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묘강삼교(苗疆三敎)
혈풍상괴 전무는 섬뜩한 심정이었다.
좀 전에 본 광경은 일 갑자(甲子)가 넘게 강호밥을 먹어 온 그로서도
처음 보는 잔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입술을 놀렸다.
"전모(田某)는 장사 수완이 좋기로 소문난 만큼 중원 도처는 물론,
새외 변방 지역까지 두루 돌아다니지요.
때문에 그 곳의 관습이나 풍물, 또는 각종 방파(幇派)에 대해 남들보다 아는 것이 많습니다."
"……."
"반년 전에 장강어옹으로부터 묘강(苗疆)의 파천혈랑교를 찾아가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서신을 전하고 대답을 듣는 일이었지요."
"서신의 내용은 뭔가?"
"천고기병(千古奇兵)인 파천혈륜과…."
"충분히 알았으니, 내가 나타나기 이전에 벌어진 상황이나 들려 주게."
냉한웅이 중도에 말을 끊자, 전무는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건 당사자들밖에 모르는 비밀인데, 궁주께서 어찌 아신단 말입니까?"
냉한웅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본존은 다른 말을 물었다."
얼굴의 미소와 정반대인 냉음(冷音)!
전무는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장강어옹 차비운이 묘강쌍마(苗彊雙魔)와 함께
야차객을 추적하기까지의 사건을 늘어놓았다.
"그 자는 결코 야차객이 아닙니다.
사도오종(邪道五宗)에 끼인 전모가 어찌 일개 호위인 따위에게 당하겠습니까?"
냉한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지금쯤 장강어옹과 묘강쌍마는 궁지에 몰려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전무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장강어옹은 제껴 놓더라도,
묘강쌍마의 무공은 그 자가 정예살수인 지옥야차객이라 할지라도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거외다."
냉한웅은 품안에서 엄지손가락만한 자옥병(紫玉甁)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지옥야차객이 단 한 명뿐이라면 그리 되겠지만, 괴궤에 능란한 자들이니…."
그는 전무에게 입을 벌리라는 시늉을 했다.
"예옛…?"
전무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입을 벌렸다.
똑-!
청량한 향기와 더불어 한 방울의 액체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한 줄기 청량한 기운이 빠른 속도로 혈맥을 따라 돌며 응혈을 풀어 주는 게 아닌가?
전신이 가벼워짐을 느낀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감탄의 외침을 터뜨렸다.
"궁주, 무슨 영약이기에 이리도 효력이 놀랍습니까?"
냉한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대꾸했다.
"녹엽영령수(綠葉英靈水)!"
전무는 자지러지게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녹엽영령수는 만년녹엽지극영초(萬年綠葉至極靈草)의 즙액으로,
그 효력은 공청석유(空淸石乳)나 설빙정유(雪氷晶乳)를 능가한다.
독상(毒傷)이나 내외상을 치유시키는 효력 외에
공력을 크게 증진시키는 효력까지 있는 천고의 영액을 먹이다니….
전무는 코가 바닥에 닿을 만큼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궁주,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겠습니까?"
하나, 냉한웅의 음성은 싸늘했다.
"다른 마음이나 품지 않으면 족하니라."
전무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는 앞장 서 걸어가는 냉한웅을 뒤쫓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휘익- 휙-!
삼라만상(森羅萬象)이 깊은 잠에 빠진 사경(四更).
냉한웅과 전무는 상승경공을 펼쳐 달빛을 가르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가느다랗게 야적(夜寂)을 찢는 음향이 들려 오자,
이들의
표정에 회심의 미소가 감돌았다.
차차창창-!
"이얏!"
그들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 소리가 들려 오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격전장에 도착한 이들은 여덟 명의 복면인들이
묘강쌍마와 장강어옹 차비운을 협공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나 끼여들지 않고 십 여장 가량 떨어진 곳에 멈춰 서 지켜만 보았다.
복면인들 중에는 야차객의 복장을 한 자도 있었는데, 무공이 특출나 보였다.
그의 입에서 진(陣)을 움직이는 구호가 토해졌다.
"양수탁천(兩手托天)- 불사광우(不死狂雨)-!"
