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7장 기이한 인연(姻緣)

오늘의 쉼터 2016. 5. 31. 15:44

제7장 기이한 인연(姻緣)

 

천리묵혈동의 내부는 뼈를 에이는 듯한 한풍(寒風)과 음기(陰氣)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바닥과 벽, 천장 등에 낀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이끼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 동굴을 두들기는 듯한 파도 소리는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듣기 거북하였다.

하지만 많은 군웅들이 몰려들므로 이러한 흉흉함은 감소된 느낌이었다.

천리화통(千里火筒)을 비롯한 각종 횃불들의 불빛이 물결에 출렁이며 사방을 환히 밝히었다.

음침한 석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현란한 아름다움마저 연출하였다.

"파천혈랑선이 저기 있다. 놓치지 마라!"

"이봐 더 속력을 내라구! 우리 배가 처지고 있잖아."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가 동굴을 왕왕 울려 댔다.

수로가 둘로 나누어지며 군웅들은 더욱 우왕좌왕했다.

파천혈랑선이 급선회하여 우측의 수로로 접어들자,

반대편 수로로 전진하던 군웅들이 배를 포기하고 몸을 날린 것이다.

그 중에 경공이 약한 군웅들은 중간의 선박들을 징검다리 삼아 넘어왔다.

월녀개와 추추귀개, 소걸군도 우왕좌왕하는 군웅들 틈에 섞여 있었다.

하지만 소걸군은 선뜻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추추귀개가 짜증을 냈다.

"어서 가지 않고 뭘 꾸물대는 거야?"

재촉해 대는 그를 월녀개가 독살스레 노려보았다.

"소걸군에게 생각할 여유를 줘. 석두(石頭)인 주제에 뭘 안다고…."

추추귀개도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대관절 누가 사형이고, 누가 사제야? 정말이지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월녀개가 그거 잘됐다는 듯 손뼉까지 쳐 댔다.

"그 동안 무능한 사형을 쫓아다니느라 고생 수월찮게 했지.

마음 먹은 김에 사형 자리를 소걸군에게 양보하는 게 어때?"

"요런 배은망덕한 계집! 그게 물불 안 가리고 보살펴 준 사형에게 할 말이냐?"

"대체 누가 누굴 보살펴 줬다는 거야?

나 아니었다면 사형은 술은 커녕 식은 밥 덩어리 하나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을걸."

그들이 개와 고양이처럼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소걸군이 손가락질을 했다.

"그만 입 다물고 저길 봐."

월녀개와 추추귀개가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어슴푸레한 빛을 발하며 한 척의 소선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다른 여느 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저 배가 어떻다는 거야?"

추추귀개의 물음에 소걸군은 담담히 대답했다.

"장강어옹이 타고 있지."

그가 차비운을 들먹인 순간, 월녀개와 추추귀개의 눈빛이 먹이를 본 매처럼 변했다.

한데, 차비운이 탄 배는 파천혈랑선이 간 우측 수로가 아니었다.

뜻밖에도 좌측 수로로 향하는 게 아닌가?

소걸군의 입가에 냉소가 흘렀다.

"제법 머리를 쓰긴 했으나 모두가 속진 않을걸? 적어도 십여 명쯤은…."

그제서야 상대의 계책을 눈치챈 월녀개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나, 추추귀개는 그것마저 자신이 알아 낸 양 떠들어 댔다.

"파천혈랑선을 미끼로 유인해 놓고 자신들은 대귀선이 숨겨진 곳으로 가려고?

하지만 난 절대로 못 속이지."

월녀개는 그의 뻔뻔스러움에 이골이 난 터라 상대 않고 소걸군을 바라보았다.

"장강어옹과 함께 불귀해로 갔던 사람들은 대귀선이 숨겨진 위치를 짐작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절대로 속지 않을걸."

소걸군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뜨거운 눈빛을 피하며 갑자기 발견한 듯 음성을 높였다.

"우린 저걸 이용하는 게 어때?"

차비운 일행의 배와 십여 장의 거리를 유지하며 유유히 따르는 선박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매우 단단했으며, 제법 큰 규모였다.

선수(船首)에는 검을 걸머진 네 명의 중년도인이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풍모가 비범해 보였다.

그들을 살펴본 추추귀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소괴(小怪)들아, 저 도사들이 누군지 아느냐?"

월녀개가 코웃음쳤다.

"흥, 말코도사 따위들은 관심 없어."

추추귀개는 으시대며 큰 소리쳤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말할 것이지. 소걸군도 모르지?"

소걸군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천하에 소걸군이 모르는 것은 없어.

천상천하무불통지(天上天下無不通知) 만통자도 내 발끝에 미치지 못하며, 또한…."

"그만! 제발 그만해 둬!"

추추귀개는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채 장황한 설교를 시작했다.

"소걸군, 밥그릇을 곱절 가량 더 비운 이 사형의 말을 명심하거라."

"……."

"우리는 비록 비렁뱅이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예절은 굳게 지켜 왔다."

"……."

"첫째, 남의 담장을 넘어가 적선을 요구하지 않는다."

소걸군은 때에 찌든 그의 손을 떼어 내며 오만상을 썼다.

"퉤퉤! 짠맛인지 쓴맛인지 구별조차 안 되네.

