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8장 오행불성선(五行佛聖仙)

오늘의 쉼터 2016. 5. 31. 15:46

제8장 오행불성선(五行佛聖仙)

 

철썩- 쏴악-!

수면(水面)도 태풍을 만난 듯 일렁여 배를 뒤흔들어 댔다.

"괴사부, 혹시 월녀개를 보셨습니까?"

추추귀개가 묻자, 철지영개는 암흑(暗黑)과 혼란이 뒤엉킨 전면(前面) 깊숙한 곳을 손가락질했다.

"저기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철지영개의 음성은 비통에 차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 오는 굉음과 단말마(斷末魔)!

쿠쿵- 우르릉-!

"크으악…!"

천지가 광란을 일으킨 듯했다.

추추귀개가 울부짖듯 외쳤다.

"사매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철지영개는 천근추 수법으로 몸의 중심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그 애가 눈물을 흘리며 달려간 것밖엔. 창졸간이라 붙잡을 겨를이 없었지."

순간, 추추귀개의 시선이 소걸군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네놈 때문이야! 계집의 외모에만 혹(惑)해 진실한 마음을 저버린…."

하나, 소걸군은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추추귀개는 더욱 열을 받아 악성을 내질렀다.

"네놈이 사매를 죽인 거야! 책임…."

그는 말을 다 내뱉지 못했다.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몸의 중심을 잃고 나뒹군 것이다.

하지만 소걸군은 굳은 땅 위에 서 있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무림고수들조차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만큼 배의 흔들림이 심한데,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가 어찌 저토록 자연스런 몸가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중인들 중 어느 누구도 이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상황은 혼란스럽고 긴급했다.

쿠릉- 쾅- 와르르르릉-!

폭발은 천리묵혈동 곳곳에서 일었다.

그리고 소걸군의 가슴 속에서도….

드디어 소걸군의 입술이 움직였다.

"내가 구해 오겠어."

그는 뱃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중인들은 동굴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암석을 피하거나 장력으로 날리는데 정신을 쏟느라,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추추귀개가 지켜보긴 했지만, 분노에 찬 눈빛만을 보낼 뿐이었다.

이 때 소걸군의 앞을 막아 서는 소녀가 있었다.

"가시면 안 돼요!"

설하공주였다.

그녀의 두 눈엔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었다.

소걸군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가야 하오."

설하공주는 양 팔을 벌린 채 울먹였다.

"절대로 보내지 않겠어요."

추추귀개가 냉소를 흘렸다.

"이건 소걸군이 책임질 일이오."

설하공주의 고개가 그에게로 돌려지며 앙칼진 음성을 토해 냈다.

"그녀를 좋아하는 건 당신이니, 당신이 가야 하잖아요?"

그 틈을 타 소걸군은 몸을 뱃전 밖으로 날렸다.

우르릉- 쾅-!

동굴을 메운 어둠과 굉음은 소걸군의 여윈 몸은 물론 이를 발견한 설하공주의 비명마저 단숨에 삼켜 버렸다.

'구해야 해!'

설하공주가 꼬옥 입술을 깨물었다.

휙-!

그녀의 교구가 허공을 가른 순간, 거대한 독수리가 작은 새를 덮치듯 허리를 낚아챘다.

그녀는 단박에 누군지 알아챘다.

"사부님!"

그녀를 안은 채 선상에 내려선 노인.

당금무림의 최고 기인이라 일컬어지는 오행불성선(五行佛聖仙)은 제자를 애틋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설아, 소걸군은 죽지 않는다."

설하공주의 어깨가 격동으로 파르르 떨렸다.

"정말이세요?"

"이 사부가 언제 네게 거짓말한 적이 있었느냐? 정말 위험한 것은 이 배에 타고 있는 무림인들이다."

"아이잉… 사부님이 계신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오행불성선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허허허허… 설아는 이 사부를 지나치게 믿는구나."

오행불성선은 아름답고 귀여운 제자의 아양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설하공주는 계속 아양을 떨었다.

"사부님께선 어떻게 보셨어요?"

"소걸군 말이냐?"

설화공주는 수줍은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아시면서…."

오행불성선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생각하는 체했다.

"우선 신분상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공주와 거렁뱅이라니?

다가 무공도 익히지 못했고, 생긴 건 더더욱 말할 필요조차 없지. 꼴에 바람기까지 있어."

소걸군에 대한 흉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자, 설하공주는 더 큰 음성으로 말을 막았다.