다음 순간, 복면인들은 좌우로 갈라져 한쪽은 궁문(宮門)을 통과해
역팔괘(逆八卦) 방위를 밟아 밀어붙이고 다른 쪽은 태극(太極)으로 감싸안듯
생로(生路)를 끊어 묘강쌍마와 차비운을 벗어날 수 없는 궁지에 빠뜨렸다.
재빠르고 일사불란하기가 마치 한 사람의 수족(手足)이 움직이는 듯하였다.
쌔애액- 윙위잉-!
이번 공세로 끝내려는 듯, 그 기세가 실로 가공스러웠다.
사방에서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기류가 밀려 오자,
묘강쌍마와 차비운의 표정이 절망으로 굳어졌다.
그 때 돌연, 냉음(冷音)과 함께 흑영(黑影)이 장내에 날아들었다.
"혈섬(血閃)- 혈참(血斬)-!"
하늘과 땅 사이에 눈부신 빛살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쏟아졌다.
츳츳츳츳-!
"크으윽……!"
가슴을 찢는 듯한 기음과 비명들.
눈 깜빡할 사이에 덮친 혈풍혈우(血風血雨)는 단 한 명의 복면인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야차객 복장의 인물, 그는 넋 나간 듯한 눈빛으로 멀거니 흑영을 응시했다.
냉한웅은 이 참상이 자신과는 무관한 양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복면인의 눈빛이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당신은 누구요?"
그 질문은 묘강쌍마와 차비운도 하고픈 말이었다.
그 때 전무가 재빨리 나섰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정사마천궁주!"
상술의 귀재답게 아부할 적절한 기회가 생기자, 틈을 파고든 것이다.
냉한웅은 자신도 모르게 쓴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자를 가리켜 필요악(必要惡)이라 하는 건가?'
차비운은 경악의 외침을 터뜨렸다.
"천수장에서 전대(前代)의 마두(魔頭) 혈시악살(血屍惡殺)을 해치운…!"
"아니? 차형은 궁주에 대해 아시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리듯 정사마천궁주와 가까운 척해,
묘강쌍마와 차비운의 기를 죽이려던 전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속셈을 짐작하고 있는 차비운은 자기가 직접 본 것처럼 들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천수장의 혈겁을 종식시킨 장본인이 천수마천궁주라는 건 강호의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아는
사실이오.
고루대교의 지원을 받은 백골방도 그로 인해 붕괴되었고…."
"백골방이? 그럼 방주인 백골마제는 어찌 되었소?"
전무의 물음에 차비운은 냉한웅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오. 하나, 궁주께선 알고 계실지도…?"
중인들의 눈빛이 자신에게로 쏠렸으나, 냉무웅은 못 본 척 복면인에게 명령했다.
"복면을 벗어라."
복면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어 그는 고함을 버럭 지르며 눈을 감았다.
"불사천마(不死天魔)- 영원불멸(永遠不滅)-!"
"……."
그의 입에서 더 이상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날 선 바람이 중인들은 옷깃을 흩날리며 지나간 뒤, 냉한웅이 신음을 흘리듯 한 마디 내뱉었다.
"대단하군."
차비웅은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오?"
묘강쌍마와 전무 역시 의혹 어린 시선을 보내자, 냉한웅은 자신만이 이해하는 미소를 던졌다.
"저 자의 몸을 밀어 보아라."
그제서야 그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챘지만,
묘강쌍마와 차비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 때 전무가 꼿꼿이 서 있는 복면인에게 다가갔다.
팔을 뻗으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 접근해도 복면인이 꼼짝 않자, 그를 슬며시 건드려 보았다.
다음 순간, 복면인은 나무 등걸 모양 뻣뻣한 자세로 넘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쿵-!
그 돌연한 상황에 냉한웅을 제외한 중인들은 아연실색했다.
묘강쌍마 중 아우인 묘강곤마가 중얼거렸다.
"지독한 독종이로군."
어떻게 하면 정사마천궁주의 눈에 들까 기회만을 엿보던 전무가 약삭빠르게 또 나섰다.
"이 자는 묘강 지역을 삼분(三分)하고 있는 집단 중 하나인 불사천마교(不死天魔敎)의 무사외다."
차비운이 복면을 벗겨 죽음을 확인하며 물었다.
"불사천교마란 명칭은 처음 들어 보는데… 틀림없습니까?"