그건 그렇다 치고, 대문이 잠겨 있을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추추귀개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둘째, 임자 없는 여인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는다. 이것은 강요로 보여질 수도 있으니까."

"왜 내 물음엔 대답 않는 거야?"

"셋째, 남의 품에 손을 집어넣는 행동도 금물이니라."

"얼씨구!"

"넷째, 의복과 몸은 청결해선 절대로 안 된다.

이것은 상대의 우월감과 즐거움을 상실케 한다."

"그 대신 불쾌감을 주겠지."

"다섯째,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월녀개가 빽 고함을 쳤다.

"본론만 얘기해. 이러단 저 배마저 놓치겠어!"

그녀의 말대로였다.

중년도인들이 탄 배가 멀어져 곧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추추귀개도 다급히 외쳤다.

"빨리 우리도 따라가자."

하지만 소걸군은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

"아직 다 안 들려 줬잖아. 다섯째는 뭐지?"

추추귀개는 신경질을 부렸다.

"지금 그딴 게 문제야? 다섯째인지 열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자랑하지 말라는 거다. 이젠 됐니?"

"아하, 그렇군. 하나, 내겐 해당 안 되는 사항이야. 난 추호도 잘난 척한 적이 없거든."

"그렇다면 저 도사들이 누군지 안단 말이냐?"

"……."

소걸군이 대답 않고 히죽히죽 웃기만 하자, 추추귀개는 더욱 열을 받았다.

"어서 말해 봐!"

소걸군은 점점 작아져 가는 배를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당사자(武當四者)들이지. 장문인이 직접 무공을 전수한 자들…."

추추귀개가 메기 같은 입을 쩍 벌렸으나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숨을 몰아쉰 후에야 음성을 토해 냈다.

"무당사자는 입문한 이후, 한 번도 산을 내려온 적이 없는데 어찌 아는 것이냐?"

"꼭 찍어 먹어 봐야만  똥인지 된장인지 아나? 소문이란 어디서고 새어 나가기 마련 아닌가?"

추추귀개는 주눅이 든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나도 개방제자의 정보를 통해 알긴 했으나,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지."

이 때, 월녀개의 욕설이 들려 왔다.

"어떻게 만들어진  사내 자식들이기에 계집보다도 더 말이 많아? 빨랑 오지 못해?"

앞서 몸을 날리던 그녀는 두 소괴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자, 멈춰 서 노려보고 있었다.

"알았어. 가면 될 것 아냐."

추추귀개는 신형을 날리려다 멈칫 섰다.

그는 소걸군의 가느다란 허리를 한 팔로 감아 쥐었다.

"주둥아리 놀리는 재주, 십분의 일만큼이라도 무공을 터득했더라면 내가 이런 고생 안 해도 되잖아."

그가 계속 투덜거리며 신법을 전개하자, 소걸군도 배알이 뒤틀렸다.

"제기랄, 굼벵이 기어가는 것보다도 더 느린 주제에 공치사 하기는…."

추추귀개가 와락 성을 냈다.

"이게 어디 내 경공술 탓이냐?"

적지 않은 수의 군웅들이 눈치채고 좌측 육로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라,

누구 하나 제대로 경공을 펼칠 수 없는 형편이 아닌가?

추추귀개는 소걸군을 골탕 먹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내들끼리 끌어안고 가자니 볼쌍사납다. 사매와 함께 가거라."

그는 소걸군의 빼빼 마른 몸에 공력을 실어 창 던지듯 월녀개를 향해 날렸다.

"으윽!"

뜻밖의 행동에 기겁을 한 소걸군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양 팔을 멋대로 휘두르며 날아가는 모습은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자세였다. 가관이었다.

한데 그 못지않게 놀란 듯한 괴성(怪聲)이 전면에서 부딪쳐 왔다.

"어맛!"

경악에 일그러진 음성이었으나 소녀의 앳된 옥음(玉音), 월녀개의 음성은 결코 아니었다.

당황한 소걸군이 급히 바라본 순간, 눈이 휩떠졌다.

'왓!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소걸군의 시야로 밀려드는 소녀의 용모는 찰나지간이었지만 충분히 감상할 여유가 있었다.

소걸군의 안력은 평범하지 않기에….

문제는 마침 신형을 날린 소녀와 허공에서 충돌을 일으킬 위급한 상황이라는 데 있었다.

도무지 멈추거나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중인들도 이 곳 저 곳에서 당황한 외침들을 터뜨렸다.

"저런!"

"큰일났군."

월녀개의 절규에 찬 음성도 거기에 섞여 있었다.

"악! 소걸군!"

이 외침에는 소걸군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지만,

아마 그 누구도 이러한 마음을 알지 못하리라.

이 때 맞은편의 소녀가 소걸군을 쳐내려고 황급히 팔을 내밀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소걸군도 잽싸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소걸군이 팔을 끌어당기자 소녀는 또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이미 그의 품안에 안긴 뒤였으니….

뭉클…!

야릇한 느낌!

그건 소걸군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수치심에 소녀는 뿌리치려 했으나, 이번엔 물 속에 곤두박질쳐진 후였다.

뾰륵… 뾰르륵…!

수공에 문외한인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걸군의 목을 껴안았다.

"으흡!"

소걸군도 못 이기는 척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천재일우(千載一遇)…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게야.'

