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조선

매천야록 제5권

오늘의 쉼터 2016. 11. 6. 18:11

매천야록 제5권

 

광무 9년 을사(속)(1905년)

 

1. 민영환, 조병세 등의 시호

 

을사년(1895) 11월, 민영환과 조병세의 시호를 충정, 홍만식의 시호는 충정이라고 하였다. 민영환의 시호는 처음에 충문이라고 하였으나 그 후 고친 것이다.

 

2. 보빙사리지용의 파일

 

리지용을 보빙대사로 임명하여 일본으로 파견하고 리근택, 권중현 등을 수원으로 임명하였으나, 그 후 다시 리재완을 그의 대신 임명하였다.

 

3. 참장금영진의 도주

 

참장금영진이 도주하였다. 김영진은 엄준원과 서로 간사한 짓을 하여 행인들도 그들을 주목하였다.

 

4. 경연관곽종석의 론시국소

 

경연관곽종석이 상소하여 시국을 논하였다. 그는 이때 상소에서 「미사신」으로 칭하였다. 그 상소는 누락되어 수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비답은 “대신과 제신에게 내린 비답을 의당 보았을 것이니 경도 참작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지방관을 파견하여 그 유시를 전하고, 또 소명까지 내려지므로 곽종석은 입경하여 독대를 청하였다. 그러나 들어가지 못하고 또 분위기마저 좋지 않으므로 남모르게 내려와 거창 객사에서 하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10일 만에 귀가하였다. 곽종석은 본래 중망을 받고 있었으나, 이때 처사가 분명하지 않아 영남 사람들은 더욱 그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5. 전지평전우의 상소

 

전지평전우가 상소를 하였으나 그 상소는 누락되어 수록하지 않았다. 이때 그 비답은 “당신의 말은 매우 가상합니다. 전후에 걸쳐 올린 제소의 비답을 참고해 보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6. 영유군수박용관 등 사직

 

영유군수박용관과 시흥군수금종국 등이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7. 진남포민의 체포와 리유인의 수감

 

진남포의 항민들이 5적 토벌을 꾀하다가 그 일이 발각되어 14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일본인들은 리유인도 의거를 하기 위한 음모가 있다고 하여 그를 수감하였다.

 

8. 외부 폐지

 

외부를 폐지하고 그 외교사무를 일본 동경으로 이관하였다.

 

9. 의정부의 외사국 설치

 

외사국을 의정부에 설치하여 옛날 외부의 임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 외사국을 설치할 때 엄준원의 집을 집어넣어 확장하려고 하자 엄비가 크게 노하였다. 이에 그 일을 주관한 사람은 엄비를 두려워하여 중지하고 말았다.

 

10. 민영환의 장례

 

21일, 민영환을 룡인에 예장하였다. 이때 고종은 친히 뜨락에 내려 멀리 떠날 때까지 전송하며 경의를 표하였고, 또 각국 공사 및 영사들도 모두 와서 조문을 하며 관을 어루만지고 애통해 하였다. 위로는 진신으로부터 밑으로 방곡의 조예(조례), 부유(부유), 걸인, 각 사찰의 승도들도 거리가 빽빽하게 모여 곡을 하면서 전송하였으므로 그 곡성은 산야를 뒤덮었다. 이때 전동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인파가 첩첩으로 쌓여 진을 친 듯 하였다. 상여를 전송할 때 이렇게 인파가 많은 것은 근고에 없는 일이었다.

이때 향병 한모라는 사람이 장례지에서 민영휘를 보고 “당신도 호상을 하러 왔습니까? 당신의 성이 민씨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민씨는 죽고 어떤 민씨는 죽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나라가 망하였지만 한 번 죽어 속죄를 하지 않고 충정공의 영구를 따라 여기까지 왔으니 하늘이 두렵지 않습니까? 속히 이곳을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뾰족한 내 군화에 치여 죽을 테니까!”라고 하자 민영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통쾌하게 생각하였다.

 

11. 한진창전북관찰사 임명

 

한진창을 전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2. 종가어전 화재

 

종가의 어전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전사 100여 칸을 소실하였다.

 

13. 통감부 설치

 

12월, 전외부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때 총무관장학원정길이 먼저 와서 이등박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4. 각 항구의 리사청 설치

 

각 항구에 리사청을 설치하여 전령사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15. 일진회의 국민신보 창간

 

일진회가 <국민신보>를 창간하였다. 그 주론은 일본의 풍속을 받아들이기 위해 서로 호응하자는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그 신문을 「기관신문」이라고 하고, 민간인들은 그들을 미워하여 구독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강제로 관리들에게 송부하여 신문대를 받아갔다.

 

16. 경운궁의 중수준공

 

중수한 경운궁이 준공되었다. 이때 고종은 중화전에 임어하여 대사령을 내리고, 감동, 감역 등에게 별단을 주어 가자하자 700명의 혼잡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고종은 그들을 미워하여 시행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17. 조민희, 신태휴 등 관찰리 임명

 

경남관찰사민영선과 경북관찰사리근호가 범장에 연좌되어 면직되었다. 이에 조민희를 민영선의 대직으로 임명하고, 신태휴는 이근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조민희는 오랫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이등박문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등박문이 우리 정부로 그를 기용하도록 권장하였으므로 이때 그가 제수된 것이다.

조민희는 조병세의 종질로, 조병세가 그의 앞에서 사망하였으나 그는 수치를 무릅쓰고 출세를 꾀하여 충신의 후예에게 음전을 내린 것처럼 관직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때 정부에서는 달찰을 추대하고, 리근택은 그의 아우 리근호를 추천하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으면서 “대구의 징청각이 어찌 당신들 집 침실이냐?”라고 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신태휴가 물망에 오르게 되었다.

 

18. 친임관의 설치

 

친임관을 칙임관 위에 두어 주임관, 판임관 등 4등을 두었다.

 

19. 우체사장리붕림의 징역

 

일본인이 홍주 우체사장리붕림을 3년 징역에 처하였다. 이때 이붕림은 일본인 한 사람과 체신사무를 보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일본인이 그를 조롱하기를, “지금부터 너희 한인들은 모두 우리의 노예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붕림은 크게 노하여 칼을 빼서 그를 찌르고, 또 자신도 찔렀다. 그러나 그 일본인은 중상만 입고 이붕림도 죽지 않아 법사에서 이붕림을 징역에 처하였다.

 

20. 리중태의 초소입성

 

전승지류도성이 만인소를 올리기 위해 호소통문을 띄우고 있었는데, 이때 전승지리중태가 자신의 상소문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일본인들에게 발각되어 수감되었다. 그들은 모두 5적을 성토하려고 한 것이다.

류도성은 안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리중태는 례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21. 전참봉리승희의 구속

 

전참봉리승희가 의병과 내통한 혐의로 대구부에 구속되었다.

이승희는 고 도사리진상의 아들로, 가정학을 계승하여 유학으로 명성을 떨쳤다.

 

22. 갑오년의 공포안 조사

 

탁지부는 갑오경장 이후의 공포안을 조사하였는데, 그때 3천냥 이상 범포자는 관찰사, 군수, 어사 등 70여 명이었다.

 

23. 손병희의 일진회 창설

 

천도교의 괴수 손병희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손병희는 망명인들과 결속하고 본국의 간세배와 내통하여 일진회를 창설한 후, 이때 일본인과 함께 귀국하므로 일진회 회원들 중에 그를 맞이한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그들은 교회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연설을 하며 군중을 유도하여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또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란 13자를 글자마다 그 뜻을 해석하여 신문에 게재하였다. 그리고 윤시병, 송병준 등이 이 교를 신봉하여 종주가 되었다.

 

24. 금영진의 환국

 

금영진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김영진은 금옥균의 아들로 일본 부인이 낳았다.

김옥균이 처형된 후 그를 청산군에 매장하였는데, 이때 김영진이 와서 13년 만에 기법회를 치르고, 또 그의 유고도 간행하였다. 김영진은 이때부터 외직에 임명되어 평남참서관과 진위군수를 지내면서 불법을 자행한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25. 최익현의 유회 설치

 

최익현이 로성 궐리사에 유회를 설치하여 의거에 관한 대책을 강구하자 영남의 정재규기정진의 제자. 로문삼자의 1인으로, 호는 애산. 편자주 와 호남의 기우만 등이 호응하였다.

 

26. 송병선의 순절

 

30일, 전대사헌송병선이 음독자결하였다.

송병선은 산림에서 일어나 그 직위가 경재에까지 이르렀으나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그를 매우 보잘 것 없이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겁약이 체결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자신을 「초망신」이라고 칭하면서 잇달아 두 번이나 상소를 하여 국사를 논하였다. 이에 고종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그를 부르므로, 그는 도성으로 들어가 독대를 청하였다. 고종은 즉시 그를 인견하였다.

이때 그는 대궐 밖에서 수일 동안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경무사윤철규가 교지를 전하기를, 교자를 타고 들어오라고 하자 그는 사양하기를, “황상이 지척에 계신데 어찌 교자를 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윤철규는 그를 속이어 “상의 명을 어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억지로 그를 교자에 태워 남문으로 나갔다. 이때 일본인들은 그를 껴안고 기차에 태운 후 잠시 사이에 공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결국 소제의 옛집으로 들어가 유소를 짓고, 또 국민과 자제, 문생 등에게 고하는 글을 지은 후 술을 내어 시자들을 두루 마시게 하고, 자신은 아편을 꺼내어 술에 타 마시려고 하자 시자들은 울면서 만류하였다. 송병선은 웃으면서 “나는 호사를 하는 바이지만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라고 한 후 그 아편이 든 술을 마시고 자리에 누웠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목숨이 끊기지 않자 그는 벌떡 일어나면서 “들은 말에 의하면 아편을 먹은 사람은 졸면서 즉사를 한다는데 내가 지금도 죽지 않는 것은 이 약이 적은가 보다. 내가 죽지 않으면 어찌 낭패가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또 모가 난 비수를 삼킨 후 벽을 향해 누워 있다가 반나절 동안 손발을 떨면서 몸을 뒤척거리다가 절명하였다. 그의 두 번째 상소는 다음과 같다.

 

27. 송병선의 재소

 

“아!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한 란신적자들이 어느 시대에든 없었겠습니까마는 개벽 이후 어찌 박제순, 리지용, 리근택, 리완용, 조중현 등과 같은 악질들이 있겠습니까? 우리 삼천리 강토는 조종의 토지이며, 백천만의 생령들은 조종의 적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폐하와 같이 높은 분이라도 이것을 사적으로 남에게 줄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폐하의 신하가 어찌 함부로 주고 빼앗아 우리 500년 종사를 엎을 수 있겠습니까? 아! 저… 5적들은 종실의 지친이며 교목세신으로서 그의 부조를 생각하지 않고, 렬성의 깊은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교활한 오랑캐들에게 아첨하여 임금님을 협박하고 허위조약을 임의로 조인하였으니 고금천하에 이것이 무슨 변이겠습니까?

지금 온 국민들은 모두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만 아직도 그들을 처형하여 신민의 울분을 씻고 천지의 신명에게 사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화가 또 어느 때 있을지 모르고 있는 일이니, 이런 처지에 이르러 그 종사와 생민들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들의 소위 5조약이라고 하는 것은 곧 우리를 노예로 삼으려는 것이며, 우리를 신첩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조종의 강토는 모두 이역이 될 것이며, 우리 조종의 생민은 모두 그들의 어육이 되고 말 것이니 나라가 나라 노릇을 하려고 해도 어찌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나라는 비록 망하더라도 의리가 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목욕을 하고 그들을 성토하자고 간청한 것은 비단 신의 말뿐이 아니라 거국의 공론이오니 성상께서는 속히 방형을 시행하시어, 위로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으시고 아래로는 여론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령부사조병세와 보국민영환 및 참판홍만식이 순절하였다는 말을 듣고 더욱 우리 조정의 아름다운 교화가 사람들의 뼛속 깊이 스며들어, 이와 같이 주상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절사하는 의리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5적들을 어찌 한 순간이라도 천지 사이에 숨을 쉬게 하고 계십니까? 폐하께서는 속히 왕법을 시행하여 그 매국한 죄를 바루시고 당당한 우리 례의지방으로 하여금 천하 후세에 웃음을 사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유소는 다음과 같다.

 

28. 송병선의 유소

 

“장사신 송병선은 목숨을 끊기 전에 삼가 북쪽을 향해 피눈물을 흘리며, 우리 성상에게 이 상서로 고결하옵니다. 신은 역적성토와 륵약폐지에 대해 소, 차(차)를 올린 후 어떤 처분이 내려지기를 기다린 지 이미 며칠이 지났고, 또 누차 독대를 청하였으나 성상의 기체가 불편하시어 대궐문 밖에서 하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경무사윤철규가 신에게로 와서, 합문에서 부복을 하려고 해도 노병에 시달린 근력으로서는 부지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신을 부축하여 교자에 태웠습니다. 교자의 문은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성밖에 도착해보니 순검과 일본 순사가 칙명이 내려졌다고 하면서, 신의 몸을 부축하고 온갖 곤욕을 보이며 신을 위협하여 차에다가 싣고 공주의 대전으로 갔습니다. 신을 쫓아내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때 신은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하고 온갖 곤욕을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애석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정에 욕을 끼치는 행위가 애석하오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리고 사림에게 욕을 끼치는 행위이니 그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아! 저 적도들을 처형하지 못하고 륵약을 취소하지 못하면 우리 500년의 종사가 오늘날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고 삼천리의 강토가 오늘날 없어질 것이며, 수천만 생령들이 오늘날 멸망하고 말 것이며, 400년의 도맥이 오늘날 끊어지고 말 것이니 살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하로 가서 우리 열성조와 선성현을 뫼시어 춘추의 대의를 저버리지 않겠으니 성상께서는 그 정상을 살펴 주시고, 가련하게 생각하시어 순사에 대한 정의를 확정해 주시고, 속히 그 적도들을 처형하여 왕법을 펴시고, 또 늑약을 폐지하여 국권을 회복하십시오. 그리고 사람을 잘 택하여 직책을 맡겨 주시고, 우리 백성들을 보존하시어 우리 종사의 복을 무궁히 누리시고, 끊긴 그 도맥을 붙들어 주신다면 이것은 신이 죽는 날이 사는 날과 같습니다.

그럼 정신이 혼미하고 기운은 막혀 어떻게 말씀을 아뢰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만 아뢰옵니다.”

그가 전국민에게 고한 글은 다음과 같다.

 

29. 송병선의 고전국민유서

 

“병선은 초야에 묻혀 사는 사람으로 문을 닫은 채 독서만 하고 분수와 의리를 지켰으며, 그 세상의 흥체에 있어서는 오직 정치인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국가가 망하고 백성들이 모두 죽어 가고 있는데도 만세를 위하여 태평시대를 전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포복(포복)하는 적자를 구제하지도 못하고 차마 이토록 참혹한 광경을 보고 있으니 차라리 이 몸이 죽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한 번 죽는 것으로 국민 앞에 사죄하고자 합니다.

아! 우리 국민들도 이토록 경쟁하는 세상을 만나 의리를 지키지 않으면 무엇을 믿고 살 수 있겠습니까? 제각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죽어야 할 일에 살면 살아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며, 당연히 죽어야 할 일에 죽으면 죽어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옛날 말에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성을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국민들은 더욱 분발하여 일심 단결하면서 임금에게 충성하고, 윗사람을 위해 죽는 마음으로 최후의 목적을 삼고, 또 백번 좌절해도 동요하지 않고, 만겁을 당해도 변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 재앙을 뉘우쳐 생명을 보존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나약하고 게으름만 피워 한결같이 흩어지면 나는 장차 우리 국민을 지하에서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아! 제각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문인들에게 고한 글은 다음과 같다.

 

30. 송병선의 고문인유서

 

“조용히 생각할 때 유자가 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은, 인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죽은 후에 그만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인이 일찍 훈계한 것입니다. 지금 천지가 뒤바뀌어 중화가 오랑캐로 변하고, 인간이 금수로 변하고 있으니 우리 동지들은 더욱 노력하고 의리를 강론하여 거의 끊어진 우리 유사의 맥을 붙잡고, 또 영원히 그 맥락을 이어 선성현에게 공헌하기를 이 로부는 구구히 바랍니다. 천번 만번 이 부탁을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의 아우 송병순에게 준 고별서는 다음과 같다.

 

31. 송병선의 고기제병순유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사람이 사는 것은 정직해야 하는 것이니, 남을 속이고 살면 이것은 요행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고 자제들도 잘 계도하여 집안의 명성을 잘 보존하기 바란다.”

그의 아들 송철헌에게 준 유서는 다음과 같다.

 

32. 송병선의 고기자철헌유서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여울물만 마시고 살더라도, 수신을 잘 하여 천명을 기다리고 선조의 훈계를 잘 지켜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기 바란다.”

이 사실이 조정으로 알려지자 그에게 문충이란 시호를 내리고 제관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이때 최익현은 직언을 잘 하고, 곽종석은 경학에 밝으며, 전우는 학행으로 명성을 떨쳐 일대의 중망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가문이 한미하였고, 송병선은 세가로서 훌릉한 빈사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본래 명성이 그리 훌륭하지 않았고 또 약간의 과실이 있다는 비방을 듣고 있었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큰 감명을 받아 완인으로 추대하였다.

송병선은 리용원의 종매부였지만, 이용원은 평소 그를 가벼이 보고 있었는데, 이때 그는 남에게 보낸 서신에 그의 순사를 논하여 “연재의 죽음은 가히 인생을 마감하는 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므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이 실상을 잘 드러낸 말이라고 하였다.

송병선의 자는 화옥이며, 호는 연재로 병신년(1836)에 태어났는데 이때 나이는 70세였다. 그는 유언하기를, 시호를 청하지 말고 례장도 받지 말고 그때 입은 복장으로 렴을 하라고 하였다.

그의 처는 한씨이며, 이분은 재취이다. 이때 송병선이 서울로 간 후 오랫동안 아무 소식이 없자 송병순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기다리고 있자 한씨는 “대감님께서 어찌 살아서 돌아오시겠습니까? 가문의 명성을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시숙께서는 어찌 기다리고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송병순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한집안에서 형수와 내가 30년 동안 살았지만 이렇게 늠름한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송병선의 죽음은 한씨가 도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녀비인 공림은 매우 가련하였다. 그가 하루는 “대감이 백세 후에 작고하시면 소인이 당연히 순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그 가족들은 그가 불길한 말을 한다고 꾸짖었다. 그러나 송병선이 순절하자 그는 성복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잠을 자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그의 남편은 피비린내를 맡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불을 밝혀 보니 그의 아내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의 목에는 부엌칼이 있었다. 그 칼은 둔하여 목을 베인 흔적이 있었고 목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이에 공림의 이름은 온 나라에 자자하였고, 송철헌이 송병선의 묘소에다가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송병선을 쫓을 때 그를 뫼시고 간 문인에게 위협하기를, “너희들이 너의 스승을 속이고 상소를 하여 오늘의 소란을 있게 하였으니, 지금은 용서를 해주지만 너희들이 다시 이런 일을 하면 두 번 다시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의 시자 10여 명은 한결같이 이런 일은 감히 다시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 보증서에 서명을 하므로 일본인들은 모두 그들을 비웃었다.

그리고 송병선의 장례를 치른 후 대구에 사는 금모란 사람은 자칭 그의 문인이라고 하면서 걸식을 해 가며 그 묘소 옆에 상려(상려)를 지어 놓고 기거하였다.

최익현은 송병선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죽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죽으면 나라를 위할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이때부터 더욱 밥을 많이 먹고 기운을 내며 사방의 인사들을 불러모으는 계획을 세웠다.

 

33. 기산도의 5적암살계획

 

기산도가 리근택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미수에 그쳤다.

기산도는 기우만의 족자이다. 그는 약관 때부터 머리를 깎고 사관학도가 되어 이근택의 문하에 출입을 하였는데, 이때 이근택의 소행에 분개하여 칼을 품고 다니며 그를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거동이 수상하므로 이근택은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였다. 이때 그는 “너희 5적을 살해하려고 한 것이 어찌 나 혼자뿐이겠는가? 내가 다만 너를 모해하는 일이 은밀하지 못하여, 어찌 이렇게 탄로되었는지 한스러울 뿐이다. 오직 5적을 다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오늘까지 시일을 지연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일이 성사되고 안되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물어 볼 필요가 있겠느냐? 너희 역적들은 오늘 나를 흔쾌히 죽여라”하고 말하였다. 이 사건에 남원의 로영현도 연루되어 그들은 모두 일본 사령부에 구금되었다.

이때 기우만은 도내에 통문을 띄워 5적을 성토하자고 간곡히 말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어디로 갔는지 소재를 알 수 없었다.

 

34. 각국 공리의 철회

 

각국 공사가 모두 철수하여 귀국하였다.

 

35. 한치유감독관 임명

 

주일공관참서관한치유를 감독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교섭사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공사조민희가 귀환하였기 때문이다.

 

36. 일본 유학생의 퇴학

 

일본으로 간 유학생 30여 명은 본국이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부로 항의서를 올리고 모두 퇴학하였다.

 

37. 초량포의 폭우

 

동래군 초량포에 큰 뇌성이 치고 많은 비가 내려, 청나라 상인 3명이 그 뢰진에 사망하였다.

 

38. 강유위의 도한국시

 

청인 강유위가 북미에 있을 때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팔도산천지마청, 구봉기자불신령. 은상혈속유존여, 진초간과가유명. 보호유인녕견사, 태평무사가재병. 한양희씨어금진, 주정마사목불명(명)8도의 산천이 푸르러도 옛날 기자의 신은 령하지 않다. 은, 상의 혈속은 당신들뿐인데 진, 초의 간과로 이름이 나 있다. 보호할 사람이 있는데 어찌 대사를 보낼까? 무사한 태평성대에도 양병을 한다. 지금 한양의 희씨가 다하였으니 주나라 구정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지 못한다. 편자주 이라는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광무 10년 병오(1906년) ①

 

1. 윤철규를 충북관찰사 임명

 

병오년(1906) 광무 10년(청국 광서 32년. 일본 명치 39년), 윤철규를 충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윤철규가 송병선을 협박하여 쫓아낸 일로 사람들이 울분을 터뜨리자, 금하용이 상소하여 윤철규를 성토하였다. 윤철규는 그 상소에 대해 적극 반박하여 심한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일본인들은 그를 외직으로 내보내어 그 여론을 피하도록 하였다.

 

2. 리근택의 피격

 

리근택이 그 첩의 집에서 자다가 자객을 만나 10여 군데 상처를 입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이때 그 대청 위에는 가발이 떨어져 있었는데, 전상을 구속하여 가발 파는 곳을 추적해 보니 그는 리근철이란 사람이었다. 그의 공사는 “가발을 하기 위해 대청 위로 올라가 보니 그 가발이 있었던 것이며, 실로 자객 노릇을 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그 후 이근택은 입원한 지 수개월 만에 완치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 5적들은 크게 놀라 일병들을 자기 집으로 파견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엄하게 통제하였으므로, 이때 사람들은 그 자객을 「둔적」이라고 하였다.

 

3. 일본공사림권조의 귀국

 

일본 공사림권조가 공관을 철수하고 우리 나라를 떠났다. 이때 임권조는 7년 동안 공사로 있으면서 우리 나라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위협과 사기를 치면서 뇌물을 받으면 중지하였으므로 그의 재산은 수만 냥을 헤아렸다.

 

4. 리근홍, 주호면 등 관찰사 임명

 

2월, 리근홍을 경기관찰사, 주호면을 충남관찰사, 리도재를 전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초7일, 해와 달이 나타나 달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5. 각도의 태비혁파

 

13도의 공금태비를 영구히 폐지하였다.

 

6. 침순택의 사망

 

2월, 침순택이 사망하였다.

심순택은 한일협약이 체결된 후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여 자결을 결심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인들이 그의 집으로 탐지하러 갔는데, 그 가족들은 “지금 칼을 꽂고 절명을 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대면을 사절하였다. 일본인들은 즉시 그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가 죽어 있는지 이불을 걷어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 없이 누워 있으므로 일본인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곳을 떠나갔다. 그 후 그는 수개월 만에 천명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심순택이 큰 공훈이 있다고 하면서 그가 사망하기 전에 그를 청녕공으로 봉하고, 그가 사망한 후에는 우악한 은전을 내려 상계를 올리기 전에 시호를 거론하라는 명을 내렸다.

 

7. 리준영을 강원관찰사 임명

 

리준영을 강원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준영은 리하영의 아우이다. 그는 부임한 지 1개월 남짓 되어 사망하였다.

 

8. 통감이등박문의 래한

 

일본통감이등박문이 내한하자 일진회는 「환영」이라고 크게 쓴 두 글자를 남대문에다가 게양하였다. 이때 이등박문의 나이는 66세였으나 그의 건강은 소년과 같았다.

 

9. 강원의병장원용팔 병사

 

강원도 의병장 원용팔이 수감중에 병사하였다.

 

10. 이등박문의 의친왕 소환간청

 

이등박문이 의친왕강 및 망명한 국사범들을 소환하자고 간청하였으나 고종은 아무 가부를 말하지 않았다.

 

11. 황태자의 연혼간택령

 

경향의 처녀를 선발해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때 황태자가 재취를 하려고 하면서 서울 이외의 13도 사녀들까지 15세 내지 19세 처녀들은 국혼 전에 혼사를 치르지 못하게 하고, 지방관은 그 명단을 작성하여 그 처녀의 가족으로 하여금 처녀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도록 하였으므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시골 여자를 뽑아서 어디에 쓰겠는가? 그리고 가산을 팔아 노자를 쓰면서까지 천릿길을 가야 할 그런 충신과 수령은 누구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명령은 문구로만 전해지고, 결국 한 사람도 서울로 올라가기를 독촉한 사람이 없었으며 옛날처럼 혼인을 하였다.

 

12. 일채차관과 해관담보

 

일본 흥업은행에서 1000만원을 차관하였다. 이자는 매회 100원이며 연이자는 6분 5리였다. 그리고 국내의 해관을 담보로 하여 10년을 상환기한으로 하고 5년 내에는 상환을 않기로 하였으며, 그 발행가격은 100원당 90원만 받기로 하였다.

이때 참정박제순과 탁지부대신민영기가 그 일을 주관하였다. 지난해에 300만원의 차관을 내기 시작하여 그 다음에 2000만원, 또 그 다음에는 150만원을 내어, 이때 모두 1650만원이나 되었다. 그러나 차관을 낸 후 중간에서 착취하여 매국인을 도와주었으므로 찌거기만 남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13. 내부의 각군지도 수집

 

내부에서 13도의 각군 지도를 수집하였다.

