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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증거 4 - 오랜만이야. 친구!

오늘의 쉼터 2016. 6. 8. 16:14

존재의 증거 4


- 오랜만이야. 친구!



 불타는 호수 위에 누군가의 시체가 떠가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곳은 아름다운 별이었고 이제 막 멸망하고 있었다.

 

그 호수가 실제 보았던 광경인지 아니면 가상의 이미지인지, 그것은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서 호수 위를 떠가는 시체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시체는 물의 침대에 누운 듯 편안한 얼굴로 너울거리는 노란 불길 사이에 떠 있었다.

 

잘생긴 소년이었다.

16살쯤 되었을까? 단정하게 깎은 검은 머리카락과 승복(僧服) 같은 스타일의 잿빛 웃옷을 입고 있었다. 문득 내가 소년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 소년은…… .

 

“손님, 테헤란로 다 왔는데요. 어디 세워 드릴까요?”

 

운전기사의 외침에 나의 환각은 깨어졌다.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잠시 어쩔 줄을 모르다가 운전석 옆 요금계산기의

숫자와 지폐의 숫자를 비교하느라 꾸물대면서 겨우 돈을 치렀다.

택시 문을 열고 거리로 나온 나는 잠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나의 눈이 번쩍 떠졌다.

 

에네르기 파(波).

 

포스코 센터, 미래 에셋 증권, 삼성 멀티 캠퍼스…

인조 대리석과 화강석으로 장식된 고층 건물 위에 강한 에네르기 파가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파동은 하늘 곳곳에서 소용돌이를 만들며 무시무시한 바람을 일으켰다.

 

멋진 곳인걸.

 

나는 킁킁 하며 거리의 매콤한 공기 냄새를 맡았다.

이런 것이 내가 좋아하는 세계였다. 에네르기가 흐르는 땅.

사람들로 하여금 혼신의 힘을 쥐어짜게 하고, 노력을 배가하게 하고,

극한의 의지를 분기시키고, 죽을 둥 살 둥 목표를 쫓아가게 만드는 땅.

 

차를 사면 더 큰 차를 사고 싶고 사장이 되면 회장이 되고 싶다.

 

사람들을 휘몰아가는 명리(名利)의 강한 힘이 느껴지면서 나의 피까지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이런 곳이 그리워서 극락을 뛰쳐나왔는데 말야.

 

우마왕 이 자식 좋은 곳에 숨어 있잖아.

 

나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것은 야구공 만한 크기의 둥근 정찰 로봇으로 변했다.

 

“베스트 넷, 영어 혹은 한국어, 고층 건물.”

 

그렇게 말하고 하늘로 던지자 로봇은 둥근 몸통에서 두 개의 프로펠러를 좍 펼치고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갔다.

로봇은 금방 베스트 넷을 찾아냈다.

그리곤 그 29층 건물을 빙빙 돌면서 적외선을 쏘아댔다.

 

데이터를 수신할 고글을 만들어 끼자 로봇이 전송하는 건물의 단면도, 조감도,

층별 세부투시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건물 28층에서 이상한 힘이 발산되고 있었다.

지구인의 에네르기가 아니었다.

 

나는 빠른 속도로 걸어서 외벽을 화강석으로 장식한 베스트 넷 사옥에 도착했다.

건물 현관으로 들어서자 제복을 입은 수위가 나를 제지했다.

 

“누굴 찾아 오셨습니까? 신분증 좀 봅시다.”

 

수위는 머리 위에 쓴 모자를 치켜 올리면서 가당치 않다는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내 유니폼에 새겨진 ‘서울대공원 동물원’이라는 패찰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수위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향했을 때 나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면서 섭혼술(攝魂術)을 전개했다.

 

“당신이 내 신분증을 봐서 뭐할 거야?”

 

나지막한 나의 음성에 수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지면서 그는 내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의 신분증을 봐서 뭐하겠습니까.”

 

“나는 들어가서 볼 일을 좀 봐야겠어.”

 

“당신은 들어가서 볼 일을 좀 봐야겠습니다.”

 

나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그의 눈앞에서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수위는 넋이 떠나버린 좀비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주춤주춤 걸어서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널찍한 로비를 걸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넥타이를 매고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들이 바쁘게 걸어오다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드레시한 투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는 나를 보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개의치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28층을 눌렀다.

 

28층에서 문이 열리자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또 하나의 로비가 중요한 고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설비된 듯 했다.

가구는 모두 고급스런 원목이었고 가죽은 검은 색의 모노 톤이었다.

밖을 향한 창문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스테인드 글라스였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창 밖으로 강남 번화가의 지붕들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어떻게 오셨나요?”

 

로비의 한 쪽에 앉아 있던 여비서가 다가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까 가만히 계세요.”

 

역시 섭혼술에 걸린 여비서는 그 자리에 뻣뻣이 서버렸다.

노크 없이 벌컥 사장실 문을 열었다.

낯이 익은 뚱뚱한 남자가 방 한 가운데의 책상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나는 잠시 방문한 목적을 잊고 미소를 지었다.

반가웠던 것이다.

 

“오랜만이야.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