사리하영이 일본 동경에 공관을 신축하였다. 종전의 공사들은 모두 가옥을 전세내어 주재하였으나 이하영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유선전화로 신축을 간청하므로, 신축비 8만원을 지급하였다.

 

22. 흡곡광업사 개설

 

흡곡(흡곡)에 매광을 개설하였다. 통천군에서 생산된 매탄이 가장 우수하였다.

 

23. 독일 공사바이페르트의 알현

 

일본 공사림권조가 내한하여 독일 공사와이벽(바이페르트 : H. Weipert)과 함께 고종을 알현하였다.

 

24. 인조실록 정축편의 유실

 

비랑 리병소가 <강화사고>를 포쇄(폭쇄)한 후 인조조의 정축편 2책이 유실되었다고 보고하자 즉시 보완을 명하고, 전일의 사고폭쇄관원을 중벌로 처벌하라고 명하였다.

 

25. 러시아의 위법포경선에 역으로 배상

 

러시아인들이 우리 해협에서 고래를 잡으면서 우리 해관을 거치지 않자, 우리 조정에서는 그들에게 벌과금 4천원을 청구하였으나 그들은 도리어 포경선이 구류되어 손해를 보았으므로 배상금 4만원을 내야 벌을 면해 주겠다고 하면서 공문을 분분히 주고받았으나 결국 러시아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26. 일본군함의 좌초

 

청국을 가던 일본 군함이 흑산도 남안에서 좌초되었다.

 

27. 장단 등에 호환

 

압록강이 붉은 빛으로 탁해지며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나고, 파주와 장단의 여러 군에 호환이 매우 많았다.

 

28. 귀인 엄씨와 궁인 리씨의 봉호

 

7월, 귀인 엄씨를 순빈, 궁인 리씨를 소의로 봉하였다.

 

29. 황자 리강과 리은에 봉왕

 

황제의 둘째 아들 의화군리강을 의친왕, 황제의 셋째 아들 리은을 영친왕으로 봉한 후 관부를 개설하여 관리를 두었다.

 

30. 조병직 등을 참정에 임명

 

조병직을 참정, 리윤용을 찬정으로 임명하였다.

 

31. 조병식을 주일공사에 임명

 

조병식을 주일공사로 임명하자 그는 일본이 안경수, 권형진의 사망을 책할까 싶어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엄한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32. 유기환의 유배

 

유기환이 상소하여 윤용선, 조병식, 민종묵, 리건하, 권재형 등이 신하의 의리가 없다고 하면서 그들을 극형에 처하여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윤용선이 성밖으로 나가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계속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있다가 만수절에 비로소 축하연에 참석하였다. 이때 조병식 등은 상소하여 자신을 탄핵하였고 권재형은 유기환과 대질을 간청하므로, 고종은 유기환의 상소로 인하여 온 조정이 조용하지 못하다는 구실을 씌워 5년간의 유배를 명하였다.

 

33. 강화병을 함북진위대에 보충

 

강화병 120명을 함북으로 파견하여 진위대를 보충하였다.

 

34. 박항래의 청국 도적 격파

 

자성군수박항래가 청비를 격파하여 그들을 쫓아내자 적도 수천 명이 성명하기를, “대동구에서 압록강을 건넌다”고 하므로 압록강 연안의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때 박항래는 군내의 장정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도착한 후 복병으로 그들을 요격하였다. 이때 밤하늘이 칠흑같이 어두우므로 적도들은 발을 헛디디어 물 위로 떨어지고, 사망한 병사들이 서로 겹겹이 쌓여 있었으나 그들은 말을 타고 도주하였다.

리도재는 이 사실을 조정으로 알려 그의 공로를 표창하자고 간청하였으나 내부의 리건하는 이도재와 사이가 나빴으므로 그의 청을 저지하여 서훈되지 못하게 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1급 승진을 시켜 주었다.

박항래는 청렴하고 위엄이 있어 그의 치적이 도내에서 제일 가므로 우리 나라로 유입해 온 청나라 사람들은 압록강 건너편 연안에다가 그의 공적비를 세워, 그가 린방을 구제한 공로와 적도를 진압한 공로를 칭송하였다.

 

35.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

 

신문사 사장 남궁억을 수감하였다. 이때 일본의 보도에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분단한다는 설이 있으므로 남궁억이 그 구절을 신문에 인용, 보도하자 조병식은 그가 군중을 선동한다고 판단하여 그를 구금하자고 아뢰었다. 그는 8월 중에 석방되었다.

 

36. 리용익의 감봉처분

 

리용익이 죄를 지어 감봉을 당하였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였다. 그는 언제나 사사로 알현할 때 군신들이 빽빽히 서 있어도 손으로 고종을 불러 귓속말로 속삭이며 군신의 례를 갖추지 않으므로 중외의 신하와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를 의지하여 금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사이를 이간할 수 없었다. 이때 윤정구는 그 사실을 아뢴 죄로 경벌을 적용하였다.

 

37. 의화단사건

 

구라파,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제국의 연합군이 청나라의 의화단을 격파하고 북경으로 들어가자 청제가 서안으로 도주하므로 고종은 친히 전화를 걸어 대첩을 축하하고, 오인택을 보내 병사들에게 호궤하게 하고 상을 주었다.

처음에 청나라의 덕종은 갑오년(1894)의 패배를 징계하고 서양법을 본받아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고자 점차 한인들을 기용하였다. 그 후 무술년(1898) 봄에 조서를 내려 변법의 시행을 선포하고 신진세력인 양지수, 담사동, 강유위 등을 잇달아 발탁하였다. 그러나 만주인 권귀는 실권을 두려워하여 서태후를 업고 그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하게 하여 덕종을 온명원으로 유폐하게 하므로 정권은 모두 복구되었다.

이때 강유위 등은 살해되기도 하고 혹은 도주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소위 무술정변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만주인과 한족 사이가 더욱 악화되어 나라를 돌볼 여가가 없었으며, 또한 민간에서는 교인들을 싫어하여 교회당이 그들의 소굴로 변하였고, 이해 봄에 산동민들은 봉기하여 교회당을 불지르고 서양 선교사를 살해하여 「창의척양」을 부르짖으면서 자칭 의화단이 라고 하였다.

원근의 군중들은 모두 봉기하여 대하의 이남과 이북 지방이 10일 사이에 호응하였다. 그들은 천진을 격파한 후 독일 공사 및 일본 서기관삼촌빈을 살해하고 또 격문을 북경으로 보내 각국 공사를 살해하였다. 그것은 서태후가 대내에서 호응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각국에서 온 많은 병력을 동청지방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이 소위 연합군이었다. 그들은 의화단과 태고에서 첫번째 전투를 벌이고, 두 번째는 천진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세 번째는 북창에서, 네 번째는 통주에서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이달 18일에는 북경을 침범하여 덕종과 서태후가 도주하므로 연합군들은 마음대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여 천리가 숙연하였다.

이에 앞서 이 사건의 여론을 들면 고종은 우리 병대를 연합군으로 파견하려다가 차마 이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북경이 격파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전화를 걸어 승리를 축하하였고, 또 오인택에게 백미 1천석, 맥분 1천5백포, 권연 2천갑을 보내어 그들을 호궤하였다.

강유위는 광동 사람이다. 그는 그의 일당 량계초와 함께 신학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강유위는 영국 런던으로 도주하고, 양계초는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이때 양계초의 나이는 28세였으나 천재적인 재주를 타고나 기발한 문장을 구사하였으므로 그는 일본에서 <청의보>를 지어 당시의 시대상을 풍자하고 또 수천 구절이나 되는 <음빙실집>을 지었다. 그의 의론은 종횡, 웅위하여 강력히 성안을 뒤엎을 만하므로 순식간에 5주까지 유행하여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혀를 토하였다.

그리고 손일선이란 사람은 혁명당에 투신하여 외양을 두루 다니므로 정부에서는 그를 금고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결국 체포하지 못하였다.

의화단은 부작(부작)과 주문이 대포의 탄환을 방어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동비와 같은 것이다. 그 일당 중에는 흥중회, 중우회, 대도회, 소도회, 가로회, 백련회, 천지회, 영웅회, 안경회, 도우회, 련장회 등 명칭이 있으며 깃발에는 「부청멸양」이라고 쓰기도 하고 혹은 「부명멸청」이라고 쓰기도 하였다. 그것은 한인들이 오랫동안 한이 쌓여 그들이 비록 서양을 배척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있지만 그들 중에는 만주로 구축하려는 사람도 있으므로 피살된 외국 사람들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오합지중이기 때문에 군률이 엄하지 않고 병기도 예리하지 않아 삽시간에 일어났다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이때 동청 일대는 철로와 전선이 모두 의화단들에 의하여 단절되어 청국에서 일본까지 통할 수 있는 전선은 오직 우리 나라 하나뿐이었으므로 인천항에는 전보를 보내는 사람으로 줄을 이어 기사관의 눈은 모두 종기가 나 있었다.

우리 나라로 피난해 온 산동 사람들은 전후로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량서에서 삼남지방으로 들어가므로 우리 나라 백성들은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청국의 량광총독 리홍장이 전권대신으로 임명되어 구미 제국과 강화를 논하였다.

 

38. 윤용선을 의정에 임명

 

윤용선이 다시 의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의 손자 윤덕영에게 10만냥을 상납하게 하여 임명되었다.

 

39. 침순택을 총호사에 임명

 

침순택을 총호사로 임명하자 그는 하명을 들은 즉시 길을 나섰다. 이때 그의 나이는 78세였다.

 

광무 4년 경자(1900년) ③

 

1. 영남지방의 활빈당

 

영남의 활빈당들이 통도사를 약탈한 후 운산사에 모여 있었다. 이때 유언비어가 유행하기를, 토비들이 재산을 약탈하여 동래왜관으로 보낸다고 하였다. 그것은 박영효가 그의 일당을 귀국시켜 한편으로는 모금을 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지방대를 계속 파견하여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의 소란이 도둑 떼들보다 더 심하였다.

 

2. 고종이 이등박문에게 금배 하사

 

고종은 금배와 표피를 일본추밀관이등박문에게 하사하였다.

 

3. 금곡 신릉 철도 개설과 신서선묘의 발굴

 

8월, 다시 윤용선을 총호사로 임명한 후 역비 20만원을 하사하여 금곡의 신릉에 철도와 전선을 개설하고 신릉 주위에 있는 신서의 선묘(선산) 2만여기를 발굴하였다.

이때 양주조씨 18대 이하 110여 기의 무덤이 모두 발굴되고 영응대군염(염)의 부처, 의창군강(강)의 부처, 안양군항(㤚)의 부처, 효순공주 부마 구사안, 정정옹주 부마 조선(조선), 숙혜옹주 부마 리정녕, 반성부원군박응순 부처, 릉안부원군구사맹 부처, 한원부원군조창원 부처, 릉천군구수영, 릉성부원군구인후, 릉풍부원군구인기(구인기), 고 상신 신용개, 사산군호(호), 동성군순, 금성도정위, 금계정기, 문강공조말생, 호양공구치홍 등의 묘소가 모두 발굴되었으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금곡은 길지가 많다고 소문이 나 있기 때문에 경재들의 분묘가 가장 많이 있다.

그중 조씨들의 선산은 지관들이 명당으로 손꼽고 있었으나 묘소를 발굴하여 보니 유해가 녹아 버리고 다만 병(호) 하나만 남아 있기도 하였다.

그 밖에 많은 분묘들도 길지로 인정한 곳이 도리어 흉지였고, 흉지로 인정되던 곳이 도리어 길지여서 종종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으며, 걸인과 민간의 무덤은 종종 찌는 듯한 다스운 기운이 있는 데다가 해골도 황금처럼 누렇게 보존되어 있으므로 발굴과정을 감독한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면서 지학을 믿을 수 없다는 판단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보녕에 있는 전수영의 터와 양주 조운서원의 터, 서산 주마곡 등을 조씨 선조들의 분묘를 이장할 곳으로 주었다.

이때 서상조가 상소하여 천릉의 부당함을 아뢰자 고종은 크게 노하여 비답을 내리지 않고 그의 사위 리재극을 불러 책망하기를, “당신의 장인이 노망을 했습니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4. 권재형, 리종건을 대신에 임명

 

권재형은 법부대신, 리종건은 경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5. 전주진위대의 동학군 격파

 

동비 여당이 정읍향교를 점거하고 있다가 전주대에게 격파되어 도주하였다.

 

6. 성진 민란

 

성진민들이 큰 소란을 일으키므로 북청대를 보내 그을 토벌하였다. 이때 리순하를 안핵사(안핵사)로 임명하였다.

 

7. 한강 일대의 화적

 

한강의 통진일대에 큰 화적들이 발생하였다.

 

8. 청국공사서수붕 동생의 내한

 

청국공사서수붕의 아우가 뗏목을 타고 그의 가족과 함께 우리 나라로 왔다. 그것은 권비의 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의화단의 일명을 「권비」라고 한다.

 

9. 홍종우의 진시폐소

 

홍종우가 상소하여 시폐에 관한 수천 가지를 열거하였다. 정부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지탄을 받았고 고종의 주책도 하나도 빠짐없이 열거하였다. 홍종우가 비록 행패꾼이긴 하지만 그의 말이 모두 타당하므로 그 상소를 일시 명소로 칭하였다.

 

10. 궁인 장씨의 숙원 증호

 

궁인 장씨를 숙원으로 증호하였다. 그는 리강의 어머니이다.

 

11. 민영준, 민응식 등을 산릉도감에 임명

 

민영준과 민응식 등에게 산릉도감을 맡도록 하였다. 고종은 이 두 민씨가 재산이 매우 많고 이때 국고가 궁색하므로 그들의 가산을 털어 역비로 충당하게 하였다.

 

12. 평양진위대 증설

 

평양부의 진위 1대대를 증설하였다.

 

13. 민영환, 리윤용 등을 진위대 순찰사로 임명

 

민영환과 리윤용 등을 진위대 순찰사로 임명하여 함경, 평안 량도연안의 형세를 두루 살피게 하였다.

 

14. 창원, 경주 등지의 동맥과 탄맥 발견

 

창원 대룡산에서 동맥을 발견하고 또 동래에서도 동맥이 발견되므로 일본인을 고용하여 채광을 하였다. 또 경주와 녕해군 등에서는 탄맥이 발견되었다.

 

15. 주일공사조병무과 일본 천황의 대담

 

조병식이 일본에 도착하여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채 일황을 만나자 일황은 그에게 힐문하기를, “당신 나라의 군신들은 모두 실덕을 하였는데 당신이 그 위치를 바꾸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독립을 중립으로 고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전화로 그 내용을 알리자 우리 조정은 크게 소란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유학생으로 있으면서 국고를 낭비하고 있으므로 그를 소환하자고 하였다.

 

16. 동학군 서장옥 등의 처형

 

동비 서장옥과 손사문 등이 복주되고 량사봉, 리일문, 정성현 등이 또 금산과 량산군 등지에서 수감되었다.

 

17. 강북 청국인 도적들의 한국류민 살해

 

강북의 청비들이 우리나라 류민을 살해하여 그 머리를 소나무 가지에 걸어 놓았는데, 옆에 있는 나무패에는 “융화보련 용집획류 고로연강일대 봉정우하 산약송교 신권현경 활불심명 실피일본용견불휘 고취정법 이소형계 특시”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18. 미국의 태풍

 

미국에서 큰 바람이 불어 사망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19. 트란실바니아의 독립

 

두란사발국(트란실바니아 : transylvania)이 영국에게 패망했다. 두란국은 남미주에 있는 공화국이다. 이때 영국인들이 그들을 병력으로 위협하자 그들은 결사 저항하였으나 1년 후에 기진맥진하여 항복하므로 영국인들은 그들을 의롭게 여겨 자주독립을 허락하였다. 영국 군인의 사망자는 4만여 명이나 되었다.

 

20. 장률 개정

 

윤월, 공포에 대한 장률(장률)을 개정하여 리서는 1만냥, 군수 4만냥, 관찰사는 5만냥을 범할 경우는 교형에 처하고, 족징은 4촌에 한하였으며 참형의 예를 더 첨가하여 참형을 당한 사람들은 으레 재산을 적몰하였다.

 

21. 총기와 탄환 구입

 

독일에서 양총 600정과 탄환 30궤를 구입하고, 영국에서는 인수통 15좌를 구입하였다.

