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8년 12월 3일(수) 13:00
•장소 : 울산광역시가족 문화센터 B동 대연회실(울주군청 옆)
□ 주제발표
•박제상 출신지-울산설을 중심으로- 송수환 전 울산시사 편찬위원회 전문위원
•박제상 유적지 진위 논란-울산과 경주를 중심으로- 장성운 울주향토사연구소장
•박제상 문화제추진 방향-김규호 경주대 교수
□ 지정토론자
•김홍두(울산매일 신문사 문화부장)
•김대곤(국제펜클럽 회원 시인)
토론자 김대원 편
- 치술령 망부석의 위치와 관련 심포지엄
나는 이런 이유로 망부석이 치술령 정상 동편의 바위요 바위라야만 한다고 믿는다.
토론자 시인 김대원
개인 인사
이번 박제상 문화유적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이러한 자리를 마련하여 주신 향토사연구소장 장성운 교수님과 유관 여러 학박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올립니다.
본인은 사학자가 아니지만 태어난 고향이 치술령을 마주한 마을이고 그곳에서 충효의열(忠孝義烈)을 상징하는 바위 치술령의 망부석을
바라보고 자라난 덕분으로 이 자리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태어난 후 내 선대조와 이 웃 여러 어른께서 전해들은 망부석은 내 집 방문만 열면 보이는 바위요
석계초등학교에서 6년간 목청 높혀 부른 교가(校歌)가 바로 망부석의 혼 충효의열의 절개를 기리는 노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 때마다“망부석”이라는 표지판과 망부석의 전설을 소개한 표지판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표지판은 뽑혀 숲속에서
버려저 있었고 정상에서 망부석으로 통하는 길을 막혀 있었으며 영봉에 망부석 방향 표지판이 반대쪽 서쪽 길로 향하게 가르치고 있어
정말 경악했습니다.
그때 저는 오직 작가적 양심 때문에 옛 어른께서 일러주신 망부석 관련 말씀을 상기하며 그 사적 자료를 모아서 한권의 책을 내기로 하여
결국 내었습니다.
그래서 출판 기념을 하려고 울산시와 경주시의 문화원을 통하여 향토 관련인을 한자리에 모시고자 등기우편으로 초청장을 보냈습니다만
관련 해당 단체 공무원은 물론 향토사학자는 거의 오지 않고 외동읍민 몇 명과 동기 동창생 몇 명과 문협회원만 참석했습니다.
다행하게도 문화원 부원장님도 문협회원이고 향토사학연구소 회원 중 한분이 문협회원이라 기념회 도중에 관련 토론을 했습니다만
저는 허허 했습니다.
당시 어렵게 500여만원의 개인돈을 투자하여 코오롱 호텔에서 출판 기념회를 열었지만 내가 기다렸던 분은 단 한명도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계속 자료를 찾고 울산시와 경주시 홈 게시판을 통하여 그 사실을 밝혀 왔습니다. 그후 9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이 심포지엄의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향토사학자 자격으로가 아니라 치술령 산하에서 태어난 문학인으로 지성인의 양심 때문에 참여하였으니
비록 미흡하고 온당치 못한 주장이 있다 해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언(緖言)
소인이 생각하기로 나라에서 문화재를 지정하는 이유는 이를 통하여 크게는 모든 국민에게 옛 선조님의 얼을 되새겨 민족관과 국가관을
확립시키는데 있으며 작게는 고유한 지방 정서 향토문화를 갈고닦아 애국애족의 향토민과 시민정서생활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그 문화재! 즉 그 지방의 문화유적을 통하여 과거사를 이해시키고 그 과거사를 통하여 오늘 날 생존하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고
나아가 미래의 후손에게 보다 정의로운 사회와 민족문화 창달에 이바지하게 하기위해서 문화재를 지정하는 것으로 압니다.
모름지기 향토사학가나 학자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사리사욕 사견을 버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컨대 어떤 도청소재지의 관할구역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지역 이권 때문에 문화재를 지정하는 국가대계의 근본 방향과 목표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문화재가 향토색 때문에 잘못 지정되어서도 안 되고 지역이권 때문에 문화재 자체의 이상과 가치를 훼손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치술령 망부석의 경우 경상도남북 도경계를 초월하여 치술령 산 전체를 “치술령문화관광 특구”로 지정하여 남북이 함께 박제상의 정기를
기려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처음으로 문화재를 지정한다면 어느 곳 어느 위치에 정하는 것이 진정 미래의 국가발전에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셔야 하고 이를
보기위해 등정하는 등산객이나 관광객으로 하여끔 어느 방향에다 문화재를 지정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으로 국민 정서에 이바지 하고
조상들이 남겨놓은 얼이나 정기를 더 잘 인식시키게 하고 깊은 감명을 주게 하는가에 그 가치와 무게를 두어야 할 줄 믿습니다.
김대원
본론(本論)
치술령과 망부석의 전설
“전설(傳說)”이기 때문에 - 혹은 “설화(說話)일 뿐이다”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은 “그것은 다만 확인이 불가능한 설화요 전설일 뿐이다.”하고 아무렇게나 해도 큰 탈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어떤 설화가 만들어지는 그 이유는 그만한 이야기가 생길 수 있는 주변 환경과 조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망부석이라는 전설도 그 바위가 있었던 위치와 방향 그 전설이 성립될 수 있는 시기와 환경이 일치가 되어 생기게 된 전설이요 설화라고
봅니다.
보통 설화를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이를 구비문학(口碑文學)이라 고도합니다. 이를 분류하면 신화, 전설, 민담, 등입니다.
신화는 신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천지의 창조, 민족이나 성씨의 시조의 탄생 등과 같이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신비한
이야기를 말하고, 전설은 사물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어떤 지명이나 성명에 얽힌 사연이며, 민담은 평범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일상에 관한 흥미 위주로 만든 것 입니다.
이런 설화를 통하여 우리는 그 민족의 전통 사상과 가치관, 정서, 문화를 알 수 있고 그 설화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문학이나 예술이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치술령, 망부석의 설화는 신화도 아니고 민담도 아닙니다.
아주 미미하나마 그 전설의 내용이 역사서에 기록된 자료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입니다.
즉 치술령이란 산 명칭을 보면 신라초기 실성왕의 아들 이름이 “치술”이었다 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또 망부석(望夫石)을 보면
눌지왕대에 당시 삽량주간 박제상이 왕명을 받고 그 왕제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 후 왜왕을 속이기 위해 거짓항복하고 자기 가족을
응징토록 하여 결국 박제상의 가족은 어디엔가 감금당했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금된 박제상 부인이 치술령 산정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혼은 남편을 만나러 왜국으로 갔고 몸은 굳어 돌이 되었다고 하니
결국 그 부인이 감금 유배된 곳이 치술령 정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전설로 남겨진 역사서의 자료이나 그 자료의 흔적이 도처에 있으니 이는 구비문학일지라도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몸이 굳어 바위가 된 것은 사람이 지어 만든 내용이고 기다리다 떨어져 죽은 그 바위를 망부석이라고 후세사람이 칭하다 보니
몸이 굳어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또 이 사실을 1934년도 울산 읍지 고적부분에 보면 아영이가
[어머니와 언니 동생 묻을 것을 염려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굳어 바위가 된 것이 아니라 시체가 있었기에 묻을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따라서 망부석 설화는 몸이 바위가 되었다고 했기에 설화가 된 것이지 사실은 투신자살한 자살 현장이 이 바위였다고 역사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설화라 하였다하여 어떤 학술로 혹은 권위로 아무 바위나 잡고 망부석이라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망부석(望夫石)
치술령 정상 지번은 녹동 산 161-2 이고 그 동편 약 20m 하에 망부석이 있는데 이곳 지번은 경북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녹동 산 161~1입니다.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성저 관문성을 따라 서쪽 길로 덕골 못을 지나 남방 쪽으로 난 길로 정상에 오르면 정상에 미치지 못해 망부석이 있습니다.
