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2장 냉월마소(冷月魔笑)

오늘의 쉼터 2016. 5. 31. 11:49

제2장 냉월마소(冷月魔笑)


 


헐레벌떡 수림 속에 뛰어든 냉한웅의 몸이 순간, 한 줄기 바람으로 변해 날았다.


풀잎을 스치고 난다는 초상비(草上飛)보다 빠르고,


눈(雪)을 밟아도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다는 답설무흔(踏雪無痕)보다도 가벼운 절세의 경공이었다.


천축(天竺) 밀교(密敎)의 비전신법인 대나이신법(大羅理身法)의 오묘함을 달리 무슨 말로 표현하랴.


한 모금의 진기(眞氣)로 구유명부탑 입구까지 몸을 날린 그는 지체 않고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부는 기이하게도 향긋한 내음이 가득했고, 여기저기 천리화통(千里火筒)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냉한웅이 이층으로 오르는 첫 계단에 발을 딛었을 때였다.


끼익-!


쇠붙이가 마찰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양쪽 벽면이 갈라지는게 아닌가?


동시에 바늘처럼 가는 무수한 침들이 소나기와 같이 폭사되었다.


순간, 냉한웅은 꼿꼿이 선 자세 그대로 몸을 날렸다.


최상승 경공인 능공허도(凌空虛渡)와 같아 보이지만, 실은 달랐다.


능공허도 신법은 허리를 사용하지 않고도 날 수 있지만, 직선으로 쏘아져 오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또한 대나이신법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덜컹-!


이번에는 천장이 뒤집어지며 활짝 펼쳐진 쇠그물이 머리 위를 덮쳤다.


독침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에 설치된 이것을 무슨 수로 피할 것인가?


하지만 냉한웅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혈사잔음강(血邪殘陰 )-!"


사극염라경(邪極閻羅經)에 수록된 쾌속절륜한 기검술(氣劍術)이었다.


촤르르르르-!


그의 두 손은 천고의 보검(寶劍)인 양 쇠그물을 양분(兩分)시켜 버린 후, 빙글 신형을 회전시키며 내려섰다.


그러나 함정은 끝이 없었다.


폭삭-!


바닥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지하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기관지학(機關之學).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셈인가?


냉한웅의 몸은 전혀 무게를 지니지 않은 양 허공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어 그의 신형이 이동을 시작했다.


한 마리 창룡(蒼龍)인 양 허공을 헤엄치며 이층으로 날아가는 냉한웅의 얼굴에 즐거운 기색이 감돌았다.


그렇지만 대나이신법의 오묘함을 만끽하는 데서 온 즐거움이 아니었다.


'천존비동의 천문고(天文庫)에서 읽은 기관건축총해가 이토록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무림에서도 학문에 대한 지식이 무공 이상으로 필요하군.'


이층에 발을 디딘 순간, 냉한웅은 오싹 몸을 떨었다.


마치 만년빙동(萬年氷洞)에서 불어 오는 듯한 냉기가 내부를 꽉 채우고 있었다.


'구유명부탑은 지옥십팔계(地獄十八階)를 본따서 만든 곳이로구나.


일층이 도산지옥(刀山地獄)에 해당하고, 여기는 한빙지옥(寒氷地獄)….'


그는 즉각 사극무형강(邪極無形 )을 펼쳐 전신에 투색투명한 강기(鋼氣)의 막을 둘렀다.


십이 성(成) 연성하려면 임독(任督) 양맥(陽脈)의 타통은 물론


사 갑자(甲子)를 상회하는 공력이 필요한 이 절학엔 한 올 실낱 같은 냉기조차 침투하지 못했다.


냉한웅은 유유히 삼층으로 오르며 중얼거렸다.


"한빙지옥 다음은 열화(熱火地獄)이겠지? 얼마나 뜨겁게 만들었는지 기대되는걸?"


짐작대로 삼층은 쇠도 녹여 버릴 듯한 열기가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냉한웅은 실망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겨우 오 성(成)의 사극무형강으로 호신했는데도 뜨거움을 느낄 수 없다니…


나중에 한 수 지도해 주어야겠군."


그는 열기를 뿜어 내는 화구(火口)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살펴본 후, 사층으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흑암(黑暗)이 가로막았다.


"여기는 암흑지옥(暗黑地獄)이로군."


순간, 냉한웅의 두 눈에 갈무리되었던 신광이 폭사됐다.


무림에서 행세 깨나 하는 고수들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광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광채!


이 때 냉한웅은 미약하게 들려 오는 기관음(機關音)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았다.


어느 새 양쪽 벽이 그의 일 장 거리 안까지 접근해 와 있었다.


웅우웅……!


속도는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하나, 오층으로 오르는 통로와 지나온 삼층 통로의 입구가 두께를


알 수 없는 철판(鐵板)으로 막혀져 있어 달리 빠져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으하하하… 꽤나 재미있는 장치야."


냉한웅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회전시켰다.


동시에 그의 쌍장(雙掌)으로부터 핏빛 기류가 노도처럼 뿜어져 나와 전후좌우로 부딪쳐 갔다.


"참륙혈마장(斬戮血魔掌)-!"


콰쾅- 퍼펑-!


