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9장 여심(女心)

오늘의 쉼터 2016. 5. 31. 15:48

제9장 여심(女心)

 

"소걸군… 소걸…!"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도 오로지 한 사람만을 찾는

녀의 애타는 음성은 냉한웅의 가슴을 찢는 듯 아프게 했다.

하나, 냉한웅의 표정은 변함없이 냉막하기만 했다.

지금의 신분이 개방의 거지가 아닌 정사사천궁의 궁주이기 때문일까?

석벽을 따라 나 있는 천연 육로는 그의 휘청거리는 몸이 자칫 중심을 잃어

수로에 빠질까 걱정될 만큼 비좁게 이어졌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통로는 걸어도 걸어도 물 소리와 어둠뿐이었다.

월녀개의 미약한 신음도 끊이지 않고 흘러 나왔다.

"으, 소… 걸… 군…!"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부름은 셀 수가 없었다.

그 때마다 냉한웅의 눈빛은 복잡한 번민으로 일렁였다.

월녀개의 무한한 애심(愛心)이 빙심(氷心)의 냉한웅을 변모시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문득 냉한웅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월녀개의 몸을 비스듬히 벽에 기대 놓은 다음,

그는 품안에서 엄지손가락만한 자옥병(紫玉甁)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슬쩍 스치기만 해도 가슴이 펑 뚫리는 듯한 청량한 향기!

만년녹엽지극영초(萬年綠葉至極靈草)의 즙액으로 

그 효력은 공청석유(空淸石乳)나 설빙정유(雪氷晶乳)를 능가하며,

독상(毒傷)이나 내외상을 치유시키는 효력 외에 공력을 크게 증진시키는 효력까지 있는 천고의 영액.

그는 녹엽영령수(綠葉英靈水)를 월녀개의 입 안에 두 방울 넣어 준 후, 자신도 두 방울을 마셨다.

청량한 향기가 입 안을 진동시키며 서서히 구강을 타고 식도를 따라 내장으로 흘러 내려갔다.

냉한웅은 가만히 월녀개를 바라본다.

정이 가는 얼굴.

비록 흙먼지로 뒤덮이고 피칠을 하고 있었지만, 냉한웅의 눈에는 여전히 정이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감고 있는 눈이 떠지면 그 모습은 더욱 정이 가리라.

"월녀개…!"

가만히 불러 보는 냉한웅. 

거기 은근한 사랑의 감정이 묻어 있었다.

그렇지만 정신을 잃고 있는 그녀가 대답을 하지는 못한다.

냉한웅은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잠시 청각을 곤두세우다가 운기요상에 들어갔다.

어느덧 천리묵혈동을 완전히 무너뜨릴 듯 울려 대던 폭음이 멎어 있었다.

철썩이는 물 소리와 동굴을 헤집는 음습한 바람만이 귓전을 울릴 뿐.

"으음…!"

월녀개가 미음(微音)을 흘리며 눈을 떴다.

순간, 그녀는 목전의 상황에 화들짝 놀라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 잔 정사마천궁주가 아닌가? 어떻게…?'

그녀가 의혹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냉한웅의 두 눈도 떠졌다.

만년빙동에서 불어 오는 한풍(寒風)처럼 차가운 음성이 냉한웅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네게 상처를 입힌 네 마리의 혈랑(血狼)들은 지옥에 보내 버렸다."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

전혀 달라진 냉한웅이었다.

월녀개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제서야 자신이 중상을 입었던 것이 생각나 운기해 보았다.

진기가 한 곳도 막힘 없이 돌아갈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해진 것을 느낀 그녀는 깜짝 놀랐다.

하나, 전혀 내색 않고 물었다.

"내 상처도 당신이 치료해 주었나요?"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그가 묵직한 어조로 잘라 대답하기 무섭게, 월녀개가 벌떡 일어섰다.

"필요가 없다니, 가야겠군요."

대담한 기질과 재치였다.

당한 기분이 든 냉한웅은 냉소를 터뜨렸다.