녹동 본동에서 치술령 정상으로 올라가면 급경사가 되어 만화리에서 올라가기 보다는 힘들지만 등산객들 중에는 이곳으로 오르는 것이 더
운동이 된다면서 이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바위는 거대한 화강암으로 높이가 18미터가 더 됩니다.
정상은 9m× 3.5m의 넓이가 되어 평평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동해를 보면 동해가 아주 잘 보입니다.
이 바위는 동해는 물론이고 박제상이 일본으로 떠났다는 율포가 잘 보이는 곳이며 일본을 응징하는 위엄을 갖추고 있는 바위이며 누가 보아도 머리가 숙여질 수 있는 웅장함이 있습니다.
박제상가의 충․효․의․열 4절의 정기가 서려 있어 극일의 정서에 이바지할 수 있는 좋은 위치와 형태와 조건을 갖추고 있는 바위입니다.
그리고 경주시에서 이 망부석을 문화재로 등록하지 못한 이유는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설의 바위로 둘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현재 울산시에서는 만화리쪽에서 정상으로 올라 정상 약 300m 못 미쳐 크기 가로 7.3m, 새로 4. 2m,로 의 바위가 국수봉을 보고 있는데 치술령 등선으로 비켜 바라보면 멀리 장생포 방향의 동해 바다가 일부 보입니다.
본래 자연석이었던 이 바위에는 근래에 와서 [望夫石]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글은 1979년 울산에서 결성되었던 울산향토사 연구회에서 새긴 것이라 합니다.
예서체로 된 이 글은 석산 이길호씨가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울산시의 경우 망부석을 1934년 일제 때 발간된 『울산읍지』의 고적 난 맨 끝에 있는 ‘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읍지의 문장을 해석하면 「지금 망부석 좌우에는 두 개의 바위가 있는데 두 계집의 몸이 화하여 된 것이라고 전하고, 또 한설은 부인을 지탱 시킨 베틀 바위라 한다.」라는 내용입니다.
만약 그 읍지 기록대로라면 망부석은 중앙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맨 동족편의 바위에 각인을 했으므로 딸에 해당하는 바위에 각인한 것입니다.
소인의 생각으로는 한곳의 바위가 아니라 치술령 정상을 중심으로 산 전체를 두고 해석해보면 이해되기도 한다.
왜냐면 망부석 오른 편에는 세효녀 바위가 있고 왼편에는 베틀바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망부석에 서서 동해를 바라보면 치술령 정상 오른쪽 등선 서편으로 300m 내가면 효녀아기바위가 나오고 정상 왼편 등선 북편 150m 정도 내려가면 베틀바위가 나옵니다.
따라서 망부석은 정상 동편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높이18미터 바위가 됩니다.
이 망부석을 통하여 충효의열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여 석계초등학교에서는 학교 교가 가사내용에 담고 있습니다.
동해물결 멀리 보는 치술령 큰봉/ 장엄하다 우리고장 자연의 병풍/ 이곳에다 자리 잡은 우리의 학교/ 큰 희망 벅찬 영광 배움의 터전 / 지성껏 배우자 부지런히 일하자/대한의 새 일꾼 낸 줄을 아느냐/ 길이길이 빛내자 석계초등학교
‘크나큰 충절이여 천추의 교훈/ 남기신 박제상의 영원한 생명/ 망부석 전해 오는 거룩한 정열/우리의 배움이요 행실이로다. 지성껏 배우자 부지런히 일하자/대한의 새 일꾼 낸 줄을 아느냐/ 길이길이 빛내자 석계초등학교. 라는 교가가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박제상 부인이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동해를 바라보고 천지신명께 기도드린 기도처이고, 어느 날 치술령 산신께서 부인에게 나타나‘흰구름이 솟구치면 남편이 살아오고 붉은 구름이 솟구치면 남편이 죽어 온다. 는 계시를 받은 곳입니다.
어느 날 동해를 바라보다 붉은 구름이 솟구치니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 죽어 혼이 되어 남편이 있는 그곳으로 날아가 남편을 만나서 계림국으로 모셔오겠다고 날아간 후 그 몸이 아직도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동해 건너 일본을 바라본다고 해서 <<망부석>>이라고 불립니다.
뿐만 아니라 東景通志序에서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망부석(望夫石)이 치술령 머리 즉 정상에 있음을 김종직의 치술령 관련 시와 유호인의 망부석 관련시가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김종직학자는 조선 전기(세종13~성종23년)의 성리학자로 1431년출생 하셨고 1492년에 돌아가신 분으로 그 출생지는 경남 밀양이고 경력은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1459)한 학자로 그 가 남긴 저서는 '유두유록'등 이 있다.
동경통지서에 그 시를 밝힌바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편 이십삼(二十三)쪽 ~ 이십사(二十四)쪽 과 치술령(鵄述嶺) 박제상(朴堤上) 십사(十四)쪽 >에 보면 시 한편을 남기셨는데 이 시에 치술령의 망부석 위치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그 시(詩)
鵄述嶺頭望日本
치술령두망일본= 치술령 정상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粘天鯨海無涯岸
점천경해무애안 = 바다의 배가 하늘에 붙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良人擧示但搖手
양인거시단요수 =부질없이 손 흔들어 보이든 그님
生歟死歟音耗斷
생여사여음모단 =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조차 끊기었소.
長別離死生寧有
장별이사생녕유 = 이별한지 너무 오래라 살아 죽지 않고 편히 잘 있는지
相見時呼天便化
상견시호천편화 = 서로 만날 그 때까지 편히 잘 있기를 하늘에 호소한다.
武昌石烈氣千載
무창석열기천재 = 굳세고 창성한 반석 같은 님의 그 절계 천만년 이어가도록 .
干空碧
간공벽 = 저 푸른 하늘에 울타리 만들어 막으리라
치술령 정상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수평선 저 넘어 정처 없이 떠나는 배(고래)
내 님은 부질없이 손들고 흔들었다
해어 진지 너무 오래라 죽지 않고 잘 있는지
소식이 끊어진 이후 생사가 묘연(杳然)하다
하늘에 부탁하노니 서로 만날 그 때까지 편히 계시기를
굳세고 창성한 반석 같은 님의 그 절계 천만년 이어가도록
저 하늘에다 울타리 만들어 막으리라
<*점천 =수평선으로 고래를 =배로 번역함>
鵄述嶺頭望日本
분명 치술령 <중턱이 아닌> 머리에서 일본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유호인(兪好仁) 의 시(詩)
孤臣一死答君恩
고신일사답군은 =한 신하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위해 외롭게 죽으니
萬里扶桑寒節尊
만리부상한절존 = 일본 만리를 높이 지킨 그 절개가 얼게 했다
鵄述峰頭三丈石
치술봉두삼장석 = 삼십척(三十尺) 높은 바위 치술봉 정상에서
愁雲猶帶望夫魂
수운유대망부혼 = 지금도 깊은 수심에 잠긴 체 지아비의 넋을 기다리는 구나
의역(意譯)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한 신하가 외롭게 죽으리.
고귀하게 지킨 그 절개는 온 일본 열도를 얼개 했다
삼십척 높은 바위 치술령 정상에서
지금도 깊은 수심에 잠긴 체 지아비의 넋을 기다리고 있구나.