"부족한 점은 사부님께서 보충해 주실 수 있잖아요!"

"그 많은 걸 몽땅?"

"칫, 무림제일 기인이신 일선(一仙)께서 하나밖에 없는 제자의 부탁조차 못 들어 주세요?"

그녀의 맹랑함에 오행불성선은 목청을 가다듬어 꾸짖었다.

"요런 버릇없는 것! 그게 사부에게 할 말이냐?"

하지만 얼굴 가득한 자애스런 미소는 지우지를 못했다.

이를 눈치챈 설하공주는 그의 팔에 매달려 졸라 댔다.

"사부니이임, 제발 도와 주세요."

"차라리 미꾸라지를 용으로 만들어 달라고 해라. 그 편이 더 쉬우니까."

지금 주변 사람들은 생지옥을 만나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이들 사도는 여유작작하게 말장난을 해 대고 있었다.

괴사(怪事)라고밖엔 볼 수 없는 광경.

어찌 된 것인지 오행불성선과 설하공주가 서 있는 주위 반 장 이내에는

암석 조각들이 근접을 못하는 게 아닌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친 듯 모조리 퉁겨 나가고 있는 것이다.

오행불성선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옥갑은 가져왔느냐?"

설화공주는 생긋 웃으며 손을 품안에 넣었다.

"그럼요. 여기…."

다음 순간, 안색이 돌변했다.

"품속에 넣었는데…?"

오행불성선의 안색도 침중해졌다.

"없느냐?"

"어찌… 된 건지 모르… 겠어요."

오행불성선은 울상이 된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괜찮다. 천리묵혈동이 무너져 버리면 사용할 일 없는 물건이니까."

"그거 불행 중 다행이네요."

설화공주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 웃자, 오행불성선은 표정을 굳혔다.

"만약 이런 변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너는 크게 혼이 났을 것이다."

설화공주는 찔끔해 어깨를 움츠렸다.

하나 그것은 일순간일 뿐이었다.

그녀는 오행불성선의 팔에 다시 매달리며 조르기를 계속했다.

"사부니이임, 제발 소걸군을 도와 주세요."

소녀의 순정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끝없이 치닫고 있었다.

콰콰쾅-!

천리묵혈동 곳곳에 울려 퍼지는 굉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넓게 퍼져 갔다.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암석, 그리고 동굴 안에 서식하던 동물들은 마구 기어나와 독을 살포해 대고….

어둠 속에서 수많은 무림인들이 아귀다툼을 벌였다.

저마다 먼저 천리묵혈동을 벗어나려고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이다.

폐부를 짓이기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들.

지옥인들도 이보다 더 참혹하진 않으리라.

견디다 못해 물 속에 뛰어드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콰르릉-!

이번 폭발은 더욱 요란했다. 

동굴 천장이 아예 내려앉는 듯 거석(巨石)들이 쏟아져 내렸다.

흑의중년인은 신법을 펼쳐 날렵하게 피했다. 하나, 이번에는 달랐다.

퍽-!

집채만한 암석덩이가 뱃전을 스친 순간, 배가 뒤집어질 듯 기울었다.

허공에 몸을 띄운 그는 크게 당황했다.

배가 빠른 속도로 밀려나 착지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풍덩-!

흑의중년인은 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다행히 수공에 조예가 있는 듯 금세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푸우!"

그는 입 안에 든 강물을 뱉어 낸 후,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점창(點蒼) 장로인 소운학(蘇暈壑)이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살아 나가기만 하면 이것들을 그냥…."

정도십종(正道十宗)의 중의 한 명인 신옥검객(神玉劍客) 소운학(蘇暈壑).

점창 장문인의 사제이기도 한 그는 명성을 탐하는 것만큼이나 여색도 탐했다.

언젠가 허풍의 고수인 일도경혼(一刀驚魂) 강무웅(姜武雄)의 입에서도 그의 별호가 올려진 적이 있지 않는가?

옥봉루(玉鳳樓)의 여주인과 잠자리를 같이 한 후,

그녀와의 약속을 헌신짝 팽개치듯 해 버린 파렴치(破廉恥)한 작자.

한데, 이걸 천벌이라 할 수 있을까?

"욱!"

소운학은 마혈이 제압됨을 느꼈다.

다음 순간, 허물이 벗겨지듯 재빠르게 자신의 의복이 벗겨져 나가고 심지어 속옷마저도….

"으으…!"

마치 물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되어 버린 그의 이마에 불끈 힘줄이 튀어나왔다.