"후후후… 월녀개가 거칠고 예의를 모른단 말은 헛소문이었군.

토록 상냥한 낭자일 줄이야."

월녀개도 지지 않고 한 마디 내뱉었다.

"정사마천궁주가 냉혹하기 그지없는 살인마란 말도 헛소문이군요. 
이토록 다정한 사내일 줄이야."

말투까지 그대로 흉내내어 되받아쳐 오자, 냉한웅도 은근히 오기가 일었다.

"운기요상 중인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떠나겠단 거냐?

그것도 너를 구해 주려다 당한 건데…."

월개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삼척동자라도 그런 말엔 속지 않을 거예요. 운기요상을 하면서 동시에 말을 하다니…."

냉한웅은 침착하게 응수했다.

"양심신공(兩心神功)이란 말을 들어 본 적 있는가?"

"양심신공? 그런 건 옛날 얘기 속에나 나오는 거죠.

실제로 터득했단 사람을 보았단 소문조차 듣지 못했어요."

"그럼… 본존의 말을 믿지 못하겠단 건가?"

월녀개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 믿어요. 당신이 내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으니까.

사 마음을 셋, 넷으로 나눈다 말할지라도…."

냉한웅은 어이가 없었다.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어 주겠다는 뜻 아냐?

요 조그만 계집이 정사마천궁주를 완전히 갖고 노는군.'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월녀개, 이번엔 당신이 본존을 안고 떠날 차례야."

월녀개의 표정도 급변했다.

"안아 달라구요? 그 무슨 해괴한 소릴…."

"낭자도 그렇거니와 본존도 여기에서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대체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설명을 해 보세요."

"서둘러야 해. 지금 파천혈랑교주가 추적해 오고 있다!"

월녀개는 다시 까르르 웃었다.

"그런 수법으로 내 품에 안기려 들다니, 정말 어리석군요."

"사내 대장부가 어찌 계집에게 안기려 들겠느냐?

혈랑은 후각이 발달되었으니, 우리의 냄새를 놓치지 않을 게다."

어미 젖을 단 한 번도 먹지 못하고 자란 것처럼 무정(無情)한 사내의 표정이 다급히 변하자,

월녀개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럼 사대혈랑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본존이 운기요상을 끝내기 전에 그 자에게 발견되면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멀리…."

월녀개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안긴 자세로 운공을 할 수 있겠어요?"

"물론이다. 본존은 어떤 자세로든 운공할 수 있으며, 동시에 듣고 말할 수 있다."

월녀개는 망설이지 않고 냉한웅을 들쳐 안았다.

그의 몸은 나무 토막 마냥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운기법이 이토록 괴이할까?'

그녀는 감촉이 별로 좋지 않게 느껴졌으나, 그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사내가 아니라 나무 토막을 안고 간다 생각하지, 뭐.'

휘익-!

그녀는 신법을 전개하면서도 입을 쉬려 들지 않았다.

"당신은 파천혈랑교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는 듯싶은데… 어떻게 알았죠?"

"지금이 그것을 설명할 상황인가? 입 놀릴 힘이 있으면 두 다리에다 사용해라."

냉한웅이 무뚝뚝하게 핀잔을 주자, 월녀개의 눈꼬리가 샐죽해졌다.

"치잇, 계집의 품에 안겨 달아나는 주제에…."

순간, 냉한웅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스쳐 갔다.

하나, 수치심이나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소걸군이 월녀개에게 얼마나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었는가?

정사마천궁주의 신분이긴 하나, 이토록 차갑게 대해선 안 될 것이다.'

그는 음성을 부드럽게 해 다시 말했다.

"본존의 운기법이 마음에 든다면, 낭자에게 가르쳐 주지."

"그게 정말인가요?"

"본존이 입 밖에 내놓은 말은 황법(皇法)과도 같다."

월녀개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계속 재잘거려 댔다.

"열심히 배우겠어요. 그래서…."

냉한웅은 의혹의 표정으로 쳐다봤다.

무림인에게 있어 무공은 생명과도 같다.

더구나 경세(警世)의 절기!

