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4장 소걸군(少乞君)의 지략(智略)

오늘의 쉼터 2016. 5. 31. 15:12

제4장 소걸군(少乞君)의 지략(智略)

 

"오래 살다 보니, 별 웃기는 것들 다 보겠군."

장강어옹(長江漁翁) 차비운(車飛雲)은 실소(失笑)를 베어 물었다.

그의 좌측에는 오 척 단신의 노인이 있었는데,

형형한 안광에 태양혈이 불쑥 돌출되어 있어 내가고수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무림인이 단신 노인의 손에 들려 있는 낡은 산반(算盤)을 본다면 단박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것이다.

사도오종(邪道五宗) 중의 한 명인 혈풍상괴(血風商怪) 전무(田武)였다.

또한 그의 우측에는 지옥야차부의 야차객 세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이에 비해 맞은편엔 거구의 사내와 중년의 미부(美婦)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일도경혼(一刀驚魂) 강무웅(姜武雄)과 옥봉루(玉鳳樓)의 여주인인 옥봉.

이들을 향한 차비운의 눈엔 살기가 감돌았다.

"요망한 계집! 어째서 노부의 목숨을 노리는 건지 이유나 말해 봐라."

그러나 옥봉의 원독에 가득찬 시선은 차비운의 좌측으로 옮겨졌다.

"혈풍상괴, 네놈도 사내냐?"

전무는 괴이한 미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노부는 결코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아.

계집의 고기 맛이 아무리 좋아도 친구의 목숨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너무도 뻔뻔스런 태도에 강무웅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간악한 소인배야! 그렇다면 애초에 거절을 할 것이지,

왜 부탁을 들어 준다는 약속을 했느냐? 상인에게도 상도의라는 것이 있거늘…."

전무는 그의 욕설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산반알을 퉁겼다.

"상인의 첫째 목적은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물건만 먼저 받아 챙기고 대금을 갚지 않는 일도 종종 생기지. 흐흐흐…!"

그 때 차비운이 그들의 대화를 가로챘다.

"전형(田兄)! 저 계집의 대답부터 듣고 손을 써도 늦지는 않을 거요."

옥봉은 차비운을 마주 노려보며 짤막한 냉음(冷音)을 토했다.

"분광월아도(分光月牙刀)!"

차비운이 진저리를 쳤다.

"또… 분광반월도! 그 자에게 손끝 하나 댄 적이 없는 노부에게 왜들 이 난리지?"

강무웅도 끼여들어 코웃음쳤다.

"네가 탐욕에 눈이 멀어 천망의 재료를 빼돌리지만 않았어도 죽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직접 죽인 거나 다를 바 뭐 있겠느냐?"

하나, 차비운은 못 들은 척 옥봉에게 물었다.

"대체 분광월아도와 어떤 관계인가?"

"그분의 아내다."

옥봉이 한(恨)을 베어 물 듯 대답한 순간, 차비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흘렀다.

"그럼 무풍신룡은 너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냐?"

무슨 뜻이 담긴 질문인지 알아차린 옥봉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더러운 늙은 놈아! 그분 협객은 이 몸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차비운은 그녀의 전신을 핥듯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별로 솔직하지가 못한 것 같군. 전형(田兄), 이 계집의 살맛이 어떻소?"

전무는 음흉하게 웃었다.

"기가 막히다는 말밖엔… 특히 가슴의 쌍옥봉(雙玉峯)은 크흐… 
저년이 노리는 것이 차형(車兄)의 목숨만 아니라면 백 명이라도 처치하고, 아주 내 것을 만들었을 게요."

순간, 강무웅이 대갈일성(大喝一聲)과 함께 등에 메고 있던 대두도를 뽑아 들었다.

"이 개만도 못한 늙은 놈들!"

도광(刀光)이 공간을 가르며 전무를 덮쳤다.

위윙-!

신력을 타고난데다가 생사현관이 뚫려 그 위세는 바위도 가를 듯했다.

하지만 공력이 추호도 실려 있지 않았으니….

전무가 가볍게 산반을 휘둘러 부딪치자 쨍! 하는 음향을 일으키며 산반이 손에서 벗어나 날아갔다.

이어 산반은 호확양인(狐確亮引)의 초식으로 전무의 마혈을 찍었다.

"윽!"

동시에 강무웅의 몸은 석상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강오라버니!"

옥봉은 화들짝 놀라 곁으로 다가가려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두 발이 땅에 붙은 듯 꼼짝조차 할 수 없었다.

