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역사자료실

조선시대 ‘민간 인쇄 조보’

오늘의 쉼터 2018. 8. 6. 20:09




조선시대 ‘민간 인쇄 조보’ 발굴과 언론사적 의의: ‘세계 최초 활판인쇄 상업 일간신문’ 가능성 높아



조선왕조는 그 나름의 독특한 정치 문화인 공론 정치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중국 고대부터 내려오던 다양한 여론 수렴 제도(예컨대 상소 제도, 대간 제도, 구언 제도, 경연 제도, 신문고 제도, 조보 제도 등)를 현실 정치에 적용해왔다. 이런 노력이 밖으로는 대륙의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과 함께 해양의 왜적으로부터 간단없는 침략을 받고, 안으로는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한 농민이나 하층민들의 폭동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왕조의 500년 존속과 정치·경제·문화적 자존을 유지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여론 수렴 제도 중 하나인 조보 제도는 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발행 기관)의 주서(注書)가 담당 승지의 감독 아래 경향 각지에서 올라온 소식 가운데 취사선택해 산하 기관인 조보소, 즉 기별청(奇別廳)에서 매일 출방하면, 각 관청의 기별서리·외방저리(경주인)·계수주인 등이 필요한 기사만을 선별적으로 필사하고, 해당 부처의 기별군사나 경저의 연락책인 경방자(京房子)가 역참 등을 통해 중앙이나 지방의 관청, 사대부들에게 뉴스를 전달하는 제도였다.



실물 첫 확인 공개


이론적 차원에서 관보인 필사 조보는 당시의 다양한 사회구성원을 독자로 하여 공개적으로 발행되는 ‘대중적 보도 매체’가 아니라, 철저하게 봉건 통치계급 내부에 국한해 폐쇄적으로 발행되는 ‘내부적 통보 매체’의 성격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 조보에는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언론 활동과 군주의 반응을 반드시 실어 경향 각지로 전파되는 까닭에, 조야 모두 정치 현안의 시비득실에 대한 논의를 거듭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런 점 때문에 조정의 ‘일방적 통보 매체’로 알려진 필사 조보는 실천적 차원에선 독자층인 사대부들이 의지를 관철시키는 ‘쌍방적 매체’로서 ‘공론 정치를 활성화하는 적극적 매체’로 기능하게 됐다.


그런데 필사 조보는 대중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별서리가 기별체(난초체)라는 속기로 쓰는 까닭에 한문에 익숙한 사대부라 할지라도 정서하지 않으면 읽기가 매우 불편했다. 이에 1577년(선조 10년) 8월, 서울의 민간업자 여러 명이 의정부와 사헌부로부터 발행 허가를 얻어 승정원의 필사 조보를 목활자로 인쇄해 각 관청을 비롯해 사대부 및 외방저리 등에게 판매했다.


  

가로 40cm 세로 29cm(타블로이드판형)로서 한 면의 행 수가 좌우 각각 11행, 1행에는 21~22자다. 면의 중간 행간(판심부)에는 ‘조보’라는 판심제, 발행 날짜, 장차(쪽번호)가 있다. 민간인쇄조보의 발행날짜는 1577년 11월 6일, 15일, 19일, 23일, 24일 등이다. <사진 출처-필자 제공>


이 민간 인쇄 조보는 독이성(인쇄)과 공개성(판매) 때문에 주된 독자층인 사대부들이 매우 편리하다며 환영했다. 민간 인쇄 조보가 3개월가량 발행된 시점(1577년 11월 28일)에 이 신문을 우연히 본 선조는 “사국(史局)을 사설화하고 국가 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폐간 조치했다. 이와 더불어 1577년 11월 28일부터 조보 발행 관련자 30여 명을 잡아들여 혹독하게 문초하고 1578년 1월 15일 이들을 모두 유배 보냈으며 민간 조보를 찍던 활자를 몰수하는 한편, 언론 양사의 책임자(대사헌, 대사간)를 경질하고 필사 조보 등서자를 언론 양사·의정부의 관리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선조실록> 선조 10년 11월 경진조, <선조실록> 선조 11년 정월 정묘조).