강렬한 포응이 이루어지자 소걸군은 더욱 욕심이 일었다.

수중에서 누가 볼 수 있으랴?

그는 소녀의 입술을 가볍게 찍어 갔다.

달콤하다고 할까?

감미롭다고 할까?

약간의 흥미로 시작한 장난이었으나 전신에 전율(戰慄)이 일었다.

평소의 냉한웅에게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장난기가 아닌가. 변하고 있었다.

천마존 냉한웅은 개방의 소걸군 신분에서 자신도 모르게 점차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소걸군은 다시 한 번 소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헤집고 자신의 혀를 살짝 들이밀었다.

그는 가슴과 하체에서 동시에 폭발하는 듯한 열화(熱火)를 감당치 못해 기성을 토해 냈다.

"으흐!"

몸이 마냥 하늘로 치솟는 듯한 황홀감.

그가 지그시 눈을 감고 감촉을 즐기고 있는 바로 그 때,

상심(傷心)과 희열(喜悅)이 뒤범벅된 음성이 귀에 와 닿았다.

"아, 저기 있다! 그런데…."

월녀개의 음성 끝부분이 흐려지고 있었다.

소걸군은 화들짝 놀라 감겨진 눈을 떴다.

'아차!'

소녀와 한 덩어리가 된 자신의 몸이 어느 틈엔가 물 밖에 드러나 있는 게 아닌가.

"저런 날도둑 놈!"

월녀개와 추추귀개의 입으로부터 동시에 질투에 찬 욕설이 날아들었다.

소걸군은 다시 물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당황한 나머지, 소녀의 몸을 끌어안은 채였으니….

수공을 모르는 소녀는 연거푸 물 속에 잠기는 바람에 가느다랗게 남아 있던

의식마저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데, 기묘한 광경이 소걸군의 눈에 띄었다.

기이한 물고기들….

오색찬란한 긴 지느러미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입 주위가 세모꼴이었으며 이빨은 머리에 비해 작은 편이었으나 톱니를 연상케 하였다.

물 속에서도 시력에 별 지장을 받지 않는 그는 순간, 기겁을 하였다.

'저건 손가락…!'

떼지어 몰려오는 물고기들 중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입에 천 조각과 더불어 물려 있는 것은 사람의 손가락 마디가 틀림없었다.

식인괴어(食人怪魚).

소걸군은 더 생각할 것 없이 물 밖을 향해 솟구쳤다.

하나 급히 서두르니, 그 일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녀의 치맛자락이 물 속 암초에 걸쳐 찢겨져 나간 것이다.

이 때 그녀에게서 조그마한 옥갑(玉匣)이 떨어져 나왔다.

물 속에서조차 영롱한 빛을 발하는 것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짐작케 했다.

소걸군은 재빨리 그것을 낚아채 품안에 넣었다.

그는 흉폭하게 아가리를 벌린 식인괴어들에게도 한 수 남기는 예의를 잊지 않았다.

"잘 가거라. 이 거지만도 못한 것들아!"

순간, 그의 전신에서 백색 기류가 뿜어져 나와 거센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혈살한빙공(血殺寒氷功)!

만년한빙(萬年寒氷)에서 나오는 극음(極陰)의 기운을 흡수하여 연마하는 마공으로,

이 강기( 氣)에 격중되면 공력이 심후해 얼어죽지 않더라도

한독(寒毒)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고 적혀 있지 않았던가.

식인괴어들은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기 무섭게 얼음처럼 변했으며, 
이어 산산조각이 나 물살에 흩어졌다.

푸우왁-!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니, 바로 코앞에 한 척의 선박이 머물고 있었다.

'이건 무당사자의 배가 아닌가? 장강어옹의 배를 추적해 갔을 텐데….'

소걸군은 의혹이 일었으나 상황이 다급한지라 목청부터 돋우었다.

"어서 좀 구해 주시오."

그의 외침이 터져 나오기 무섭게 천리화통의 불빛이 와 닿았다.

"소걸군이 여기 있다."

추추귀개의 고함 소리에 이어 밧줄이 내려졌다.

소걸군이 밧줄을 움켜쥐자, 곧 끌어올려지긴 했는데….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녀는 치마가 찢겨져 백옥 같은 종아리가 그대로 드러났으니….

중인들은 갑자기 선내가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종아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리화통 불빛에 드러난 그녀의 용모는 빙기옥골(氷肌玉骨),

화용월태(花容月態), 설부화용(雪膚花容) 등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를 갖다 붙여도 부족한 듯싶을 만큼 절색이었다.

소걸군도 물 속에서 보았던 것과 또 다른 미색(美色)에 그녀를 넋 나간 듯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가 이제껏 보아 왔던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각인(刻印)처럼 새겨진 소연군주(素蓮君主)라면 혹 비교가 될까?

십전십미(十全十美).

어느 한 군데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용모는 그야말로 인간의 것이 아닌 듯싶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소걸군의 모습은 다른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다.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지금 소걸군이 바라보고 있는 건 눈앞의 소녀가 아니라 다른 여인임을.

이 순간, 소걸은 소연군주를 떠올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사랑을 느끼게 한 여인.

그러나 당시 자신은 감히 바라볼 자격조차 없었던 황실의 인척.

돌연 그의 상념을 깨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소걸군! 이 염치 없는 놈아! 대체 언제까지 훔쳐보고 있을 거야?"