두려움과 수치, 분노…

그의 가슴도 천리묵혈동 마냥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참다 못한 그가 욕설을 퍼부으려 입을 크게 벌렸다.

"어떤 요… 물…."

하나,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물 때문에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꼬르륵…!"

물 속의 누군가가 발을 잡아당긴 것이다.

하지만, 곧 놓아 주어 그는 다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 있었다.

소운학은 콧구멍에서 연기가 날 만큼 열을 받았다.

"이 비겁한 놈아! 모습을 드러내라!"

하지만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비웃음만이 전해졌을 뿐이었다.

"비겁한 놈은 바로 너다. 겉으로 인의를 내세우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그 음성은 차츰 멀어져 갔다.

냉막한 표정의 흑의인이 수면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천축(天竺) 밀교(密敎)의 비전신법인 대나이신법(大羅理身法).

하지만 밀교(密敎)의 수좌라 할지라도 이토록 절묘하게 펼칠 수는 없으리라.

신옥검객 소운학의 흑의(黑衣)를 벗겨 입고 신체를 변형시킨 냉한웅.

암흑을 환히 꿰뚫어볼 수 있는 그의 신안(神眼)은 오히려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할 뿐이었다.

부서진 배들의 잔해와 시체들이 수면 위를 떠다녔고,

가장자리의 육로(陸路) 또한 피에 젖은 시체와 부상들로 메워져 있었다.

'네놈들을 살려 보낸다면, 난 정사마천궁주가 아니다.'

그는 바람 소리가 칼날처럼 귓가를 스칠 만큼 빠른 속도로 내부 깊숙이 질주해 갔다.

복면인들이 탄 배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냉한웅의 신형은 퉁겨지듯 허공으로 솟아 빙글 뱃전에 내리꽂혔다.

번쩍-!

섬광과 동시였다. 

복면인 두 명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나간 것은….

냉한웅의 오른손에 한 자루 검이 쥐어져 있었다.

싸늘한 한망을 드러낸 검이었다.

신옥검객의 옥령검(玉靈劍)!

복면인들은 급작스런 변화에 당황한 외침을 터뜨렸다.

"넌 웬 놈이기에 감히…."

"없애 버려라!"

그들의 분분한 행동은 왠지 한 무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들고 있는 병장기들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냉한웅에게 달려들었다.

병장기의 광채가 살벌하게 작렬하였다.

쇄액- 카르르륵-!

병장기들이 저마다 생긴 대로의 음향을 일으킨 순간, 냉한웅은 입가에 야릇한 살기를 머금었다.

"혈살(血殺)-!"

서른여섯 개(個) 방위를 동시에 노릴 수 있는 광폭살초(廣暴殺招).

수백 수천의 검화(劍花)가 그의 전신에서 쏘아져 나오는 착각이 들게 했다.

복면인들이 무기를 휘둘러 방어하려 했을 땐, 이미 그들의 이마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온 후였다.

"으으악…!"

검강(劍 )이 빠르고 강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분산시켜 신정혈(神庭穴)만을 꿰뚫는 정확함은 검강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무(武)라기보다는 예(藝)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몸놀림.

"크윽!"

"억!"

"끄으윽…!"

선상(船上)은 비명 소리가 핏줄기와 함께 분수처럼 치솟는 지옥으로 변했지만….

신비지미(神秘之美)!

이 광경을 만약 검귀(劍鬼)가 보았다면 자신이 천당에 온 듯 황홀함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일순간에 다섯 명의 복면인이 쓰러지자, 나머지 복면인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우째 이런 일이? 너는 누구기에…?"

당황과 겁에 질린 복면인들 중 하나의 입에서 강남(江南) 지역의 억센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냉한웅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탈혼(奪魂)- 비마(飛魔)-!"

복면인은 자신도 모르게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어떻게…?"

그럼 복면인이 정말 강남녹림맹주(江南綠林盟主)인 탈혼비마 손학위(孫學爲)란 말인가?

다음 순간, 복면인은 경악의 외침을 터뜨렸다.

"정사마천궁주(正邪魔天宮主)!"

냉한웅은 미소지었다.

그러나 한풍(寒風)이 이는 듯한 냉소였다.

"본존을 알아보았으니, 한 번의 기회를 주마."

복면 속 얼굴에 한 줄기 생기가 떠올랐다.

"궁주님,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소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무릇 높은 지위에 오르자면 실세(實勢)를 파악하는데 도가 터야 한다.