묘강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묘강에는 파천혈랑교(破天血狼敎)와 고루대교( 賜大敎) 외에 불사천마교가 있소."
순간, 냉한웅의 눈에서 야천(夜天)을 꿰뚫을 듯 예리한 신광이 폭사되었다.
아, 공포와 저주의 십대겁란(十大劫亂)!
장장 오랜 세월 암중(暗中)에서 싹터 온 새외(塞外)의 방파들.
이제 그 겁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운몽오우(雲夢五友)와 이들의 제자인 동해무성(東海武聖) 사마궁(司馬宮),
그리고 천마존(天魔尊) 독고기(獨孤奇)!
그 절세의 기인들이 두려워하며 막기 위해 일생을 바친 그 모든것이 과연 겁란을 잠재울 수 있을까?
냉한웅을 상념에서 벗어나게 한 이는 차비운이었다.
"궁주께서 전형을 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렇듯 차모를 도와 주셨으니… 감사하기 한량없습니다."
그는 냉한웅이 손을 들어 가볍게 답례했으나, 속셈이 있는지라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는데, 이야말로 삼생(三生)의 인연 아니겠습니까?
기왕에 차모와 인연이 닿았으니, 목적을 같이하시는게 어떨는지요?"
"어떤 목적인가?"
냉한웅이 계속 하대를 하였지만 그는 사람 좋은 척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성미가 꽤나 급하시오."
"본존은 볼일이 있으니, 빨리 말하라."
냉한웅의 표정이 싸늘해지자, 차비운은 입이 얼어붙었다.
대신 전무가 말을 이었다.
"차형이 제조한 대귀선에는 특수한 망이 있습니다.
만일 이것으로 호신의를 만든다면 어떤 장력이나 보검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요."
전무는 말을 끝내며 차비운의 가슴에 일 장을 날렸다.
퍽-!
바위라도 부술 수 있는 철수공(鐵手功)!
하지만 차비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를 연성했단 말인가?
전무는 잇몸이 드러날 만큼 크게 입을 벌려 말했다.
"지금 차형은 겉옷 안에 천망(天網)의 일부로 만든 호신의를 껴입었습니다.
만약 대귀선의 천망을 모두 차지한다면, 백 벌 이상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제서야 차비운도 열띤 음성으로 거들었다.
"보셨겠지만 천망은 어떤 압력이나 탄력, 날카로움을 견딜 수 있소이다.
더구나 가볍기는 새의 깃털 같아, 한 벌의 무게라 봤자 반 근도 채 안 되지요."
냉한웅의 눈가에 미미한 실소(失笑)가 어리다 사라졌지만, 흥분한 이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대귀선 밖으로 퉁겨져 나간 구멍이 그래서 생겼구나.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늙은이!'
하지만 그는 시치미를 뗐다.
"거참, 흥미 있는 제안이로군."
묘강곤마가 호탕한 웃음을 날렸다.
"푸하하하… 궁주는 사리분별이 명확하구려."
냉한웅은 그의 어울리지 않는 아부에 씨익 미소로 답한 후, 차비운을 노려봤다.
"본존은 결코 죽간의 독바늘이 두려워 응낙한 게 아니다."
순간, 차비운은 얼른 품안에 넣은 손을 빼냈다.
만약에 대비해 품속에 감춘 죽간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귀신 같은 놈! 이 자의 지략도 결코 신기묘산 소걸군에 뒤지지 않을 듯싶구나.'
차비운이 어색한 표정을 짓자, 전무가 약방의 감초 마냥 또 끼여들어 분위기를 살렸다.
"자아, 이럴 게 아니라 모두 객잔으로 돌아갑시다.
귀한 분을 모시게 되었는데, 어찌 석 잔 술을 안 마시겠소."
묘강필마의 입이 헤, 벌어졌다.
"중원의 술과 계집은 묘강에도 소문이 나 있소.
석 잔이 아니라 삼백 잔이라도 비울 테니, 어서 갑시다."
차비운도 재빨리 안색을 고쳤다.
"궁주께서 협조하신다면 천망은 필시 우리의 수중에 들어올 거요."
냉한웅은 일이 무척 재미있게 꼬여 간다고 생각하였으나, 무뚝뚝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귀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차비운은 그의 말투가 전혀 변하지 않자, 내심 욕하며 정중히 대꾸했다.
