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신라 화랑도

오늘의 쉼터 2009. 6. 26. 20:11

 

 

◎ 설치와기원
 
 

화랑도의 설치에 대한 기록 내용들은 사서에 따라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37년(576) 봄에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삼국사절요』·『동국통감』에는 진흥왕 원년(540)에 풍월주를 설치하고 선사(善士)

즉 좋은 사람을 구하여 무리로 삼았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에는 화랑도의 설치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들이 나오고 있다.

우선 그 서문에는 신라에서 여자를 원화로 삼았는데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고 나오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와는 다른 내용이다. 오히려 『삼국사절요』·『동국통감』과 같은 내용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풍월주의 설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에 앞서 삼산공의 딸인 준정이 원화가 되었는데 많은 낭도를 두었다.
그 때 법흥대왕의 딸인 남모공주는, 곧 백제 보과공주의 소생인데,
또한 뛰어난 미인으로
공과 더불어 도탑게 사랑하였다.
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남모를 도와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옥진궁주의 사부(私夫)인 영실공을 용양군으로 삼아 총애하며 높은
위에 있게 하고, (준정에게) 원화를 물러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준정이 (영실공을) 부지런히 섬겨, 남모가 원화가 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태후는 비록 (왕의) 유명으로 영실을 계부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미진부)공에게 명하여 (준정이) 물러나도록 하였다. 
태후는 또 (남모에게)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의 낭도를 소속하게 하여
더하여 주었다.
준정이 투기를 하였다. 이에 술로 유혹하여 개물에서 죽였는데, 남모의 낭도들이 그 것을 폭로하였다.

태후가 이에 원화를 폐지하고 선화(仙花)를 화랑으로 삼았다.
그 무리를 일러 풍월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라 하였다.
위화공이 풍월주가 되고, (미진부)공이 부제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미진부)공이 풍월주가
되었다. (2세 풍월주 미진부공 조,)

 
 
삼국사기』진흥왕 37년 조에도 준정이 남모를 죽인 사건을 계기로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둔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에는 보다 구체적인 모습들이 들어있다.

즉 그 안에는 남모가 법흥왕과 백제의 보과공주 사이에 출생하였다는 사실이 나온다.

그리고 남모를 지소태후가 원화로 삼고자 한 까닭도 나오고 있다.

원화를 폐지한 후에는 선화를 화랑으로 삼고 그 무리를 풍월,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하였던 사실도 보인다.

이것이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한 화랑도의 설치였다.

그 이전에는 원화를 우두머리로 한 선도가 있었고 원화 밑에는 낭도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원화와 낭도로 이루어진 조직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검토할 문제다.

그것은 화랑도의 기원에 대한 문제가 된다.
 
 
 

1)화랑도의 기원에 대한 기존 연구와 그 문제

화랑도의 기원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해명을 하기 위한 전제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근·현대 한국사학이 만들어낸 신라사 체계를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사학은 『삼국사기』 내물왕 이전의 기록을 불신하여 왔다.

2002년 제7차 교육과정에 의하여 편찬되어 고등학교 1학년부터 사용된 교과서 『국사』

(이후 2002년 대신 7차로 표시하기로 함)에는 4세기 내물왕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는 한국사에 대한 하나의 국민적 상식이 되어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신라사 체계를 버리지 않고는 신라 화랑도의 기원에 대한 해명을 옳게 할 수 없다.



실제로 『삼국사기』 에 나오는 신라의 앞부분 수백 년 역사를 말살한 것은 1945년 이전 제국 일본의 역사가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사의 한 부분으로 임나 일본부 등의 역사를 날조하기 발명하기 위하여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치적 공백상태

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역사날조는 그 후 소위 삼한론으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역사 읽기로 인하여 신라 역사의 앞부분 수백 년 역사가 은폐·말살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인 내물왕 이후의 역사도 왜곡·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발명한 신라의 역사와 달리 실제 신라는 기원후 1세기 중반부터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하여

3세기 중엽에는 진한의 소국들을 모두 병합한 왕국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은폐·말살하고 만들어진 역사읽기의 대표적인 희생물의 하나가 신라의 화랑도다.

실제로 화랑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역사적 실상을 벗어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화랑도에 대한 연구의 틀을 만든 것은 미지나 아키히데이다.

그는 『조선고대연구-신라화랑연구』(1943)을 통하여 화랑도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그 안에 신라 화랑의 원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삼국사기』진흥왕 37년(576)의 기록을 따라 진흥왕 대에 화랑이 제정되었다고 본 그는 화랑의 원류를

그 이전 원시 한족(韓族) 미성년집단의 남자 집회사에서 찾고 있다.

그는 한반도 남부 한족(韓族) 간에 3·4세기경 원시적 집회조직이 있어 젊은이 집회사가 운영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부족적 집회였다고 한다.

이들 한족으로부터 신라와 백제 등의 국가가 성립되었는데 4세기 후엽에는 왕권국가로서 부족통일을 이루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마립간을 왕호로 한 당시 왕권은 부족회의에 의해 지탱하였으며 공화주의적 성질을 지닌 선거왕권 정치체제를 이루었다

고 하였다.

 이 때 삼한시대의 남자집회는 중요한 사회·정치적 기능을 지녔다고 보고 있다.

6세기 초엽 법흥왕·진흥왕
대에 이르러 신라는 국위가 신장되고 중국문물제도를 수용하여 국가내용이 새로워졌다고 하였

다.


화랑제도의 제정도 그 신흥사회 제도의 하나였다고 하였다.

그는 화랑제도의 원류를 원시시대의 남자집회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그 사이 역사적 연관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역사를 은폐·말살한 미지나 아키히데의 이 같은 주장은 따를 수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신라는 일찍이 진한의 소국을 병합하였다.

그 과정에 삼한 중의 하나인 진한은 사라지고 신라 왕국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신라를 원시 한족 사회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신라 화랑의 기원을 원시 한족의 남자집회사에서 찾는 그러한 주장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잘못 발명된 미지나 아키히데의 주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문제다.

교과서 고등학교 『국사』 (7차,)에서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화랑도는 미성년집단이라는 공동체적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데에 특색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일제 시대 미지나 아키히데가 한 주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랑도가 기본적으로 미성년집단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 기원을 원시 한족의 미성년집단으로

보는 미지나 이키히데의 주장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까닭은 분명하다.

국가 형성 이전의 못한 사회에서는 미성년집단이 하나의 연령집단으로 사회·정치적
기능을 하였다.

 한국의 경우 신석기 시대, 부족사회가 그 단계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로6촌을 통합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던 신라는 일찍부터 진한 소국을 병합한 왕국으로 성장하였기에

지금까지 화랑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뒤에 보겠지만 신라의 화랑도에는 미성년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30·40이 넘어 풍월주로 재임한 화랑도 있었다.

낭두들은 그 직에 따른 한정이 있었으나 60살까지 재직할 수 있었다.

낭도 중 대도는 30살에 물러났다.

이는 화랑도를 미성년자 집단으로 본 견해가 잘못임을 뜻한다.



2) 화랑도의 기원으로서 선도(仙徒)

그러면 화랑도의 기원은 무엇일까? 『화랑세기』의 서문에 답이 있다.


 
 

화랑은 선도(仙徒)이다.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

의 동산에서, 노(魯)의 태산에서 한 것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

을 길렀는데 이름 하기를 국화(國花)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다.

지소태후가 이것(원화)을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을 받드는 것(奉神)을 위주로 하였는데, 국공(國公)들이
이것(봉신)을 베풀어

행한 후에(또는 국공들이 무리(화랑도)에 들어간 후에)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이에)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화랑세기』 서문, )


 

 위 서문의 기록을 통하여 신라의 화랑도가 선도(仙徒)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선도는 옛날 연부인이 거느렸다는 선도와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한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 신라에서도 여자를 원화로 삼았다는 사실이 주목하게 된다.

신라 선도의 풍습은 서쪽에서 온 것이다.

한편 선도는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옛날에 선도는 봉신을 위주로 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국공들이 화랑도에 들어간 후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썼다고 한다.

『삼국사기』 에 따르면 소지왕(비처왕) 9년(487) 또는 지증왕 때 시조가 탄생한 나을에 신궁을

설치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를 보면 신궁의 설치시기는 그 이전일 수밖에 없다.

 5세 풍월주 사다함 조의 세계(世系)에는 눌지왕이 심황을 명하여 내물신궁의 주로 삼았다는

사실이 나오고 있다.

눌지왕 대(417-458)에 신궁이 존재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여기서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지내던 선도의 기원을 새롭게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언제부터 그러한 선도가 만들어졌을까?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단지 『삼국사기』 잡지 제사 조에는 남해왕 3년(6) 봄에 시조 혁거세묘를 세워 4시에 제사지냈는데

왕의 친누이 아로가 주제(主祭)하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는 아로가 시조묘에 신으로 모셔진 혁거세에 대한 제사를 주관 한 것을 의미한다.

남해왕 대에 신궁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겠지만 후대 언제인가 설치된 신궁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선도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궁을 받들어 하늘에 대제를 행한 선도는 일찍이 설치되었던 시조묘 등의 제사를 받드는 임무를

지닌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화랑도의 성원들은 낭적(郎籍)에 이름을 올렸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4세 풍월주 이화랑 조에는 이화랑의 부제(副弟) 토함은 일찍이 낭적에 속하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낭적은 구체적인 이름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것이 황권(黃卷) 또는 풍류황권(風流黃卷)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호세랑이 황권에서 양명(讓名)하여 이름을 지웠다는 기록과 죽만랑의 낭도에 득오가 있었는데

풍류황권에 예명(隸名)하고 매일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화랑도들은 화랑이나 낭도나 모두 낭적에 이름을 올리고 화랑도로서 활동하였고, 화랑도를

떠나게 되면 그 이름을 지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화랑도는 낭적을 통하여 파악되었다.