강남녹림맹주답게 그의 처신술은 뛰어나기 그지없었다.

냉한웅의 음성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누가 시킨 거냐? 불사천마교도 행세는 왜 한 것이고?"

"……."

손학위는 다소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마냥 지체할 수가 없었다.

- 정사마천궁주는 한 번 말한 것은 되풀이하지 않는다.

- 약속은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지키지만, 뜻을 거스르면 죽음뿐이다.

이 소문은 혈풍상괴 전무의 입을 통해 강호에 널리 퍼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냉한웅은 그의 심중을 꿰뚫어보는 듯 비웃었다.

"위협보다는 유혹이 더 컸겠지. 계속해라."

"불사천마교주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저희 강남녹림맹 뿐만 아니라 강북녹림의 고수들도 동원되었습니다."

손학위는 자신의 잘못을 희석시킬 속셈으로 타지역 녹림고수들까지 물고 늘어졌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고루대교도 그들과 한 편임을 아십니까? 금고루 가면을 쓴 사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자가 누군지도 알고 있다.

천수장의 구유명부탑주(九幽冥府塔主)였던 신산묘인(神算妙人)이지."

손학위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인보다도 더 속속들이 아시면서… 왜?"

냉한웅의 두 눈에 살광이 스쳤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다음 순간, 그의 검이 섬광을 발출했다.

"크으윽……!"

손학위가 복부를 움켜쥐며 비명을 터뜨렸다.

그는 의혹 어린 표정으로 냉한웅을 노려봤다.

"이것이 약속을 지킨 거냐? 기회를 준다 해 놓고…."

냉한웅은 빙긋 웃으며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대답을 들려 주었다.

"후후후… 본존은 네게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 질문을 했던 것이다."

손학위는 너무도 기가 막혀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이런 야비한 놈!"

그는 너무도 분한 나머지, 복부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내밀어 냉한웅을 붙잡으려 했다.

순간, 그의 복부로부터 피와 내장이 폭포와도 같이 쏟아져 내렸다.

"윽!"

이것이 그의 최후였다.

음모와 귀계로 강남녹림맹주의 자리에 오른 탈혼비마 손학위.

그 역시 비열하기 짝이 없는 수작에 걸려들어 희롱만 당한 채 참담한 종말을 맞이하였으니….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하나, 냉한웅도 왠지 입맛이 썼다.

'나도 훗날 이런 꼴이 되지 않는다 장담할 수 있을까?'

악을 처벌하는 일이다.

하지만 비열하고 잔혹한 수법으로 남을 심판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낀 것이다.

시킨 것도 아닌데, 무릎을 꿇고 애원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복면인들.

자원해서 온 자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온 자도 있을 것이었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모습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냉한웅은 뜻 모를 한숨을 내쉬며 신형을 날렸다.

슉-!

다시 수면 위를 질주하는 그의 앞에 세 개의 통로가 나타났다.

순간, 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날아 작은 암초 위에 올라섰다.

이어 그는 천리지청술(千里之廳術)을 펼쳤다.

천리지청술이란 땅에 귀를 대 전해진 진동의 흐름을 증폭시키는 술법이다.

하지만 그는 수면에 귀를 댄 것도 아니었다.

그냥 뻣뻣이 선 자세로 주위 백 장 내의 음향을 엿들었다.

중앙의 통로로부터 병장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토록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는 자들이라면 필시….'

냉한웅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배부른 고양이가 독 안에 든 쥐를 발견했을 때의 표정이 이러할까?

파라라락-!

흑의자락을 펄럭이며 여유 있게 암흑의 허공을 가르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박쥐였다.

냉한웅의 시야에 먼저 들어온 것은 눈에 익은 소선이었다.

선미(船尾)에 꽂혀 있는 파천혈랑(破天血狼) 깃발.

소선은 꽤 넓은 공지에 맞닿아 있었고, 그 곳에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창- 차창- 윙- 우웅웅-!

병장기들에 실린 내력이 하나같이 대단한 만큼, 동굴 안에 울려 퍼지는 음향 역시 고막을 찢을 듯 예리했다.

일순, 냉한웅의 눈에서 섬광이 폭사됐다.

'월녀개…!'

격전이 치뤄지는 한 귀퉁이에 그녀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싸움을 멈춰라!"

사자후(獅子吼)와 함께 그의 신형이 전광석화(電光石火)와도 같이 장중에 떨어져 내렸다.

