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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원숭이 별의 전쟁 1 - 여기는 쥬라기 시대 강남입니다

오늘의 쉼터 2016. 6. 8. 16:56

 제2장 원숭이 별의 전쟁 1


- 여기는 쥬라기 시대 강남입니다



“우마왕, 목숨을 걸고 부탁 드립니다.”


우마왕은 엎드린 채로 땅에 이마를 찧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며 눈살을 찌푸렸다.



“초공간의 재앙? 그게 뭐야?”



“예, 어디까지를 기억하고 계신지 몰라 처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우주 안에 있고 우주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있음과 없음 사이에 초공간이 있습니다.

초공간은 수학의 0과 같습니다.

모든 수에 0을 곱하면 0이 되고, 모든 수를 0으로 나누면 무한대가 됩니다.

우주에도 공간과 시간이 0으로 소멸해버리고

또 거기를 통과하면 무한대의 시공간으로 갈 수 있는 지점이 있는데

이것을 초공간이라고 합니다.

블랙홀이라고도 하구요.

그런데 최근에 이것이 큰 변고를 일으켰습니다.”



“무슨 변고?”



“제천대성, 우리가 있는 곳을 둘러보십시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더럽게 습기찬 별이군. 여긴 어디지.”



“떠나온 곳과 똑같은 곳. 1억 4천 3백만 년 전의 강남입니다.”



나는 놀라서 다시 한번 동굴 밖을 찬찬히 응시했다.

그제서야 울창한 원시림에 부시럭거리는 것들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공룡. 티라노사우러스 같이 흉폭한 공룡들이 숲에 우글거리고 있었다.



쥬라기 시대. 괴수 조종술에 특기를 가진 우마왕에게 유리한 시공간이었다.

큰일날 뻔 했구나. 나의 공격이 조금만 늦었다면 하늘로부터

수백 마리의 육식성 익룡들에 몰려들었을 지도 모른다.



“전혀 강남 같지 않은데.”



“그럴 겁니다.

지금의 강남이 되려면 7천8백만 년 후에 저 바다 밑이 솟아올라야 하니까요.

아까 우리는 3, 4초 만에 이곳으로 왔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이 먼 시간대까지 이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 참, 네가 날 데려 왔잖아.”



“초공간 여행은 본래 이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초공간의 구멍이 극히 드물어서 엄청나게 먼 거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초공간이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초공간을 통해 이제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괴물과 요마(妖魔)들이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요마라고? 야, 그거 신나겠는걸. 자고 일어나면 싸움거리가 생긴단 말이지.

그게 뭐가 문제야. 퇴치하면 되잖아.”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가 사는 세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 세상에 익숙해지고 세상에서 하는 일과 배움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시간과 공간이 그렇게 간단하게 구멍이 나서 기괴한 것들이 마구 들어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이 과연 진짜 세상인지, 실재 감각이 흔들립니다.

나중엔 내가 정말 나인지 그것도 알 수 없어져요.

제천대성께서 삼장법사를 모시고 한 번 더 서역으로 가서 이 사태를 바로 잡아주셔야 합니다.”



먼 옛날 삼장법사를 따라 무려 14년, 5032일 동안 터벅터벅 두 발만으로 길을 걸어

서역으로 가던 일이 생각났다.

오행산에 억류되어 있던 것을 풀어주고 죄값을 씻으라기에 한 일이지 두 번 다시 할 짓이 아니었다.



“난 그런 거 못 해. 솔직하게 말할께. 과거의 나는 금강불괴의 쇳덩이였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내 실력은 우마왕 너와 비슷해. 너한테 맞은 갈비뼈가 아직도 아파.

이런 내가 요마가 우글거리는 서역길을 가?”



“아닐 겁니다.

손오공님은 원래 싸우면 싸울수록 더 강해지고 공력이 올라가는 체질이었습니다.”



“에잇, 시끄러. 그만 잠이나 자.

너 때문에 동물원에 있다가 나와서 하루 종일 날뛰었더니 진짜 피곤하다.”



나는 모닥불에 장작을 더 집어넣고 머리카락 하나로 담요를 만들어 깔고는 그 위에 누웠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쥬라기의 태양은 거품이 이는 강남의 바다에 눈부신 빛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숲을 뒤져 과일과 물을 가져왔다.

우마왕과 둘이 배를 채우고 동굴을 나와 희뿌연 모래사장을 보자 갑자기 피로를 잊었다.

부드럽게 물보라치는 바다. 1억만년 넘게 계속될 생명의 노래를 담은 그 바다는

내 고생을 위로하듯 은은한 해풍을 불어주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우마왕이 물었다.



“제천대성,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내 근두운은 어디 있나?”



“제가 깊은 산 속에 감춰두었습니다만.”



“그럼 그 산으로 가자. 그걸 찾아서 <오래(傲來)> 행성으로 가볼 거야.

고향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너도 같이 가자.”



“저는 못 갑니다.”



우마왕은 구두 끝으로 모래를 찼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지구에서 할 일이 있어요.

그리고 전 고향의 가족들이 다 죽었습니다. 초공간의 재앙으로.”



“저런, 내가 복수해 줄께.”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우마왕이 물었다.



“그런데 손오공님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충격을 받고 숨을 훅 들이켰다.



막 전기가 들어오려는 형광등처럼 캄캄했던 머리 속에 밝은 빛이 명멸했다.

이상한 영상이 다시 보였다.

불타오르는 호수 위에 떠가는 잘 생긴 소년의 시체. 불덩어리가 비처럼 떨어지는 하늘.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붕괴되고 있는 행성. 그것이 키리카 행성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