차비운은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옷 앞섶을 와락 잡아뜯었다.

찌익-!

옷자락이 찢겨져 나가며 육봉을 덮은 자홍색 젖가리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악마!"

옥봉은 수치와 모멸감에 눈을 질끈 감았으나 닫혀진 눈까풀 밖으로 눈물이 계속 새어 나왔다.

"무풍신룡은 지금 어디 있느냐?"

차비운의 눈에 독광(毒光)이 번뜩였다.

"다시 묻겠다. 무풍신룡은 지금 어디 있느냐?"

"몇 번을 대답해도 마찬가지다. 난 그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옥봉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으나, 차비운은 조금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크흐흐흐… 네년은 노부를 너무도 업신여기는구나."

차비운은 슬며시 손을 뻗어 옥봉의 젖가리개를 더듬었다.

순간, 뇌전(雷電)이 손끝을 타고 그의 하체로 흘러 가랭이 사이의 물건을 불끈 달구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강무웅의 눈에 붉게 핏발이 섰다.

"쭈글쭈글 해골이 다 된 늙은 놈이 망령이 나도 단단히 났구나. 
당장 그 더러운 손, 치우거라!"

그가 마구 욕설을  퍼부었으나, 차비운의 표정에서 흉물스런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네놈의 소원이라면 손을 떼지."

순간 매 발톱 같은 그의 손가락이 젖가리개를 사납게 낚아챘다.

"찍-!

비단 조각이 두 마리 나비인 양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자리에 유백색 윤기 흐르는 두 개의 봉우리가 황홀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 눈으로 보기만 해도 감탄을 자아낼 만큼이나 완벽한 형태가 아닌가?

그것은 어떤 미인의 미소보다도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단 한 명, 강무웅의 눈에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비쳐졌다.

"죽이겠다. 네놈들을 모조리…!"

그는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입술뿐이라 피 맺힌 욕설을 퍼부으려 했다.

하지만 전무는 이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주둥아리 닥쳐!"

전무의 왼발이 그의 복부를 사납게 파고들었다.

"크윽!"

결국 강무웅의 입에서 토해진 것은 욕설이 아니라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동시에 그의 거구가 붕 떠올라 이 장 밖으로 곤두박질쳤다.

차비운은 색정(色情)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옥봉(玉鳳)의 육봉(肉峯)을 더듬었다.

더 이상 참기 어려워진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쪽에 버티고 있는 야차객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전무 역시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옥봉의 앞가슴을 바라보고 있자, 
차비운은 하체가 더욱 후끈 달아올랐다.

'혈풍상괴가 저토록이나 옥봉의 몸을 잊지 못하는 것을 봐도 기물(奇物)임이 틀림없는데….'

그가 양 손을 뻗쳐 탐스러운 쌍옥봉(雙玉峯)을 거머쥐려는 순간, 
꼭 닫혀져 있던 옥봉의 눈까풀이 위로 올려졌다.

흥건히 괴어 있던 눈물이 반짝 빛줄기로 변해 주르르 흘러내렸다.

"차라리 날 죽여라."

하지만 차비운은 일말의 동정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너도 수치를 아느냐? 스스로 사내 놈들을 유혹하여 몸을 섞고선…."

와락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그는 마구 주무르며 더운 입김을 뿜어 댔다.

"이제 와 요조숙녀(窈窕淑女) 행세를 한다고 해서 열녀문을 줄 리 없으니,

노부의 애첩이 되어 귀염받는 게 어떠냐?

거절하면 네 시신조차 온전히 보전하지 못할…."

그 때 어디선가 긴 소성(嘯聲)이 들려 와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삘릴리리…!

심신을 편안하게 감싸 주는 그 음률(音律)은

선명하게 가슴에 와 닿아 중인들의 살기에 찬 마음을 가라앉혔다.

유선곡(遊仙曲)!

마정소(魔情嘯)를 불며 중인들의 삼 장 앞 거리까지 다가온 냉한웅은

히죽, 어리숙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특유의 마소(魔笑)와 완전히 상반된….

낡은 퉁소를 든 낯선 젊은 거지의 모습에 중인들은 일제히 의외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 때 전무가 흉성(胸聲)을 터뜨렸다.

"미련한 놈! 자살을 하고 싶으면 장장(長江)에 뛰어들거나 태산 깊숙한 곳을 찾을 것이지,

하필이면 어르신들이 즐기려는 곳에 와 흥을 깰 게 뭐냐?"