 

14. 제도의 의병봉기

 

경기, 강원, 충청, 경상 등 여러 도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한일협약이 체결된 이후 거국이 들끓어 대나무로 깃대를 만들어 세우고 모두 일본인을 살해하자고 하였다. 이 성명을 먼저 주창한 곳은 관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각처에서는 모두 호응하여 인심이 조금 흥분되었으나 그들은 아무런 병기도 없고 기률도 없어 비록 100명 내지 1천명이 떼를 지어 다니더라도 일병 수십 명만 만나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또 혹 한두 곳의 요새지를 점령하여 몇 명 정도 참획하는 성과를 거두더라도 일병들은 패배를 꺼려하여 멀리 피하였으므로 군성이 멀리 떨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때 경북관찰사신태휴가 민간에서 성행한 서당을 금지하여 그곳을 신학교로 개설할 것을 권장하고, 그 영을 어긴 사람은 벌을 가하였으므로 사민들은 그를 원망하여 성학을 포기하고 사교로 들어가거나 의병에 가입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전남과 전북은 조금 멀리 있기 때문에 성기가 잘 통하지 않아 기치를 높이 들고 군중과 서약한 사람이 없었다.

 

15. 전감리하상기의 도주

 

전감리하상기가 의병과 내통하여 도주하였다.

 

16. 각군의 신학교 설치

 

경상, 전라 등지에 각 2천원을 지급하여 각군에 신학교를 창설하게 하였으나 그 자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17. 대한자강회 설치

 

전신문사 사장 장지연 등이 대한자강회를 창설하였다.

 

18. 리강의 환국

 

3월, 의친왕리강이 귀국한 후, 통감부에 있으면서 잠시도 이등박문과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근친할 때는 이등박문과 함께 고종을 알현하였으나 그는 본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리강이 일본에 있을 때, 어떤 자객을 만나 겨우 죽음을 모면한 적이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엄비의 지시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귀국한 후에는 그런 불상사를 주밀하게 예방하였다.

리강은 나이가 어려 중망을 받지 못하고, 또 외국에 있으면서 학문을 하지도 않았으며, 오직 주색만 좋아하고 자전거를 잘 탄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리고 이때 일본에서는 관병식이 있어 이등박문이 장곡천과 함께 귀국하자 리강도 그들을 따라갔다. 14일 왔다가 25일 떠난 것이다. 10년 만에 귀국하였다가 겨우 10일 정도 머물다가 떠났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19. 판서리유승의 사망

 

전판서리유승이 사망하였다.

 

20. 경관 및 군인 봉급 인상

 

경관과 군인의 봉급을 인상하였다. 이등박문의 청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보안령을 발표하여 일본인의 폭력과 약탈행위를 금지하였다.

 

21. 엄주익의 녀학교 설치

 

엄주익이 귀족녀학교를 설립하였다.

 

22. 전주사리건석의 사망

 

전주사리건석이 수감중 사망하였다. 이건석은 종성으로 황간에서 살고 있었으며, 지난해 겨울에 전승지리석종과 함께 파약소를 지어 곧 올리려고 하던 중에 일본인에게 발각되어 사령부에 수감되었다. 이때 그는 온갖 위협을 받았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피를 토한 후 사망하였다.

 

23. 고와정 신씨 부인의 출산

 

금산 고와정에 사는 신씨 부인이 임신한 지 열두 달이 되어도 유방이 불지 않았는데, 이달 20일 저녁 일기가 매우 쌀쌀하던 중 어떤 사람이 밖에서 그 부인을 불렀다. 옆에 있는 사람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부인만 그 소리를 들은 것이다. 부인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어떤 사람이 그 부인을 손으로 끼고 산골짝으로 들어가 왼쪽 옆구리를 째고 아이를 꺼냈다. 그런 후에 부인에게 눈을 한줌 쥐어 먹이자 옆구리의 상처는 즉시 치유되었다. 그는 다시 부인을 손으로 부축하고 와서 그의 문 앞에 놔두고 아이만 안고 가버렸다. 부인은 이때부터 벙어리가 되었다.

부인은 옆구리의 상흔을 보여 주었다. 그 배는 낮게 들어가 있어 사람들은 부인이 분만한 것을 알았다. 그 후 그 부인은 아무 탈이 없었다.

 

24. 류경종 아들의 자결

 

주사류경종의 아들 모(그 이름을 모름)가 일생 동안 문을 닫고 독서만 하면서 영리를 바라지 않고 있었으나, 시국이 날로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 미친 듯이 탄식하다가 갑자기 음독 자결하였다.

 

25. 미국 유학생 박장법의 서신

 

미국 거니성(미상)의 유학생 박장법이 신문사에 서신을 부쳐 왔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전년에 일아가 담판할 때 미국에 우거하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7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윤병구, 리승만 등을 대표로 선발하여 그들을 대통령에게 보내 미국의 도움을 청하여, 우리 한국으로 하여금 일본의 기반(기반)을 벗어나게 하고 세계의 평등국이 되도록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흔쾌히 허락하며 말하기를, “나는 당연히 힘을 다하겠으나 국제공법에 있어서 반드시 미국공사의 교섭이 있어야 응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윤병구 등은 다시 대리공사금윤정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윤정은 그 공로가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므로 본국에서 그런 명령이 없다는 핑계로 고집을 부리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아 이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26. 리순익의 사망

 

리순익이 사망하였다.

이순익은 소론 중에서 가장 갑부였다. 그는 나이가 70세였지만 젊었을 때보다 더 인색하여 섶나무(신)와 쌀을 창고에 저축해 두고 조석으로 저울로 달아 밥을 지어먹고, 두육도 하루를 걸러서 먹었으므로 구더기가 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직위가 보국에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상란에 대한 걱정이 없어 세상 사람들은 그를 왕융진의 림기인. 죽림칠현의 1인. 편자주 에게 비교하였다.

 

27. 북경의 황설

 

청국 북경에서는 황설이 내렸다.

 

28. 미국 상항의 지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사망자가 수천 명이나 발생하였다. 이때 우리 나라 유민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고종은 정부로 하여금 본국에 있는 그들의 처자들을 구제하도록 하고, 고종은 1만원, 황태자는 3천원, 영친왕은은 2천원을 희사하였다.

 

29. 지방조사회 설치

 

4월, 지방조사회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각군의 여론을 종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오랫동안 시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조신 중 지리에 조예가 있는 사람을 택하여 위원으로 임명한 후 산천, 강역, 형편, 원근 등을 시찰하게 하였는데, 가을에 시행하기로 하였다. 리원긍 등이 그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30. 송병준 등의 금윤식, 박영효 석방운동

 

일진회민 송병준 등이 정부를 협박하여 금윤식, 박영효 등을 일체 서용하고, 백악관을 신원하여 그의 충성을 표창하자고 간청하였다. 이에 고종은 크게 노하여 “짐이 이 자리를 양보했으면 했지 윤식은 사면할 수 없다”고 하였다.

 

31. 천도교의 수도기념일

 

5일, 이날은 동학괴수 최제우가 천도교를 주창한 날이므로 천도교도 수천 명은 중앙총본부에 모여 최제우를 위한 기복행사를 치르고, 4월 5일을 천도교 수도기념일로 정하였다.

 

32. 금종한의 사충사 건립운동

 

금종한이 사충사를 건립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는 처음에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송병선 등만 거론하였으나 후에 리상철, 금봉학 등을 추가하여 이를 6충이라 하고, 그 터를 로량진 한강 위에다가 정하였다.

이때 경외로 통문을 보내어 의연금을 요구하면서 오랫동안 그 일을 착수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김종한이 6충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노리고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식인들은 그 일을 너무 속히 시작한 것을 의심하였고, 또 김종한을 통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33. 리하영의 사직 간청

 

법부대신리하영이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정부는 통신기관처럼 거쳐만 가고 있었다. 그러나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5적들은 밖으로 일본의 원조를 받고, 안으로는 고종을 협박하면서 모두 한 단체를 이루어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자주 술자리를 가지며 동맹을 강조하여 그들의 위치를 굳히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도사리고 앉아서 다른 직위로 옮기지 않고 있었고, 고종은 팔짱만 끼고 있었다.

 

34. 일본인의 독도 탐사

 

울릉도 앞바다에서 동쪽으로 200리의 거리에 섬이 하나 있다. 이 섬을 독도라고 한다. 이 섬은 옛날에 울릉도에 속해 있었으나 일본인들은 그들의 영토라고 하면서 조사를 해갔다.

 

35. 금가진 등 관찰사 임명

 

금가진을 충남관찰사, 침상훈을 강원관찰사로 임명하였다.

 

36. 안종덕 등 선유사 임명

 

청송군수안종덕을 영남선유사, 홍주군수윤시영을 호서선유사로 임명하여 의병을 해산하게 하였다.

 

37. 민영규를 의정 임명

 

민영규를 의정대신으로 임명하자 이등박문은 전화로 힐책하기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승을 임명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므로, 우리 정부에서는 “황태자의 가례를 곧 행하려면 대신이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임시로 임명하였다”고 대답하였다.

 

38. 일본헌병의 의병 대비

 

일본인들은 사령부에서 헌병 2중대를 충청, 경상 양도로 분송하여 의병을 대비하였다.

 

39. 전참판민종식의 기병

 

전참판민종식이 의병을 일으킨 후 홍주로 들어갔다.

민종식은 판서민영상의 아들이다. 그는 국변을 통분히 생각하고, 가산을 판 후 의병을 모집하고 병기를 구입하자 호서사민들은 그를 따른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이때 그는 남포(람포)를 습격한 후 보녕제군에서 그 병기를 수집하여 순찰하는 일병을 죽이고, 20일 홍주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일병들은 홍주의 성지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포병 약간 명을 잠복시키고 대포 10여 대를 설치하였으나, 이것이 모두 민종식의 소유가 되어 그가 각문을 파수하고 있으면서 매우 큰 성세(성세)를 떨치었다.

 

40. 금승문의 수감

 

일본인이 금승문을 사령부에 수감하였다.

김승문은 함흥 사람이다. 그는 신술이 있었으므로 강석호가 그를 천거하자, 고종은 그를 입대시켜 10일 만에 비서승으로 제수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일본인에게 밀고하기를, “이 사람은 의병과 내통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그를 구속한 후 그의 행적을 조사하여, 의병과 내통한 어보문자를 발견하고 결국 그를 오랫동안 수감하였다. 김승문은 그 행적이 곽종석과 같은 사람으로 이런 기화를 만났으나 그대로 지나갔다.

 

41. 금악영의 비기 발견

 

금악영이란 사람이 철원의 황제봉 밑에다가 사악재를 건립하였다. 이때 그는 그 터에서 비기 26자를 발견하여 궁내부로 올렸으나 궁내부에서는 그 비기를 다시 깨끗한 곳에 묻도록 하였다. 그 문자는 무슨 문자인지 알 수 없었다.

 

42. 홍주의병장 민종식의 패전

 

윤월, 홍주 의병이 패전하여 민종식이 도주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민종식의 병사가 많다는 말을 듣고 2개 중대를 파견하자, 우리 병력 150명도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그 처음으로 도착한 예기로 홍주를 포위하였다. 일본 병사들도 그들의 앞에서 포진하고 있었다. 민종식이 대포를 쏘아 일병 50여 명을 사살하자 일병들은 병사를 수습하여 후퇴하였다. 이에 민종식이 병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한 관리가 자청하여 남문을 지키겠다고 하자 많은 병사들은 “먼저 입성할 사람은 사대부입니다. 관리를 그 가운데 참여시킨다면, 사람마다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 관리는 의병들은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하며 9일 밤 남모르게 동문을 열어 일병을 들어오게 하였다.

이때 밤이 매우 어두워지자 의병들의 대열은 큰 혼란이 일어나, 그들과 맞서서 싸우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다가 60여 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민종식은 정예부대를 선발하여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여 홍주 10리 안에는 밀과 보리가 모두 뭉개졌다. 그 병사들과 말에 짓밟혔기 때문이다.

전승지리설이 사망하였다. 이설은 지난해 겨울에 서울로 와서 5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그 상소가 보고되지 않자 시골로 돌아가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민종식과 서로 내통하여 그가 성공하기를 기원하였는데, 그가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크게 애통해 하며 유소를 지어 놓고 음식을 먹지 않은 지 10여 일 만에 사망하였다.

 

43. 류맹홍주군수 임명

 

류맹을 홍주군수로 임명하였다. 유맹은 기량이 있기 때문에 그를 특히 임명하여 란을 겪은 백성들을 위로하게 한 것이다.

 

광무 10년 병오(1906년) ②

 

1. 최익현의 거병

 

전판서최익현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은 지난 해 겨울 상소를 한 이후 정산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일본인들은 그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여 파수하고 있었다. 이에 최익현은 병을 칭하여 낮이면 안채에서 누워 있다가 파수병이 조금 해이해진 틈을 타서 미태복 차림으로 문을 나가 태인에 있는 림병찬을 만났다.

임병찬은 군리로 있다가 을유년(1885)과 병술년(1886) 사이에 뇌물을 주고 악안군수로 임명되었으나,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깊은 산속에다가 집을 지어 놓고 살면서 최익현의 충의에 감격하여 서로 왕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년 이후 난리가 일어날 징조를 보고 그는 가산을 팔아 많은 사람들과 사귀는 한편, 군기를 사서 비축해 놓고 어떤 변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그는 홍주에서 패배하여 인심이 크게 꺾이자 발을 붙일 곳이 없었지만 오직 호남이 가능성이 있고, 또 그곳은 최익현의 문도가 많아 그들을 초치할 만하므로 그는 최익현에게 권고하여 태인에서부터 병사를 소집하자고 하였다. 최익현은 그의 말을 따라 13일, 무성서원으로 들어가 단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서약을 하였다. 이때 그를 따른 유생들은 80여 명이었다. 그는 군중과 서약하기 하루 전에 상소하여, 의병을 일으킨 사유를 다음과 같이 알렸다.

“신이 보는 바에 의하면, 옛사람 중에 나라가 망하면 떠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의 미자입니다. 그리고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명의 범경문입니다. 그리고 적을 성토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한의 적의와 송의 문천상입니다.

신은 불행히도 오늘의 국변을 보고도 떠나야 할 곳과 그럴 만한 의의가 없으므로 오직 대궐로 상소하여 폐하의 앞에서 죽을 뿐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헛된 말을 공연히 지껄여 이 일이 문구에 불과하옵니다.

그러나 인심은 아직도 국가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난리를 겪은 이후 성급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참고 살아남아 동지 약간 명과 함께 적의와 문천상처럼 되려고 한 지 지금부터 4,5개월이 되었습니다. 다만 신은 본래부터 재주가 없는 데다가 병까지 들어 형세에 구애를 받는 일이 십중팔구는 되었으므로 이렇게 지루함을 면치 못하고 세월만 낭비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계획이 조금 정해지고 사람들도 조금 모이었으므로 윤4월 12일, 전악안군수림병찬을 전주로 보내 동지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점차 북쪽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이등박문과 호도 등 일본인 및 각국 공사들과 회동하여 담판을 짓고, 또 그 륵약을 소멸시켜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우리 백성들이 종자를 바꾸는 화를 면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그들에게 노예 취급을 받거나 대의를 주창한 사람이 그들의 원수 취급을 당하여 비도로 일컬어지고 비방을 당한다면 신은 그들을 구제할 여가가 없을 것입니다.”

최익현은 또 전후 죄상을 다음과 같이 적어 일본정부로 보냈다.

“대한 광무 10년 윤4월, 일 정헌대부 전의정부찬정최익현은 일본정부의 첨대신각하에게 이 서신을 보냅니다.

아!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성이라 하고, 신의를 잘 지키는 것을 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 이 성이 없으면 반드시 죽고 나라에 이 도가 없으면 반드시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고한 이 로생의 상담이 아니라 비록 개화를 경쟁하는 열국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아니면 이 세계에서 자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병자년(1876) 귀국 사신 흑전청륭이 와서 통상을 간청할 때 나는 강력히 그 청을 저지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린국과의 수호가 좋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귀국의 반복 무상한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걱정스러워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대세는 옛날과 달라 서양의 기세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한국, 일본, 청국 3국이 서로 도운 후에 동양을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은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이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귀국이 믿지 않더라도 또한 너무 심하게 하여 양국의 화기를 상할 필요가 없으므로 20년 동안을 숨기어 시국일을 말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귀국이 하는 것을 보고 나의 견해가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 귀국이 지금은 강대하지만 반드시 망할 것과 동양의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먼저 귀국이 신의를 저버린 죄를 말한 후에 귀국이 망하는 이유와 동양의 전쟁이 그치지 않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병자년(1876)에 체결한 그 조약 제1관에는 「조선은 자주지방이므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사후 화친을 하려고 할 때는 피차가 동등한 예로 대하여 추호도 침월, 시혐(시혐)하지 않고 먼저 종전의 교정이 조새할 수 있는 제규례를 일체 혁파하여 관유, 홍통한 법으로 영원한 안녕을 기할 것」이라고 하였고, 제12관에는 「우의 조약을 양국 정부는 변혁하지 않고 영원히 준행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을미년(1895) 청국리홍장과 귀국 이등박문이 마관조약을 체결할 때에는 그 제1관에 「조선국의 독립과 자주는 양국이 인정하여 추호도 침월하지 말 것」이라고 하였고, 갑진년(1904) 일아선전서에도 또 「한, 청 양국은 평화를 유지한다」는 구절이 있었으며, 또 귀국이 러시아의 공법을 위반한 데 대하여 열국에 통첩한 변명서에도 「원래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여 토지와 주권을 유지한다」고 하였지만 이것을 전쟁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또 구라파로 공사를 보내어 전쟁이 일어난 원인을 설명할 때도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후 30년 동안에 귀국의 군신들은 폐국을 믿는다고 천하에 성명을 할 때마다 어느 때나 우리의 토지와 인민을 침략하지 않고 우리의 독립과 자주를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천하만국이 어느 때나 한일 양국은 순치관계를 가진 나라로서 서로 보호하여 침해한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귀국은 폐국에게 폭행을 자행하여 그 행위가 매월 심하고 신의도 저버리어 못하는 바가 없으니 그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갑신년(1884)에 죽첨진일랑은 난을 일으켜 우리 황상을 겁천하고 우리 재상을 살육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며, 갑오년(1894)에는 대조규개가 난을 일으켜 우리 궁궐을 소각하고 우리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우리의 전장을 훼기하여 명분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지만 후일 나라를 빼앗는 기틀이 실로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으니 그 죄가 둘째이며, 을미년(1895)에는 삼포오루가 변란을 일으켜 우리 모후를 시해하여 만고에 없는 역행을 저지르고도 오로지 은폐하여 그 도망친 역적을 한 사람도 체포하지 않았으니 그 대역무도한 행위는 신의를 저버리는 정도뿐 아니라 그 죄가 세 번째이며, 림권조, 장곡천호도 등이 우리 나라에 주재하고 있을 때 그들이 협박하고 약탈한 일은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 큰 일만 열거하면 각처에 철도를 부설할 때 경의철로는 처음부터 조회도 하지 않고 임의로 시행하여 어채, 삼포, 광산, 항해 등의 리권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가의 재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착취하였으니 그 죄가 네 번째이며, 군사상으로 열거하면 그들은 우리 토지를 강점하고 인민을 학대하고 묘소를 발굴하고 가옥을 헐어 버린 사람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그들이 우리 정부에 권고한 것을 열거하면 우리 나라의 소인들을 추천하여 강제로 그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도록 요청하므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추문이 낭자하였으니 그 죄가 다섯 번째이며, 철로, 토지, 군율 등에 있어서도 병대를 이용할 때는 혹 군용을 핑계로 시행하고 지금은 모든 군대를 이용하는 일이 중지되었지만 철로는 반환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고 토지도 여전히 점탈하고 있으며 군율도 예전처럼 시행하고 있으니 그 죄가 여섯 번째이며, 우리의 역적 리지용을 유인한 후 강제로 의정서를 만들어 우리 국권을 대체하고 대한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문제에 있어서는 거론도 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일곱 번째이며, 신사 및 유림들이 전후로 아뢴 상소는 모두 우리 황상에게 고하고 우리 나라에 충성한 일이지만 그분들을 모두 체포하여 구속하거나 살해하여 그 충고와 공론을 억제하며 오직 우리 국세가 다시 떨칠까 우려하고 있었으니 그 죄가 여덟 번째이며, 또 우리 부랑민을 꾀어 동학도들을 일진회란 이름으로 그들을 창귀(창귀)로 삼고 또 그들에게 선언서를 외우게 하여 이것을 민론이라고 하였으며, 그 국민의 의무에 있어서도 보안회, 유약소 등을 치안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백방으로 저지하고 그들을 체포 내지 구금을 하였으니 그 죄가 아홉 번째이며, 강제로 역부를 모집하여 그들을 소나 돼지처럼 몰고 다니며 조금도 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고 풀을 베어내듯 처형하였고, 또 우민들을 모집한 후 그들을 멕시코로 팔아 넘겨 우리 백성들의 부자, 형제로 하여금 원한을 갖게 하였지만 그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고, 또 갖은 학대를 받아 죽어도 그 시신을 가져올 수 없으니 그 죄가 열 번째이며, 전보사와 우정국 량사를 강제로 빼앗아 통신기관을 장악하였으니 그 죄가 열한 번째이며, 강제로 각부에 고문관을 두어 그들은 누워서 후한 봉록을 먹고 오로지 우리 나라가 망하는 일만 하여 그중 군경의 감액과 재부의 전횡을 가장 손꼽을 수 있으니 그 죄가 열두 번째이며, 강제로 우리에게 차관을 하게 하여 한 번 내게 하고 두 번 내게 하면서 재정을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옛날 화폐와 다름없는 새 화폐를 그 색과 질과 경중만 가지고 그 명칭을 바꾸고 그 수효만 믿게 한 후 배나 되는 이익을 갈취하여 일국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또 사용할 수도 없는 종이 조각을 억지로 원위화라는 명칭을 붙이는가 하면 또 차관이란 미명하에 미리 많은 이자를 착취하고, 또 고빙이란 미명하에 미리 많은 봉급을 절취하여 우리의 피를 빨아먹고 빈 껍데기만 남겨 두었으니 그 죄가 열세 번째이며, 작년 10월 21일 밤 이등박문, 림권조, 호도 등이 병대를 인솔하고 대궐로 들어가 강제로 조약을 작성하고 정부를 위협하여 스스로 가부를 결정한 후 그 인장을 빼앗아 함부로 날인하고 우리 외교권을 통감부로 옮겨 우리의 독립권과 자주권을 하루아침에 잃게 하였으니 그 죄가 열네 번째이며, 처음에는 우리 외교를 감시한다고 하다가 결국 우리 나라의 정권을 관장하고 그 소속에 관리를 두어 그 수를 날마다 늘리며 우리로 하여금 손 한 번 쓰지 못하도록 온갖 위협과 공갈을 하였으니 그 죄가 열다섯 번째이며, 요즈음은 또 이민에 대한 조례를 만들어 강제로 그 인준을 간청하면서 인종을 바꾸어 버리려는 가혹한 음모를 하고 있으니 그 죄가 열여섯 번째입니다. 아! 이것은 특히 그 큰 일만 거론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10여 가지의 죄상을 강화조약, 마관조약 및 선전서, 변명서 등과 비교해 보면 그 반복무상한 것과 그 기만과 사기가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우리 한국 수천만 명의 마음에 어찌 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동양의 대세 때문에 귀국이 러시아와 전쟁할 때 창방의 인사들은 귀국의 병사들을 환영하여 아무 두려워하는 마음도 갖지 않았는데, 귀국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이후 더욱 흉폭하여 폐방의 인민으로 하여금 다시 어육처럼 참화를 당하게 하였습니다. 가령 러시아가 승리를 거두어 동양이 망했다 하더라도 폐방의 참화가 어찌 오늘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폐방의 인민들은 사람마다 반드시 죽어 살아남지 못하고, 반드시 망하여 보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는 것과 망하는 것은 마찬가지 일이므로 그 머리를 굽히고 자존심을 꺾어 온갖 핍박을 당하며 이런 치욕을 면하지 못한다면 어찌 주먹을 한번 쥐고 소리 한번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로련은 일개 선비였지만 진나라의 말을 부끄럽게 여기었고 소진은 세객(설객)이었지만 남의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하물며 우리 대한의 삼천리 민중들은 선왕과 선현들의 예의를 배운 민족이니 어찌 원수의 나라에 노예가 되어 하루라도 더 살려고 애걸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천하 사람들은 모두 러시아인들이 귀국을 잊지 않고 조만간 동방을 쳐들어올 기세가 있다는 사실을 부녀자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동양 3국이 정족지세로 맞서서 힘을 축적하여 기다려도 오히려 지탱하지 못할까 우려되는데 하물며 서로 시기하고 원망하면 한집안에서 원수의 위상을 면치 못할 것이며, 또 서구렬국도 어찌 귀국이 경솔한 것처럼 일당을 사랑하지 않고 귀국이 마음대로 날뛰는 것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귀국이 망하는 것은 곧 발을 치켜세워 기다려질 것이며 동양도 함께 망하는 날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귀국이 비록 강하다고 해도 결국 망하고야 말 것이며 동양의 참화도 그칠 날이 없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귀국을 위해 생각한다면 그 본초로 돌아가는 길밖에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초로 돌아가는 길은 신의를 잘 지키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 신의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즉 비서(비서)를 귀황제에게 상주한 대로 위에서 열거한 16항의 대죄를 모두 회개하여 통감부를 폐지하고 고문관 및 사령관을 소환한 후, 다시 충실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을 공사로 파견하여 이러한 죄상을 각국에 사죄하고 우리의 독립권과 자주권을 침해하지 말고 양국이 영원히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귀국이 완전할 수 있는 복을 누릴 것이며, 동양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선인에게 복을 주고 음인에게 화를 내리는 것은 명백한 천도입니다. 지금 귀국의 소행은 제나라 민왕(혼왕)과 송나라 언왕(언왕)보다 다르지 않는 것이 몇 가지나 되는지 알고 있습니까? 내가 불행히도 작년 봄에 죽지 않고 또 작년 10월 21일의 변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의리상 원수 나라의 노예는 될 수 없는 일이지만 구차히 천지 사이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수레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서 이등박문 및 호도 등과 함께 한번 말을 다 하고 죽으려 합니다. 이것은 오직 귀국을 위하는 일뿐 아니라 동양의 전국을 위해서입니다. 그럼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최익현의 구인전서

 

최익현이 사람을 구하여 일본영사관으로 서신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두려움을 느껴 사령부의 문에다가 그 서신을 붙여 놓고 도주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되어 일본 신문에 보도되어 그 서신이 전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3. 일진회의 궁금

 

서울의 일진회에서는 궁궐의 출입금지를 부득이 시행한다고 하면서 병력을 파견하여 대궐 문을 지키고, 사잇길로 출입하는 별입시들도 모두 구속하였다.

