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문무왕의 비석에 '투후(秺侯)가

오늘의 쉼터 2010. 4. 17. 17:26

 

문무왕의 비석에 '투후(秺侯)가 7대째를 이어져 내려왔다'는 말은,

중국에서 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기원전 86년)가 초대 투후가 된 후,

그의 후손이 투 지방의 제후로 7대째 내려왔다는 것이다.

 김일제(金日磾)라는 글자는 우리나라 비석에 보이지 않으나 투후에 대한 것이

한서(漢書)에 나와서 그 내력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발표 때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전한을 멸망케한 왕망과 힘을 같이 했던

투후가 세훈 신(新)나라는 후한에 의해 사라지면서 金씨의 기록도 사라진다.

   

결국 전한(前漢)에 의해 멸망한 훈 제국의 후예가 전한을 멸망시킨 셈이다.

그리고 그 후예가 쿠테타에서 실패한 후 신라에 와서 삼국을 통일시키는데

단지 그 후예라는 것을 비석에 명시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으로는

'훈 제국'을 부활시키려했다는 의지가 강하는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태조(太祖) 성한(星漢)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김알지의 아들 세한(勢漢)과 음이 비슷하여 그렇게 추정하고는 있으나

김알지와 세한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즉 세한을 神話化한 것이 김알지가 아닐까.

김알지의 아들을 태조로 삼을 수는 없다.

아직은 성한의 실체는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신라 김씨 왕이나 고승들 그 후손들은 김일제의 후손임이 틀림없다.

문무왕비에 새겨진 15대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勢漢이 되고,

흥덕왕비에 새겨진 24대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다시 勢漢과 만난다.

이 얼마나 또렷한 역사적 기록인가. 
  

이 사실은 중국 역사가들 보다는 유라시아 역사가들에게 흥미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흉노가 한 나라에 망하기 전에는 흉노가 세운 광대한 유라시아 제국은

세계사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흉노'라는 말이 흉하면 '훈'이라고 부르자.

그러니까 훈 제국은 망했으나 영원히 망한 것이 아니고 신라에서 부활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세계사에서 괄목할 만한 경악스러운 사건이다.

  그 발단이 당군을 물리친 기념으로 세운 통일신라 최초의 사원, 사천왕사의 목탑에 장엄된 사천왕상이다.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 그에 대한 간단한 기사가 실려 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비록 크게는 다루어지지 않았으나 앞으로 이를 시작으로 한국역사의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리라 확신한다.

발표 때 이런 것 까지 청중에게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 기사는 역사학자에게 던진 하나의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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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사천왕사(寺) 사천왕상(四天王像) 왜 4개가 아니라 3개일까
강우방 前경주박물관장
"경주 김씨는 흉노 후예 북쪽 지킬 필요 없었다"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지금은 터만 남은 경주시 사천왕사(四天王寺)는 통일신라의 대표적 호국 사찰이었다.
 
문무왕이 당나라의 침공을 사전에 탐지하고 이 절을 지어 원력으로 당을 분쇄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일제시대 사천왕사 터를 발굴했더니
 
수호신의 부조상이 조각된 '녹유전(綠釉塼·녹색 유약을 입혀 구운 벽돌판)' 파편들이 나왔다.
 
통일신라의 조각승 양지(良志)가 만든 것으로 갑옷 차림에 화살·칼 등을 든 수호신들의 자태가 드러난

걸작품이다.

이 수호신 조각의 정체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엇갈렸지만 수호신상의 정체는 '사천왕상(四天王像)'

이라는 통설이 유력했다.

그런데 2006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사천왕사 터를 다시 발굴한 결과 녹유전상(像)이 3개만 확인돼
 
학계를 당혹시켰다.
 
사천왕상은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方位神)이어서 4개의 상이 한 세트를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사천왕상이라면 왜 상은 3개뿐일까. 사천왕이 아닌 다른 수호신으로 봐야 하지는 않을까?

 

▲ 경북 경주시 사천왕사 터에서 발굴된녹유전 사천왕상. 발굴된 파편들을 이어 붙인 것이다.
오른쪽은 강우방 전 국립 경주박물관장이 그린 복원도다. /강우방씨 제공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26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강연에서 "사천왕사의 사천왕상이
 
3개뿐인 이유를 문무왕 비석에서 찾았다"고 밝혔다.

이 조각들이 사천왕상이라고 주장해온 강씨는 "신상들의 차림새는

분명 사천왕인데 왜 상이 3개뿐인지 이해가 안됐는데,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했다.


문무왕 비문에 쓰여 있는 신라 김씨 왕가의 계보에는 '투후(禾宅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5행),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6행) 등의 문구가 나온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투후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김일제다.
 
한나라와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됐고 무제에 의해 '투후'로 임명됐다.

 

경주 김씨는 흉노의 후예라는 것이다.

'성한왕'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로 추정된다.

  강씨는 "사천왕사의 사천왕상은 불법(佛法)의 수호신인 동시에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의 수호신"이라며
 
"문무왕이 북방에 위치한 훈 제국의 후예임을 비석에 천명했기 때문에 북방을 방위할 필요가 없었던 것"

 이라고 했다.

사천왕상 중 북방에 맞서 국토를 수호하는 다문천상(多聞天像)은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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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신라의 역사는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경주에서 오래동안 살면서 가졌더던 의문들이 하나하나 풀려지기 사작합니다.
 
박물관에서 발표가 끝난 후 질문을 받았는데 우리나라는 토론문화가 없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것은 金씨의 족보나 신라에 한 한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특히 유라시아 역사가의 관심을 촉구하며 이 문제만을 다루는 연구회가 결성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민족은 왜 이렇게 소심한 민족이 되었나요.
 
우리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왔지만 마음 속 깊이는 중국에 예속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이 쳐 놓은 만리장성 밖의 북방민족의 혈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을 누비고 다녔던 기마민족의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갖 감상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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