일향, 냉한웅의 단아한 치아가 드러났다.

두 볼은 젖빛 같고 머리카락은 옻칠을 한 듯 검은데,
눈빛이 주렴으로 들어오니 주옥과 같이 빛나누나.
원래 흰 비단으로 선녀의 옷을 만들고,
붉은 연지는 타고난 바탕을 더럽힐까 바르지 않았네.
오나라 사투리가 아직 애교 있는 어린애 같지만,
무한한 세월에 그 근심 다 알 수가 없어라.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의 운명은 거의가 박하니, 
문을 닫고 봄이 다하면 버들꽃도 지고 말리라.

소식(蘇軾)이 지은 가인박명(佳人薄命)이란 칠언율시(七言律詩)였다.

이는 옥봉의 절염(絶艶)한 용모와 기구한 삶을 빗대어 읊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어 그는 옥봉의 드러난 상반신을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그가 좋다는 말만 반복하며 히죽히죽 웃자, 전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거 미친 놈 아닌가?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냉한웅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구슬로 쌓은 봉우리가 옥봉(玉峯)인가?

크고 호화로운 주루가 옥봉(玉峯)인가?

이도 저도 옥봉(玉峯)이 아니로다.

진정한 옥봉(玉峯)은 옥봉(玉鳳)의 가슴에 있다네.

"소걸군이 죽어서도 볼 수 없을 진귀한 것을 보았는데,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좋아, 좋아!"

그가 자신의 명호와 옥봉에 대해 알고 있음을 드러낸 순간,

차비운과 전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신기묘산(神奇妙算)… 이제 보니 개방의 새로운 소괴(少怪)였군. 
지금 우리 일에 참견하려는 건가?"

천수장(千手莊)의 혈겁은 강호를 뒤집어 놓을 만큼 큰 사건이 아닌가?

그 곳에서 냉한웅이 보여 준 뛰어난 재지(才智)가 소문으로 퍼지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강호인들 사이에서는 신기묘산(神奇妙算) 소걸군은

무림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로 인식되었다.

'저 자가 무공을 모른다고는 하나, 귀계백출(鬼計百出)하니…

시 그만한 대비책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차비운은 재빨리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하나 별다른 조짐을 발견할 수 없자, 냉음을 토해 냈다.

"방주인 천지영개의 체면을 생각해 이번 한 번은 봐주겠으니 즉시 떠나거라.

만약 개방의 세력을 믿고 경거망동한다면, 즉각 처치해 버리겠다."

그의 눈에 살기가 일렁였지만 냉한웅은 못 본 척 떠들어 댔다.

"보아하니 소걸군의 말뜻을 제대로 파악 못한 듯싶군.

옥봉(玉峯)이 옥봉(玉鳳)의 가슴에 있다고 한 것은 육(肉)이 아니라 심(心)을 가리킨 것이야."

낭군의 복수를 위해서라고는 하나,

사내들을 유혹해 정사를 벌여 온 그녀의 마음이 옥(玉)처럼 맑고 고우며 봉우리 마냥 드높다니….

소걸군의 말은 중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차비운과 전무의 입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세상의 어떤 옥이 뭇사내들과 마구 몸을 섞는 계집처럼 색(色)이 지저분하단 말이냐?"

"학문과 지혜가 대학사(大學士)를 능가한다니, 어디 고견이나 들어 보세."

이들이 매우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리자, 소걸군은 반대로 정색을 했다.

"사내들이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명예(名譽)란 곧 심(心)이 아닌가?

여인이 목숨처럼 지켜야 할 정조(貞操) 역시 육(肉)이 아닌 심(心)에서 찾아야 할 것이야."

이어 그는 따끔한 일침을 가하였다.

"장강어옹! 혈풍상괴! 변심(變心)을 밥 먹듯 하는 당신들은 옥봉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졸지에 망신을 당한 차비운과 전무는 길길이 날뛰었다.

"평생을 빌어먹고 살 놈아!

마음 속으로만 정조를 지키면 아무 남자나 유혹해 몸을 내주어도 괜찮단 말이냐?"

전무가 욕설을 퍼붓자 차비운도 나서며 삿대질을 했다.

"천수장에서 일이 터지기 무섭게 꽁지가 빠져라 달아난 주제에 무슨 명예를 들먹이느냐? 

주둥아리만 살아 있는 아무 쓸모 없는 놈!"

냉한웅은 한심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쇠귀에 경 읽기로다. 정조란 진실(眞實)을 위해 지키는 것임을 어찌 이리도 이해 못할까?"