이를 가르쳐 준다면 자신의 팔다리 중 하나를 내놓으라 해도 마다할 리가 없으니,

이토록 기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월녀개는 다르다.

염불에는 관심 없고 젯밥에만 마음이 있듯, 그녀의 마음 속엔 오로지 달님뿐 아닌가?

오죽했으면 개방방주인 철지영개가 가두어 놓다시피 무공을 익히게 하고,

추추귀개로 하여금 감시하게 했을까.

호기심이 인 그가 급히 반문했다.

"그래서 어쩌겠단 말인가?"

"강호명화대회(江湖名花大會)에 나가겠어요."

무림에 몸담은 여협(女俠)들 중 미색(美色)과 기예(技藝)에 가장 출중한 이를 뽑는 이색적인 겨룸.

강호제일화(江湖第一花),

중원명화(中原名花),

강북화(江北花),

강남화(江南花).

네 미인들을 선출하는 이 대회는 강호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세인들의 지대한 호응과 관심까지 끌어모을 만큼 대성황을 이루어 왔다.

제오차 강호명화대회는 올해에 개최되며,

그 장소는 동정호(洞庭湖)를 끼고 있는 하남성(河南省)의 악양(岳陽)이니…

더욱 성황을 이룰 게 분명했다.

너무도 뜻밖의 말이라 냉한웅은 얼떨떨했다.

"강호제일화(江湖第一花)가 되는 게 꿈이었나?"

"예전에는 아니었죠. 하지만 지금은…."

"왜 마음이 바뀌었지?"

월녀개는 수줍은 듯 웃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는 절색의 미녀만을 좋아해요.

절색은 아니지만 명화(名花)로 뽑힌다면 그의 관심을 끌 수 있지 않겠어요?"

순간, 냉한웅은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했다.

그 바람에 자칫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될 뻔한 고비를 맞았다.

하나, 즉시 냉정을 되찾아 위험을 넘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 속엔 벅찬 감동의 물결이 일렁였다.

'나로 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에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더니,

젠 관심이나마 끌기 위해 천한 짓이라 비웃던 강호명화대회에 참여하려 하는구나.'

냉한웅은 갑자기 그녀가 사랑스러워졌다.

낡은 의복 안에서 풋풋한 살 내음이 풍기는 듯 느껴진 그는 문득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그 복 많은 사내가 누군지 말해 주겠나?"

월녀개의 양 볼이 능금처럼 붉어졌다.

"말할 수 없어요, 누구에게도.

설사 내 마음 속에 있는 그가 물어 볼지라도 가르쳐 주지 않을 거예요."

이어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가느다란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녀개다운 행동이었다.

술을 마시고도 여전히 부끄러워 노래를 부르지 못한 채,

섬섬옥수를 들어 옷자락을 만질 뿐입니다.

촛불은 꽃잎처럼 흔들리며 마음 속의 그윽한 정을 나 대신 이야기해 주고,

술은 억제할 수 없는 그리움을 느끼게 합니다.

내 마음은 기쁨과 쓸쓸함으로 뒤엉키고,

때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때로는 근심에 아미를 찌푸리기도 합니다.

함께 있는 날은 적고 헤어져 있을 때가 많군요.

올 봄이 다시 지나가면 나의 시름은 어이할까요?

 이 때 돌연, 광소(狂笑)가 들려 왔다.

"크하하하… 이 년놈들이 겨우 여기에 와 있군."

다음 순간,

바람을 가르는 음향과 함께 황금빛 이리 털가죽을 뒤집어쓴 괴인이 바닥에서 치솟듯 눈앞에 나타났다.

냉한웅은 크게 당황했다.

'황금혈랑(黃金血狼)!

그렇다면 파천혈랑교주가 틀림없다.

저 자가 이토록 가까이 접근하도록 눈치채지 못하다니….'

의외로 월녀개는 침착했다.

"당신이 파천혈랑교주인가요? 정말 놀라운 신법과 추격술을 지녔군요."

"본 교주의 혈랑백변신법(血狼百變身法)은 천하제일이지.