鵄 述 峰 頭 三 丈 石 치술봉 머리에 3장(30자)높이의 바위를 말하니
그 바위역시 치술령 <중턱의 바위가 아닌 >정상의 바위를 말한다.
이렇게 울산 읍지(1934년)가 만들어지기 근 480여 년 전 1450여년에 이미 이 망부석 위치가 치술령 중턱이 아닌 산머리(정상)에 있음을 정확하게 밝혀 입증하고 있습니다.
베틀바위
국대부인이 죄 없이 치술령에 유배되어 남편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기 위해 베틀을 차려 놓고 딸들과 교대로 베를 짰다고 하는 바위다. 치술령 정상에서 북쪽 능선 약 100m 아래에 있는 세 개의 바위로 가장 높은 맨 아래 바위높이가 약 7m 이고 중간바위가 5m이며 위쪽 낮은 바위가 약 2.5m이다. 특히 중간 바위는 흡사 베를 감은 것 같은 12층계가 있어 특이하다. 정상 북쪽 등선약 15미터 하에 꼭 베틀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며 그 바위하단엔 두루마리같이 생긴 기석이 김겨 있다.
*•세 효녀 아기바위
박제상의 세 딸이 치술령에서 어머니와 함께 머물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다는 세 효녀의 전설과 아기∙아경의 두 처녀 시신을 묻었다는 곳으로 이 바위는 치술령 정상에서 약 300m 남서쪽 능선을 타고 만화리 쪽으로 내려가면 바위가 세 개 있는데 제일 높은 동쪽 바위가 4m 20cm 이다.
울산에서 주장하는 망부석을 <<세 효녀 아기바위>>라고 칭했습니다.
'박제상의 세 딸(아기(阿奇)·아영(阿榮)·아경(阿慶)도 함께 치술령에서 아버지를 기다린 효녀'라 하여「세 효녀아기바위」라 전한다. 나중에 맏딸 아기(阿奇)와 셋째딸 아경(阿慶)이가 어머니와 같이 떨어저 죽은 후 혼은 새가 되어 은을암에 숨었다. 그 은을암을 마주하는 산 치술령 서편 양지쪽 이 바위 밑에다 그 육체인 시신을 묻었으므로 맏딸 아기의 이름을 붙여 「아기(阿奇)바위」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또는「세 처녀바위」 혹은「세 공주바위」라고도 불리는 것은 세 처녀가 산정에서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기다렸다는 의미입니다.
공주라는 것은 처녀를 미화시켜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전해오는 이 바위의 명칭을 필자는「세 효녀아기바위」라고 칭하기로 했습니다.{고(故) 안응묵 옹. 안병옥. 김호곤 김영곤 윤병길.등 구전]
망부석 그 두 군데의 진위(眞僞)
지금부터 치술령 동편의 바위가 본래 앙부석임을 입증할 자료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합니다.
1)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날 그 시에는 박제상의 가족은 금성(金星) 가까이 있었다.
박제상 가족은 박제상이 고구려의 보해를 구하려 가기 전까지는 삽랑주( 良州) 간(干:태수)으로 양산에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그의 가족이 이사를 하여 수도인 금성 가까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내용들은 많습니다.
아직도 울산쪽의 일부 인사들은 당시 박제상의 집은 양산에 있었고 그 부인의 친정집이 두동면에 있었으므로 박제상의 도왜(渡倭)할 시에 부인은 두동면 만화리 어디에 있었다고 합니다. 부인은 친정집에서 매일 치술령을 오르내리며 남편을 기다렸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습니다. 과연 그때 부인은 지금의 두동면에 있었을까요?
《제1증명》'역사서'에서
『삼국유사』 98쪽 위에서 15번째 줄부터 읽어보면 박제상의 도왜 직전 상황을 대강 기록한 후 같은 책 100쪽에서 그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므로 전후 사정을 자세하게 검토 연구분석해 봅시다.
①-1. 이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말을 탄 채 두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하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 갯가에 이르렀다.
①-2. 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갔으나 남편은 이미 배위에 오른 뒤였다. 아내는 간곡하게 남편을 불렀다. 하지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에 이르렀다」는 그 내용과 ①-1의 내용을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는 같은 책 100쪽 위에서 10번째 줄의 「처음에 제상이 신라를 떠날 때 부인이 듣고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었다. 이에 망덕사 문 남쪽 사장(沙場)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하여 그 사장(沙場)을 장사(長沙)라 불렀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박제상 자택과 왕실이 그리 멀지 않은 부근에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박제상 부인이 만약에 왕실과 거리가 먼 양산에 있었다면 박제상이 금성에 있는 왕을 배알하고 말을 탄 채 곧장 달려 율포로 갔는데 어떻게 아내가 남편의 떠났다는 소식을 그렇게도 빨리 듣고 즉시 뛰쳐나와 남편을 뒤쫓아 가다 더 이상 지쳐 뛰지 못하고 모래바닥에 발을 뻗대며 길게 부르짖은 곳이 현 경주 배반 앞개울 장사와 벌지지일까?
장사에 쓰러진 박제상의 부인이 양산에서 아니면 두동면 만화리 어디에서 배반 망덕사 부근까지 말을 타고 달려왔단 말인가? 그런데 왜 쓰러졌는가? 말을 타고 왔으면 쓰러질 리 만무하다. 이는 양산이나 두동 만화리 어디에서 배반 앞까지 와서, 말을 타고 달려가는 남편의 말을 뒤쫓아 왔다면 말이 쓰러지지 않는 이상 이런 상황은 절대 불가하다.
② 그렇다면 몸소 맨발로 남편을 보고 뒤를 쫓아갔다는 이야기인데, 여인의 몸으로 특히 아이 셋을 낳은 부인의 몸으로 남편이 말을 타고 뛰어가는 것을 보고 그 즉시 뒤를 쫓아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하자. 달렸으면 얼마를 달려 갔겠는가? 200m? 아니 100m만 힘껏 달려도 그만 쓰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맨발로 달렸다면 만화리나 양산에서 배반 앞 개울까지 달려온다는 것은 누구나 무리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망덕사에서 망덕사 앞 개울까지의 거리는 약 200m도 채 안되는 거리다. 부인은 그 모래사장에서 주저앉아 발을 뻗대며 울었다.
③ 그리고「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었다」는 무엇인가? 율포까지 갔다가 왔다는 내용이 아니라「남편을 쫓아갔으나」 했으므로 남편과 헤어지고 올 때의 상황이 아니라 남편의 뒤를 쫓아 갈 때의 상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인은 배반 망덕사 부근 그 어디에서 남편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뛰쳐나와 남편이 타고 달리는 그 말을 보고 맨발로 남편을 부르면서 곧장 따라갔다는 내용이다. 죽을 힘을 다해 남편을 만나보려 달렸으나 그녀는 그만 200m도 따라가지 못하고 숨이 차서 쓰러졌을 것이다.
④『삼국유사』 같은쪽에 계속 읽어가면「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그 자리에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 한다」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박제상 부인이 남편을 쫓아가다가 쓰러져 일어나지 않고 다리를 뻗은 채 앉아 있었다는데 계속해서 앉아 있었을 것인가? 아니다.