이 또한 차비운과 전무의 살기만을 더욱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놈! 찢어진 입이라고 마구 내뱉는구나."

"진실이라… 그게 원이라면 네놈을 진실로 죽여 주마."

그 때 갑자기 냉한웅의 시선이 차비운의 안면에 날카롭게 꽂혔다.

"당신의 악랄함과 교활함은 천하에 따를 자가 없겠어.

야차객들 뿐만 아니라 절친한 친구마저도 음모의 희생물로 삼다니…."

일순 전무의 안색이 획 돌변하며 차비운을 향했다.

하지만 입을 열지 않은 채 의혹의 눈빛만을 쏘아 보냈다.

"네놈이 지금… 무슨 헛소릴…."

공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시작되자, 차비운은 너무도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냉한웅은 그가 말을 끝낼 틈도 주지 않고 계속 공세를 퍼부었다.

"장강어옹! 당신의 진짜 목적은 무풍신룡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옥봉을 차지하려는 것이다.

하나 함부로 납치하는 짓을 벌였다간 강호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

옥봉과 무풍신룡을 벗어날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독계(毒計)를 꾸몄지."

"그게 어떤 방법이지?"

전무의 물음에 냉한웅은 싱긋 웃어 보였다.

"살인멸구(殺人滅口) 누명전가(陋名轉嫁)!"

그의 반간지책(反間之策)에 전무가 휘말려들자, 차비운은 쌍장을 쳐들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놈! 당장 요절을 내버리겠다."

하지만 이도 냉한웅의 계산에 들어 있는 행동이었다.

그는 재빨리 전무의 곁으로 비켜 서 방패로 삼으며 외쳐 댔다.

"당신은 나의 입부터 멸구(滅口)하려는 겐가?"

순간, 차비운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전무와 야차객들의 싸늘한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이를 이간하려는 저 자의 모함이오. 넘어가선 아니 되오!"

그가 고함을 질러 대자, 냉한웅도 결코 작지 않은 음성으로 맞섰다.

"혈풍상괴와 야차객들도 당신에 뒤지지 않는 노강호(老江湖)들이야.

그 말이 나를 궁지에 몰아넣어 위기를 모면하려는 수작이란 것쯤 당장 알아차릴걸."

차비운은 그제서야 소걸군이 소문 이상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자임을 느꼈다.

"네놈이…!"

심사가 부글부글 끓었으나 섣불리 살수를 쓸 상황이 아니라 치만을 떨고 있는데….

전무가 은근히 물어 왔다.

"차형은 정말 그럴 마음이었소?"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어도 정도가 있지…

이 순간, 차비운은 정말로 그의 안면을 박살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일 따름이었다.

"전형은 정말 저 교활한 거지의 말을 믿는 거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무는 고개를 저었지만 얼굴에는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차비운은 화를 벌컥 내며 등을 돌렸다.

"이대로 물러서면 될 게 아니겠소. 이래야만 전형이 믿겠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이어 그는 고개를 돌려 냉한웅을 무섭게 쏘아봤다.

"개방의 노괴(老怪)보다 상대하기가 어렵구나. 그러나 앞으론 항상 몸을 보중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훌쩍 몸을 날리자, 야차객들도 놓칠세라 다급히 뒤따랐다.

전무가 미련이 남았는지 미적대며 옥봉의 앞가슴을 쓸어 보자, 냉한웅은 냉소를 흘렸다.

"당신이 뒤쫓지 않는다면 장강어옹은 당장 되돌아올걸.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잖는가?"

전무는 눈을 껌벅이며 산반알을 퉁겨 보였다.

차르르륵-!

알이 돌아가는 음향을 즐기는 듯 귀를 기울인 후, 그는 혀를 내밀어 입술에 침을 발랐다.

"사도오종(邪道五宗)에 끼인 노부가 어찌 차가(車哥) 따위를 두려워하겠는가? 그보다…."

그는 숨을 들이쉬며 냉한웅의 신색을 살핀 후, 한껏 다정한 음색을 꺼냈다.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중원제일의 부자가 될 수 있을 걸세.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냉한웅은 그의 물욕(物慾)에 내심 기가 찼으나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솔깃한 제안이지만 불가능한 일이니, 거절하겠어."

"무슨 근거로 불가능하다고 하는가?"

"만보공자(萬寶公子)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중원제일의 부자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

"만보공자? 그러한 인물이 중원에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당신은 근래 중원을 떠나 있었던 모양이군."