"설마 우리가 믿지 못한다고 역정 내시지는 않겠지요?"
아직은 믿을 수 없어 못 가르쳐 주겠다는 뜻이 역력했다.
다시 중인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나, 냉한웅은 개의치 않는 듯 전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본존도 당신들을 믿을 수 없다. 하나, 석 잔 술을 사양하지는 않겠다."
강호인들 사이에 공인된 천하사대금역(天下四大禁域)이 있으니….
동(東)으로는 동해(東海)의 불귀해(不歸海),
서(西)로는 무산삼협(巫山三峽)의 단명곡(斷命谷),
남(南)으로는 광동성(廣東省)의 천잔부시하(天殘腐屍河),
북(北)으로는 북해(北海)의 탈혼마봉(奪魂魔峯).
그 네 지역 중 단명곡(斷命谷).
일명 백독곡(白毒谷)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곳에 지옥야차부(地獄夜叉府)가 있었다.
지옥야차부에서는 단명곡의 외부에
각기 지옥전(地獄殿)과 야차전(夜叉殿)을 설치하여 청탁인들을 맞이했다.
때문에 본부의 인물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곡 안에 들어설 수 없는데….
홀연히 한 대의 사두마차가 단명곡을 향해 질주해 오는 것이 아닌가?
두두두두-!
네 필의 말은 하나같이 잡털이 전혀 섞이지 않은 찰합이성(察哈爾省)의 황마(黃馬)였고,
마차는 바퀴에마저 정교하게 세공된 금장식을 덧씌워
그 화려함이 황제의 것보다 결코 덜하지 않아 보였다.
단명곡 입구를 지키던 지옥야차부 무사들이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둥- 둥-!
그들은 경고의 북을 울리며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움직였다.
평소에 얼마나 엄격한 훈련을 쌓았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멈춰라!"
선두에 있는 지옥야차 무사가 호통을 내질렀다.
하지만 사두마차는 멈추지 않고 질주해 왔다.
지옥야차 무사들은 일제히 장검을 뽑아 들었다.
여섯 자루의 검이 바람처럼 흩어져 에워싸듯 사두마차를 향해 덮친 순간.
히이이잉-!
네 필의 말이 일제히 앞발을 들어올려 제자리에 멈춰 서며 한 명의 금의인(錦衣人)이 성큼 내려섰다.
동시에 지옥야차 무사들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친 듯 퉁겨져 나뒹굴었다.
"크으!"
"으음…!"
그들은 신음도, 비명도 아닌 기음(奇音)을 흘리며 자신의 상세를 살폈다.
하나, 아무런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도의 기색을 띠며 벌떡 일어선 그들은 재차 공세를 취하려 상대를 노려보았다.
하나, 아무도 행동하려 들지 않았다. 휘둥그레 뜬 눈으로 바라만 볼 뿐….
과연 인간일까 싶을 만큼 잘생긴 금의공자!
일신에서 느껴지는 기도(氣道) 또한 한 마디로 설명키 어려울 정도였다.
장엄한 산맥(山脈)의 위풍이랄까? 아니면 창창한 사해(四海)의 대범함에 비할까?
비단에 금실로 수놓은 화복(華服)에 각종 보석들로 장식된 요대(腰帶),
수중에 쥐고 있는 백옥섭선 등 현란하기 그지없는 차림새는 후광(後光)인 양 느껴졌다.
정사마천궁주(正邪魔天宮主) 냉한웅.
그가 다시 진면목(眞面目)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옥봉루(玉鳳樓)에 나타났을 때와 너무도 달랐다.
"부주(府主)에게 어서 나와 본존(本尊)을 맞이하라 일러라."
그 얼마나 광오한 말인가?
지옥야차 무사들은 얼굴에 가득 노기를 띠었으나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이들이 냉한웅의 범상치 않은 모습과 당당한 태도에 질려 있을 때.
휙휙휙-!
일진의 파공성과 함께 수 명의 인영(人影)이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하나같이 안광이 형형하고 태양혈이 블끈불끈 치솟은 것으로 보아, 모두 내가고수들임이 분명하였다.
그들 한가운데 선 초로(初老)의 인물이 지옥야차 무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자 때문에 경고를 울린 것이냐?"