 

4. 최익현의 피집

 

20일, 순창병이 궤멸한 후 최익현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최익현은 전주를 점거하려고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길을 바꾸어 정읍과 태인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는 길을 가면서 병사를 모집하여 량군의 군기를 수집하고 또 세전을 인출하여 사용하면서 곡성에서 순창으로 들어가 첩보를 통하여 일본인과 내통한 군수리건용을 체포한 후 그를 처형하려고 하였으나 이행하지 못하고 19일 연청에서 유숙하고 있는데, 황혼이 될 무렵 전주와 남원 지방 관병들이 3면을 포위하여 들어왔다. 이때 탄환은 빗발처럼 쏟아져 휘하의 수백 명이 삽시간에 흩어지고 서기정시해가 탄환을 맞아 사망하였으며 림병찬, 고석진, 금기술, 문달환, 량재해, 라기덕, 리용길, 림현주, 최제학, 조영선, 조우식, 류해용 등 12명은 사력을 다하였으나 그들은 아무 대책이 없어 속박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오랫동안 일기가 가물다가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고 뇌성이 치더니 비가 쏟아지므로 량대는 모두 병력을 수습하였고, 21일에는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병들이 최익현 및 기타 12명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한 후 그들을 사령부에 수감하였다. 최익현은 본래 중망이 있어 그의 충성심과 의리를 온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었으나 그는 군사훈련을 해보지 않은 데다가 나이도 많아 기발한 책략과 일정한 계산이 없었으며, 또 수백 명의 오합지중이 아무 기율도 없어 유생으로 종군한 사람들은 큰 관과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다녀 흡사 과거시험을 보러간 것 같았으며 총과 탄환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있었고, 심지어는 시정의 한량배들을 대오에 채워 넣고 다녔으므로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패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패배할 때 주점의 기생과 길을 다니던 걸인들은 목이 쉬도록 탄식하였고 도정(도정)과 무당들도 그의 교자를 바라보고 절을 하며 하늘을 향해 우리 최충신을 살게 해 달라고 외친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때 서울 본부에서는 전남북지방의 병대로 순창을 포위하게 하자 전남관찰사리도재는 광주병대에게 칙령을 내려 다만 순창 경내에 진주만 시킬 뿐, 만일 교전을 하는 사람은 비록 승리를 거두더라도 참할 것이라고 하므로 광주병은 총을 쏘지 않았다. 그리고 남원병대는 출발할 때 늙은 아전 량한규 등이 교전을 하지 못하게 하므로 남원병도 포를 쏘는 체만 하고 탄환은 발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주대장금□□는 병력을 다하여 적극 싸웠으므로 정시해가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5. 곽종석과 기우만의 최익현 요청불응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킬 때, 곽종석에게 서신을 보내 그를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곽종석은 그 일이 군부에게 화를 재촉하고 백성들에게 독을 끼치는 행위라고 하면서 불응하였고, 또 기우만도 담양의 어느 산사에서 회동하여 함께 거의하자고 하였으나 그도 사양하였다. 그것은 자기가 의병의 기치를 내세우려고 한 것이며 최익현의 휘하에 있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때 최익현의 생각에는 혹 우도를 따라 장성의 기우만과 합한 후 라주로 들어가 그곳을 근거지로 삼으려고 하였고, 혹은 남원을 습격한 후 운봉으로 들어가 박봉양을 일으켜 령우병을 호소하면 사방에서 호응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이때 그는 기우만과 박봉양 등이 관망만 하고 있을 줄 모르고 있었으므로 공연히 지방만 유린(유린)될 뿐이었다. 최익현이 패배한 후 량호의 사대부들은 더욱 의기를 상실하여 감히 거의를 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창평에 거주하는 고광순은 최익현이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칼을 등에 지고 그곳을 갔으나 그는 이미 패배하여 피체되었으므로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거창에 사는 리완발이 최익현의 막하로 가려 하다가 그가 이미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도에서 최익현을 뵈었다. 이때 그는 순찰하던 일병에게 매를 맞아 거의 죽을 뻔하였다. 그러나 그는 최익현을 따라가다가 서울에 도착한 후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6. 조병호를 의정에 임명

 

조병호를 의정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광무 10년 병오(1906년) ③

 

1. 법부원과 경무분서 설치

 

통감부에는 법부원, 13도에는 경무분서를 설치하였다.

 

2. 리건석, 리문화 등의 구속

 

리건석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이때 유생 리문화, 금석항, 류한정, 리종대, 안한주, 리린순, 조성찬 등이 모두 의병으로 연좌되어 사령부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문화의 첩은 한씨, 김석항의 첩은 박씨, 유한정의 첩은 최씨, 이종대의 처는 조씨, 안한주의 처는 박씨, 이인순의 첩은 황씨, 조성찬의 첩은 허씨, 이건석의 첩은 천씨로 그 부인들은 서울로 들어가 서로 짝을 지어 다니며 옷과 장식품을 팔아 죽을 쑤어가지고 감옥으로 가서 남편들을 대접하였다. 그들은 머리가 흐트러지고 얼굴에는 때가 묻은 채 호곡을 하였고, 사람들이 혹 유혹하면 침을 뱉으며 “우리집 남편이 의리를 지키어 수감되었으니 우리는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어찌 행동을 나쁘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므로 그들을 보는 사람들은 매우 의롭게 생각하였다.

 

3. 이등박문과 의친왕의 내한

 

5월, 이등박문과 의친왕강이 잇달아 내한하였다.

이때 이등박문은 일황의 서신을 올려 망명인을 소환하라고 권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을 송환하겠다고 하였다.

 

4. 리근상경북관찰사 임명

 

경북관찰사신태휴를 평북관찰사로 임명하고, 리근상을 신태휴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이근상의 아우 리근홍이 경기관찰사로 있으면서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여 사직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근홍은 치적이 있으므로 그곳 아전과 백성들이 간절하게 만류하여 체직하지 못하고, 결국 이근상을 체직하여 리중하를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강력히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5. 이등박문의 궁금조치

 

이등박문이 대궐문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무당들과 대소관원들의 출입을 막고 통감부에서 발행한 출입표가 없으면 들어가지 못하게 하므로, 이 궁금으로 인하여 대궐이 쓸쓸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덜렁하게 혼자 앉아 사람을 볼 수 없었으므로 두려움을 느껴 울었고, 눈에는 모두 종기가 나 있었다. 그리고 하루는 태자에게 말하기를, “아이야, 들은 말에 의하면 지금 세계의 열강들이 비록 남의 나라를 빼앗을지라도 그 나라 임금은 죽이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 부자가 혹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으며, 도민들은 대궐을 가리키며 비웃기를, “지금은 어찌 별입시를 부르지 않고 있을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의친왕강을 불렀으나 강은 병을 칭하여 가지 않자, 그 다음날 고종은 금덕수의 산정으로 가서 술을 많이 마시고 돌아왔다.

 

6. 내시강석호의 도주

 

내시강석호가 도주하여 일본인들이 찾았으나 결국 발견하지 못하였다.

 

7. 농부 관리의 단발

 

이때 농부의 관리들 중 단발하지 않은 사람이 매우 많아, 대신 권중현이 그들에게 사직을 하라고 독촉하므로 이에 주사들은 모두 단발을 하였다. 그리고 각 학교의 생도들도 단발하지 않은 사람이 매우 많으므로 그들에게도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또 장정 수백 명을 징계한 후 감옥서에서 모두 단발을 하였다.

이에 도성에서는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단발을 하여 일을 하는 데 위생적이어서 모두 이익이 있었고, 또 의복의 형태도 날마다 변하여 적삼과 바지가 화살통처림 좁은 데다가 색깔도 일정한 색이 없어 연보라색, 검은색, 문채 있는 색 등이 무슨 괴물처럼 찬란하였다.

그리고 삿갓의 창도 띠 무늬와 같았으며, 버선의 코도 칼처럼 뾰족하여 그 모습이 이상하고 창피하여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지만 사람들은 제각기 호기를 부리고 다녔다. 혹 하얀 옷을 입고 상투를 한 사람들은 도리어 기가 죽어 옛날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8. 민영환의 혈의생순

 

민영환이 자결한 후, 그가 자결할 때 사용한 칼과 피묻은 옷을 령상 뒤에 있는 마루에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달 중에 그의 부인 박씨가 그 옷을 볕에 말리기 위해 가보니 새 죽순이 그 하의에 돋아나 있었다. 그 죽순은 네 개의 떨기에 아홉 개의 줄기가 있었으며 가늘기는 벼 마디와 같고, 뿌리와 줄기는 실과 같이 가늘어 청판과 유지 사이에 뿌리를 의지하고 있으면서 겨우 대나무 모습을 이루고 있었으나 너무 약하여 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성안 사람들은 모두 와서 구경하여 10일 내지 한 달 동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서양의 상인들도 와서 처음 자결할 때와 같이 술을 따라 놓고 곡을 하기도 하였고, 도성 사람들도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목판에 새기어 팔았으며, 청나라 사람들도 그 광경을 시로 읊어 우리 나라로 온 사람들은 시권을 만들기도 하였다.

 

9. 윤근수의 묘 도굴

 

월정윤근수의 묘소가 도굴되었다. 도둑들이 떠난 후 옥곤 1개, 옥합 1개가 남아 있었다. 그 묘는 장단에 있다.

 

10. 의화군을 왕으로 책봉

 

6월, 의화군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11. 러시아 영사프란손의 내한

 

러시아 영사프란손(Plancon)이 내한하였다.

러일 양국이 개전할 때 공사파블로프가 국기를 내리고 귀국하면서 그 기물을 프랑스공관에다가 맡겨 놓고 갔었는데, 그 후 화의가 체결되자 러시아는 다시 영사를 보내었다. 이때 수행원은 남자 2명, 여자 1명이었다.

 

12. 일본의 이민조규 반포

 

이민조례를 반포하였다.

일본은 수년 이후 날마다 그 국민들을 우리 나라로 보냈다. 그 수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자유로 우리 한국을 건너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후 륵약이 체결되자, 그들은 또 우리 국민들이 저항할 것을 걱정하여 우리 국민도 그들의 나라에 섞여 살게 하기 위하여 정부를 협박하고 이 규례를 반포하여, 자국의 이민을 불문에 부치고 우리 백성들이 외국으로 가려고 할 때도 그대로 들어주었다. 반드시 일본으로 가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민에 응모된 사람들은 먼저 그 가족 수에 따라 돈을 납부하게 하고 그 문서도 소지하게 하였으며, 이를 어기는 사람들은 처벌하였다. 그 뜻은 우리 국민 한 사람과 한 가족을 막론하고 한 집이 떠나면 한 집이 이민을 오게 하여 그들의 관리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을 내보낼 때도 강제로 이민을 시키지는 않았다.

이에 유언비어가 날로 전파되어 그들은 장차 우리의 인종을 바꾸기 위해 우리 국민을 배에 실어다가 바다에 버린다고 하므로 원근이 모두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일본이 교사를 부려 우리 국민을 우ѭ՘고, 우리 국민의 이목을 현혹하여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자급자족을 못하게 하고 스스로 빈약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실로 한 강제성을 띠어 반드시 이민을 하도록 내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시행한 것은 조령모개식이었다. 그것은 모두 이민의 예와 같은 것이다. 이때 일본인 령목요태랑은 이민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13. 대안문의 개칭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개칭하였다. 이 문은 경운궁의 정문이다.

이때 전비서승류시만이란 사람은 겸암 류운룡의 사손으로, 그는 유운용의 비결을 얻어 300년이나 된 묘소를 이장한다고 하면서 또 허위 첨서를 조작하여 남모르게 옛 광내에다 묻어놓았다가 그것을 파내어 은밀히 고종에게 바치었다.

그 첨서를 대충 말한다면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안동의 신양면으로 천도를 하면 국운이 연장된다고 하였다. 고종은 이 말에 현혹되어 꿈에 그런 징조가 있었다고 말하고, 즉시 그 대안문의 이름을 바꾸고 또 많은 금전을 유시만에게 주어 행궁을 지으라고 하였다. 이에 류시만은 그 돈을 자루에 담아 가지고 와 졸부가 되었으나 고종은 그것을 불문에 부쳤다.

 

14. 진해와 영흥에 군항을 개설

 

일본인이 경남 진해만과 함남 영흥만을 강제로 빼앗아 그들의 군항으로 삼고 우리 군사기능이 확장되면 반환키로 하였다. 이때 웅천은 진해와의 거리가 수백 리나 되었지만 그들은 그곳까지 항역으로 편입하여, 그곳의 아전과 백성들은 난리를 만난 듯이 모두 흩어졌다.

 

15. 정봉시 등 관찰사 임명

 

정봉시를 함남관찰사, 윤길병을 충북관찰사, 성기운을 경기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6. 군수의 월봉 증액

 

다시 군수의 월봉을 증액하였다.

 

17. 경기 한발

 

경기도에 한해가 심하였다.

 

18. 문의군의 산수용출

 

문의군 월산동의 냇물 가운데서 신물(산수)이 솟아나왔다.

 

19. 함흥부의 대사 소동

 

함흥부에 구각이 있었다. 그곳은 태조가 말을 타고 활을 쏜 곳으로, 그 각 위에 보기가 있다고 하여 역졸인 일본인이 두어 발 정도 땅을 파 보았다. 그곳에는 반석이 있었고, 그 반석을 깨자 큰 뱀이 나는 듯이 밖으로 나왔다. 뱀의 길이는 40자 내지 50자 정도 되었으며, 크기는 대들보(옥량)의 4~5배나 되었다.

이때 일본인 한 사람이 총으로 뱀을 쏘았으나 맞지 않자, 다른 일본인 6명이 일제히 총을 쏘아 죽인 후 동문 밖에서 소각하였다. 그 냄새가 매우 고약하였고 푸른 기운이 온 성을 뒤덮었다.

그날 밤, 총을 쏜 일본인 7명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또 뱀 하나가 반석 사이에서 나왔다. 크기는 어제 죽은 뱀과 같았다. 그 뱀은 아무리 총을 쏘아도 맞지 않았다. 뱀은 성을 날 듯이 빠르게 돌면서 밤이 새도록 슬프게 울었다.

 

20. 일본인의 목축장 설치

 

7월, 일본인들은 평양, 강동, 상원 3개 군의 경계에다가 길이 70리, 넓이 60리 지역을 대한목축장으로 지정하여 우리 국민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21. 최익현의 대마도 구류

 

8일, 일본인들은 최익현을 대마도에 수감하였다. 최익현은 림병찬 등과 사령부에서 두 달 동안 있을 때 일본인을 저항하여 굽히지 않자 일본인은 등수를 나눈 후 죄를 정하여 금기술 이하 9인은 답형 100대를 가하여 석방하고, 고석진, 최제학 등은 4개월 동안 더 수감하였으며, 최익현, 임병찬 등은 대마도의 위술영에 구류하므로 그분들이 떠날 때 전송을 나온 문인, 자제, 신사 및 사림들의 수는 3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목이 쉬도록 통곡을 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웃으면서 “그대들이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거듭 나에게 부끄러움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고 즐거운 듯이 떠났다.

이때 최익현의 아들 최영조와 임병찬의 아들 림응철이 부산까지 따라가므로 일본인들은 칼을 휘두르며 그들을 쫓자 최영조 등은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이에 앞서 민종식이 패배할 때 그의 휘하 리식, 리준근, 신현두, 리상두, 남경천, 안항식, 최중일, 문석환, 신보균 등 9명이 체포되었는데, 일본인들은 그들을 위술영으로 보내 수감하였다. 그들을 파수하는 일병들은 그들을 매우 가혹하게 학대하여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으나, 최익현이 그곳을 도착하자 그 일본인들은 매우 공경하여 감금을 조금 늦추므로 리식 등도 그의 덕을 많이 보았다.

 

22. 전대사성금상덕의 자수

 

전대사성금상덕은, 민종식이 일병을 토벌하려는 음모에 가담하였다가 평리원에 자수하였다. 그가 올린 진정소는 대충 다음과 같다.

“신은 불행히도 지난해 겨울인 10월의 변을 만나 자결을 하려고 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올 4월에 전참판민종식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로 들어가서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서신을 신에게 보냈습니다. 신은 홍주 사람이므로 의리상 국난을 피할 수도 없고 또 구차히 살 생각도 없었으므로 신은 강개히 그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은 의병을 일으킬 역량도 없으며 단 한 번 죽음을 결심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 의병이 도주할 때, 신은 실신하여 죽지 않았으므로 즉시 법원에 자수하여 왕법으로 처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법원은 공연히 헛소문만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신이 간직하고 있는 의리는 차라리 시궁창에 빠져 죽을망정 결코 일본 사령부의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동서를 누비며 자취를 감추었지만 하루를 더 살면 하루의 욕을 더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들은 말에 의하면 로성 등지에서는 민종식의 여당이 백성들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한다고 합니다만 이것은 도둑 떼들이 의병으로 위장하여 하는 일 같습니다. 그러나 민종식이 만일 지휘한 사실이 있다면 신은 지난날 그와 의거를 같이한 사람으로서 신이 그 사실을 잘 모르는 지금, 흑백을 잘 분간할 수 없어 욕상가욕이 되므로 일본인의 포로가 되는 것도 걱정할 여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석고대죄를 하면서 평리원에 수감되어 있으니 폐하께서는 속히 부월을 내리시어 신으로 하여금 일인의 옥귀를 면해주시면, 이것은 신의 영광뿐 아니라 실로 국가의 올바른 체통이 설 것입니다.”

이 상소가 들어가자 그를 10년 동안 유배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최상하란 사람은 10년 동안 금상덕의 문하에서 수업을 한 사람으로, 김상덕이 수감되자 그는 의리상 혼자 죄를 면할 수 없다고 하면서 김상덕과 같은 죄를 내려 달라고 자원하므로 5년 유배를 선고하였다가 그 다음해 2월에 모두 석방하였다.

 

23. 의친왕궁의 어기획급

 

경남 연해군의 어기를 의친왕궁에 획급하였다.

 

24. 강호의 저서

 

량산 사람 강호가 두 종류의 저서를 냈다. 하나는 <역계조변>이며, 하나는 <중용조변>이다. 그는 이때 정문을 증감하고 자구를 뒤바꾸어 그 책을 성균관으로 보냈는데, 관장 서상훈은 크게 놀라며 “사문에 처음 있는 변으로서 이것은 경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25. 제주목사조종환의 감태전매권 승인

 

지난해 제주목사조종환이 일본인에게 뇌물을 받고 감태전매권을 승인해 주었는데, 이때 이등박문은 한국민의 실업이 염려스럽다고 하면서 전매제를 폐지하여 우리 국민들에게도 감태채취 및 전매권을 허락하여 두루 이익을 보게 하였다. 그는 교활하여 적은 혜택을 주고 생색을 내는 것이, 이와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26. 지방관제의 개정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각항의 감리를 부윤이라 하고, 강화, 광주, 개성 등 3개 부윤은 군수로 개칭하였다.

 

27. 침상황 등의 엄비승황후소청

 

침상황 등이 상소하여 엄비를 황후로 승격하자고 간청하고, 그들은 또 고종에게 다시 재취를 간청하기도 하였다.

 

28. 충청남북도의 호우

 

충청남북도는 3일 동안 호우가 내려 물동이를 부은 것과 같았고 전례 없이 사태가 발생하였다. 북쪽으로 한강으로 들어간 지류는 수고가 24척 5촌이었으며, 남쪽으로 금강으로 들어간 지류는 산더미와 같았다. 이때 침수된 전답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고, 표호는 1만여 호나 되었다. 그리고 사진 강경포에는 두 교룡이 나와 싸우며 큰 냇물을 가로막고 있어 그 역류는 수십 리를 범람하였다.

옛날부터 민간에는 “초포에는 배가 다니면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된다”는 참언이 있어 시사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때 강경포가 범람하여 초포에 배가 다닐 조짐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때 조병호는 상소하여 백성들의 숨은 고통을 열거하였다.

 

29. 류맹 등 위유사 임명

 

공주군수류맹과 진천군수리탁응을 충청남북도의 위유사로 임명하여 그 표호를 위로하고, 수재 및 사상자를 조사하였다.

 

30. 평리원 연못의 적탁

 

평리원고등재판소를 광무 3년(1899)에 고쳐 일컬었던 이름. 편자주 연못(련지)의 물이 연일 붉고 탁한 색으로 변하였다.

 

31. 도군 경계의 개정

 

13도의 도군 경계를 개정하여 문의는 충북으로 속하고, 울릉도는 경남으로 귀속하고, 구례는 전남, 흥덕, 고창, 무장 등지는 전북으로 귀속하였으며, 그 군계는 갑지가 을군에 있는 곳은 비래면, 병지가 정군에 들어간 곳은 두입면이라고 하여 각각 그 부근 지역에 귀속하고, 또 관찰부는 도로 개칭하여 참서관과 통역관을 두어 제도가 복잡하므로 어떻게 기준을 둘 수가 없었다.

 

32. 민종식 부하의 활약

 

민종식의 패졸들이 해로로 부안의 줄포면에 도착하여 일본 상인의 가옥 2호를 소각하고, 또 고창의 선운사에 도착하였을 때 흥덕 및 고창군의 병대들에게 습격을 당하여 모두 도주하였다.

 

33. 박이양, 권익상 등 관찰사 임명

 

안악군수박이양을 황해관찰사, 부안군수권익상을 강원관찰사, 한진창을 경북관찰사, 금규희를 전북관찰사로 임명하고 리시영을 평남관찰사로 기부하였다.

 

34. 전라도의 은결사찰

 

전라도의 은결을 사찰하여 2,800여결을 발견하였다. 경자년(1900)에 개량한 이후 이미 7년이 지났지만 그대로 방치하여 시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각군의 은결도 혹 상공보다 많았지만 관리들이 서로 짜고 죽을 때까지 은폐하였으므로, 결국 10분의 1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35. 리강의 곤궁책봉 권유

 

8월, 의친왕강이 초8일 일본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 도착한 후 고종에게 전화를 걸어, 황후의 책봉이 동궁의 재빙보다 더 시급하므로 먼저 곤궁을 책립하고 그 후 황태자의 가례를 치르라고 아뢰었다. 그것은 리강의 처지가 위태롭기 때문에 자신이 엄비에게 의탁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리강의 장인인 금사준은 성품이 본래 유순하고 근신하였는데, 이강이 환국한 후 동비들의 여망을 받고 있다는 뜬소문이 있어 많은 부랑배들이 김사준의 집을 방문하였으나 그는 버젓이 귀척으로 자처하였다.

 

36. 위술사령부의 설치

 

위술사령부를 설치하여 경외제도에 그 조례를 반포하였다.

 

37. 13도의 세무감 설치

 

13도에 세무감을 설치하여 관찰사들에게 겸직하게 하고 또 세무관 36명, 세무주사 144명을 두었다. 옛날처럼 결정과 세전이 수령과 리서들의 손에 돌아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38. 서북 삼림회사의 설치 여론

 

일본인과 협약을 체결할 때, 제각기 자금 120만 원을 출자하여 서북 지방의 삼림회사를 개설하자고 제의하였다.

 

39. 화폐통용법 설정

 

화폐통용법을 설정하여 10원 이하는 새 은화를 사용하고, 2원 이하는 백동화를 사용하였으며, 1원 이하는 청동전을 사용하되 엽전은 지방만 사용하였으며, 1원 이하도 엽전 사용을 허락하였으나 각기 제한을 두어 서로 주고받을 때 거절하지 않았지만 오직 제일은행권은 무제한 통용하도록 하였다.

 

40. 일본승려 보도의 원흥사 창건

 

일본 스님 보도가 흥인문 밖에다가 원흥사를 창설하여 13도의 사찰을 관할하고 영친왕은을 대법주로 추대하였으며, 또한 정부를 모방하여 각 국과 과를 두어 교권을 확장하였다. 보도는 일본 태자인 우서로, 그가 가지고 온 금화는 100만원이나 되었다.

 

41. 역둔토의 탁지부 귀속

 

목하전종태랑이 내장사에서 관리한 각도의 역둔토를 탁지부로 귀속하였다.

 

42. 이등박문의 일본 적십자사 명예의원 간청

 

이등박문이 고종과 태자에게 일본 적십자사 명예의원이 되어 주기를 간청하였다.

 

43. 13도의 검사 증원

 

13도 재판소의 검사를 증원하고, 또 평리원에 보좌관을 두었다. 그곳은 한성부 이외의 관찰사가 있는 도와 부윤, 항구, 제주 등 23개처로서 모두 일본인을 고용하였다. 이것은 이등박문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이등박문은 광제원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서 사용한 두종과 우장을 엄금하여 일체 일본 동인회에서 무역하여 사용하게 하고, 또 한국인은 청결법을 모른다고 하면서 일본인을 고용하여 각부에서 청소를 하게 하였다. 그는 우리의 일에 대하여 공사를 막론하고 이익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적은 이익이라도 이렇게까지 빠뜨릴까 두려워하였다.

 

45. 서상규, 구우영 등의 거의

 

서상규와 구우영은 포의였다. 그들은 5적을 살해하기 위해 폭약을 구입하려 리근택에게 시험을 하려다가, 서투른 솜씨로 불리한 일을 당할까 싶어 북한산으로 들어가 남모르게 연습을 하다가 그 일이 발각되었다.

또 안동에 사는 박량래란 사람은 떠돌이 의사 노릇을 하면서 룡천전덕원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때 그는 홍주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려고 하다가, 의병이 패했다는 소식이 다시 전해지자 전덕원 및 의주진사 홍재기 등과 함께 강계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응모한 사람이 없었다. 이때 일본인들은 그들을 살피고 있다가 서상규 등을 모두 체포하여 수감하였다.

리근택은 5적 중에서 가장 교사하고 악랄하였다. 그는 장곡천호도와 의형제를 맺고 또 이등박문의 의자가 되어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일본 신을 신고 일본의 차를 타고 다니면서 출입을 할 때는 일병들이 그를 호위하였다. 하루는 어떤 취객이 그의 차를 잡고 그를 흘겨보면서 “나는 왜놈인가 했더니 이근택이로군… 5적의 괴수로서 그 영화가 이것에 지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이근택은 크게 화를 내며 그를 결박하여 경찰서로 보냈다. 그는 갖은 악형으로 몇 번이나 기절하였다가 한밤중에 다시 깨어나 “이 역적은 나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 나를 명백하게 꾸짖어 주면 죽더라도 통쾌하겠다. 그러나 그 역적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자결하겠다”라고 한 후 옷을 찢어 그 천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46. 민형식, 민병한 등의 석방

 

일본인들은 민형식, 민병한, 민경식, 홍재봉, 리봉래, 조남승 등을 석방하였다.

홍주의 싸움에 일본인들은 민씨들이 남모르게 호응을 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중 홍재봉 등도 의심을 받아 모두 수감되었으나, 그들은 모두 광적이고 방자한 사람으로 의거가 무엇인 줄도 모르는 데다가 수개월 동안 아무 의심받을 만한 증거가 없고, 또 각국에서 일본인들을 좋지 않게 논평을 하기 때문에 그들을 석방하였다.