 

22. 인화문 목창의 화재

 

인화문의 목창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23. 선원전의 화재

 

선원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렬성의 진용 7본이 모두 소각되었다. 고종은 함흥릉의 선원전본을 모방하여 궐내에 건립한 전각에다가 봉안하였으나 한밤중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때 청국 공사가 소화기를 가지고 대안문에 도착하였으나 고종은 무슨 변란이 일어날까 싶어 그들을 저지하였으므로 결국 다 타 버리고 말았다.

 

24. 민충단의 건립

 

민충단을 건립하여 갑오경장 이후의 전쟁으로 죽은 장병들에게 위령제를 지냈다.

 

24. 울릉도감을 울릉군수로 개칭

 

울릉도의 도감을 울릉군수로 개칭하였다.

 

25. 일본에 어업권 허락

 

일본인이 개성포삼을 채취하자 외부의 박제순이 채삼권 대신 해상어채권을 허락하여 일본 역장장국지경춘이 채삼금지방을 게시하였다. 그 후 전라, 경상, 강원함경 지방의 해상에 일본 범선이 가득하므로 연해 지방의 어민들은 많은 실업자가 발생하여 주객이 전도되었다.

 

26. 황제공덕을 새기자는 의론

 

윤진학, 리증하 등이 통문을 띄운 후 남부에 모여 황제공덕을 정고에 새기자고 간청하였다.

 

27. 영남 유생의 경의, 시무 2과 신설 간청

 

영남 유생들이 경의, 시무 량과를 설치하여 과별로 선비를 기용하자고 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8. 전세 증가와 조병식의 귀국

 

명년부터 전세를 증가하라는 조서가 내려지자 금가진은 매결마다 산군은 15냥을 증가하고, 해군에는 20냥을 증가하자고 간청하여 절목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조병식이 귀국하자 고종은 독대를 청하였다. 그 후 갑자기 증병설이 나돌다가 군량이 모자라 결국 결세인상을 결행하였다.

 

29. 선원전

 

선원전을 중건하여 렬성의 어진을 이봉하였다. 이에 앞서 윤용선이 어진을 이봉하기 위해 두 번이나 관북을 가서 매우 정중하게 모셔 오므로 온 조정에서는 그를 부러워하였다. 이때 서상조는 부개로 가기를 요청하였으나, 신기선을 시켜 모셔 오게 하였다.

 

30. 양주의 잠업

 

양주의 잠사에서 추잠 기르기가 모두 끝났다. 금년에는 세 번을 수확하였다.

 

31. 홍릉 이장지 변경

 

홍릉의 이장지를 양주군장리로 바꾸었다.

금곡에서 수만 기의 분묘를 발굴하자 많은 사람들은 원통해 하며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었는데, 참서에 능을 옮기면 국명이 끊긴다고도 하고 혹은 지손에게 불리하다고도 하였다. 이 소문을 엄귀비에게 알리자 결국 개복하라는 명을 내렸다.

 

32. 해서에 서리 내림

 

해서의 전주, 수안, 신계 등지에는 초4일 밤에 서리가 내렸다.

 

33. 성기운과 민철훈 등 공사 임명

 

9월, 금정근을 강원관찰사, 조병식을 참정으로 임명하고 성기운은 주일 공사, 민철훈을 주영,주독 및 주벨기에 공사로 임명하였다.

 

34. 북청민요

 

북청에 민요가 발생하여 리용관을 안핵사로 임명하였다.

 

35. 도호의 면천

 

도호를 천민에서 면하게 하여 호적을 만들도록 허락하였다.

 

36. 금태식의 자결

 

동대문 밖 각심동에 사는 금태식은 약간 호탕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였다. 그가 하루는 술에 취하여 여러 사람들 앞에서 탄식하기를, “국사가 날로 그릇되어 한 신민으로서 앉아서는 차마 볼 수 없으므로 여러분과 결별을 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날 밤 그는 선영(선영) 옆에다가 확을 파 놓고 음독, 자결하였다.

 

37. 비행선 발명

 

구주인이 비행선을 만들었다.

 

38. 리홍장의 사망

 

청국의 태학사 리홍장이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는 78세이다. 그에게 태전의 호를 증하고 1등후로 추봉하였으며, 시호는 문충이라 하였다. 그의 아들은 경술, 경매, 경방이며, 손자는 국걸(국걸), 국연, 국후(국후), 국웅, 국도(국도)이다.

 

39. 개가 허락 요청 상소

 

10월, 례경민치헌이 상소하여 개가를 허락하도록 간청하였다. 그의 소문은 다음과 같다.

“조용히 생각해 보니 가취(가취)는 인지대륜입니다. 그러므로 선왕들은 례의로서 제도화하여 군자가 해로(해로)하게 하고 두 남편을 섬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만고에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그리고 변고에 대처하여 권도를 따르는 것도 제왕이 만든 것이므로 호양공주한나라 광무제의 누나. 등신에게 출가하였음. 편자주 가 송을 택하였을 때 광무제는 그것을 비난하지 않았으며, 범씨로서 주씨 성을 사용하였지만 문정공 송의 범중엄의 시호. 그는 2세 때 아버지를 잃고 장산주씨에게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가 주씨 성을 사용하였음. 편자주 은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세속이 숭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 조정에서도 선정신송시렬1607~1689. 선조, 숙종 때의 문신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성뢰(성뢰). 편자주 이 우윤 권시(권시)1604~1672. 효종, 현종 때의 학자. 자는 사성, 호는 탄옹. 편자주 에게 보낸 답서에서 「주공주나라 문왕의 자로 이름은 단(단). 친형 무왕을 도와 주를 토벌하고 그 후 성왕을 도와 제도와 례악을 제정하였음. 편자주 이 예의를 제작할 때 어찌 재가한 어머니가 계부의 상복을 입도록 제작하였겠습니까? 주공이 어찌 예의를 교육으로 삼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어찌 재가를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몰랐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자송의 명도선생. 이름은 호(호). 편자주 도 상부(상부)가 재가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지만 그의 생질녀를 재가시켰고, 주자송의 주희. 편자주 도 대강은 그 처지에 따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현인송우암을 말함. 편자주 이 어찌 1성주공을 말함. 편자주 과 2현정명도와 주자를 말함. 편자주 보다 더 훌륭하다고 하겠습니까? 근고에 청환들에게 재가를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례양과 명교를 숭상한 사대부들은 그것을 부녀의 행실로 교육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만 법만 알고 권도는 모르는 행위로서 려항의 필서들도 절개를 끊은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므로 결국 국가의 금지사항으로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이남<시경>의 두 편명. 즉 주남과 소남 편자주 의 풍화가 일변함에 따라 강한양자강과 한수로 <시경> 대아 탕지십의 편명. 편자주 의 풍속이 모두 아름답게 된 것과 같은 예입니다. 맨 처음 이런 법을 만든 것은 형법을 밝혀 금지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도 슬픈 일입니다. 저… 청춘의 나이에 갑자기 남편을 잃고 홍안으로 지내는 처지가 너무 가련하옵니다. 낮이면 외롭게 지내는 모습과 밤이면 혼자 누워서 한탄하는 소리를 낼 때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뼈가 시큰거리도록 섬뜩함을 느낄 것이며, 이를 보는 사람들은 창자가 찢어지는 듯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새도 쌍쌍이 날고 신도 두 개가 놓여 있는 법인데 사람으로서 그 미물보다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울분이 쌓이고 화기가 감소되는 일은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늙은 사람도 남편이 없으면 왕정이 있는 시대에는 그들을 먼저 구제하였는데, 하물며 젊은 사람에 있어서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경장 이후 시대의 흐름을 아는 사람들은 먼저 개가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정론입니다. 그러나 외식적인 관습에 젖어 옛날 풍속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청산에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에도 개가했다는 소문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설혹 개가를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 예의로 맞아들이지 않고 있어 남몰래 만나는 행위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례속에 어긋난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우견으로는 지금부터 민가의 연소한 과부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길일을 택하여 폐백(폐백)을 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혼례를 치를 때와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15세부터 20세까지는 초혼처림 출가하고, 30세부터 40세까지는 재혼 내지 삼혼으로 출가하도록 하며, 이 연령이 지난 사람은 실기로 간주하고, 이 규칙을 어긴 사람은 이속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혹 부모가 권하고 마을 사람들이 설득을 해도 끝까지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굳이 그 뜻을 꺾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칠거지악부인으로서 행하는 일곱 가지의 악덕. 즉 부모에게 불순, 무자, 음행, 질투, 악질, 다언, 절도 등으로 옛날에는 부인이 이 일곱 가지 중 한 가지만 범해도 버림을 받았음. 편자주 은 엄하게 밝히고 강간도 엄금하여 이런 기풍은 온 고을이 다 이행하고 온 나라가 본받아, 안으로는 원망하는 여자가 없고 밖으로는 홀아비가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박연이 호연으로 이어지고 울분은 길상으로 변하여 이 세상은 화기가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이런 여론을 펴는 것은 예속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백왕이 시행한 제도를 준수하는 것이니 신의 이 상소를 정부로 내리신 후 정부와 중추원으로 하여금 의정, 공포하여 한 백성이라도 모르는 일이 없게 하시기 바랍니다.”

민치헌은 민씨의 서족이므로 이 상소가 민치헌으로부터 나오자 어떤 사람은 그를 비방하고 비웃었으나 이 것은 참으로 고금의 통론이라고 하겠다.

 

40. 주한일본공사서리산좌원차랑 취임

 

일본 공사림권조가 귀국하고 서기관산좌원차랑이 서리로 임명되었다.

 

41. 경북관찰사리성렬의 면직

 

경북관찰사리성렬이 면직되었다. 그는 부임한 후 모든 시찰원과 파견원을 경외로 쫓아내어 가결에 대한 새 반포령도 이행하지 않고 다시 그 명령을 취소하라는 전화를 누차 걸었는데, 조정에서 이를 불허하자 그는 친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42. 윤길구, 금완수 등 관찰사 임명

 

윤길구를 충북관찰사로 임명하고 안악군수금완수를 승진시켜 황해관찰사로 임명하였다.

 

43. 한국 벨기에 통상조약 체결

 

박제순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백이의(일명 비리시) 사신 방갈(벤카르트 레몬 : Vincart Lemon)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44. 스페인 친왕의 방한

 

서반아의 발발친왕이 입경하여 러시아 공사와 함께 고종을 알현하였다

 

45. 천주교인 금주화의 신주 소각

 

이천에 사는 금주화가 천주교의 신자가 된 후 제사를 폐지하고 사당의 신주를 모두 불태웠다.

 

46. 일본의 이질 유행

 

일본에서 적리로 인하여 9천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그 병균을 채취하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고 쥐를 구입하였는데, 4개월도 되지 않아 대판시에 쌓인 쥐의 수는 176,816마리였다.

 

47. 인도의 태풍

 

프랑스 영토 인도의 동산연안에는 46시간 동안 태풍이 불어 사망자가 1,600명이나 발생하였다.

 

48. 미국인의 장수와 로봇의 발명

 

미국인은 장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 금년 통계를 보면 만 백세인 사람이 남자는 1,393명이며, 여자는 2,583명이었다.

그리고 뉴욕에 사는 폐류(미상)라는 사람은 자동인(로봇) 1구를 만들었다. 그것의 신장은 7척 5촌이며, 차 1대를 끌고 한 시간 정도에 약 20리를 다녔다. 이 자동인은 10년 동안 연구를 했다고 한다.

 

49. 금태웅의 처형

 

11월, 지리산의 비괴 금태웅이 복주되었다. 지리산 청암동에는 진주룡이 있는데 그곳은 가장 깊숙한 곳으로서, 그는 불순분자들을 그곳으로 모이게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위관에 서명하게 하였으나 당일 적발되었다.

그들이 탄로난 것은 진주부에서 정찰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주하기도 하고 혹은 체포되기도 하여 서울로 압송된 적도는 모두 7명이었다. 그중 정씨란 사람은 손바닥에다가 먹물로 「왕」자를 새기고 있었다.

이때 영호남 산촌민들 중에서 그들이 내통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으나 관찰사금영덕은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석방해 준 사람이 많았다.

 

50. 종인학교 설립

 

11월, 종정원에다가 종인학교를 설립하였다.

 

51. 군악대 신설

 

군악대를 신설하였다.

 

52. 공포 징수

 

다시 갑오년(1894) 이전의 공포를 징수하였다.

 

53. 윤웅렬관찰사 임명

 

윤웅렬을 전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8만냥을 징수하였으나 전관찰사조종필은 그 금액을 상납하지 못하여 체직되었다.

 

54. 박영효 서신 사건

 

리조현과 리승린을 유배하였다. 이 두 사람은 일본에서 돌아와 한규설에게 박영효의 서신을 전해 주었다.

그 내용은 은전 2만원을 보내 달라는 것이다. 그가 귀국시에 쓸 경비였다. 그 일이 발각되자 이들을 유배한 것이다. 한규설도 수감되어 있다가 수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55. 영희전 중건

 

전영모궁 터에 영희전을 중건하였다.

 

56. 리용태주미전권대신 임명

 

리용태를 주미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대수장을 보냈으나 그쪽에서 그런 례가 없다고 사양하여 다시 반환되었다.

 

57. 이탈리아의 국왕 시해사건

 

이탈리아 사람이 그의 군주를 시해하여 그 범인을 잡아 종신형에 처하였다. .

 

58. 리재극을 관찰사 임명

 

12월, 리재극을 경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59. 태조어진 이전

 

12월, 태조의 어진을 개성 목청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윤용선이 배봉하고 갔다.

 

60. 류린석 체포령

 

충북부에 밀칙을 내려 류린석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때 유인석은 료동에서 본국으로 격문을 보내고 명성황후의 복수를 위해 곧 병대를 인솔하고 우리 나라로 오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인들은 충북과 강원 지방에 많았으므로 혹 그가 이곳을 내왕하는 줄 의심하였다.

 

61. 청국공사서수붕의 귀국

 

청국공사서수붕이 귀국하고 참찬관허태신이 공사서리로 임명되었다. 그가 고종을 처음 알현했을 때 우리 기수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고 극구 칭찬을 하므로 고종은 그것을 이상히 여기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폐방에서는 매관매직을 한 지 10년도 안되어 천하가 큰 난리를 겪고 종사가 거의 위태롭게 되었는데 귀국은 매관매직을 한 지 30년이 되어도 아직까지 보좌가 건재하니 그 기수가 왕성하지 않고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면 어찌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고종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자, 서수붕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한국민은 슬픈 민족이다”라고 하였다.

 

62. 양주 주민의 호세를 면제

 

양주 주민들에게 호세를 면제해 주었다. 그것은 릉역에 대한 위안을 하기 위한 것이다.

 

63. 일본천황이 황태자 등에게 훈장 증정

 

일본천황이 우리 황태자에게 국화대완장을 보내고 궁내부 □□□와 외부의 박제순에게는 대훈장을 보내 왔다.

 

64. 화폐조례 시행

 

화폐조례를 정하여 금을 본화로 하고 은, 적동, 백동 등은 보조화로 하였다.

 

65. 독일로부터 총기 구입

 

독일로부터 양총 300정과 탄환 1만발을 구입하였다.

 

66. 영국 여왕 빅토리아 사망

 

영국녀황 유다리아가 사망하였다. 그의 재위는 62년이며 나이는 81세이다 그는 결혼하기 1년 전에 등극하여 재위 41년에 상부하였고, 자녀 5남 3녀와 내외손 29명을 두었다. 그의 둘째아들이 황제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우리측은 주아공사리범진을 그의 장례식에 파견하였다.

 

광무 5년 신축(1901년) ①

 

1. 서울에 지진 발생

 

신축년(1901) 광무 5년(청국 광서 27년, 일본 명치 34년) 정월, 서울에서 지진이 발생하였다.

 

2. 용산 전환국의 화재

 

대구에서 서양인의 교회당에 화재가 발생하고, 그 후 룡산의 전환국에서도 화재가 발생하여 백동화 100만원이 소실되었다.

 

3. 리유인을 관찰사로 임명

 

리유인을 경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례천군에다가 훌륭한 사제를 지었다.

 

4. 평북지방의 동학 세력

 

평북 태천군에 다시 동학도가 치성하여 강성택, 리지점, 손규동 등을 접주로 추대하였다. 그들의 일당이 매우 많았다.