지옥야차 무사들 중 적염(赤髥)을 기른 자가 얼른 허리를 굽혔다.
"네, 부주님을 찾으십니다."
초로의 인물이 가소롭다는 듯 냉한웅의 아래위를 훑었다.
"부주님의 신물인 영패를 지니고 있느냐?"
그의 눈빛이 불쾌해 냉한웅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영패? 그런 것은 없지만…."
그는 백옥섭선을 흔들어 보였다.
"대신, 더 확실한 물건이 있지."
"그게 뭐냐?"
순간, 냉한웅의 백옥섭선이 펼쳐졌다.
"마존령(魔尊令)!"
아수라파천귀(阿修羅破天鬼)의 형상을 드러낸 천존선(天尊扇)!
동시에 두 글자가 선명히 드러났다.
<알목(謁目)>
천마존의 형벌 중 네 번째로, 두 눈알을 뽑아 버리는 잔인한 수법이다.
춘풍(春風)인 듯싶은 냉한웅의 표정이 돌연, 심장마저 얼릴 듯한 한풍(寒風)으로 변했다.
찰나, 일성폭갈(一聲暴喝)과 함께 흑영(黑影)이 번뜩였다.
"주군(主君)께 무례를 범한 대가다!"
동시에 초로의 인물이 양 손으로 두 눈을 움켜쥐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크으으…!"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샘솟듯 흘러내렸다.
장중에는 어느 틈엔가 흑의노인(黑衣老人)이 태산처럼 서 있었다.
마치 지옥의 끝에서 온 듯 냉기가 흐르는 그로 인해 중인들은 질식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더욱이 그의 손아귀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두 개의 눈알이 들려 있지 않은가?
그 때 경미한 파공성이 일며 홍의노인(紅衣老人)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성큼 냉한웅의 면전에 부복( 伏)하였다.
"주군께 인사 올립니다."
청운보의 개 한 마리 남겨 주지 않았던 혈살신마(血殺神魔)와 잔인사황(殘忍邪皇)이 나타난 것이다.
잔인사황도 예를 취하며 물었다.
"주군께선 어찌 이리 늦으셨습니까?"
냉한웅도 정중히 반례(半禮)로 답례했다.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지요. 그보다…."
그가 운만을 띄웠으나, 혈살신마는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었다.
"속하들은 이미 지옥야차부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그 말에 지옥야차부 인물들은 경악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단명곡(斷命谷) 안은 본부의 무사들조차도 허락 없인 드나들 수 없는데?"
단명곡 주변에 살포된 각종 독물(毒物)과 독화(毒火), 그리고 수많은 절정고수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홍의노인의 말은 신빙성이 없었다.
하지만 좀 전에 흑의노인이 펼친 무공 또한 경세적이 아니던가!
지옥야차 무사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참으로 믿기 어렵소이다. 본부의 무사들 중 일류고수가 아닌 자가 없는데,
어찌 전혀 눈치조차 못 채게 뒤지고 다닐 수 있단 말입니까?"
혈살신마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린 놈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나서느냐?"
지옥야차 무사는 가슴이 섬뜩했으나 그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나도 환갑을 넘긴 몸이외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지 않소이까?"
그 때 다급한 외침이 들려 왔다.
"혈성마군(血星魔君)!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혈성마군이라면 진천패도(震天覇刀), 혈풍상괴(血風商怪) 등과 더불어
사도오종에 끼인 고수가 아닌가?
그가 지옥야차부의 일개 경비무사라니….
이어 장내에 왜소한 인영이 나타났다.
오 척 단신의 작은 체구에 피풍(被風)을 두르고 있는 인물.
순간, 지옥야차 무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영생불사(永生不死), 부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당금무림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지옥야차부주.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데, 괴이하게도 면사(面紗)로 얼굴을 가렸으니….
그렇다면 그는 여인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왜소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구와 굵직한 음성은 그가 사내임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지옥야차부주는 냉한웅 일행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공자는 천마존과 어떤 관계요?"
혈살신마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주둥아리 닥쳐라! 더 이상 나불거리면 지옥야차부를 당장에 박살내 버리겠다."
지옥야차부주의 면사 속에서 횃불 같은 광망(光芒)이 이글거렸다.
