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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증거 3 - 강남의 테헤란밸리라는 곳으로

오늘의 쉼터 2016. 6. 8. 16:08

존재의 증거 3


- 강남의 테헤란밸리라는 곳으로



눈동자와 흰자위가 구별되지 않는 초록색의 눈, 구멍 두 개로만 이루어진 밋밋한 코와 턱 밑까지

길게 찢어진 입, 그리고 그 양쪽 가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두 개의 송곳니.

그리고 도마뱀의 뒷다리처럼 짧고 날렵한 하반신.

 

커다란 파충류처럼 생긴 이 놈들은 야차(夜叉)였다.

우주 곳곳에 서식하고 있는 호전적인 하등 생물.

나는 이미 쇠창살로 때릴 때부터 매를 튕겨 내는 살갗의 반동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대왕님.”

 

나의 성난 눈길 아래 깨어난 놈들은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내 여의봉과 근두운 어디 있어?"

 

“몰라요. 저희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한 겁니다. 대왕님도 아시잖아요. 저흰 쫄자예요”

 

“어쭈, 몰라? 그럼 누가 이런 짓을 하라고 시켰어?”

 

야차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는 다시 쇠창살을 집어들었다.

 

“말 안하고 그냥 죽을래?”

 

“아닙니다. 우마왕님. 우, 우, 우마왕(牛魔王)님입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우마왕은 나, 손오공의 둘도 없는 친구다.

힘들었던 수업시대가 끝나고 <오래국>의 원숭이 왕으로 군림하던 젊은 시절부터

나는 그와 사귀었다.

교마왕, 붕마왕 등과 함께 사흘이 멀다 하고 만나 술 마시고 당구 치고,

무용담을 떠벌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도대체 내가 기억을 할 수 없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살이라도 베어 나눠 먹고 싶었던 친구가 나를 배신한 것일까.

또 이 개미굴 같은 행성에 나를 가둬놓고 매일 독극물을 주사한 대가로

우마왕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준엄하게 노려보면서 야차들에게 물었다.

 

“우마왕, 지금 어디 있나?”

 

체구가 조그마한 야차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폭주(暴走)하는 땅>에 계십니다."

 

“뭐라고? 그게 뭐냐?"

 

“10년 전부터 이 행성에 강력한 에네르기의 태풍이 출현했습니다.

그 에네르기 파(波)가 지나가는 땅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확대시킬 수 있는

거대한 에너지를 받지만 조금만 제자리에 멈춰 있어도 곧바로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그 곳을 <폭주하는 땅>이라고 부릅니다.”

 

“거기가 어디냐?”

 

“여기서 북쪽으로 이십 리쯤 가면 관악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을 넘으면 강남이라는 도회지가 나오는데 <폭주하는 땅>은 거기 있습니다.

 <테헤란 밸리>라고 부르는 계곡으로 들어가셔서 <베스트 캐피탈>이라는 빌딩을 찾아보십시오.”

 

“찾아보긴 뭘 찾아 봐. 네 놈들도 모두 같이 간다.

우마왕과 대질시켜서 거짓말을 한 놈은 박살내겠다.”

 

나는 머리털 하나를 뽑아 즉시 공간 압축 캡슐을 만들었다.

 

호리병, 호리병, 호리병!

 

다음 순간 길이가 2미터 이상씩 되는 두 녀석의 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쫄아들면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캡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것은 옛날 내가 <금각대왕> <은각대왕>이라는 강적들과 싸우다가 배운 기술이었다.

이 공간압축마법을 발동하면 크기 19미터 이하의 물체들은 무조건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캡슐 속으로 빨려든다.

나는 캡슐을 눈앞으로 가져와 두 놈이 잘 들어갔는지 확인한 뒤 입안에 넣어 꿀꺽 삼켜버렸다.

 

나는 방을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을 나와 이리저리 살피다가 동물원 관리동인 듯한 건물로 재빨리 스며들었다.

 

날카로운 절도범의 후각으로 나는 로커가 있는 방을 찾아내었다.

로커의 자물쇠를 있는 대로 다 뜯어서 유니폼 한 벌을 꺼내 입고 구두와 휴대폰,

23만원의 현금을 훔쳤다.

제기랄, 천도복숭아를 훔치고 불로장생의 단약을 횡령한 우주의 대도(大盜) 손오공이

이런 좀도둑질이라니. 영락한 영웅의 비애가 가슴을 쳤다.

 

우마왕, 이 자식 만나기만 해봐라.

 

동물원을 걸어 나왔을 때는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는 상쾌한 아침이었다.

좌우를 경계하면서 정문을 빠져나온 나는 바람처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시속 40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달리다가 큰길에서 멈춰 서자 머리 위엔

이정표인 듯한 팻말이 붙어 있었다.

 

내가 떠나온 방향으로는 <서울대공원>이란 말이, 반대 방향으로는 각각 <사당>이니 <양재>니

하는 말이 씌어 있었다.

도무지 낯선 이름들이었다.

 

길은 원기왕성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지리를 모르는 나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뒷좌석에 올라탔다.

 

“강남의 테헤란 밸리라는 곳으로 갑시다.”

 

택시는 쏜살같이 달려 교차로를 지나 오르막 고갯길로 접어들었다.

고갯길부터 도로는 붐볐고 택시는 속도가 떨어졌다.

차창에 부딪혀 반사되는 아침 햇살을 보다가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 뾰족한 것이 머리를 긁고 지나가는 듯한 두통과 뜨거운 불덩이가

목구멍을 태워버리는 것 같은 갈증이 번갈아 일어났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숙였다.

 

그러자 기억의 물통 같은 것이 한 쪽으로 기울었다.

출렁, 하고 뭔가가 넘쳐흐르면서 나의 현실 감각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 균열의 열린 틈새로 이상한 영상(映像)이 번쩍번쩍 카메라 플래시의 섬광처럼 비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