"으음, 지난 일 년 동안 새외를 돌아다녔지.

어쨌든 다시 만나게 되면 장사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싶네."

그는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총총히 몸을 날렸다.

한동안 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던 냉한웅이 등을 돌려 옥봉에게로 다가갔다.

마혈을 짚여 꼼짝할 수 없는 옥봉은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채 귓불만을 붉힐 뿐이었다.

냉한웅은 격공타혈 수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음흉하게시리 손을 갖다 대 혈도를 풀어 주자,

옥봉은 짜르르한 전율에 자신도 모르게 비음(鼻音)을 흘렸다.

"아이잉…!"

이어 옥봉의 백사(白蛇) 같은 두 팔이 벌려지자,

냉한웅은 '날 잡아 잡슈' 하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교구는 그대로 지나쳐 강무웅의 품에 뛰어들었다.

'에잉,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다음 순간, 냉한웅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저 허풍쟁이 고수(高手)의 혈도는 반시진 정도 후에 풀어지도록 손을 써 놓았으니…

은혜를 모르는 옥봉아, 어디 애 좀 타 봐라."

냉한웅은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차비운과 전무가 몸을 날렸던 그 방향으로….

산우객잔(算牛客棧).

호남성(湖南省)과 호북성(湖北省)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오고가는 길손,

특히 장사치들로 붐볐다.

그 객잔에는 다른 방보다 특별히 꾸며진 별실(別室)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곳에 장강어옹 차비운과 혈풍상괴 전무가 마주 앉아 있었다.

차비운은 침통한 안색이었고, 전무는 불안한 신색이었다.

"차형, 곡해하지 말구려."

"……."

"전모(田某)가 어찌 차형을 의심하겠소?

아까는 소괴(少怪)의 꿍꿍이속을 떠보기 위해 짐짓 그랬던 거요."

"……."

"좋소. 그럼 다시 가서 모조리 쓸어 버립시다."

전무가 당장 문을 박차고 나설 듯 벌떡 일어서자, 차비운은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능구렁이 놈! 이젠 가 봐야 소용 없을 줄 알면서….'

그가 안면 근육만을 실룩이며 꼼짝 않자, 전무는 갑자기 생각난 척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아, 그렇군. 묘강쌍마(苗彊雙魔)와 만나기로 한 시각이 다 되었지."

순간, 두 개의 인영이 문가에 어른거리며 으시시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 형제와의 약속을 잊었단 말이오?"

그들의 신법은 유령과도 같아, 추호도 바람 소리를 일으키지 않았다.

차비운과 전무는 반색을 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원로에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어서 여기 앉으시지요."

팔자수염에 귀밑에 세 치 가량의 칼자국이 나 있는 묘강필마(苗彊筆魔)와

그의 동생인 묘강곤마(苗彊棍魔).

중원 출입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이들은

일신의 재간이 중원의 절정고수들과 맞먹는다는 소문이었다.

그들은 팔선탁을 중앙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먼저 차비운이 말문을 열었다,

"두 분께선 어떤 소식을 가져오셨는지요?"

전무도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이번 거래는 양측에 이익만 있을 뿐이니, 좋은 소식이 확실하오."

묘강필마가 얼굴에 으시시한 미소를 띄우자, 칼자국이 벌어졌다.

"교주께서는 이번 일에 흥미를 느끼시고 쾌히 승낙을 하셨소이다. 
보름쯤 후엔 파천혈륜(破天血輪)을 가지고 중원에 납실 거외다."

"그거 참말로 희소식이오. 어디로 오실 것인지 알려 주시겠소이까?"

차비운이 희색이 만면하여 묻자, 묘강곤마는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대귀선이 정박해 있는…."

그 순간, 묘강필마가 손을 흔들어 아우의 말을 중단시켰다.

이어 그의 우장(右掌)이 작은 원을 그리며 쭉 내밀어졌다.

순간, 장심으로부터 쏘아진 예리한 경기(勁氣)가 별실 문을 박살냈다.

펑-!

문짝이 산산조각 나 사라진 그 자리, 한 인영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차비운을 호위하는 야차객들 중 한 명이 지필(紙筆)을 손에 쥔 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더욱 경악할 일이 있으니….

문짝을 산산조각 냈지만 그 주변은 전혀 상한 흔적이 없었으며, 
야차객의 몸도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상태였다.

이는 정순한 공력과 절묘한 손속을 지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비운은 몹시 성이 나 야차객에게 고함을 질렀다.