 

5. 전국연안에 포대 설치

 

전국연안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6. 금만수와 민영돈 등을 공사로 임명

 

금만수를 주미공사, 민영돈을 주영의공사, 조민희를 주법공사, 민철훈을 주덕오공사로 임명하여 2월 27일 출발하였다.

 

7. 금영준의 처형

 

금영준이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이에 앞서 민영주는 러시아인에게 월미도를 팔아 넘겨 중벌을 받게 되자 그의 아들 민경식이 김영준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때 김영준은 민경식에게 러시아공관으로 가서 병력을 빌린 후 고종을 위협하여 엄비와 여러 권귀들을 살해하도록 하고 그 여세로 정부를 전복시키라고 하므로 민경식은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자 두려움을 느끼어 그 음모를 모두 자백하고 주석면을 중인으로 내세웠다. 이에 주석면은 지정죄로 선고를 받고, 민경식은 만고죄로 선고를 받아 모두 종신류배형에 처했다.

한편, 금영준은 처음에 참형으로 처형하려고 하였으나 조서를 다시 내려 교형으로 처형하게 하자 사법부에서는 무슨 옥변이라도 생길까 싶어 그를 서둘러 처형하므로 백성들은 도로로 나와 서로 축하말을 나누었다.

이때 고종은 그를 처형할 뜻이 없었으므로 그의 처형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공무를 잘 받들어 이행하고 재물을 잘 상납한 사람 중 어찌 김영준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금영준은 서얼(서벽)서자와 그 자손. 편자주 로 버림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귀인이 되어 적자의 집안을 경멸하고 더욱이 윤리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행패를 부렸다. 그는 자기 어머니의 신주를 만들어 그의 형 금영철을 꾸짖으며 자기 아버지의 사당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는 또 어머니의 묘를 파서 그의 아버지 묘소에 합장을 하면서 “어찌 살아서는 한자리에서 자면서 죽어서는 한 구멍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법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재들이 그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생」으로 칭하고 「제」로 칭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을 납치하여 땅에다가 엎어놓고 “이 사람이 살고 싶지 않는가 봐, 생이 무슨 호인가?”라고 하며 문책하므로 그들은 김영준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또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사귀었다.

그가 여러 사람으로부터 공분을 사게 한 일은 대충 이러한 것이다. 이때 문벌은 이미 없어져 청직도 서류들이 과반수를 차지하였으므로 그들의 권력 앞에 본래 교만하던 사대부들도 친구, 아우 등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혼인은 서로 하지 않았다.

 

8. 주석면의 본관 바꿈

 

주석면은 북관 사람이다. 갑오경장 이후 북인으로서 갑자기 귀인이 된 사람은 금학우, 장박, 리용익, 금홍륙, 조윤승, 강홍대 등으로 이들은 전횡과 참람한 행위로 세상의 지목을 받았다.

그러나 주석면은 겸손한 처세를 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들었으므로 오랫동안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단함을 부끄럽게 여기며 주자가 자신의 원조라고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주자의 4세손이 세상을 피해 우리 나라로 와서 릉주에 적을 두었다고 하면서, 고종에게 자신의 본관을 신안으로 고쳐 달라고 강력히 요청하여 여러 주씨들과 합보를 하였다. 이때 윤용선과 리근명이 서문에 그 내용을 과장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이를 천서의 본색이라고 그를 꾸짖었다.

길영수는 청주의 도호 출신으로, 많은 길씨들을 위협하여 자신이 길재의 종손이라고 하면서 그의 집에다가 야은(야은)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상기는 서울의 천인으로 고종의 교지를 받아 하위지의 종손이라고 하였고, 송병준도 본관을 은진으로 하여 시렬의 후예라고 하므로 많은 송씨들은 그를 따라 송병위, 송병옥, 송병찬 등 대과 출신이 모두 그로부터 나왔다.

대체로 이와 같은 일은 매우 많아 주석면뿐만 아니었다. 주석면은 주씨가 본조에서는 현조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궁한 나머지 주자에게 계통을 댄 것이다

민영준이 영휘로 개명하였다. 그것은 김영준의 이름과 음이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은용도 지용으로 개명하였다. 그것은 영친왕의 이름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9. 그리스정교의 전도

 

서울에 고씨란 부인이 있는데 그는 자칭 아부인이라고 하며 호를 정길당이라고 하였다. 그는 남편 량감찰과 함께 림천으로 간 후 그리스정교(희랍교)를 전도하면서 십자기를 세워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소송사건도 간섭하였는데, 그들은 갑오년(1894)의 동비가 일어날 때와 같았다. 충남부에서 그들을 체포하였으나 다시 놓치고 말았다.

 

10. 경무청 복설

 

다시 경부를 경무청으로 바꾸어 경무사를 두었다.

 

11. 삼수군의 청국 도적 침입

 

청비들이 삼수군을 침범하자 본군의 병사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12. 일본에 독두병 발생

 

일본에서 독두병이 발생하였다.

 

13. 아비주의 핍미

 

아비주에 핍미(미상)라는 한 국사가 출현하였다. 그는 신장이 4척 4,5촌이었으며, 칼과 창은 사용할 줄 알아도 화기는 사용할 줄 몰랐다.

 

14. 독일 황제의 봉변

 

독일 황제가 밖에 나와 놀다가 어느 민간인의 행패로 그의 볼(협)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 민간인은 광증(광증)으로 판명되어 그 일을 불문에 부쳤다.

 

15. 성기운의 귀국

 

2월, 주일공사성기운이 귀국하였다.

 

16. 총기 구입

 

양총 1만정과 탄환 100만발을 구입하였다.

 

17. 일본인의 화장지 요구

 

일본인이 화장지를 바꿔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일본인이 서울에서 사망하면 수구문 밖에서 화장을 하였는데, 그 예독(예독)이 사람을 해롭게 하므로 일본 공사는 그 화장할 곳을 바꿔 달라고 간청하므로 남서의 두모포 대현동에 있는 민전을 승낙해 주었다.

 

18. 능원들의 화재

 

창릉과 온릉에 화재가 발생하고 또 숙릉도 화재가 발생하였다.

 

19. 홍릉을 금곡으로 다시 정함

 

홍릉을 다시 금곡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군장리에서 묘를 파다가 암석이 많아 결국 금곡으로 정하였다. 새 지관은 구본순이었다. 이때 제갈형은 참형을 선고하고 길영수와 박인근 등은 종신징역을 선고하였으나 고종은 특명을 내려 감형하였다가 다시 그들을 석방하였다.

구본순은 본래 릉주에 사는 사람으로, 그는 상술로 대내에 들어가 많은 은총을 받고 있다가 만년에 비서승까지 되었다. 이때 그가 알현할 때마다 고종은 용안을 들고 묻기를, “오늘 운세가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면 그는, “만안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릉역에 관한 지술을 가지고 좌지우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곡박동윤의 묘소도 발굴되어 그의 후손 박제형이 그 유골을 수습하여 군장리로 갔는데, 이때 땅이 꽁꽁 얼었지만 조금 경사진 비탈에서 표석이 나왔다. 그 표석에는, 「목복증점지 종위호세릉 호홍씨홍지제업필 수증군신동복 국조장원지광 무학하지신사소채지 청당시속사 막왕심양댁유여음댁 시형제이후기유사백」이란 62자가 새겨져 있었고, 또 「증인비매」라는 4자도 씌어 있었다. 이것은 간사한 무리들이 남몰래 묻어 놓고 고종을 현혹하여 총애를 받으려고 한 것으로 박제형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 표석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감히 숨길 수도 없었다. 이 사실을 그의 종인 박정양에게 알렸다. 박정양은 대내로 들어가서 이 사실을 고종에게 아뢰자 고종은 매우 좋아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그 후 아무 말이 없었다.

박제형은 본래 나와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성품이 매우 근신하여 절대 비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나에게 그 전말을 말해 주면서 나에게 그 사실을 기록하여 집안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20. 청국인의 류린석 구출

 

평북시찰관문봉오가 류린석을 체포하여 국경을 들어을 때 청국인 왕무충 등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그를 탈취하여 창성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들은 문시언도 결박해 갔다. 그는 문봉오의 집안사람이었다.

 

21. 영국에서 광무황제에게 훈장 증정

 

영국공사고빈사(거빈스 : J. H. Gubbins)가 우리 황제에게 두훈 대수훈장을 을렸다. 그것은 그의 전왕인 녀황의 유명이라고 한다.

 

22. 프랑스의 발명가

 

프랑스의 어떤 사람은 수족이 없지만 매우 영리하여 입으로 제조법을 가르친다고 한다.

 

23. 리은용을 함북관찰사에 임명

 

2월, 리은용을 함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24. 조병식, 금규홍 등의 입각

 

3월, 조병식을 법부대신, 금규홍을 농부대신, 민영소를 학부대신으로 임명하고 서정순을 참정, 권재형을 찬정으로 임명하였다.

 

25. 민영익의 홍콩 거주

 

민영기가 그의 형수인 민영익의 처 금씨와 함께 환국하였다.

이때 민영익은 향항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귀국하지 않고 있자 김씨는 그를 보살피기 위해 그곳으로 가 있었다. 고종은 민영익의 양자 민정식을 파양하고 민겸호의 아들 민영찬에게 두 국구의 제사를 받들게 하므로 이때부터 민영익은 민승호의 아들이 아니었다. 김씨도 홍콩으로 간 지 수년이 지나서 다시 들아오고 싶어하므로 민태호의 서자인 민영선이 그곳으로 가서 맞이하자 이때 그는 민영기를 따라 귀국한 것이다.

민영익은 본래 고자였으나 해외에서 오랫동안 있으면서 기특한 약을 구하여 양도를 회복한 후 첩을 얻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의 이름은 보라고 한다.

그리고 민영익은 본국에서 병란이 빈번한 것을 보고 귀국할 뜻이 없어 향항에서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가 홍삼을 취급하여 많은 재산을 모은 후 상해에다가 은행을 설립하여 그 생활이 왕공보다 더 호화로웠다.

그는 란초 그림을 잘 그려 문지방마다 붙여 놓았으므로 그의 난초 그림이 천하에 유행하였다.

 

26. 독일황제가 광무황제에게 훈장 증정

 

독일황제가 우리 황제에게 대경장을 보냈다.

 

27. 프랑스인 살타렐을 주불공관참서관 임명

 

프랑스인 살태래(살타렐 : P. M. Saltarel)를 주법공관참서관으로 임명하였다.

 

28. 묄렌도르프의 사망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사망하였다. 그는 계미년(1583)부터 인천, 원산, 부산 등 3항 세무관 및 외무협판으로 있으면서 많은 일을 하였고, 이때는 청국 녕파항의 세무사에서 근무하다가 병사하였다.

 

29. 청국 육현의 만사

 

청국인이 란주에 있는 전순무육현을 사사하였다. 육현은 만주 비당의 우두머리였으므로 그를 살해하여 외국을 설득하였다. 이때 그의 두 첩도 그를 따라 자결하였다.

육현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만사를 지었다.

“신의 죄는 당연히 처형되어야 합니다. 신은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소자가 살든 죽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삼자옥중국 북송 때 진회가 악비를 무고하자 한세충은 진회를 찾아가 악비가 무슨 죄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진회는 “악비가 장헌에게 보낸 서신이 비록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을 「막수유」 3자로 표기하였다. 이것은 무고를 당한 옥사라는 뜻이다. 편자주 을 당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의 은혜를 제가 저버렸으니 임금님의 걱정을 누가 풀어 드리겠습니까? 제공께서는 나라를 도와 량궁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나랏일에 죽고 처첩도 신을 위해 죽으니 누가 타당치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가련스러운 것은 90세 된 노모와 7세 된 딸입니다. 이렇게 노인과 어린아이가 온전하기 어려울진대 자애와 효성을 상한 죄를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저를 살인죄로 치죄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조정에서 나를 살해한다 해도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제가 부끄러운 것은 임금님을 섬긴 지 20년이 되었고 관직생활도 3개의 성을 거쳤지만 만분의 일이라도 그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여 공연히 명주의 은혜를 저버린 데 대해 탄식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 유서를 읽은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였다.

 

30. 리용태을 주일공사에 임명

 

4월, 리용태를 주일공사로 임명하였다.

 

31. 금병규 등의 헌의

 

유생 금병규 등이 헌의하여 오대산에 봉선하고 비석을 세워 황덕을 반포하자고 간청하였다.

 

32. 제주민란

 

제주민이 큰 소란을 일으켰다. 프랑스인이 제주에 포교활동을 하여, 그곳으로 유배된 전교리리용호가 천주교를 믿게 되자 주민들 중 그를 따라 신봉한 수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그를 도와 포학(폭학)을 선동하므로 전지역이 크게 소란하였다. 그를 따르지 않은 많은 주민들은 그들을 공격하여 천주교도 250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조정으로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황기연을 찰리사로 임명하여 강화병 100명, 수원, 전주병 각 200명, 광주병 100명을 인솔하고 가서 그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그들은 5월에 돌아왔다. 그리고 모든 죄수들은 다른 섬으로 이배하였다.

 

33. 오천군 설치

 

전일, 충청도 수영 터에다가 오천군(오천군)을 설치하였다.

 

34. 고종의 50세 경축식

 

황태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고종에게 50세 경축식을 거행하자고 간청하였는데, 세 번 상소한 후에 허락하였다.

 

35. 윤용선을 의정에 임명

 

윤용선을 의정, 신기선을 법부대신, 조중목을 경기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조중목은 조병세의 손자이다.

 

36. 전선교사 초빙

 

독일 여성 송씨(미상)를 고빙하여 전선교사로 임명하였다.

 

37. 서양인의 사향 사향 제조

 

서양인이 사향(사향)을 제조하였다. 그것은 진품과 구별할 수 없었으나 1개월이 지나면 그 향기가 사라졌다.

 

38. 대동강, 한강 등지에서 불상 출토

 

대동강에서 석불 2구, 한강에서 금불 1구, 서울 동대문 밖에서 석불 1구가 나왔다.

 

38. 경기도의 한발과 기우제

 

5월, 큰 가뭄이 계속되었다.

경기도 연해 지방이 더욱 심하여 8월까지 기우제를 지내다가 중지하였다.

 

39. 명헌태후의 80세 경축연

 

명헌태후의 나이가 80세를 바라보자 이때 경축연을 열면서 기녀에게 관직을 상으로 주었다. 종2품은 2명이며 정3품은 3명이나 되었다. 이와 같이 명기를 남발하였다.

 

40. 온양의 냉천 발견

 

온양군에서 랭천이 발견되었다. 온천과의 거리는 10리였다. 맹씨 마을에서 샘을 파다가 이 냉천이 발굴된 것이다.

이 물을 마시거나 목욕을 하면 효험이 있었다. 이 소문이 대내까지 알려져서 그곳에 행궁과 사찰을 건립하므로 전군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41. 안남미 수입

 

리용익이 안남미 30만석을 수입하였으나 그 쌀의 질이 불량하여 보급을 할 수 없었다.

이때 서울에서는 날씨가 가물어 쌀값이 날로 오르므로 돈을 가지고도 끼니를 굶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각 공관에 조회하여 각 항구에 쌓인 미곡을 수출하지 못하게 하였다.

 

42. 한해로 공사중지령

 

한재로 인하여, 급하지 않은 토목공사를 중지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43. 금영준의 복관

 

금영준을 부관하였다.

 

44. 강화병 모집

 

강화병 500명을 추가모집하였다.

 

45. 가로등 점화

 

서울의 각 가로마다 전등을 점화하였다.

 

46. 공납전 운반비 책정

 

공납전의 운반비를 정하여 100민을 운반하는 사람에게는 10리마다 2푼 5리를 지급하였다. 전년에 비해 절반이 감해진 것이다.

 

47. 윤두영 등의 엄빈봉비 상소

 

7월, 전교리윤두영이 상소하여, 엄빈을 황비로 봉하자고 간청하였다.

윤용선, 조병식 등도 그의 뒤를 이어 간청하였다.

 

48. 흥선대원군 추존

 

흥선대원군을 대원왕으로 추존하였다.

 

49. 박수빈 황비증봉

 

수빈 박씨를 황비로 증봉하고 대사령을 내렸다. 황비는 곧 가순궁이다.

이때 엄빈을 비로 봉하자는 여론이 날로 높았다. 윤용선 등이 먼저 박수빈을 황비로 봉하자고 간청하는 것은, 엄빈을 황비로 봉하기 위한 것이다.

 

50. 침순택을 의정에 임명

 

침순택을 의정으로 임명하였다.

