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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손오공, /존재의 증거 1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오늘의 쉼터 2016. 6. 8. 08:17

제1장 손오공,



존재의 증거 1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내 이름은 손오공.

 


원숭이 종족의 왕. 선(善)을 행하는 무법자. 최후에 승리하는 범죄자다.

 

우주를 움직이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힘, 적나라한 힘이다.

법과 도덕이란 겁쟁이들의 방패이며 살아있는 시체들의 위장술이다.

나는 세상에서 신과 부처가 지배하는 고상한 사회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고 확신한다.

 

삼장법사를 따라 서역에 다녀온 후 나는 그 공로로 잠시 그런 사회에서 살았다.

<극락>이라 부르는 그곳에선 매일 매일 온화한 봄볕이 하늘에 넘쳐흘렀다.

물 위엔 청정한 연꽃이 피고 구름 위에선 가릉빈가라는 새가 아름다운 소리로 울었다.

슬픔도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았다.

갈등도 싸움도 없었다.

항상 평온 무사했다.

결국 지루하고 답답하고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 된 나는 어딘가에 있다는 <속세>를 찾아

그곳을 탈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다시 장대한 모험의 삶을 즐겼다.

타락한 세계를 찾아다니며 생생하고 짜릿하게, 재미있고 활기차게 살았다.

쉽게 잊어버리고, 순간에 살며, 하고 싶은 일만 했다.

그것이 나다.

 

유례가 없을 만큼 독창적인 나의 일생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어떤 승려가 나를 보고 “귀신을 초월하고 무리에서 뛰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과연 나는 자라면서 최고의 마법사들을 찾아다니며 수련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 드넓은 우주에 72 가지의 변신술과 108 개체로의 분신술(分身術)을 구사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혹성과 혹성 사이를 날아다니는 <근두운>의 비행술, 어떤 무기와 대결해도 압도적인 파워를

발휘하는 <여의봉>의 전투력, <호풍환우>의 내공을 이용해 숲을 불태우고 산을 허물어버리는

공격력을 당신은 한 번 구경이라도 했는가.

 

내가 바로 그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오공. <하늘>을 평정해버린 위대한 원숭이 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좀 어지럽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가 정말 손오공일까?

그것이 불안하다.

 

영겁만큼이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뒤에 나는 깨어났다.

어렴풋한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내가 잠든 동안에 며칠이 지났는지 몇 달이 지났는지

아니면 몇 해가 지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발가락을 움직여보고 손가락을 움직여보고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뜨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주위를 분간할 수 있었다.

 

밤인지 낮인지 모를 희미한 빛이 느껴졌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밀폐된 공간의 꾸리하고 후텁지근한 공기였다.

갖가지 오물의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그 때 무엇인가가 누워 있는 나의 허리를 우지끈 밟았다.

소스라치는 내 머리 위를 타넘고 걸어가 희끄무레한 어둠 속을 어슬렁거리는 것들은 원숭이들이었다.

그것을 알자 불같은 분노가 나를 엄습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 쫄때기 새끼들아!”

 

나는 벌떡 일어서서 가까이 서 있는 원숭이의 따귀를 후려갈기고 다른 녀석들을 닥치는 대로 걷어찼다. 원숭이들은 바람을 만난 가랑잎처럼 나뒹굴었다.

 

“이 자식들이 감히 누굴 밟는 거야.”

 

고함을 지르다가 나는 더욱 충격을 받았다.

구석에 코를 박고 서로 뒤엉켜 벌벌 떨고 있는 그것들은 내가 아는 원숭이 종족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말도 하지 못했다.

용서를 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들은 몸을 웅크리고 끼익 끼익 끽 소리를 내며 손바닥을 부볐다. 어떤 것은 고개를 땅에 처박고 낑낑거리면서 내 눈앞에 제 엉덩이를 쳐들었다.

 

언어능력이 없는 영장류의 원시 원숭이들!

 

화가 나서 뻣뻣하게 곤두섰던 나의 털들이 갑자기 가라앉았다.

이곳은 나는 뺨에 난 털을 긁으며 이제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좌우를 살펴보았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정사각형에 가까운 방이었다.

그 가운데 한 면은 문이 달린 철창이었다.

 

유치하긴 하지만 이것은 문명의 흔적이었다.

이 방에 있는 6마리의 원시 원숭이들이 이런 방을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길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철창 밖이 수런거리더니 덜컹 하고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방으로 들어선 그림자들을 보는 순간 내 몸의 모든 근육은 쇠처럼 긴장했다.

 

그것은 세 마리의 털 없는 원숭이들이었다.

식물성 섬유로 만든 바지와 셔츠를 입고 모자를 쓴, 털없는 원숭이 종족.

이 새로운 데이터를 받아들이자 내 머리는 폭풍을 만난 풍차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렇게 콘크리트를 사용할 줄 아는 털없는 원숭이 종족은 그렇다.

나는 <지구>에 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털 없는 원숭이들이 다른 종족을 지배하는 혹성.

바람에 불려 몽환(夢幻)의 안개들이 천천히 걷히면서 어제 혹은 그저께 같은,

아주 가까운 날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햇빛이 쏟아지는 노천의 짐승 우리.

좁고 어두운 사육실의 방.

그리고 주삿바늘.

 

그렇다. 머리가 좀 맑아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는 주사를 맞았다.

인상이 더럽게 생긴 <인간> 하나가 밤마다 팔뚝만큼 굵은 주사기를 들고 와서 내 등에 뭔가를 주사했다.