"노부가 물러가라고 했거늘, 어째서 이 방을 기웃거리는 것이냐?"

"문 앞을 지나던 길이었는데 갑자기…."

야차객이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 때, 전무가 손을 내밀어 그의 완맥을 노렸다.

"우릴 세 살 먹은 아이로 아느냐? 냉큼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놓아라."

야차객이 슬쩍 허리를 틀어 피하려 들자, 

전무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영대혈(靈台穴)을 찍어 갔다.

무려 열다섯 가지 변화가 내포된 기괴한 수법으로 사도오종다운 솜씨였다.

묘강쌍마와 차비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의 표정은 경악으로 변했다.

"차앗-!"

야차객이 일갈을 터뜨리며 빙글 몸을 돌려 간단히 피해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악곤룡(五嶽困龍)의 초식으로 일퇴를 내질러 전무의 가슴 한복판을 격중시켰으니….

일신 무예가 강호 이류고수 수준인 야차객으로선 도저히 펼칠 수 없는 쾌속절륜한 수법이 아닌가?

"윽!"

전무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입 밖으로 토해 낸 핏물이 앞섶을 붉게 물들인 것으로 미루어,

상의 정도가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차비운은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네놈은 야차객이 아니야!"

동시에 묘강쌍마도 신법을 전개해 달아나는 야차객의 뒤를 쫓았다.

휙- 휘익-!

어슴푸레한 공간을 가르며 인영들이 긴 포물선을 그렸다.

깊어 가는 추야(秋夜), 때아닌 추격전이 전개된 것이다.

별실에는 극심한 내상을 입은 전무만이 남아 안면을 흉칙하게 일그러뜨린 채 뒹굴고 있었다.

"우욱!"

피가 계속해서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그 때 문짝이 사라져 버린 별실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네 개의 인영이 있었다.

홍(紅), 청(靑),  황(黃), 녹(錄) 등

네 가지 원색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옷은 매우 괴이한 느낌을 던져 주었다.

"만… 신… 각!"

고통에 몸부림을 치던 전무가 가슴을 움켜쥐며 두 눈을 부릅떴다.

신비괴문(神秘怪門) 만신각(卍神閣).

형형색색의 의복을 걸치고 다니는 그들은 괴이막측한 무공을 펼쳤다.

또한 사술대법(邪術大法)에 능해 이들이 노리는 상대는

무공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죽음의 손길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주로 대막(大漠)에서 활동하였는데, 돌연 중원에 나타났으니….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심상치 않은 일임엔 틀림없었다.

이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노인이 나직하게 물었다.

"대귀선은 어디에 있느냐?"

전무는 넘어오려는 핏덩이를 꿀꺽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모… 르오."

"본각에선 결코 두 번 묻지 않는다."

노인이 입을 다물자, 옆에 있던 중년인이 초점 없는 눈빛으로 전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자,

전무는 극심한 고통보다 죽음의 공포가 앞서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대… 답하겠소!"

하지만 중년인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다.

이젠 늦었다는 무언의 대답이었다.

상거래 관계로 새외(塞外)를 빈번히 출입하는 전무인지라,

만신각의 율령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는 체념의 빛을 띤 채 눈을 감았다.

중년인의 검이 창 안 가득 쏟아져 들어온 달빛을 가르려는 순간, 
기이한 울림이 별실을 채웠다.

"멈춰라!"

위압감이나 공포가 추호도 섞여 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중년인을 비롯한 중인들을 전율케 했다.

검을 쥔 손도 뇌전(雷電)을 맞은 양 부르르 떨며 멈춰섰다.

중인들의 시선이 문가로 집중되었다.

방 문턱 너머 흑의중년인이 무심한 눈빛을 띈 채 우뚝 서 있었다.

"……."

사술에 능한 만신각의 고수들은 그의 전신에 흐르는 신비로운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들이 입이 얼어붙은 듯 바라만 보자, 

흑의중년인은 감정 없는 음성을 나직이 흘렸다.

"본존은 두 번 명하지 않는다."

이는 만신각의 율령을 빗대어 모욕하는 말이 아닌가?

만신각 고수들, 특히 수좌인 노인의 안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건… 방진 놈!"

그가 불호령을 터뜨린 순간, 검기가 흑의중년인의 서른여섯 요혈을 노렸다.

그 일련의 동작은 너무도 신속절묘하여 어느 틈에 검을 뽑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동시에 중년인의 검도 전무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쇄쇄액-!