울분과 흥분, 애틋함이 서린 월녀개의 외침!

소걸군은 그제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흘겨보는 월녀개와 혀를 쏙 내밀고 약을 올리는 추추귀개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인자한 모습의 노승(老僧)과 대춧빛 얼굴의 노검객이 보였다.

노승은 천수장에서 본 바 있는 법성대사(法成大師)였다.

소림사(少林寺) 장경각주(藏經閣主)인 그의 우측에는 역시 원만한 인상의 노승이 서 있었는데,

그는 붉은 법의(法衣)를 걸치고 있었다.

붉고 긴 수실이 달린 장검을 등에 멘 노도장(老道長)이 법성대사의 좌측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르고 머리에는 청옥(靑玉)이 박힌 도관(道冠)을 썼으며,

왼손에 불진(佛塵)을 쥐고 있는 모습이 마치 고운야학(孤雲野鶴)과도 같았다.

노도장의 뒤엔 무당사자가 공손히 시립해 있었다.

소걸군은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것이 바로 정(正)과 사(邪)의 다름이로군."

중인들은 그의 엉뚱한 말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때 노도장이 도호를 토해 냈다.

"무량수불… 우리가 경망 중에도 배를 돌려 구해 준 것을 말씀하심이 아니오?"

소걸군은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했다.

"맞소. 만약 도장이 이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면 난 무척 외로웠을 거요."

중인들이 그의 조심성 없는 말투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 소걸군은 여전히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였다.

"무당 장문인, 별로 쓸모도 없는 제자들을 거느리느라 노고(勞苦)가 심하오."

그 순간, 무당사자를 비롯한 중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분노의 빛으로 바뀌었다.

"저런 막돼먹은 자가 있나."

"상종 못할…."

노도장은 당금 무당파 장문인인 창허자(昌噓子)였다.

누구보다도 더 화를 내야 할 그의 안면에 잔물결 같은 미소가 감돌았다.

"허허허… 빈도를 이토록 칭찬해 주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중인들은 창허자가 수양이 깊은 것인지, 정신이  약간 돈 것인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소걸군은 추궁과혈법(推宮過穴法)으로 소녀의 몸을 주무르는 월녀개를 힐끗 바라본 후,

창허자를 따라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우르르 중인들도 따라 선실 안으로 사라지자 선상엔 무당사자와 월녀개,

그리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소녀뿐이었다.

월녀개는 물끄러미 소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달님은 정녕 이 마음을 모르는 걸까?"

천리묵혈동의 냉기 찬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마구 흩날렸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머리카락보다 더 헝클어져 흩날리고 있었다.

선실의 내부는 여러 개의 천리화통이 놓여져 있어 매우 환하였다.

바닥에는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어 호화롭진 않았지만 안락한 기분이 들었다.

한쪽 구석에 나이를 짐작할 수 없어 보이는 백삼노인(白衫老人)이 책상다리 자세로 좌정하고 있었다.

깨끗한 옷차림에 수염을 기르지 않은 모습으로 미루어, 매우 깔끔한 성격임을 짐작케 해 주었다.

소걸군은 잘 아는 척 친숙한 표정으로 포권을 했다.

"천하절색을 안아 보고 만통자까지 만나다니, 오늘 소걸군은 정말 운이 좋군요."

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 백삼노인의 안색이 변했다.

"……."

백삼노인 뿐만이 아니었다.

소걸군과 함께 들어온 중인들 모두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먼저 법성대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미타불… 만통자께선 빈승보다도 월등한 배분이시오.

이분 시주처럼 젊으실 리가 없소이다."

대춧빛 얼굴의 노검객도 비웃음을 흘렸다.

"소걸군이 신기묘산(神奇妙算)이라더니, 잔꾀만 많을 뿐 견문은 형편없군."

소걸군은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천수장에선 화산 장로가 쥐뿔도 모르면서 이죽거리더니만,

이번엔 화산 장문인이 실수를 하시는구려."

"……."

화산파 신임 장문인 경운유협검(經雲流俠劍) 노백(櫓柏)은 날카롭게 쏘아만 볼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소걸군은 일파의 종주답게 분노를 삭이고 있는 노백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붉은 법의를 걸치고 있는 노승에게 시비 걸 듯 물었다.

"아미파(峨嵋派) 장문인께서도 소걸군의 말이 실언(失言)이라 생각하시오?"

아미파 장문인 혜인대사(慧仁大師)는 굵은 백미를 꿈틀거리며 합장했다.

"빈승은 진상을 확인할 수 없으니,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소이다."

"하하하하… 대사께서는 중용(中庸)을 택하셨군요. 가장 현명하오."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소걸군은 법성대사와 노백을 훑어보며 혀를 찼다.

"쯧쯧, 두 분이 잠자코 있었다면 중간은 되었을 텐데…."

법성대사와 노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노백이 분노를 터뜨리려는 그 순간, 백삼노인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네놈의 사부가 누구길래, 이토록 오만방자한 것이냐?"

하지만 소걸군의 표정은 변함없이 웃고 있었다.

"겁을 주어 입을 막으려 하다니, 만통자가 사람을 한참 잘못 봤군."

백삼노인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어린 놈이 노부의 속을 꿰뚫어보고 있구나.'