친척 두 사람이 '집으로 되돌아가자'고 부추기며 일으켜 세우니 부인은 "나는 남편 만나보지 않고는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이곳에서 일어날 수 없소." 하고 버티며 땅을 치고 통곡하니 그 모습이 너무나 처절하여 대신들이 아래것들을 시켜 말을 가져 오게 하여 그 말에다 부인을 태운 다음 남편을 쫓아가게 하였다. { 같은 동네에 살던 고 안응묵, 고 안병옥, 신용범, 김영곤의 구전에 따름. }
①-2-1의「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갔으나」하는 그 내용은 바로 이렇게 된 것으로 필자는 추리하였다.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아내는 간곡하게 남편을 불렀다. 하지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남편이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로 지금의 망덕사지 부근 어느 절에서 기다리던 부인은 맨발로 장사(長沙)라 일컫는 곳까지 달려가다가 더 이상 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것을 보고 따라 나온 친척 두 명이 집으로 되돌아 갈 것을 권고했지만 그녀는 끝내 듣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친척은 말을 구해서 그 말에 부인을 태우고는 박제상의 뒤를 따라 갔던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 구전과 연결하여 결합해 보면,부인을 태운 말이 동해 율포에 다다랐을 시에 이미 남편은 배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돛단배는 순풍을 타고 점점 멀어만 가는데 이윽고 배가 수평선을 넘어가자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그녀는 율포 진리마을 끝에 있는 동뫼라는 바위언덕에 올라가서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오후 늦게야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 부인은 두문불출하며 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라에서 보낸 사자가 박제상 부인을 찾아와 말하기를"그대의 남편 박제상이 신라국을 배반하여 왜국의 신하가 되었으니 당신네 일가는 모두 나라를 배반한 역도의 가정이므로 참형이 마땅하나 보해를 구해온 공로를 감안하여 치술령으로 유배케 하라. "는 왕의 말을 전했다 한다.
{{ 앞의 구전과 같음. }}
2) 박제상의 부인은 치술령(鵄述嶺) 정상에 유배되어 있었다.
국대부인은 어떻게 매일 바위위에 올라가서 동해를 바라보며 남편의 무사귀국을 빌었을까?
국대부인은 물론 세 딸과 문량은 만화리 어느 민가에서 살면서 매일 치술령에 올라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삼국사기』이병도 역. 권 제45. 열전 박제상. 415쪽 하단부터 416쪽 상단 부분을 읽어보십시오.
「고구려는 큰 나라요 왕 역시 어진 인군이므로 신이 한 마디의 말로 깨닫게 할 수 있지만 왜인(倭人)같은 것은 구설(口舌)로 달랠 수 없으니 거짓 꾀를 써서 왕자를 돌아오게 하여야겠습니다. 신이 저곳에 가거든 대왕(19대 눌지왕:訥祗王, 서력 417즉위, 41년간 재위)께서는 신에게 나라를 배반한 죄로 논정(論定)하여 왜인들이 알게하소서」했다. 그렇게 부탁을 받은 왕은 약속대로 그 가족을 반역자의 가족으로 몰아붙였다. 박제상을 반역죄로 논정하면 그 집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 모두가 반역자 가족이 되고 패가망신(敗家亡身)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왜인들이 염탐하러 왔을 때 박제상 가족은 나라를 배반한 죄로 구금(拘禁)되거나 유배(流配)가 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토록 해야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박제상 가족들에게는 사실과 다르게 즉, 정말 남편이 왜국으로 도주한 것으로 알게 해야 했다. 그래서 구금· 유배시킨 곳이 바로 치술령 산정을 택하게 된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가두어 두어야 할 그리고 갇혀 있어야 할 박제상의 가족이 어찌 자택이나 친정이나 민가에 투숙하면서 여상스럽게 전 가족을 동원하여 매일 치술령 산정을 오르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삼국사기』는 같은 쪽에 연이어 그 사실을 더욱 명명백백하게 밝혔으니「바로 왜국으로 들어가서 마치 본국에서 반해 온 자와 같이 하였는데 왜왕이 의심(疑心) 하였다. 」하였고, 같은 쪽 위에서 15번째 줄에는「(왜왕)은 신라왕이 미해 및 제상의 가족을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는 제상을 정말 반한 자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신라에서는 그 가족을 어디엔가 구금해 두었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또한『삼국사기』는 「왜(倭)의 제장(諸將)이 밀의(密議)하기를 '신라를 멸(滅)한 후에 제상과 미사혼의 가족을 잡아 돌아오자'라고 하였다」고 기록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들은 모두 박제상의 가족이 어디엔가 갇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하권 제45에 있는 414쪽의 박제상과 425쪽의 한자 원문기록을 자세하게 읽어보십시오.
「왜가 드디어 군사를 보내어 신라국경 밖을 순찰케 하고 잡아 놓은 백제인을 풀어 그 사실(박제상 가족이 갇힌 것)을 확인케 하였는데 이 모두를 확인한 후에 그제 서야 박제상이 진짜 항복한 줄 알았다. 미해의 가족과 박제상의 가족이 모두 갇혀 있음을 알자 이에 왜왕은 신라를 침습(侵襲)하려고 박제상과 미해를 장수로 임명하고는 의견을 물었다. 그때 왜의 모든 장군이 입을 모아 '우리가 신라를 멸한 후에 박제상과 미해의 처자를 잡아오겠다. ' 하니 박제상은 '저는 벌써 부모처자를 깨끗이 포기했으므로 전혀 보고 싶지가 않으니 더 이상 신라쪽 저희 가족을 염려하여 구금을 풀고 구해오는데 신경을 쓰시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박제상은 미해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서 물고기사냥을 하면서 즐기니 왜인이 그것을 보고는 저들이 진짜 부모처자를 모두 잊은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갇힌바 되었다는 기록이 엄존하는데, 양산에서 치술령으로 혹은 두동 칠조리나 만화리에서 매일 치술령을 오르내렸다고 주장하면 되겠습니까?{{ 1999년 4월에 망부석을 답사했을 때 울산에서 왔다는 60대의 등산객 4명은 박제상의 부인이 친정집이 있는 두동 어디에서 매일 치술령을 오르내리며 남편을 기다렸다고했다.}}
거기다가 그것이 다른 장소라면 몰라도 남서쪽 국수봉 하늘을 바라보고있는 치술령 서쪽 줄기의, 정상에서 300여m 아래에 있는 산중턱의 4m 20cm의 바위를 두고「망부석」이라 고집해서는 안되지요.
치술령 정상 바로 이마에 18m 80cm의 높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올라서면 동해 천지(天地)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율포니 방어진이니 장생포는 물론 대마도의 목도까지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는「망부석」을 두고 말입니다.
그리고 기다린다는 자체도 그렇습니다.
매일「망부석」 바위에서 어린 자식과 머물면서 기다렸다는 것이 되는데, 모르긴 해도 어린 문량을 데리고 험난한 잿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기엔 매우 힘이 들고 사실상 불가능하였을 터인 즉,
그 가족은 분명 치술령 어딘가에 갇힌 몸이 되었다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앞뒤 전후가 맞는「망부석」이 될 것입니다.
영해박씨 종친이라는 치산서원 관리인은 울산 만화리쪽에 박제상의 처가집이 있었노라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그분께서도『울산읍지』를 믿는다면『삼국사기』나『삼국유사』의 기록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국대부인 김씨가 남편 박제상을 만나기 위하여 집에서 달려 나온 곳은 양산도 아니요
울산도 아니며 경주 곧, 금성(金城)의 어디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금성에 살던 그녀의 가족은 남편이 떠난 후에 양산이나 울산의 만화리 어딘가로 이거했을 리 만무합니다.