두 군데에서 공기를 가르는 음향이 인 다음 순간.

"크악!"

처절한 비명이 핏물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전무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검을 쥔 손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중년인의 오른손목으로부터 핏물이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빠를 수가…?'

쾌검수로 소문난 노인은 넋 나간 눈빛으로 흑의중년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상대가 자신의 검기를 피하는 동시에 발검(拔劍)하여 중년인의 손목을 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흑의중년인이 손에 든 검을 바닥에 툭 내던졌다.

순간, 노인은 귀신이라도 본 듯 경악의 외침을 내질렀다.

"악!"

그것은 반 동강난 검날이었다. 손잡이가 안 달린….

바닥에 떨어진 수하의 손에 반 동강난 검의 손잡이가 쥐어져 있는 것을 보자, 노인은 확연히 깨달았다.

흑의중년인은 몸을 날려 자신의 검을 피함과 동시에

전무의 목을 베어 가던 검날을 잡아 부러뜨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쥔 반 토막의 검날로 수하의 손목을 베어 버렸으니….

이토록 빠른 신법과 절묘한 금나수는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창룡신노(蒼龍神老)가 망구(望九 : 구십 살을 바라봄)에 이르러 

천외천(天外天)의 진리를 깨우치는구나."

창룡신노는 중얼거리며 의혹에 찬 시선을 던졌다.

그의 내심을 꿰뚫고 있는 흑의중년인은 담담하게 신분을 밝혔다.

"정사마천궁주(正邪魔天宮主)!"

그렇다.

냉한웅이 아니고서야 천하의 그 누가 이토록 감정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창천신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검을 비껴 잡았다.

"당신의 명호를 들어 본 적이 없구료.

어쨌든 본각의 제자를 상해한 자는 죽어야만 하오."

냉한웅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본존에 대항하는 자는 죽는다."

찰나, 창룡신노와 손목이 절단된 고수를 제외한 두 명이 질풍처럼 덮쳐 왔다.

"만공혈해(卍空血海)-!"

"만겁지옥(卍劫地獄)-!"

귀화(鬼火)와 냉류(冷流)가 소용돌이치는 괴이한 검법.

검기에 휩싸인 냉한웅도 거친 억양의 기합을 내질렀다.

"파혼(破魂)-!"

사극염라경에 수록된 잔혼도법(殘魂刀法)의 두 번째 초식인 파혼(破魂).

도(刀)의 특성인 강맹을 위주로 한 이 도초(刀招)는

도강(刀 )을 형성해야만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떠한 호신강기라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반 토막의 검날로 전개하다니….

냉한웅의 공력과 기공이 입신의 경지를 넘어섰다 하나,

원래의 위력에서 크게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눈부신 검광이 그의 손을 떠나 귀화가 춤을 추는 검기의 소용돌이와 부딪쳤다.

카르르르르-!

고막을 짓이기는 듯한 파열음이 섬칫하게 터져 나왔다.

검광은 귀화의 막을 꿰뚫으며 폭파되었다.

이어 반 토막의 검날이 모래알처럼 빛의 파편이 되어 막 안쪽 사면팔방에 휘몰아쳤다.

"크으이이익…!"

"우욱!"

비명 소리가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다.

냉한웅을 기습했던 만신각의 두 고수.

그들은 전신은 벌집처럼 무수한 구멍이 뚫렸고, 

그 곳으로부터 가느다란 핏줄기들이 세차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쉽게 죽을 수도 없는 잔혹한 살수….

그러나 이는 냉한웅이 원했던 결과가 아니었다.

냉한웅이 그들의 고통을 끝내 주려 우수(右手)를 치켜든 순간,

룡신노의 눈에서 분노에 찬 살광이 폭사되었다.

"악마 같은 놈!"

그는 노갈을 터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기가 스쳐 간 곳은 냉한웅의 반대 방향이었다.

"윽!"

"큭!"

두 개의 목에 선홍색 선이 그어지며 머리통들이 퉁겨지듯 좌우로 날았다.

동시에 끔찍스런 비명은 뚝 끊겼으나,

바닥에 떨어진 머리통의 얼굴은 지옥의 형벌을 받은 듯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미칠 듯한 분노에 휩싸인 창룡신노의 표정도 죽은 수하들의 것처럼 변했다.

"노부도 인명(人命)을 하찮게 여겨 무수한 살상을 했지만,

이렇듯 비열하고 악랄한 살수는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더구나 무공 수위가 자신과 비교될 수 없이 낮음을 알면서…."