하지만 그는 내색 않고 고개를 저었다.

"노부의 나이는 작년에 겨우 환갑을 넘겼을 뿐인데, 어찌 만통자일 리 있겠는가?"

소걸군은 못 들은 척 상대조차 않고 창허자(昌噓子)에게 따졌다.

"무당 장문인께선 소걸군을 헛소리꾼으로 만들 셈이오? 어서 진실을 밝히시오."

자연 중인들의 시선도 창허자의 얼굴에 모아졌다.

창허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백삼노인을 바라봤다.

"노시주, 죄송하외다."

다음 순간, 중인들은 경악성을 발했다.

"정말 만사무불통지란 말인가?"

"오, 이런!"

법성대사와 노백의 표정엔 놀라움 외에 부끄러움이 더해졌다.

백삼노인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노부의 인피면구는 정교하기 그지없어 스스로 신분을 밝히기 전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허허허……!"

소걸군은 반대로 냉소를 흘렸다.

"천면인마(千面人魔)가 만든 면구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당금천하에 소걸군 이외엔 없을 거요."

"그렇다 쳐도 노부가 만통자인 것까지 알아 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러니까 소걸군이 신기묘산이라 불리우는 것 아니오?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니, 자세히 설명하겠소."

"……."

"소걸군에 관한 소문이 중원무림에 파다하니,

만사무불통지라 불리우는 만통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거요."

"하지만 노부는 자네를 보려고 선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는 척도 안 했는데…?"

"바로 그 점이 첫번째 의문이었소.

이러한 사람은 대개가 자존심이 유난히 강하고,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품고 있지요."

"허…!"

"두 번째, 이번 사건과 같은 큰일에 절대로 만통자가 빠질 리 없다는 점이오.

그리고 세 번째는 무명인(無名人)이 무당 장문인과 함께 있다는 것이니,

연결해 짐작하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외다."

선실 내의 중인들은 하나같이 감탄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추측일 뿐이잖는가?"

만통자의 반박에 소걸군은 얄밉게 웃어 보였다.

"어쨌든 만통자임을 밝혀 보이지 않았소?"

"……."

만통자마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자, 선실 내에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 숨막히는 분위기를 깬 인물은 역시 추추귀개였다.

"편하게 앉아 얘기합시다. 그렇다고 이 배가 멈춰 설 리도 없으니…."

그가 털썩 주저앉자, 창허자도 중인들을 향해 손을 내밀어 앉기를 권했다.

"옳은 말씀이오. 모두들 앉아 대책을 강구해 봅시다."

바닥이 푹신한 융단이라 따로 자리가 필요 없었다.

중인들이 둘러앉자, 최연장자인 만통자가 말문을 열었다.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追前浪)…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 내니,

개방의 영명이 사해를 누빌 시기가 멀지 않은 것 같소."

장강의 뒷물결이란 누굴 가르키는 것인지 뻔하잖는가?

화산 장문인인 노백이 냉소를 터뜨렸다.

"소걸군의 지혜가 뛰어남은 사실이나 무공을 익힌 바 없고,

설사 개방방주가 가르친다 하더라도 근골이 약해 큰 성취를 기대할 수 없을 거외다.

하나, 우리 화산파의 비전지술로 벌근세수시키고 무공을 전수한다면…."

추추귀개가 발끈해 말을 끊었다.

"화산 장문인께선 어떤 근거로 그런 망말을 하시오?"

"흥! 개방의 노괴(老怪)에게 그만한 능력이 없음을 알 만한 이는 다 알고 있다."

"닥쳐라! 괴사부(怪師父)께선 자신을 자랑하기 원치 않아, 진재실학을 드러내지 않으신 것이다."

추추귀개가 벌떡 일어서며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노백의 눈가에 살기가 감돌았다.

"감히 노부에게 대들다니… 네놈은 관을 보아야만 눈물을 흘리겠구나."

법성대사가 황급히 끼여들었다.

"두 분은 잠시 고정하시오. 새외의 문파들이 저마다 중원을 넘보고 있는 이 때,

자중지란(自中之亂)부터 일으킬 셈이오?"

아미 장문인인 혜인대사도 거들었다.

"그렇소이다. 지금이야말로 중원무림이 하나로 뭉쳐야  할 시기요."

노백은 더욱 기가 살아 외쳤다.

"바로 그거요. 현 중원의 문파들은 힘을 합쳐 불세출의 고수를 키워 낼 필요가 있소.

하나 시일이 촉박하니, 총명과 재지가 절정에 달한 인물이어야만 하오이다."

그는 짐짓 눈빛을 번뜩이며 소걸군을 직시하였다.

"소걸군은 어떤 배움도 빠르게 익힐 수 있을 게요.

하지만 좀 전에도 밝혔듯, 근골이 약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할 거외다."

혜인대사는 알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화산 장문인의 말씀은 개방만으론 부족하니, 힘을 합쳐 키우자는 것이오?"

노백은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나는 소걸군을 구파일방의 공동전인(共同傳人)으로 추천하는 바외다."

법성대사가 가장 먼저 동감을 표시했다.

"빈승의 눈이 어둡기는 하나, 구파일방의 절학을 모아 갈고 다듬는 일은

소걸군과 같은 기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듯싶소이다."

이어 창허자도 입을 열었다.