 

51. 리용익의 범포 수령 탄핵

 

리용익이 범포한 수영 200여 명을 탄핵하여 100일 내로 그들을 파면, 치죄하게 하고 2일 안에 27만원을 청산하도록 하므로, 가옥을 저당잡히고 재산을 매도한 사람이 길에서 줄을 잇고 있었다.

 

52. 만수절의 내외경축연

 

만수절에 내외의 경축연을 마련하여 경비가 100만원이 소비되고, 미리 기생들을 선발하고 풍악을 준비해 두었다가 우제도 병행하였다.

이때 서양인들은 금중으로 들어와 악기 등을 발로 짓밟고 크게 꾸짖다가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경축연이 끝난 후 황태자는 백지 3속, 면포 10필, 돈 500냥을 문밖으로 보내어 걸인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53. 일본인의 방한 자유 선언

 

일본인들이 한국 방문을 자유롭게 한다고 선언하였다.

우리는 맨 처음 일본과 조약을 체결할 때 여권이라고 할 수 있는 호조정부에서 외국인에게 내어주는 여행권. 편자주 가 없으면 한국의 연안에 항해를 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때 그들은 우리 나라를 경멸한 나머지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이와 같이 시험을 한 것이다.

지난해 연합군을 조직하여 러일 양국이 만주를 탈취하려고 하였으나 그 후 일본은 러시아에 양보하고 조선을 간섭하지 않도록 조약까지 체결하였다. 그것은 상호 교환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었다.

 

54. 각국의 한발

 

가뭄이 날로 심하였다.

외국의 신문보도에 의하면, 청국의 산동, 직례, 산협, 강남, 구주, 토이기, 만파사(페르시아), 아라사(러시아) 및 북미주가 모두 큰 한해를 입었으며 오직 일본에만 많은 비가 왔다고 한다.

 

55. 청국의 과거제도 폐지

 

청국이 문무과의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각성에 무비학당을 설립하였다.

 

56. 왕우군의 행서 발견

 

청나라 건륭(건륭)청국 고종의 년호. 편자주 때 진대 왕우군진나라 왕희지의 별칭. 회계인. 자는 일소, 원제 때 우군장군을 지내어 왕우군이라고 칭함. 편자주 의 진필 행서 30여 자를 발견하였다. 13자를 배열하여 벽옥에 각을 한 것이다. 그 벽옥의 길이는 8촌, 넒이는 1척이었다. 이것을 대내에 간직하고 있었으나 북경이 격파될 때 서양인들이 가져가 이것을 찾는 가격이 1,400원이나 되었다.

 

광무 5년 신축(1901년) ②

 

1. 윤용선을 의정에 임명

 

8월, 침순택을 면직하고 다시 윤용선을 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윤용선은 그 정략과 시행능력이 심순택과 별다를 게 없었지만 그는 문학이 조금 우수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그의 강인한 성품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어리석은 심순택을 대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2. 일본인의 경부선철도 부설과 울릉도 산림벌채

 

일본인이 경부선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하고, 울릉도를 들어가 삼림을 벌채하였다.

 

3. 민영주의 수감

 

민영주를 수감한 후 징수금 3만9천원을 추징하고, 다시 일본인에게 월미도를 주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4. 엄비 책봉

 

엄비를 순비로 책봉하여 그 궁호를 경선이라고 하고, 영친왕의 궁고를 옛날 장흥고 터에 신축하였다.

 

5. 혜민원의 신축

 

혜민원을 신축하여 진정을 강구하자 어떤 사람은 외국의 미곡을 구입하라고 간청하고, 어떤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분담을 시키자고 권고하였다.

 

6. 지계아문의 설치

 

지계아문을 설치하였다. 그 역할은 지방관으로 하여금 전주를 불러다가 새로 만든 권번을 지급하게 하되, 그 절반을 나누어 오른쪽은 전주에게 주고 왼쪽은 관고에 보관하게 하였으며 1권당 1전을 징수하고 옛날 권번은 모두 회수하여 소각하였다. 이것은 의관금중환의 상소를 따른 것이었으나 그 일은 결국 시행하지 않았다.

 

7. 이탈리아 황제 등의 시해사건

 

이탈리아 황제, 오스트리아 황후, 필리핀 대군주, 미국과 프랑스 대통령이 모두 백성들에게 시해되었다. 이것은 외국 신문에 보도된 것이다.

 

8. 전국의 수해와 도둑 유행

 

전국이 큰 수해로 인하여 집이 떠내려가는 것이 각처에서 발생하였다. 량서에서 호우까지 이재민들이 즐비하였다.

이때 각군에서는 정공을 폐지하고 진정을 시행하라고 간청하며 눈송이(설편)만큼이라도 진휼미를 달라고 그 시급함을 호소하였으나 의정부에서는 그것을 바라만 볼 뿐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도둑들이 사방에서 일어, 서울에서는 대낮에 약탈사건이 빈번하므로 십가작통을 시행하여 서로 감시를 하였으나 그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9. 청국의 수해

 

청국의 강서성과 절강성 이남 7성에 큰 홍수가 발생하였다. 그로 인한 수해는 한재보다 더욱 심하였다.

 

10. 코끼리의 반입

 

9월, 리용익이 안남미를 구입해 올 때 그 선편에 코끼리 두 마리를 싣고 왔으나 하나는 죽고 말았다.

 

11. 귀인 박씨에게 경빈호 하사

 

장조의 귀인 박씨에게 경빈호를 하사하였다.

 

12. 민종묵의 입각

 

박제순을 찬정, 민종묵을 농부대신, 리종건을 경무사로 임명하였다.

 

13. 성진군과 길주군의 합병

 

성진군과 길주를 다시 합병하였다. 성진과 길주를 분리한 후 누차 민요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14. 서정규 등을 관찰사에 임명

 

리근호를 충남관찰사로 임명하고, 서정규를 함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5. 윤헌섭 등을 삼남시찰사 임명

 

윤헌섭을 삼남시찰사, 리만재를 삼남도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송경인, 금홍제, 강용구 등이 잇달아 시찰사의 임무를 띠고 전임이 떠나기 전에 후임이 다시 내려왔다.

그들은 잠시 소환명령이 있으면 뇌물을 더 주었기 때문에 고종은 제로의 시찰원들을 외부로 여겼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더욱 그들의 명령을 견딜 수 없었다.

 

16. 연안군의 큰 연못 준설

 

연안군 남쪽에 있는 큰 연못을 준설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큰 연못은 국내에서 큰 제방에 속하였다.

그리고 이해 여름에 큰 가뭄으로 인하여 먼지가 날리고 음화가 나와 수십 일 동안 화재가 발생하였다.

 

17. 홍릉 신축비

 

다시 홍릉 신축비 3만원을 지급하였다.

 

18. 리강의 학자금 송부

 

미국에 있는 의친왕리강에게 학자금 3만원을 송부하였다.

이해 7월 중 일본군함이 자주 인천에 도착하므로 고종은 이강의 서신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황비 금씨에게 학자금을 납부하도록 독촉하였으나 김씨는 없다고 대답하였고, 그 궁비를 엄하게 국문하였지만 결국 아무 근거를 찾지 못하자 사람들은 고종이 참소(참소)에 빠져 든 것으로 의심하였다.

 

19. 옥구군 해일

 

전북 옥구군에 해일이 있었다.

 

20. 채광묵의 내부주사 사절

 

10월, 채광묵을 내부주사로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채광묵은 부수소를 올려 복수할 기회가 없다고 하였는데, 복수하기 전에 관함을 받는 것은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하면서 강력히 사절하였다.

 

21. 서공마 구입

 

서공마 300필을 구입하여 원수부로 들여놓았다.

 

22. 신기선의 입각

 

신기선을 법부대신, 민경호를 평남관찰사, 정태현을 충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정태현은 영남에서 유명한 부호였으므로 25만냥을 상납하여 그 자리를 얻었으나, 그는 부임한 후 치적이 있다고 칭송되었다.

 

23. 사진도감

 

사진도감을 설치하여 고종 및 황태자의 어용을 그렸다.

 

24. 수옥헌의 화재

 

수옥헌(수옥헌)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문화각과 정이재를 소각하였다.

 

25. 경위원 설치

 

경운궁에 경위원을 설치하였다.

 

26. 전남지방의 기독교 번성

 

전남 순천, 악안 등지에 서학이 크게 치성하였다.

 

27. 량전을 중지

 

전지측량사업을 정지하였다.

기해년(1899) 여름부터 개량사업을 시행하여 이해 7월까지 측량한 곳은 경기 14군, 충북 13군, 충남 18군, 전북 14군, 전남 13군, 경북 22군, 경남 8군, 황해 2군으로 도합 104군이었으며, 내탕전이 199,146원 41전 4리나 소비되었다.

그리고 루결은 66,901결 52부이며 루호는 188,832호였다. 이것은 흉년이 들어 잠시 정지된 것이다.

 

28. 탁지부와 내장원의 재정

 

이때 탁지부에서는 재정이 궁색하여 오랫동안 관리의 봉급을 주지 못하고 내장원에 있는 돈을 끌어다가 지불하자 그 후 얼마 안되어 공납전이 조금 풀리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그 즉시 탁지부에 명하여 내장원의 돈을 갚으라고 독촉하였다. 그것은 고종이 탁지부를 공물로 보고, 내장원은 사물로 인정하여 주나라와 월나라처럼 아무 상관없이 생각한 것이다.

 

29. 주계옹수직 제수

 

함흥민 주계옹이 나이 103세이므로 특명을 내려 종1품을 제수하였다.

 

30. 치도률 개정

 

11월, 도둑이 법부를 침입하여 관리의 의복과 물품을 약탈하자 치도률을 개정하여 장물 50관 이상과 재범, 3범에 대해서는 불문곡절하고 교수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요즈음 몇 년 동안 절도사건이 빈번하여 서울로부터 변방에 이르기까지 솜에 불이 붙듯 계속되었으나 관리들은 그들을 근절하지 못하고, 또 기근까지 들어 그들은 공공연히 약탈을 자행하므로 행상들의 발길이 끊기어 치도율을 무겁게 하였지만 결국 금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31. 금성근의 석고 제작 건의

 

금성근이 석고를 제작하여 성상의 중흥공적을 기록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경관은 1개월 봉급을 감봉하고, 또 이 여론을 외군까지 파급시켜 그 비용을 충당하기로 하고 송성건의소를 설치하여 조병식을 의장, 리유승을 부의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유승은 강력히 사절하고 다음과 같은 상소를 하여 그것이 비리임을 지적하였다.

“력대의 제왕으로 요, 순, 우, 탕, 문, 무로부터 한, 당, 송에 이르기까지 상하 3~4천년 동안에 걸쳐 그 덕망과 업적을 기륵한 것은 오직 간책으로 전한 것뿐이며, 비석을 세워 자신의 덕을 칭송한 것은 진시황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석고에 대해서는 <경전>에도 상고할 수 없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문왕의 석고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선왕 때 시를 각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의 중흥은 <시경>과 <사전> 등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이며 석고에 의하여 후세에 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국가의 사업과 대훈에 있어서는 훌륭한 사가들이 대서특필하여 천추에 전해질 것이니 어찌 한 조각의 돌에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일을 중지하라는 특명을 내려 겸손한 덕을 빛내시기 바랍니다.”

이 상소가 전해졌으나 그 후 거론되지 않았다.

 

32. 리근택의 원흥사 창건

 

이근택이 동대문 밖에 있는 영미정(영미정) 부근에 원흥사를 창건하여 13도의 사찰을 관리하게 하고 승군 50명을 두었다.

이것은 호위대의 Ȭא 의ܠ것이다. 그리고 이근택은 자신이 총사장이 되어 일본승 광안진수 등에게 단상에 올라 불법을 강하게 하므로 경산 32사 승도 및 늙은 배우 등 1천여 명이 모이고, 사대부의 부녀자들도 마치 시장을 가는 것처럼 많이 모였다.

이근택은 한규설의 생질로 고종과 가깝게 지냈다. 그가 하루는 일본인 점포에서 수대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이 혹 명성황후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 수대에는 그때까지 피묻은 흔적이 있었다.

이근택은 그 수대를 6만원에 구입하여 고종에게 올리자 고종과 태자는 슬피 울면서 황후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여겼다.

그 후 이근택에 대한 총애는 날마다 커져서 그의 형 근호, 근용 및 그의 아우 근상, 근홍 등과 함께 요직을 두루 거치므로 이때 사람들은, 그들을 오현으로 7칭하였다.

 

33. 안영중의 방술

 

지리산이 3일 동안 울었다. 그 소리는 수백 리까지 들렸다.

그리고 안영중이란 사람은 옛날 남원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술수를 좋아하여 역수를 잘 말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안주역」이라고 칭하였다. 그는 갑오년(1894) 동학란이 일어났을 때 어머니 상중에 있었으나 탈상한 후에는 금개남에게 붙어 좌포장이 되었다.

그 후 동학당이 패배하자 그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서울로 왔다. 이때 그는 어떤 사람을 통하여 아뢸 말이 있다고 하면서 대궐로 들어가 독대를 하였다.

그는 지리산 산맥이 바다를 건너 일본 땅이 되려 하니 그 산맥을 끊어 제압을 하면 일본이 스스로 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고종은 그의 말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안영중을 량남 도시찰사로 임명하고, 많은 장정들을 동원하여 운봉 지역으로 뻗은 산맥을 끊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한 것은 겨울철인데다가 암반이 나오고 물도 솟아올라 삽으로 팔 수도 없었다.

이때 관찰사조한국이 누차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있다가 안영중이 산의 울음소리를 듣고부터 두려움을 느껴 중지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는 현풍군수로 부임하였다.

 

34. 리근호 등 관찰사 제수와 고종의 관직 매매

 

리근호를 전남관찰사, 조정희를 충남관찰사, 조기하를 경북관찰사, 민영철을 평남관찰사, 민경호를 평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때의 매관 람발은 갑오년(1894) 이전에 비해 훨씬 심하여 비록 종척과 친한 사람이라도 감히 한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관찰사 자리는 10만원 내지 20만원이었고, 1등 수령은 적어도 5만냥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관직에 부임하면 자기 돈으로 빚을 갚지 않고 서로 앞을 다투어 공전을 끌어다가 갚았으며, 더욱 심한 사람은 사사로운 상납을 더 많이 하여 높은 직위에 승진한 후 떠나기도 하므로 관리들은 그들을 본받아 공전을 끌어다가 화려한 전장을 마련하고 혹은 관직을 노리기도 하였다.

이에 관리들이 범하는 것은 모두 공전이었으므로 국고가 자연히 감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국고를 공물로 생각하여 국고가 차거나 줄거나 관계하지 않았고, 매관전은 사전으로 생각하여 혹 손해가 날까 두려워하였으나 관리들이 속이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서상욱은 민영환의 장인이었으므로 민영환은 오래 전부터 고종에게 군수 한자리를 제수해 달라고 하였는데, 하루는 고종이 “당신의 빙장이 아직도 군수가 되지 못했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후 다시 그 사실을 말하자 고종은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내가 거의 망각할 뻔하였으니 곧 이름을 적어 내리겠습니다”라고 하고 이에 광양군수를 제수하였다.

이때 민영환은 집에 돌아가서 기뻐하며 “오늘 상께서 저의 장인에게 군수 한자리를 허락해 주었으니 그 은혜에 감명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자, 그의 어머니는 웃으며 “네가 이렇게 어리석으니 너도 황제의 외척이냐? 상이 어찌 한자리를 제수하여 너에게만 후하게 하겠느냐? 내가 이미 5만민을 상납하였다”고 하였다.

 

35. 이황 신주의 도난

 

선정신 리황의 서원에 도둑이 들어 그 신주를 가져가므로 례안군수를 축출하라는 명을 내 렸다.

그 서원은 례안의 도산에 있다. 구례에 따라 봉상사가 다시 신주를 만들어 도산서원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36. 진남대, 울산대의 이동

 

진남대는 진주, 울산대는 경주로 이동하였다.

 

37. 일본인의 이민 준비

 

일본에서는 우리 나라로의 이민문제가 거론되어 토질을 채취해 갔다.

 

38. 갑산의 동광 붕양

 

갑산군의 동광이 붕괴되어 광부 600여 명이 사망하였다.