"그대야말로 함부로 날뛰다간 죽어도 묻힐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그의 말에는 상대를 깔아뭉개는 듯 낮은 어조로 은은한 비웃음마저 배어 있었으니….
혈살신마는 당장에 때려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 갑자(甲子)를 전후하여 신마에게 주둥이를 놀려 댄 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네 따위가 감히…."
이 갑자라면 일백이십 년.
그렇다면 신마는 바로 석년의 혈살방주(血殺幇主)인 혈살신마(血殺神魔)가 아닌가?
장중은 한순간 혼란에 빠져들었다.
"홍의(紅衣)의 혈살신마! 그럼 저 흑의인(黑衣人)은…."
"잔인교주(殘忍敎主)까지…."
그러나 지옥야차부주는 태연자약하게 응수했다.
"신마와 사황! 그대들이라면 단명곡을 드나드는 것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하나, 별 소득은 얻지 못할걸."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의 행적을 낱낱이 알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 때, 잔인사황이 슬쩍 소맷자락을 떨치며 물었다.
"노부들이 누군지 알면서도 이토록 무례하다니… 믿는 게 있는 모양인데, 그것이 뭔가?"
순간, 한 줄기 암경(暗勁)이 지옥야차부주의 면사를 휘감았다.
파라라락-!
무형의 기류에 휘말린 면사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요동을 쳤다.
하나, 잔인사황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면사는 찢겨진 곳 한 군데 없이 멀쩡했으며, 한 치도 얼굴에서 벗어나 있질 않았다.
지옥야차부주는 득의의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본 부주는 그대들의 침투 목적을 알아 내기 위해 모른 척 내버려둔 채 행동을 살폈다."
혈살신마는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흐음, 우리들이 눈치 못 챌 정도라면 정말….'
그는 힐끗 잔인사황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매우 격동된 표정이었다.
"……."
지옥야차부주는 시선을 냉한웅에게로 돌렸다.
"이만하면 공자의 내력을 물을 만한 자격이 있겠소?"
냉한웅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마존령은 천마존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이젠 정사마천궁주(正邪魔天宮主)의 신물이 될 것이오."
냉한웅의 입에서 더 이상의 음성이 흘러 나오지는 않았으나 입술은 움직임을 계속했다.
"천신령주(天神令主)는 더 이상 묻지 마시오."
다음 순간, 지옥야차부주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영생존귀(永生尊貴)하신 주군께 수하, 인사 올립니다."
그의 행동에 놀란 지옥야차 무사들도 덩달아 부복하며 외쳐 댔다.
"영생존귀(永生尊貴)! 천존께 비속(卑屬)들, 인사 올립니다."
돌변한 상황에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지옥야차부주는 감격에 벅찬 가운데에서도 떨치기 어려운 의혹이 있었다.
'천하에 본 령주를 아는 사람은 천마존뿐이다.
하나, 저 공자는 결코 천마존이 아니다. 불귀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그 때, 냉한웅의 청아한 음성이 그를 일깨웠다.
"부주, 본존을 언제까지 이 곳에 세워 둘 거요?"
"수하의 무지를 용서하십시오."
지옥야차부주는 얼른 몸을 일으킨 후, 혈정마군에게 지시하였다.
"본부가 세워진 이래 다시 없을 귀빈께서 오셨으니, 어서 알려 준비토록 하거라."
사태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자,
눈알이 뽑히는 형벌을 당한 초로의 인물은 입도 삐죽이지 못했다.
냉한웅은 고통과 공포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신마, 그를 치료해 주시오."
혈살신마는 냉한웅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주군의 마음이 날이 갈수록 온화해지는구나. 천존비동에서는 분명 마존부를 먼저 선택하였거늘…."
잔인사황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학과 지략도 날이 갈수록 성취를 더해 가고 있잖은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누구를 칭찬하는 것은 처음 보는군."
"그런가? 하여간 주군은 노부를 끊임없이 감탄케 하네."
"한데, 우리도 아직 못 알아 낸 지옥야차부주의 정체를 주군께서 어떻게…?"
이들이 대화가 여기에 이르렀을 때.
두둥- 두둥-!
냉한웅은 우렁찬 북소리와 지옥야차곡 내 인물들이
목청껏 내지르는 환호성을 들으며 한 석실로 안내되었다.
계곡의 자연 동굴을 다듬어 만든 이 곳은 깨끗할 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다.