신라시대에는 동시에 여러 명의 화랑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각 화랑을 중심으로 각기 수백 명의 낭도가 속하여 활동하였다.

그러한 사정은 풍월주가 되기 전 화랑 문노가 5백 명의 낭도를 거느렸던 것으로도 확인된다.

화랑들을 중심으로 각기 하나씩의 화랑도(花郞徒)를 편성하였다.

그러한 낭적은 황권(黃卷) 또는 풍류황권 등의 이름을 가졌다.

 물론 당시 화랑도마다 하나씩의 낭적이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신라 전체의 화랑도가 하나의 낭적에

편명되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검군이 근랑의 낭도에 편명(編名)하고 풍류도를 수행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화랑을 단위로

낭적이 작성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화랑 중의 화랑이었던 풍월주를 중심으로 낭정을 운용하는 과정에 그러한 낭적들을 모아 화랑도를

관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사도(私徒)들도 낭적을 만들었던 것은 생각할 수 있으나 풍월주가 그 낭적을 장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낭적에 들어 있던 많은 화랑도들을 거느리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였다.

실제로 신라의 화랑도는 잘 짜여진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화랑세기』를 통하여 그러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화랑도 조직이 한번에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 조직은 점차 발전하여 나갔다.

당시 화랑도는 화랑·낭두·낭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화랑도와 관련된 여자로서 화주·봉화·유화 등이 있었다.

이들 집단은 낭문(郎門)을 구성하였다.

화랑도 조직은 일시에 편성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화랑도 조직의 발전에 대하여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풍월주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원화를 우두머리로 하는 집단이 있었다.

그들을 화랑도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당시에는 원화가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원화를 우두머리로 한 무리는 선도(仙徒)라 하였다. 이러한 선도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
원래 원화는 한 명이었다.
한 가지 더 알 수 있는 사실은 원화를 우두머리로 하던 시기에도 낭도를 거느린 화랑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진흥왕 원년(540) 풍월주를 설치하였을 때의 화랑도 조직을 볼 수 있다.

이 때 원화는 사라졌고, 풍월주가 화랑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당시 여러 명의 화랑이 각기 낭도를 거느렸다. 풍월주 밑에는 부제(副弟)가 설치되었다.

셋째, 동시에 여러 명의 화랑이 존재하게 되며 화랑도는 새로운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늘어난 화랑도는 점차 파가 나뉘게 되었다.
7세 풍월주 설화랑(설원랑) 조에는 문노일파가 설화랑에게 불복하고 일문을 스스로 세웠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문노의 낭도는 '호국선(護國仙)'이라 하였고, 설화랑의 낭도는 '운상인(雲上人)'이라고 하였다.
화랑과 낭도로 이루어진 화랑도의 형성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넷째, 8세 풍월주 문노 때에 화랑도 제도가 정비된 것을 알 수 있다.

문노 때 설치된 낭도부곡은 풍월주와 부제 밑의 화랑들에 대한 조직편성이었다.
당시 화랑도를 크게 3부로 나누어 각기 맡은 바 일을 달리 하도록 했다. 국선이었던 문노가 풍월주가
됨으로 인하여 이 때에 이르러 크게 늘어났던 화랑도가 하나로 통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화랑들은 낭도부곡에 의하여 편제된 것이다.

다섯째, 화랑도에는 화랑들 밑에 낭두(郎頭)가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비교하자면 낭두는 현재 한국 군대의 부사관에 해당하는 존재일 수 있다.
화랑들만이 아니라 낭두들도 여러 등급으로 나뉘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낭두는 『화랑세기』가 출현함으로 밝혀진 존재다.

여섯째, 화랑 밑에 낭두, 낭두 밑에 낭도가 있었다. 낭도는 원화 밑에도 있었다.

이러한 낭도들 또한 일정한 체계로 편제하였다.
『화랑세기』를 통하여 낭도가 동도·평도·대도로 나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위의 기록을 통하여 대도 중 입망자는 망두라 하였고 망두는 낭두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낭도와 낭두의 관계도 밝혀지게 되었다.

일곱째, 풍월주나 화랑은 물러난 후 상선(上仙)·상화(上花)가 되었다.

9세 풍월주 비보랑 때 미실이 화랑도의 파가 갈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상선과 상화를 회합하여 열선각
(列仙閣)을 짓고 대의를 통과시켜 결단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파의가 비록 많았으나 또한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상선과 상화가 하나의 집단이 되어 화랑도의 움직임에 통제를 가한 것이다.

여덟째, 『화랑세기』를 통하여 화랑·낭두·낭도와 관련된 여자들의 존재를 찾게 되었다.

풍월주의 처는 화주가 되었다. 그리고 문노는 국선이 되며 그의 처 윤궁을 선모(仙母)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낭두의 처들은 봉화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편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에 속하고 유화가 되었고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화랑도 조직의 대강을 알아보았다.

신라의 화랑도는 시간이 지나며 늘어났고, 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화랑도 조직 또한 확대 편제된
것을 알 수 있다.
 
 
 


화랑

신라에는 일정한 시점에 여러 명의 화랑이 있었다.

그들 화랑들은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하여 일정한 조직으로 편제되었다.
동시에 여러 명이 존재하였던 화랑들은 그 직책이 달리 정해져 있었다.
그러한 화랑도는 풍월주,부제가 중심이 되고 좌삼부의 화랑(좌방대화랑·좌화랑·소화랑·묘화랑),
우삼부의 화랑(우방대화랑·우화랑·소화랑·묘화랑),전삼부의 화랑(전방대화랑·전방화랑·소화랑·묘화랑) 등이 있다.
그리고 진골화랑·귀방화랑·별방화랑·별문화랑 등의 화랑도 있었다.


풍월주

신라 시대에는 1세 위화랑에서 32세 신공까지 32 명의 풍월주가 있었다.

풍월주는 화랑 중의 화랑으로 전체 화랑도의 우두머리였다.
32명 풍월주는 대부분 부제를 지낸 후 임명되었다.
부제가 되는 것이 풍월주가 되는 길이었다.


부제(副弟)

풍월주를 설치할 때 부제를 함께 설치하였다. 부제는 풍월주와 행동을 함께 하였다.

풍월주들은 부제를 사랑하였고 부제는 풍월주들을 힘써 보좌하였다.
부제들은 풍월주를 일찍부터 모시는 일을 볼 수 있다. 보종공과 염장공에서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화랑세기』 의 기록을 보면 보종공의 부제 염장공은 보종공이 부제가 되기 이전부터 그의 아우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보종공은 낭정을 본 일이 없고 염장공이 맡아서 하였다.
그런데 보종공은 내사에 관심이 없어 염장공이 보종공의 처 양명과 혼거하여 장명을 낳을 정도였다.
그러한 사정은 19세 풍월주 흠순공과 부제 예원공 사이에서도 찾아진다.
흠순공은 예원공의 누이 보단낭주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흠순공은 재위4년 동안 한결 같이 낭정을 돌보지 않고 낭도를 거느리고 지방에 머물렀다.
낭정은 부제 예원공이 대행하였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32명 풍월주의 계승은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물론 예외도 없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부제가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부제가 아니고서도 풍월주가 되었던 사람들이 있다.
6세 풍월주 세종은 사다함의 추천을 받았으나,
결국은 지소태후가 허락하여 그 지위에 올랐다.
 8세 풍월주 문노는 미실궁주가 설화랑에게 양위를 명하여 그 자리에 올랐다.
10세 풍월주 미생은 원래 7세 풍월주 설화랑의 부제였으나 그 지위에 오르지 못하다 마침내 문노의
명으로 그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15세 유신공의 부제였던 춘추공은 보종과 염장공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다 18세 풍월주가 되었다.
 29세 원선공부터는 『화랑세기』의 기록에 부제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록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략이 되었을 뿐 실제는 다음 대의 풍월주들이 부제로서
그 자리에 올랐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풍월주는 기본적으로 부제의 지위에 올랐던 자들이 차지한 자리였다.

부제가 아니고서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던 세종이나 문노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종은 지소태후의 사자(私子)였다.
그리고 문노는 지도태후의 지원이 있었고, 진지왕의 폐위에 공을 세웠기에 풍월주가 될 수 있었다.

후대로 갈수록 부제의 지위는 전임 풍월주들의 개인적인 이유로 임명되는 예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는 낭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특이 26세 풍월주 진공부터는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 때 낭정은 되 돌이킬 수 없게 무너지게 되었다.

부제가 된 이유는 풍월주가 된 이유와 대체로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부조(父祖)도 같았다.
즉 왕·왕자·풍월주가 부조에 들어 있는 예가 많았다.
구체적으로 낭정에 영향을 미친 지도태후, 미실 등의 친족들이 부제 나아가 풍월주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몇몇 풍월주의 아들들이 부제가 되고 풍월주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풍월주와 부제 밑의 여러 화랑들

화랑도에는 풍월주와 부제 외에도 여러 화랑들이 있었다.