이 엄청난 기세에 놀란 중인들이 급히 무기를 거두며 물러섰다.

"누구의 짓이냐?"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의외거니와,

밑도 끝도 없는 냉한웅의 물음에 중인들은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

"……."

냉한웅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천천히 그들을 살폈다.

이리 가죽을 뒤집어쓴 자 네 명이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포위하듯 좌측엔 흡혈인마와 무산괴마가 버티고 있었으며…

우측엔 설산신니(雪山神尼)와 천도탈흔(天賭奪魂) 방문웅(方文雄), 하남일장(河南一掌) 손무(孫繆),

진천패도(震天覇刀) 피천웅(皮天雄), 백운신검(白雲神劍) 나인걸(羅人傑) 등

대귀선을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이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낭패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설산신니의 안색이 특히 창백한 것으로 미루어, 내상을 입었음이 분명했다.

이 때 이리 가죽을 쓴 자 중 하나가 냉한웅에게 호통쳤다.

"네놈은 무슨 자격으로 끼여드는 거냐?"

하나, 냉한웅은 상대조차 않고 월녀개 곁으로 다가가 상세를 살폈다.

숨결이 가늘긴 하지만 고르게 이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안도와 탄식 어린 음성을 흘렸다.

"월녀함정이무한(月女含情已無限)… 월녀가 품은  정은 끝이 없구나."

냉한웅은 문득 월녀개 곁에 있는 설산신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이는 설산신니가 월녀개를 구했으며, 내상을 입은 것도 그 때문이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여인에게 상처 입힌 자가 누구냐?"

그의 음성은 너무도 냉막하여 장내의 중인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전원 숨을 멈추었다.

냉한웅은 주변을 훑어보았다.

살의가 번들거리는 야수의 눈빛보다도 강렬한 눈초리였다.

그 눈빛 하나로만 수백 명을 살인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피천웅이 이리 가죽을 쓴 자들을 손가락질했다.

"사대혈랑에게 당했소. 중상이긴 하나 신니께서 치료했으니, 생명엔 지장 없을 게요."

일순, 냉한웅의 미간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사대혈랑을 향해 냉음을 토했다.

"자결하겠느냐? 본존의 검에 목숨을 바치겠느냐?"

사대혈랑은 어이가 없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맏형인 금강혈랑(金剛血狼)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보니, 미친 놈이로군."

광혼혈랑(光混血狼)도 고개를 저었다.

하나, 의미는 달랐다.

"눈의 정기를 보니, 미친 것은 결코 아니고… 명호를 밝혀라!"

냉한웅은 싸늘하면서도 단호한 목청으로 대꾸했다.

"정사마천궁주!"

중인들의 표정이 일제히 변하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냉한웅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 검화를 일으켰다.

쉭쉭쉭쉭-!

검기가 송이송이 꽃을 피우는 절묘한 수법이었다.

검화(劍花) 만개(滿開).

하나, 중인들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정사마천궁주의 수법이란 별게 아니었다.

그들 중 절정고수 아닌 이, 누가 있는가?

귀수혈랑(鬼手血狼)이 비웃었다.

"정사마천궁주… 소문만 요란했지, 별거 아니군."

하지만 다음 순간, 그를 비롯한 중인들의 안색이 귀신을 본 듯 변했다.

"저럴 수가?"

"성기현화(成氣現花)-!"

팔랑- 팔랑-!

공중에 꽃잎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검화들이 바람을 타고 흩어져 제멋대로 날아가는 장관은 중인들에게 섬뜩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목전의 정사마천궁주가 얼마나 가공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냉한웅은 천천히 사대혈랑에게 다가갔다.

"다시 묻겠다. 자결하겠느냐?  아니면 본존의 검에 목숨을 바치겠느냐?"

사대혈랑의 신형이 약속이라도 한 듯 흩어져 냉한웅을 에워쌌다.

금강혈랑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설사 네놈의 재간이 오심향천(五心向天)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우리 형제들의 취랑진(醉狼陣)만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냉한웅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취랑진이라… 혈랑진이 아니고…?"

여지껏 입을 다물고 있던 무영혈랑(無影血狼)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묘인에겐 가무(歌舞)가 곧 삶이다. 그러니 어찌 술이 빠질 손가?"

냉한웅은 그를 세심히 살폈다.

'강호비사집(江湖秘事集)에 적혀 있길, 

사대혈랑 중 막내인 무영혈랑이 가장 무공이 높고 심기가 깊다 했는데… 저 자인 모양이군.'