 

47. 궁궐의 경포 설치

 

일본인들은 대궐 안에 경포를 설치하였다. 큰 경포는 5개, 작은 경포는 3개를 설치하여 이 것을 일정한 규칙으로 정하였다.

 

광무 10년 병오(1906년) ④

 

1. 원세순, 장호신 등의 황후 책봉 간청

 

재신 원세순, 장호신, 로영경 등이 상소하여 엄비를 황후로 책봉하자고 간청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그들을 3귀로 지목하였다. 장호신과 노영경은 모두 영남 사람이다.

 

2. 리지용의 산삼사기

 

리창원이란 사람이 산삼을 캐어 남중희에게 팔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리지용은 이 소문을 듣고 남중희를 유인하기를, “나에게 그 산삼을 주면 군수 한자리를 주겠다”고 한 후 그 산삼을 달여먹고 큰 효험을 보아, 하룻밤에 두 여자를 거느렸다. 그러나 그가 결국 군수 자리를 주지 않아 이창원은 남중희에게 고함을 지르며 “내 산삼을 돌려 달라”고 하였다. 이에 남중희는 이지용에게 고함을 지르며 “나에게 군수 자리를 내놔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지용은 거듭 말하기를,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내가 큰 것을 드리리다”라고 하였다.

리창원의 아우 모는 통감부에 고용된 사람이었다. 이때 그가 이등박문에게 그 사실을 호소하였다. 이등박문은 이지용을 꾸짖으며 금전으로 그 대가를 갚도록 하였다.

 

3. 이등박문의 아들 용길의 내한

 

이등박문의 아들 용길이 내한하여 그의 아버지를 배알하였다. 이등박문은 그를 데리고 폐하를 알현하였다.

 

4. 리극도의 양별 파가

 

가산민 리극도가 자기 집에서 자라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군수윤교영은 그것이 서구라고 하면서 바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극도가 바치려고 하지 않자 윤교영은 그를 위협하여 그의 가정이 거의 파산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그는 그 자라를 조정으로 바치었으나, 내부에서는 물에 넣어 살려 주었다.

 

5. 전주 관제묘의 영험

 

전주에 있던 일본인 5명이 관제묘에 들어가서 그 소상을 희롱하다가 모두 피를 토하고 사망하였다. 이때부터 그 요기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이 잇달아 발생하자 일본인들은 크게 놀라 타군으로 피신해 있다가 1개월 후에 다시 돌아와 결국 무사하였다.

 

6. 려수 동헌의 괴귀출현

 

일본인들이 려수군으로 들어가 동헌에서 거처를 하고 있었는데, 하룻밤에는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그 크기는 수십 장이나 되고, 몸은 큰 집채와 같아 사납고 추하게 생긴 데다가 칠을 해 놓은 듯 검게 보였다. 그는 느긋이 몸을 굽혀 처마를 엿보고 있었다.

이때 일본인들은 크게 놀라 잇달아 대포를 쏘았다. 그는 맞아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더욱 놀라 다시는 대포를 쏘지 않았다. 그는 잠시 후에 갑자기 나가면서 한탄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는 그 다음날 밤에도 왔다. 일본인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감히 기운을 내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그 괴물이 떠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

그 다음날 일본인들은 도주하여, 다시 그곳을 오지 못한 지가 1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7. 강화의 홍릉도굴

 

울산군에 흑연맥이 발견되었다.

고려의 홍릉이 도굴되었다. 그 능은 강화군에 있으며, 고종의 능이다.

 

8. 이두삼목묘

 

인천항에 있는 일본인 집에서 기른 고양이는, 머리가 두 개이고 눈이 세 개인 새끼를 낳았으나 그 어미 고양이가 물어 죽였다.

 

9. 영호남의 상재

 

17일, 원산항에는 눈이 내리고, 영남과 호남의 이남 지역에는 서리가 일찍 내려 벼들이 많이 손상되었다.

 

10. 홍콩의 태풍

 

청국 향항에 심한 바람이 불어, 닉사자가 2천여 명이나 되었다.

 

11. 포왜의 화산

 

미국의 영토인 하와이에서 바다 수십 리에 큰 지진이 발생하므로 고기가 모두 타 죽어, 물위에 뜬 고기가 수천만을 헤아렸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바다 밑에 화산이 있다고 하였다.

 

12. 윤  , 금희수 등의 엄비승후불가소

 

9월에 윤  , 금희수 등이 13도의 신사와 사림들을 거느리고 엄비를 황후로 책봉할 수 없다는 상소를 다음과 같이 올렸다.

“로영경, 원세순, 장석신 등이 올린 승후소에 대하여 그 비답을 보면, 비록 윤허할 뜻은 없었지만 너무 지나치게 생각한 점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성상께서 혹 확고한 결정을 하지 못하여 간세배들이 기회를 엿보는 길을 열어줄까 염려되옵니다.

아! 저…노영경, 원세순, 장석신 등 3적은 방례의 대방을 생각지도 않고, 감히 우리 숙종대왕의 금석 같은 전장을 어기어 이와 같이 란역의 말을 서슴지 않고 성상을 현혹하였으니 그 죄를 국법으로 미루어 볼 때 무슨 죄목에 해당하겠습니까? 지금 이 비답은 너무도 우악하여 혹 해볼 만한 일 같이 여기면서 속히 서두르지 않는 듯하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도 크게 불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 등이 모르기는 하지만 폐하께서는 한밤중 잠이 오지 않으실 때 혹 숙종조에 죄를 짓고 만세에 웃음거리를 남겨 그것이 크게 부끄러운 일임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폐하께서는 국가의 전례에 있어서 멀리는 명나라 조정을 생각해 보시고, 가까이는 선왕을 생각해 보시면 추호도 감히 어길 수 없는 일인데, 오직 이 일에만 착안하시어 좌우를 고면(고면)하는 불안함을 면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으니 신 등은 명나라 및 선왕조에서 시행한 전례를 돌이켜보고 그 다음으로 폐하 및 동궁이 편안하기 어려운 이유를 10개 조목으로 아뢰겠습니다.

그 첫 번째는, 명의 태조는 마황후가 붕한 후 수십 년 동안 그의 총애를 받은 비, 빈이 없지 않았으나 황후를 책봉해야 한다는 여론을 듣지 못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본받을 일이 아닙니까 ?

그 두 번째는, 우리 숙종조에서는 후궁을 정위에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위로 태묘에 고하고, 아래로 만세에 훈계하여 이것을 국가의 금석 같은 전장으로 정하였으니 폐하께서 이 3인의 역적을 처형하지 않고 혹 그들의 말을 따른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숙종의 묘우에 들어갈 수 있으며, 무슨 말로 하늘에 계신 28세의 선대왕들의 영령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 세 번째는, 영조대왕은 그 효성이 다른 왕들보다 우월하여 육상궁의 전례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으나 추숭하자는 여론을 듣지 못했으며, 순조황제는 가순궁을 받들고 있을 때 온갖 효성을 다하였으나 정위에 올리자는 여론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상궁과 가순궁은 대왕을 기르시어 그 공덕이 매우 높았지만 대호를 받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엄비는 폐하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어머니에 불과한 분임에도 지금 만일 육상궁과 가순궁에게 시행하지 않았던 전례를 엄비에게 베푸신다면 이것은 숙종조에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영조, 순조에게도 매우 미안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 네 번째는, 삼가 국조의 전례를 참고해 보면 오직 현덕, 안순, 정현 등 세 왕후가 후궁으로서 정위에 올랐지만 현덕왕후는 동궁으로 뽑히어 들어간 후 단종을 낳으셔서 빈으로 받들다가 폐하였기 때문에 왕후로 책봉하였으며, 안순왕후도 동궁으로 뽑혀 들어간 후 장순왕후가 후사를 두지 못하고 훙(훙)하였으므로 정위에 을랐으며, 정현왕후도 대내로 뽑혀 들어가 중종을 낳은 후 연산군의 모친을 폐출한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숙종 이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명칭이 비록 후궁이지만 이분들은 어린 나이로 명문 가정에서 선발된 후 예의를 갖추어 입궁하였으므로 부득이 그렇게 하여 정위에 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민가의 여자로 상궁이 되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오직 장희빈뿐이었으나 그 후 얼마 안되어 다시 그 위호를 빼앗았으니 이렇게 발생한 불상사는 그 예를 들지 않아도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입나다. 하물며 장희빈이 정위에 오를 때는 이미 경종을 낳았으므로 이분은 저군의 사친이었습니다만 그 후 숙종은 이 일을 매우 후회하여 종묘에 고하고 또 훈계를 하여 자손들이 대대로 지킬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물며 엄비가 당초에 상궁이 되는 것은 장희빈과 다를 바 없고 낳으신 영친왕도 저군과는 크게 다르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 다섯 번째로, 지금 과시를 치른 사람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황태자의 가례가 앞으로 있으니 그 조알을 하는 것도 례이며, 헌조와 헌포도 례이지만 곤전이 없으면 한 당상에서 함께 림어하는 자리에는 모두 올릴 수가 없는 것이 매우 큰 흠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찌 이토록 불경스럽고 무례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헌포의 예는 경효전에서 시행한 일이 있는데, 어찌 곤전이 있고 없고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부황이 혼자 헌포의 예를 받는 것이 흠이라고 한다면 렬성조 이후 대비전 혼자서 헌포의 예를 받는 례가 일찍 없었습니까? 이미 시행한 례가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다면 지금 폐하께서 흔자 조와 포를 받는 것은 조금도 이의를 달 필요가 없으며, 또 천자의 례는 전일과 자별한 것이라고 한다면 명의 태조는 적서를 막론하고 아들이 26명임에도 마황후가 승하한 후 곤전이 오랫동안 비었으나 그 아들들의 혼례를 치를 때마다 혼자 헌조의 예를 받는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가에서 통행된 예를 말씀드린다면 홀아비가 아들의 혼례를 치를 때 혼자 조례를 받는 것은 이미 관례가 된 일인데, 만일 이런 경우를 흠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첩을 처의 자리에 앉혀 그 서모에게 자식의 예를 다하게 하려고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여섯 번째는, 우리 태조 이하 28조의 왕후는 젊은 나이로 명문에서 선발되지 않으신 분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명나라 16조에서도 빈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 황후로 참람히 오른 사람이 있고, 명나라 황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세계 각국의 예를 들더라도 귀족 이하는 처음부터 황후로 선발하는 예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궁녀로서 황후가 된 경우는 처음부터 인거할 수 있는 예가 없는데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일곱 번째는, 황태자의 나이는 이미 40세가 지났는데 30년 전의 엄상궁을 대하여 하루아침에 소신이라고 칭하고, 그를 모후라고 부르며 곤전의 어석 밑에서 몸을 굽혀 4배를 올린다면 그것이 천리와 인정에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시겠습니까? 편안치 않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명성황후의 영령이 지하에서 알고 있다면 어찌 측연히 민망한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 말을 하고 보니 한없이 통곡만 하올 뿐입니다.

그리고 그 여덟 번째로는, 만일 폐하께서 이런 일을 이행하시면 천추만세 후에는 명성황후의 주패도 평일 시녀 및 상궁의 신주와 함께 한 사당에서 배향될 것이니 명성황후의 그 혁혁한 영령이 어찌 진노하지 않겠으며, 어찌 종묘의 제향을 함께 받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아홉 번째는, 황태자는 을미사변과 같은 망극한 변란이 발생한 이후 그 원통함을 참고 살면서 오직 의지한 것은 부황폐하인 엄부 및 자모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적신들은 그 망측한 일을 시험하기 위해 종종 분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 예충을 상상해 볼 때 오직 대조가 어떻게 처분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만 갑자기 지존의 앞에 나가 모두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또한 현저히 적신들을 질타하기도 어려워 반드시 배회하면서 마음이 편안치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만일 한가한 여가가 있을 때, 이 일을 조용히 물어보시면 그 지극히 깊은 마음을 다 아실 수 있게 되어 신의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번째는, 숙종의 어진을 이미 진전에 봉안하고 있습니다만 전날 엄상궁이 만일 황후가 되어 그 제향을 주관하였다면 하늘에 있는 숙종의 영령이 그곳을 오르내리며 순수한 복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도 어찌 편안히 앉아서 멀리 바라본 사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신은 이 10조 이외에도 다시 아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황귀비가 상궁에서 빈이 되고, 그 후 또 비가 되어 지극히 높은 후궁의 직위까지 이르렀으니 그 명예와 직위에 있어서 아무런 해가 없으며, 복록에 있어서도 조금도 과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6궁을 잘 다스리어 그 덕망에 아무 과실이 없으면 그 명예와 규범도 천추의 역사에 빛날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영친왕께서도 영민하고 성숙하여 명성이 날로 높아가고 있으니, 만일 옳은 방법으로 교육을 하여 덕성을 배양해 간다면 후일 제실의 번병이 되고 왕유를 협찬하여 하간의 동평왕처럼 오로지 옛날에만 미명을 떨치는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황후의 책봉 여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영친왕이 후일 누릴 복록에 대해서는 아무런 손익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만일 이 일을 반대하지 않고 국법을 어기고 공의를 경시하여 귀비에게 부당한 명위를 가하여 분수에 지나친 위복을 누리게 한다면 이것을 융성한 위복을 조심하는 도리가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 등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황귀비를 위하고 영친왕을 위해서 하는 말이오니 폐하께서는 거국의 공론을 굽어살피시고 속히 그 3인의 역적들을 처형하여 란신적자로 하여금 우리 숙종의 대의를 범하지 말게 하시기 바랍니다.”

 

13.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의 창립

 

9월, 관서인이 서울에서 서우학회를 창설하고 이를 이어 관북인도 한북흥학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기호, 량남 및 관동에서도 차례로 학회 붐이 일어나 모두 서울에 본회를 두고 각군에 지회를 두었다. 이때 국내에는 학교와 사회 등에 교육기관이 많이 발족되어, 학교는 관서 지방에서 많이 설립되고 룡천의 한 군에서는 20여 구나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때 관립과 공립은 일본인들이 규제하여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였고, 오직 사립만 그들의 구속을 받지 않았으나 그 사립도 재정이 궁색하여 중지한 사례가 속출하였으며, 사회는 문학과 종교를 비롯하여 공예, 미술 등에 이르기까지 그 명칭이 말할 수 없이 많았지만 그것을 주관한 사람들은 안면을 바꾸어 현란한 명목으로 이익을 챙기어 진실한 마음으로 유지, 운영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단체들은 말만 앞세운 것에 불과하였고, 그 경상을 외치는 사람들도 송곳 하나와 칼 하나라도 서로 챙기어 오래 지속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또 그 이윤마저도 일본인들이 차지하여 우리 국민의 소득은 빈 껍데기만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개화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 그 효과는 바람을 잡는 격이 되었지만 보고들은 것은 조금 변하였고 사상도 조금 새로워져서 종종 학교와 사회를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 갑오경장 이전에 비하면 매우 달라진 점이 있었다.

 

14. 각군주사제 설치

 

각군의 향장제를 폐지하고 군주사를 두어 군수가 유고할 때는 그를 서리로 임명하였고, 그들을 임명할 때는 군수가 그 군에서 유사와 리서를 막론하고 내부로 추천하였다.

 

15. 백악구의 거의와 기우만의 연루

 

전주사백악구가 일본인에게 체포되어 광주에서 수감되었다.

백낙구는 전주 사람이다. 그는 갑오년(1894)에, 초토관으로 남도에서 동비를 추적하여 그들을 모두 섬멸한 후에 청국으로 들어가 료동과 심양을 왕래하고 있었으나, 안질로 인하여 본국으로 돌아와 광양의 산중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이때 의거를 모의하여 동지 10여 명과 함께 산촌민 수백 명을 모집한 후 20일 밤에 순천을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중도에 모일 날짜를 잘못 전하여, 그 다음날 날이 환하게 밝아도 그 군중이 모이지 않으므로 그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가, 구례군수송대진에게 체포되어 그를 추종하던 7명과 함께 순천을 순찰하던 일병들에게 회부되었고, 이들은 다시 순천에서 광주로 수감되었다.

그리고 처음에 기우만은 백악구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 후 백낙구가 체포되어 기우만이 연루되자, 그는 공모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대질신문을 할 때 매우 겸손해 하며, 일본을 일컬어 「저 나라」라고 하였다. 이때 백낙구는 그를 「축생」이라고 크게 꾸짖고, 분연히 붓을 꺼내어 다음과 같온 공사를 써냈다.

“아! 오늘의 대한은 누구의 나라입니까?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일본 공사삼포오루는 함부로 병대를 대궐에 들여보내어 세계 각국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실망을 하였고, 8역의 국민들은 그 통한이 뼛속 깊이 사무쳤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나도록 윗사람은 복수를 거론한 사람이 없었고, 아랫사람도 그 치욕을 씻자는 여론을 펼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이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이등박문은 더욱 우리를 경모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억압하여, 자칭 통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통치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감시할 만한 일은 무슨 일입니까? 우리 500년 종사와, 삼천리의 강토와, 이천만의 생령은 모두 린국의 적신 이등박문이 빼앗아 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수그려 그 원한을 외쳐 보지도 못하고 한결같이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에 백악구가 힘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의용군을 모집하여,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일본인들을 쫓아내고 또 이등박문을 처형하고 최익현 등 제공을 환국시키려고 하였으나 시운이 불리하여 먼저 체포되었으니, 패군지장은 죽는 길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16. 백악구의 사망

 

백악구는 두 눈을 실명하여, 전투를 할 때는 언제나 교자를 타고 일병을 추격하였다. 그리고 패할 때도 이 교자를 타고 도주하여 세 번이나 체포되었는데, 그는 결국 대포를 맞아 사망하였다. 광양 사람를은 지금도 “백낙구는 발발한 기운이 있었다”고 말한다.

 

17. 기우만의 공사

 

기우만의 공사는 대충 다음과 같다

“지난 을미년(1895), 망극한 국변을 치를 때 기우만은 렬군에 통고하여 대의를 펴려고 하였습니다만 그 적신들은 황상과 내통하여 강제로 선유하였으므로 통곡을 하고 귀향하였으나, 차마 집으로 들어가 처자를 보양하지 못하고 산중으로 들어가 초옥을 한 채 지은 후에 친히 나무를 하며 자급자족하였습니다.

<춘추>의 대의에 의하면 “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장」이라고 쓰지 못하고, 「장」이라고 쓰지 못하면 상복을 벗지 못한다”고 하였으므로 지금까지 하얀 상복을 입고 와신상담(와신상담)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은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작년 겨울, 생각지도 않았던 5조약을 인준하였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황상께서 한 조각의 빈 종이로 인하여 앉아서 나라를 잃고 있었지만,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한 사람도 그 손에 든 판자로 5적을 쳐죽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러고도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역량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감히 소장에 그 사실을 아뢰어 우리 군신과 부자가 한번 성을 등지고 싸우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적신들이 그 청을 거절하여 황상께서는 그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으므로, 문을 닫고 병을 앓고 있은 지가 지금부터 5개월이 되었습니다.

이때 백악구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그의 얼굴은 비록 보지 못했지만 마음은 서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아름다운 명분을 혼자 천명하기 어려워, 그를 불러 지시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허명을 퍼뜨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어찌 구구히 말을 회피하여 화만 면하려고 하겠습니까 ?

아! 사람은 자신이 자신을 업신여긴 후에 남들이 자신을 업신여기고, 국가도 자국이 자국을 정벌한 연후에 남의 나라가 정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진나라가 아니라 자란이었으며, 오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월나라가 아니라 백희(백비)였으며,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5적들이었습니다.

아! 저…5적들은 머리털을 뽑아 그 죄를 세어 보더라도 그 죄를 다 셀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의 살을 베어 먹더라도 그 분통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의리를 조금이라도 알게 하려면 당연히 그들을 처형하여 그들 나라의 신하들을 격려해야 할 텐데 도리어 그들을 돌봐주며 훅훅 불어주고 있으니, 어찌 이런 무리들이 이곳에만 있고 그들 나라에는 이런 무리들이 없답니까? 그러나 그들의 나라를 위하여 말한다면, 그 5적들을 체포하여 우리 황상으로 하여금 조선신민에게 사죄하게 하고, 또 그들도 급히 그들 나라로 돌아가 내수에 힘쓰며 각 지방으로 하여금 편안한 생활을 하게 하면 이 두 가지가 모두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만일 나의 말이 옳지 않다면 나를 죽이시어 극락에서 선왕을 따르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른 말은 할말이 없습니다. 저는 일개 서생으로서 다른 기술은 하나도 없고, 다만 지키고 있는 것은 살아도 리씨의 신하가 될 것이며, 죽어도 이씨의 귀신이 될 뿐입니다.”

 

18. 일본인의 삼종신화 주조

 

일본인들이 3종의 신화를 주조한 후 대판조폐국에서 서울로 운반해 왔다. 20전 은화 4만원과 10전 은화 51,828원이다. 그리고 1전은 청동화로 5천원이었다. 이것은 중앙금고의 부탁에 의한 것이다.

 

19. 군부대신리근택의 수뢰

 

군부대신리근택이 경리원 서리로 임명된 후, 수조관을 각도로 보내어 약 100만냥의 뇌물을 바치게 하므로 이등박문은 그를 미워하여 강제로 경리원경을 교체하였다.

 

20. 리완용의 별궁지 매도

 

안동의 별궁 담밖에 공지가 있었는데, 리완용이 이 터를 일본인에게 팔았다.

그 후 이 일이 발각되어, 정부에서 일본인을 힐책하며 공사를 중지하도록 하자 일본인은 이완용에게 그 공사비를 갚게 하였다.

 

21. 민간의 총기세

 

민간인에게 총기세를 받았다. 1병에 신화 1원이었으나, 그 령은 이행되지 않았다.

 

22. 일본인의 국희장

 

일본인들이 9월 9일, 동경에 국희장을 마련하였다. 그것은 국화로 두 사람의 상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덕천가선이라고 써놓고 하나는 조선 국왕이 조회하러 왔다고 써 놓았다.

이때 우리 유학생들이 통곡을 하며 일본정부로 그 사실을 호소하여 그들의 무례함을 힐책하므로, 일본인들은 웃으며 그 놀이를 금지하였다.

 

23. 이등박문, 리근택 등의 선적비

 

신관희란 사람이 이등박문, 리근택, 박용화 등 3인의 선적비를 모화관이 있는 독립문 밖에 세워, 이등박문은 교린과 보호의 공이 있고 이근택과 박용화는 강력히 이민을 막은 공이 있다고 하였다. 이때 신관희는 영남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영남 유림들은 신문사에 서신을 보내어 그가 영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광무 10년 병오(1906년) ⑤

 

1. 영국인 베델의 매일신보 창설

 

영국인 베델이 서울에 신문사를 창설하여 이를 <매일신보>이라고 하고, 박은식을 주사로 맞이하였다.

박은식은 황해도 사람이다. 그는 본래 경술을 좋아하였고 또 신학에도 지식이 풍부하여, 무슨 일을 논할 때 그 근거가 확실하여 장지연과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이때 영국인들은 비록 일본과 동맹을 맺기는 하였지만 일본인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 그들을 꺼려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베델은 정부를 의지하고 신문을 발행하여 일본인을 꾸짖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박은식도 그들의 주필로 초빙된 후 숙원을 갚기 위해 마음대로 그들을 공박하여 아무 기탄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그들을 꺼려하여, 처음에는 우체사에 부탁하여 서울 밖으로 배달되지 못하게 하고, 또 박은식을 구속하여 사령부에 수감하였다.

베델은 크게 노하여 자신이 그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꾸짖기를, “당신들은 천하의 개명국이라고 자칭하면서 남의 신문을 금지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들이 박은식을 수감하는 것은 나를 수감하는 행위입니다. 당신들이 이와 같이 나를 걱정거리로 생각하면 나는 신문사를 철폐하겠지만, 나는, 우리 정부에서 시설비 30만원을 받아 이 신문사를 창설하면서 그 운영기한을 30년으로 하였으니 당신들이 나에게 철수를 요구하려면 나에게 30만원과 30년의 이자를 보상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겸손하게 사죄를 하면서 박은식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베델은 또 말하기를, “우리 신문사는 매일 수입금이 2천원으로, 지금 이틀 동안 정간하여 4천원이 되는데 이 금액은 누가 갚습니까?”라고 하자 일본인들은 “네네”하면서 4천원을 내주어, 베델은 그 4천원을 가져와서 박은식에게 주며 “당신의 술값이나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중외에서는 일본인의 소행에 격분하고 있었으나 그들에게 위축되어 감히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있었고, 각 신문사에서도 의병들을 폭도나 비류로 칭하였지만 오직 <매일신보>는 의병으로 칭하며, 그 논설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본인의 악행을 게재하여 들으면 들은 대로 모두 폭로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 신문을 구독하여 한때 그 신문은 품귀상태에까지 이르렀고, 1년도 못되어 매일 간행되는 신문이 7~8천장이나 되었다.

 

2. 리관일 전국경고문 부송

 

순천군의 보통학교생 리관일이 매일신문사에 전국인경고서를 보내왔다. 그 경고서에 그의 나이는 14세라고 하고, 또 이롱증이 있다고 하였으며, 그의 삼촌 한 분은 프랑스 파리에 있고 한 삼촌은 일본 동경에 있으며, 두 분의 삼촌과 두 분의 형 및 8세 된 아우는 미국 워싱턴에 있다고 하였다.

 

3. 각 신문의 미일 개전설 연재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이 필리핀의 속도를 엿보고 있다는 소문으로 국론이 비등하여 샌프란시스코의 학교에서는 일본인 유학생을 거절하고, 거리마다 젊은 청년들은 구호를 외치며 그들의 기숙사에 돌을 던졌다. 이에 일본정부에서는 공문을 보내 그들의 소란을 금지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미국인들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때부터 누차 미일개전설이 떠돌아 각 신문에 게재되었다.

 

4. 의병장 민종식의 체포

 

10월, 의병장 민종식과 전참판리남규가 금가진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송치되었다.

민종식은 홍주에서 패전한 이후 사방으로 숨어다니며 재기를 하기 위해 이남규의 집을 왕래하고 있었다. 이때 김가진은 충남관찰사로 있으면서 은밀히 그를 추적하고 있다가 그를 결박하여 사령부로 송치하였다. 그리고 민종식의 부하인 금덕진, 박윤식, 곽한일, 황영수, 정재호, 리용규 등은 모두 구속되었으나 이남규는 그와 호응한 흔적이 보이지 않아 석방되었다.

민종식이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자 그의 처 이씨는 도보로 상경하여 한 여비를 데리고 밥을 빌어다가 옥중으로 넣어 주었으나 민씨들은 한 사람도 그를 걱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문앞에서 부르면 모두 거절하였다.