화랑도는 시간이 지나며 그 규모가 커지고 조직도 발전하게 되었다.
문노가 풍월주로 있을 때(579-582)에 낭도부곡(郎徒部曲)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잘 짜여진 화랑도 조직이었다.
그 때 특히 여러 화랑들을 조직화한 것을 볼 수 있다.
 좌봉사랑·우봉사랑·전방봉사랑을 각기 좌대화랑·우대화랑·전방대화랑으로 만들어 각기 3부의 낭도를
거느리게 했던 것이다.
 3부는 좌삼부·우삼부·전삼부를 의미한다.
 3부에는 좌화랑 2인, 우화랑 2인을 두었고 각기 소화랑 3인, 묘화랑 7인을 거느렸다.
 이들은 현재의 군단조직의 군단장·사단장·연대장·대대장 등이 단위부대의 지휘관인 것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여겨진다.
 각 화랑은 등급에 따라 격을 달리하였고 거느린 낭도의 수가 달랐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진골화랑·귀방화랑·별방화랑·별문화랑을 두어, 12·13살의 빼어난 진골 및 대족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하는 자를 뽑아 이를 삼았다.

 이들 화랑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들도 어떤 형태로던 낭도부곡에 속한 것은 틀림없다.

문노가 설치한 낭도부곡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7세 풍월주 설화랑 때(572-579)에 문노는 국선으로 임명되었다.
 진지왕이 즉위한 후 지도부인이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國仙)으로 삼고 비보랑을 부제로 삼은 일이 있다.
국선은 풍월주와 별도의 화랑도를 거느려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
문노가 풍월주가 되자 국선을 우두머리로 한 화랑도와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한 화랑도를 합쳐 하나의
화랑도로 만들고 그 보직을 만든 것이 낭도부곡이었다.
이 때에 이르러 전국의 화랑도가 하나의 조직 속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낭두

『화랑세기』에는 미생공에게 많은 폐첩이 있었다고 한다.

9부 낭두들이 모두 첩을 통하여 청탁을 하였다고 한다.
9부는 좌삼부·전삼부·우삼부의 9개 부를 가리킨다.
 이는 문노가 설치한 낭도부곡에 따른 것이다. 각 부에 낭두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낭두는 어떠한 존재였을까?

한마디로 낭두는 화랑과 낭도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위치에 있던 집단이었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현재 군대의 부사관(하사관)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수 백 명의 낭도를 거느리기 위해 화랑들은 낭두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낭두가 되는 길은 독특하였다.

낭도 중 23·24세에서 30세까지 집단인 대도 중 입망자를 망두라 하였다.
그 중 공과 재주가 있는 자를 천거하여 신두로 삼았다.
 신두는 낭두가 될 수 없었고 오직 망두 만이 낭두가 되었다.
 여기서 입망의 법을 주목할 수 있다.

낭두가 되기 위해서는 입망의 법을 따라야 하였다.

이를 위하여 낭두의 처들은 임신을 하면 선문에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선문에서 임신한 아이를 상선과 상랑의 마복자로 만들어야 하였다.
마복자 만이 낭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폐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낭두들은 화랑도에서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낭정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24세 풍월주 천광공 조에 찰인은 나이 60살이 넘었는데 대노두로 있었으며
처첩 자녀가 백을 헤아렸으니 거동함이 상선과 같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세 아들로 모두 권세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찰인의 처 옥두리가 절색으로 역대 상선을 섬긴 때문이었다.


낭도

낭도는 풍월주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있었다.

원화들이 낭도를 거느렸던 것이다.
그러한 낭도는 서민들로만 편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화랑세기』 7세 풍월주 설화랑 조에 골품이 있는 사람은 설도(설화랑의 화랑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의 사람들은 문도(문노의 화랑도)를 많이 따랐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실제로 10세 풍월주를 지낸 미생도 처음에는 낭도가 되었다.
여기서 풍월주를 지낸 사람도 처음에는 낭도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낭도들도 일정한 조직으로 편제되었다.

『화랑세기』양도공 조를 통하여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국초에 서민의 아들도 준수하면 곧 낭문에 나아가 (낭)도가 되었다.
13·14살에 동도가 되었고, 18·19살에 평도가 되었으며, 23·24살에 대도가 되었는데,
대도 중 입망자는 망두가 되었다"고 한다.

낭도 편제를 보면 대부분의 낭도들은 일반 서민들로 구성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골품제 하에서 진골이나 두품신분을 가진 사람들도 낭도가 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낭도들 중 골품이 있는 사람들은 화랑이 되었고, 두품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낭두 등의 직을 차지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이 간다.

그런데 서민 낭도들은 화랑도를 출세의 문으로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용춘공은 조정에 들어간 후 대사 이하에 재능이 있는 낭도를 많이 등용하였다.
골품제 하에서 대사는 4두품이 오를 수 있던 최고의 관위였다.
서민 낭도들도 대사까지 올랐다고 하면 평인·백성 신분을 가졌던 사람들도 화랑도에서 활동하여
대사까지 올랐고 4두품 신분을 갖게 된 것을 뜻할 수 있다.


국선

『화랑세기』에는 국선(國仙)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화랑 조에 나오는 사다함에 대한 이야기가 보인다.
사다함이 언급한 국선이라는 것은 왕이 임명한 국선이 아니라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화랑이라는 의미 정도로 생각된다.

그런데 왕이 국선을 삼은 예가 있다.

 8세 풍월주 문노는 풍월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인 576년 10월 지도황후의 명으로
국선이 되고 윤궁을 선모로 삼았다.
문노가 국선이 된 사실은 설화랑 조에도 나오고 있다.
진지왕의 왕비인 지도황후의 아버지 기오공은 문노와 종형제간이었다.
그러므로 지도는 본래 문노를 따랐다.
진지왕이 즉위하자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으로 삼고 비보랑을 부제로 삼았다.

풍월주와 국선 사이에 경쟁관계가 벌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국선은 풍월주보다 아래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선은 비록 진지왕이 설치한 것이지만 풍월 정통은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노와 설화랑의 관계에서 문노는 도맥으로 스승이고, 통맥으로는 아우가 되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이 때 문노의 부제였던 비보랑도 국선 계통의 선도(仙徒)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이다.
문노가 8세 풍월주가 된 후 국선이 계속 이어졌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 후 신문왕 원년(681) 흠돌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풍월주를 지낸 자들이 가담하였던 사건을 계기로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하는 화랑도가 폐지되고 국선을 우두머리로 하는 화랑도가 부활된 것으로 헤아려진다.


원화

540년 이전 원화는 어떤 존재였을까?

『화랑세기』 세종 조에 그 답이 있다.
미실은 황후궁 전주가 된 후 진흥왕에게 한 말 중 옛날 선제들은 총첩을 낭도로 하여금 받들게 하여
남도에서 조알을 받았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신라 선대의 왕들은 총첩을 원화로 삼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진흥왕 원년(540) 지소태후는 원화를 폐지하고 풍월주를 설치하였다.
원화는 540년 이전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원화는 무엇을 하였을까?

540년 이후 설치된 풍월주 중심의 화랑도들도 실은 그 이전 원화 중심의 선도가 하던 일도 계속하였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문노가 두었던 낭도부곡에 따르면 전삼부(前三部)에서는 유화· 제사(祭事)·공사(供事)를
맡았는데 원래 원화를 우두머리로 한 낭도들이 제사를 담당하였던 사실로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원화를 중심으로 한 선도는 김씨 왕이 등장한 이후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신궁은 물론이고
그 이전 신라의 시조 혁거세를 모신 시조묘를 비롯하여 역대의 왕들을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행하던
집단이었을 수 있다.
남해왕 3년 시조 혁거세묘를 설치하여 4시에 제사를 지냈는데 왕은 그의 친누이 아로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 이후 역대의 왕들은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한 제사를 주관한 집단이 바로 원화를 우두머리로 한 선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남해왕의 친누이 아로는 1세 원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 신라에는 국초부터 많은 제사가 있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행했던 그러한 제사와 원화와 그의 낭도들이 무관할 수 없었다고 여겨진다.


상선(上仙)

상선은 풍월주를 물러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화랑세기』에는 보리공이 3년간 풍월주의 위에 있다가 부제 용춘공에게 그 자리를 전하였다고 한다. 보리공의 지위는 비록 상선이었으나 몸은 불문에 바쳐 형인 원광을 도왔다고 나오고 있다.

당시 상선은 한 사람이 아니라 풍월주를 지냈던 사람들 모두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11세 풍월주 하종공 대에는 미실이 파가 갈리는 것을 염려하여 상선과 상화가 회합하는 열선각을 만든 바 있다. 상화는 풍월주가 되지 못하였던 화랑들을 가리킨다.

상선들은 화랑들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상선들은 여러 화랑이나 풍월주들로부터 존중 받았다.

상선들은 낭정에 관여하기도 했다. 상선들의 낭정에 대한 간섭은 폭 넓게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풍월주들이 상선의 명을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한편 상선들은 입망의 법에 의하여 임신한 낭두의 처를 총애하여 마복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상선들은 낭두의 딸들을 첩으로 거느리기도 하였다.
염장공 같은 상선은 낭두의 딸들을 첩으로 많이 거느리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화랑도의 파가 갈린 후 상선들도 자유롭지는 않았다.
상선들은 화랑들을 이끌어 관직을 갖게 하고 승진시킨 것도 알 수 있다.


화랑도와 관련된 여자들

풍월주 중심 화랑도와 관련된 화주·봉화·원화가 있다.