천에 하나 그곳에 있었다 해도 그녀의 가족은 이미 갇힌 몸이기 때문에 치술령 산정을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갇혀 있어야 할 박제상 부인이 치술령에서 매일매일 기도하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치술령 어딘가에 그 가족이 구금되어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즉, 그 갇힌 곳이 바로 치술령 산 어디엔가 가 아니고는 결코 매듭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가족이 갇힌 곳은 치술령 정상 일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눌지왕은 사실 가두어 두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제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 가두어 둘 입장이면, 율포가 가장 잘 보이고 동해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두어 남편을 기다리는 박제상의처를 위로하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율포로 떠나간 남편은 또 율포로 돌아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녀를 위해 치술령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치술령에 가두어 놓을 요량이면 지금의 녹동 산 161-1번지의 가장 높은 정수리의 바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배려하였을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장생포 일대의 바다만 겨우 보이는, 그것도 남서로 뻗은 동해의 반대쪽인 서편 줄기 7부 능선쯤의 만화리 낮은
바위에서 보도록 했겠습니까?
박제상 부인인들 그곳에서 동해를 보려했겠습니까?
동해 일대를 한눈에 모두 볼 수 있는 확 열린 치술령 정상 동쪽의 높디높은 그 바위를 제쳐 놓고 말입니다.
3)박제상 부인이 기거했던 움막집은?
매일 바위에 올라가 바라보았다면 박제상부인의 거처는 치술령 정상어디에 있었다.
그 다음 알아야 할 것은, 녹동쪽 바위에서 동해를 바라보았다면 그곳과 인접한 곳에 움막집이라도 지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무어라 하여도 집과 식수(食水)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족이 치술령에 거처할 만한 장소 중 가장 유력한 곳이 있다면 곧 이 식수를 해결할 수 있는 장소일 것입니다.
만화리에 있는「세 효녀아기바위」 일대에서 식수 해결 처를 찾아 이곳 저곳 다 다녀보아도 샘터는 없었고, 그 바위가 있는
북쪽 100m쯤에서 진풀이 난 뻘이 있었지만 그곳에다 샘을 판다 해도 수량(水量)이 모자라고 뻘물이라 냄새가 나서 식음수로 하기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처럼 치술령 정상 그 어디에도 식수를 해결할 만한 샘터가 없는데 유독 정상에서 그리 멀지 않는 북쪽 산등성의 오솔길을 타고 한 100m
정도 내려가면「베틀바위」가 있고 좀더 내려가면 평지가 있습니다.
평지에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비상 헬기 착륙장을 만들어 놓았으나 더이상 관리를 하지 않아 지금은 숲이 우거져 있는 곳이 있습니다.
평지 동쪽 아래엔 계단식 텃밭 터가 있으며 이 밭의 급경사진 동쪽 바위틈에는 사시장철 차디찬 샘물이 퐁퐁 솟구치는 참샘이 있습니다.
정상 부근 그 어디에도 먹을 만한 샘물은 없었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머물고 살았을 움막집을 어디에 지었을까요?
과연 그 장소가 어디일 것 같습니까?
참샘 바로 위에는 움막집을 지을만한 좁은 평지가 있고 바로 뒤에는 바람막이가 되는 산이 가리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움막을 지었던 흔적뿐만 아니라 지금도 등산객들이 천막을 쳐서 야영을 하고 가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가족 모두에게 참형(慘刑)을 가함이 마땅하나 박제상이 내 아우 보해를 구해온 그간의 공을 감안하여 그가 비록 반역한 뒤 도망하여
왜나라 신하가 되었다지만 옛정을 생각하여 먹고 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도록 움막을 짓고 식량을 보급해 주겠으니
그리 알고 치술령 정상에서 생활하도록 하되 산하의 민가로 내려와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니라.
"하고는 치술령 정상 참샘 위에 움막을 짓도록 명하였을 것입니다.
임금님은 말로는 반역죄로 몰아 세웠으나 속 깊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부인의 그 애절한 심중을 헤아려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내심 각가지 배려를 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동해가 잘 보이고 박제상이 떠나간 율포가 가장 잘 보이면서도 왜인에게는 박제상의 가족이 반역죄로 유배된 것을 알릴 수 있는
그런 위치를 물색토록 하였을 때, 그곳은 바로 치술령 참샘 위의 따뜻한 양지였을 것입니다.
4)국대부인이 남편의 무사귀국을 간구한 기도처는?
박제상 부인 김씨는 남편이 신라국을 배반하고 왜국으로 도망갔다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치술령 정상으로 유배되자,
이 누명을 벗어날 길은 남편이 하루 속히 신라국으로 돌아와 왜국의 신하가 아니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므로,
더욱 간절하게 남편이 미해를 구하여 신라국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높은 산정에서 그녀가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드리는 그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동해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기도드릴 수 있는 장소를 선정함에 있었어도①거리가 가깝고 ②동해가 가장 잘 보이고 ③높고 제일 큰 바위를
택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 바위는 가장 정상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또한 동해를 향해 있는 녹동 산 161번지의 그 바위를 기도처로 선정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필자는 봅니다.
박제상(朴提上)은 어떤 분이신가?
신라의 충신. 내물왕 때부터 눌지왕 때까지 활동한 인물입니다.
소인이 현제(2008년11월)까지 찾아 살펴본 박제상 출생에 관한 자료는 지극히 미미합니다.
다만 그의 저서인 부도지에 보면 서기 363에 태어나 419년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는 월성인으로 신라내물왕 8년 9월에 양주 효충동에서 태어나 경주 삼강동에서 자랐다고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符都誌)
<< 부도지 14쪽 원저(原著) 박금(朴錦)씨(氏)의 저본(底本)을 김은수(金殷洙)씨가 역해(譯解)>>에서 밝혔다.
그 성(姓)은 박(朴)이요 이름은 제상 [提上] 자는 중운(仲雲) 호는 도원(桃源) 혹은 석당(石堂) 관설당(觀雪堂) 월성(月城)인으로
신라내물왕 8년 9월에 양주(良州) 효충동(孝忠洞)에서 태어나 경주 삼강동(三綱洞)에서 자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삼국사기》에 그의 세계(世系)에 대한 설명이 있으나 거의 신빙성이 없습니다.
[실성왕 1년]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402년도에 일본에 내물왕의 셋째아들 미사흔(未斯欣)을, 412년에는 둘째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요청하고자 하였으나 두 왕자는 인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왕은 즉위한 뒤 두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당시 양산(梁山)지방 토호세력으로서 삽량주간의 직책을 맡고 있던
박제상을 고구려와 일본에 보냈습니다.
두 왕자를 구출시킨 박제상은 일본에서 잡혀 충절을 지키다 참형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이를 안 눌지왕은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 (國大夫人)으로 책봉하였으며, 둘째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을 뿐 실재 그 출생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박제상이 미해를 구하기 위해 도왜(渡倭)할 그 당시(當時)에는 그의 처(妻)가 분명 금성 부근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니
그 박제상이 타고 갔던 말이 집으로 되돌아오던 중 지쳐 죽은 곳이 현 외동읍 북토 아랫마을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어느 곳으로 회귀했는가가 곧 회귀한 그 인접지역에 박제상이 그 당시 살았던 집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의 회귀성의 정확도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말의 회귀성(回歸性)의 정확도를 보아 비록 말이 지치긴 해도 박제상의 본가가 경주 금성 부근 어디쯤이며, 더욱 가깝게는 북토 제내리
어디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다만 결코 박제상 도왜(渡倭) 당시에는 그의 본가가 양산이나 두동 쪽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경주풍물지리』북토편 441쪽, 및 마을주민 구전} 그리고 보면 경주 외동읍 북토(北吐) 제내(堤內)리 부근(附近) 그 어디엔가에
혹시 박제상의 본가가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도 있다.