그리고 혈랑공(血狼功)은 사흘이 지난 후에도 남은 냄새를 찾아 낼 수 있다."

황금혈랑은 흐뭇한 듯 음성이 부드러워졌다.

하나, 반대로 월녀개는 아미를 잔뜩 찌푸리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여기까지 우릴 따라온 이유가 겨우 그 시시껄렁한 재간을 자랑하기 위해선가요?"

희롱을 당한 황금혈랑의 두 눈동자가 횃불처럼 타올랐다.

"죽기를 재촉하는구나. 그렇다면 소원을 들어 주…."

쌍장을 치켜올리던 그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월녀개의 묘한 시선이 자신의 어깨 너머로 향한 것을 발견해서였다.

"왜 이제들 오는 거예욧!"

그녀의 입에서 기쁨 어린 외침이 터져 나온 순간, 황금혈랑의 신형이 빙글 돌아섰다.

참으로 재빠른 대응자세였으나….

동시에 월녀개는 신형을 날려 좌측으로 흐르는 육칠 장 가량의 비교적 좁은 수로를 넘었다.

휘익-!

그녀는 젖먹던 힘까지 다하여 경공을 전개한 것이다.

하지만 황금혈랑이 누구인가?

"죽일 년!"

그 자세에서 황금혈랑의 신형이 무섭게 튀어올랐다.

마치 공이 튀어오르듯 탄력 있는 동작이었다.

"하늘도 쪼갠다는 파천(破天)의 장법이다!"

황금혈랑의 소매가 떨쳐지는 순간, 노도와도 같은 잠력이 그들에게 휘몰아쳐 왔다.

냉한웅은 내심 대경하며 소리쳤다.

"격중당하면 끝장이다."

월녀개는 이를 악물고 벽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죽기를 작정한 사람 마냥.

"꼭 잡아요!"

그녀는 뾰족하게 외치며 두 발로 벽면을 박차고 반대편으로 퉁겨져 날아갔다.

그녀의 임기응변은 신속하면서도 절묘했다.

탄력을 이용해 신법에 속도를 더한 것이다.

하나, 이는 그녀의 착각이었다.

"아아악…!"

그녀가 땅바닥이라 생각해 디딘 곳은 깊은 어둠뿐이었다.

갱(坑).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그들의 몸은 계속 빠져들었다. 

이 때 황금혈랑의 분노에 찬 외침이 동굴 내부에 울려 퍼졌다.

"기왕 죽을 목숨이면 본좌의 손에나 맡길 것이지!

사대혈랑들의 복수를 못하다니, 참으로 애석하다!"

월녀개와 냉한웅의 몸은 한 덩어리가 되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위위잉-!

차고 습한 바람이 그들의 귀와 볼을 스치며 치솟는 듯 느껴지는 가운데, 월녀개가 입술을 달싹였다.

"어째서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요?"

"마음의 고통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지.

죽음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일 수도 있으니까."

"그는 월녀개를 여자로 취급조차 안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나쁘게 생각하려 해도 보기 싫기는커녕 더욱 좋아만지니… 어쩌면 좋죠?"

"……."

소걸군은 죽음에 임박해서도 자기만을 떠올리는 그녀에게 뭐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월녀개는 가슴 속의 모든 것을 토해 내듯 외쳤다.

"그는 소걸군이에요! 미소가 만월(滿月)과도 같은…."

"……."

"너무도 황홀하였죠.

월녀개가 꿈에 그리던 달님이 곁에 있는데도 손을 내밀어 붙들지도 못하고… 으흑흑……!"

그녀의 음성은 흐느낌으로 변하였다.

떨어지는 속도가 더욱 빠르게 느껴진 냉한웅이 다급하게 외쳤다.

"바닥이 가까워진 모양이니 본존의 몸을 놓아라.

먼저 착지해 떨어지는 몸을 받아 들면 우리 둘 다 충격이 훨씬 덜할 것이다."

하나, 월녀개는 쓴 미소를 흘렸다.