그리고 원화와 관련된 화모, 국선과 관련된 선모를 주목할 수 있다.


화주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 조에 화주(花主)가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화주를 화랑단체를 관장하던 관직으로 파악하여 왔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화주는 풍월주의 아내였다.
25세 풍월주 춘장공은 천광공의 누이 천봉낭주를 아내로 맞아 화주로 삼았다고 한다.
26세 풍월주 진공은 흠돌의 누이 흠신을 처로 삼았고, 풍월주가 되자 화주로 삼은 바 있다.
풍월주가 되면 그의 처가 화주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삼국유사』에 나오는 화주를 화랑도를 관장하던 조정의 관리로 파악한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다.

화주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화주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화주가 되기 위하여 진골정통·대원신통의 통이 있어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풍월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통이 있는 여자를 화주로 삼아야 하였던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화주들의 활동은 다양하였다.

화주는 낭정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25세 풍월주 춘장공은 늘 화주와 함께 낭두의 처와 딸들을 독려하여 정포(征袍)를 만들어 출전한
낭도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몰래 서울과 시골을 다니며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그리하여 인망이 크게 돌아왔다고 한다.


봉화

봉화는 낭두의 딸들이다. 봉화는 화랑도와 깊은 관련이 있던 여자들이다.

『화랑세기』에는 봉화(奉花)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낭두의 딸들이 봉화가 되어 선문에 머물며 일하는 동안 화랑들의 총애를 받지 못하면 시집을 갈 수 없었다는 사실이 새롭다.
옥로가 아니면 낭두에 오른 자들이 처로 삼지 않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위의 기록에 나오는 것과 같이 처로 인하여 귀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풍월주를 비롯한 화랑들은 봉화와 관계를 가진 후, 그가 혼인을 하면 그의 남편의 후원자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봉화를 거쳐 낭두의 처가 된 자들이 임신을 하면 다시 선문에 들어가 탕비가 되었다.

몇 날 또는 몇 달 만에 상선·상랑의 총애를 받으면 물러났다.
그 때 남편은 재물을 들여 예를 갖추어 맞이하는 사함을 하였다.
아들을 낳아 석 달이 되면 다시 선문에 들어가는데 양과 돼지를 예물로 하는 세함을 하였으며
총애를 받으면 물러났다.
 이 때 남편은 다시 사함을 하여 맞았다.
이로써 낭두가 아이를 많이 낳으면 곧 재산이 기울게 되었다고 한다.
낭두는 그 딸과 처를 선문에 들여보내야 하였던 사정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낭두들이 처로 인하여 귀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낭두는 딸과 처를 상선·상랑에게 바쳐 낭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낭두의 예속성이 드러난다.


유화

『화랑세기』양도공 조에는 유화(遊花)에 대한 기록도 있다. 유화도 새로운 존재다.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에 속하여 유화가 되었고,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공이 또한 그 폐단을 바로 잡으니 향리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유화는 일찍부터 있었다.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0세 풍월주 미생랑 조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미생랑이 남도에 갈 때마다 유화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고 한다.
유화가 적은 수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여자들이 모두 유화가 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남보의 딸은 유화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용춘공을 모시고자 하였다.
한편 풍월주 문노는 유화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화랑도는 역사적 산물이다.
비록 진흥왕 원년에 풍월주가 설치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한 선도를 바탕으로 화랑도가 편성·운용되었다.
『화랑세기』의 『후기』를 통해 낭정(郎政)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낭정의 운용

낭정의 운용과 관련된 국법이 있었다.

『화랑세기』에는 도두 세기의 처 도리를 처벌하는 과정에 양도공이 도리를 잡아다
볼기를 치려할 때 도리가 한 말이 있다. "첩의 죄가 비록 중하나 효장과 유장의 어미입니다.
국법에 선종(仙種)을 낳은 여자가 볼기를 내놓고 매를 맞는 도리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통하여 국법에 선종을 낳은 여자에 대한 처벌 규정까지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당시 신라에는 그 외에 많은 법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방 낭정

 신라 왕경만이 아니라 지방 낭정의 존재를 주목할 수 있다.

흠돌의 난으로 인하여 화랑도를 폐지하고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속하게 하고 직을 주었다. 그러나 지방 낭정은 옛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중 실직(悉直, 현재의 삼척?)이 가장 성하였다고 한다.
그 풍속이 오래지 않아 서울로 퍼졌고 중신들이 오래된 풍속을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자의태후는 득도하여 국선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실직에서 성한 지방 낭정은 화랑도의 부활을 가져올 수 있었다.
신라의 화랑도는 왕경만이 아니라 지방에도 있었음이 확인된다.
지방에 화랑도가 있었던 까닭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많은 제사를 지냈는데 그 중에는 지방에서 지내는 제사도 있었다.
그러한 제사를 지방의 화랑도들이 지낸 것일 수도 있다.
 
 
 

화랑도와 관련되었던 성원들이 될 수 있었던 조건을 밝히기로 한다.

『화랑세기』문노 조에는 좌대화랑·우대화랑·전방대화랑·진골화랑·귀방화랑·별방화랑·별문화랑 등
화랑은 12·13살의 빼어난 진골 및 대족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하는 자로써 이를 삼았다고 하였다.

화랑도의 낭정을 장악한 중간집단인 낭두는 입망 법에 의하여 될 수 있었다.

 입망 법은 낭두의 처로서 임신한 자들이 선문에 들어가 상선과 상랑의 총애를 받아
그 아들을 마복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선과 상랑의 마복자가 낭두가 되었던 것이다.
낭두집단은 신라 골품제 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화랑세기』를 통하여 낭도가 될 수 있는 조건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국초부터 서민의 아들도 준수하면 곧 낭문에 나아가 낭도가 되었다고 한다.
 낭도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풍월주의 부인이 화주가 되었던 것은 앞에서 보았다.

그리고 낭두의 딸들은 모두 선문에 들어가 봉화가 되었다.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에 들어가 유화가 되었고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여기서 화랑도가 남자들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5세 풍월주 유신공(612-616)이 춘추공에게 지금은 비록 왕자나 전군이라 하더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다고 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
 최고 지배세력들이 낭도들을 거느리려 하였던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신라에는 스스로 낭도를 거느렸던 화랑들이 있었다.

풍월주가 설치되기 전인 법흥왕 대에 이미 위화랑은 낭도를 거느렸던 것이 분명하다.
지소태후는 그러한 위화랑의 낭도를 원화로 삼으려던 남모에게 소속하게 하였던 것도 볼 수 있다.
4세 풍월주 이화랑 대에 그 부제였던 토함의 동생 사다함은 묘량의 풍모를 가지고 있어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
사다함은 나이가 장년에 이르기도 전에 스스로 낭도를 거느려 자못 국선이라고 이를 만 하다고 하였다.
당시 사다함의 낭도 천명도 충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그 때 무관랑 또한 인망이 있어 사도(私徒)를 많이 거느렸다.
 6세 풍월주 세종은 금지옥엽의 귀한 왕족이었지만, 능히 사다함공의 어루만짐의 도를 이어 낭도를 많이
뽑아 당을 이루었고 도의에 힘써 상하에 두루 미쳤다.
세종이 풍월주의 지위에 오르나 문노의 낭도가 세종에게 속하게 되었다.
이 경우 문노의 낭도들은 문노를 따라 사다함 밑에 갔다가 사다함이 죽자 다시 문노를 따라 세종에게
갔던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한 명의 화랑에 속한 낭도들도 나이가 차면 낭도로서의 활동을 그만두고 낭적에서 이름을 지우는

양명을 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나이가 든 화랑들이 낭적에서 양명을 하고 낭도들도 양명을 하였지만새로운 화랑들이 등장하여 화랑도는 계속 유지되어 나갔던 것이다.
 
 
 

화랑도간의 애(愛), 형제애

신라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중 화랑도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그들이 사용한 형제라는 용어의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사다함 종형<종질이다.
그런데 그 때 사람들이 서로 사랑(愛)하면 형제라 하였다.
그러므로 형이라 불렀다>이 나를 사모하여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 한마디를 들어주지 않으면 곧 장부가 아닙니다" 하였다.
당시 신라인들이 서로 사랑하면 형제로 불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화랑과 화랑 사이의 관계를 보면 그와 같은 형제관계가 적지 않게 찾아진다.
그러한 관계는 형제애(兄弟愛)라고 할 수 있다. 이 형제애는 화랑도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화랑들 사이의 이러한 사랑은 화랑도에서 서로 끌고 밀어주는 관계로 이어졌다.
화랑들 사이에 맺어진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화랑도 안에서 낭계의 승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에서 양명하고 난 후 관직을 가졌을 때도 서로 밀고 끌어주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화랑도에서 맺어진 형제애가 평생을 지속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라 화랑도의 형제애는 '소년애'로 불리는 스파르타의 '파이데라스티아(paiderastia)'와 흡사하다.

평생을 이어간 화랑들의 관계

화랑도는 낭도부곡으로 편제되었다.