"근골이 약한 것이야 우리의 능력으로 능히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이니, 그리 문제될 것 없지요."

소걸군은 중인들의 이목이 다시 자신에게 향하자,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된다면 난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수가 되겠군요. 좋아, 좋아!"

노백이 성급하게 물었다.

"수락하는 것인가?"

한데, 소걸군의 고개는 좌우로 흔들려졌다.

"무공만이 능사(能事)는 아니오."

순간, 중인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공으로 일을 해결치 않겠다면…?"

"거부한단 말인가?"

"남들은 꿈조차 못 꿀 좋은 기회를 차 버리다니…."

노백의 양 볼이 노기로 부들부들 떨렸다.

"무공 없이도 너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단 뜻인가?"

"물론이오."

"노부가 지금 너를 공격한다면 어찌 방어하겠느냐?"

"추추귀개가 대신 보호해 줄 거요."

소걸군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대꾸해 대자, 노백은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그는 몸을 날리며 외쳤다.

"소괴는커녕 노괴가 온다 해도 널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이어 오른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추추귀개의 완맥을 노렸다.

갑작스런 공격을 당했으나 추추귀개는 당황치 않고 빙글 몸을 돌려 피했다.

하지만 상대는 대문파인 화산의 장문인 아닌가?

노백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더욱 빠른 일격(一擊)을 가해 왔다.

쉭-!

위기였다.

이 때, 추추귀개의 귀에 가느다랗게 음성이 들려 왔다.

"우측으로 반 보 이동하며 휘진청담(揮塵淸談)!"

전음입밀(傳音入密)!

틀림없는 소걸군의 음성이었으나, 그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추추귀개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움직이며 우권(右拳)을 쳐올렸다.

"엇!"

그의 돌연한 반격에 노백은 다급히 허리를 비틀어 피했다.

자세가 흩트러진 그 순간, 소걸군의 전음이 계속 추추귀개의 고막을 울려댔다.

"천리유사(千里流沙), 전용재야(戰龍在野), 설옹운산(雪擁雲山)으로 밀고 잡아당긴 후

수분(水分)과 기해혈(氣海穴)을 삭풍진막(朔風振漠)으로…."

추추귀개는 단번에 기세를 제압하자, 신이 났다.

"장문인의 무공이 고작 이 정도라니, 화산파도 문 닫을 날이 멀지 않았구나."

노백은 검술의 대가였다.

하지만 비좁은 선실 내에서 장검을 뽑아 휘두를 수 없는 일 아닌가.

'내가 소괴의 무공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군. 낭패로다!'

추추귀개는 그를 계속 궁지로 몰아넣었다.

신룡출운(神龍出雲), 비폭유천(飛瀑流泉), 팔방풍우(八方風雨) 등 
하나같이 무림에 너무도 잘 알려진 일반 초식들이었다.

하지만 그 배합과 신법이 너무도 절묘하여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때 갑자기 창허자의 입에서 경악의 외침이 흘러 나왔다.

"저건 이 갑자(甲子) 전에 실전된 구구잔영보(九九殘影步)가 아닌가!"

순간, 중인들은 일시에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혜인대사가 다급히 물었다.

"구구잔영보는 불귀해로 떠났던 구파일방 고수들 중 개방 마영절개(魔影絶 )의 독문보법이 아니오?"

추추귀개와 노백도 놀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멈춰 서 주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노백은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추추귀개에게 예리한 음성으로 추궁했다.

"뭔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개방이 숨기고 있는 것 같군. 진상을 털어놓아라."

추추귀개는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소걸군의 지시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구구잔영보였다니….'

하지만 사실대로 밝힐 처지가 아니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자, 노백의 가슴 속에서 다시 열화가 들끓기 시작했다.

"구린 냄새가 몸에서만 나는 게 아니구나. 그렇다면 실토하게 만드는 수밖에…."

이 때 홀연, 무당사자 중 정현(靜賢)이 뛰어 들어왔다.

"장문방장께 아룁니다."

"무슨 일이기에 호들갑이냐?"

창허자는 제자가 중요한 때에 끼여들자, 못마땅한 어투로 물었다.

"정체불명의 복면인들이 탄 배가 나타나 우리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만통자는 짚이는 것이 있는 듯 빙그레 웃었다.

"혹시 불사(不死)라고 수놓은 깃발을 발견하지 못했느냐?"

"네, 그런 것이 꽂혀 있긴 했습니다만…."

"묘강의 불사천마교도 모습을 드러냈군."

만통자의 중얼거림을 들은 소걸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묘강 삼교 중 파천혈랑교와 불사천마교가 자신을 감추지 않고 행동하는데, 왜…?'

그는 만통자에게 의문을 털어놓았다.

"고루대교가 이번 일에 끼여들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만통자도 표정 가득 의혹의 빛을 띠었다.

"노부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일세. 천수장 사건 이후 이제까지 계속 잠잠하니…."

창허자는 조심스레 이들의 안색을 살피며 묻지 않은 답변을 했다.

"본파도 유의해서 살폈으나,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소이다."

소걸군의 눈빛이 흔들렸다.

"고루대교만이 유독 천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소?"

다음 순간, 만통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건 음모다! 천수장을 배반한 신산묘인이 고루대교에 몸담고 있으니, 그 자가…."