29. 군수 여비제도 폐지

12월, 군수 부임시에 주던 여비를 폐지하였다. 옛날 예에 수령이 부임할 때는 쇄마전을 주었다가, 갑오경장 이후에는 여비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임지에 도착하여 다시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므로 그 제도를 폐지하였다.

 

30. 평양의 행궁 건립

 

민영철에게 명하여 평양에다가 행궁을 건립하게 하고, 이를 서경이라고 하였다.

 

31.영국 대관식 특명대사 파견

 

리재각을 특명대사로 임명하여 영국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하고, 민영찬을 주불공사로 임명하였다.

 

32. 서정규의 기부

 

함북관찰사서정규가 상을 당하였으나 그는 기부을 희망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33. 리강의 학자금 송부

 

의친왕리강의 학자금 9,500원을 송부하였다.

 

34. 남관왕묘의 중수

 

남관왕묘를 중수한 후 고종은 그 명호를 높여 「현령소덕의렬무안관제」라고 하였다. 이때 고종은 기도를 숭상하므로 서민들은 이를 본받아 무풍이 성행하였다. 그 관제를 떠받든 사람들은 가가호호가 모두 축원하였다. 오직 서울만 그러하였다.

 

35. 국문학교 설립

 

금가진이 국문학교를 설립하였다.

 

36. 진청 설립

 

서울에 진청을 설립하여 5부에서 기아 인구 19,683명을 선별하였다.

이때 동사 및 아사자도 수만 명이나 되었으며, 그 고통을 못이겨 온 가족이 독약을 먹고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혜민원에서는 날마다 죽을 두 번씩 끓여 결식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또 경무서에 칙령을 내려 연강의 걸인들을 엄금하였다.

 

37. 진위대 감축

 

진위대 절반을 감축하고 시위대 및 친위대 두 부대는 매일 절반으로 나누어 번을 편성하였다. 그것은 군량을 절감하려는 것으로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38. 대원군의 후사관계

 

리재면의 아내가 사망한 지 이미 10여 년이 되었지만 장남 준용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고, 차남 분용은 이해 겨울에 사망하였다.

38. 이때 고종은 준용이 역적명을 띠고 있으므로 대원군의 제사를 받들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문용을 후사로 세워 둘째 적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재면은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자신의 슬하에 혈육이 하나도 없으니 재취를 하여 후사를 얻겠다고 하였다. 이에 고종이 그의 청을 허락하여, 그는 부평 민가의 리씨를 후실로 맞아들였다. 이때 그 후실의 나이는 19세였다.

처음에 엄빈은, 준용은 먼 곳에 있으므로 우려할 것이 없고, 문용은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잘 길러 후일을 기대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자주 그를 불러 은근히 친근하기를 꾀하고 있었다.

이해에 10만민을 들여 운현궁을 수리하였다.

 

39. 명예영사라는 말

 

필리핀 사람 무륵륭(미상)이 우리 나라 명예령사로 임명된 후, 서울에 있으면서 상무를 맡아보고 있었다. 「명예」라고 한 것은 봉급도 받지 않고 일만 본다는 것으로 근년에 유행한 말이다.

 

40. 최과부와 리용직

 

최씨 성을 가진 어떤 과부가 합천 해인사를 왕래하면서 30년 동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는 아들의 성이 정씨라고 하였으나 그 아들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때 전판서리용직은 첩과 함께 해인사 옆에 살면서 최과부를 도와주었으므로 사람들은 그 여인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해 겨울에 경병이 해인사로 들어가 그 최과부를 체포한 후 그를 신문하고, 그의 아들을 추적하였으나 체포하지 못하였다. 그 후 이용직은 그의 와주(와주) 노룻을 하며 수십만 냥을 상납하여 겨우 방면하였다. 그러나 경병이 3~4개월 동안 수색을 하였으므로 승려들만 곤욕을 치렀다.

 

41. 전국의 호구와 인구수

 

한성부에서 보고한 이해의 호구 수는 1,409,344호이며, 인구는 5,713,244명이었다. 지난해에 비해 호구 수는 11,714호가 더 증가하고 인구는 10,593명이 더 증가한 것이다.

이때 전북 연해로부터 인천과 통진에 이르기까지 들판의 작물이 모두 말라죽어 류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아무 근거도 없이 세결을 징수하므로 거주민들은 더욱 살기가 어려웠다.

이때 정부에서는 표재를 공제해 주는 일은 없고, 다만 3분의 1만 감해 주었다. 그러므로 경기도 지방에서는 한 군에서 2천여 호의 유민이 발생하고 오직 경남지방과 전남 일대만 조금 작황이 좋아, 도둑을 경비한다는 소문이 드물었다.

 

42. 청국 황제의 시정

 

청국 황제가 서안에서 북경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원세개를 직례총독으로 임명하여 리홍장의 뒤를 잇게 하고, 또 팔기자제들을 선발하여 구주로 유학을 시켰으며, 한인 여자의 전족(전족)을 금지하고 만주족과 한인 두족이 상호 결혼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때 고종은 전화로 그의 회환을 축하하였고, 허태신도 이에 대한 답전을 하였다.

 

광무 6년 임인(1902년)

 

1. 고종의 존호가상

 

임인년(1902) 광무 6년(청국 광서 28년. 일본 명치 35년) 정월, 고종이 등극한 지 40년이 되고 성수는 60세를 바라보게 되었으므로 이 양대경사를 병행하여 「건행곤정영의홍휴」 및 전날에 가상한 「통천륭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신렬외훈홍업계기선력」 등 48자를 존호로 가상하고, 또 문조익황제에게는 굉유신휘수서우복, 신정익황후는 계지, 명헌태후는 유녕, 명성황후는 성덕으로 추상한 후 대사령을 내렸다.

그리고 근년 이후 4색당 중에서 초사자는 노론이 800명, 소론 500명, 남인과 북인이 도합 700명이었다. 또한 존호도감에는 감조관을 두었는데, 이들은 음도(음도)로 6등급을 선발하였으므로 그 6등급에 선발되기 위해 경쟁을 벌인 사람이 2천여 명이나 되었다. 각 당의 인원을 도감원역으로 배정하고 그 별간역 등에 대해서는 각 한 사람당 은전 18원, 주단 6필, 고원, 공장 사령 등은 은전 10원, 면포 2필, 악생, 악공, 녀령, 비장 등은 은전 10원, 주단 5필, 기녀 53명은 제각기 은전 18원, 주단 13필, 녀령 150명에게는 각 은전 4원, 면포 1필, 니혜, 건혜 1부를 하사하였다.

 

2. 침상훈 등의 입각

 

침상훈을 탁지부대신, 신기선을 군부대신, 한규설을 법부대신, 리근명을 경기관찰사로 임명하였다.

 

3. 러시아인의 경흥부 전주 가설

 

러시아인들이 경흥부에서 함부로 전주를 가설하므로 외부대신박제순이 사람을 보내어 그 전주를 빼어 버리자 러시아 공사파블로프가 크게 화를 내어 고종에게 박제순의 해임을 간청하였고, 박제순도 상소하여 이에 대해 반발하였다.

파블로프는 이를 창피하게 여기어 다시 조정에 간청하였다. 이때 그의 말은 매우 겸손하였지만, 우리 조정에서는 단연 허락하지 않았다.

 

4. 시찰원의 소환령

 

파견한 시찰원을 소환하고 음사인과 관함을 빌린 사람들은 <관보>에 게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때 유언비어가 유행하기를, 영국과 일본이 맹약을 체결하여 우리 내정을 간섭하려 한다고 하므로 조정의 여론은 흉흉하여 이 칙명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곧 시찰원들에게 즉시 상경하지 말고 형세를 보아 가며 행동을 취하도록 하였다.

 

5. 일본의 울릉도 경찰서 설치

 

일본인들이 울릉군에다가 경찰서를 설치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이 도서에서 거주한 지 5~6년이 되고 그 수효는 매년 증가추세에 있었다. 그들은 삼림을 관리하면서 도리어 우리 나라 사람에게 채벌을 금지하며 병력으로 위협하였으므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

이같이 경찰을 파견한 것은 울릉도를 일본의 영토로 본 것과 같다.

 

6. 주청공관의 매입

 

박제순을 주청공사로 임명하였다.

그가 북경으로 간 후 고종은 지금부터 청국과 맞먹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의절이 구차하면 청국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고 생각하고, 특별히 내탕전 15만원을 지출하여 공관을 구입하였다. 그 공관은 극히 화려하게 꾸미어 다른 나라 공관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다.

박제순은 문식이 있고 외교에도 능숙하였으므로 그를 파견한 것이다. 이때 박제순은 그곳에 도착하여, 새 공관을 신축하기 위하여 그 비용을 계산해 보니 수백만 원이 들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다. 그때 마침 미국 공사가 그들의 옛 공관을 매도하려 하므로 14만원을 주고 매입하였다. 그 공관은 매우 크고 훌륭하였다.

그러나 그는 각 공관을 왕래하며 그들이 거처하는 생활환경을 보니 모두 선궁과 같으므로 배고픈 줄도 몰랐다고 하였다.

박태영은 참서관으로 박제순을 따라갔었는데, 나를 만나 그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웃었다.

 

7. 일태사아

 

서울 모동 거리에는 탯줄 1개에 달린 4명의 아이가 버려져 있었다.

 

8. 전화 설치의 시작

 

2월, 인천항에 전화를 가설하였다. 이때부터 전화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9. 리용우 등의 벽옹설립 간청

 

전의관리용우 등이 벽옹(벽옹)주대에 천자가 세운 태학의 명칭. 남을 성균, 북을 상양, 동을 동서, 서를 고종, 중앙을 벽옹이라 하였음. 편자주 설립을 간청하였다.

 

10. 함남지방 민요

 

함경남도에 민요가 발생하여 관찰사금종한을 축출하므로, 조서를 내려 서정순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서정순은 함경도지방의 백성들을 사랑한 일이 있었으므로 특명을 내려 그를 세 번이나 제수하였다. 이때 서정순은 여섯 차례나 상소하여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아 결국 부임하였다.

 

11. 평양의 궐비 유실

 

평괴군에 있는 궐비를 잃었다.

 

12. 인도에 흑사병 유행

 

인도에서 열병이 발생하여 1월 중에 7만여 명이 사망하였다. 이것을 흑사병이라고 한다.

 

13. 한기동의 사망

 

3월, 전참판한기동이 사망하였다.

한기동은 갑오경장 이후 집에 들어앉아 모든 일을 사절하고 청명을 떨친 채 작고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를 고상하게 여기었다.

 

14. 역둔조의 대출

 

충북관찰사정태현이 장계를 올려, 빈민에게 역둔조(역둔조)를 대출하였다가 가을에 상환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고종은 이를 윤허하고, 또 조서를 내려 경기, 충남, 전북, 해서지방에 곡종이 없으므로 역둔조를 대출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것은 충북의 경우를 따른 것이다.

 

15. 경기도의 기근

 

경기도의 기민들이 교하에 있는 장릉의 송림을 침범하여 송피를 모두 벗겼지만 릉군들이 금하지 못하였다. 이때 그 송림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죽은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

 

16. 고종 등극 40주년 경축연

 

9월 17일을 고종 등극 40년 경축일로 정하고 청국, 일본,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에 주재하고 있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화를 하여, 각국 정부로 하여금 대사들을 파견하여 경축연에 참석하도록 조회를 하라고 하였다.

 

17. 확포사의 이전

 

안변군의 각포사를 관동의 흡곡군으로 이속하였다.

 

18. 의정부의 이전

 

4월, 새로 지은 법전을 중화전이라 부르고 옛 중화전을 다시 즉조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포덕문 안에 있는 화경당으로 의정부를 이치하였다.

 

19. 고종의 기로사 가입

 

고종이 기로사에 들었다. 이것은 숙종과 영조 전례에 의한 것이다.

이때 고종은 령수각에 절을 올리고 양로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경조관 4품 이상으로 나이 70세가 된 사람과, 5품 이하로 나이 80세가 된 사람은 모두 한 자계를 올려 주었다. 그 계는 모두 600여 명이었다.

그리고 경외에는 기호 양도에서만 760여 명이었는데 그중 변칙 가입자들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서민 중에서도 나이 100세가 넘은 사람은 모두 종1품을 주었다. 이때 고산의 금제상은 106세이며 흥양의 박보득은 105세, 금두선은 102세였다.

그러나 근세의 불량민들은 로인과를 넘보며 으레 호적에 연령을 더 추가한 경우가 많아 다 말할 수가 없다. 지금 이와 같이 100세가 되었다고 한 사람들도 종종 이런 예가 있었다.

그리고 양로연을 치르면서 연일 북을 치고 풍악을 즐기므로 시민들은 궁중으로 기와조각을 던졌다. 이에 별입시들은 별원으로 장소를 옮기자고 하였는데, 고종은 그때까지 투석의 변이 있었던 것도 몰랐다.

이때 탁지부의 예산을 짜면서 양로연의 진찬비 69,246원 8전 4리와 법전 영건비 31만5천원을 기입하고, 홍릉 신역비로 이미 지출한 45만원과 만수절 수용비 250,605원 13전도 기입하였다.

그리고 궁내부에서는 양등대, 양반우 등을 프랑스에서 구입하였다. 경축연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20. 미국인 보스트윅을 주샌프란시스코 명예영사에 임명

 

미국인 보시욱(보스트윅 : H.R. Bostwick)을 대한명예영사로 임명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주재하면서 우리 교민들을 관리하게 하였다.

 

21.일본 승려 사곡의 방한

 

일본인들이 정토종의 스님 사곡을 파견하여 우리 나라의 불교계를 시찰하였다.

 

22. 낭천군의 개칭

 

관동의 랑천군을 화천으로 개칭하였다.

 

23. 서인도의 화산폭발

 

서인도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사망자가 2만여 명이나 발생하였다.

 

24. 홍승헌 등의 관찰사 임명 경위

 

6월, 리헌!!영을 경북관찰사, 홍승헌을 충남관찰사, 리용직을 황해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고종이 매관한 데 대한 질책을 날마다 하였으므로 당대의 명망 있는 이 세 사람을 택한 것이다. 이때 이헌영은 세번째 제수되었다. 그는 강력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홍승헌은 네번이나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엄한 교지를 내려 부임하게 하였다.

 

25. 례식원 건립과 창덕궁 중수

 

예식원을 건립하여 경축연 때 의절행사장으로 삼고, 창덕궁을 중수하여 각국 대사들의 향연소 및 사교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되어 도둑 떼들이 침입하여 목창을 파괴하고 장판지를 뜯어 갔다.

 

26. 관리서 건립

 

관리서를 건립하여 국내의 사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27. 서울의 기우제

 

서울에 큰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냈다. 그리고 하삼도에는 많은 황충이 발생하였다.

 

28. 엄비 황후 책봉 간청

 

재신 한성근과 침상한이 진신과 장보 수백 명을 인솔하고 대궐 앞에 부복하여 엄비의 황후 책봉을 간청하고 또 금병익, 서상조, 금영목, 조병필, 정락용, 조종필, 리건하, 리근수, 금세기, 금학수, 금가진, 리용태, 정세원, 서공순, 금만수, 금승규, 리면상,정관섭, 정인학, 조정구, 금유성, 리치영, 정인승, 원세순, 구영조, 리남희, 리용한, 금재은, 구종서, 리민섭, 리봉래 등이 신사 400여 명을 거느리고 그 뒤를 계속하여 간청하고, 또 전남의 신사 한신교 등이 그 뒤를 이어 간청하였다. 그리고 3도 유생들이 그 뒤를 이어 간청하고, 또 리만식 등이 8도 유생들과 함께 만인소청을 설치하였다.

이때 엄비를 따르던 주익, 준원 등이 용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민영준, 민응식 등이 교지를 받아 백관을 효론하는 것처럼 하였으므로 국내의 모든 사람들은 미친 듯이 날뛰며 다른 일은 물어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고종은 본래 태자를 사랑하여, 엄비가 만일 정위에 오르면 태자는 당연히 신으로서 엄비를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기 때문에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뭇거리고 있었다.

 

29. 리범윤의 북간도 시찰

 

리범윤을 파견하여 북간도를 시찰하였다.

 

30. 고종의 공덕기념비 건립

 

8월, 고종의 공덕기념비를 건립하였다.

 

31. 리지용의 기복

 

리희하가 사망하였으나 리지용은 본생부의 거상중 기부되었다.

 

32. 윤황의 신주 도난

 

도둑이 윤황의 서원에 있는 신주패를 절취해 가므로 봉상사로 하여금 다시 제조해 봉안하도록 하였다.