화랑과 화랑들은 낭도부곡에 의하여 풍월주-부제-전방화랑 등의 자리를 차지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풍월주가 세워지면 그를 따르는 자들이 부제-전방화랑의 지위로 승진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화랑들 사이에 끌고 밀어주는 관계가 있었다.
이러한 풍월주-부제-전방화랑으로 이어지는 관계나 풍월주-부제-우방대화랑-우방화랑으로 이어지는 화랑들의 연결 관계는 신라 화랑도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불신지신(不臣之臣)과 방외우(方外友)

화랑과 화랑 사이의 관계는 형제애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화공이 (문노)공을 사다함의 스승으로 삼고 낭도로 하여금 공경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지소태후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공이 '천자에게도 오히려 불신지신(不臣之臣)이 있는데,
하물며 선도는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높으니 한 가지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입니다' 하였다.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자 친히 문노의 집으로 찾아가 "나는 감히 그대를 신(臣)으로 삼을 수 없소.
청컨대 나의 형이 되어 도와주시오" 하였다.
 말이 심히 간절하여, 문노가 굽혀 세종을 섬겼다.
여기서 불신지신 관계 속에서도 사실 형제애가 작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세종이 설원랑(설화랑)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여 주었을 때 금태자(진지왕) 또한 미실과 서로 사귀어 정을 맺는 것을 좋아하여 설원·미생 등과 사귀어 방외우(方外友)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방외우는 신분을 떠난 친구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신라 사람들은 골품제 사회에서도 신분을 떠나 벗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신라인들에게 화랑과 화랑의 관계는 형제애와 종·속 관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문노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하여진다.
 
 
 

일반적인 방법으로서 형제애·중망·의리

화랑도를 거느리는 공식적인 방법은 낭도부곡을 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화랑도를 거느리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다.
실제로 낭도부곡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거느렸던 사실이 확인된다.
 실제로 화랑도를 거느리는 방법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랑이 화랑을 거느리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앞에서 본 형제애라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형제애로 뭉쳤고 형제애로 다스려지는 조직이었던 것이다.
풍월주가 되기 위해서는 중망(衆望)이 있어야 하였다.
 화랑 개인의 자질이 화랑도를 거느린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하였다.
 화랑에 따라 낭도를 다스린 방법이 달랐다.
 사다함은 사람을 사랑함을 자기와 같이 하는 방법으로 낭도를 거느릴 수 있었다.
유신공은 나이가 15살일 때 호림공의 부제가 되었는데 커다란 도량을 가지고 있어 낭도들을 능히 다스렸다고 한다.
사다함은 호협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화랑도 사이에 의리(義理)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화랑도는 호협을 좋아하거나 의협의 인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6세 풍월주 보종공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화랑이 되어 낭두를 아재비(叔)이라고 불렀고 한 번도 그 호칭을 바꾼 적이 없었다.
그는 염장공을 부제로 삼았는데 오히려 형과 같이 섬겼다.
그런가 하면 양도공은 사랑하고 미워함이 심히 치우쳐 마음속에 성이 나면 종신토록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아랫사람들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이 신라의 화랑도였다.

행뢰(行賂)와 산재(散財)

때로는 재물이 화랑도를 거느리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7세 풍월주 설화랑과 10세 풍월주 미생랑이 낭도를 거느린 방법은 다른 풍월주들과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뇌물을 주어 낭도들의 불복을 막을 수 있었다.
 미실은 낭도들에게 행뢰(行賂), 즉 뇌물을 주어 미생공의 지위를 일으키니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랐다고도 한다.
미실은 7세 풍월주 설화랑과 10세 풍월주 미생랑을 위하여 낭도들에게 뇌물을 준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낭도를 거느리는 한 방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풍월주 중에는 재물을 주어 낭도들의 우러러봄을 얻은 경우도 있다.
12세 풍월주 보리공과 만룡낭주는 재물을 모두 나누어 주었기에 낭도들이 우러러보기를 부모같이
하였다고 한다.
 보리공과 만룡낭주는 무릇 근심과 재난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가서 위로하고 구호하여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두 성인이 순행하며 다스리는 것에 비교하였다.
또한 14세 풍월주 호림공은 마음가짐이 청렴하고 곧았으며 재물을 풀어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 때 사람들이 탈의지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화랑들에게는 각기 후견세력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 밑의 화랑, 낭두들도 일정한 후견세력을 가졌다.
그 중 낭두는 상선과 상랑의 마복자들이 임명되었기에 그들을 마복자로 삼았던 상선과 상랑을 후견
세력으로 가졌던 것도 알 수 있다.
 
 
 

화랑도의 승진

화랑도에는 낭계(郎階)가 있었다. 화랑·낭두·낭도 모두 계급이 있었다.

 따라서 화랑도의 구성원들은 그가 속한 화랑·낭두·낭도 집단에서 승진을 하는 문제가 있었다.
세 집단 모두에게 승진의 사다리가 따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화랑들은 묘화랑-소화랑-좌방·우방·전방 화랑-좌방·우방·전방 대화랑-부제-풍월주로 이어지는
승진과정이 있었다.
물론 대화랑-부제-풍월주는 화랑세습 가문이나 왕의 측근세력들이 임명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낭두들은 원래 7단계의 승진과정이 있었는데 22세 풍월주 양도공이 9단계로 늘린 바 있다.
낭도들에게도 승진의 단계는 있었다. 두 가지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른 것이었다.
13·14살에 동도(童徒)가 된 낭도는 18·19살이 되면 평도(平徒)가 되었고 다시 23·24살이 되면
대도(大徒)가 되었다.
그리고 30살이 되면 병부에 속하거나 농공(農工)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화랑도의 임기

화랑·낭두·낭도에게는 임기가 있었다. 풍월주나 부제의 경우 정해진 임기는 없었다.

그러나 540년에서 681년까지 32명의 풍월주가 있었다는 것은 풍월주들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지위를 물려주었던 것을 의미한다.
풍월주 중 가장 오래 재위한 사람은 14세 풍월주 호림공으로 10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
3세 모랑공, 7세 설화랑, 30세 천관이 8년간 재위하였다.
9세 비보랑, 10세 미생랑, 11세 하종. 20세 예원공, 28세 오기공은 3년간 재임하였다.
정해진 임기가 없었지만 풍월주는 대체로 3년간 재위하는 것을 관행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낭두들은 풍월주보다 나이가 많아도 그 지위를 차지하였다.
24세 천광공 대에 대노두 찰인은 60이 넘었는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광공은 가야파 찰인을 미워하여 파면시키고, 진골정통의 구두 만덕을 대도두로 삼고,
당두의 아들 대원신통파 당보를 대노두로 삼았다.
 천광공은 규칙을 새로이 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대노두는 60살까지, 대도두는 55살까지, 도두는 50살까지, 대두와 상두는 45살까지,
낭두와 대낭두는 40살까지로 한정하였다.
별장은 각기 그 지위에 따르게 하였다고 한다.
낭도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13·14살에 낭도가 되어 동도·평도·대도를 거쳐 30살이 되면
화랑도에서 물러났다.
원화도 30살에 이르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풍월주의 임명과 왕

풍월주의 임명에는 어떤 형태로던 왕이 관련되었다.

풍월주의 임명에 지소태후·미실 등이 힘을 발휘한 바 있다.
그 경우도 비록 왕명은 내리지 않았더라도 왕의 허락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의 동의나 허락 없이 풍월주를 임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풍월주의 퇴임

『화랑세기』에 나오는 32명의 풍월주들은 일정 기간을 재위한 후에는 모두 퇴임을 하였다.

퇴임 이유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풍월주의 퇴임이유를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3세 모랑과 5세 사다함과 같이 풍월주로 재임하는 중 죽은 경우가 있다.
둘째, 본인의 의사에 의하여 물러나는 예를 들 수 있다. 2세 미진부와 4세 이화랑의 퇴임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 누군가의 명에 의하여 물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넷째, 정부의 관직을 차지하게 되며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는 예들이 있다.
한편 32세 신공은 681년 김흠돌의 난으로 인하여 자의태후가 화랑도를 폐지하게 되며 그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다른 풍월주들의 퇴임과는 다른 이유로 물러난 것을 의미한다. 32명의 풍월주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부제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보편적인 퇴임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는 아니나 부제는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받을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제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고 퇴임하는 일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여겨진다.

풍월주의 임명과 퇴임 절차

풍월주의 임명과 퇴임은 화랑의 법(花郞之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고 있다. 화랑의 법에는 후계자가 전주에게 하배(下拜)를 올리고 칭신을 한다.
양위하는 날 미실과 더불어 세종이 수레를 같이 타고 이르렀다. 설원랑이 옷을 갖추어 입고, 인부(印簿)와 검장(劒仗)을 받들어 미실·세종에게 바치고, 미실에게 선배(先拜)하고 세종에게 차배(次拜)를 하고 물러나 섰다.
세종이 미실에게 물어 말하기를 "문노는 설원에게 도맥(道?)으로는 스승이고 통맥(統?)은 아우인데 어느 자리에 앉아 마땅한가?" 하였다.
미실이 말하기를 "설원은 나의 총신이고 또 정통의 형입니다. 문노는 비록 스승이나 정도가 아닙니다.
어찌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까?" 하였다. 세종이 이에 설원에게 명하여 미실의 옆에 앉도록 하였다.
문노가 옷을 갖추고 무릎으로 걸어 나아가서, 미실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에 세종에게 절하고,
다음에 설원에게 절하고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자질이 없습니다"하고 사양하였다.
미실이 이에 인부를 주며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문노가 …을 받았다.
(세종이) … 이에 부서(簿書)를 주며 말하기를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설원은 이에 검장을 주며 말하기를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옛날에는 반드시 공주 중 혼인하지 않은 자를 택하여 …을 삼아 … 인부를 …(주었)다.
전주(前主)가 검장을 주었다. 이에 이르러 미실이 (天·地·人의) 삼재지법(三才之法)을 처음으로 행하였다. 이 이후 문노는 설원에게 하배를 하고 칭신을 하였다.
풍월주의 퇴임 의식은 장엄하게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 결과 후계자는 전주에게 하배하고 칭신하게 되었다.