강호인들이 사용하는 천리화통(千里火筒)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른
팔뚝 굵기만한 수백 자루 황촉불로 안을 대낮처럼 밝혔으며,
바닥은
발목까지 잠겨들 만큼 푹신한 양털 융단이 깔려 있었다.
냉한웅이 정중앙에 마련된 태사의에 좌정하기 무섭게 홍영(紅影)과 흑영(黑影),
두 줄기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 들어와 양 옆에 시립했다.
먼저 잔인사황이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주군, 지옥야차부주는 대체 어떤 자이옵니까?"
일순, 냉한웅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쳐 갔다.
"본존의 일에 간섭하려는 거요?"
뜻밖의 냉음(冷音)에 잔인사황은 움찔 어깨를 떨며 극구 사죄했다.
"수하의 경망됨을 용서해 주십시오."
혈살신마 역시 섬뜩한 심정이었다.
'나약해진 것만은 아니었군. 주의해야지.'
냉한웅은 다시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굳이 숨겨야 할 이유도 없으니, 아는 만큼만 알려 주도록 하겠소."
그의 이러한 태도는 지옥야차부주마저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방금 전만 해도 딱 잘라 묵살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다시 없을 수모(受侮)와 고통을 겪으며 다시 태어난 냉한웅.
그의 만년한빙(萬年寒氷)과 같은 가슴 속에 용
암처럼 들끓는 애(愛)와 정(情)이 감추어져 있음을 안다면, 이해할 수도 있으련만….
내심 잔인사황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냉한웅은 천수제갈로부터 들은
사대밀령주(四大密令主)의 얘기를 비교적 상세히 털어놓았다.
천마존의 수하에 혈살방(血殺幇)과 잔인교(殘忍敎)가 있음은 강호의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네 개의 극비조직을 지니고 있었다.
천살령(天殺令),
천신령(天神令),
천기령(天機令),
천독령(天毒令).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도 천마존의 휘하에 자신들을 감시하는 비밀스런 조직이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으며,
그래서 딴 생각을 품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나 이토록 방대하고 치밀한 것이었을 줄은 짐작조차 못한 일이었다.
냉한웅은 얘기하는 중간 중간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의 신색을 예리하게 지켜보았다.
하나, 면사로 가리워진 지옥야차부주의 변화만은 살필 수가 없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지옥야차부주가 물음을 던져 왔다.
"주군께선 어떻게 수하의 신분을 알아 내셨는지요?"
냉한웅은 별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지옥야차부의 일이라는 건 신속 정확한 정보력이 없인 불가능한 것 아니오?
또한 개개인 고수들의 능력도 빈틈없이 파악, 선별하여 적시적소에 파견해야 하는 등…
이런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게 아니오."
냉한웅은 달콤한 향기가 감도는 찻물로 입술을 적신 후,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오래 전에 만들어졌으며,
그 은밀함과 뛰어남이 강호인들의 상식을 벗어난 정도여야 할 텐데…
천신령 외에 어떤 조직이 과연 이런 일을 꾸밀 수 있겠소?"
혈살신마와 잔인사황, 지옥야차부주는 할 말을 잊을 지경이었다.
"아아……!"
"과연……."
"주군의 혜지는 제갈량이 환생을 해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이 경탄과 아부가 섞인 탄성을 연이어 터뜨릴 때, 냉한웅이 말의 방향을 바꾸었다.
"천신령주는 고루대교와 어떤 사이요?"
지옥야차부주의 면사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까?"
이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과는 매우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흥정하였지요."
냉한웅의 눈빛이 햇살처럼 강렬히 빛났다.
"혹, 그게 대귀선에 있는 물건이 아니오?"
"아니? 대관절 주군께선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지옥야차부주가 기절초풍할 듯이 경악했으나, 냉한웅은 다시 한 번 그의 급소를 찔렀다.
"강호칠기(江湖七奇) 중의 기걸(奇傑) 만통자(萬通子) 역시 천신령주의 수족이란 것까지밖엔 모르오."
그 말에 지옥야차부주는 두 손을 내저었다.
"천하에서 수하가 알아 내지 못할 것이라곤 주군의 심중(心中)뿐일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냉한웅 실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그 동안 파악한 강호 정세에 대해 자세히 들려 주시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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