 

33. 식인 맹수

 

서울 외곽에서 맹수가 어린아이를 잡아먹었다. 그 맹수는 늑대라고도 했고, 시랑이라고도 하였다.

 

34. 군경의 단발과 금각수의 유배

 

군과 경 양청의 관리 및 외도의 지방대를 모두 단발시켰다. 이에 김확수가 상소하여 간하므로 그를 유배하였다.

 

35. 엄비의 황귀비 책봉

 

9월, 순비엄씨를 황귀비로 책봉하자 그 후 황후 책봉을 간청한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36. 명성황후 감모비의 건립

 

장원서에 명함황후의 감모비를 건립하였다.

 

37. 도량기의 구입

 

도량형을 개정하여 일본인이 제조한 도량기를 구입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사용하지 않아 아무 실용성이 없었다. 국고의 낭비가 모두 이와 같았다.

 

38. 리기종을 비서승에 임명

 

리기종을 비서승으로 임명하였다. 이기종은 리범진의 아들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근친하러 왔다.

 

39. 리학규의 가결 간청

 

의관리학규가 가결을 간청하자 명년에 시행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때부터 1결마다 80냥으로 책정하므로 농민들은 매우 큰 곤란을 겪었다.

 

40. 조병식의 숭의묘 건립 간청

 

조병식이 소렬묘를 건립하여 장비도 배향할 것을 간청하자 이를 윤허하고 사람을 청국으로 파견하여 진영을 모사해 오게 하였다. 이것을 숭의묘라고 하였다

 

41. 서울에 장티푸스 유행

 

서울에 장티푸스가 유행하여 수만 명이 사망하였다.

 

42. 경축연의 연기

 

각국에 전화를 걸어 축하사절을 오지 못하게 하였다. 경축연을 명년 3월로 미루었기 때문이다.

 

43. 일본 승려의 본원사 창건

 

일본 스님이 남산에 본원사를 창건하였다.

 

44. 박정양의 사망

 

10월, 박정양이 사망하였다.

박정양은 봉급을 모아 다시 고종에게 바쳤으므로 그 관직에 오래 있었다.

 

45. 이용익 처단운동

 

11월, 리용익이 안남미를 수입하였다.

그는 내장원경으로 있으면서 고종의 사탕을 관리할 때 모든 이익을 착취하여 사람들의 원망도 불고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해 가을에 탁지부서리로 있으면서 부군의 포세를 독촉하여 백성의 처자들을 수감하고 진신들을 욕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온 조정에서는 이를 갈면서 그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용익은 마음은 불량하고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였다. 그가 하루는 고종을 대하여 과실을 지적하기를, “폐하께서 엄비를 총애하는 것은 당명황이 양귀비를 총애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고종은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치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엄비에게 신을 칭하면서 대하므로 엄비도 그를 당해 내지 못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을 빙자하여 그를 치죄하자고 하면서 침순택, 윤용선, 조병세 등은 혹 련명차자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자기 혼자 상소도 하였으며, 10부에서도 그 뒤를 이어 이용익을 대역적으로 지탄하였다.

이때 그들은 대궐문 앞에 부복하고 있다가 이용익이 나오면 그를 박살하려고 하였으므로 고종은 대궐문을 살피고 있다가 이용익으로 하여금 약 10일간 금중에 숨어 있게 한 후 교지를 내려 그를 대궐문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유언비어로 인한 무슨 화가 발생할까 싶어 남몰래 그를 상해로 보내어 안남미 10여만 석을 수입하게 하였다. 그 안남미가 인천항에 들어온 후 기호 지방민들은 그의 덕을 입었다.

이용익은 청렴하고 무슨 일에든 능력이 있었다. 그는 식사를 할 때도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헐은도포와 모자를 쓰고 다녔고 노래와 여색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고종은 그의 청백함과 검소함을 믿었다. 그리고 고종이, 언제나 자금을 요청하면 그는 1만원이라도 갖다 바치어 좌우의 수족 노릇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살을 오려먹으려고 하였으나 고종은 시종 그를 비호하였다.

 

46. 민영소 등의 입각

 

민영소를 학부대신, 금성근을 탁지부대신, 리재극을 법부대신, 금주현을 내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47. 홍릉 면례의 개정

 

홍릉의 면례를 명년 10월로 다시 정하였다. 7~8년 동안 릉지 바꾸기를 수 차례 하였고, 날짜는 몇 번이나 바꿨는지 셀 수도 없다. 공연히 내탕전만 절반을 소모하고 있었으나 고종은 끝까지 애석한 생각을 갖지 않고 매년 그 기일만 연기하여 아직까지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고종이 민후의 유해 두어 개만 보고 길지도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세 후에 자신과 합장할 것을 생각하여 극히 택일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48. 송근수의 사망

 

전좌의정송근수가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는 84세였다. 그는 과거급제에서부터 진출한 사람이었으므로 학문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그의 조카 송병선이 비록 유종으로 칭하였지만 무슨 의심나는 글이 있으면 늘 그에게 질문을 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선조인 송시렬의 서독을 간추려 <송서백선>을 <주서백선>과 같이 편집하고, 또 그의 언행을 편집하여 <송자언행록>이라고 하였다. 이 책들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49. 민형식 등을 관찰사에 임명

 

12월, 민형식을 북평관찰사, 정인승을 충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50. 평안남북도의 결세 감면

 

12월, 평안남북도의 결세를 3분의 1로 감면하고, 또 추호세도 감면하였다. 이것은 서경의 요역이 과중하여 백성들이 노고를 겪기 때문이었다.

 

51. 사육신의 후사문제

 

단종조의 충신 리개, 성삼문, 류성원 등의 후사를 입양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것은 방손들의 상소에 의한 것이다.

 

52. 리근명을 의정에 임명

 

리근명을 의정, 리도재를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이근명은 궁금을 엄숙하게 하고 수령을 잘 선택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말은 매우 간절하고 강직하였다.

 

53. 개신교와 천주교의 대립

 

남해민들이 개신교에 입적하였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서로 알력이 생겨 소요를 일으켰다. 이에 안핵사리응익에게 명하여 프랑스인 수을랑(솔랑제 : Seissier Soulange)을 대동하고 가서 그들을 심판하게 하였다.

 

54. 세금과 국채 통계

 

이해 토지결수는 총 980,538결이며, 조세 및 잡세의 총계는 10,766,115원, 국채는 988,250원이었다.

 

55. 서울의 지진

 

서울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56. 리도재, 신기선 등을 강제로 단발

 

이달에 고종은 리도재와 신기선 등을 불러 단발을 명하였다.

이때 시종에게 칼을 들고 깎게 하면서 거절한 사람은 목을 잘라 오라고 하였다. 이도재 등은 눈물을 흘리며 단발하였다.

이로부터 민영준, 민영소, 침상훈, 리윤용 등이 차례로 단발하였다.

그리고 공사의 연회석에 모인 사람들은 단발한 사람들이 자리에 가득 모여 있어, 사람들은 그들을 「원두객」이라고 하였다.

 

광무 7년 계묘(1903년) ①

 

1. 양로연 행사

 

계묘년(1903) 광무 7년(청국 광서 29년. 일본 명치 36년) 정월, 양로연회를 베풀었다.

 

2. 일본의 제일은행권 발행

 

일본인들이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백동화를 주조한 이후 도주률을 엄하게 하여 교형을 받은 사람이 계속되었으나 그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또 자국에서 남몰래 주조한 백동화를 가져와 사용하므로 이때부터 물가가 앙등하기 시작하여 쌀 1석이 1만5천원이나 호가하였다. 주전이 많으면 많을수록 금전가치가 더 천하여 백동화 1원(원)이 엽전 25전과 상당하여 엽전 6, 7전으로 백동화 100원을 바꾸었으므로 그 가치가 일정하지 않아 국가의 농업과 기타 말직 등에 있어서 모두 병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일본에서는 또 지폐를 만들어 이것을 제일은행권이라고 하였으며, 또 청나라 상인 동순태란 사람은 동순태상표를 발행하여 언제나 한조각 지표를 가지고 모든 화폐를 장악하고 있으므로 화폐권이 외국인에게 돌아가 국가의 경제는 더 물어볼 것 없이 되었다.

대체로 각국의 지폐법은 공과 사를 막론하고 먼저 본위금을 국고에 비치하여 만일 그 본위금이 1천원이라면 지폐도 1천원을 발행하고 1만원이라면 또 1만원을 발행하기 때문에 그 국가에는 남발하는 폐단이 없고, 또 지폐가 파손되면 다시 국고로 반납할 경우는 국고에서 본금을 보상해 주기 때문에 백성들만 공연히 손해볼 우려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청국과 전쟁을 치른 이후 국가의 재정이 없었고 또 우리 나라의 철도를 부설하면서 자금을 다 지급할 수 없기 때문에 지폐를 날조하여 우리 나라의 철도 부설에만 사용한 것이며, 실제로는 본위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런 행위를 저지하였으나 일본인들은 위협을 하여 점차 통용되었다.

 

3. 흑두르마기의 장려

 

서울에서는 천담색의 두루마기를 금지하고 흑색류의 옷을 입도록 하였다.

이때 순병들은 길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상인들은 흑두루마기(흑주의)를 입지 않으면 감히 왕래를 하지 못하여, 행인들이 소란을 일으켰다.

이에 리유인이 말하기를,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흑의를 입으라고 하십니까?”라고 하므로 고종은 그렇게 생각하고 금지령을 철회하였다.

 

4. 장호원 감모궁 건립

 

충주 장호원에 감모궁을 건립하였다. 명성황후가 행차하였기 때문이다.

 

5. 각지 진위대 소환

 

강화, 원주, 대구, 진주, 수원, 전주 등지에서 진위대 1,500명을 소환하였다. 장차 려단을 편성하여 경축연을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진위대의 병사들이 오면서 도로가 소란하였으나 그 후 경축연의 예식 일자가 변경되자 다시 되돌아가라는 명을 내렸다.

 

6. 대한회전 및 문헌비고속편 편찬

 

<대한회전>과 <문헌비고속편>을 찬하라는 명을 내려 참서관금택영, 윤희구 등이 편찬하였다.

 

7. 고종 경축연 보조금 징수

 

다시 송축연 보조금을 징수하였다. 지난해 조병식 등이 고종의 송덕기념비를 건립할 때 그 비용을 경관 및 외임들에게 징수하여 관찰사는 100원, 군수는 4등급으로 나누어 80원에서 40원까지 받고 또 각군의 진신, 장보들도 장부에 기록하였으나 아무도 응한 사람이 없으므로 군수가 부호를 택하여 강제로 수십, 수백냥을 부과하였다.

이토록 한 번만으로 부족해서 이때 또 징수하므로 군수가 종종 착복하기도 하였다.

 

8. 아프리카의 풍토병

 

아프리카주에 두 종류의 기질이 있다.

그 하나는 수면에서 깨어나지 않고 사망하는 것이며, 하나는 발뒤꿈치의 혈관이 팽창하여 거치형으로 된 부분이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파, 그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는 것이다.

 

9. 황태자 탄생기념

 

2월, 황태자의 탄진경하를 위하여 서울의 조관 중 구갑술생에게는 1자계를 올려 주었다. 그들은 모두 206명이었다.

그리고 서민들 중 후갑술생은 각기 견포 1필씩을 하사하였다.

 

10. 리윤재을 함북관찰사에 임명

 

영흥군에 사는 리윤재를 함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리용익의 조카이다.

 

11. 오악, 오진, 사해, 사독의 위호

 

악, 진, 해, 독의 위호를 정하여 동악은 회양의 금강산, 남악은 남원의 지이산, 중악은 서울의 삼각산, 서악은 영변의 묘향산, 북악은 무산의 백두산이며 동진은 강릉의 오대산, 남진은 보은의 속리산, 중진은 서울의 백악산, 서진은 문화의 구월산, 북진은 경성의 장백산이며 동해는 양양, 남해는 라주, 서해는 풍천, 북해는 경성이며 동독은 상주의 낙동강, 남독은 서울의 한강, 서독은 평양의 패강, 북독은 영흥의 룡흥강이다.

 

12. 리원일, 정현영 등의 과거 복원 간청

 

리원일, 정현영, 리학재 등이 계속 과거부원을 간청하자 고종은 다시 과거를 매매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진정 및 간청을 못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외국인들이 강력히 견지하여 이행하지 못하였다.

 

13. 민응식의 사망

 

민응식이 사망하였다.

 

14. 계룡산의 기서

 

계룡산에 꽂힌 깃발에는 푸른 글씨로 「광무일월금계창 신녀후기리화영 친왕운수백지자선」이라고 씌어 있고, 백성들이 먹글씨로 쓴 것은 「토상삼목화백자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마이산 갈처사 망기이래」라고 씌어 있었다.

 

15. 흰 꿩을 헌상

 

봉산군에서 백치를 올렸다.

 

16. 일식과 천둥

 

3월 초1일에 일식이 있었고, 3일 저녁에는 천둥이 울렸다.

 

17. 수첩 매매

 

성상의 수를 추산하여 사서인 70세 이상인 사람에게 통정, 가선 등의 자계를 주었다. 이에 경향 각지의 무뢰배들은 옛날 호적을 다 열람하여 70세 이상은 생사를 막론하고 성명을 적어 올렸으므로 1개 군에 줄 수첩이 수백 명에 해당되었다.

이때 그들은 군수에게 부탁하여 수첩 1개당 110냥을 징수한 후 그 부담금을 분할하였는데, 시골 노인들은 소란스러워 편안한 나날을 보내지 못하였다.

 

18. 법무협판이기동 수감

 

법무협판리기동이 리용익을 살해하기 위하여 륙혈포를 숨겨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으나 그 일이 발각되어 수감되었다.

 

19. 영친왕의 마마 치유

 

영친왕은의 마마(두진)가 잘 나아가므로 대사령을 내리고, 종묘에 고하여 백관들의 축하를 받았다.

 

20. 경축연을 다시 연기

 

경축연의 례식을 다시 가을로 정하여 각국의 축하사절을 되돌려 보내었다.

리은이 마마병을 앓고 있어 대궐 안에는 꺼리는 일이 너무 많아 100일 동안 재계를 하고 있었으므로 왕실의 종친들도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고, 만일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면 불결한 일이 있을까 싶어 경축연을 가을로 정한 것이다.

이때 서양에서 오는 사절들에게 말로 잘 미봉하여 사죄를 하고 아울러 그 배삯까지 배상해 주었으나 내부의 관리들은 감히 무슨 말을 아뢰지도 못하고 있었고, 수령들이 불참한 곳도 100여 군이나 되었다.

이때 마마신에게 굿을 하면서 금전과 비단을 여섯 수레나 반출한 것이 세 번이나 되었다.

 

21. 의관이해창 등을 군수에 임명

 

의관리해창을 보성군수, 리경옥을 김제군수, 박민준을 영일군수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어의를 대동하고 왕래하였으므로 마마병을 치료한 공로로 상을 준 것이다. 이때 고종은 리은을 매우 사랑하여 잠시도 슬하를 떠나지 않게 하였는데, 언제나 주본이 올라오면 이은은 그 주본을 잡고 아는 사람의 성명을 가리키며 “아무개는 모군이 좋겠다”고 하면 고종은 웃으면서 권점을 찍곤 하였다.

 

22. 경강선세

 

경축연의 경비가 궁색하여 다시 경강의 상선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대선은 30냥, 중선은 22냥, 소선은 15냥이었다.

 

23. 신묘, 갑오년의 사마방 간행

 

궁내부에서 신묘(1891), 갑오(1894) 양년의 사마방 1질 3책을 간행하여 빈부간의 매긴 가격은 200냥에서 100냥이었으므로 생원, 진사 및 가난한 선비들은 책을 접수해 놓고 통곡한 사람이 있었다.

 

24. 서울의 유언비어

 

서울에는 유언비어가 유행하여 명헌태후가 승하하였다고 하므로 시민들 중에는 남모르게 포립을 만든 사람이 있어 경무청에서 그들을 적발하여 죄를 물었다.

 

25. 베를린의 대설 피해

 

독일의 서울, 베를린에서 열두 시간 동안 눈이 내려 기차가 불통되고 포도나무가 모두 죽었다.