 

5. 전승지금복한의 구금

 

전승지금복한이 홍주에서 수감되고 전주서박봉양은 전주에서 수감되었다. 이때 행인들의 말에 의하면, 김복한은 민종식과 호응하고, 박봉양은 백악구와 모의하였다고 한다.

 

6. 이등박문의귀국

 

이등박문이 귀국하였다. 이때 이등박문은 리근택과 리지용으로 하여금 황상에게 근일의 외교는 모두 이등박문의 힘이라고 설득하도록 하였다. 그는 국서에 모든 사실을 자세히 기술하여 계속 유임하기를 바란다고 하므로 고종은 그의 의견을 따랐다.

그리고 이등박문이 귀국한 후 장곡천호도가 통감부 서리로 있으면서 청국 영사마정량과 함께 서북간도의 지계를 정하려고 하였으나 그 일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7. 최석린, 고희경 등 군수 임명

 

최석린을 웅천군수, 고희경을 거제군수로 임명하자 그들은 즉시 길을 떠났다. 이등박문이 돌아온 후 그는 진해만을 답사한다고 하므로 우리 정부에서는 일본어를 잘하는 그 두 사람을 일본공관의 접반으로 보내었다.

희경은 고영희의 아들로, 그는 이등박문과 매우 친하였다.

 

8. 리홍경과 류옥향의 음행

 

리지용이 특파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갔다. 그것은 이등박문을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후 이지용을 수감한 것은 박영효의 사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지용의 아내 이씨는 자칭 리홍경이라고 하는데, 이때 그와 함께 갔었다.

옛날부터 우리 나라의 부인들은 이름이 없고 다만 모씨라고만 하였는데, 그는 이때 일본의 풍속을 본받은 것이다. 그들은 제각기 이름을 사용하여 사회에 진출하였으므로 그는 자기 이름을 「홍경」이라고 지은 것이다.

홍경은 처음에 일본 관리인 추원수일과 통하고, 또 국분상태랑과도 통하였으며, 그 후 장곡천호도와 또 통하였으므로 추원수일은 분이 나 그를 질투하였으나 소문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풍속에 남녀가 서로 만났을 때는 반드시 악수를 한 후 키스를 하여 친하다는 표현을 하였다. 추원수일이 떠날 때 홍경은 그를 전송하면서 키스를 하였다. 이때 그는 혀끝을 내밀어 추원수일의 입으로 넣자 추원수일이 그 혀를 깨물어 홍경은 그 통증을 참고 돌아오므로 도성 사람들은 작설가를 지어 그를 조롱하였다.

홍경은 일어와 영어를 잘하고 양복을 입고 다녔으며, 다닐 때는 이지용과 손을 잡고 다니고 혹 인력거를 타고 다닐 때는 얼굴을 내놓고 권연을 피우며 의기양양하게 다녔으므로 행인들은 눈을 가리고 지나갔다. 처음에 이지용은 방탕하여 누차 고종에게 꾸지람을 들었으나 홍경은 엄비의 거실을 출입하면서 고종의 뜻을 너그럽게 하여 결국 그를 중용하였으므로 홍경의 방자한 행동을 이지용은 금지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때 이지용은 자신과 홍경의 모습을 그려 그 그림을 외헌의 마루 위에 걸어 놓았다. 이때 하인 하나가 지팡이로 홍경의 음부를 찌르며 “이곳은 일본놈의 구멍이다”라고 하면서 서로 웃었고, 또 일본 사람들도 그를 질투하여 그가 일본 사람을 안고 통정하는 장면을 그려 그 그림을 팔았으므로 한 달 사이에 그 소문은 온 도성으로 전파되고, 또 외국의 항구까지도 소문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민영철의 아내 류씨는 구례 사람인 류제빈의 딸로 민영철의 재취인데, 그는 얼굴이 아름다워 장곡천의 사랑을 받았고, 홍경과 함제 두 미인으로 지목되어 유씨는 옥경으로 칭하였다.

이때 민영철이 상해로 가자 옥경은 그 집을 지키고 있으면서 날마다 일본공관으로 갔고, 또 북한산 승방으로 가서 음행을 자행하여 이런 행위가 그치지 않으므로 이때 방곡소민들은 탄식하기를, “종척대가에서 먼저 규범이 없어졌으니 우리가 외국인을 대할 때 예의지국으로 칭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리준용의 아내 □씨가 이준용을 보기 위해, 홍경을 따라 이준용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자 고종은 크게 노하여 그의 외출을 저지하였다.

리지용이 일본으로 들어갈 때 내부서리박제순은 수령 10여 자리를 제수해 주고 그 후에도 자주 시망이 있는 사람을 채용하므로 이지용은 이 소문을 듣고 매우 분통해 하였다.

이에 앞서 이지용의 아들 리해충은 일본으로 들어가 학교를 들어가려고 하자, 그곳 유학생들은 그를 쫓아내며 “우리는 비록 외국에 있지만 역적의 아들과는 함께 유학을 할 수 없다”고 하므로 이해충은 그들에게 굴복하여 유학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 후 이지용이 그곳을 가서 그들에게 돈 수백 원을 주며 유학비로 사용하라고 하였으나 유학생들은 그 요청을 거절하며 “우리는 역적의 돈을 쓰지 않아도 지금까지 죽지 않았다”고 하였다.

 

9. 일진회의 신약기념연

 

일진회 회장 리용구 등이 신약기념연을 마련하였다. 이달 20일이 을미조약을 체결한 지 일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일진회민들은 무슨 경축회처럼 여겼으나 조야에서는 이를 매우 통분히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용구 등이 대소 관리들을 초청하였지만 한 사람도 가지 않았고, 오직 광산국장최상돈만 갔다.

이때 일본인들도 일진회를 억제하고 있었으므로 일진회민들은 의지할 곳을 잃고 그들의 기염이 날로 식어갔다. 이때부터 지방에서는 그들을 형법으로 억제하기 시작하였고, 평민들도 그들을 내쫓기 시작하여 그들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그리고 리용구는, 이때 천도교와 합하려고 하였으나 손병희는 그들을 거절하였다. 이에 이용구는 일진회를 시천교로 개칭하고, 지회장은 교구장이라고 하여 천주교와 서로 혼합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성기가 통하지 않아 이미 머리를 깎은 사람들은 천도교로 칭하고 흑은 시천교로 하였지만 천주교와 일진회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대도시에 있는 일진회민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 짝을 잃은 귀신과 같았다.

 

10. 성기운 등 대신 임명

 

성기운을 농부대신, 권중현을 군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11. 신라탈해왕의 숭신전

 

신라 석씨 탈해왕의 묘를 숭신전으로 명명하였다. 이것은 박씨의 숭덕전과 금씨의 숭덕전의 예를 따른 것이다.

 

12. 일경의 위세와 관찰사의 위축

 

대구에 있는 일경들이 징청각(징청각)을 점거하자 관찰사한진창이 부임한 후에 누차 교섭하여 결국 환원되고, 광주관찰사침상익은 일경에게 간곡한 애걸을 하여 선화당에 거처하게 되었다. 이때 일경들은 각도와 각군에 가득히 널려 있어 관찰사 이하 모든 관리들이 조금만 그들의 비위를 거슬려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노예 취급을 하였으나 한 사람도 인수를 버리고 떠난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대구군수박중양은 일본인을 매우 잘 섬겨 이등박문이 우리 정부에 부탁하기를, “한국에서 가장 좋은 관리는 오직 박중양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박중양은 더욱 교만하여 성첩을 함부로 헐어 일본인에게 석재를 팔았으나 한진창은 그것을 금지하지 못하였다.

박중양은 본래 양주의 아전이었다.

진주는 강과 산이 험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성지가 매우 견고하였으나, 이때 일본인들은 그 험한 산을 모두 평지로 만들어 석재를 운반해다가 집을 신축하였고, 오직 촉석루(촉석루)만이 우뚝하게 보존되었다.

 

13. 투전, 골패, 화투 등의 도기

 

옛날부터 경향 각지에서는 투전과 골패라는 도박이 있었다. 이것은 마조와 강패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갑오경장 이후 도박놀이는 자연히 중지되었는데, 수년 이후 일본인들은 서울과 각 항구에 화투국을 설치하여 지폐를 놓고 도박을 하면서 한판에 많은 돈을 따고 잃었으므로 미련한 신사와 밑천이 적은 상인들은 파산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일본인들은 또 요술을 잘부리어 그 기교로 사람들의 이목을 현란하게 하였으므로 도성에서는 절도가 매우 많았다.

 

14. 이유인의 부친묘 도굴

 

도둑이 리유인의 부친의 묘소를 도굴하여, 그 두골을 가져갔다.

 

15. 일본인 서판풍의 자결

 

일본인 서판풍이 자결하였다. 그는 일본의 유사로, 평화를 주장하여 우리 동양을 돌아다니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를 권고하고 한, 청, 일의 순치관계를 더욱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우리 서울에 온 지 조금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이등박문과 호도 등의 전횡을 보고 누차 ׸들을 간՘였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않자,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밝히기 위해 다락에서 떨어졌으나 죽지 않았다. 그는 많은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한 후에 결국 자결하였다.

또 대원장부란 사람도 책사로 자부하면서 서울의 사대부들과 모임을 갖고 서로 왕래하였는데, 그들의 논설이 종종 신문에 나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를 기만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때 청국인 반종례란 사람도 서판풍과 같이 자결하였다.

 

16. 진주 기생 산홍의 의기

 

진주 기생 산홍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이때 리지용이 그를 불러 첩을 삼으려고 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자유롭게 사는 사람인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

이때 어떤 사람은 그에게 「거세쟁추매국인 노안비슬일분분 군가금옥고어옥 난매산홍일점춘」온 세상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매국인에게 달려가 날마다 노복과 녀비처럼 굽신거린다. 그대 집에 금옥이 집보다 높이 쌓여도, 일점홍인 산홍은 사기 어렵다. 편자주 이란 시를 지어 주었다.

 

17. 비인비사 기형아

 

룡인군의 어떤 연씨 집에서는 사람도 아니고 뱀도 아닌 아이를 낳았는데, 허리 이상은 모두 사형이므로 즉시 죽여 매장하였다. 그 유부의 말에 의하면, 임신중 어느 날 밤에 곤히 잠을 자고 있는데, 큰 뱀이 자신의 배 위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18. 조병호를 의정대신 임명

 

11월, 조병호를 의정대신, 침상훈을 궁내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19. 13도 신사 황후책봉 간청

 

13도의 신사 남백희 등이 엄비를 황후로 책봉하자고 간청하였다.

 

20. 각종세전의 지폐 사용

 

수산물의 세금은 100분의 1로 정하고, 결세와 호세 및 각종 세전도 모두 새 화폐인 지폐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21. 창기매음세

 

창녀 및 기녀들에게 매음세를 정하여 매년 1인당 기생은 36원, 창녀는 24원을 내도록 하고, 또 매월 의사를 파견하여 양매창매독. 편자주 을 검사하게 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풍속을 따른 것이다.

 

22. 문관의 양제대례복 제정

 

문관에게 양제의 대례복을 반사하였다.

 

23. 전중광현의 황태자 가례 축하

 

일본은 궁내부대신전중광현을 파견하여 황태자의 수례를 축하하였다. 황태자의 재빙 날짜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24. 전판서최익현의 사망

 

17일, 전판서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사망하였다. 처음에 최익현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그에게 바친 죽이 일본의 곡식이므로 그는 그 죽을 먹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매우 놀라 우리 정부로 통고하기를, 그에게 제공할 식물을 주라고 하고 림병찬 등도 그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령도 많고 위에서 음식물을 잘 받아들이지 않아 식사량이 점차 줄고 또 노환까지 겹치어 10월 17일부터 자리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이때 서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짓고는 임병찬에게 구두로 유소을 일러준 후 살아서 귀국하여 황상에게 알리라는 말을 하고 운명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일본인들도 그의 충의에 감동하여 서로 와서 조문을 하고 갔다.

그리고 21일, 그 상여가 부산에 도착하자 우리 나라 상민들은 상점을 열지 않고 친척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 남부, 로소를 막론하고 그들은 떠나는 배를 부여잡고 슬피 울므로 그 울음소리는 먼바다에까지 들렸다. 그리고 상민들은 그들의 회사에다가 호상소를 마련하여 상여를 다시 만들고 그곳에서 하루 동안 머물고 있다가 출발하였다. 그 상여를 따르며 미친 듯이 통곡한 사람은 1천만 명이나 되었고 산승, 방기, 걸인들까지도 영전에 바칠 제물 광주리를 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그때 모은 만장도 말 두 필에 싣고 갔으나 종일 10리 정도밖에 가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부음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더욱 모여 동래를 출발하던 날 상여가 거의 가지 못하므로 일본인들은 무슨 변이 생길까 싶어 매우 엄하게 호위하면서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결국 쫓지 못하였고, 상주에 도착한 후에는 일본인들이 고통을 느껴 상여차를 버리고 기차에 영구를 실어 순식간에 그의 고향집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상주 이하 300리길에 이미 10일이나 소요되었다. 그리고 시골마다 애통해 한 곡소리가 온 나라에 울려퍼졌다. 이때 사대부로부터 가동주졸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를, “최면암이 죽었다”고 하면서 슬퍼하였다. 이것은 국조 이후 사망한 사람을 위하여 이렇게 슬피 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무슨 은전을 내리지 않았다. 그것은 적신이 국정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망하기 수일 전 어느 날 밤에 서울 동쪽에서 큰 별이 바다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부음이 전해지고 그 상구가 동래항에 도착하자 대낮에 갑자기 비가 오고 물가에서 쌍무지개가 일어났으며, 장례를 치를 때는 뇌성이 치고 많은 비가 왔으며 소상 때와 대상 때는 여러 날 동안 비가 내리므로 사람들은 더욱 이상하게 여기어 슬퍼하였다. 그리고 장례는 정미년(1907) 2월 련산현의 현계인 어느 마을 뒷산에 치렀다. 그곳은 관도 옆이었다.

그의 아들 최영조와 최영학은 그가 신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마도로 가서 간호를 하였고, 그가 사망한 후에는 관을 사서 염을 하려고 하였는데 이때 일본인들이 관을 보내왔다. 그러나 최영조가 그 관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자 일본인들은 겁을 주면서 “우리가 준 관을 사용하지 않으면 반장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므로 최영조는 부득이 그 관을 사용하였으나, 집에 도착한 후에는 새 관으로 바꾸었다.

내가 무신년(1908) 9월에 그의 령연을 방문하여 곡을 올리고 조객록을 보니 4책 정도 되었다. 그리고 명성이 있는 경재는 리도재 한 사람뿐이고 인편에 위문편지를 보내어 제를 올린 사람은 금학진과 리용구뿐이었다.

리재윤은 지금 황상의 종조와 형제간으로 일찍 승지를 지낸 바 있다. 그는 최익현의 충의에 감격하여 그의 제자가 된 후 벼슬을 하지 않은 지 10년이 지났는데, 최익현이 사망하자 그의 뒷일을 맡아 매우 수고를 많이 하였다.

 

25. 일본 유학생의 학비 보조

 

일본 유학생 최창조 등이 혈서를 보내왔다. 최창조 등은 을사년(1905) 봄에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학비가 궁색하여 도망해 온 사람이 과반수나 되었다. 이때 최창조 이하 21명은 선서하기를, “비록 굶어 죽더라도 학업을 마치지 못하면 환국을 하지 않겠다”고 하고 일제히 손가락을 깨물어 그 흐른 피로 혈서를 작성하였는데 감독 한치유가 그 사실을 학부에 보고하여 결국 그 사실이 사방에 게재되므로, 우리 국민들은 그들을 장하게 여겨 전후에 걸쳐 보낸 보조금이 수만 원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 21명은 희천최창조, 성천리희설, 곽산리윤찬, 의주최충호, 은산박윤힐, 가산금창하, 태천백종흡, 은산안희정, 선천금윤영, 의주서윤경, 안악리선경, 순천량대경, 룡천금치련, 경성함준호, 안주한문언, 경성류영희, 의주장경락, 한문선, 철산정리태, 정주장운룡, 파주민재현 등으로 이들은 모두 관서인이었으며 나이는 30세도 채 되지 않았다.

이때 우리 국민들은 모두 서양학을 전공한 특출한 학생들이 나와 국권을 회복하기를 믿고 있었으며, 그중에서 강경하고 민첩한 관서인들을 더욱 추대하였다. 그리고 학교의 수를 말하면 관서 지방이 가장 많이 개설되었다.

 

26. 황태자비 재빙

 

12월, 황태자비 윤씨를 맞이하였다. 황태자비는 비서승윤택영의 딸로 이때 그의 나이는 14세였다.

고종은 윤택영이 윤근수의 후손인 데다가 문벌도 혁혁하므로, 나이가 어린 것을 흠으로 생각하지 않고 황태자비로 정하였다. 이에 그 즉시 외지의 여론이 자자하였다. 그것은 윤택영이 엄비에게 많은 뇌물을 바쳐, 그가 알선한 힘이 많았기 때문이다.

 

27. 금사묵의 경무사 유임과 진령군의 사망

 

경무사금사묵을 그 직책에 유임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금창렬의 어머니 진령군이 사망하자 김사묵은 그의 의자로서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후 김사묵이 경무사직에서 쫓겨나게 되자 고종은 진영군을 생각하여 체직하지 말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28. 리윤용 등의 호남철도회사 설립

 

리윤용, 서오순 등이 호남철도회사를 설립하였다. 청주, 조치원에서 옥구, 군산항까지 경부간의 지선을 부설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그들은 주를 모집하였으나 호응을 하지 않아 오랫동안 착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서오순이 손가락을 깨물어 맹세를 하자,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일본 유학생을 본받아 사람들의 협조를 바랐기 때문이다.

 

29. 민건식의 부산진지 암매

 

민건식이 부산진지 4만평을 일본인에게 암매하여 지가 1만2천원을 받은 후 4분의 1은 대내에 바치고, 1은 탁지부, 1은 궁내부, 1은 자신이 차지하였다.

민건식은 탁지대신민영기의 아들이다.

 

30. 리준의 의분

 

형사국검사리준에게 답형 70대를 가하였다.

동궁의 가례를 치르고 대사령을 내릴 때 리유인은 중범으로 수감되어 있었는데, 형사국장금락헌이 그 대사령으로 인하여 죄수들의 석방과 구속을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리유인을 석방하고 기산도를 수감하자, 이준은 그가 국법을 악용한 데 대한 흥분을 하여 김낙헌을 평리원에 소송하고 재판을 열자고 요구하였다. 이에 리하영, 리윤용 등은 김낙헌을 부추기며 일병을 파견하여 법원을 포위하고, 사람들의 방청을 금하여 강제로 공안을 작성하였다. 또 이준의 직책을 파면하여 태형 100대에 처하려고 하자 고종은 특별히 그의 형량을 감하여 70대를 적용하게 하였다.

 

31. 일본승의 경천탑 탈취

 

일본 공사전중광현이 귀국할 때 경천탑을 탈취해 갔다. 그 탑은 풍덕군 경천리의 옛 사찰터에 있었는데, 12층의 탑 한쪽 면에는 「지정팔년 경천축원 위황제황후태자」라는 15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고려말에 로국공주가 하가할 때 실어 온 것으로 서울 대사동 석탑과 함께 세운 것이다. 탑은 지금으로부터 600년이 되었지만 석편 하나도 이그러지지 않고 우뚝 솟아 있었다. 돌 같으면서도 옥이 아니고 옥 같으면서도 돌이 아니었으며, 인물을 조각해 놓은 그 신교함이 눈빛을 앗아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해 가을 일본 스님 세 사람이 와서 사찰를 중건한다고 하며 그 주위를 살피고 갔다. 이때 전중광현이 많은 일본인들을 풀어 그 탑을 헐어가지고 기차에 실은 후 한밤중에 바다를 건너갔다. 본군 사람들은 강력히 금지하였으나 그들은 칼을 휘두르고 총을 난사하여, 결국 저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은 일본에 도착한 후 그 탑을 박물관에 진열해 놓았는데, 동서양 사람들이 모두 와서 보고 천하의 보물이라고 절탄을 하며 그 가격은 우리 나라의 경부선과 경의선 철로를 부설할 만한 자본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32. 원세순의 축단천향

 

청주의 만동묘가 훼철된 이후, 원세순은 다시 영동 명지곡에다가 제단을 축조하여, 사적으로 제향을 올리면서 제향비를 핑계로 그 동민들에게 전조를 거두어들였다. 이때 평리원에서 그런 행위를 금지하자, 원세순은 다시 같은 군에 있는 승곡으로 그 제단을 옮겼다

 

33. 영국신문의 을사조약 게재

 

영국 서울 런던의 신문에 우리 대한의 을사보호조약에 대한 시사가 6개 조로 게재되었다.

1. 1905년 11월 17일(양력 사용), 일본 공사는 박제순과 5개 조약을 체결할 때 황제는 인준을 하지 않았고, 또 날인도 하지 않았음.

2. 일본은 이 5개 조약을 강제로 반포하므로 황제는 처음부터 반대하였음.

3. 황제는 일찍부터 독립제권을 추호도 타국에게 양여하지 않았음.

4. 일본이 외교권을 강탈하는 것은 아직까지 그런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데, 하물며 내치에 있어서 1건의 일이라도 어찌 인준할 수 있겠는가?

5. 황제가 통감의 주재를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황제의 권한은 추호도 외국인의 천행을 허락하지 않았음.

6. 황제는 세계의 각 대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외교를 보호하기 위하여(이하 7자는 인장에 가려져 있음.) 5년 내에 확정함.

그 인장은 대한의 국새(국새)였다. 그것은 고종이 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한두 신하에게 밀서를 내려 영국 런던에서 국새를 발행하게 한 것이다. 그 방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설(베델 : E.T. Bethell)도 그 사실을 <매일신보>에 게재하여 중외에서 혹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해에 해아(헤이그 : Hague)에서 리준사건이 발생하였다.

 

34. 호환

 

동소문 밖에서 또 호환이 치성하였다.

 

35. 동인도의 해일

 

동인도에 해일이 일어 수천 명이 익사하였다.

 

36. 남원량한규의 기병

 

11월, 남원에서 량한규가 의병을 일으켰으나 그는 그 후 얼마 안되어 사망하므로, 의병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

양한규는 대대로 아전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그는 일찍 초계의 관함을 빌려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양초계」로 칭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그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은밀히 의거를 꾀하여 가산을 팔고 동지를 규합하면서 예기를 축적하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관병들은 설날 다례를 치르기 위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일본호위병도 한산하였다. 그는 이때 기회를 노려 그믐날 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에 동군의 장정 100여 명을 인솔하고 일병을 습격하자 일본 순사들은 모두 도주하므로 그들의 군기를 탈취하여 4대문을 파수하였다.

그는 이때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일이 잘 수습될 것 같아 매우 기뻐하며, 손을 뒤로 두르고 순대청 위아래를 여러 차례 돌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그것은 날이 저물어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그 오합지중들은 아무 기강이 없어 휘하에서 양총을 란사해도 미처 저지하지 못하여, 결국 어디서 날아든 탄환에 맞은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때 많은 의병들은 양한규가 사망하자 일이 잘 풀리지 않을 줄 알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날이 밝자 일병들은 점차 모여, 의병을 체포하기 위해 사방으로 수색에 나서 횡재를 당한 사람들이 감옥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양한규의 가족들은 짚으로 양한규의 시신을 싸서 장례를 치렀으나 서울에서 일병이 도착하여 그 무덤을 파가지고 검시를 하였다. 시체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꿋꿋하였으므로 일병들은 놀라 넘어지며 혀를 내둘렀다.

양한규의 아내는 박봉양의 누이였다. 어느 날 양한규는 박봉양과 약속하기를, 남원에서 의병과 병기를 마련하여 운봉으로 들어가서 영남 우도의 의병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이때 조금 질서가 잡혀 나갔으나 불의에 그가 변을 당하였다고 한다.

같은 군의 전진사박재홍과 상민 량문순 등이 양한규와 함께 입성하기로 하였으나, 그들은 양한규가 사망하자 모두 망명을 하였다. 그 후 한 달이 지나 박재홍은 자수하고 양문순은 체포되어 모두 서울 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이때 박재홍은 법관을 매우 강경하게 꾸짖어 오랫동안 구속되었다.

 

광무 11년 정미(1907년) ①

 

1. 단연회의 국채보상운동

 

정미년(1907) 광무 11년(7월 이후에는 륭희 원년. 청국 광서 33년. 일본 명치 40년) 정월, 대구인 서상돈과 금광제 등이 단연회를 결성하여 국채보상금을 모금하였다. 이때 일본에게 지고 있는 우리 국가의 부채는, 130만원이나 되어 그것을 갚지 못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우리 국토를 송두리째 가져가도 속수무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상돈 등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우리 국민 2000만명이 금연을 하면 매인의 한 달 연초비가 절약되어 신화 20전의 이익을 남길 수 있으므로 만 3개월이면 그 채무를 모두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 모임을 갖게 된 것이다. 그후 각 신문에서도 이 사실을 게재하여 전국민이 호응하였다. 고위층은 1만원 내지 1천원을 희사하였고 평민들은 10전에서 20전까지 희사하였다. 그 액수의 다소를 구애받지 않고 희사하였고 강제로 인원을 파견하여 희사를 하도록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신문에 게재하기를, 조금이라도 서로 희사를 하자고 하였으나 호응하는 사람들 중 정부의 대관과 서울의 사대부 및 부상들은 한 사람도 출연하지 않고, 그토록 미친 듯이 슬퍼하여 큰 소리로 외치며 혹 그 목표량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한 사람들은 노예와 걸인들이 훨씬 많았다. 이때 희사금을 많이 낸 사람으로는 해주의 리재림이 2만원, 금선준이 1만원이었다.

고종은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백성들이 이렇게 나라를 걱정하고 있으니 짐이 무슨 낯으로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량궁이 피우는 권련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고, 각 학교 생도로부터 각대의 군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상의는 하지 않았지만 한결같은 말로 “황상도 그렇게 하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모두 금연을 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금연을 하여 국채를 보상한다는 말을 듣고, 리지용을 위협하여 금연을 못하게 하자 이지용은 “우리 국민들이 나를 5적의 괴수로 지목하고 있어 내 몸도 어떻게 처신할 줄 모르고 있으니 다른 일은 금지할 수 있어도 이 일은 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므로 장곡천 등도 탄식하기를, “이것은 의로운 일이니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 출연하는 사람이 있으면 각국 영사들은 모두 자기의 나라로 전화를 하여 보고하였다.

서상돈은 재산이 많은 미국 여자와 동거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리고 그는 야소교(기독교) 신자로서 미국인들과 교류하므로 비록 일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를 꺼려하였는데, 그는 이때 단연회를 창설하여 국채를 모금하자 사람들은 “그의 특별한 점은 미국 사람들이 후원을 하고 있으므로 그 일을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 나라에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조만간 몇 사람들이 중간에서 챙겨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과연 맞아떨어졌다.