즉 제내리의 제(堤)와 토상의 상(上)자를 따서 제상이라 했다고도 전 한다.(고 안응묵(安應默), 안병옥(安秉玉) 등의 구전)
박제상(朴提上)과 김제상(金提上)
우선 밝혀져야 할 것은 박제상의 정확한 성이다.
아직 자료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박씨성을 가진 제상을 삼국유사에서는 김씨라 했을까?
의문을 소인은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박제상을 부를 때 사용하는 성씨인 박(朴)은 순전히 『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삼국사기』와 함께
우리의 가장 귀중한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보면 박제상의 설화 내용은 비슷하지만 이 책은 박제상의 성씨가 박이 아닌 김(金)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술가가 유가의 학자일 때와 불가의 학자일 때와 차이가 난다고 보았습니다.
불가의 입장에서는 남편은 불자가 아니고 아내가 불자일 경우에 아내의 성을 달고 남편의 이름을 명부에 기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역사서의 저자가 당시 어떤 소속의 직책을 가진 인물인가에 따라 그 관습대로 기록하다가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당시 박제상 부인 김교 김씨가 지금 경주 배반에 있는 망덕사(望德寺)(?) 부근에서 부처님께 기도하다가 남편이 왜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버선발로 뛰쳐나왔다고 하니 따라서 국대부인은 불교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기도하다 뛰쳐나온 곳이 지금의 경주배반 앞 모래사장인 “장사와 벌지지”다.
그 때문에 박제상의 부인의 성이 김씨였으므로 그 불자의 기록명부에 박제상의 부인 성 <<김>> 과 그 남편의 이름 <<제상>>으로
기록된 것을 근거로 삼국유사 저술가인 고려일연스님은 불자의 명단을 살펴 <<김제상>>이라 하였다고 보며, 삼국사기는 유학자
김부식(金富軾 1075∼1151(문종 29∼의종 5))이 쓴 역사서로 이름 그대로 <<박제상>>이라 기술했다고 추측합니다.
치술령(鵄述嶺) 명칭
치술령(鵄述嶺)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경계에 있는 높이 765.4m 산이다.
내륙에 있으면서도 동해가 내려다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일본 쓰시마섬[對馬島]이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습니다.
산꼭대기에는 신라 눌지왕 때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러 갔다가 죽은 박제상의 아내가 동해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망부석과 신모사(神母寺)·기우단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산이 실성왕자의 이름인 치술령(鵄述嶺)이라 했는지 그 산 이름의 유래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서에 보면 18대 실성왕의 아들이 치술입니다.
눌지왕이 자신을 죽이려하던 실성왕이 오히려 죽으니 왕은 원수의 딸 즉 실성왕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한편으로 실성왕의
아들인 치술을 지극히 보살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눌지왕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실성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처남인 실성왕의 아들 치술(鵄述)을 궁 안에서 키웠습니다.
치술이 성장하여 이 사실을 알고 자기아버지(실성왕) 때문에 고구려와 일본에 박제상을 보냈고 결국 그 가족이 생이별 당하게 되고
이 산에 유배되어 부인과 딸들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들(국대부인과 딸들)의 혼령을 향해
부친의 잘못을 빌고 달래기 위해 망부석에서 참회의 기도를 하다 얼어 죽어 그곳에 묻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누나 눌지왕의 부인은 그 산을 향해 절규하며 치술아! 치술아! 부르는데서 산 이름을
“치술이 국대부인의 신령(神靈=聖母)에게 기도했다”는 말에서 처음에는 치술령(鵄述靈)이라 하다가, 그 산이 이어진 산 고개이므로
나중에 치술령(鵄述嶺)으로 개칭 되었다는 구전(口傳)입니다.
박제상(朴提上)의 도왜(渡倭) 발선처(發船處)
『삼국사기』 열전 「박제상 편」을 보면 그가 일본을 향할 때 죽음을 맹세하고 처자도 보지 않고 율포로가 배를 띄워 일본으로 향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삼국유사』도 이 장면을 놓고 「말을 타고 집에 들이지 않고 바로 율포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달려 율포로 달려갔으나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지라 간절히 불렀으나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면 멈추지 않고 왜국으로 갔다」고
되어 있어 당시 박제상이 떠났던 곳이 율포(栗浦) 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양남 율포 진리마을에는 동뫼라는 전설의 돌산이 있고 이 돌산에서 박제상 부인이 남편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 보았다고 전하므로
이곳이 도왜 처요 발신지라고 합니다.
현재 울산광역시에서는 박제상의 도왜(渡倭)한 발선처를 울산 북구 강동면 정자리 유포 석보 바로 옆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울산시에서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그 율포에 석보(石堡)가 있다는 기록 때문에 1987년 박제상 발선처에 대한 연구와
답사를 끝낸 한국교원대학교 연구팀이 박제상이 정자에서 일본으로 떠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곳에 朴提上使倭時發船處’라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아둔(啞鈍)한 필자(筆者)는 한자 실력이 미흡(未洽)하여 아직 그 부분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인이 가지고 있는 자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명문당에서 낸 노사신 양성지 등 6명의 실학자가 편 책입니다.
•치산서원(鵄山書院)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두동면 만화리 산 30-2에 있다. 치산서원은 조선 21대 영조가 박제상과 부인 김씨 그리고 두 딸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었다.
사당 내에는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와 부인을 모신 신모사 그리고 그의 두 딸을 모신 쌍정여가 있었으나 조선 말기 서원 철폐로 모두
없어졌던 것을 다시 복원해 놓았다.
치산서원은 조선시대에는 지방 서원의 역할도 했으나 대원군 때 철폐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울주군은 매년 치산서원 보존회를 통해
이곳에서 춘향제를 올리고 박제상과 그 가족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원내 에 박제상 기념관도 건립했다.
•신모사당(神母祠堂)
박제상의 부인 김씨를 모셨던 사당이다. 이 사당은 치술령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한국교원대학교 학술조사팀은 지난 1987년 답사할 때 치술령 정상에 신모사가 있었던 터를 발견했다고 보고한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며 당시 사당의 울타리였던 토루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의 규모는 택지를 볼 때 10m×11m 정도로 추정했고
조사단은 이곳에 신라 토기와 기와편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울주군은 1999년 7월 이 장소에 신모사지 기념비를 세웠다.
•은을암(隱乙岩)
울주군 범서읍 척과리에 있는데 『울산읍지』에는 ‘은을암이 망부석 동쪽 10리에 있으며 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서
암혈에 들어갔는데 지금도 암혈이 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하지만 읍지의 기록과는 달리 실지 은을암(隱乙岩)은 망부석 동쪽십리가 아니라 망부석 남서쪽, 10리인 국수봉 동북쪽 바로 아래에
있으며 치술령 정상이 북쪽으로 멀리보이고 망부석도 가물거린다.
이 절은 해발 372m 높이에 있고 치술령 정상과도 10리 거리에 있있다.
이 절은 누가 언제 세웠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이 절이 인근에 있는 공부암과 함께 19대 눌지왕 때 세워진 함듬사의 말사였다는 얘기가 있지만 남방전래 불교가 신라에 불교 승인
23대 법흥왕 이전부터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전설의 실재내용인즉 김교부인은 새가되어 화염속의 남편을 구하려갔고 두 딸 아가와 아기의 혼도 새가 되어 어미 새를 뒤 딸아 나르다 어미 새가 붉은 연기 속에 가리어 숨어버리니 더 이상 그 뒤따르지 못하여 비조위 하늘에서 배회(徘徊)하다 바위굴에 숨은 곳이 지금의 은을암이다. 구전
•망부천(望夫泉)
녹동에 있는 망부석에서 산 정상으로 올라 북쪽등선을 타고 외동읍 석계구역과 녹동 구역 경계선 쪽으로 내려가다
가장 낮은 등선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참 샘터가 나온다. 정상에서 약 250여m 지점에 있다.