 

26. 윤용선을 의정에 임명

 

4월, 윤용선을 의정, 리봉의를 군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27. 조종필 등을 관찰사에 임명

 

조종필을 ٩해관찰사, 침상훈을 충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28. 이항면 등이 고종황제송덕비 건립을 간청

 

리항면 등이 고황제의 송덕비를 건립하자고 간청하고 그 뒤를 이어 리보영 등도 간청하였다.

 

29. 학부의 박사 선발

 

학부에서 경의를 시험하여 박사를 선발하였다. 이에 앞서 신기선, 서상봉 등이 학정을 관장하고 있으므로 경의 문제를 반포하여 유사들에게 지어 바치도록 하였으나 그 일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유명무실하였고, 그중에서 선발된 사람들도 모두 타도 출신으로서 갑오년(1894) 이전이 과거장처럼 협잡이 많았다. 이로부터 유지자들은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여 응시하지 않았다.

 

30. <속삼강행실록>의 간행

 

박창화 등이 국내에 통고하여 <속삼강행실록>을 편찬하기 위하여 먼저 호남의 전주에다 서국을 개설하여 일도의 삼강사적을 모아 간행하였으나 그 금전의 액수에 따라 쓰고 지우고 하였으므로 유식한 사람들은 그것을 비난하였다.

 

31. 일본 상인 경축기념잔 판매

 

일본 상인이 서울에서 경축기념잔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조정이 날마다 경축회를 꾸미고 있으므로 백자 기념잔 10만개를 제조하여 그 잔에다가 금으로 새기기를, 「수제남산 복일한수」라고 하였다.

황제를 송축하는 글귀라고 하지만 외국인들은 이와 같이 우롱한 것이다.

 

32. 러시아인의 용암포 삼림 벌채

 

러시아인이 용천군의 용암포에 정박하고 있으면서 삼림을 벌채하고, 또 방잔을 신축하고 있으므로 우리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 문책하였으나, 러시아인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33. 일본군함 양무호 구입

 

일본 군함 양무호를 구입하여 군부가 관리하였다. 이것은 삼정회사에 주문하였으며 그 구입가는 20만원으로 국채로 공제하였다.

그 군함이 도착하자 어떤 사람은 시급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누차 일본인의 질책을 받아 부득이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군함은 고물인 데다가 누수까지 되어 빨리 항해할 수 없었으므로 일본인을 고용하여 수선작업을 벌이는 바람에 전후에 걸쳐 거액의 비용이 소모되었다.

 

34. 윤용선, 조병세에게 궤장 하사

 

윤용선과 조병세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그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도록 명하였다.

이때 조병세는 본래 가난하였으므로 집을 빌려 객석을 마련하느라 비용이 6만원이나 들었다.

 

35. 창성군의 민란

 

창성의 진사 강모가 역전역에 딸린 공수전, 아록전, 장전, 부장전, 급주전, 마전 등을 말함. 편자주 과 둔전에 파견된 관원 및 악당들과 한 무리가 되어 백성들을 학대하므로 백성들은 큰 소란을 일으켜, 강진사를 결박한 후 그의 코와 귀를 자르고 눈의 신경줄도 잘라 사방으로 끌고 다녔다.

 

36. 보리와 밀의 흉작

 

보리가 매우 흉작이었다. 이해 봄에 보리와 밀이 매우 무성하게 자랐지만 낟알이 팰 무렵에 모두 누렇게 오그라들어 퉁기면 먼지만 일어나 그 악취를 맡을 수도 없이 고약한 냄새가 났다. 이런 병이 10일 사이에 13도에 전파되어 전국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보리 한 섬에 4천원이나 하였다. 계속 흉년이 든 나머지 다시 보리까지 흉년이 들므로 모든 사람들은 경황이 없어 큰 병난을 치른 것처럼 술렁거렸다. 100세가 된 노인들도 모두 처음 보는 일이라고 하였으며, 국사를 참고해 보아도 이런 일은 일찍 없었다.

 

37. 경기, 영남 지방의 우박피해

 

경기 지방에 많은 우박이 내렸다. 그리고 영남은 밀양, 청도에서부터 고영, 성주 등 수십 군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박이 내렸다. 그 우박이 떨어진 곳은 밭두렁에 열린 보리도 모두 빈 껍데기만 남아 있었고 삼(마)도 모두 망가졌다. 못자리도 많은 피해를 당하여 모판을 다시 만들었다.

 

38. 서울의 낙뢰

 

서울에서는 큰 뢰진으로 인하여 전신주 3개가 부러지고, 청국인 1명이 사망하였다

 

39. 대동강과 용흥강의 이변

 

대동강이 3일 동안 붉고, 룡흥강도 연일 붉었다.

 

40. 청국 호부의 화재

 

청나라 북경에 있는 호부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41. 미국의 수해

 

미국에서 수해가 발생하여 떠내려간 집이 2만5천여 호나 되었다.

 

42. 인도의 장티푸스 유행

 

인도에서 장티푸스가 크게 유행하여 1월부터 5월까지 총 14만1,989명이 사망하였다.

 

43. 홍은군이희빈 등의 귀비 엄씨 황후책봉 요청

 

5월, 홍은군리희빈 등이 13도의 진신과 장보를 인솔하고 귀비 엄씨를 황후로 책봉하자는 연명소를 올리고, 또 엄씨의 송덕비를 건립하자고 간청하였다.

 

44. 두문동 제신을 제사

 

고려 주문동 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45. 강홍대의 포수 모집 상소

 

강홍대가 상소하여, 서북산 포수들을 모집하여 변방을 방어하고 둔전을 개설하여 군량을 충당하자고 간청하였다.

 

46. 서울 시민의 공제회 설립

 

서울 시민들이 공제회를 설립하였다. 지난번 동순태상표와 은행권이 발행된 이후 전국이 모두 그것을 병폐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감히 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윤리병, 침상희, 고석주 등이 많은 군중을 모아 놓고 각 항구에 사용된 상표 및 은행권을 엄금하라고 하였다. 이에 외국인의 질책이 사방에서 일어나 그 주모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고 혹은 배상금을 요청하므로 공제회는 결국 힘을 잃어버렸다.

 

47. 미국인의 전차 운행기한의 위약

 

미국인이 서병달을 감금하였다. 처음 서울에서 전차가 운행될 때(이 일은 기해년 기사에 적어놓았음) 미국인이 주관하면서 3년만 운행하고 정부로 반환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 약속기한이 지나도 반환할 의사가 없으므로 전주사서병달이 방을 내걸고 대중들을 충동하여 승차를 금하였다. 이에 군중들이 전차를 향하여 돌을 던지자 미국인들은 크게 화를 내며 정부를 위협하여 서병달을 감금하였으나, 그후 얼마 안되어 사람들은 옛날처럼 승차하였다.

 

48. 이범윤의 <북여요람> 편찬

 

북간도 시찰관리범윤이 <북여요람>을 지어 올렸다.

북간도는 토문강 아래, 두만강 서쪽 지방의 총칭으로서 「도」라고 한 것은 와전된 것이다. 이곳은 옛날에 한청 양국이 금지하여 그 지역을 비워 둔 지 수백 년이 지났으나 요사이 서북민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려 이삿짐을 챙겨들고 남모르게 월경해 들어갔다. 그 호수는 10여만 호나 되었지만 소속된 국가가 없으므로, 이에 청국과 러시아는 서로 넘보고 있었다.

이때 서북민들은 두 나라에 식식되어 그 통한은 뼈를 깎는 듯하였으므로 누차 우리 정부에 호소하여 본국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우리 정부는 이범윤을 파견하여 그곳을 시찰하도록 하였다. 이범윤은 험한 길을 헤치고 가서 그들을 불러 위로하였다.

그러나 청국인들은 이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공사허태신이 우리 정부에 재촉하여 이범윤을 소환하도록 하였으나 그 주민들은 그가 떠나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이범윤은 그곳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양국 지도에 기재된 부분을 채집하여 이를 종류별로 나누고, 그 책을 완성한 후 <북여요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우리 정부로 보내 왔다.

 

49. 군수 매매와 영호남지방 수령을 욕심내는 이유

 

군수의 임기기한을 16개월로 개정하였다. 이때 수령을 제수하면서 금액의 다과에 따랐다.

고종은 관직을 자주 팔면 금전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1년도 안되어 관직을 교체하였다. 그리고 그 관직을 구입할 사람은 이미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간신히 임지에 도착하였다 하더라도 즉시 관직을 빼앗겼고 조금만 늦어져도 교체되었다. 그러나 그 주문한 사람의 수효가 너무 많아 결국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또 그 교체한 사람을 살피어 그가 부유하게 지내면 다른 군으로 발령하여 다시 그 대가를 징수하였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1년에 5개 군을 바꾸는 사람이 있었고, 1개 군이 1년에 5명의 수령을 맞이한 곳이 있었다.

그러므로 부유하게 지낸 사람이 군수를 희망한 경우는 수년만 지나면 가산이 탕진되어 관직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차 드물었다. 고종은 이런 점을 깨닫고 그 임기를 16개월로 정하였다.

이때 기호 이북 지방에서는 백동전을 사용하고 량남지방에서는 엽전을 사용하였는데, 백동전 1냥에 엽전 70문을 겨우 당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량남지방에서 관직을 갖고자 할 사람은 서울로 상납할 백동전을 시골에서 엽전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그 바칠 금액이 10만원일 경우 실제로는 7만원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호세와 조세에 있어서도 백성들에게는 엽전을 바치게 하고, 서울로는 백동전을 올려 보내서, 그 차익이 남는 것이 원래 관직을 살 때 들였던 돈의 10배나 되었다. 그래서 량남 각군은 특별히 기름진 자리였다. 이때 밀양 사람 박병익은 35만냥을 바쳐 경주군수로 임명되었다.

 

50. 이용익의 폭사 모면

 

리용익이 병이 들어 일본인의 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중 갑자기 폭약이 온돌방에서 폭발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는 바람을 쐬러 나갔으므로 그 화를 면하였다.

 

51. 청국의 인구

 

청국에서 새로 인구조사를 하였다. 18성 및 동삼성, 몽고, 서장, 신강 등을 합하여 4억2,644만7,325명이었다.

 

52. 시어머니 살해 사건

 

경북 영천군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살해하였다.

 

53. 귀비 엄씨 황후책봉 간청

 

윤달. 풍선군조동만 등이 13도의 신사 1천여 명을 인솔하고 연명소를 올려 귀비 엄씨를 황후로 책봉하자고 간청하였다.

 

54. 전주사박기종의 기자묘 건립 간청

 

전주사박기종이 서울과 각 관찰부에 기자묘를 건립하자고 간청하였다.

 

55. 차함 정지

 

경북 의관과 주사의 차함실제로 근무하는 것이 아니고 임시로 그 직명을 비는 것 편자주 행위를 잠시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56. 이용익의 내장원 쌀 시판 요청

 

리용익이 내장원미 3만석을 시판하자고 요청하였다. 그 가격은 1승에 9냥으로 백성들이 모두 살 수 있도록 하였다.

그것은 서울의 미곡이 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1천석은 경상도에서 소비하도록 하였다.

 

57. 윤웅열을 군부대신에 임명

 

윤웅렬을 군부대신, 리윤용을 경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58. 영국과 일본의 의주 시장개설 요청

 

영국인과 일본인이 의주에 시장개설을 요청하자 러시아인이 비난하였다.

 

59. 미국인의 의친왕 구타

 

주미공사조민희가 전화로 보고하기를, 의친왕리강이 미국인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하였다.

 

60. 이윤용 등을 관찰사에 임명

 

6월, 리윤용을 경북관찰사, 민형식을 경남관찰사, 리근교를 전남관찰사, 주석면을 경기관찰사, 리범윤을 북간도관리관으로 임명하였다.

 

61. 주러공사이범진의 사임 요청

 

주러공사리범진이 전화로 보고하기를, 아병으로 체직을 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이범진이 거짓으로 아프다고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으나, 이와 동시에 침상훈의 아들 침장섭도 학생으로 러시아에 가서 유학하고 있다가 아병으로 인하여 귀국하였다.

 

62. 프랑스 공사플랑시와 제주도 천주교인들의 횡포

 

대정군수채구석을 서울의 감옥에 수감하였다. 그리고 제주도에는 신축년(1901)에 천주교가 들어온 이후 신도가 날로 늘어나 백성들이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때 프랑스 공사플랑시가 내한하자 교인들은 그에게 무고하여 채구석을 체포한 후 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또 3년 동안 수감해 놓았다가 이제 석방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우리 정부를 협박하여 제주의 교인들에게 묘지를 선정해 주도록 요구하므로 그들은 서로 비옥한 땅을 독점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숙원을 갚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리응익은 해서지방의 교안을 탄핵, 추궁하였는데, 교인들은 서양 공관에 들어가서 자신들의 체포에 저항했다. 이에 플랑시는 또 우리 법부를 협박하여 서울에서 구속된 자를 모두 석방해 주도록 옹호하였다.

이때부터 간민들은 떼를 지어 준동했지만, 그들의 악행을 징계할 길이 없었으므로 양민들은 고개를 떨구며 기운을 잃고 있었다.

 

63. 상민 부대의 편성

 

원수부에서 상민들을 병사로 삼아 8개 대대로 편성하였다. 1개 대대를 각각 1천명으로 하고, 동별궁을 그들의 주둔지로 하였다.

 

광무 7년 계묘(1903년) ②

 

1. 영남 집포관김상한의 무고

 

령남 집포관금상한이 정해일을 역모죄로 무고하여 반좌률무고 또는 위증으로 타인을 죄에 빠지게 한 자에게 그 빠진 자와 동일한 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법 편자주 에 걸렸다.

정해일은 본래 필상으로, 그가 걸식을 하고 다닐 때, 마침 해인사의 정씨 옥사가 발생하여 범인을 오랫동안 체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김상한은 우둔하게 생긴 정해일을 유인하여 그로 하여금 정모로 칭하면 큰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하므로, 정해일은 그의 청을 승낙하자 김상한은 정모를 체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머리에 오악이 그려져 있고, 이마에는 천자라는 글자가 있고, 가슴에는 28숙이 있으며, 등에는 삼태성이 그려져 있다고 하였다.

그 후 그를 서울로 압송한 다음 신문하기 전에 모든 형구를 다 갖추어 놓았다. 정해일은 이런 광경을 보고 기겁을 하면서 “김상한아! 나의 목숨을 살려 달라, 부귀는 누리지 않아도 되니 지금 이 형구를 갖다 놓은 것은 무슨 이유냐?”라고 하여 간수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를 신문하였으나 아무 근거도 없어 석방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김상한을 참형으로 처리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여론이 일어날까 싶어 그만두었다. 이때 영남과 호남 지방 사람들은 이 옥사에 걸려들어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2. 경부철도 공사

 

일본인이 경부선철도를 부설할 때 상중하 세 곳에서 시작하였다.

하는 부산, 중은 천안, 상은 서울이다. 서울은 남대문 도동에서부터 기공하였는데, 그때 가옥을 철수하고 분묘를 파내면서 길을 곧게만 시공해 나갔다. 매 분묘마다 3원을 이장비로 보상해 주었으나 한번 굴총을 당한 사람들은 다시 당할까 싶어 해골를 종종 화장하였다.

그리고 철도 옆에는 매 30리마다 한 정차장을 두었다. 이때 인부들은 매우 거칠어, 밤이면 도둑이 되고 낮이면 상인들을 강탈하였다. 조금만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면 즉시 살해하였으므로 그들이 지나간 곳은 마치 병란을 당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우리 국민들을 고용하여 후한 월급을 주었으나, 게으르고 무력한 사람은 구타하여 살해한 후 구덩이에다가 묻어 버리기도 하였다. 실로 애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 중에도 응모하는 사람이 있었다.

 

3. 서울의 귀신

 

서울에 이상한 귀신이 출현하였다. 그것은 어떤 괴기가 떨어진 것과 같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발작하였다. 그것은 사람과 부딪치면 머리를 베어 가기도 하고 혹은 상투를 베어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탕건을 모두 베어 가기도 하였다.

 

4. 이근명을 의정에 임명

 

7월, 리근명을 의정으로 임명하였다.

 

5. 경기도에 신결명 반포

 

경기도에 신결명을 반포하여 다시 수원과 과천의 전답을 측량하고, 그 비용은 전감리리종대에게 징수하였다. 그것은 백성들의 호소가 너무나도 끈질겼기 때문이다.