낭도의 해산

진흥왕 29년(568) 미실이 원화가 되었다.

그 때 세종이 6세 풍월주로 있었는데 화랑의 우두머리로서 풍월주와 원화가 공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세종이 풍월주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때 세종은 그가 거느렸던 낭도를 모두 해산하였다.
세종의 낭도들이 원화 미실의 낭도로 될 수도 있었겠으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진흥왕은 설원과 미생 두 화랑이 낭도의 많은 무리를 통솔하고 조알케 한 것으로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화랑정신

화랑정신과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떠올릴 것으로 짐작이 간다.

하나는 사다함·관창·김유신과 같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충성심이다.
다른 하나는 세속5계다.
그런데 이 두 가지로는 화랑정신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화랑들은 충성심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27세 풍월주 흠돌은 마음이 험악하고 간사한 꾀가 많아 사람들이 모두 꺼렸다고 한다.
681년에는 흠돌이 주동이 되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화랑들은 충성심으로만 무장된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를 순국무사로 만들어낸 것은 현대 한국사학이다.
우리는 세속5계를 화랑정신이라고 배워왔다.
화랑정신이라고 여겨온 세속5계도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세속5계는 화랑도들만이 지켜야 하는 계율이 아닌 신라의 젊은이들이 지켜야할 계율이었다.
특히 중국화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 신국의 도가 아닌 보편적인 계율을 신라인들이 지켜나간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와 같은 계율을 화랑도가 지켰던 것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속5계를 화랑도의 계율로 만들어낸 것은 근·현대 한국사학일 뿐이다.
화랑정신은 세속5계 정도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기서 화랑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문노 조에 나오는 사풍(士風)을 주목할 수 있다.
사풍은 화랑이 낭도를 사랑하고, 낭도는 화랑을 위하여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화랑정신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청렴결백한 정조를 들 수 있다.

6세 풍월주 세종의 전기 「찬」에 그를 '화랑의 전형(典型)'이라고 하였다.
청렴결백한 절조를 화랑정신으로 볼 수도 있다.

둘째, 화랑들이 중시한 의리(義理)도 화랑정신으로 들 수 있다.

셋째, 재물과 관련된 화랑정신도 찾을 수 있다.

5세 풍월주 사다함은 561년 가야를 정벌한 공으로 밭을 받게 되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다함의 처신도 화랑정신의 하나일 수 있다.

넷째, 8세 풍월주 문노를 통하여 화랑정신을 말할 수도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했고 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 결과 문노의 낭도들은 사(武事)를 좋아하였고 호탕한 기질이 많았다고 한다.
이는 현대 한국사학이 만들어낸 화랑정신에 가까운 것이다.

다섯째, 화랑정신에는 불신지신(不臣之臣) 즉 신하로 여기지 않는 신하를 인정하는 것도 있다.

신라인들은 뛰어난 인물을 존중하여줄 줄 아는 정신이 있었다.
그것도 화랑정신의 하나로 보면 어떨까?

여섯째, 『화랑세기』는 아니지만 『삼국사기』에 나오는 검군이라는 낭도를 통하여 화랑정신 한 가지를

더 찾을 수 있다.
검군은 궁중 사인으로 다른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는데 동참하지 않아 죽음에 이르렀다.
이것이 신라인의 정신이고 화랑정신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검군 전에는 검군이 죽을 곳이 아닌데 죽었으니 태산 같은 귀중한 목숨을 홍모처럼
아주 가볍게 여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한 평은 고려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편 화랑정신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화랑들의 여러 가지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우선 화랑도가 왕을 폐위하는데 가담한 것을 볼 수 있다.
 579년 진지왕의 폐위하는데 가담한 문노는 골품을 얻을 수 있었고, 문노의 화랑도들은 미천한 사람으로 고관으로 발탁되는 람들이 많게 되었다.
신라의 화랑도는 인간집단이었다. 따라서 왕을 폐위시키는데 가담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세속5계의 사군이충(事君以忠) 조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풍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화랑정신에 대해서는 앞으로 검토할 문제다.
보다 다양한 화랑정신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만 근·현대 한국사학이 발명한 순국무사로서의 화랑도를 해체하고, 신라인의 화랑정신, 사풍을 찾아야 한다.
 
 
 

낭정·낭권 장악

『화랑세기』저술 내용 세 가지 중의 하나가 낭정의 대자(大者) 즉 화랑도 조직과 그 운용에 대한 것이다. 화랑도를 이끌어가는 낭정은 풍월주가 장악하였다.

그런데 풍월주 중에는 낭정을 돌보지 않은 예도 있다. 19세 풍월주 흠순공은 재위 4년 동안 한결같이 낭정을 돌보지 않고 낭도를 거느리고 지방에 머물렀다.
부제 예원공이 낭정을 대행하였다. 낭정이 부제와 낭두들에 의하여 장악되기도 하였다.

화랑도와 조정

화랑도 자체가 조정의 관부로 있었던 것은 아닐 수 있다.

화랑도가 국가의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조정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랑도가 조정과 무관하게 존재한 것일 수는 없다.
풍월주의 임명에 주도권을 장악한 사람들은 왕권을 등에 업고 있었고, 풍월주들은 왕권을 등에 업고 있는 사람들을 후견인으로 하여 활동을 하였다.
한편 화랑과 낭도는 나이가 차면 조정의 관직을 갖고 활동을 하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과 같이 진평왕 대에 검군은 사량궁 사인(舍人)으로 있으며 동시에 화랑도에 속하여 낭도로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문노의 경우 세종의 청으로 진흥왕이 급찬을 주었으나 거절하였고, 미실이 봉사(奉事)로 삼으려 하였으나 승낙하지 않았고, 진지왕의 즉위 후 지도황후가 일을 꾸며 일길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후일 진지왕을 폐위하는 일에 가담한 공으로 아찬으로 올라 골품을 얻게 되었다.
문노는 579년 진지왕을 폐위한 후 풍월주가 되었다. 그가 풍월주로 있으며 아찬이 된 것은 조정에서 화랑도에게 일정한 대우를 한 것을 의미한다.
아찬과 같은 관위는 보수를 주는 기준이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화랑도에게 관직을 주어 일을 시키고 관위를 주어 보수를 준 것을 알 수 있다.

폐정(弊政) 개혁

화랑도의 낭정은 시간이 지나며 문제가 생겼고, 필요에 따라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며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쳤다.

실제로 낭정의 옛 폐단을 개혁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든 풍월주들이 있었다.
8세 풍월주 문노는 낭도부곡을 설치하였다.
12세 풍월주 보리공은 진골정통·대원신통·가야파로 갈라진 3파의 낭두들을 섞어 등용하기 위한 균등의 제도를 만들었다.
13세 풍월주 용춘은 낭도 구습을 고쳤다고 한다.
22세 풍월주 양도공은 낭두 7급을 9급으로 고쳤다.
 그리고 낭두를 배출하는 입망의 법을 개혁해 인재를 뽑고 사함의 풍속을 금했다.
양도공은 유화의 폐단도 고쳤다. 화랑도 제는 한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며 개혁되어 나갔던 것이다.

무너진 낭정

낭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26세 풍월주 진공 대(652~656)부터였다.

진공은 27세 풍월주 흠돌, 흠돌의 부제였던 흥원 등이 모두 낭도 사병을 거느리고 위에서 낭정을 전횡하였던 것이다.
당시 한번 무너진 낭정을 바로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흠돌의 난을 일으킨 소위 3간들이 낭도 사병을 장악하였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나 한다.
즉 백제·고구려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풍월주들이 사병들을 거느리고 활동을 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조정에서도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화랑들이 낭도사병을 거느렸고 그것이 낭정을 무너뜨린 바탕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화랑세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화랑도의 활동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중 『삼국사기』의 기록은 20세기 한국사학을 만든 연구자들이 화랑도의 활동을 이해하는 기본적 자료로 이용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받든 이후 낭도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도의를 서로 연마하였고 가악(歌樂)을 서로 즐겼으며, 산수에 유오(遊娛)하여 멀리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사람들의 사정(邪正)을 알게 되어 착한 이들을 뽑아 조정에 천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은 화랑도의 활동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 왔다.
 
 
 

『화랑세기』에는 지금까지 상상도 하지 못한 많은 사실들이 들어있다.

그 중 화랑도가 행했던 공식적 활동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좌삼부(左三部)는 도의(道義)·문사(文事)·무사(武事)를 맡았고, 우삼부(右三部)는 현묘(玄妙)·악사(樂事)·예사(藝事)를 맡았고, 전삼부(前三部)는 유화(遊花)·제사(祭事)·공사(供事)를 맡았다. (『화랑세기』, 문노 조,)

문노가 편제하였던 낭도부곡에 좌삼부·우삼부·전삼부의 9부가 설치되었다.

 9부의 각 부는 담당하였던 업무가 정해져 있었다.
이를 통하여 화랑도는 적어도 9가지의 범주로 나뉘는 일을 맡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좌삼부에서 맡았던 일들을 주목할 수 있다. 그 중 도의가 있다.