위에서보면 바위가 보이지 않으나 막상 샘터에 가면 경사진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오른다.
석계에서 치술령으로 오르는 사람들은 정상에서 가까운 이곳의 물을 약수라면서 많이 마신다.
샘의 형태로 보면 샘 주위가 모두 두터운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
경주시 배반들 망덕사지 바로 인근에 있다. 역사서를 보면 박제상은 고구려에 가 왕제 복호를 데리고 온 후 왕명에 따라 집으로 오지 않고
다시 곧 일본으로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소식을 늦게 들은 그의 부인이 일본으로 떠나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뒤따랐으나 남편을 따르지 못하고 망덕사 남쪽 모래밭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고 되어 있다.
울산에서 경주로 가다 보면 사천왕사지가 있고 사천왕사지 앞에서 남산에 있는 화랑연수원쪽으로 가면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둑길을 200여m 정도가면 도착할 수 있다.
비석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여져 있다.
《新羅 忠臣 朴提上 公 婦人遺蹟
처음 제상이 떠날 때 그 부인이 듣고 쫓아 가다가 미치지 못하고 망덕사 문 남쪽 모래위에 이르러 드러누워 길게 부르짖음으로
그 모래를 長沙 라 하였다.
그 친척 두 사람이 그를 부액하여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다시 일어나지 아니 하였음으로 그 땅을 벌지지라 하였다. 三國遺事》
마릉(馬陵)
* 그 외에도 마릉(馬陵)이 있다 : 박제상은 도왜(渡倭)시 배에 오르기 전 타고 갔던 그 말의 안장(鞍裝)에 박제상이 서찰을 달아
아내에게 보내었다고 전한다.
그 말이 자기집으로 되돌아오다 지쳐 북토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하는 마능(馬陵)이 경주시 외동읍 북토 아랫마을에 아직도 있다.
•충렬비(忠烈碑)
양산시 교리 춘추공원에 있다. 앞에는 ‘朴提上萬古忠烈碑’라 써여져 있다. 박제상 비석이 있는 곳에는 옆으로 3개의 다른 비석이 있다.
박제상 충렬비는 당초 양산 읍내에 있었던 관아에 세워져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지역 주민들이 왜경의 눈을 피해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해방 후 다시 파내어 1949년 현재 자리에 세운 것이다.
개석의 조각이 선명한데 비해 대석의 괴임이 희미한 것은 당초 비석이 없어지고 대신 새로운 비석을 옛 대석위에 세웠기 때문인 것 같다.
비제는 전면에서 후면에 이르기까지 상하 2열로 ‘新羅贈大阿湌朴公諱提上 萬古忠烈碑’라 되어 있다.
끝에는 ‘崇禎紀元後四乙巳四月日 通訓大夫行梁山郡守西原韓兢人謹識’ 이라 되어 있어 이 글이 조선 24대 현종 11년(1845) 4월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고 글은 당시 군수 한긍인이 쓴 것임을 알려준다.
대마도(對馬島)
•순국 기념비
대마도 북쪽 사고(佐護)라는 해안 마을에 있다.
이 비석은 한국교원대학교 황수영과 정영호가 박제상의 일본 순국을 기리기 위해
1988년 8월 8일 일본 인사인 나가토메히사에(永留久惠)와 함께 세웠다.
* 결론
문화재 지정은 국가가 국민에게 역사관과 국가관관을 확립(確立)시키기 위해 지정(指定)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시인이지만 박제상의 충효(忠孝)의열(義烈)의 기상을 배웠기에 향토사학자가 아니라도 500여 만원 개인 돈을 투자하여
이를 바로 잡기위해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어떤 도청소재지의 경계나 지역 간의 경계 때문에 문화재를 지정하는 근본 방향과 목표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문화재가 향토색 때문에 잘못 지정되어서도 안 되고 지역이권 때문에 문화재 자체의 이상과 가치를 훼손하게 해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남북 경계선 때문에 본래부터 있었던 그곳 망부석 위치 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어느 곳 어느 방향에 망부석이 서 있는 것이 진정 미래의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고 관광객으로 하여끔 보다 효과적으로 인식시키고 감명을
주는가에 그 가치와 무게를 두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1934년도의 울산 읍지의 기록을 보면
「망부석재치술령상신라눌지왕이년박제상사어왜국기처금씨부승애원졸이녀상차산망왜국통곡이사신화위석혼위조혹운장녀아기삼여아경개곡진이사이녀아영독부사왈아약종순수매아모급자호우수양아제문량호귀이맹금망부석좌우유이석시이녀신화운일운부인지기석」
「望夫石在鵄述嶺上新羅訥祗王二年朴堤上死於倭國其妻金氏不勝哀怨卒二女上此山望倭國痛哭而死身化爲石魂爲鳥或云長女阿奇三女阿慶皆哭盡而死二女阿榮獨不死曰我若從殉誰埋我母及姉乎又誰養我弟文良乎歸而盲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
기록하고 있습니다.
(망부석은 치술령 정상에 있다. )
「望夫石在 鵄述嶺上」
(신라눌지왕 2년 박제상이 왜국에서 죽으니)
「新羅訥祗王二年 朴堤上死於倭國」
(그의 처 김씨는 원망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죽었다. )
「其妻金氏不勝哀怨卒」
(이 산상에서 두 여식(女息)도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어 몸은 돌로 화하고 혼(魂)은 새가 되었다. )
「二女上此山 望 倭國痛哭而死. 身化爲石 魂爲鳥」
(혹 이를 두고 이르기를 장녀 아기와 삼녀 아경은 모두 함께 슬픔이 극에 다다라 쓰러져 죽었고 둘째딸 아영(阿榮)은 홀로 죽지 아니 했으니)
「或云長女阿奇三女阿慶 皆哭盡而死 二女阿榮獨不死」
(아영(阿榮)이가 말하되, 만약 나마저 따라 죽고 나면 누가 내 어머니와 여동생을 묻을 것이며 또 누가 나의 남동생 문량이를 키우겠는가
하고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져 돌아갔다. )
「曰我若從殉誰埋我母及 乎又誰養我弟文良乎 歸而盲」
(지금 망부석 좌우에는 두 개의 바위가 있는데 그것은 두 계집의 몸이 화한 것이라 하고 일설에 의하면 부인의 베틀바위라고도 한다. )
「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
우선 위의 내용부터 요약 이해한 후 중요한 부분은 다시 다루고자 합니다.
「망부석은 치술령 (중턱이 아닌) 상(上)에 있고 박제상은 눌지왕 2년 왜국에서 죽었다.
그 부인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죽고 그 뒤를 따라 장녀와 셋쩨딸도 죽었다.
둘째딸 아영이는 어머니와 언니와 여동생의 장례식(葬禮式)을 염려하고 남동생 문량을 키우기 위해 함께 죽지 않고 돌아가려고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 망부석 좌우에 두 개의 바위가 있는데 이는 두 계집의 몸이 화하였다 하며, 한편 이르기를 부인을 지탱시켜 온 베틀바위이라고도
한다. 」
「……今望夫石左右有二石是二女身化云一云夫人支機石」
현재 울산에서 정상 서족 300m 하에 있는 망부석이라 세긴 돌을 보면 망부석 좌우에 바위가 있다 했는데 중간에 있어야할 망부석이
동쪽 편 우측에 있다. 따지면 울산 읍지에 기록된 대로의 바위도 아니다.
