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서유기2

존재의 증거 2/끝내 벌렁 철창에 누워버렸다

오늘의 쉼터 2016. 6. 8. 08:37

끝내 벌렁 철창에 누워버렸다


나는 양손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가위처럼 벌리고 필사적으로 변신술의 기억을 더듬었다.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서 떠오르는 단어들을 외쳐보았다.


차크라!


오라!


에레보스!


아르케!


에잇, 개고기!


밥풀때기!


쫌팽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며 1시간에 걸친 정신의 고투를 벌이다가 나는 새벽이 오고 있었다.

뿌연 여명이 반지하의 천장에 달린 들창 꼭대기로 찾아왔다.

들창 바깥은 조그만 풀밭인 듯 했다.

희미한 빛이 풀잎 사이로 조각지면서 점점 강해졌다.

슬그머니 잠이 오려고 했다.



그 때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쩔렁거리는 열쇠소리가 나더니 덜컹 문이 열렸다.

방이 환해졌다.

육중한 턱을 가진 거구의 사내와 교활해 보이는 조그만 사내가 들어와 벽의 스위치를 올린 것이었다.

큰 사내는 철사줄 올가미의 장대를 잡고 있었고 작은 사내는 고동색 액체가 든

큼지막한 주사기를 쥐고 있었다.

둘 다 동물원 관리인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두 녀석을 보자 울컥 하는 열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고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낯이 익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본 쌍통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더럽고 괴로운 기억의 잔상(殘像)이 묻어 있는

얼굴들이었다.

두 녀석은 철창으로 다가오며 저희들끼리 지껄였다.



“어젯밤에 원숭이 놈이 발광을 했대.”



“그 주사약 중국제 아냐?

아무리 별종이라지만 매일 질산염 50cc씩 맞고 발광이라니?

그 양이면 고래도 한 방에 죽어.”



“그래서 오늘은 100cc 가져 왔어."



그 순간 내 머리의 뚜껑이 열려버렸다.



벌떡 일어난 나는 나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의 힘으로 쇠창살을 잡아 비틀었다.

이번엔 두 개의 굵은 쇠창살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철창을 튀어나온 나는 떼어낸 쇠창살로 두 녀석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두 녀석은 첫 매를 맞고 스프링처럼 튕기며 몸을 피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네다섯 대씩을 더 맞고 뻗어버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나는 쇠창살이 우그러질 때까지 계속 때렸다.



이렇게 때리면 죽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곧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아, 하는 힘찬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려왔다.

갑자기 팔과 다리에 엄청난 에네르기가 흘렀고 그렇게 기억나지 않던 주문까지 떠올랐다.

나는 쇠창살을 집어 던지고 두 팔을 벌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카샤!



순간 내 몸의 모든 근육이 진동했다.

 220 볼트쯤 되는 약한 전류에 감전된 느낌이었다.

내 눈앞에 수많은 육체의 이미지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나갔다.



나는 지구를 방문할 때마다 사용하는 나의 육체를 찾아냈다.

머릿속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이미지를 선택하자

3차원과 4차원과 5차원을 연결한 에너지의 장(場)이 함께 출렁거리면서 나의 형태가 변했다.

다리가 늘어나고 팔이 짧아졌으며 키가 커졌다.

코가 나오고 입이 들어갔으며 몸의 일부분을 제외한 모든 체모가 사라졌다.



털없는 원숭이, 지구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185센티 정도의 키에 야윈 얼굴.

피부색은 황토색이 배어나는 흰빛이고 눈동자는 갈색이 조금 섞인 검은 색이었다.

나이는 29세 정도. 아시아인이지만 어떻게 보면 흑인 같기도 하고 슬라브계

유럽인인 것 같기도 한 외모. 등산 자켓처럼 한 번 걸치면 지구 어디든 부담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편리한 육체의 옷이었다.



나는 내 몸의 여기 저기를 들여다보면서 깔깔깔 웃었다.



그러나 흐뭇함은 잠시였다.

왠지 모르게 귓구멍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새끼손가락으로 오른쪽 귓구멍을 후벼보다가 다시 왼쪽 귓구멍을 후벼보았다.

이럴 수가! 나는 기절할 만큼 놀라 허둥대었다.



내 여의봉!



물로 뒤덮인 행성 <동해>에서 용(龍)족의 군주로부터 얻은 나의 여의봉.

음성인식장치가 내장되어 “커져라, 작아져라” 하는 나의 목소리에 따라

능소능대(能小能大)하던 나의 여의봉. 그것이 없었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슬림형 담배의 필터 크기로 줄여 항상 귓구멍에 꽂아 두던

내 여의봉이 어디 갔단 말인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나는 들창 쪽을 보며 ‘근두운!’ 하고 불렀다.



없었다.

원격조종장치가 달린 나의 근두운은 아무 응답이 없었다.

여의봉도, 근두운도 없다. 사라져버렸다.

여의봉도 근두운도 없는 손오공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들은 내 존재의 증거였다.



“야, 이 늘어져 뒈지지 못한 개새끼들아! 내 여의봉 어쨌어?

근두운은 어디로 빼돌렸어? 이 도둑놈들, 이 죽일 놈들아!”



나는 물에 젖은 빨래처럼 뻗어 있는 녀석들을 힘껏 걷어찼다.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놈들은 이제 변신의 힘을 잃고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물원 관리자의 유니폼은 늘어나는 체구를 견디다 못해 찢어져버렸다.

놈들은 이제 2미터가 넘는 괴물로 변해 헐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