"이미 시험해 봤지만 진기가 모아지지 않아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달님의 미소를 간직하는 것뿐이에요."

"본존은 네게 녹엽영령수(綠葉英靈水)를 먹였다. 상처가 치료되었음을 확인하였는데, 어찌…?"

"……."

월녀개가 대답을 않자, 냉한웅은 등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설마, 본존을 죽음의 길동무로 삼으려는 건 아니겠지?"

월녀개는 아예 두 눈마저 감아 버리며 일언반구도 없었다.

십오 장… 십 장… 오 장….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

냉한웅의 입에서 폭갈이 튀어나왔다.

"수미단열(須彌斷熱)-!"

그는 민첩하게 왼팔로 월녀개의 허리를 껴안는 동시에, 바닥을 향해 우장(右掌)을 내갈겼다.

항마수미신장(降魔須彌神掌) 중 네 번째 초식.

하나, 몇 번째건 별 상관이 없었다.

반탄력만을 얻기 위함이었으니….

펑-!

바닥에서 굉음이 일며 크고 작은 돌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았다.

둘레가 칠팔 장 정도 될 듯한 큰 웅덩이가 그 자리에 생겨날 만큼의 엄청난 위력.

그 여파로 인해 냉한웅의 신형이 일순 허공에 머물렀다.

찰나간이었으나 냉한웅이 대나이신법(大羅理身法)을 전개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듯 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휴, 적시에 행공(行功)이 끝났기 망정이지…."

불과 일 장의 거리를 남긴 아슬아슬한 순간으로,

만약 그대로 추락했더라면 천참만륙의 분실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냉한웅은 울화가 치밀어 월녀개의 뺨을 후려치려 했다.

"미친 짓을 해도 정도가 있지… 어찌 남의 목숨을 가지고… 어?"

하나, 치켜든 손바닥은 허공에 박힌 듯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허리를 껴안은 팔을 푼 순간, 월녀개의 몸이 무너지듯 스르르 쓰러져 버리는 게 아닌가?

냉한웅은 다시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살펴보았다.

미간 사이에 붉은 기운이 머물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는 불귀해 천동비동에서 영령천의(靈靈天醫)가 남긴

천의신술(天醫神術)을 읽은 터라 단박에 증상을 알아보았다.

'거미의 독이로군. 이 동굴 안에는 독지주(毒蜘蛛)가 많이 있으니….'

그는 와락 월녀개에게 달려들어 의복을 벗겼다.

살풋 드러난 고의(袴衣).

그것은 검게 색이 바래고 누덕누덕 기운 겉옷과 너무도 판이하였다.

기운 곳 한 군데 없이 깨끗한 비단(緋緞)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향주머니를 달아 꽃향기까지 풍기고 있었다.

개방 방주의 적전제자요, 여인이라 하나 거지의 신분으론 분에 넘치게 호사스런 고의였다.

냉한웅은 고의만을 남기고 몽땅 벗겼다.

아, 살결…!

이 또한 냉한웅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백설(白雪)처럼 희었으며, 손끝에 와 닿는 감촉은 비단보다 더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냉한웅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어둠 속, 그의 두 눈동자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이토록 아름다운 몸을 낡고 더러운 옷 속에 감추고 있었다니너무도 애석한 일이다.'

비단 옷을 아끼질 마오.

차라리 그대 청춘을 아끼시오.

활짝 핀 꽃 꺾고프면 재빨리 꺾어 버리시오.

저물어 꽃 지면 빈 가지만 남는다오.

마음 속으로부터 이런 속삭임이 들려 오는 듯했다.

그는 단전 아래로부터 치미는 열류를 억제하며 월녀개의 나신을 훑었다.

일순, 미세한 움직임이 발견되었다.

굵은 모래알만한 독지주였다.

붉은빛을 띠고 있는 거미가 재빨리 그녀 가슴의 두 봉우리 사이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어찌 냉한웅의 손을 벗어날 것인가?

"미물 따위가 감히 항아(姮娥) 같은 월녀개를…!"