문제의 1934년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울산읍지』3쪽 망부석 항목 부분의 이 기록은 '누가' '무엇에 근거를 하여' '왜 그렇게 썼는지'는
모르지만 치술령에 있는 세 곳의 바위는 그 명칭이 각각 따로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분이 쓴 것 같습니다.
추측컨대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치술령의 망부석에 대한 이야기만을 듣고 그것을 읍지에 기록했다 는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망부석」과「은을암(隱乙岩)」의 방향표시를 전혀 엉뚱하게 기록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박제상부인의 몸은 떨어져 죽어 바위가 되고 그 혼(魂)은 백조(白鳥)가 되어 동쪽 왜국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 남편이
화형당한 붉은 구름이 솟구치는 그 속으로 사라졌다는 전설을 알고 있었기에 그 은을암이 망부석 십리 동쪽에 있다.
「隱乙岩 在 望夫石東十里」
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을암은 망부석 동쪽이 아니라 반대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서쪽에 있습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실재(實在)하는 망부석의 위치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구전으로 들은 것을 책상 앞에서 기록하려 하니
은을암이 있다 하는데 망부석에서 새가 동쪽을 향해 날아갔다 하니 아마 동편 십리 어디에 있지 않을까? 하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치술령 정상에서의 일본 목도인 대마도는 국수봉 방향 남남서편넘어에 있었고 그때 솟구친 붉은 연기구름도 그 쪽이었으며
어미새가 날아간 방향도 그쪽입니다.
어미새를 찾지 못해 연기 구름 속에 해매이다 지처 날아든 곳이 비조 였고
그곳에서 나뭇군(도인)에게 쫓기어 날아든 곳이 국수봉 중턱 아래에 있는 바위 굴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미새는 왜국(倭國) 목도에서 불타는 남편을 맞이하러 갔고 그 딸들이 새가되어 숨었다는 전설의 바위가 은을암입니다.
은을암은 박제상 부인의 혼인 어미새가 날아들어서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 두 딸의 혼이 새가 되어 어머니 뒤를 따라가려 했으나
어미 새를 놓쳐 버리고 그만 지쳐 국수봉(國讐峯) 하(下) 바위틈으로 들어가 숨었다 하여 생긴 전설에 의해서 만들어진 바위이기
때문입니다.
은을암(隱乙巖)은 망부석에서 본 방향은 남서쪽이다.
왜국(倭國) 하늘을 향해 날아간 어머니의 혼을, 엉뚱하게도 딸의 혼이 새가 되어 숨어들어 갔다 하여 만들어진 그 은을암에 적용시켜 전설을 만들고자 하니 은을암이 동쪽에 있다고 오기(誤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울산읍지』은을암 항목의 전문을 보면「은을암 재 망부석동십리 속전 박제상부인혼조비입암혈간금암혈수연적」「隱乙岩 在 望夫石東十里 俗傳 朴堤上夫人魂鳥飛入岩穴間今岩穴水涓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풀어 보면 「은을암이 있는 곳은 망부석 동쪽으로 십리다. 속담에 전하기를 '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가 바위구멍 사이로 들어갔다' 한다. 지금도 그 바위 구멍에는 물이 졸졸 흐르며 (눈물이) 똑똑 떨어진다. 」 고했습니다. 기록자가 만화리「세 효녀아기바위」에서나 녹동의「망부석」에 올라가서「은을암」을 보았다면 아무리 동서남북 방향감각이 무딘 어린 아이 같은 이라 해도 해가 돋는 쪽은 동쪽이요 지는 쪽이 서쪽이라는 사실만 알아도 망부석에서 은을암이 동쪽이 아니고 남남서쪽이나 남서쪽임을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화리쪽에서 주장하는 대로「세 효녀아기바위」를「망부석」이라 한다 치더라도 그곳의 방향은 결코 동쪽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보면 은을암은 남쪽 혹은 남남 서쪽이 됩니다.
치술령 정상에 있는「망부석」 바위에서는 정남남서쪽입니다.
이쯤 하면 우리는 누구나 쉽게 망부석 동쪽에 은을암이 있다고 그렇게 주장한 1934년도에 만들어진『울산읍지』가 이 부분 만큼은
최소한 오기(誤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東景通志序
동경통지서에 있는 김종직의 치술령 관련 시와 유호인의 망부석 관련시를 읽게 되었습니다.
김종직학자는 조선 전기(세종13~성종23년)의 성리학자로 1431년출생 하셨고 1492년에 돌아가신 분으로 그 출생지는 경남 밀양이고
경력은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1459)한 학자로 그 가 남긴 저서는 '유두유록'등 이 있다.
동경통지서에 그 시를 밝힌바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편 이십삼(二十三)쪽 ~ 이십사(二十四)쪽 과 치술령(鵄述嶺) 박제상(朴堤上)
십사(十四)쪽 >에 보면 시 한편을 남기셨는데 이 시에 치술령의 망부석 위치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그 시(詩)를 이렇게 번역해 보았습니다.
鵄述嶺頭望日本
치술령두망일본= 치술령 정상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粘天鯨海無涯岸
점천경해무애안 = 바다의 배가 하늘에 붙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良人擧示但 搖手
양인거시단요수 =부질없이 손 흔들어 보이든 그님
生歟死歟音耗斷
생여사여음모단 =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조차 끊기었소
長別離死生寧有
장별이사생녕유 = 이별한지 너무 오래라 살아 죽지 않고 편히 잘 있는지
相見時呼天便化
상견시호천편화 = 서로 만날 그 때까지 편히 잘 있기를 하늘에 호소한다
武昌石烈氣千載
무창석열기 천재 = 굳세고 창성한 반석 같은 님의 그 절계 천만년 이어가도록 .
干空碧
간공벽 = 저 푸른 하늘에 울타리 만들어 막으리라
치술령 정상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수평선 저 넘어 정처 없이 떠나는 배(고래)
내 님은 부질없이 손들고 흔들었다
해어 진지 너무 오래라 죽지 않고 잘 있는지
소식이 끊어진 이후 생사가 묘연(杳然)하다
하늘에 부탁하노니 서로 만날 그 때까지 편히 계시기를
굳세고 창성한 반석 같은 님의 그 절계 천만년 이어가도록
저 하늘에다 울타리 만들어 막으리라
점천 =수평선으로 고래를 =배로 번역함
鵄述嶺頭望日本
분명 치술령 <중턱이 아닌> 머리에서 일본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유호인(兪好仁) 의 시(詩)
孤臣一死答君恩
고신일사답군은 =한 신하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위해 외롭게 죽으니
萬里扶桑寒節尊
만리부상 한절존 = 높이 지킨 그 절개 얼게 했다 일본 전체를
鵄述峰頭三丈石
치술봉두삼장석 = 삼십척(三十尺) 높은 바위 치술봉 정상에서
愁雲猶帶望夫魂
수운유대망부혼 = 지아비의 넋을 기다리는 구나 지금도 깊은 수심에 잠긴 체
의역(意譯)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한 신하가 외롭게 죽으리
고귀하게 지킨 그 절개는 온 일본 열도를 얼개했다
삼십척 높은 바위 치술령 정상에서
지금도 깊은 수심에 잠긴 체 지아비의 넋을 기다리고 있구나
鵄述峰頭三丈石 치술봉 머리에 3장(30자)높이의 바위를 말하니
그 바위역시 치술령 <중턱의 바위가 아닌 >정상의 바위를 말한다.
이렇게 울산 읍지(1934년)가 만들어지기 근 480여 년 전부터 이미 망부석 위치가 치술령 산머리(정상)에 망부석이 있음을
정확하게 밝혀 입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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