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서유기2

존재의 증거 6 - 한번만 더 서역에 가서…

오늘의 쉼터 2016. 6. 8. 16:37

존재의 증거 6


- 한번만 더 서역에 가서…




번쩍, 하고 우리는 빛의 커튼 같은 초공간을 통과했다.

또 다른 있음의 세계. 우마왕과 나는 서로를 향해 필사의 공력을 다한 일격을 퍼부었다.

꽝 하는 굉음과 함께 바다가 쪼개지고 땅이 꺼지는 충격이 새로운 시공간에 울려 퍼졌다.

 

무서운 고통이 찾아왔다.

턱이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눈 앞이 아찔해지면서 나는 공중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졌구나. 그 빌어먹을 느낌은 28층 높이쯤에서 떨어지는 듯한 긴 낙하 때문에 더욱 실감났다.

 

첨벙.

 

나는 물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입안에 고여 드는 것은 짭짤한 바닷물이었는데 그리 깊지는 않았다.

버둥거리다가 땅바닥에 발을 딛고 서자 바닷물은 가슴에서 출렁거렸다.

주위는 온통 검은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였다.

온 몸이 심하게 아팠다.

내 몸은 어느새 변신의 에너지를 잃고 다시 원숭이의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그 때 나의 눈은 번쩍 빛났다.

500m쯤 떨어진 백사장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우마왕이 보였다.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도 나만큼이나 심한 부상을 당한 듯했다.

 

잘 하면 저 녀석을 도망치게 만들 수 있을 지도 몰라.

나의 부상을 감추고 빠르게 맹렬하게 공격한다면.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거품을 일으키며 밀려가는 바닷물은 이상한 육지를 적시고 있었다.

먼 동쪽 하늘에 치솟은 산봉우리는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그 위엔 연기가 자욱히 깔린 듯한 잿빛 하늘이 걸려 있었다.

백사장을 둘러싼 무성한 원시림에는 키가 50, 60미터씩 되는 양치 식물들,

괴상하게 생긴 소철나무들, 사람의 키 만한 꽃을 피운 협죽도가 보였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솟구쳤다.

그리곤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여 바닷물을 박차고 우마왕을 향해 질주했다.

 

달려가면서 나는 머리 셋, 팔 여섯 개가 달린 사람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여섯 개의 손에 날카로운 칼을 잡고 광포한 공격을 퍼부었다.

우마왕은 나의 돌연한 맹공에 압도당한 듯했다.

그는 여의봉을 휘둘러 내 칼을 방어하면서 계속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에 공포가 깃들었고 그것은 곧 얼굴 전체로 번졌다.

 

그는 언제나 나보다 약했다.

나를 클론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런 기억은 심리적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공포가 무모한 공격을 조장했다.

우마왕은 풀쩍 뛰어 뒤로 빠지더니 하늘로 도약하면서 여의봉을 치켜들었다.

 

커져라.

 

나는 비로소 내 여의봉의 위용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길이 일만 발. 머리는 태산 같고 허리는 준령 같으며 하늘로 찌르면

삼십삼 천(三十三天)에 닿고 땅을 쑤시면 십팔층 지옥에 닿는다는 전설의 여의봉.

그렇게 거대해진 여의봉이 산사태처럼, 그러나 느리게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나는 파리처럼 날아 몸을 피했고 여의봉은 백사장의 모래를 가르고 지반을 부수었다.

지진처럼 강한 진동이 땅을 뒤흔들고 봉을 휘두른 우마왕의 팔뚝을 엄습했다.

우마왕의 손이 한순간 여의봉에서 떨어졌다.

 

나는 재빨리 여의봉의 다른 끝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외쳤다.

 

작아져라.

 

여의봉은 눈깜짝할 사이에 작아져서 내 손에 잡힌 길이 1.5 미터, 직경 5센티미터 정도의

철봉으로 변했다.

나는 여의봉의 끝을 우마왕 쪽으로 겨누고 다시 외쳤다.

 

늘어나라.

 

길이만 무한대로 늘어난 여의봉이 작살처럼 우마왕에게 날아갔다.

푹 하는 감각이 여의봉을 쥔 손아귀에 전해졌다.

 여의봉에 배를 찔린 우마왕은 허공을 헤엄치며 백여 미터나 뒤로 밀려가다 떨어졌다.

나는 앞으로 돌진해서 우마왕의 통통한 목을 밟고 여의봉을 겨누었다.

 

“어떠냐. 이 똥딱지야. 이래도 내가 허깨비냐?”

 

중상을 입은 우마왕은 코와 입으로 계속 피를 토했다.

내가 항복을 종용하자 그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동물원에 가둔 자를 그토록 증오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우마왕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나에 대한 우정 때문이라고 했다.

거짓일 수도 있지만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나는 우마왕의 등을 두드려 상한 피를 토하게 하고 배와 가슴을 주물러 내상을 치료했다.

그런 뒤 바다에서 좀 떨어진 시원한 동굴을 찾아 그를 눕히고 불을 피워주었다.

나도 기진맥진하여 그 옆에서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우마왕이 멀뚱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일어나자 그는 비대한 몸을 일으켜 넙쭉 큰 절을 했다.

 

“제천대성, 몰라 뵙고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만 둬. 친구끼리 왜 이래.”

 

“아니오. 이제야 희망이 생겼습니다. 제천대성, 이 우주를 구해주십시오.”

 

“뭐, 뭐라고.”

 

“지금 우주에는 초공간의 재앙이 일어나 뭇 생명들이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한 번만 더 삼장법사님과 함께 서역으로 가셔서 생명체들의 패턴을 바로 잡고

우주를 위기에서 구해주십시오.”

 

“무슨 홍두깨 같은 소리야.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어. 너 내가 진짜 손오공이라고 생각해?”

 

“키리카 행성에서 어떻게 살아나셨는지 모르지만 틀림없는 손오공이십니다.”

 

나는 발뺌을 하고 싶어졌다.

 

“그 키리 뭐시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아무래도 난 클론인가 봐.”

 

“아닙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진짜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