이 때, 무영혈랑이 취한 음성을 토해 냈다.

"대주불각명(對酒不覺瞑)… 술잔을 기울이니, 해 지는 줄 몰라라."

이를 신호로 네 마리 술 취한 이리들이 비틀비틀 역천(逆天)의 방위를 밟기 시작했다.

냉한웅은 여전히 냉막한 표정이었으나 속으론 크게 경계했다.

'사대혈랑… 짐작했던 것보다 월등히 강한 놈들이다.'

냉한웅도 신법을 펼쳐 먼저 천선(天璇)의 방위를 밟았다.

순간, 금강혈랑의 대두도가 천령개를 쪼개 왔다.

그가 발걸음을 틀어 옥형(玉衡)의 방위에 가 서니,

귀수혈랑의 낭심귀수(狼心鬼手)가 기다렸다는 듯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가 정사마천궁주란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냉한웅의 손끝이 퉁겨졌다.

검광이 발산되었다.

"크윽!"

비명이 터져 나왔다.

펄떡- 펄떡-!

귀수혈랑의 손목에서 떨어져 나간 오른손이 물고기 마냥 땅바닥에서 뛰고 있었다.

냉한웅은 진궁(震宮), 즉 동쪽의 을목(乙木)으로 신형을 날리며 대구(對句)를 읊었다.

"낙화영아의(落花盈我衣)… 꽃잎은 왜 떨어져 나의 옷깃을 스미는가?"

하나, 무영혈랑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취기보계월(醉起步溪月)라… 거나하게 취해서  달을 밟고 가노니…."

순간, 그들의 보법이 빨라졌다.

혈랑파천무(血狼破天舞).

마치 술 취한 이리들이 날뛰듯 일정한 법칙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사실 매우 심오하고 오랜 훈련 없인 펼치기 불가능한 절진이었다.

냉한웅의 전후좌우가 이리의 그림자들로 채워졌다.

냉한웅도 호기가 일어 크게 외쳤다.

"조환인역희(鳥還人亦稀)… 새는 보금자리를 찾고 인적은 끊겼네."

이는 끝내 버리겠다는 경고의 대구였다.

동시에 그의 검이 혈광을 발했다.

"혈섬(血閃)-!"

중원제일의 쾌검초(快劍招)는 귀수혈랑의 움직임을 단번에 갈라 놓았다.

부상으로 인해 전력을 다할 수 없는 그부터 해치운 것이다.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양분시킨 잔혹스런 수법!

"악!"

짧은 비명이었으나 참담한 죽음이었다.

형제의 처참한 죽음에 충격, 

그리고 방위 중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상태의 취랑진(醉狼陣)은 크게 흔들렸다.

고수들의 대결에서 바늘만한 허점도 패배로 직결된다.

하물며 상대는 냉한웅이 아닌가.

"혈참(血斬)-!"

혈살검법(血殺劍法) 중 마지막 초식으로 무변중만변(無變中萬變).

변화 속에서 변화를 이루는 이기어검강이 전개된 것이다.

비명이 송두리째 터졌다.

"크으윽……!"

"윽!"

금광혈랑과 광혼혈랑의 신형이 동시에 나뒹굴었다.

쓰러진 그들의 가슴은 어른 주먹이 드나들 만한 크기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리고 무영혈랑…

그는 반토막 난 검을 들고 있었으며, 울컥 검붉은 피 한 모금을 뱉어 냈다.

역시 그의 무공은 다른 삼형제에 비해 월등했으며, 임기응변 또한 뛰어났다.

"이기어검강(以氣御劍 )!"

무영혈랑의 두 눈동자에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냉한웅의 냉막한 표정에 일순, 한 줄기 아쉬움이 스쳐 갔다.

"혈참은 칠십이 개 변화 속에 삼백구십팔 개의 변화가 숨겨져 있는데, 막아 내다니…

없애기엔 아까운 솜씨다."

다음 순간, 그의 안면이 핏빛으로 물들며 살광을 폭사했다.

"하나, 본존의 뜻을 거스른 자는 결코 용서치 않는다!"

이 모습을 본 중인들은 경악을 했다.

"혈살신마(血殺神魔)……!"

"혈살한빙공(血殺寒氷功)-!"

뜻밖에도 무영혈랑의 입가엔 미소가 흘렀다.

'이거야말로 내가 꿈꿔 왔던 대결이 아닌가. 결코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야.'

