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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별의 전쟁 2 - 저팔계와 사오정은 요즘 어디에

오늘의 쉼터 2016. 6. 8. 17:47

원숭이 별의 전쟁 2


- 저팔계와 사오정은 요즘 어디에




그 날 오후 쥬라기 시대의 강남을 빠져 나온 우마왕과 나는 역시 초공간을 이용해

눈 덮인 록키산맥에 도착했다.

우마왕이 나의 근두운을 감춰둔 곳은 록키산맥 그레이시어 산의 험준한 정상이었다.


“절대 안전한 곳에 두었습니다. 곰이 자주 나와서 캐나다 당국이 입산을 금지하고 있어요.

그래도 워낙 보물이라 위장을 해두었지요.”



우마왕은 비대한 몸을 위태롭게 추스르며 눈길을 올라갔다.

헉헉 하는 그의 입김이 청청하기 그지없는 록키산맥의 하늘에 하얗게 피어 올랐다.



“넌 근두운과 여의봉을 어떻게 얻었지?”



“키리카 행성에서 발하는 생체 신호를 잡았습니다.

제천대성께서 살아계신 것은 기적입니다.

생체의 에네르기가 극한에 달했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제가 레이더로 봤으니까요.

격렬한 싸움 끝에 죽었구나 생각했지요.

제 우주선이 도착했을 때는 별 자체도 폭발해버린 뒤였습니다.

저는 우주공간을 떠도는 행성의 잔해 속에서 여의봉과 근두운을 찾아 지구로 가지고 왔습니다.”



“왜 하필 지구야?”



“관세음보살님께서 제게 맡기신 임무가 있습니다.

전 지구에 환생한 삼장법사님을 찾아서 중생들을 구제할 <생명체들의 패턴>을 가지러

서역으로 보내야 합니다.”



“내 스승님이 또 지구인으로 환생했어? 그래, 찾았나?”



“거의 가까이 갔습니다. 그러나 찾아도 큰 일입니다.”



우마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삼장법사님은 공덕과 수행이 높은 성승(聖僧)이시지만 피와 살로 된 사람입니다.

무슨 수로 요마들이 우글거리는 서역길을 혼자 가시겠습니까?”



“저팔계와 사오정은 요즘 어디에 있나?”



“사오정님은 최근 지구를 방문했습니다.

제 부하들 말로는 인도인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변신하고 시애틀에 나타나셨다더군요.

저팔계님도 2년 전까지 지구에 계셨습니다.

홍콩에서 펀드 매니저로 일하셨죠.

하지만 여자 문제로 또 귀찮은 일이 생기자 사라졌습니다.

다른 세계로 나가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두 분도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아, 다 왔습니다. 저깁니다.”



우마왕이 가리킨 곳은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암벽이었다.

눈이 쌓인 위에 안개가 끼어 제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불러보십시오. 저것이 근두운입니다.”



우마왕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벼랑 중간의 뾰족한 모서리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과연 구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근두운이 은폐되기 좋은 장소였다.



근두운!



나의 목소리에 흰 눈은 부르르 떨더니 쏜살같이 나의 무릎 앞으로 날아왔다.

그리곤 마치 강아지처럼 나의 종아리에 제 몸체를 비볐다.

틀림없는 근두운이었다.



“자, 근두운도 돌려드렸습니다. 부탁이니 관세음보살님과 한 번 얘기해 보시지요.”



우마왕이 말했다.



“그건 그만 두고 싶은데.”



우마왕은 내 말을 못 들은 척 산 정상의 눈 더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금속제 원통을 꺼냈다.

스위치를 누르자 원통 중간이 좌우로 열리면서 스크린이 펼쳐졌다.



우물쭈물 하는 사이 스크린에는 보타락가 산의 거소에 있는 연못가를 홀로 거닐고 있는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왼손에 연꽃을 들고 세상 뭇 생명들의 음성을 관(觀)하시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얼굴을 비추는 스크린을 보았다.



“손오공, 나는 그대가 해탈한 줄 알았어요.

그대는 하늘을 나는 새처럼 어디에도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졌지요.”



나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보살님, 이 원숭이를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고난을 이기고 도를 구할 사람들이 필요해요.

지금 그대들이 있는 우주가 사라지려고 해요.

유가(한 우주의 종말)의 날이 가까웠어요.

세상은 화장터에 타오르는 불꽃. 그 장작은 세월, 그 연기는 햇빛, 그 불길은 낮, 그 재는 밤이에요.

그대들 세상의 운수가 밤에 이르러 천지가 캄캄하고 만물이 막히려 해요. 그대의 힘을 빌려주세요.”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요.

이왕 우주가 사라지는 거라면 제게 남은 시간이라도 즐겁게 살고 싶군요.

그리고 캄캄한 혼돈도 괜찮을 것 같아요.

헤헤. 잘 아시면서. 전 힘든 일은 딱 질색이예요.”



“손오공, 한 번만 자비의 마음을 가져보세요.

그대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고통의 태양이 진 후에는 안식의 별이 찾아와요.

반짝이는 별 아래서 진정한 평화를 누리세요.”



“그 태양 부분은 …… 그래요, 사오정과 저팔계에게 알아보시죠.

저는 그냥 놀고 먹다가 취생몽사(醉生夢死)할래요.

저 원래 그런 놈이거든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관세음보살이 더 말을 걸기 전에 나는 번개처럼 몸을 날려 근두운에 올라탔다.

그리곤 혀를 쏙 빼물고 귀 밑 털을 휘날리며 최고의 속력으로 뺑소니를 쳤다.



됐다. 해방이다. 집으로, 내 고향 원숭이 별 앞으로.



이 세상이 망한다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 한 우주가 망하면 또 다른 우주가 열리고

한 생이 끝나면 또 다른 생이 시작된다.

지루하게 질질 끄는 것보다 얼마나 좋아. 미래 따위는 우습지도 않은 것이다.



관세음보살이 내 마음을 듣지 못하게 이제 이 구질구질한 자의식도 집어치워야지.

앞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살 것이다.

쉽게 잊어버리고, 순간에 살며, 하고 싶은 짓만 할 것이다.

그것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