 

6. 시랑이 피해

 

서울에서는 현상금을 걸고 시랑이(랑)를 잡게 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옛날부터 시랑이가 없었고 고려사의 한두 곳에서만 그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5~6년 전부터 전국 어느 곳에나 출몰하면서 어린아이들이 시랑이에게 물린 사례가 무수했고, 특히 돼지와 양을 많이 잡아먹었다. 이때 시랑이 한 마리에 50원씩의 현상금을 주었다.

 

7. 이승화의 소륜선 발명

 

해미 사람 리승화가 작은 륜선을 제조하여 뚝섬(독도) 앞에서 진수식을 가졌다.

 

8. 미국인 헐버트의 <대동기년> 저술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이 자기 나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우리 나라로 와서

18년 동안 머물며 한문을 공부한 후 우리 조정의 공사 서적들을 모두 구입하고, 태조로부터

고종 을미년(1895)까지 편년사 5책을 편집하여 이를 <대동기년>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상해의 미화관에서 간행하여 우리 나라에서만 판매하므로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그 책을 구입하였으나 그 문장은 매우 저속하였다.

 

9. 고종의 곽종석에 대한 대우

 

8월, 곽종석이 서울로 불려올라왔다. 곽종석에게 비서승과 의정부 참찬을 계속해서 제수하였으나

그는 병을 핑계 삼아 향리로 돌아갔다. 그는 은거하고 있으면서 교육에 치중하여 누차 불러도 응하지 않았으므로 이때의 여망으로는 그가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추대하고 혹은 그가 무슨 비술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남 좌도에서 고종에게 아첨한 사람은 강석호를 통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고종은 본래 방술을 믿었으므로 결국 그를 이인으로 인식하여 남모르게 불렀다. 이때 지방의 관리들에게 독촉하고 견책이 아울러 내려오므로 그는 부득이 서울 성밖에 와서 대죄했다. 고종은 잇달아 사관을 보내어 야복으로 입대하도록 하고 그에게 묻기를, “제갈량은 어떤 사람이길래 풍우와 귀신을 마음대로 부렸습니까? 이 말을 믿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그는, “신이 들은 말에 의하면 제갈량은 몸을 다스릴 때 담박 녕정하고, 임금을 섬길 때는 몸이 초췌하도록 성의를 다하고, 나라를 다스릴 때는 상벌을 분명하게 하였으며, 제나라 동쪽 야인들이 전하는 풍우나 귀신 등의 불경한 말들은 모두 소설가들이 기담으로 전한 말이거나 괴담들이므로 정사에서는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 것이니 지금 물으실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므로 고종은 아무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점차 기이한 말을 들을 수 있었으므로 즉시 그에게 비서승을 제수하였다가 다시 참찬으로 승진시키고 또 그의 사위인 로정용을 참봉으로 발탁하였으며, 그가 추천한 숙유 허유한주리진상의 문인. 호는 후산. 편자주 , 리승희한주이진상의 문인. 호는 대계. 편자주 , 정재규로사기정진의 문인. 호는 애산, 로백신 대곡 금석구, 일신 정의림과 함께 로문삼자로 칭하였으며, 정애산의 문인 률계정기와 정률계의 문인 효당금문옥이 노사의 학통을 전수하였음. 편자주 등을 관직에 임명하여 한 구성을 하사하였다. 이렇듯 전후에 걸쳐 그에게 지극한 예우를 한 것이다.

이때 곽종석은 고종에게 성학에 힘쓰고 재물을 절약할 것과, 행문을 닫고 송병선을 기용하여 산림처사들을 부르자고 간청하였으나 그 후 얼마 안되어 류장을 올려 병을 칭하므로 고종은 그의 귀향을 윤허하면서 병이 나으면 다시 오라고 하였는데, 그는 한번 귀향한 후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고종이 처음에 그를 이인으로 생각하여 매우 공경하였으나 그는 유현으로 자처하면서 정심, 성의의 설을 말하는 데 불과하였다. 이것은 동문서답인 것이므로 다시 무슨 말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지방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억지로 유현의 례로 그를 대우하였고, 곽종석도 주위의 아첨배에게 구애되어 물러나고 말았다. 이것은 군신의 사이에 실정이 아니었으며 또 오래 전부터 기대하던 여망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곽종석은 초야에서 기용되어 한 달 만에 공경의 위치에 오르고 또 경연을 드나들면서 유자로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은 것이다. 이런 경우는 영남의 선배 중에서 찾아봐도 장현광1554~1637. 인조 때의 문신. 자는 덕회, 호는 려헌. 편자주 과 리현일1627~1704. 숙종 때의 문신, 자는 익승, 호는 갈암. 학행으로 천거되어 지평이 되고 리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거두가 됨. 편자주 보다 훨씬 우월한 예우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10. 용암포조계 조사

 

삼림감리조성협을 파견하여 룡암포조계를 조사하였다.

이때 용암포에 있던 러시아인들은 음행과 착취를 자행하여 변방에 대한 우려가 날로 더하였다.

군수리경직이 그들을 저지하지 못하고 있자 이에 조성협을 파견하여 그곳을 조사한 후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그들의 폭행은 여전하였다.

 

11. 충주 등지에 우박이 크게 내림

 

충주, 진천 등 여러 군에 많은 우박이 내렸다.

 

12. 심상훈을 탁지대신에 임명

 

9월, 심상훈을 탁지부 대신, 구영조를 충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리종건은 평북관찰사로 임명하였으나 곧 그를 면직하고 백성기를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13. 김주현과 70여 명 군수의 면직

 

9월, 내부대신금주현을 면직하였다. 김주현이 주본을 올려 군수 70여 명을 새로 제수하였으나

고종은 중간에 변경하여 그들을 모두 면직시키고, 아울러 김주현의 관직도 교체하였다.

이때 군수 한자리에 5~6만냥 미만의 자리는 없었지만 그들은 졸지에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므로 경향 각지에서 가산을 탕진한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시전의 보증인들도 감옥에 수감된 자들이 즐비하였다.

 

14. 영친왕의 마마병 쾌유

 

영친왕리은의 마마병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백관이 진하한 후 대사령을 내렸다.

 

15. 정한조를 평남관찰사에 임명

 

정한조를 평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6. 감모궁 건립

 

서울 화개동에 감모궁을 건립하였다.

그것은 임오군난 때 명성황후가 이 화개동에 있는 리용식의 집으로 피신하여 방 두 칸을

사용하였으므로 지금까지 봉쇄하고 있다가, 민충식이 모금하여 감모궁을 건립하였다.

 

17. 전보국서상우의 사망

 

전보국서상우가 사망하였다.

서상우가 병이 악화되었을 때 엄귀비를 황후로 책봉하자는 상소에 대하여 서명을 받으러 온 사람이 있었다. 이때 서상우는 벌떡 일어나서 “만일 반대하는 상소가 있으면 내가 서명을 하지만 황후로 책봉하자는 상소에 대해서는 내가 죽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18. 신응조 등에게 시호를 하사

 

신응조는 문경, 송근수는 문헌, 리경응은 효정, 민응식은 충문이란 시호를 하사하였다.

 

19. 고종 및 태자의 진용 풍경궁 봉안과 민영철의 탐학

 

10월, 의정리근명이 고종과 태자의 진용을 서경 풍경궁으로 봉안하였다. 이때 민영철은 궁역을 빙자하고 일도를 박할하여 백성들의 재산 3분의 1을 적몰해다가 관아로 바치므로 류민들은 서로 줄을 이어 천리의 길이 소란하였다. 그러나 자금은 토목비로 다 사용되지 않았다.

이 궁이 준공된 후 풍경이란 이름을 붙였다. 민영철은 백성들이 격변을 일으킬까 싶어 어진을 이봉한다고 하면 혹 민심이 진정될 것으로 생각하고, 이 사실을 고종에게 말하여 이 명을 내린 것이다.

 

20. 술객 차성충

 

거창 사람 차성충은 산중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그가 특이한 술이 있다고 하므로 고종은 관찰사민형식에게 명하여 그를 찾아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민형식은 산군마다 다니며 그를 찾다가 오랜 시일이 지난 뒤 그를 발견하였다. 그의 머리는 더벅머리였고 손발은 부르터서 흡사 귀신과 같았다. 고종이 기이한 술법을 좋아하므로 소수의 군소들은 그런 점을 이용하여 고종을 기만하는 것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다.

 

21. 조희일의 귀인 엄씨 황후책봉 간청

 

조희일이 상소하여 귀인 엄씨를 황후로 책봉하자고 간청한 후 그의 아들 조성재가 평창 군수로 제수되었다. 조희일은 풍도가 있어 진신들 사이에 명성을 떨쳤으나 이 상소가 나간 뒤로 그의 친구들은 그를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황후로 책봉하자는 상소는 날마다 가득 쌓여 있었으나 고종은 태자가 와병중에 있기 때문에 매우 난색을 보였고, 또 황후의 책봉을 말한 사람들은 아부를 하는 것으로 추측하여 그 상소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때 엄비가 비록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그는 재주가 기민하고 권모도 있어, 자주 황후로 책봉하자는 상소가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황후가 되는 날은 내가 죽는 날이다”라고 하면서 고종에게 윤허하지 말라고 권하였고, 군소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더 이상 간청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비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태자는 입궁할 때마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묻기를, “네가 황후가 되고 싶으냐?”라고 하면 엄비는 공순한 말씨로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22. 고영근의 우범선 살해

 

고영근이 일본에서 우범선을 자살하였다.

을미역변 이후 우범선은 리두황 등과 함께 일본으로 도주한 지 수년이 지났다. 이때 고영근도 독립협회에서 죄를 지어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그들은 서로 만나서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고영근은 홍종우의 경우를 생각하며 그가 만일 우범선을 죽이고 환국하면 그 공으로 속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그를 추종한 로원명과 함께 기습적으로 우범선을 살해했다. 일본인들은 우범선이 이미 일본 국민이었으므로 한국인에게 살해된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보고, 그에 대한 법률을 논한 끝에 고영근을 교수형에 처형하기로 하고 그를 광도에다가 수감했다.

이 사건이 보고되자 우리 조정에서는 그를 면죄하여 소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침 러일전쟁이 시작되어, 경황없이 한 해를 내다가 그 일은 결국 불문에 그치고 말았다.

 

23. 목포 사람들이 일본인과 싸움

 

목포 항민들이 일본인과 큰 싸움을 벌였다.

 

24. 김병훈 등의 문묘 위호 개정 간청

 

금병훈 등이 상소하여 문묘의 오성위호를 개정하자고 간청하였다. 명나라 가정 연간의 제도와 같이 하자는 것이다.

 

25. 명헌태후 홍씨의 사망

 

11월 15일, 명헌태후 홍씨가 승하하였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그의 빈전은 효혜전이라고 하였다.

 

26. 고종의 명헌태후 박대

 

고종은 명성황후 때부터 명헌태후를 매우 박하게 대하여 궁중에서 기한을 면치 못하고, 사령들도 없었다. 신정황후는 늘 명헌태후를 가련하게 생각하여 사재로 그를 도왔으나 신정황후가 승하한 후에는 그가 더욱 외롭고 쓸쓸하였다. 이때 그는 혹 돈이 쓸 곳이 있으면 자기의 조카 순형에게 자금조달을 요청하였으므로 순형도 궁색하게 되었다.

고종은 외부의 여론이 두려워 누차 순형을 외직으로 제수하였는데, 이때 순형도 진봉을 핑계로 탐욕을 부린다는 말이 있었다.

 

26. 러일전쟁

 

12월 27일, 일본인이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을 격파하였다.

이에 앞서 갑오년(1894)에 일본이 요동을 점거하려고 하자 러시아인은 독일, 프랑스와 연락하여 일본은 요동을 청국으로 양보하여 대만과 교환하라고 위협하였다. 그것은 밖으로는 평화라는 미명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그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자기들이 점유하여 동양을 엿보려고 한 것이다.

그 후 연합군이 승리를 하자 러시아는 동삼성으로 들어가 여순을 강탈한 후 수륙의 요충지를 차지하여 요동 전지역을 점유하려 하자 일본인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기만한 행위에 대하여 매우 분개하였고, 또한 그들에게 위협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누차 논박을 가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병력을 철수하기로 약속하였으나 러시아는 끝까지 철수하지 않았고, 또 그들은 룡암포로 들어가 한청의 요충지를 장악하면서 세력을 날마다 확장해 나갔다.

이에 일본은 그들의 죄를 성토하여 전쟁을 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고 또 국론도 분열되었다. 그들의 정치적인 입지는, 나이와 관직이 높은 이등박문과 같은 사람들이 신중론을 펴며 서서히 시도하기를 주장하였고, 혈기가 왕성한 소장파와 민당 일파들은 먼저 그들을 제압해야 한다고 하면서 지금 기회를 놓치면 50년 내에 우리 동양 3국이 러시아에게 먹힐 것이므로 잠시의 편안함을 다행으로 생각하지 말자고 하였다. 또 신문에서 정부를 비난한 말들이 각국으로 전해져 이등박문을 왕륜송의 건강인. 자는 덕언, 시는 장민. 금이 맹약을 위배하자 적정을 살피라고 간청하였음. 편자주 과 진창송의 강녕인. 자는 회지, 시는 충헌. 그는 금국과 화의를 주장하고 회부을 반대하여 충신 악비를 살해하였음. 편자주 로 비유하면서 서로 수년 동안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일본을 약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그들이 발병할 줄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때 일본은 발병을 결의하고 선전문서를 작성하여 한국을 보존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한다고 선언한 후 대산암을륙군제독, 동향평팔랑을 수군제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들은 군함을 타고 부산을 지나 계속 인천을 향하고 있던 중 그 기밀이 발각되었다.

이때 러시아인들은 정탐을 하고 있다가 그들의 속셈을 알고 순양함 수 척을 파견하여 해상을 정찰하고 있던 중 인천 팔미도에서 일본병에게 습격을 당하여 그 순양함이 침몰하였다.

이와 같이 러일 양국의 평화가 깨어지자 동양은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러시아가 극동병력을 동원하여 적을 맞이하였으므로 우리나라 서북 량계가 먼저 화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발해와 여순 사이에도 대포를 실은 차와 화기를 실은 병선들이 앞뒤로 즐비하였고 징과 북소리가 천리를 진동하였다.

 

27. 파블로프의 귀국

 

일본인은 주한공사파블로프를 귀국시키고, 일본의 주러공사률야신태랑도 독일로 갔다.

이때 고종은 러시아공관을 행궁처럼 생각하여 그곳에 지화 10여 대를 놔두고 혹 필요할 때 사용하려고 하였으나, 파블로프가 떠날 때 그 지화를 모두 가지고 갔다. 그 액수는 모두 수백만 원이라고 한다.

 

28. 이재극, 민영소 등을 대신에 임명

 

리재극을 내부대신, 민영소를 농부대신, 리지용을 법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29. 양전사업 결과

 

농지 측량이 완료된 군은 212개소이며, 구결을 징수한 수는 10만4,066결이었다.

 

30. 일본의 대풍

 

이 해에 일본은 큰 풍년이 들어 예상수확량이 50,00만석에 달하였다.

 

31. 미국인 3형제의 장수

 

미국인 형제 3명의 자손은 증손까지 남녀를 합하여 800명이다.

 

32. 김윤식을 처형하자는 상소

 

정부의 제신들은 연명소를 올려 금윤식을 처형하자고 간청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후속 명령이 조석간에 내릴 것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인하여 조정에서 경황이 없었으므로 그 일은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33. 국내의 13개 신문

 

이때 보도기관으로는 서울에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이 간행한 것이다.

그리고 <한성신보>, <대동보>, <기독교보>는 외국인이 관리하고 있었으며, 인천에는 <조선신보>와 <대한일보>, <인천상보>가 있었다. 옥구에는 <군산신보>가 있었으며 목포에는<목포신보>가 있고, 부산에는 <조선시보>, 원산에는 <원산신보>, 성진에는 <북한시보>가 있었다. 이것은 모두 외국인들이 간행하였다.

 

34. 일본인의 대러 선전포고문

 

일본인의 선전서는 대충 다음과 같다.

“우리 제국은 한국을 보존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양국이 여러 세대 동안 지속한 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의 존망이 제국의 안위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러시아는 청국과 조약을 체결하였고 또 열국들에게 누차 선언을 하였지만, 그들은 만주를 점거하여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병탄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만주가 그들에게 돌아가면 한국의 보전은 유지할 수 없고, 극동의 평화는 다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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