세계 각국의 공채는 모두 그 나라의 경제력 중 10분의 1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일본의 경제력은 130만원에 불과하였지만 그 공채는 24만원이나 되어 그들의 경제력의 10분의 2가 되므로 유식인들은 일본도 공채로 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2. 영친왕 태극장 수여

 

고종은 황태자 및 태자비에게 서봉대수장을 수여하고, 영친왕랑에게 태극장을 수여하였다.

 

3. 리용익의 사망

 

리용익이 해삼위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그는 유소에서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기를 간청하였으며 또 그의 아들 리현재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내가 죽더라도 반장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현재는 이역에서 오래 있을 수가 없어 한 달 남짓 된 후에 초빈을 하려고 하였으나 그 널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현재는 통곡을 하며 중지하였다.

 

4. 충청관찰사윤길병의 군수 단발 권장

 

충청관찰사윤길병이 관할 군수들에게 단발을 권하면서, 단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관직을 버리고 떠나라고 하므로 군수들은 서로 후한 뇌물을 바쳐 사직을 면하였는데 박봉자도 500냥이나 바쳤다. 그리고 이때 윤길병은 또 관할구역에 칙령을 내려 백성들이 단연회를 조직하여 모금운동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5. 리충영경북관찰사 임명

 

리충영을 경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6. 영친왕리은의 정혼

 

영친왕리은의 혼사를 민봉식의 딸에게 정하였다. 이분은 민영규의 손녀이다.

이때 고종은 “민간에서 금연을 하여 국채를 모금하고 있으니 짐이 어찌 편안한 마음으로 길례를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3월로 흔사 일자를 정하였으나 그 후 가을로 퇴정하였다. 그러나 이때 간택된 사람들이 48명이나 되었는데, 그 혼기를 퇴정할 때 간택된 사람마다 2천원씩 지급하였다.

 

7. 룡산의 청루설치

 

일본인이 룡산에 청루를 설치하면서 민총 800여 기를 파냈다. 그리고 사냥을 하던 일본인이 수원 륭릉으로 들어가 담배를 피우다가 실화하여 륭릉을 모두 소각하였다.

 

8. 현흥택의 채무소송

 

현흥택이 청국 상해로 들어가 민영조에게 빚을 받으려고 상해재판소에서 재판을 하였다. 이때 민영익이 은행에 저축한 돈 절반은 현흥택에게 돌아갔다. 현흥택은 민영익의 옛 하인이다.

 

9. 인천과 대구 지방의 화재

 

인천항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100여 호가 소실되고, 대구에서는 58호가 소각되었다.

 

10. 령동지방의 설재

 

이달 중 강원도 령동 일대에는 눈이 7~8장 정도 내려 높은 나무가 겨우 그 끝만 드러내고 있다가 눈사태가 날 때 큰 나무들이 모두 부러지므로, 100세 된 노인들도 처음 보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때 인명 피해는 40여 명이었고, 우마 피해는 4두였다.

 

11. 이등박문의 귀경

 

2월, 이등박문이 초5일 서울로 돌아오고 의친왕강은 초10일 입경하였다.

 

12. 전주서라인영 등의 모주오적

 

전주서라인영, 전주사오기호와 금인식 등이 5적을 살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쳐 평리원에 자수하였다. 이때 나인영 등은 폭약 2궤를 은밀히 가지고 있었다. 그 기구는 자물쇠를 설치하여 그것을 잡아당기면 화약이 폭발하였다. 그들은 그 폭약을 리지용과 박제순 등에게 보내며 “이것은 미국인 모씨가 보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가족은 그 폭약에 접근하여 열어보려고 하였으나 박제순은 열지 못하게 하고, 날카로운 칼로 그 틈 사이를 넣어 힘을 가하자 그 폭약궤는 열리었다. 그 가족들은 모두 놀랐다. 그리고 이지용도 다행히 열지 않고 있다가 박제순의 소식을 듣고 서로 놀라며 그 사실을 누설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인영 등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장정 강원상, 황화서 등 18명을 모집하여 3명이 1명을 대적하게 하였다. 그것은 상대가 박용화 등 6명이기 때문이다. 이때 강상원은 권중현을 맡기로 하고 그를 사동까지 추적하여 그를 향해 세 번이나 육혈포를 쏘았으나 명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체포되었고, 그 후 얼마 안되어 박용화는 자객을 만나 사망하였다. 이지용 등은 크게 놀라 그들의 소굴을 추적하여 여러 날 동안 몸이 달아 있었다. 그리고 이때 나인영 등이 다시 거사를 하려고 하였으나 그럴 기회가 없으므로 그들은 5적의 참간상및 통감부와 각국 영사관의 통첩, 마을의 광고문, 자신회의 취지서, 애국동맹가, 그 간적을 살해한 후의 자수문 등 증거가 될 만한 문서에다가 련명하여 자성문을 적어 자수하였다.

이때 나인영 등은 리기와 친하게 지냈으므로 법사에서는 리기도 그들과 공모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도 하옥시켰다. 이때 이등박문은 옥관에게 말하기를, “지금 나인영과 오기호를 석방하면 그 다음 사람들을 징계할 수 없으므로 그들을 엄하게 수감하라”고 하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매우 위태롭게 여기고 있었다. 이때부터 이지용 등은 출입을 할 때마다 경비병이 따라붙었고, 또 일본 순사들을 그들의 집으로 파견하여 밤이면 5,6명을 파견하였으나 사람들은 그들이 어느 곳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리용태와 민형식 등도 체포하였다. 그들도 나인영, 오기호 등에게 포섭된 후 거액을 투자하여 그들의 운동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용태의 집에서는 사주한 병기와 화폐가 발견되어 그것이 죄안에 첨가되었으나 민형식은 입을 다물고 굴복하지 않고 있다가 혹형을 당하였고, 리기는 그 삼엄한 분위기를 보고 사실을 실토하여 모든 문서가 그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그 죄상이 명백히 밝혀졌다. 박용화를 처형한 것은 다른 사유가 있었던 것이며 나인영과 오기호 등의 사건에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법사에서 처음에는 그들에게 살인을 음모한 죄로 처형하려 하였으나 민형식은 민영휘의 양자이므로 민영휘는 많은 돈을 뿌리며 안팎으로 주선하여 그 사건이 조금 풀리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박영효가 귀국하자 그들을 국사범으로 바꾸어 그들은 모두 처형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에 리기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떨어진 상복을 입고 서울을 왔었다. 이때 이지용이 그를 추천하여 그가 사범교관이 된 후에도 그를 위해 봉급과 식비를 도와주었으며, 나인영은 날마다 박제순의 집에 가서 관직 한자리를 제수해 달라고 하였으나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논하면서 매우 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 사건은 윤주찬, 리광수 이하 10여 명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그들은 모두 호남 사람으로 주모자인 리기 및 라인영 등과 한고향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13. 일본 유학생의 전연풍길 성토

 

일본 동경의 조도전학교에서 토론회를 가졌을 때, 일본인 전연풍길이 한국의 황제를 화족으로 칭하였다. 화족을 그들은 사족으로 칭한 것이다. 이때 우리 나라 유학생들은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곳에 모여 전연풍길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교장이 그를 비호하여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교장을 성토하자 그 교장은 사죄를 하고 강제로 전연풍길을 퇴학시킨 후 중지하였다.

박제순 등은 이 소문을 듣고 그 사실을 이등박문에게 말하였다. 이등박문은 웃으면서 “그 사람은 일본인 중에서도 빗나간 사람입니다. 귀국도 어찌 이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이미 처벌을 하였으니 더 이상 말을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지난날에는 외국 사신들이 폐하를 알현할 때 으레 정부에서 아뢴 후 윤허를 받아야만 알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이등박문은 우리 나라에 들어온 후 우리 정부를 통하지 않고, 그가 먼저 알현하여 오랜 시간을 있다가 나오므로 사람들은 그가 공갈 협박 등 많은 기만을 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14. 탁지부 문서 통감부 이관

 

이등박문이 탁지부의 문서를 통감부로 이관하였다. 이때 통감부에는 재정감사장을 두고 중앙전고를 제일은행으로 이속하였으나, 우리 정부에서는 침묵을 지키며 한 사람도 그들을 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등박문은 우리 나라에 거류하고 있는 일본 국민들에게 그 지세를 일본으로 납부하도록 하므로, 박제순이 리지용과 함께 이등박문에게로 가서 그 사유를 힐문하자 이등박문은 이로부터 그 일을 중지하였다.

 

15. 경의과 설치

 

경의과를 설치하여 박사 33명을 발췌하자 이등박문은 우리 정부에 질책하기를, “당신들은 아직도 옛날 폐단을 답습하려고 합니까?”라고 하였으나, 학부대신리완용은 겸손하게 사죄하며 감히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나이를 표시한 후 시권을 참고하여 70세 이상의 노인만 선발하였다. 이것은 박사과를 폐지하였기 때문에 은전을 베풀어 노년에 과거시험을 보는 사람들을 위로한 것이다.

 

16. 리재극궁내부대신 임명

 

리재극을 궁내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17. 량호의 의병 봉기

 

량호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났으나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은 군장과 화기가 없음을 우려하다가 민간의 소를 약탈하여 군산항으로 들어가 소 한 마리에 양총 한 자루씩 바꾸었다. 이에 련산, 로성, 진산, 금산 등지의 들에는 소가 없어 소 한 마리의 가격이 민전 300냥이나 되었다.

 

18. 경주의병장 임성기의 옥사

 

경주의병장 임성기, 하덕근 등이 1년 동안 구속된 후 지방진위대에게 살해되었다. 임성기가 처형될 때 시를 낭랑히 읊자, 하덕근은 미소를 짓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들을 보는 사람들은 슬퍼하였다.

 

19. 금흥원의 봉선 간청

 

철원에 황제봉이 있다. 그 산봉우리에는 네 개의 바위가 있는데, 한 바위에는 「대황제후」라는 4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때 금악형이란 사람은 그 산기슭에서 10년 동안 기도를 드리며 국가가 봉선을 해야 자신이 그 암혈에서 나온다고 하므로 그의 족인 금흥원이 그를 민망하게 생각하고 중추원에 제의하여 봉선을 간청하였다.

 

20. 숭례문과 흥인문의 괴서

 

숭례문과 흥인문 옆에 있는 성첩을 헐고 전차길을 내었는데, 그 량문의 연목에는 괴서 6자가 있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력사마장월미가◆두건알」

 

21. 탁지부 량지과 창고 화재

 

탁지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량지과의 창고 40여 칸이 모두 소각되었다.

 

22. 함흥의 화재

 

함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100여 호가 소실되었다.

 

23. 멕시코의 지진

 

멕시코에 큰 지진이 발생하여 500명이 사망하고, 전복된 가옥이 5만여 호나 되었다.

 

24. 금재풍, 박승봉 등의 관찰사 임명

 

3월, 금재풍을 강원관찰사, 박승봉을 평북관찰사, 윤성보를 함북관찰사, 리건영을 충남관찰사, 최익상을 전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25. 서북영림청 설치

 

서북영림청을 설치하여 산림 사무를 관리하였다.

 

26. 리완용에게 2등훈장 하사

 

3월, 리완용에게 2등훈장을 하사하였다. 이때 고종이 그에게 3등훈장을 하사하자 이완용은 화를 내며 “시종조남익도 3등훈장을 차고 다니는데 대신인 내가 조남익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그 훈장을 반납하였다. 고종은 그 소문을 듣고 2등훈장과 바꾸어 하사하였다.

 

27. 금승문과 강호석 등의 석방

 

일본인이 금승문을 석방하였다. 그는 귀향할 때, 주례의 일왕지치를 연의하여 그것을 상소에 적어 올렸다. 그리고 강호석도 석방되었다.

 

28. 경흥민과 일본인의 격투

 

경흥민들이 큰 함성을 지르며 일본인의 가옥을 불태우다가 일본인과 격투를 벌여 1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일병들이 겨우 진압하였다.

 

29. 조병식과 리헌식의 사망

 

조병식과 리헌식이 모두 사망하였다. 조병식이 일생 동안 악행을 하였으나 결국 집에서 무사히 사망하므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분통해 하며 하늘의 이치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30. 림병찬의 석방

 

전군수림병찬이 대마도에서 석방되어 돌아왔다. 그는 이때 고 참판최익현의 유소를 올렸다.

 

31. 최익현의 유소

 

“림사신 모는 일본 대마도 경비대내에서 서쪽을 향해 재배를 올리며 황제폐하에게 상언하옵니다. 신이 거의를 하는 이유는 대략 금년 윤4월 거사를 시작할 때의 상소에서 이미 아뢴 바 있으므로 원소가 올라갔는지 안 올라갔는지는 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다만, 신이 거사를 형편없이 하였으므로 결국 포로가 되어 7월 초8일 일본의 대마도로 압송되어 현재 경비대 안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신의 분수를 헤아려 볼 때, 반드시 죽지 살아서 돌아갈 가망이 없습니다. 지금 이 적들은 신에게 단발을 하려고 하다가 결국 교활한 말로 해명을 하였지만 적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반드시 죽이고야 말 것입니다. 신이 이곳에 온 후로 한 수저의 쌀과 한 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으로 제공됩니다. 그렇다면 설사 적들이 비록 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신은 차마 구복을 더럽힐 수 없어 음식을 물리치기로 결심하고, 고인들이 몸을 깨끗이 하여 선왕에게 보답하는 뜻을 본받고자 하옵니다. 신의 나이 74세이니 죽은들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역적들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들을 멸종시키지 못하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되찾지 못하고, 4천년 중화의 정도가 더러운 땅에 사라져도 붙잡지 못하고, 삼천리의 선왕적자들이 모두 어육이 되어도 구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조용히 생각할 때 왜적들이 망할 날은 멀어도 4,5년에 불과하지만, 다만 우리의 대응한 자세가 그 방법을 다 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지금 청국과 러시아 양국은 주야로 이 적들에게 이를 갈고 있고, 영국과 미국도 이 적들과 십분 좋은 사이는 아니므로 조만간 서로 공격을 할 것이며, 또 그 일본은 병력을 낭비한 나머지 백성은 곤궁하고 재정은 고갈되어 백성들이 윗사람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밖으로 그들을 엿보는 적이 있고, 안으로는 윗사람을 원망하는 백성들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망하는 날은 발을 치켜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국사를 돌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분연히 용기를 내시어 뜻을 세우시고, 또 퇴폐한 기강을 떨쳐 버리시고 흐지부지한 마음을 일으키어 차마 할 수 없는 일에는 참지 마시고, 믿지 못할 일은 믿지 마시고, 그들의 허세와 위엄에 너무 겁을 내지 마시고, 기만한 말을 듣지 마시고 더욱 자주성을 가지시어 영원히 의지할 신의 수양을 다하시고, 미준한 사람을 부르시고 군민을 의무하여 사망의 형편을 살펴보신 후에 그 가운데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잘 선택하신다면 이 백성들은 모두 임금을 존경하고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며, 또 선왕들이 500년 동안 쌓으신 그 훌륭한 덕과 지선의 혜택에 흠뻑 젖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어찌 폐하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하여 저 원수를 보복하고 그 깊이 사무친 수치를 말끔히 씻지 않겠습니까? 그 기회는, 다만 폐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신은 죽음에 임하여 정신이 혼란하므로 하고 싶은 말을 한두 가지도 다 아뢰지 못하고, 이 글을 신과 함께 수감되었던 림병찬에게 주어 기회가 나는 대로 올리도록 하였으니 폐하께서는 신을 가련히 생각하시어 잘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임병찬은 다시 상소 한 장을 지어 그 유소에 대한 곡절을 자세히 아뢰고, 원소는 고본을 올려 믿을 수 있도록 하였다.

 

32. 장인근의 일본식 장례

 

장인근은 문충공장유의 후손으로, 그는 지금 륙군정위로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어머니가 사망하자 일본식의 장례를 치렀는데, 그의 아우 장우근과 함께 양복을 입고 상여를 따랐다. 군악대가 그 상여를 인도하고 그의 처는 마차를 타고 그 뒤를 따랐으며, 상여 앞에서는 일본 스님들이 주문을 외고 갔다.

 

33. 윤효정의 활동

 

윤효정은 사족이었다. 그는 서양에서 10여 년 있다가 돌아와 일진회와 자강회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출석하였다. 그리고 그의 딸은 미국을 들어가 구주를 두루 돌아다녔으며, 나이가 30세를 넘었지만 아직 아이를 하나도 두지 못하였고, 자신은 “천하의 영웅을 섬기지 그렇지 않으면 몸을 깨끗이 하여 이대로 죽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때 서울의 부녀들에게 권장하여 두어 구역에 여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가정집 여인들이 10명~100명씩 짝을 지어 입학하였다. 사대부의 집에서도 종종 그들을 본받아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함께 걸어가고, 땋은 머리도 땅에까지 드리운 채 박쥐우산과 책보를 들고 기세 등등하게 교만을 부리고 다니며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추문이 들리며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그치지 않았다.

 

34. 호남의병장 백악구의 전사

 

호남의 의병장 백악구가 태인에서 일병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백악구는 지난 섣달, 광주에서 석방된 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주에 있는 의병과 합류하였다. 이때 일병들은 태인의 들에서 의병을 습격하자 그를 추종하던 의병들은 불리함을 보고 그를 부축하여 포위망을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백악구는 탄식하며 “그대들은 마음대로 어서 떠나시오. 이곳은 내가 죽을 곳입니다”라고 한 후 뛰어나오면서 “백악구가 여기 있다”고 외쳤다. 결국 그는 탄환을 맞고 절명하였다.

 

35. 고광순의 패주

 

고광순이 동복에서 일병들을 습격하였으나 그는 패주하였다. 이에 앞서 고광순은 최익현을 추적하였으나 따라가지 못하고, 또 량한규와 남원을 점거하기로 모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랜 시일을 보내는 동안 그는 1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동복군으로 들어갔는데, 그 군리들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고 일병들을 인도하여 그를 습격하므로 고광순은 도주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그리고 이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이씨란 사람은, 일찍 정언을 지낸 사람으로 그는 관서 사람이었다. 그는 힘이 절륜하여 성중을 돌아다니며 충직한 사람을 남모르게 사귀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민종식을 따르다가 패배하고, 또 최익현을 따르다가 패배하고, 또 량한규를 따르다가 패하고, 이때 또 고광순을 따르다가 패하였는데 그는 이때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36. 윤치호의 기부

 

윤치호는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였으나 기부되었다.

윤치호는 청인 마건상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지난해 산기가 있는 이후 복부에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양의의 수술을 받아 치료하였으나 수일 후에 사망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풍이 내부로 들어간 것이라고 하였다.

 

37. 이등박문의 시

 

각부 제입들이 이등박문을 맞이하여 창덕궁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그는 시 일절을 읊어 「화명류암춘삼월 창덕궁 중대극정 상부하지군국한 무심가무불감청꽃이 피고 버들가지 늘어진 이 춘삼월에 창덕궁 태극정에서 논다. 장사하는 아낙네가 어찌 임금님의 한을 알랴! 무심히 가무를 즐기고 있으나, 차마 들을 수 없다. 편자주 이라고 하였다.

 

38. 신응희의 견인치상

 

박영효가 을미사변 때 다시 도주하자 리규완과 신응희 등도 도주하여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때 신응희의 아버지가 사망하여 그의 가족이 신응회에게 부음을 전하자, 그는 “일이 있어 갈 수 없으므로 사람을 보내 치상하겠다”고 하였다.

 

39. 리용익, 리헌식, 박용화 등의 시호

 

리용익의 시호는 충숙, 리헌식의 시호는 충간, 박용화의 시호는 충정이라고 하였다.

박용화는 고양에서 거주하는 어떤 민가의 아들로, 그는 일본어를 잘하여 갑자기 출세를 하였는데 이해 봄에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이때 여론에 의하면, 그는 죽을 만한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40. 박제순, 리완용 등의 면직

 

4월에 참정박제순, 학부리완용, 탁지민영기, 군부권중현, 농부성기운, 내부리지용, 법부리하영 등이 모두 면직되었다.

박제순은 5적 중에서 지식도 있고 흑심도 있어 오랫동안 전국민의 타매(타매)를 견디었다. 그러나 그는 외부의 압력이 날로 심한 것을 싫어하여 비록 벼슬이 높고 봉급이 후하지만 밤만 되면 그는 방황하고 있었다. 이때 라인영과 오기호의 옥사가 일어나자 그는 크게 두려워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있으니 차라리 벼슬길을 피해야겠다”고 하면서 약간 공분을 터뜨리며 사직을 하였다. 그 후 각 부에서도 모두 파직을 단행하였다.

 

광무 11년 정미(1907년) ②

 

1. 신임내각

 

리완용을 참정, 고영희를 탁지대신, 리병무를 군부대신, 송병준을 농부대신, 임선준을 내부대신, 조중응을 법부대신, 리재곤을 학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이완용은 이등박문과 결탁하여 전국민이 그의 명에 따르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이등박문은 그를 강력히 참정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그를 견제하므로 이등박문은 크게 노하여 “이완용을 참정으로 임명하지 않으면 이로부터 외신들은 모두 사직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고종은 억지로 그의 뜻을 따랐다.

그리고 이완용이 임선준을 내부대신으로 추천하자 고종이 “임선준은 3품관인데 어찌 대신으로 임명할 수 있겠느냐?”고 하므로, 이완용은 “외국에는 9품대신이 있는데 어찌 안될 이유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고종은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중응의 초명은 중협으로, 그가 유생으로 있을 때 일본인과 내통한 죄로 연좌되어 오랫동안 외지에 유배되어 있다가 갑오년(1894)에 인천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는 박영효와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도주하였는데, 이때 시국이 또 변하자 슬며시 귀국하여 일본인의 심복 노릇을 하다가 갑자기 사법부를 장악하면서 일본인의 뜻에 맞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앞장을 섰다. 그러므로 이때 사람들은 그를 왜놈의 충노라고 지목하였고, 또 그는 본래 명가세족으로 이름이 나 절반은 남촌과 인척관계이므로 그의 성세와 연락이 매우 넓기 때문에 대궐에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조중응이 들은 일은 일본인도 모두 알고 있었고, 또 소론 중에서도 가난하고 조급한 사람들은 그에게 아부하여 그를 「남촌주인」이라고까지 추대하였다.

 

2. 황철, 최석민 등 관찰사 임명

 

강원관찰사금재풍을 면직하고 황철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으며, 최석민을 경기관찰사로 임명하였다. 황철은 의친왕강을 따라 10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인과 매우 친하였으므로 이 직위를 얻은 것이다.

이때 내외의 관리는 모두 통감부에서 임명하고, 고종은 재가만 하고 있었다. 통감부에서 관리로 있는 일본인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후한 뇌물을 요구하며 관직을 임명한다고 하였으나, 이등박문은 살펴보지도 않았다. 황철은 관직에 임명된 후 함부로 날뛰고 있으므로 관동 사람들은 그를 채찍을 든 도깨비라고 하였다.

 

3. 박중양, 량재익 등 관찰사 임명

 

대구군수박중양을 평남관찰사, 양근군수량재익을 충남관찰사, 파주군수금규창을 전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리건영과 권익상은 부임하기 전에 교체되었다.

 

4. 영친왕에게 리화대수장 수여

 

영친왕에게 대훈위리화대수장을 하사하였다.

 

5. 경빈금씨의 사망

 

경빈금씨가 사망하였다. 그는 헌종의 빈궁으로 순화궁이라고 칭하였다.

 

6. 금윤식의 석방

 

금윤식이 석방되어 돌아왔다. 김윤식의 나이는 70세가 넘었지만 그의 정력은 소년처럼 강하여, 도서에 있으면서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병오년(1906) 겨울에 70세 이상을 모두 석방하라는 조서가 내려졌으나 김윤식 혼자만 빠져 있으므로 일진회에서 누차 정부를 공박하고, 또 이때 시상이 변하여 먼저 그를 석방하였다.

 

7. 기우만과 박봉양 등의 석방

 

장성의 기우만과 운봉의 박봉양 등이 의병과 내통하였다고 하여, 서울 감옥에서 수감되었다가 한 달 남짓 되어 석방되었다.

 

8. 리종태, 리상현의 유배

 

충남의 리종태와 리상현이 10년 동안 고군산으로 유배되었다. 의병과 연락하였기 때문이다.

 

9. 박영효의 귀국

 

박영효가 일본에서 부산으로 돌아와 소장을 올리어 하죄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를 소환하라는 조서를 내리고 서울에다가 그의 집까지 하사하였다. 수년 동안 박영효가 귀국한다는 소문이 매일 와전되어 도민들은 종종 모이어 서로 손을 머리에 얹고 “면릉위가 온다”고 하였다. 그것은 일본인의 기염이 날로 가혹하였지만 그들은 호소할 곳이 없으므로 그 영향력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박영효에게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박영효는 본래 개화를 주장하여, 본국에 뜻을 두고 있었으므로 수십 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는 중에도 가족을 보호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조종하는 줄이 일본인에게 있으므로 일본인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때 그는 마음속으로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일본인을 생각하는 척하여 누차 일본 천황에게 교섭을 하였으므로 일본인들은 그가 귀국하도록 놓아주었다. 그의 상소는 대충 다음과 같다.

 

10. 박영효의 상소

 

“신의 국적이 외국에 속해 있으나 그 은총을 받아 하자를 씻고 만사지중에서 발탁하여 이 몸을 백료의 서열에 두시니 신이 비록 돈어와 같다 하더라도 어찌 그 감사함과 두려움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 은혜를 말씀드리면 하해도 오히려 얕으며, 그 의리를 돌아보면 <춘추>의 대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결같은 충군애국의 마음은 속히 정치를 혁신하여 우리가 렬강들과 어깨를 함께하고 독립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거짓말도 참된 말로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공연히 간인들의 음모에 죽는 것보다 차라리 해외로 도피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후일을 기대해 보는 것이 더 나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의 국세는 위태롭고 생민들은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신의 소원도 아무 가망이 없어 백번 생각하던 끝에 공연히 죽음만 두려워하여 영원히 도피할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신은 본래 한국의 신하로서 죽어도 한국의 귀신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므로 다시 바다를 건너와 지계의 첫머리에서 하명을 기다리며 감히 소장을 올려 신의 애곡을 아뢰옵니다. 신의 몸을 돌아볼 때, 이몸은 신의 소유가 아니오니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시어 특별히 처분해 주시기 바랍니다.”

 

11. 비답

 

“지난 을미년 여름, 박영효에게 엄하게 치죄하라는 조칙을 내렸습니다. 그때 그 일은 내용을 잘 모르고 있었으나 마음속으로는 매우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금릉위박영효를 특별히 서용하여 조가(조정)에서 손님에게 우대하는 뜻을 보이기 바랍니다.”