냉한웅의 눈빛은 변함없이 무심했으나 내심 크게 격동하고 있었다.

지나친 자만심.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가슴을 덮었으나, 현재 자신의 신분은 정사마천궁주가 아닌가?

단 한 마디도 실수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

창룡신노는 그가 입을  굳게 다문 채 자신을 생명이 없는 물체를 바라보듯 하자, 결심을 굳혔다.

'우리를 살려 보내지 않을 속셈이 분명하구나. 그렇다면…!'

다음 순간.

신검합일(身劍合一)!

그의 몸이 검과 한 줄기 빛이 되어 쏘아졌다.

"혈폭창룡(血暴蒼龍)-!"

검술에 있어서 최상승의 절공인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을 펼친 것이었다.

잠재력을 극한으로 격발시키는 창룡육십사식(蒼龍六十四式) 중 최후의 절초로,

살아남는다 해도 폐인이 되어 버리는 동귀어진(同歸於盡) 수법!

냉한웅의 몸도 한 줄기 섬광으로 변해 맞부딪쳐 갔다.

"무상범천(無上汎天)-!"

반야보리검법(般若菩提劍法) 중 마지막 초식인 무형어검강(無形御劍 )이 전개된 것이다.

우우잉……!

두 줄기 검기가 부딪치자, 용(龍)의 울부짖음인 양 기음이 천지사방에 메아리쳤다.

찰나, 창룡신노는 한 줄기 투명한 빛이 가슴을 통과하는 듯 느꼈다.

아니, 그것은 현실이었다.

너무나  빨라 느낌으로 와 닿았을 뿐이다.

다음 순간, 자신의 가슴에서 뿜어지는 혈전(血箭)을 발견한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기어검강(以氣馭劍 )을 파괴하다니…  어떤 검공(劍功)이기에……"

갑자기 그의 눈이 귀신을 본 듯 휩떠졌다.

"네겐 검이 없지 않느냐?"

공수(空手)!

창룡신노는 죽음에 앞서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냉한웅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우수(右手)를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신체(身體)가 곧 신검(神劍)이니, 신외지물(身外之物)이 아무리 예리한들 무슨 소용인가?"

창룡신노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인지, 경악의 외침인지 구별 못할 음성이 토해졌다.

"무상검도(無上劍道)… 전설의 검신(劍神)이 펼쳤다는 절정검도(絶頂劍道)…

하나, 만신각의 삼대각주(三大閣主)만은 결코 쓰러뜨리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그의 몸이 허물어지듯 바닥에 나뒹굴었다.

눈을 휩뜬 채 숨을 거둔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냉한웅은 중얼거렸다.

"정사마천궁주는 결코 두 번 묻지 않는다. 만신각의 삼대고수란 누구인가?"

절단된 오른손목을 응급조치한 채 엉거주춤 서 있던 만신각 고수의 안색이 밀랍처럼 창백해졌다.

만신각 고수들 중 살아남은 자라고는 자신밖에 없으니, 상대가 소문만 내지 않는다면….

삶과 죽음의 기로(岐路) 앞에 선 그의 표정이 몇 번이나 변했다.

갑자기 그가 쓰러지듯 빙글 몸을 돌려 바닥에 떨어진 동료의 검을 좌수(左手)로 집어들었다.

"만불경혼(卍佛驚魂)-!"

검기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냉한웅의 요혈을 노렸다.

그의 돌연한 태도엔 누구라도 당황하리라.

하지만 이런 수법으로 상대의  옷자락조차 건드릴 수 없음을 만신각의 고수가 어찌 모를 것인가?

냉한웅의 금나수법(擒拿手法)으로 검을 탈취하려는 순간,

그는 검끝의 방향을 돌려 자신의 심장을 관통시켰다.

"읍!"

그는 신음을 삼키며 짧은 미소를 지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그 미소는 숨이 끊어진 후에도 얼굴에 남아, 냉한웅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상대의 놀라운 무공과 잔인함으로 미루어,

입을 열지 않는다면 목숨을 끊기도 쉽지 않으리라는 판단에 이런 수를 썼으나….

사실 냉한웅은 팔목을 자른 자의 목숨마저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또한 감탄스러웠다.

"당신도 사람일진대, 어찌 죽음이 두렵지 않겠는가?

내세에는 부디 바른 길을 걸어 대장부의 기개를 마음껏 떨치기 바라오."

냉한웅은 낮은 음성으로 명복을 빌어준 후,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는 전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본존에게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얘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