소걸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신산묘인은 엄청난 화력을 지닌 뇌전(雷箭)을 훔쳤소.

그걸 사용한다면, 우린 천리묵혈동에 매장되어 버릴 거요."

만통자는 즉각 창허자를 향해 고함쳤다.

"배를 되돌리시오!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 하오!"

창허자도 사색이 돼 외쳤다.

"정현(靜賢)아, 서둘러라!"

급히 선실 밖으로 뛰쳐나간 정현의 음성이 들려 왔다.

"배를 돌려라! 어서!"

만통자는 침중한 표정으로 소걸군을 바라봤다.

"천리묵혈동에 대귀선이 감추어져 있단 소문을 낸 것도 고루대교겠군."

"필시 신산묘인의 계략일 것이오. 장강어옹도 그 자의 사주를 받아 우릴 유인했고…."

"으휴, 그 놈이…."

만통자가 장탄식 터뜨리는 이유를 소걸군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만통자는 천신령(天神令) 소속으로, 기밀을 탐지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천기령(天機令) 소속인 신산묘인의 이적행위를 간파하지 못해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다시 말해,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때였다.

쿵-!

선체가 뭔가에 충돌한 듯 심하게 흔들렸다.

중인들이 선실 밖으로 뛰쳐나가 보니, 무당사자 중의 정현이 복면인들을 향해 호통치고 있었다.

"너희의 정체를 밝혀라!"

복면인들 중 하나가 가래 끓는 소리로 웃었다.

"크흐흐…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도사 놈이 음흉하구나."

묘강어였으나 소걸군의 귀에는 별로 자연스럽게 들리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일제히 복면인들이 구호를 외치며 덮쳐 왔다.

"불사천마(不死天魔)- 영원불멸(永遠不滅)-!"

무당사자도 검을 뽑아 들고 그들을 상대해 갔다.

"멈춰랏!"

차창창창-!

창허자도 불진을 흔들며 소리를 높였다.

"아무래도 금일은 살계를 범해야 할 것 같구려."

하나, 그 소리마저 장풍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가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선상(船上)은 이십여 명의 고수가 벌이는 혼전(混戰)으로, 몸을 피할 만한 곳이라곤 전혀 없었다.

소걸군은 겁먹은 듯 살살 기어 월녀개와 절색의 소녀가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다른 선실로 들어갔다.

청죽을 엮어 만든 평범한 침상에 그 소녀가 누워 있었다.

월녀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소걸군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작일일화개(昨日一花開)… 어제도 꽃피더니, 금일일화개(今日一花開)…

오늘도 꽃이 피네! 올해 여복(女福)이 터졌군."

성큼 침상에 다가간 소걸군은 소녀의 얼굴을 핥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무슨 좋은 꿈을 꾸는지 방긋 웃었다.

순간, 소걸군은 눈이 부신 듯 느껴졌다.

수천 수만의 꽃이 일시에 만개(滿開)하는 듯, 황홀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소걸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살짝 그녀의 볼에 대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포근하며 매끄러운 감촉… 하늘의 흰 구름이 이러할까?

낙양일색(洛陽一色) 팽지연(彭芝燕), 강북월녀(江北月女) 하미미(河美美), 

천수공녀(千手公女) 유화영(兪華英)… 

그녀들 모두가 절색이었지만 이 소녀에 비하면 차이가 있었다.

더욱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 있지만,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단 한 여인, 그녀도 이 소녀가 가진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으며 결코 뒤지지 않았다.

'소연군주(素蓮君主)!

냉한웅(冷恨雄)은 죽는 순간까지 그대를 잊지 못할 거요.'

그렇다.

소걸군, 아니 냉한웅에게 있어서 목전의 소녀는 소연군주를 떠올리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또한 그녀는 단지 신선한 아름다움을 탐하는 인간 본연의 심미적(審美的) 욕구 대상일 뿐이었다.

이 때 소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 나왔다.

"으으음…!"

거의 동시에 파르르 눈까풀이 떨리더니, 흑수정 (黑水晶) 같은 눈망울을 드러냈다.

소걸군은 화들짝 놀라 손을 움츠리며 계면쩍은 미소를 머금었다.

부지불식간에 지금 자신의 신분이 냉한웅이 아니라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소걸군임을 잊은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안면에 떠오른 것은 마소(魔笑)였으니….

아, 매혹의 도를 넘어선 불가사의한 마력(魔力)!

순간, 소녀의 깊고 맑은 눈망울에 이채(異彩)가 떠올랐다.

흔들리는 눈빛….

그녀는 갑자기 뜨겁게 달아오르며 두방망이질을 쳐 대는 자신의 가슴을 양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런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소걸군은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자제했다.

아니, 자제할 수밖엔 없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선실 문짝이 부서져 나가며 훼방꾼이 뛰어든 것이었다.

두 명의 복면인이었다.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놈들!

앞으론 불사천마교도들이 눈에 띄기만 하면 몽땅 작살을 내버리리라!'

소걸군은 내심 크게 원통해 하였다.

그러나….

"어머!"

소녀가 놀란 듯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품안으로 파고들자,

그는 좀 전의 결심을 완전히 뒤집었다.

'앞으론 불사천마교도들이 기분을 좀 상하게 하더라도 손속에 인정을 두리라!'