냉한웅의 입에서 천둥과 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혈참(血斬)- 혈강(血 )-!"

동시에 무영혈랑의 반 토막 검도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초식으로 받아 쳤다.

"파천겁(破天劫)-!"

크르릉- 쾅-!

두 줄기 검강(劍 )이 부딪쳐 일으킨 굉음은 동굴 뿐만 아니라 천지를 붕괴시킬 듯했다.

수면은 태풍을 만난 양 치솟아 뒤집어지고, 주위의 작은 암석들도 마구 휘날려 날아다녔다.

그리고 침묵.

사방은 여전히 칠흑의 어둠에 휩싸여 있었으나, 절정고수들인 중인들에겐 그것이 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냉한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나, 키가 약간 작아진 듯했으니….

무영혈랑, 그는 신형을 원래의 자리에서 이 장 가량 떨어진 동굴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중인들은 한눈에 그의 숨이 멎었음을 알아차렸다.

만년한빙(萬年寒氷)의 극음기(極陰氣)에 의해 강시처럼 뻣뻣이 변해 버린 모습.

이를 지켜보는 중인들의 표정은 정사(正邪) 양측이 모두 똑같았다.

공포와 의혹!

냉한웅의 표정은 별일 아닌 듯 담담했다.

하지만 입가 양쪽엔 실처럼 가느다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키가 작아 보인 이유는, 바닥인 암석에 양 발이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발목까지 내려갈 만큼이나….

상대의 검강에 밀려나지 않으려 버티다 입은 내상 또한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전력을 다하진 않았지만 상대는 파천혈랑교주의 수하가 아닌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삼 갑자(甲子) 전에 겁란(劫亂)을 예언하고 우려했던 운몽오우(雲夢五友)의 우려는 결코 기우(杞憂)가 아니었다.

서장일궁(西藏一宮), 천축이사(天竺二寺), 묘강삼교(苗彊三敎), 대막사문(大漠四門) 등 새외십문(塞外十門).

그들 중 일개 문파인 파천혈랑교, 그것도 교주 아닌 일개 혈랑에 의해 중상을 입다니….

냉한웅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욱 무공에 정진해야겠군. 칠 성(成)의 경지로는 대항하기 역부족이다.'

그렇다. 냉한웅은 불귀해를 급히 빠져 나오느라, 완벽한 수련을 거치지 않고 나온 것이다.

이 때 무산괴마(巫山怪魔) 여량(呂凉)이 말문을 열었다.

"이보게, 고루대교와 불사천마교에서 파천혈랑교를 쓰러뜨리기 위해 이번 계략을 꾸몄다는데… 정말인가?"

냉한웅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본존에게 그 따위 말투를 쓰다니… 입을 조심하지 않으면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면치 못할 것이다."

여량은 움찔했다.

하지만 곧 기세등등하게 노려보았다.

"네놈이야말로 입조심 해라. 내상이 가볍지 않음을 노부가 모르고 있는 줄 아느냐?"

흡혈인마(吸血人魔) 유남(劉嵐)도 은근한 압력을 가했다.

"영웅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아야 하는 법. 순순히 묻는 말에나 대답하거라."

두 마두가 지나치게 거들먹거리자, 진천패도(震天覇刀) 피천웅(皮天雄)이 노성을 질렀다.

"궁주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당신들의 생명을 보전하기 힘들었을 게요.

은인이 중상을 입었다고 그토록 무례해도 되는 거요?"

유남이 눈을 휘번득거렸다.

"피가(皮哥)야, 네놈이 정녕 죽지 못해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그가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자, 냉한웅이 나섰다.

"흡혈인마, 무산괴마! 너희는 본존에게 용무가 있지 않느냐?"

여량은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그래서 대신 사죄한다는 거냐?"

참다 못한 설산신니가 냉음을 터뜨렸다.

"이런 못된 것들! 짐승도 은혜를 알거늘…."

하나, 이마(二魔)의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노니(老尼), 닥쳐라!"

유남의 공력 실린 웅후한 외침에 석벽이 진동을 일으켰다.

평소의 그들이라면 꼬리를 말고 사라지기 바빴을 텐데… 설산신니의 내상도 결코 가볍지 않은 듯했다.

냉한웅은 서 있기조차 힘겨운 듯 검에 몸을 의지한 채 중얼거렸다.

"여러분은 상관 마오. 저 두 마리 짐승은 본존에게 살심을 품고 있으니…."

유남과 여량은 눈짓을 주고받았다.

절호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는 뜻이리라.