『화랑세기』서문에는 국공들이 봉신을 행한 후(또는 국공들이 무리에 들어간 후) 선도가 도의를 서로 힘썼다고 나온다.
세속5계가 있다.
그것은 중국인들도 중시하는 도의를 신라에서 받아들인 것을 뜻한다.
그로부터 신라인들의 삶은 유교와 불교의 도의를 수용하는 세계화·중국화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화랑도의 활동과 관련시켜 문사(文事)를 볼 수 있다.

문사에는 역사를 공부하고, 문장을 익히고, 서적들을 읽고 글을 쓰는 일들도 모두 포함된다.
문사는 단순히 한문을 익히고 문장을 작성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중국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길이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화랑도는 무사(武事)와 관련되어 있었다. 화랑도들이 나라를 위한 군사적 활동을 한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순국무사로서 화랑도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문제이지 사실 화랑도를 무사와 떼어 생각할 수는 없다.
7세 풍월주 설화랑 대에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를 좋아하였고 호탕한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우삼부에서 맡았던 일들을 볼 수 있다. 우삼부에서는 현묘·예사·악사를 맡았다.

먼저 현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현묘는 미묘하고 심오한 도리라고 한다.
그러한 도리가 무엇을 의미할까?
『화랑세기』에는 9세 풍월주 비보랑 대에 대세라는 사람이 발분하고 써 공부하여 신선(神仙)의 진도(眞道)를 터득하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신선의 참된 도는 신선사상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화랑도는 신선사상과 깊은 관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화랑도를 선도(仙徒)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신라인들은 시간이 지나며 중국에서 만들어진 도교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현묘에는 도교적인 성격도 포함되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신라인들이 노장사상을 더한 도교를 직수입한 것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화랑세기의 시대에 우삼부 중 한 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신선의 도, 신선의 진도를 계속 관장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648년 당에 갔던 예원에게 유향이 신선의 도에 대하여 물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악사가 있다. 당시 악사는 음악과 춤이 함께 하였던 것이다. 또한 비보랑과 설화랑이 함께 노래를 배웠고 피리를 배웠던 것도 볼 수 있다.

한편 예사는 무엇일까?
보종공의 조카 모종공은 빼어난 용모에다가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모종공에게 문장과 화법(畵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예사에 해당한다.
그 밖에도 예사에 해당하는 일들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전삼부에서 담당하였던 유화·제사·공사는 무엇일까?
전삼부에서 맡았던 유화는 분명한 실체가 있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이 낭문에 들어가 유화가 되었는데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전삼부의 한부에서는 남도에 머물던 유화를 관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화랑도는 제사와 관련이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화랑세기』의 서문에 선도인 화랑이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지냈다고 한 것은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다.
화랑도는 신궁의 제사나 나라 안에서 행해진 수많은 제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각된다.

그러면 공사(供事)는 무엇이었을까?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공(供)과 관련하여 『화랑세기』에는 색공(色供)은 진골정통이나 대원신통에 속한 여자들이 왕 등에게 색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전삼부가 관장하였던 공사는 단순히 색공만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화랑도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물품들을 공급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쩌면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바치는 일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공사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화랑도 9부에서 담당한 일은 생각보다 다양한 것들이었다
 
 
 

1 화랑도가 배웠던 것들

『화랑세기』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화랑들이 배웠던 것들은 역사·문장·음률·노래·피리·춤·검 등이 있다.

사실 화랑도들은 그 밖에도 화랑으로서 또는 신라인으로서 필요하였던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고 생각된다.

2 화랑도가 익혔던 궁마와 검

화랑도의 우두머리가 누구인가에 따라 각기 익혔던 내용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7세 풍월주 설화랑의 낭도들은 향가를 잘하였고 속세를 떠난 청유를 즐겼다.
그와는 달리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하였고 호탕한 기질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화랑들은 기본적으로 누구나 익혀야 하였던 것이 있었다. 궁마와 검이 그것이다.
풍월주가 누구냐에 따라 무사(武事)를 강조한 바 있다.
8세 풍월주 문노의 문하에 있었던 화랑들은 무사를 중시하였다.
9세 풍월주 비보랑, 15세 풍월주 유신공 등이 그들이었다.
그리고 후에 천광공도 무사를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천광공이 5년간 풍월주로 있는 동안 낭정이 무사로 많이 돌아갔다는 것으로 그러한 사정을 확인하게 된다.

3 화랑도가 익혔던 향가(鄕歌)와 노래들

23세 풍월주 군관공의 아버지 동란공은 음성서(音聲署)의 장으로 향가를 잘하였다고 한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음성서는 향가도 관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7세 풍월주 설화랑의 낭도들이 향가를 잘하였고 속세를 떠난 청유를 즐겼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 하였다. 설화랑의 낭도를 운상인(雲上人)이라 하였던 것은 옥보고가 지리산에 들어갔던 운상원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여하튼 향가를 즐겼던 화랑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풍랑가』·『청조가』를 비롯한 노래들은 당시 화랑과 낭도를 비롯하여 신라인들이 알고 있던 것들이다.
여기서 화랑도들도 많은 노래를 불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4 화랑도의 주행천하(周行天下)

화랑도들이 산수에 놀러 다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유신공 또한 풍월주가 되기 전에 지혜와 용기가 있는 낭도를 뽑아 천하를 주행(周行)하고 고사(高士)들과 결속을 맺었으며 중악에 들어가 노인에게 비결을 받았다고 한다.
그 때 신변에는 늘 신병들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고 한다. 그가 돌아오자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그런가 하면 풍월주의 지위를 물러난 유신공은 열국을 순행하여 뜻과 기개가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삼한을 통합하였다고 나오고 있다.

화랑이나 풍월주가 천하를 주행할 때 낭도들도 따랐다.

화랑도는 군현으로 나갔던 것이다.
이는 천하를 주행하는 것이 단순히 놀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화랑도들은 후일 관직을 갖고 활동을 할 때를 대비하여 정보를 얻기 위하여 신라의 지방을 주류하였던 것이다.
 화랑도의 주행천하는 지방낭정을 돌보는 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신라의 제사가 전국적으로 행하여졌다. 지방의 화랑도가 지방에서 행해지는 국가 제사를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풍월주들이 나라 안을 돌아다니며 그러한 제사도 지낸 것은 아닐까 짐작하여 본다.


 
 
화랑도의 군사적 활동
 

1 화랑도와 전쟁



『화랑세기』는 저술 목적이 따로 있었다.

그렇기에 화랑도들이 전쟁에서 벌인 활동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다.

실제로 화랑도의 구체적인 전쟁 장면은 찾을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20세기에 만들어진 순국무사로서의 화랑도상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이

『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할 정도다.

화랑 중에는 풍월주가 되기 전부터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사람도 있다. 문노가 그 예가 된다.

문노(538~606)가 진지왕에 의하여 국선이 된 것은 576년이었고 풍월주가 된 것은 진지왕이 폐위 된 후인 579년이었다.

문노는 554년에 유신공의 할아버지 무력(武力)을 따라 백제를 쳤다.

555년에는 북한(北漢)에서 고구려를 쳤다.

557년에는 국원에서 북가야를 쳤다. 모두 공이 있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세종이 진흥왕에게 말하여 급찬의 관위를 주었으나 문노는 받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유신공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문노를 사기(士氣)의 종주로 삼았던 것은 의미가 있다.

문노가 화랑으로 있으며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것은 화랑도의 사기를 세운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다함은 16살의 나이로 전쟁에 나가려 하자 왕은 그가 어리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실제로 13·14살에서 18·19살까지의 낭도들은 동도(童徒)로서 전쟁에는 참전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화랑도들이라 하여 전쟁에 참전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평도와 대도는 전쟁에 동원될 나이였던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평도나 대도는 관직을 가지기도 하였고 전쟁에 나가기도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2 반란 진압에 나선 화랑도

왕국 신라에서는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화랑세기』에는 반란 진압에 화랑도가 공을 세운 예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의 즉위 과정에 있었던 반란의 진압에 관여하였던 화랑도들을 볼 수 있다. 『화랑세기』에는 17세 풍월주 염장공이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칠숙의 난을 다스리고, 그 공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선덕이 즉위하자 조정에 들어가 조부(調府)의 장관인 영(令)이 되었다고 한다. 24세 풍월주 천광공은 풍월주로 있을 때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바 있다. 선덕왕 대에 국사가 어지러워졌는데, 풍월주 천광공이 거느린 화랑도는 궁마를 익히고 무사로 돌아가 있었다.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때 신라 왕경에는 군사가 적어 천광공이 화랑도를 모두 동원하여 비담의 진으로 돌격하여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운 것이다. 천광공은 그로 인하여 호성장군으로 발탁되었다. 이로써 화랑도가 유사시에 군대의 임무를 수행한 것을 확인하게 된다.