형언(形言)할 수 없을 만큼 절묘한 감촉을 즐기던 그에게

복면인들은 또 한 번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크흐흐흐… 보아하니 한 쌍의 연인인 모양인데,

이 어른들께서 자비를 베풀어 함께 보내 주마."

복면인들이 한 칼에 양단내 버릴 듯 대도(大刀)를 치켜들자, 소걸군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두 개의 육봉(肉峰) 사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소생은 무공을 익히지 못했소. 낭자, 살려 주오!"

무르익어 가는 여체(女體)는 너무도 향기롭고 아늑하였다.

소걸군은 마구 비벼 대어 육향과 감촉을 만끽하였다.

"으흥… 겁먹지 말아요. 소졸(小卒)들이니…."

소녀 역시 생전 처음 경험한 짜릿짜릿한 느낌에 비음(鼻音)을 흘렸다.

그러나 손속은 전광석화(電光石火)와도 같이 빠르고 예리했다.

그녀가 가볍게 양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퉁기자, 두 줄기 지풍이 공간을 꿰뚫었다.

핑- 핑-!

음향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복면인들은 신법을 전개해 좌우로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그들을 스치듯 지나간 지풍이 빙글 방향을 꺾는 게 아닌가?

살가죽을 찢는 것인지, 뼈가 으스러지는 것인지 분간키 어려운 음향이 복면인들의 몸에서 일었다.

"악!"

"크윽!"

복면인들의 입에서 비명이 토해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동시에 소걸군의 입에서도 놀람이 섞인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회(廻)… 선(旋)… 지(指)…!"

이 때, 소녀의 향긋한 숨결이 그의 귓불을 간지럽혔다.

"거짓말쟁이! 당신은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소걸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소생은 정말 무공을 익히지 않았소.

다만 잡다한 견문과 무학에 관한 지식이 다른 이들보다 많을 뿐이오."

"……."

소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무언가를 애틋하게 갈망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은 말이 필요 없었다.

소걸군은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그 순간, 작고 도톰한 입술이 벌려졌다.

"일화(一花)를 아시나요?"

소걸군은 움찔 놀라 행동을 멈추었다.

"그럼 당신이 오행불성선(五行佛聖鮮)의 제자…."

일선(一仙), 이제(二帝), 삼옹(三翁), 사패(四覇), 오마(五魔), 육혈(六血), 칠기(七奇), 팔군(八君)….

오행불성선은 이들 삼십육 명 중 첫째인 일선(一仙)을 가리킨다.

그러나 소걸군이 놀란 이유는 그녀가 오행불성선의 제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강호비사집(江湖秘事集)에 적힌 일화(一花)의 신분.

그녀는 현 황제인 영종(英宗)의 질녀(姪女) 설하공주(雪霞公主)였으니….

이 때, 돼지 멱따는 듯한 소리가 선실 밖에서 들려 왔다.

"소걸군! 뻔뻔스러워도 정도가 있지, 네가 지금 그런 짓을 할 처지냐?"

언제 왔는지 개방방주인 철지영개가 문간에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소걸군은 떫은 표정을 지었으나 벌떡 일어났다.

그는 뭔가를 말할 듯 설하공주를 바라보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묵묵히 등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설하공주의 마음은 매우 어지러웠다.

'저 사람이 신기묘산 소걸군! 대명(大明)의 황녀(皇女)가 거지에게 연정을 느끼다니….'

선상에는 조금 전에 보이지 않던 인물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도움을 주러 달려온 고수들로서, 그들 중엔 천도탈흔(天賭奪魂) 방문웅(方文雄)과

성수마의(聖手魔醫) 여소량(呂紹梁), 중원일괴(中原一怪) 공문건(孔文建) 등 낯익은 인물도 여럿 있었다.

한 구석에는 십여 구의 시체가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는데, 모두가 복면인들이었다.

소걸군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공문건이 성수마의를 툭! 쳤다.

"천수장에서 보았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네만,

소걸군이 천수장의 그 애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군."

여소량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음양태령절맥(陰陽太靈絶脈)은 절대로 고칠 수 없는 병이야.

가(冷哥) 아이는 죽었으니, 그만 미련을 버리게."

이 때 시체들 곁에 선 소걸군이 큰 음성으로 주위를 침묵시켰다.

"대승(大勝)했다고 좋아하기엔 이르오."

자신이 가장 큰 몫을 했다고 떠들어 대던 철지영개가 머쓱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말에 뼈가 들어 있는 듯싶은데, 그게 무슨 뜻이냐?"

소걸군은 시체들의 복면을 벗기며 대답했다.

"불사천마교의 고수들이 이렇게 허약할 리가 없어요. 전에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의 무공은…."

화산 장문인인 노백의 놀란 외침이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아니? 이 자는 지살웅(地殺雄)!"

지살웅(地殺雄) 왕각(王殼)은 강북 녹림의 고수였다.

이어 중인들의 입에서 녹림무사들의 별호가 계속 튀어 나왔다.

"소면인도(笑面人屠)! 금발두타(金髮頭陀)!"

"이 자들은 음산삼마(陰山三魔)가 아닌가?"

이 때 갑자기 가공할 폭발음과 엄청난 진동이 일었다.

콰르르릉- 우르릉- 우웅-!

동굴 천장으로부터 크고 작은 암석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