그들은 눈에 흉광을 번뜩이며 각자 쌍장을 쳐들었다.

그들이 내뻗으려는 찰나….

"비겁한 놈들! 내가 상대해 주겠다."

피천웅이 앞을 가로막고 도를 뽑아 들자, 냉한웅은 고개를 저었다.

"정사마천궁주는 누구의 도움도 원하지 않소."

피천웅은 그가 대귀선에서 호감을 느낀 인물이다.

천도탈혼 방문웅에게 가진 것을 몽땅 털리고도 웃어넘기던 대범함.

사파(邪派)의 거두라 하나, 그야말로 진정한 사내라고 기억했었다.

"뜻이 정 그렇다면…."

당사자의 동의 없이 싸움을 가로챌 수는 없는 일.

피천웅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비켜 섰다.

여량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추혼비(追魂飛)-!"

우웅…!

동굴 안에 폭풍이 지나는 듯 장력이 웅맹한 음향을 일으켰다.

암암리 천극음양경(天極陰陽經)에 수록된 무상보리신공(無上菩提神功)을 운행하던 냉한웅도

기다렸다는 듯 탄자결(彈字訣)을 전개했다.

콰쾅-!

천 근 화약이 폭발하는 것 같은 음향이 일었다.

순간, 여량은 숨을 쉴 수조차 없는 엄청난 암경에 휩싸였다.

그는 벗어나려 공력을 남김없어 끌어모았다.

무리무상신공의 탄자결.

이것은 상대의 공력이 강할수록 반탄력이 강해지는 묘용(妙用)도 있지 않은가?

"크욱!"

여량의 몸이 발에 채인 가죽 공처럼 높이 치솟았다.

그는 오 장 밖에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떨어진 그의 형체는 시체 보기를 밥 먹듯 하는 무림인들마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눈, 코, 입, 귀 등 칠공(七孔)에서는 검붉은 핏물이 줄줄 흘러 나오고

사지육신이 몽땅 으깨져 허연 뼈들이 살 밖으로 비어져 나오기까지 했다.

경악(驚愕)!

이 외에 또 뭐가 있겠는가?

장내의 중인들은 숨소리조차 죽였다.

이 때, 유남이 폐부를 찢는 듯한 괴성을 질렀다.

"너도 우리와 함께 가자! 탈명살(奪命殺)-!"

무영혈랑이 그러했듯, 함께 죽기를 각오한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살초.

무영혈랑에 비해 크게 차이 나긴 하나, 오마 중의 일 인답게 그 위력은 가공스러웠다.

냉한웅도 중상을 입은 몸인데다 조금전 여량을 상대하느라 억지로 내력을 끌어올리지 않았던가?

"마극참(魔極斬)-!"

천마존이 남긴 사마천존경(邪魔天尊經).

책자에 수록된 무학들 중에서도 정화라 할 수 있는 천존칠선(天尊七扇).

지법, 장법, 검법, 도법 등 그 무엇으로든 펼칠 수 있는 칠 초의 선법(扇法).

그 중 천존마극참(天尊魔極斬)이 검으로 펼쳐친 것이다.

암흑 속, 두 가지 병기가 내뿜은 섬광과 공기를 가르는 음향만이 물결처럼 일었다.

"크악!"

"윽!"

양쪽 모두에게서 비명이 토해졌다.

다른 점이라면 한  명은 바닥에 쓰러졌고, 또 한 명은 곧 쓰러질 듯 비틀거린다는 것뿐.

등이 바닥에 닿은 유남의 하복부가 완전히 갈라져 내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냉한웅도 무사하지 못했다. 

계속되는 충격으로 인해 굵은 핏줄기가 입 밖으로 계속 흘러 나왔다.

그가 강호 출도한 이래 최초의 수난이었다.

중인들은 냉한웅, 아니 정사마천궁주의 초절한 무공과 인내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냉한웅은 비틀비틀 설산신니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두 팔을 내밀었다.

월녀개를 돌려 달라는 뜻이다.

"시주, 상세가 심하니 우선 치료부터 하는 게 어떠시오?"

하지만 냉한웅은 내민 팔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

일순, 설산신니의 눈동자에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인정이라곤 전혀 없는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 참으로 뜨거운 열정을 간직한 사내구나.'

월녀개를 안아 든 냉한웅은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

안고 있는 그녀의 무게로 인해 휘청이면서도

결코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행동을 고집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하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중인들의 얼굴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직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기분과 감동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