3개월가량 발행된 민간 인쇄 조보는 문헌상(<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석담일기> <연려실기술> 등)으로 존재했지만 지금까지 실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2017년 4월 17일, 경북 영천시 소재 용화사의 지봉스님(은해사 부주지, 성보박물관 부관장)이 발굴하고 영천역사문화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민간 인쇄 조보>(추정)가 대구 소재 TBC(SBS 동시 방영)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민간 인쇄 조보로 추정되는 이 문건이 서지학계·언론학계의 공인을 받는다면, 세계 최초의 민간 상업 활판 일간신문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세계 최초의 일간 인쇄 신문으로 공인된 신문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1650년 발행된 ‘아인코멘데차이퉁(Einkommende Zeitung)’-일명 라이프치거차이퉁(Leipziger Zeitung)-이고, 최초의 주간 인쇄 신문은 1609년에 독일 볼펜뷔텔, 스트라스부르(당시는 독일령, 현재는 프랑스령) 등지에서 발행된 ‘아비소(Aviso)’나 ‘렐라치온(Relation)’이다. 즉, 한국의 민간 인쇄 조보가 세계 공인을 받고 있는 독일의 주간 및 일간 인쇄 신문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앞서 발행된 것이다.



중국, 독일보다 앞선 듯


종종대에서 선조대에 이르는 시기에 민간인들이 조보를 인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이 크게 성숙됐다. 1519년(중종 14년) 7월에 중국을 모방해 서울에 서책을 팔고 살 수 있는 서사(書肆)를 처음으로 설치했으며, 소격서 및 폐사된 절의 유기나 종 등으로 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출하도록 했다. 또한, 서울의 수표교 근처에 전문적 서책 상인이 출현했으며 경저·서원·사가(私家) 등에서 목활자로 여러 종류의 서책을 인출하는 사례도 있었다.


한편, 중국 인쇄 통보를 모방해 만들었다고 알려진 민간 인쇄 조보(목활자본)는 실물을 보기 전에는 <급선보>(목판본)와 <경보>(금속활자본)의 중간 크기(길이 23cm 내외, 폭 13cm 내외, 면수 6쪽 내외)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정작 발굴된 민간 인쇄 조보의 크기를 살펴보니, 가로 40㎝, 세로 29㎝(소책자 형식이 아닌 타블로이드 판형)로서 한 면의 행수가 좌우 각각 11행(도합 22행)이며 1행은 21~22자로 되어 있었다. 중간을 접어 판매했을 것으로 보이는 민간 인쇄 조보의 하루치는 2장가량(총 968자로 명대 <경보>의 5쪽 분량과 동일)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11월 15일자 조보의 판심부(版心部)에는 장차(張次, ‘一’)가 있고, ‘중첩(重疊)’으로 시작된 조보에는 조보의 첫 장을 표시하는 발행 날짜가 없어 두 번째 장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저지(楮紙, 닥종이)로 만들어진 발굴 <민간 인쇄 조보>는 8쪽(모두 잔편(殘片), 여러 편으로 된 책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일부 없어지고 남아 있는 편)으로, 발행 날짜(선조 10년(정축년) 11월 6일, 15일, 19일, 23일, 24일자 등)를 알 수 있는 문건이 5쪽이며, 알 수 없는 문건이 3쪽이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1577년 8월 발간을 시작해 늦어도 11월 27일까지 이어졌으므로, 이번에 발굴된 <민간 인쇄 조보>는 폐간되기 직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 인쇄 조보의 발행 간별을 살펴보면, 우선 주간보다 자주 발행됐으며 23일자와 24일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간의 가능성이 아주 높다.


각 면의 중앙 행간(판심부)에는 ‘조보(朝報)’라는 판심제(版心題)와 함께 발행 날짜(예컨대 丁十一 二十三)가 있어 ‘일정 시기에 발행된 인쇄 조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필사 조보를 지칭하는 용어는 다양하다. 즉, 조보(朝報), 조지(朝紙), 저보(邸報), 기별(奇別), 분발(分發), 난보(爛報), 경보(京報), 경기(京奇)등이 있는데, 공식 명칭인 ‘조보’를 사용했으며, 필사 조보와 마찬가지로 제호는 따로 두지 않았다. <선조실록>이나 <석담일기> 등에 따르면, ‘목활자로 인쇄됐다’고 했지만, 서지학 전공인 남권희 교수(경북대 문헌정보학과)는 목활자를 기본으로 하고 금속활자(세종 16년에 만든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추정)를 10∼15%가량 함께 사용했다는 것이다.