손톱으로 눌러 터뜨려 죽인 후에도 분이 안 풀린 냉한웅은

거미 껍질을 발로 비벼 흔적조차 없이 만들었다.

젖가슴 주변을 유의하여 살핀 냉한웅은 곧 작은 바늘 구멍만한 여러 개의 상처를 발견해 냈다.

그는 상처 부위에 손바닥을 대 독을 빨아들인 후,

다시 녹엽영령수(綠葉英靈水) 한 방울을 입 안에 흘려 넣어 주었다.

'월녀개가 곧 정신을 차릴 터이니, 할 수 없군.'

냉한웅은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옷을 입혀 주었다.

목전의 사태를 해결한 그는 여유작작, 지하갱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넓이는 십여 장에 달했으며, 주위 사방은 꽉 막혀 있었다.

한쪽에선 폭포와 같은 물줄기가 떨어져 내리고,

그 외 벽면(壁面)은 도끼로 자른 듯 가파르기 그지없었다.

'큰일이다. 우리가 떨어진 시각으로 미루어 오백 장이 넘을 듯싶은데… 더구나 월녀개까지 있으니….'

이 때, 등 뒤에서 월녀개의 음성이 들려 왔다.

"무엇을 찾고 있어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녀를 본 냉한웅은 일시 근심을 잊었다.

"깨어났군. 너는 정말 속 썩이는 계집이야."

"어찌 된 건지 설명부터 해 줘요. 지금쯤이면 우리는 저승에 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귀신이 된 것은 아닌 듯싶군요."

그녀의 여유에 냉한웅은 어이가 없었다.

"다행히 때맞춰 운기요상(運氣療傷)을 끝낼 수 있었다.

리고 네가 공력을 모을 수 없었던 이유는, 독지주에게 물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월녀개는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 자세를 취했다.

"정말… 진기가 원활히 돌아가네요? 고통도 전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해진 것 같아요."

그녀의 기뻐하는 모습을 본 냉한웅은 퉁명스럽게 소리를 내뱉었다.

"녹엽영청수를 세 방울이나 먹었으니, 공력이 반 갑자 이상 늘었을 게다."

순간, 월녀개의 안색이 변했다.

"녹엽영청수… 그건 만금을 준다 해도 구하기 힘든 천고 영약인데…?"

냉한웅은 그녀의 의혹 어린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게 되었다. 사방이 막혔으니, 어디로 나간단 말인가."

그제서야 월녀개도 움찔 놀라 두리번거렸다.

월녀개는 꼼꼼하게 살폈다.

마치 보물 찾기라도 하는 듯 구석구석을 더듬던 그녀가 외쳤다.

"여기 뭔가가 있어요!"

그녀의 손끝이 닿은 곳은 바닥에서 다섯 치쯤 위에 위치한 석벽 귀퉁이로,

인공(人工)에 의해 깎여진 흔적이 역력하였다.

냉한웅은 소맷자락을 떨쳐 그 주변에 듬성듬성 난 이끼들을 모조리 쓸어 내렸다.

그러자 금강지력에 의해 새겨진 글자와 작고 네모진 구멍이 드러났다.

<운몽(雲夢)과 인연(因緣)을 원하는 자, 천패옥갑(天覇玉匣)을 찾으라.>

기이한 문구(文句)였다.

찰나, 냉한웅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구멍과 옥갑(玉匣)!'

수중(水中)에서 주워 넣었던 일화(一花) 설하공주(雪霞公主)의 옥갑과 그 크기가 맞을 듯싶었다.

냉한웅은 품안에서 그것을 꺼내 구멍에 대 보았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딱 들어맞음을 확인한 그가 옥갑을 안쪽으로 들이민 순간.

크르르릉-!

전면 석벽이 기관이 작동되는 음향과 함께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어 일부가 벌어져 장정 한 사람의 몸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구멍을 드러냈다.

실로 절묘한 장치였다.

냉한웅이 망설임 없이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월녀개도 조심스레 뒤따라 걸었다.

다음 순간, 이들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앗!"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