 

기억을 꼽씹고 있을 때 냄새가 고약한 인간이 장대를 휘둘렀다.

장대 끝에 달린 철사줄 올가미가 나의 목을 힘껏 조여왔다.


올가미를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동서남북도 모르면서 날뛰면 안돼.

 

전투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목소리가 내 안에서 속삭였다.

여기가 어디이고, 어떤 놈이 내게 해꼬지를 하고 있는지를 알기 전까지 힘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털 없는 원숭이들은 철사줄 올가미로 내 목을 죄고 나를 원시 원숭이들의 우리에서 끌어내었다.

나는 약간 저항하는 척 하며 어두운 복도로 질질 끌려갔다.

 

복도는 벽 바깥으로 배관 파이프들이 튀어 나와 있는 반지하층이었다.

어떤 방에선가 여자 오랑우탄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베이지 색 페인트칠이 오래 되어 누릿누릿하게 보이는 복도의 끝에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털 없는 원숭이 하나가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수컷 침팬지가 다른 침팬지들을 때렸어요. 그래서 격리시키는 거예요.”

 

“수고해.”

 

어느 방으로 끌려간 나는 가로 세로 1.6미터 정도 되는 쇠로 만든 철창에 갇혔다.

그들은 나를 가둬놓고 나가버렸다.

방에는 바퀴가 달린 네 개의 이동식 철창이 있었고 갇혀 있는 원숭이는 나뿐이었다.

 

나는 철창에 앉아 나를 가둔 자들이 나눈 대화를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지구에서 쓰이는 모든 언어를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곳은 한국인들이 사는 지역이고 내가 있는 곳은 동물원인 것 같았다.

곳곳에 금이 간 벽과 낙후된 시설, 너저분한 청결 상태로 미루어 보아 오래된 동물원인 듯 했다.

낯선 느낌 밖에는 받지 않았다.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이곳에 가두고 원시 원숭이들 사이에 섞어놓았다.

그리고 내 몸에 뭔가 나쁜 것을 주사했다.

심장의 박동이 뛰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내 귀에 울렸다.

 으으으 하고 목을 죄는 듯한 울부짖음이 두 개의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흘러나왔다.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분노가 내 안에서 끓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한 놈은 절대로 살려두지 않겠다.

 

나는 석가모니가 했던 말 중에서 특히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좋아한다.

감히 이따위 짓을 한 놈은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나는 은하계의 수많은 별들을 돌아다니며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악당들을 죽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지구에 왔던 때도 나는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지구에 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손끝을 구부려 콧잔등과 입 주위를 긁기 시작했다.

극도로 신경질이 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진 나는 나를 가두고 있는 쇠창살에 달려들었다.

우선 이 빌어먹을 철창에서 나가야지.

 

그런데 이럴 수가! 두 손으로 쇠창살을 잡고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겼는데

그것은 뜻밖에도 조금밖에 휘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전율이 온 몸을 통과했다.

 

나, 손오공 맞아?

 

천하의 손오공이 이런 장난감 같은 철창에 갇혀 있다.

 

내 몸은 정상 상태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혈관에 이상한 약물이 잔뜩 투여되어 있었다.

그 이상한 약물은 나의 근육을 이완시키고 나의 정신을 가물가물하게 만들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무력(無力)함은 거기에서 온 것이다.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어쩌면 억누를 수 없는 의심이 나의 가슴을 짓눌렀다.

내가 만약 진짜 손오공이 아니라면? 나 손오공은 가슴의 터럭을 뽑아 훅 부는 방법으로

 108 개까지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분신들은 나중에 회수되지만 간혹 몇 가닥의 터럭이 돌아오지 않는 수도 있다.

 

나는 혹시 진짜 내가 아니라 길을 잃은 나의 분신(分身)이 아닐까.

일시적인 욕망에 의해 생겨났으나 결코 진정한 내가 아닌 분신.

이제는 본체에서 멀어져 점점 생명력이 쇠약해가고 있는 분신 말이다.

 

나는 난생 처음 무섭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손오공이야. 진짜 손오공. 허깨비가 아냐. 원숭이 종족의 영웅.

바람처럼 달빛처럼 은하계를 주유하는 전설의 승부사.

 

단신으로 <하늘>에 쳐들어가 9개 혹성의 연합군과 싸운 파천황(破天荒)의 용사.

붙잡혔을 때도 6센티의 작은 인간으로 변신해서 49일 동안 팔괘로의 무서운 화염을 견뎌낸…

 

잠깐, 변신?

 

변신!

 

그렇다. 내가 진짜 손오공이라면 변신술(變身術)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에 사는 털없는 원숭이로 변신해보자.

자, 변신, 변신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식은 땀이 흐르면서 갈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변신술의 요령은 알고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세 개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

3차원에 존재하는 물질적 육체와 4차원에 존재하는 심령(心靈)적 육체,

그리고 5차원에 존재하는 이지(理知)적 육체이다.

변신술이란 이 세 개의 신체를 서로 연결하고 있는 에너지를 움직임으로써

현재의 물질적 육체 위에 에너지이면서 동시에 물질인 기(氣)의 복합체(複合體),

즉 <에테르 복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3차원계를 초월하여 4차원과 5차원의 육체를 연결하는 그 에너지 영역의 호출암호였다. 무식한 말로 ‘마법의 주문(呪文)’이라고도 부르는 그 호출암호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