 

12. 고종의 박영효 영접

 

박영효가 서울에 도착하자 고종은 궁내부의 관원을 중로까지 보내어 그를 영접하고, 또 130냥으로 민영찬의 집을 사서 그에게 하사하였다.

그가 알현할 때는 옛 의관과 망건 띤 비취(비취)로 만든 옥관자를 장식하고 들어오므로 고종은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그는 대하기를, “지난 갑오년에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라고 하자 고종은, “바다를 건너오면서 어떻게 보존하였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는 “신이 옥관자를 보면 폐하를 뵈옵는 듯하였으니 어찌 잃어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므로 고종은 오랫동안 감탄을 하고 있었다. 이때 리완용 등은, 고종이 박영효를 우대하자 모두 눈을 흘기며 엿보고 있었다.

 

13. 부산민의 리지용, 민영기 등의 일본행 저지

 

리지용, 민영기, 권중현 등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부산에 도착하자, 부산민들은 그들의 길을 막고 통곡과 욕설을 하면서 “너희들이 대신으로서 일본인에게 금고를 양보하고 또 본진의 묘터(묘지)까지 팔았으니 이곳에 사는 백성들은 어디로 가겠느냐? 너희들이 이곳 땅을 다시 반환하지 않으면 우리들을 모두 땅에 파묻고 가거라.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이행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군중들은 화를 내며 조수처럼 몰려들어 그 광경이 매우 공포를 느낄 정도였으므로, 그들은 일병들의 호위를 받아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4. 리완용의 장옹 파열

 

리완용의 집에 장독 6개가 일시에 모두 깨어졌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신대의 소란이 있었다.

 

15. 충주의 우박피해

 

충주에서 계란같이 큰 우박이 내렸다.

선산민 최연희가 지진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일본 광도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16. 관제개혁

 

5월, 의정부를 내각, 각부의 협판을 차관, 참서를 서기관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 갑오경장 이후로 누차 관제를 변경하여 칭호도 변하였으므로, 혹 오래 지속되기도 하고 혹은 잠시 지속되기도 하여 그 칭호가 복잡하고 생소하였다. 이에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옛날 칭호를 좋아하고 새 칭호를 싫어하여 비서랑을 한림, 비서승을 승지, 협판을 참판, 대신을 판서로 불러 항시 이 칭호를 관례로 하였다. 그러나 오직 의정을 정승이라고 하지 않고 의정으로 칭하였다. 또 이때 차관, 서기관 등의 관제를 시행하므로 사람들은 영관으로 보지 않았다.

 

17. 교원 정재홍의 자살

 

박영효가 귀국할 때 서을 각회의 회원들은 환영회를 마련하여 금가진, 금종한, 윤웅렬, 민병석 등이 모두 모였다. 그러나 박영효는 신병을 칭하여 안영중을 대신 보내었다.

그리고 정재홍은 서울 사람이었다. 환영회가 한창일 때 그는 육혈포를 자신의 배를 향해 발사하였다. 군중들은 매우 놀라 그를 낭가에 떠메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수일 후 그는 사망하였다. 이때 박영효는 일일이 환자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사망자에 한하여 50환(환)구한국 때의 화폐 단위. 1953년부터 1962년까지의 우리 나라 화폐 단위의 하나. 편자주 을 부의로 내놓았다.

정재홍은 본래부터 글을 잘하지 못하였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는 유서와 팔변가가 있었다. 모두 국문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원수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그 형세가 살상에 그치면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차라리 자신이 혼자 죽어 본래의 뜻을 표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매우 모호하고 명백하지 않아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박영효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그와 적수가 되지 않으므로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정재홍은 본래 강개(강개)한 뜻을 가지고 시국에 분개하여 교육에 열성을 다하였고, 현재에도 학교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는 「지사」라고 한다.

 

18. 국채금총합소 설치

 

서을 사람들은 국채금총합소를 설치하여 금종한을 회장으로 추대하였으나, 그 후 얼마 안되어 비리사실이 드러나 선웅렬을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그곳에 모인 금액은 년리 4퍼센트로 하여 은행으로 귀속하였다.

 

19. 리유인의 사망

 

안경수를 신원하기 위해 리유인을 체포하자, 이유인은 공포를 느껴 사망하였다. 이때 안경수의 아내는 평리원에 호소하기를, 안경수가 사망한 것은 고종의 뜻이 아니라 이유인이 살해한 것이기 때문에, 그를 재판에 회부하여 그의 목숨으로 배상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때 이유인은 금해군에 있다가 체포되어 당일 밀양에 있는 그의 전사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깊은 잠에 빠진 듯 죽어 있었다. 이에 경사에서는 그 보고를 듣고 즉시 일본의사를 그곳으로 보내어 검시를 하였다. 그 의사의 말에 의하면 경기(경기)로 인한 뇌막적체증으로 사망한 것이며 다른 이유는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담파증과 같은 것이다.

주청일본공사림권조가 귀국할 때 서울을 들어왔다가 10여 일만에 출국하였다.

 

20. 경회루의 외빈 영접

 

경복궁의 경회루를 외빈영접소로 하였다.

 

21. 금사묵, 리호성 등 관찰사 임명

 

금사묵을 경남관찰사, 리호성을 충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호성은 리완용의 친족으로, 그는 목포항에서 상관을 개설하였다.

 

22. 대한일보의 정간

 

대한일보사는 일본인이 창설한 것으로, 간행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후 주필 반전삼랑과 삼호평길 등이 우리에게 고빙되어 있는 일본인들의 학대가 날로 심하여 정직하지 못한 것을 보고, 환산중준과 호자우일랑 등의 악행을 지면에 게재하여 그들을 공박하였다. 환산중준 등은 이 사실을 이등박문에게 호소하여 <대한일보>를 정간하게 하고, 그들을 강제로 귀국시켰다.

 

23. 국혼시상채

 

대내에서 신화 10만 환을 내려 윤택영에게 국혼 때 진 빚을 갚게 하였다.

 

24. 일본인의 궐문출입표 매도

 

일본인이 대궐출입표를 팔면서 그 출입표가 없는 사람은 대궐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어소에는 참내료라고 하면서 1매에 16환을 받았고, 동북 량궐에는 배관권이라고 하면서 1매에 1~2환을 받았다. 이것은 극장표와 같은 것이다.

 

25. 한남규함남관찰사 임명

 

명천군수한남규를 함남관찰사로 임명하였다.

 

26. 민종식, 리용태 등의 유배

 

민종식, 민형식, 리용태, 라인영, 오기호, 금인식, 리기 등은 년한의 차이를 두어 진도 등지로 유배하였다 그리고 리용규, 박윤식, 금덕진, 곽한일, 황영수, 정재호 등은 지도로, 박재홍, 조규현, 량문순 등은 진도로 유배하였다. 이들은 모두 종신에 한하였다. 그리고 민형식, 리석종 등은 철도로 10년, 리용태, 금동필, 강상원, 지팔문, 박종섭, 금경선, 황문숙, 황성주, 리경진, 조화춘, 라인영, 박두표 등은 지도로 10년, 리승대, 최익진, 서창보, 리광수, 윤충하, 금영채, 최동식, 권재중 등은 진도로 10년, 정인국, 리기 등은 진도로 7년, 윤주찬, 오기호, 금인식, 서정희 등은 진도로 5년, 금덕준, 리완수, 차정오, 리승당, 리상학 등은 지도로 5년 동안 유배되었다. 이때 리용규 등 6명은 민종식의 일당으로 연좌되고 박재홍 등 3명은 양한규의 일당에 연좌되었으며, 이석종 이하 30여 명은 모두 민형식과 함께 권종현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연좌되었다.

이때 리완용 등은 민종식을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조중응이 강력히 견제하여 사형을 감면하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그리고 리종원이란 사람은 민종식의 하인으로, 그는 시종 민종식을 호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며 조석으로 밥 한 그릇씩을 들고 옥문 밖에서 울며 민종식을 부르므로,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의롭게 여겼다.

 

27. 호남의병장 량회일 등의 유배

 

호남의병장 량회일과 림락균 등은 15년, 안찬재, 류태경, 신태환, 리윤선 등은 10년으로 한하여 유배하였다. 양회일 등은 광주에서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이때 선고하였다.

 

28. 일진회의 최제우 신설 간청

 

일진회에서 연명소를 올려 최제우에 대한 신설을 간청하자, 법부조중응이 그 사실을 각의로 제출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이때 회장 리용구는 최제우의 기일에 그의 집으로 가서 제사를 지냈다. 이 제사에 참여한 사람은 약 1천명에 가까웠다.

 

29. 평양성 남문훼철

 

평양성 남문을 헐었다.

 

30. 일본인의 모병령 반포

 

일본인이 모병령을 반포하였다. 이 영은 3개 항으로 구분하여 현역, 예비역, 국민병역으로 17세부터 40세까지 한하였으며, 그들의 청원에 따르고 강제로 모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은 결국 이행되지 않았다.

 

31. 일본인의 모롱

 

부산민 정덕규와 대구 박모의 딸은 일본인의 유혹에 말려들어 동경으로 들어갔다. 이 두 사람은 30세도 되지 않았으나 모두 어리석었다.

이때 일본인들은 그들을 한국 복장으로 꾸몄다. 정덕규는 상투에 망건을 싸매고 큰 삿갓을 씌워 광수포를 입게 하고, 박씨의 딸은 낭자를 하게 한 후 착수진과 장군을 입혀 모두 옷폭이 넓은 것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한 후 그들을 의자에 걸터앉게 하였다. 그것은 우리 나라 사람을 우롱하는 것으로, 꿈틀거리는 동물처럼 박람회에 출품한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다만 그들의 말만 듣고 묵묵히 앉아서 하루하루를 지내었다.

이때 각국 사람들은 이 광경을 구경하고 일본의 잔악한 행위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때 마침 민원식이 시찰원으로 그곳을 가보고 큰 충격을 받아 다른 대가를 지불하고 그들을 귀국시켰다.

 

32. 일본인의 노동자 모집

 

일본인은 충북지방의 철도에 인접한 제군의 우민들에게 그들 나라에 철로부설사업이 한창이라고 하면서 1개월의 품삯(고가)이 400환이라고 꾀어 그곳에 취업한 사람은 단시일에 천금을 벌 수 있다고 하고, 혹 응모한 사람이 있으면 그 즉시 400환을 선불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기를 원하여, 10일 만에 응모한 사람이 600여 명이나 되었다. 일본인들은 그들을 차에 싣고 가서 선박에 태워 보낸 후 소식이 묘연하였다. 이때 그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을 멕시코로 보냈다고 하였다.

 

33. 전고소 폐지

 

전고소를 폐지하였다.

 

34. 박씨녀의 주역애독

 

어느 박씨의 딸이 계룡산에서 서울랭정동으로 이거하여 살았다. 그는 나이 39세가 되었지만 결혼을 하지 않고 <주역>을 애독하며 그 이웃 마을 여자들을 교육하므로, 사람들은 그를 「박주역」이라고 하였다.

 

광무 11년 정미(1907년) ③

 

1. 해아밀사 리준의 자결

 

전검사 리준이 헤이그의 평화회의에 우리 국변을 호소한 후 자결하였다.

이에 앞서 구주인들은 만국평화회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춘추의 의상회와 같은 것으로 지금까지 5회의 모임을 가졌다고 하고, 혹은 2회의 모임을 가졌다고도 한다. 그 모이는 장소는 회기 전에 정하기 때문에 일정하게 정해진 곳이 없다.

이때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회의를 개최하자 고종은 이 소식을 듣고 은밀히 이준 등에게 어인이 찍힌 문서를 주어 그가 해삼위로 가서 리상설과 함께 러시아를 경유하여 헤이그로 가게 하였다.

이때 리범진의 아들 리위종의 나이는 21세였다. 그는 7세 때 그의 아버지를 따라 구미를 두루 다녔으므로 서양어를 잘하여 이때 그도 이준을 따라갔다. 그들이 헤이그에 도착했을 때 이위종은 우리 한일간의 변란에 관한 전말을 일일이 역설하였는데, 그 회원들은 한국인은 외교권이 없다고 하면서 연설을 듣지 않으려고 뿌리치므로 이준은 분통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할복한 후 그 피를 한줌 쥐어 그들이 앉은 자리에 뿌리며 “이렇게 해도 믿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피는 뚝뚝 떨어지고 그는 이미 땅으로 쓰러졌다. 이때 그 회원들은 크게 놀라 서로 돌아보며 “천하의 렬장부다. 일본은 참으로 아무 형편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때 일본은 우리 한국을 그들의 부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만국을 속이고 있었으므로 구미인들은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이때 그들의 기만성이 모두 탄로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아무 변명을 하지 못하고 부끄러움을 느낀 나머지 화를 내며 이상설 등을 살해하려고 하자 미국 공사가 그들을 붙들고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리준은 종성으로 북관 사람이다. 그의 몸은 신장이 짧고 살이 쪘으며, 성품은 강직하여 언제나 술이 취하면 주먹을 불끈 쥐고 “죽어도 어찌 그냥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때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리상설은 이때부터 구미를 두루 다니다가 혹 해삼위로 와서, 그의 집에 통지하여 전답을 팔아다가 자신의 여비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므로 그는 본래 재산이 많았으나 수년이 되지 않아서 가산을 탕진하여 그의 가족들은 다른 곳으로 전전하였다. 일본인들은 해아사건을 듣고, 이상설을 교형으로 처형하여 그 사실을 중외에 공포하였다.

 

2. 재미동포의 대동보국회 창설

 

안정수, 류성춘, 장경 등이 북미에서 우리 교민들과 함께 대동보국회를 창설하였다.

 

3. 각도의 대한해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되어 삼남지방의 100여 군에는 산촌과 야지에 겨우 절반 정도 모내기를 하였고, 기타 지방에는 먼지가 하늘에 가득하여 천리 거리가 애타게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충남의 10여 군은 흑충이 벼를 해쳐 그 여파로 점차 과일, 채소, 초목 등에도 영향이 미쳤으나 6월 초에 큰비가 왔다.

 

4. 니현 광견의 일본인 교살

 

서울 니현에서 광견이 일본인 7명을 교살하고, 태평동에서는 삽살개가 일본 어린이를 교살하였다.

일본 수호시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200여 호를 소각하였다.

청국의 남경학당에서는 지하에서 꺼질 듯한 큰 소리가 연일 네 번이나 났다. 이때 지질학자들은 “지하에 있는 다섯 개의 금광이 전기에 감염되어 소리를 낸다”고 하였다.

 

5. 박영효의 궁내부대신 임명

 

6월,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혜성이 동쪽에서 나왔다. 그 길이는 1장 남짓 되었다. 그리고 형혹성(영혹성)은 남두로 들어갔다.

 

6. 일본 공사림동의 래한

 

일본 공사림동이 내한할 때 리지용, 민영기, 권중현 등도 그를 수행하여 돌아왔다. 그리고 해아에 있던 일본인들은 그들의 나라로 리준사건을 보도하자 일본에서는 크게 소란하여 이등박문의 소홀한 점을 비난하고, 또 우리 나라 사람의 반복무상함을 한하여 크게 징계를 하기 위해 림동을 외무대신으로 특파하였다. 그는 사절로 와서 그 죄를 문책한다고 하였다.

 

7. 고종의 양위

 

9일, 고종은 선위의 여론을 받아들여 황태자 은에게 서정을 대리로 맡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중외의 여론은, 고종은 많은 실덕을 하여 민심이 이미 떠나 만회할 수 없으므로 만일 선위를 하여 보좌할 사람이 있으면 이목을 일신하여 혹 연장해 갈 수 있다고 하였으나 감히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유성준은 외부의 여론을 은밀히 아뢰어, 폐하를 한가히 지내게 하기 위해서는 그 부탁할 만한 사람이 있고 또 종사가 힘을 얻게 되면 그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묵묵히 앉아 아무 말이 없으므로 유성준은 두려워하여 그곳을 물러났다.

그리고 이때 일본인들은 해아사건에 한을 품고 우리의 목을 더욱 조이기 위하여 궁성을 병대로 포위하고, 또 이등박문은 리완용 등을 불러 다음과 같은 3개 조항을 요구하였다.

1. 을사오조약에 어인을 찍을 것.

2. 섭정할 사람을 추천하여 황위를 같이 할 것.

3. 차가가 현해탄을 건너 일황에게 사죄할 것.

그러나 이때 고종은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이완용 등은 대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태자에게 전위하여 책언을 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고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이완용은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지르기를,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폐하를 뫼시고 있는 무감과 액례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이완용의 행위를 보고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칼을 빼어들고 고종의 말 한마디만 기다리며 이완용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아무 뜻을 모르는 듯이 묵묵히 앉아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완용을 흘겨보며 “그렇다면 전위를 하는 것이 옳다”고 하자 이완용 등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들은 다음과 같은 교조를 내렸다.

“짐이 열조의 비기(비기)를 계승한 지 지금 44년이 되었습니다만 그동안 누차 어려운 일이 많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고, 또 기용한 사람들도 인재들이 아니었으므로 유언비어는 날로 심하여 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하고, 시국의 어려움은 매우 급박하여 민생의 곤란과 국가의 위태로움은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으므로 두렵고 위태롭기가 연못의 얼음을 딛는 듯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황태자의 덕망은 천성적으로 타고나고, 훌륭한 명예는 일찍 드러나 취침할 때와 반찬을 보살피는 여가에 유익한 말을 많이 하여 시정을 개선한 방법도 부탁할 만한 사람이므로, 짐이 생각할 때 권근(권근)간에 선위를 하는 것은 역대에 이미 행한 예가 있고, 또 우리 선왕조의 훌륭한 예의이기도 하므로 이를 정당히 이어받아 짐은 지금부터 군국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맡도록 하겠으니 모든 의식은 궁내부와 장례원에서 마련하여 시행하기 바랍니다.”

 

8. 황태자의 수하와 리철우의 수감

 

황태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다시 상소를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아, 결국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계제과장리철우가 초10일 부름을 받아 입궐하자 고종은 이철우의 손을 잡으며 “짐은 지금 정신이 혼미하여 사람을 알아볼 수 없으니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하자 그는 대하기를, “이철우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고종은 “대리의주를 마련하여 들여오시오”라고 하였다.

이철우는 고종의 용안이 저하된 것을 보고 대궐을 물러나와 사직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궁내부에서 누차 재촉을 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불응하므로 그를 경무청에 수감하였다.

 

9. 이등박문의 고종일본송치 음모와 결사회의 투쟁

 

이등박문이 고종을 일본으로 송치하기 위해 별도로 만든 차를 대궐 밖에 숨겨 놓고 고종에게 그 차를 타라고 위협하였다. 이때 도민들은 그 소문을 듣고 남녀 노소가 방망이와 몽둥이를 가지고 달려와 잠시 사이에 길거리를 메우고, 또 각 학교 학생들도 서로 연락하여 조수처럼 몰려오며 고함을 지르고 사투틀 벌일 기세를 보이므로, 이등박문은 노도 같은 군중이 결사적으로 몰려든 것을 보고 즉시 그 음모를 중지하였다.

도민들 중에, 기약 없이 종가에 모인 사람들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결사회」라고 쓴 깃대를 앞세우고 정부로 가서 그 이유를 물었으나 일본인들이 저지하였다. 이에 그들은 만인소를 올리자는 여론을 벌인 후 그 상소문을 쓰려고 하였으나, 일본인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결사회원들이 모여 있는 곳을 돌격하므로 시위대의 병사 수십 명은 결사회와 합류하여 피를 마시며 맹세하고, 일본인에게 총을 발사하여 일본인 3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우리 국민도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일진회원 수백 명도 수일 전부터 병기를 들고 궁성을 포위하여 일본인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때 도민들은 “일진회도 모두 일본인이다, 어찌 그들도 죽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고함을 치고 칼과 곤봉을 빗발같이 휘둘러대므로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도주하다가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길가에 줄을 잇고 있었다.

서울의 각 관아가 모두 휴무하고, 상민들은 전포를 닫았으며, 개성과 평괴 및 각 항구에서도 모두 철시하였다.

 

10. 리준용의 환국

 

리준용이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그는 5월에 부산에 도착하여, 이등박문의 전화를 받고 초10일 입경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등박문이 고종을 협박하여 선위를 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일이 만일 지연되면 이준용을 옹립하겠다고 선언하므로, 고종은 크게 두려워하여 결국 윤허하였다고 하였다.

 

11. 리병무의 일병입궐 주선

 

그 일이 시작될 때 이등박문은 각 병대에서 무슨 변란이 일어날까 싶어 일병들을 파견하여 궐문을 파수하려고 하므로, 군부대신리병무가 본부에 전화하여 그들을 맞이하게 하자 정위조성근은 대답하기를, “본국의 군문은 타국병이 파수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이병무는 또 전화하기를, “일본인이 명령한 것이니 어쩔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조성근은 크게 화를 내며 “다만 일본인만 알고 있으니 이 군부를 어디에 사용하겠는가?”라고 하며 주먹으로 그 전화기를 때려부수고 일어났다.

그 후 이병무는 또 참령림재덕을 호출하여 “일본 헌병 70명이 지금 대궐 밖에 도착할 것이니 즉시 문을 열어 주시오”라고 하자 임재덕은 “칼을 차고 입궐하는 것은 더욱 우리 나라에서는 금지되어 있으니 어찌 일시 부신의 뜻으로 함부로 외국 병사를 들어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대장 리한용이 이병무의 지시를 받아 일병들을 인솔하고 입궐하자 임재덕은 그들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때 이병무는 일본인에게 부탁하기를, 임재덕이 끝까지 의심하면 그의 무기를 빼앗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재덕은 일본인에게 저항하기를, “이 부대의 병기는 모두 황상의 칙명이 있어야 줄 수 있는 것인데 어찌 사사로 외국 병사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므로 일본인들도 그의 바른말에 굴복하자 이병무는 제3대의 폭동을 저지하지 못하면 그 죄가 장관에게 있다는 핑계를 대고 임재덕을 법원에 수감하므로, 임재덕은 땅을 치면서 “비록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이것은 병사의 충의심에서 나온 일인데 장관은 부끄럽지도 않느냐?”라고 하였다.

 

12. 시위대의 일본순병 습격

 

12일, 시위대의 병사들이 일본 순병을 습격하여 일시 큰 전투를 벌이므로 포성이 성중에 가득하였다.

 

13. 이등박문의 저격

 

항간의 민가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한 사람이 있었으나 명중하지 못하였다.

 

14. 박영효, 리도재 등의 수감

 

박영효, 리도재, 남정철 등이 평리원에 수감되었다.

이때 일본 천황이 전화로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자 우리 정부에서는 답전을 의논하였는데, 리완용이 「수선」이란 글자를 사용하려고 하므로 박영효는 “오늘은 대리를 하라는 명을 받은 것이지 수선이 아니라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서로 논박을 하다가 결국 서로 역적이라고 꾸짖으므로 일본인들은 그들을 체포하여 수감하였다. 이도재와 남정철도 박영효와 같은 여론을 전개하였다.

환관 리병정이 이완용을 책망하기를, “대감은 세신이라 30년 동안 조정에 있었으므로 의리로 말하면 군신이며 은혜로 말하면 부자와 같은데, 오늘 이와 같이 하는 것을 대감의 성공으로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그도 이때 수감되었다.

 

15. 리완용, 리지용가의 방화

 

박영효 대신 리윤용을 궁내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리완용 형제는 일시 혁혁하여 안팎으로 중임에 있었지만, 도민들은 리완용, 리지용, 리근호, 리근택 등의 집을 소각하여 이완용의 선조 리만성 이하의 신주가 모두 불에 탔다.

그리고 니현에 있는 송병준의 집은 일본인과 섞여 살고 있었으므로 이완용 등은 도민들에게 살해될까 싶어 모두 송병준의 집에 모여 있었다.

 

16. 리근명의 도피

 

전의정리근명이 도주하였다. 이때 이근명은 이달 초에 시국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성묘를 간다는 핑계를 대고 서교로 가서 약 10일 동안 머무르고 있었다. 그 후 변보가 들리자 파주 사람들은 모임을 갖고 그의 죄를 성토하기를, “이근명은 원임대신으로서 국가가 위태로워도 구제할 수 있는 대안 하나를 세우지 못하고 먼저 도망칠 계획만 세우고 있으니, 이 사람은 란적의 우두머리로서 사람마다 그를 죽여야 하므로 군중이 죽여야 한다”고 하자, 이근명은 크게 놀라 다시 서울로 도주해왔다.

 

17. 리재완과 리재곤의 도주

 

리재완이 대포 소리를 듣고 부인 복장으로 위장한 후 부인의 교자를 타고 도주하였으며, 리재곤은 군인들의 약탈을 두려워하여 그의 가족과 재산을 외지로 이동하였다.

 

18. 일월 무광

 

초10일부터 해와 달이 빛이 없어 날이 개어도 10여 일 동안 음산하였으며, 15일에는 한강도 한나절 동안 혼탁한 물이 흘렀다.

 

19. 순명비 황후 책봉

 

순명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였다.

 

20. 일본의 무기매도 금지

 

이등박문은 일본의 군기를 우리 한국으로 매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때 인심은 흉흉하여 조석 사이에 무슨 변란이 발생할 것 같았다. 오강민들은 룡산인쇄국을 습격하고, 중화(화)민들은 전차를 부수었으며, 안성학교 학생들은 떼를 지어 서울로 들어가고, 각 병대들은 일진회 회원만 만나면 머리를 베어 땅에 던지면서 “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은 이 적들이다”라고 하였다

사방에서는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날로 들려왔다. 이때 이등박문은 7적과 함께 은밀한 모의를 하였고, 송병준은 병대해산책을 주창하여 먼저 각 항구의 군기매입을 금지하였다.

 

21. 7조약의 체결

 

15일, 다음과 같은 7조신약을 체결하였다.

1. 한국정부는 모든 시정에 관한 개선방법을 통감부의 지도에 따를 것.

2. 한국의 법령과 제도는 반드시 통감부의 승인을 얻을 것.

3.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행정과 구별할 것.

4. 한국 관리는 통감부의 뜻대로 임면할 것.

5. 통감부에서 추천한 일본인은 한국의 관리로 임용할 것.

6. 통감부의 동의가 없으면 외국인을 고빙하지 않을 것.

7. 갑진년(1904) 8월 22일 조인한 한일협약 제1항(대한 정부는 일본에서 추천한 1명을 재정고문으로 임명하여 재정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따를 것)은 지금부터 폐지할 것.

약권 끝에 내각총리리완용과 통감후작이등박문이 조인하였으나 대한, 일본 등의 글자는 제기하지 않았다. 이때 이등박문은 이 조약을 체결할 때, 옛날 내각인 박제순, 리지용 등과 상의하자 그들은 사양하기를, “우리들은 5조약을 체결한 이후 위로는 황제를 우러러볼 수 없고, 아래로는 국민을 대할 수 없어 몸을 움츠리며 오늘까지 지내왔는데 지금 또 이 안에 참여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지만, 오직 이완용만은 강력히 호응하여 결국 이 조약이 체결되었다.