명나라 조보가 조선의 민간 인쇄 조보보다 앞서 인쇄됐다는 것은 사실일까? 1598년 선조에게 올린 정탁(1526∼1605)의 차자에 따르면, “중국 조보가 어떠한 규제도 받지 않고 매일 바쁘게 인행되고 있다(<藥圃集>卷三十九, 晴勿禁朝報箚, “中朝通報, 本無所諱, 逐日刊印…”)”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정진석은 “우리나라 민간 인쇄 조보가 세계 최초로 인쇄된 신문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중국 송대에는 정부 관보인 조보를 목판, 즉 누판(鏤板, 판목에 그림이나 글자 따위를 새김)으로 인쇄했다는 사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명나라 인쇄 문화사를 살펴보면, 만력(萬曆, 1573∼1620)에서 천계(天啓, 1621∼1627)에 이르는 동안 변함없이 필사와 목판인쇄의 두 가지 방법이 병존했으며, 숭정(崇禎) 11년(1638)에 겨우 활판인쇄를 시작했고 숭정 말년에 이르면 활판인쇄를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선조 10년(1577)에 보았다는 명대의 통보는 필사본과 활판인쇄본의 중간 단계인 ‘목판인쇄본’으로 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1577년 8월부터 11월까지 약 3개월 동안 발행된 조선시대의 민간 인쇄 조보는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일간신문’일 가능성이 크며, 같은 시기에 발행된 명나라의 인쇄 조보는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 일간신문’으로 여겨진다.



‘왕명’부터 ‘자연재해’까지, 근대 신문에 가까워


필사 조보의 내용은 대체로, ①국왕의 명령과 지시[傳敎, 備忘記], ②당면 정책 및 중요 문제에 대한 유생과 관료들의 건의[疏狀, 疏箚], ③건의 및 보고에 대한 국왕의 답변[批答, 下批, 啓下], ④국왕이 관민에게 보내는 회유문[綸音], ⑤관리들에 대한 인사행정[都目政事] ⑥자연계 및 사회에서 발생한 특이한 현상인 기문기사(奇聞奇事, 災異記事), ⑦경향의 관청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 및 복명[啓目, 啓本, 單子, 草記, 狀啓] 등으로 되어 있다.



이번에 발굴된 민간 인쇄 조보의 내용을 살펴보면 비록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앞에서 언급한 항목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 특히 공의전 왕대비(인종비인 인성왕후)의 병환, 소 전염병(?疫, 牛馬之疫)의 창궐, 혜성의 일종인 치우기(蚩尤旗)의 출현 등은 동시대의 기록물인 <선조실록> <석담일기> <우계집> 등에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인사행정이나 사직·휴가 신청으로 드러난 인의 유염(1588년 윤6월 풍천부사 → 1595년 11월 만포첨사 → 1597년 9월 경기방어사)과 가주서 신식(1586년 5월 지평 → 1586년 8월 헌납 → 1594년 12월 사간 → 1595년 2월 홍문관 교리) 등을 비롯한 9명의 인물(한효순, 허진, 노직, 허숙, 한수, 유대수, 이정형, 남전, 송응형 등)도 예외 없이 <선조실록> 등을 통해 역임한 직책들이 확인되어 동시대 인물임을 검증할 수 있다. 이외에도 경연 개최 여부와 성변·날씨 등의 재이 관찰(첫 면 앞쪽에 배치), 행정관청(예컨대 관상감, 승정원, 한성부, 이조, 예조, 경기감영 등)의 보고, 국왕의 전교와 비답·계하, 재이 발생에 대한 왕의 자책과 상신들의 계언 등도 기재되어 있다.


한편, 발굴 민간 인쇄 조보의 기사 문장을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처럼 순 한문으로 되어 있지 않고, <승정원일기>에 흔하게 등장하는 이두 표현이 다양하게 사용됐다는 점이다. 물론, 조보 출방 담당자가 승정원의 하급 관리인 주서(注書)이므로 자연스럽게 이문(=이두)을 많이 사용했을 터인데, 민간 인쇄 조보의 편집자들도 필사 조보의 기사 문장을 그대로 베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의 민간 인쇄 조보에서 사용된 이두 표현은 是白乎等用良, 是如, 爲白良置, 爲白, 爲白置, 是白去等, 爲白在如中, 是白置, 是白有亦, 是白昆, 不得事是白昆, 是白沙餘良, 乙, 段, 亦, 節, 兮, 次, 先可, 上下, 爲有昆, 亦爲白有臥乎所, 向箭, 耳亦, 敎是, 望爲白置 등 25가지가 넘는다.


조보에는 일상적인 날씨를 비롯해 천문, 기상 상태, 천재지변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번의 민간 인쇄 조보에도 혜성의 일종인 치우기 출현을 비롯해, 소 전염병의 창궐, 재앙의 도래에 대한 왕의 자책과 상신들의 계언 등 재이(災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회적 자연적 돌발 사건인 ‘기문기사’에 대한 성격을 어떻게 보는지도 중요하다. 언론사학자인 최준 교수는 광해조에 일어난 세 가지 특이한 사건(4개의 발과 날개가 달린 병아리 탄생 사건, 색깔이 독특한 달의 출현 사건, 계란만 한 우박이 나는 새를 죽이고 사람이 놀라 죽은 사건)을 나열하면서, 이러한 사건들을 ‘사회면 가십 기사’로 간주했다. 즉, 단순한 관보가 아니라 ‘근대적 신문에 가깝게 접근했다’는 시각을 보였다.


