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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증거 5 - 착각마! 넌 복제인간일 뿐이야…

오늘의 쉼터 2016. 6. 8. 16:26

존재의 증거 5


- 착각마! 넌 복제인간일 뿐이야…




“여어.”

 

나를 본 우마왕은 긴장한 낯빛으로 그렇게만 말했다.

그는 편안해 보이는 스트라이프 무늬의 연회색 싱글 아래 흰색 골프 웨어를 입고 있었다.

 

가지런하게 빗어넘긴 머리카락 아래 위엄이 넘치는 넓은 이마와 굵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둥그스름한 큰 얼굴에는 금테 안경을 꼈는데 나이는 4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그는 내게 의자를 권하고 사장실 밖으로 나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여비서를 깨웠다.

 

“내 선배 아들이 취직 부탁하러 온 거야. 그렇게 알고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방문을 굳게 잠그고 돌아선 우마왕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넌 누구냐?”

 

우마왕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지구에서 놀던 옛 모습으로 변신했는데 친구도 몰라 보나? 나 손오공이다.”

 

“손오공은 죽었다.”

 

“흥, 네가 죽이려고 했겠지!”

 

나는 뱃속에서 야차들의 캡슐을 토해냈다.

바닥에 떨어진 캡슐을 밟자 퍽 하고 깨어지면서 두 마리의 야차가 굴러 나왔다.

나는 놈들을 걷어차며 우마왕을 손가락질했다.

 

“나를 원숭이 우리에 가두고 독극물을 주사하라고 한 게 이 놈이지?”

 

우마왕은 놀란 눈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야차들을 보더니

눈을 더 크게 치켜 뜨고 내 얼굴을 뜯어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동자가 야릇하게 반짝였다.

길다란 입술이 실룩거리면서 큭 큭 큭 하는 웃음소리가 삐져 나왔다.

 

“자기를 진짜 손오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잘 들어라. 내 친구 손오공은 2년 전 키리카 행성에서 정체불명의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 최후의 결전에서 손오공은 많은 분신들을 만들었지.

본래의 주인이 죽고 행성이 폭발했을 때 대부분의 분신들도 같이 죽었다.

그런데 일부 죽지 않은 분신들이 하이퍼 스페이스(초공간)에 난 구멍을 통해 이 곳 지구로 흘러 들었어. 나는 그 놈들을 잡아 동물원에 가두고 조용히 안락사시켰다.

결함투성이 클론(복제 인간) 때문에 존경스러웠던 내 친구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야.”

 

나는 등골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우마왕의 증언에는 일말의 주저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목소리가 나를 물러설 수 없게 만들었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뻔뻔스러움이군. 무슨 근거로 내가 죽었다는 거지?

누가 그런 거짓말을 믿을 것 같아? 넌 배신자야.

친구의 여의봉과 근두운을 훔쳐가려고 허튼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야.”

 

“그럴까?”

 

우마왕은 여유만만하게 웃으면서 귀에서 뭔가를 끄집어내었다.

그의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에 잡힌 그것은, 바로 나의 여의봉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 들어간 여의봉은 즉시 1.5 미터 정도의 길이로 늘어났다.

 

“손오공의 목소리에만 반응하게 되어 있는 음성인식장치를 풀려고 고생 좀 했지.”

 

우마왕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덧붙였다.

 

“어디 한 번 증명해보시지. 허깨비씨. 진짜 손오공은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엄청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너는 그 10분지 1도 못 될 거야.

생식세포에서 태어난 진짜는 완전하지만 이미 노화된 성인의 체세포에서 태어난 클론은

세포핵 안의 유전자가 노쇠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지.”

 

나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 입김을 불어넣었다.

머리카락은 길이 55센티 정도의 칼로 변했다.

뱀장어처럼 칼날 중간이 부드럽게 굽이치는 단병 접전용 양날검. 우마왕도

여의봉의 끝을 나의 가슴에 겨누었다.

 

다음 순간 발을 구르고 뛰어오른 나의 몸은 허공을 7미터 가량 날아서 우마왕의 머리를 노렸다.

오른손의 칼은 태산이라도 쪼갤 듯한 기세로 우마왕을 강타했다.

 

우마왕은 여의봉으로 나의 칼을 쳐내면서 오른손을 휘둘러 주먹으로 공격해왔다.

나는 왼손의 손바닥에 공력을 모아 그의 주먹을 맞받았다.

 

순간 나는 그가 나보다 한 수 위라는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펑.

 

벼락이 떨어져 부서지는 것 같은 섬광과 함께 방 안에 있던 모든 집기와 종이들이

가랑잎처럼 날아올랐다.

우마왕은 번개처럼 나의 팔목을 거머쥐었다.

 

“결투장이 좀 좁지?”

 

우마왕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그와 나를 감쌌다.

그것은 회오리바람이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일시에 휘어지면서 사라지는 듯이 보이는 빛의 굴절이었다.

이것은 있음의 세계에서 초공간(超空間)으로 빨려들어갈 때 생기는 현상이었다.

우마왕은 나를 붙잡고 전방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계동행(異界同行).

 

초공간을 이용할 줄 아는 마법사가 자기에게 유리하고 상대편에게 불리한 다른 시공간으로

함께 순간이동을 해버리는 고난도의 기술이었다.

주변은 일시에 캄캄해졌다.

우리가 움직이는 폭풍 같은 속도 앞에서 세상은 2차원으로, 다시 1차원으로 변해갔다.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휘어지면서 광원(光源)뿔 같은 한 지점으로 줄어들었다.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휘어져 수축했다.

 

드디어 있음과 없음의 사이, 초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