 

22. 리완용에게 신화하사

 

리완용에게 신화 2만환을 하사하여 새 가옥을 신축하게 하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후 또 그에게 3천환을 하사하여 기밀비로 사용하게 하였다.

 

23. 리재윤의 망명

 

전승지리재윤이 대궐 밖으로 달려와 위문하였다.

을사년(1905) 겨울, 이재윤은 리지용을 참하라고 간청하였으나 그의 말을 듣지 않으므로 그는 향려로 가서 있었는데, 그는 이때 다시 도성으로 들어와 분주하게 다니며 호곡을 하였다. 그는 광인처럼 7,8일 동안 다니다가 결국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들은 말에 의하면, 그는 청국으로 들어가 원세개를 보고 울면서 국변을 호소하기를, “공은 우리 한국을 잊었습니까?”라고 하자 원세개는 즉시 슬픈 기색을 띤 후 붓을 빼어 쓰기를, 「청천재정 하일가망」이라고 썼다. 그는 다시 산동성 곡부현으로 들어가 공림과 연성공을 첨알하고 또 료동으로 돌아왔다. 이때 일본인들이 그의 소식을 듣고 추적하였으나,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며 항시 한곳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19일, 일본 공사림동이 귀국하였다.

 

24. 리완용의 교조

 

22일, 리완용이 교조를 내려 병대를 해산시키자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성환이 자결하였다.

 

25. 교조

 

“짐이 국가가 다난한 때를 당하여 경비를 절약하고 실업에 유의하는 것은 오늘의 급무입니다. 지금 군무도 고용병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상하가 일치하지 못하여 완전히 방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짐은 지금부터 군제를 쇄신하여 사관 양성에 전념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음 징병령이 내려지면 그 병력으로 하여금 대비를 공고히 하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황실에서 필요한 시위대는 아직 배치를 하겠지만 유사에게 명하여 그 나머지는 모두 해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겪은 평일의 노고를 생각하여, 특별히 그 계급에 따라 하사금을 주려고 하니 당신들은 짐의 말을 순응하여 제각기 직업을 갖고 과오를 범하지 말기 바랍니다.”

 

26. 군대 해산시의 군제

 

요즈음 군제는 서울에 제1연대, 제2, 제3 각 대대와 제2연대 제2, 제3 각 대대 및 포병, 공병, 기병 각 중대가 있었고, 또 그 외에 혼성대대가 있었다. 이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각 지방에는 또 진위대가 있었는데, 이때 시위 제1연대와 제2연대만 남겨 두고 모두 해산시켰다.

 

27. 경군의 해산

 

7적 등은 군심의 격변을 우려하여 일본인에게 전일보다 배나 엄하게 계엄을 하도록 부탁하고, 23일 각 대장을 불러 소속병을 훈련원으로 모이게 한 후 먼저 맨손으로 무예를 연습하게 차여 병기를 휴대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일본인들은 대병들이 병영을 떠난 틈을 타서 병영에 마구 들어가 총포를 모두 가져갔다.

이때 대병들은 훈련원에 도착하여, 무예를 다 마친 후에 은사금이 교조가 내린 뒤에 하사되는 것을 보고(하사 80원, 병졸 50원, 그 다음은 25원) 분통을 견디다 못해 그 지전을 찢어버리고 통곡하며 병영으로 돌아갔으나, 군대의 병기는 하나도 없었으므로 제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28. 박성환의 자결

 

박성환은 계속 시국이 이상하게 된 것을 살펴보고 은밀히 총포를 별고에 넣고 문을 폐쇄하여 일본인도 들여보내지 않고, 또 자신도 훈련원을 가지 않았다.

그러나 병대를 해산하라는 교조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며 그의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국가의 은혜를 입고 산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이제 국가가 망하였는데도 일본인 하나를 죽이지 못하였으니 죽어도 그 여죄가 있으므로 나는 차마 당신들이 떠나도록 놓아둘 수 없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겠다”라고 하면서, 의자에 앉아 칼을 빼어들고 목을 베자 그의 몸과 의자가 함께 넘어졌다. 이때 박성환은 10여 일 동안 입직하고 있으면서 집에 가지 않고, 다만 문을 닫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결국 자결하였다.

이때 부위구의선도 박성환과 함께 같은 날 자결하였으며, 그의 정교 1명, 졸병 1명(모두 성명을 모름)도 모두 그를 따라 자결하였다.

 

29. 한일 군대의 충돌

 

부위남상덕이 일병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이때 남상덕은 박성환이 자결한 것을 보고 큰 고함 소리로 외치기를, “박공과 함께 죽을 사람이 누구냐?”고 하자 전 대병들은 일제히 소리치기를, “죽겠습니다”고 하므로 남상덕은 그들을 지휘하여 병영을 나왔다.

이때 이미 일병들은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용맹을 발휘하여 격투를 벌인 지 이틀이 되었고 고전을 한 경우도 세 차례나 있었다. 양측 모두 시체가 쌓여 있었다. 우리측 사망자는 조사 결과 98명으로 나타나고 그중 장교는 7명이나 되었으며, 일본장 미원도 사망하였다. 이때 일병들은 숭례문을 의지하여 기관포를 발사하므로 연일 총성이 진동하였고, 성내외에 있는 민가 수백 호도 모두 소실되었으며, 남상덕도 탄환을 맞고 사망하였고, 대관권기홍도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때 많은 병대들은 남상덕이 죽고 또 탄환이 다함을 보고 사방으로 도주하여 목숨을 구제하였다.

이때 관전을 한 사람들은 탄약이 끊기지 않았으면 일병은 크게 패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미원은 날쌘 용장이었다. 그는 갑진년(1904) 러시아와 싸울 때 기공을 남겼으나, 이때 남상덕에게 살해되자 일본 병영에서는 통곡을 하였다.

그리고 해산된 병사들은 마을로 도주하여 대청과 사랑채에서 숨어 있었으므로 일병들은 집집마다 그들을 수색하였다. 그 일병들은 일본 부인들을 앞세워 내실까지 샅샅이 탐지하였으므로 그들의 포위망을 탈출한 우리 병사들은 얼마 안되었고, 성밖으로 도주한 사람들도 모두 의병들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이때 일본 부인들은 한국 병사들을 수색한다는 핑계로 많은 재산을 약탈하여 도둑들보다 더 심하므로, 민간에서는 다시 난리를 겪었다.

참위리충순은 병대를 해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서모와 결별하면서 “저의 직책이 비록 미약하지만 나라에 난리가 일어났으니 부득이 죽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돌진하는 군진으로 달려가 사망하였다.

한창 전투를 벌일 때 여학교의 간호원 수명은 탄환을 무릅쓰고 넘어진 우리 병사들을 인력거에다가 싣고 병원으로 운반하였으며, 미국인 의사 어비신(어비전 : 0. R. Avison)과 목사 조원시 등도 우리 부상자를 실어다가 제중병원으로 운송하여 그들의 치료에 전력을 기울였다.

도민 금명철, 기인홍, 금창기, 리원선 등도 금액을 갹출하여 전망장졸들의 장례를 치르고 또 제전까지 마련하여 곡을 하고 돌아갔다.

 

30. 진위대의 해산

 

이등박문은 각도에 전화를 하여 경관으로 하여금 진위대를 해산하게 하였다. 그것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훈련장에 모이게 하여 총을 일제히 세워 놓게 하고 먼저 맨손으로 무예를 시험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병사들이 무예를 시험하고 있을 때, 일제히 그 총을 거두어 갔다. 그 교조가 반포된 후 병사들은 속수무책이었으므로 탄식만 하고 있다가 어찌할 수 없이 제각기 흩어지고 말았다.

이때 량서와 관북에서도 많은 병사들이 의병들의 군진으로 투신하였고, 량호 이남 지역도 토비들과 합류한 병사들이 많았다. 그 후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나자 많은 병사들은 모두 그들과 합류하였다. 이때 안동과 원주 량대는 먼저 기회를 틈타 총을 메고 해산하였으므로 일본인들은 매우 괴로워하였다.

각도에서 병대를 창설할 때 도둑들이 모여들었으나 그들을 금지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오직 배불리 먹고 취하여 교만하고 악독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착취하였으므로 지방민들은 그들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하고 원수처럼 미워하여, 그들이 해산되었을 때는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경축하였다. 또 그 후 얼마 안되어 의병이 계속 일어나 일본과 각축전을 벌이다가 사상자 및 가산을 탕진한 사람들이 약 1000만명이나 되어 병대를 창설할 때와 같지 않았다.

 

31. 태황제의 존호

 

태황제의 존호를 수강이라고 하고, 궁호는 덕수, 부호를 승녕이라고 하였다.

부에는 총관 등의 관직을 신설하였다.

 

륭희 원년 정미(1907년)

 

1. 륭희 개원

 

광무 11년(1907) 6월을 륭희 원년 7월로 개칭하고, 연호는 태시로 하였다. 맨 먼저 올린 망자를 따른 것이다.

 

2. 영친왕리은 황태자 책봉

 

영친왕리은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때 조야에서는 새 황제가 영민하지 못하여 촉망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태자들 중 한 사람을 택하여 인심을 얻으려 하였고, 일본인들도 보호한다는 명칭을 내걸고 있었으므로 그 후사를 끊기 어려워 아직 대신들의 여론을 따랐다. 그리고 엄귀비가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아들을 높은 직위에 올리기 위해 후한 뇌물을 이등박문에게 주어 그의 힘을 빌리려 하였고, 의친왕리강은 나이가 비록 많으나 거동을 많이 잃어 인망이 없는 데다가 또 그는 고립되어 후원하는 사람이 적고 고종도 그를 좋게 보지 않았으므로,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여론은 리은에게 돌아가 정종조의 고사에 의거하여 그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3. 황제위의 정통론

 

이때 정론을 편 사람들은 새 군상이 즉위를 하여 1년 후에 개원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춘추의 대의이다. 그리고 형제 중 한 사람을 대통으로 내세을 때는 당연히 황태제라고 칭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전례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은 크게 법을 어긴 것이므로 개정을 하기 위해서 상소를 하려는 사람이 많았지만 모두 모른 체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생각해 볼 때, 이등박문이 해아사건으로 인하여 태황제를 매우 원망하고 있었으므로 광무가 하루라도 더 연장되는 것을 싫어하고, 또 만일 리은을 황태제로 칭한다면 그가 오히려 태황제의 아들이 된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4. 경무사의 개칭과 일인 중임

 

경무사를경무총감으로 개칭하여 일본인 환산중준을 총감, 목내중사랑을 내부차관, 표손일을 학부차관, 학원정길을 궁내부차관, 목하전종태랑을 탁지부차관으로 임명하였다. 일본인으로 경관의 정임이 되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등박문은 각부의 대신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였으나 나쁜 소문이 나는 것을 싫어하고, 또 인심이 소란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차관 자리를 모두 빼앗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봉급을 대신의 3분의 1을 더 주고 매사를 차관에게만 결정권을 주어, 대신들은 서명만 할뿐이었다. 이때부터 일본인이 아니면 차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5. 한성부의 사병매장과 각도 군수의 사직

 

이등박문이 한성부로 하여금 광희문 밖에다가 사망한 병사들을 매장하게 하여, 위관은 포 l필, 지 3속, 졸병은 포 10척, 지 1속을 거두었다. 이때 병란에 순직한 위관은 수십 명이 되었지만 모두 그 성명을 잃어버렸다.

각도에서 관직을 버린 군수는 수십 명이나 되었지만 모두 그 성명을 잃어버렸다.

 

6. 일인의 회녕성 구축

 

일본인들은 륙군성에서 10만환을 내어 우리 회녕 지방에 성을 축조하였다.

 

7. 진남군의 민란

 

진남군민들은 일본의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모두 무기를 들고 일어나 일본인들과 싸웠다. 이때 일본인 사상자는 10여 명이나 되었고, 또 그들의 가옥도 소실되므로 일본인들은 부산과 창원에서 병대를 파견하여 민란을 진압하였다. 이때 경남 연해 지방에서는 큰 소란이 일어났다.

 

8. 침상훈의 사망

 

침상훈이 사망하였다. 그의 시호는 충숙이다.

 

9. 각국 선교사의 기천청명회 설립

 

각국 선교사와 교도들은 우리 한국이 망한 것을 보고 기천청명회를 설치하였다.

 

10. 관동, 호서, 영남 지방의 의병 봉기

 

관동, 호서, 영남지방에 의병이 일어나 서울 동쪽 제군에서도 일시 호응하므로 일본인들은 계속 정병을 파견하였으나, 그들은 지형에 어두워 전진 후퇴를 할 때마다 길을 잃었다. 이 때 의병들은 새로운 예기를 이용하여 부인들은 나무와 돌을 운반하고 노약자들은 주식을 바치게 하였다. 이들은 천릿길에 줄을 잇고 있으면서 험한 지형을 점거하여 출몰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명령에 움직이다가 피로에 지쳐 종종 패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패전을 꺼려하여 우리 국민들에게 그 사실을 모르게 하였다. 이때 원주에서 사망한 일본인들은 1차 전투에서 200여 명, 2차 전투에서는 400여 명이었으며, 충주에서 사망한 병사는 600여 명, 그 머리를 베어 배에 가득 싣고 양근강에서 서울로 운송된 수는 4,5척 정도 되었다. 그 이하는 의병월일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1. 일인의 민응식 향제소각

 

이에 앞서 민응식은 려주의 향제에 있었다. 그 집은 세 개로 나누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무려 300여 칸이나 되었다.

이때 의병들이 그곳을 출입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인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가 그 집을 포위하자, 민응식의 아들 민병승은 즉시 도주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일본인들은 그 집에 소장된 물건을 모두 구경하고 진귀한 보화만 택하여 40여 필을 싣고 가고, 병풍 800접과 그 서화를 모두 떼어 갔다. 그리고 우포, 세단, 동철 등을 모두 불에 태우고 그의 집도 모두 불에 태워버렸다. 그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작은 나라에도 이렇게 부자가 있을까?”라고 하였다. 이때 려주, 지평, 양근, 원주 사이에서 사망한 백성들은 3천여 명이며, 소실된 가옥은 5천호라고 한다.

태백성이 귀방으로 들어가 적시를 관통하였다.

영국의 영토인 인도의 맹매(미상)에 많은 비가 내려 수심이 8척이나 되었다.

미국 뉴욕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안남국의 황제가 프랑스의 포로가 되어, 프랑스인들은 그의 셋째 아들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12. 이등박문의 귀국과 내각의 이사

 

7월 3일, 이등박문이 떠나갔다.

내각을 포덕문 안으로 이전하고 지방박람회를 서울에서 열었다.

 

13. 민두호와 리호준의 시호

 

민두호의 시호는 효헌, 리호준의 시호는 충익으로 하였다. 이때 리윤용은 이호준의 서자로, 그는 궁내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그 아버지의 시망을 올렸다. 그는 이와 같이 염치가 없었던 것이다.

 

14. 리규환경기관찰사 임명

 

리규환을 경기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5. 일인의 각도경시관 파견

 

일본인들은 각도에 경시관을 파견하였다 경기도는 반전장, 충남은 천연개, 충북은 령목중민, 전북은 증전창, 전남은 궁천무행, 경남은 소천길태랑, 경북은 영곡륭지, 함남은 송하평조, 함북은 고교천목, 평북은 관곡용, 평남은 향전행장, 황해도는 시흥시, 강원도는 도전문지조이다. 그리고 그 사무관은 염전일태랑 등 12명이며, 도주사는 횡산등삼랑 등 24명이다. 일본인이 지방관의 정임으로 임명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이등박문은 7적들과 약속하기를, 내직으로는 각부대신과 외직으로는 관찰사를 임명하고, 군수 자리는 당연히 한국인에게 임명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나머지의 자리는 구애를 받지 않기로 하였으므로 그들은 이미 각부의 차관을 제수하여 내권을 장악하고, 또 각도의 관찰관을 제수하여 외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들은 다시 많은 일본인을 각도, 각군의 재무관으로 임명하고, 그중 또 군주사도 임명하였다. 이에 내직과 외직이 모두 일본인에게 돌아가고 우리 관리들은 코를 꿰는 송아지처럼 그들의 고용원 취급을 받을 뿐이었다. 이후부터 일본인의 관직 임명 및 제수는 기록하지 않았다.

 

16. 강화진위대의 저항

 

일본장군소창이 수원에서 강화로 온 후 진위대를 해산하려고 하자 대병들은 그들을 살피고 있다가 선착장 연안에서 그들을 요격하였다. 이때 일본인 사망자는 53명이었다. 성안에도 큰 소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군수정경수는 일진회 회원이었다. 그가 통진으로 도주하자 대병들은 그를 살해하였는데, 그 시체가 해상에 떠서 교동, 연안 등지에 출몰하므로 경기 연안 지방은 매우 소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강화의 화약고와 갑관진의 군기가 모두 불에 소실되었다.

 

17. 유길준, 장박 등의 귀국

 

유길준, 장박, 조희연, 조희문, 리두황, 리진호, 리범래, 최정덕 등이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처음에 박영효가 명성황후의 시해를 모의할 때, 그는 유길준을 의지하여 그와 공모하였으나 유길준은 명성황후로 하여금 박영효를 살해하게 하여 그의 관직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 변이 위로 보고되자 박영효는 그 일을 포기하고 다시 도주하면서 꾸짖기를, “국사를 다시 그르치는 사람은 유길준이다”라고 하였다.

 

18. 민간의 렵총 회수

 

민간의 사포화약과 강원, 평안도에서 사슴을 사냥한 렵총을 모두 거두어들였다. 의병들이 사용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19. 각국 공사의 일본 2사단 송한책 저지

 

리완용은 날마다 장곡천호도를 찾아가 일본 병대가 우리 의병을 토벌해 줄 것을 간청하자 장곡천호도는, “이 일은 갑자기 이뤄질 수 없으나 만일 귀황제가 우리 천황에게 칙서를 보내면 혹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 일본인들은 2개 사단을 한국으로 보내자는 여론을 제기하였으나 일본에 있는 각국 공사들은 그들에게 힐난하기를, “귀국이 한국을 보호하겠다고 하면서 지금 병대를 파견하여 도륙을 하려고 합니까? 이것은 공례에 없는 일이니 천하에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일본인들은 그 여론을 취소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수년이 지난 후 일본인들은 의병을 매우 괴로운 존재로 여겼지만, 한번 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이런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곡천호도의 대답은 간청에 따른 부질없는 대답이었다.

 

20. 일본호위병의 7적 경비와 홍운표의 송처

 

7적은 일병들을 불러 그들의 가옥을 호위하였으나 그들의 수는 5~6명에 불과하였다. 그들에게는 매일 식사할 때마다 닭 한 마리와 계란 다섯 개를 제공하였으며, 담배도 이집트 및 부도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면 피우지 않아 그 경비에 대해 불평은 할 수 없었지만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었다.

홍운표는 리완용의 사위이다. 그는 란을 피하여 충주로 갔으나 충주민들은 그를 꾸짖으며 “당신은 역적의 사위이므로 우리 땅을 더럽히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홍운표는 그의 아내를 이완용에게 보내고 혼자 거처하였으므로 죽음을 면하였다.

 

21. 송병준의 삭발안 제출

 

송병준이 국민삭발론을 각의로 제출하였으나 그 제안은 보류되었다.

이때 의병들은 단발한 사람만 만나면 모두 살해했는데, 송병준은 이를 매우 우려하여 일체 단발을 하면 그런 일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강제 단발을 주장하였다. 이때 임선준은 “지금 온 나라가 소란스러운데 또 강제로 단발까지 하면 이것은 난리인 것이니 어찌 조금 시국이 안정된 후에 의논하지 않고 그러느냐”고 하였고, 장곡천호도도 “단발이 급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22. 리지용의 자수

 

리지용이 평리원에 자수하였으나, 그 후 곧 특사를 명하였다.

 

23. 박시병의 부녀개가 간청과 리민설의 승니가취 간청

 

박시병은 부인들의 치마를 금지할 것과 부녀의 개가 및 남녀의 의제를 동일하게 하자고 간청하고, 리민설은 스님들의 가취를 허용하자고 간청하였다. 이 일은 모두 중추원에 제의하였다.

이 때 정치적인 것은, 일본인이 필요할 경우에는 제방을 헐어 물을 흘려보내듯 하였지만, 우리 나라의 리해에 관계된 일은 대충 윤곽만 나타내어 묻어버리고 문서만 건넬 뿐이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부녀들이 얼굴을 노출하고 다닌 지 이미 1년이 지나 개가한 사람을 막론하고 공공연히 서로 모여 다녔으며, 스님들도 서로 결혼을 하였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 보아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박시병, 리민설 등이 한 말은 덧붙여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24. 리완용의 자부간통

 

리완용의 아들 리명구의 아내인 임씨는 임선준의 형인 임대준의 딸이다.

이명구가 일본 유학을 떠난 수년 후에 이완용이 간통하였다. 이명구가 귀국한 후, 하루는 안채로 들어가 이완용이 자신의 아내 임씨를 끌어안고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와 탄식하기를, “가정과 나라가 다 망하였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하며 그는 자살을 하였다. 이에 이완용은 이명구의 아내를 마음대로 소유하여 희첩처럼 여기었다.

그리고 민형식은 곧 민경식이다. 그는 그의 첩의 딸과 동거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이때 그 아이를 안고 손님들에게 자랑하기를, “점쟁이가 나에게 아들 넷을 둘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아이가 그 수를 채웠으니 그 점쟁이는 정말 귀신같은 사람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이미 작고한 판서홍종헌의 조카 모는 과부의 몸으로 있던 그의 종매를 첩으로 맞이하여 아이를 낳았다. 이것이 가장 소문난 일로서 기타 소소한 사건들 다 기록할 수 없이 많았다.

 

25. 박영효의 제주 유배

 

박영효를 제주에 안치하고, 리도재와 남정철을 모두 석방하였다. 이때 박영효는 시국을 만회하기 위해 지난날의 과실을 뉘우치고 있었으나 대세는 이미 떠나 만회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어, 일본인들은 그를 매우 원망하여 은혜를 잊은 행위로 규정하였으므로 이 옥사가 발생하였다.

 

26. 황제의 즉위례 거행과 민종식 등의 유배

 

19일, 황제는 돈덕전에서 즉위례를 거행한 후 대사령을 내렸다. 그리고 고종과 황태자 리은은 모두 단발을 하여, 서울과 지방민들에게 일제히 준행하도록 하였다.

민종식, 민형식 등이 유배지에 도착하여 한 달만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10년 이내에 유배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석방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량궁이 비록 단발령을 내렸지만 관리와 군인을 제외하고는, 단발을 하고 싶은 사람은 단발을 하고 단발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단발을 하치 않아 옛날처럼 잡박하였다.

전남관찰사금규창이 영하의 군수들을 모아 놓고 모두 단발을 하였다. 이때 외도의 관리들은 아직 단발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녕변의 아전 금기홍이 7조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면서 관찰사박승봉에게 말하기를, “소인이 비록 천한 사람이지만 나라가 망하는 때를 당하여 차마 밖을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관직을 버리고 떠나갔다. 이때 경성의 관리들도 단발을 피하여 도주한 사람이 6명이나 되었다.

 

27. 북청진위대의 해산

 

진위대를 해산할 때 북청부교조희명이 해산하기를 거부하면서 “들은 말에 의하면, 조정에서는 경비가 부족하여 병대를 해산한다고 하니 우리들은 국비를 낭비하지 않고 각자가 식량을 가지고 와서 국가를 위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장 금명환이 그를 꾸짖자 조희명은 부하들과 함께 통곡을 하면서 헤어졌다.

 

28. 리재선의 봉호하사

 

리재선을 신구하여 정은군으로 봉하였다.

 

29. 군수금태식 등의 피살

 

파평군수금태식 및 양지군수침의혁, 마전군과 죽산군의 군수들(모두 성명을 잃어버렸음)이 의병들에게 피살되었다.

 

30. 자강회의 해체

 

자강회를 해체하라고 명하였다. 그것은 군중의 마음을 선동하기 때문이었다.

 

31. 국유재산조사소 설치

 

제실소유 재산 및 국유재산조사소를 설치하였다.

 

32. 정인흥, 금중환 등의 선유사 임명

 

정인흥을 경기선유사, 금중환을 경북선유사, 홍우철을 강원선유사, 리순하를 충북선유사로 임명할 때 일병 각 30명을 파견하여 그들의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으나 그들은 의병을 두려워하여 임지를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의병들을 피해 갔다.

 

33. 공사서적 판본 보고령

 

국내의 공사간행서적판본을 모두 기록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34. 경무관소흥문의 면직

 

궁내부경무관소흥문이 면직되었다. 소흥문은 을사년(1905)에 례경청에서 금홍집이 사망한 것을 보고 그의 신낭(신낭)을 베어 버렸는데, 이때 리윤용이 그를 경무관으로 발탁하자 송병준은 리완용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일찍 금총상의 신낭을 베었으니 대감은 두렵지 않겠습니까? 대감도 신낭을 잘 보호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소흥문은 이 말을 듣고 스스로 물러났다.

 

35. 진위대장관에게 은사금 하사

 

군부리병무가 진위대 관리에게 구휼금을 하사하였다. 이것을 은사금이라고 한다. 위관과 참령은 600원, 정위는 500원, 부위는 400원, 참위는 300원, 연성학교위관은 150원, 헌병은 100원이다. 그것은 해산병의 위로금이었다. 이때 이미 병대를 해산하고 사관연성학교와 헌병사령부도 폐지하였다.

리병무의 향제는 공주에 있는데, 그는 그의 어머니 회갑연을 치를 때 많은 손님들을 초청하였으나 손님들은 그의 집을 가지 않고 “역적의 집에서 어찌 잔치를 벌여 즐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36. 일병의 보은향교 소각

 

일병들이 의병을 추적하여 보은군으로 들어가서 향교를 소각하였다.

 

37. 금홍집과 정병하 등의 복직과 유길준, 장박 등의 서용

 

금홍집과 정병하 등을 복직하고 유길준, 장박, 조희연, 리두황, 리범래, 리진호, 조희문, 권동진 등을 서용하였다.

그리고 태황제는 비록 사리에 어둡고 행실이 용렬하지만 일의 가부를 판단할 줄 알았는데, 지금 황제는 천성이 어리석어 기포와 한열도 잘 느끼지 못하므로 많은 아이들은 그를 야유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고, 심지어는 금홍집 등에게 설욕행위를 한다고 해도 윤허를 해주었다.

 

38. 일본 동경의 호우 피해

 

일본 동경에서 호우로 인한 홍수 피해가 발생하여 철도는 600리가 파괴되고, 익사자는 7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30년만에 처음 있는 수재였다.

그리고 함관에는 큰 화재가 발생하여 1만5천호가 소실되고, 사망자는 3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복강에는 장티푸스가 크게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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