3 반란을 일으킨 화랑도

그런데 화랑도는 왕 · 왕정을 수호하기 위한 반란 진압에만 공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들이 주도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일도 있다. 흠돌의 난이 그 대표적인 예다. 『화랑세기』에는 흠돌의 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흠돌은 일찍이 후일 문무왕의 왕비가 된 자의의 아름다움을 듣고 첩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자의의 어머니 보룡이 막았다. 얼마 안 있어 보룡이 당원전군을 낳았는데 흠돌이 사람들을 시켜 보룡의 추함을 떠들게 하여 위협하였다. 그런데 흠돌은 무열왕(김춘추)이 보룡을 총애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자의가 태자 법민(문무왕)의 비가 되자 자의가 덕이 없다고 험담을 하여 궁지로 몰았다. 그 때 흠돌이 문명황후의 조카로서 권세가 내외를 압도하였다. 자의는 마음을 졸이고 조심을 하였다. 흠돌은 문명왕후를 설득하여 자의가 후일 왕후가 되어 그 아들을 태자로 세우면 대권이 진골정통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기에 가야파는 위태로울 것이라 하고 태자의 첩으로 되었던 유신공의 딸 신광을 태자비로 삼으라고 한 바도 있다. 흠돌 등이 일으킨 반란의 전개와 진압에 대한 기록이 『화랑세기』에 있다. 흠돌의 난에 가담하였던 주동자들은 풍월주나 부제를 지낸 자들이었다. 그리고 난에 동원된 병사들은 시위삼도가 중심이었는데 그들은 흠돌 등의 낭도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흠돌의 난은 상선과 상랑 그리고 풍월주가 가담한 반란으로 화랑도가 중심이 된 반란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4 왕의 폐위에 가담한 화랑도

579년에 있었던 진지왕의 폐위사건에 화랑도가 가담한 것을 볼 수 있다. 문노는 진지왕의 폐위에 가담한 공으로 아찬이 되었고 골품을 얻을 수 있었다. 흔한 일일 수는 없으나 화랑도가 왕의 폐위에도 개입한 것을 볼 수 있다. 화랑도는 언제든 군사적 세력으로 될 수 있었기에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화랑도의 종교적 활동
1 신들의 나라, 신국의 화랑들

신라인들이 신라를 신국(神國)이라고 불렀다. 신국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죽은 사람들을 시조묘 · 신궁 · 사당 등에 모셔 놓고 신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한 신들도 격을 달리하였다. 그것은 살아있는 신라인들이 골품제의 규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화랑세기』가 나오기 전까지 신궁에 누가 또는 무엇이 모셔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통하여 신궁에 법흥왕과 옥진의 상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신궁에는 아시공의 상도 모셔져 있었다. 아시공은 하종의 어머니인 미실의 할아버지가 된다. 아시공은 비처왕의 마복7성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신궁에는 내물왕을 비롯한 김씨 왕들이 모셔졌는데 각 왕들과 관련이 있던 사람들 또한 모셔졌을 수 있다. 화랑도가 찾아간 곳은 신궁만이 아니라 능침도 있었던 것이다. 강조해야할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사당이 만들어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한 사당에 화랑도들이 찾아가서 절하고 기도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 마디로 신라는 신들의 나라였다

2 신선의 진도(眞道), 우주 청원(淸元)의 기를 찾는 화랑도

『화랑세기』에는 화랑들이 신선의 진도를 구하고자 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미생랑과의 갈등을 겪었던 화랑 대세는 비보랑의 보살핌을 입어 발분하고 힘써 공부하여 신선의 진도 즉 참된 도를 터득하고자 하였다. 대세는 벗인 구칠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구칠 또한 비보랑의 화랑이었다. 두 사람이 떠나자 비보랑의 심복 낭도들이 많이 불안해하였다고 한다.

화랑도들이 얻고자 하였던 신선의 진도는 무엇일까? 20세 풍월주 예원공이 648년 춘추공을 따라 당에 간 바 있다. 그 때 당의 유향이라는 사람이 예원공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그 중 신선(神仙)의 도(道)에 대한 것도 있었다. 예원공은 보종공이 그 도를 능히 얻었다고 답하였다. 16세 풍월주 보종공 조에는 유신공이 낭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선(仙)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보종형공을 따라야하고, 나라를 지켜 공을 세우려면 마땅히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하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보종공의 무엇이 신선의 도와 관련이 있을까? 신선의 도를 얻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주의 진기를 깊이 살펴 어조 · 화목이 끊임없이 생기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편작의학을 갖추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신라인들이 말하는 신선은 어떤 존재였을까? 앞에서 이야기한 우주 청원의 기나 우주의 진기는 구도의 결과 얻을 수 있는 것이었고 진생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화랑들이 얻고자 하였던 신라인들이 구한 신선의 도였다. 그러한 신선의 도는 신라에 일찍부터 자리 잡았던 샤머니즘 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아직 이 같은 화랑들의 신선의 도를 중국의 신선사상이나 도교와 연관시킬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신선이라는 같은 용어를 쓴다고 하여 신라인이 생각하는 신선과 중국인들이 생각한 신선을 단순 연결시켜야 할지도 자신이 없다. 만일 그것이 같았다면 648년 유향이 예원에게 신선의 도에 대하여 물었을 까닭이 없다. 그 때까지 신라의 선도는 노장사상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유향이 도교가 아니라 신성의 도를 물은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신라에는 국초부터 신선의 도에 대한 사상이 널리 퍼져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화랑세기』의 서문에 화랑은 선도(仙徒)라고 한 것을 통하여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3 화랑도와 불교

화랑도에 승려가 있었던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원화를 폐지하고 풍월주를 설치한 진흥왕 원년(540)에는 이미 왕실불교가 자리 잡았다. 화랑도들도 그와 같은 불교와 무관할 수 없었다. 『화랑세기』에 생각보다 적지 않은 불교관련 자료들이 들어 있다. 원광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 중 불교의 약사불이 등장한 것은 의미가 있다. 이로서 당시 불교가 받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화랑과 숙명공주는 일찍부터 불교와 관계가 깊었다. 『화랑세기』에 7세 풍월주 설화랑이 양위를 하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에 갔던 것으로 나온다. 설화랑은 수도(手徒)를 택하여 미실이 출입하는 것을 호위하여 사신두상이 되었다. 후에 설화랑은 미륵선화라는 이름을 더한 바 있다. 설화랑의 경우 화랑도에 불교를 끌어들인 흔적은 찾기 어렵다. 596년 풍월주의 지위를 물러난 보리공은 상선의 지위에 있으며 불문에 몸을 바쳐 원광법사를 도왔다. 김대문이 지었던 『고승전』에 보리공의 전기가 있다고 한다. 보리공에 이르러 불교가 화랑도와 관련이 시작되었다.

화랑도와 불교가 깊은 연관을 가진 것은 14세 풍월주 호림공 때부터였다. 14세 풍월주 호림공은 보리공에게 나아가 계를 받았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실제로 그로 인하여 선불 즉 화랑도와 불교가 융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호림공은 천부관음을 만들어 아들을 기원하여 선종랑(자장)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의 대성인이 되었다고 한다. 공은 부처를 숭상함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유신공에게 양위를 하고 스스로 무림거사라 불렀다고 한다. 호림공이 풍월주로 있을 때 화랑과 낭도들이 불교를 믿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21세 풍월주 선품공은 선불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22세 풍월주 양도공도 부처를 숭상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양도공의 세 아들과 두 딸이 사문의 노비가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왕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후 화랑도들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이는 신라 불교의 성장에 화랑과 낭도들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화랑도와 공사(公私)의 활동

1 사적인 활동-사신(私臣)이 된 화랑들

낭정의 운용과 관련된 국법이 있었다. 『화랑세기』에는 도두 세기의 처 도리를 처벌하는 과정에 양도공이 도리를 잡아다 볼기를 치려할 때 도리가 한 말이 있다. "첩의 죄가 비록 중하나 효장과 유장의 어미입니다. 국법에 선종(仙種)을 낳은 여자가 볼기를 내놓고 매를 맞는 도리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통하여 국법에 선종을 낳은 여자에 대한 처벌 규정까지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당시 신라에는 그 외에 많은 법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2 공적인 활동-화랑도와 관위·관직

신라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데 대한 보수를 주기 위한 기준으로 관위를 설치 · 운용하였다.
그리고 관직에 임명됨으로 왕정의 업무를 담당할 수 있었다. 화랑도는 관위와 관직과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화랑도는 왕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동도의 경우 그 가능성이 적었으나 평도나 대도는 왕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 관위와 관직과 관계가 생겨났다.
여하튼 신라의 화랑도들은 나라를 위하여 일할 때 관위와 관직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퇴임 후 화랑도의 활동 퇴임 화랑도가 갈 길은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들은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낭도의 경우 대도로서 30살이 되면 병부에 속하거나, 농공(農工)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이 되었다.
낭도 중에는 낭두로 올라가는 길도 열려 있었다.
한편 13세 풍월주 용춘공은 퇴임 후 조정에 들어가 요직을 거치며 대사(大舍) 이하에 재능 있는 낭도들을 많이 등용하였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낭도로서 등용된 자들이 또한 용춘공을 위하여 모두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한편 12 · 13살의 빼어난 진골 및 대족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한 자들이 될 수 있었던 화랑들의 갈 길은 또 달리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화랑도에서 퇴임한 화랑들은 상랑이나 상선이 되어 낭정에 간여하기도 하였다.
보리공 같은 사람은 조정에서 중용하려 하자 화랑 세습 가문으로 족하다고 하여 왕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풍월주와 화랑들은 왕정에 참여하여 관위를 받고 관직을 차지하였다.
퇴임한 풍월주들은 왕사에만 몸을 바친 것은 아니었다.
7세 풍월주 설화랑은 영흥사로 간 미실을 호위하며 사신두상이 되기도 하였다.
12세 풍월주 보리공은 퇴임 후 불문에 몸을 바쳐 원광을 도왔다고 한다.
14세 풍월주 호림공은 퇴임 후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