‘자연재해’ 또는 ‘범상하지 않은 자연현상’으로 풀이되는 재이(災異)는 인간사와는 무관한 것이지만,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 특히 유교사상가들은 인간 행위와 관련해 발생한다고 인식했다. 전한의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104)에 따르면, “하늘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는 까닭에, 하늘과 사람은 서로 감응한다”는 ‘천인감응설’을 주창했다. 즉 그는 “통치자의 그릇된 행위가 하늘을 노하게 하면 하늘의 진노는 자연적 이변(예컨대 지진, 일식, 성변, 한발, 홍수, 적조, 병충해 등)으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천인감응 사상은 삼국시대를 시작으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받아들여졌다. 그런 까닭에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대 사서에는 재이 기사가 ‘군주의 실정을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꾸짖는 중요 정치 기사’의 일환으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폐간 후 306년간 금지된 인쇄 신문


민간 인쇄 조보 발행자들은 ‘서울에서 글자를 알면서 일없이 놀고먹는 자들(京中識字游食之人)’, 또는 ‘서울에서 일없이 노는 자들(京中游手之輩)’이다. 민간 조보 발행 사건 치죄자 30여 명 가운데 신문의 발행·편집·조판 담당자들은 성격상 식자층이었을 것이며, 배달·판매·인쇄 담당자들은 식자층이 아니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관련 사료에 언급된 ‘기인(其人)’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론사학자와 왕조실록 번역자 대부분은 ‘기인등(其人等)’을 ‘조보를 인행했던 사람들(朝報印出人等)’의 의미로 해석하면서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시대 초반 이래 지방 향리의 자제를 뽑아 중앙 관아에 복속시켜 해당 지방행정의 자문에 응하게 함으로써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인질로서의 ‘기인’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들은 고려시대까지 지방 세력인 향리의 자제로서 충당됐기 때문에 ‘양민 식자층’이었으나, 여말·선초의 전환기에 이르러 궁실 축조 등 잡역에 종사하게 됐고, 중앙 통치력이 강화되던 태종조 특히 소목법(燒木法)의 개정 이후 주로 ‘소목역에 종사하는 잡역부’가 됐다. 선조 때 기인들은 지방행정의 자문자에서 벗어나 각 궁방과 관사에 시탄(柴炭) 공급 전문상인(貢人)으로 전환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이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필사 조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공개성과 영업성, 독이성을 함께 겨냥한 새로운 정보 전달 매체인 민간 인쇄 조보와 정보 전달의 매개자인 ‘기별서리·외방저리·계수주인’, 다양한 고급 정보에 목말라하는 사대부들, 그리고 새로운 정보 상품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서울 소재의 ‘일부 기인’들 간의 상호관련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간 인쇄 조보의 폐간 이후 조보를 인쇄하자는 주장이 200년이 지난 1776년 5월 정조에 의해 한차례 제기됐으나, 1883년 10월 ‘한성순보’가 출현하기 전까지 인쇄 신문은 나오지 못했다. 이 사건이 한국 신문사에 끼친 부정적 파급 효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577년 8월 조선에서 민간 인쇄 조보(활자본)가 처음 나왔고, 명나라에선 그 이전부터 인쇄 조보가 목판본으로 발행됐으며, 1600년경 일본에서 부정기 인쇄 신문이 발행되어 1600년경에 이르면 한중일 공히 인쇄 신문을 발행한 경험을 갖게 됐다. 이런 사실은 한중일 동양 3국의 신문 인쇄 문화가 독일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신문 인쇄 문화보다 앞서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번에 발굴된 <민간 인쇄 조보>는 선조의 탄압 정책으로 대략 3개월 만에 폐간되는 비운을 맛보았지만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인이 발행하고 활판인쇄술을 세계 최초로 채용해 발행됐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상업 일간신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일간 인쇄 신문 기준으로 독일보다 70여 년 앞서 발행된 민간 인쇄 조보가 새롭게 발굴됨으로써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본(불국사 석가탑 사리공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본(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하)>)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인쇄 문화 대국으로 명실상부하게 만방에 선포하는 계기가 됐다.


글 / 김영주 (경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