공력 실린 외침과 양쪽 석벽 및 통로를 가로막은 철문들이 산산조각 났다.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뒤섞여 그 음향이란 천지가 개벽하는 듯하였다.


돌가루가 비산하여 밤안개인 양 흑암 속을 헤엄쳐 다녔다.


하나 웬일인지 냉한웅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게 아니야!"


이어, 그의 신형이 화살처럼 허공을 꿰뚫었다.


하지만 위쪽이 아니라 아래쪽이었다.


구유명부탑 밖으로 뛰쳐나온 냉한웅은 탑의 후면으로 질주하였다.


그는 문득 사층 암흑지옥에서 들었던 기관음(機關音)이 멀리서 들려 온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또한 그것이 막힌 통로를 열 때 내는 음향이란 걸 알아차린 것이다.


다시 말해 반대편 통로에서 기관이 작동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니,


상대가 뒷문을 이용해 빠져 나가려는 게 아니고 뭔가?


아니나 다를까!


냉한웅은 곧 다섯 명의 노소(老少)가 뒷문을 열고 나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일순, 냉한웅의 두 눈에 칼날 같은 살기가 번뜩였다.


노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태검장의 네 제자들만은 그의 눈에 흙이 들어간다 해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냉한웅은 냉소만 흘리며 지켜볼 뿐이었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연무장의 격전(激戰)은 혈전(血戰)으로 변해 있었다.


창차창창-!


"으아악……!"


금속성과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어우러진 가운데,


새로운 인물들이 마구 군웅들을 수세에 몰아넣었다.


그들은 백골 가면이 아닌 진짜 백골을 뒤집어쓰고 외문병기들을 사용했는데,


하나같이 무공이 상당하였다.


천중사기(天中四奇)…


태검장주 팽소환, 일월문주 하웅봉, 개방방주 철지영개, 중원일괴 공문건과


각 파의 명숙들만이 간신히 평수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나머지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격전을 치르는 광경을 남궁진악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사형, 저 고루인( 賜人)들이 누군지 아세요?"


무공이 워낙 쳐져 끼여들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팽지연이 묻자, 그는 음흉한 미소를 띄웠다.


"묘강 지역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고루대교( 賜大敎)의 무사들이지."


"고루대교와 중원의 구파일방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강한가요?"


남궁진악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중원의 그 어떤 문파도 고루대교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저길 봐라! 천수장주조차도 겨우 고루인 한 명에게 몰리고 있지 않느냐?"


팽지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고루인들은 고루대교에서의 위치가 어느 정도일까요?"


"고루대교에서의 신분은 금고루(金高賜), 은고루(銀高賜), 동고루(銅高賜)로 나누어져 있고…


저들은 중간 지위 정도인 은고루들이다."


은고루들이 중원의 절정고수들과 막상막하라니… 


팽지연은 새삼 놀라며 의혹의 기색을 떠올렸다.


"사형은 어찌 그리 고루대교의 내막을 소상히도 알고 있는 거죠?"


남궁진악은 자랑스레 웃었다. 


웃음은 입꼬리에서 휘날렸으나, 어딘가 음산함이 배어 있었다.


"이 사형도 고루대교에 몸담기로 했다.


머지않아 중원무림은 고루대교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니, 그 땐… 으하하하……!"


이 무슨 해괴한 대답인가?


팽지연은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 마냥 한동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충격이었다.


그것도 아주 엄청난 충격.


그는 팽지연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자, 얼굴에 음산한 살기를 띠었다.


"본 공자의 웅지(雄志)를 가로막는 자는 그 누구라도 가차없이 처단하리라."


남궁진악은 순간적으로 변해 있었다.


아주 더럽게.


팽지연은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혼례식도…?"


남궁진악은 빈정대듯 말했다.


"이제는 알아봤자 소용 없다. 천수장, 일월문, 태검장은 오늘로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남궁진악은 태검장이란 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런 짐승만도 못한… 날 사랑한다는 것 역시 거짓이었지?"


팽지연이 설움과 분노를 못 이겨 주르륵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남궁진악은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사랑? 맞아, 사랑했었지. 그러는 넌 어떠냐?


지금쯤 백골로 변했을, 못나고 멍청한 놈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지?"


팽지연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무슨 억지 소릴…?"


남궁진악의 눈에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냉한웅… 그 놈이 부상을 당했을 때,


네가 몰래 약실의 귀중한 약초들을 빼내어 치료해 준 것을 모르고 있는 줄 아느냐?"


"……!"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그녀만의 비밀!


꿈(夢).


언제부터인가 팽지연은 기이하게도 잠들 적마다 한 사내를 만났다.


평범한 용모에 병약한 소년인 그는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동정심을 지니고 있던 팽지연은 측은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하나 손을 내밀어 잡으려 하면 순간,


그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녀는 애타게 '한웅'이란 이름을 외쳐 부르다 깨어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보았다.


그의 얼굴에 스쳐 가는 신비로운 미소를.


아, 이토록 가슴을 녹이는 미소를 어찌 인간이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이후, 팽지연의 가슴에선 동정심이 사라지고 대신 야릇한 감정이 자리를 잡았다.


꿈 속의 그녀는 더욱 열정적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움켜쥔 채 깨어나 허전한 가슴을 부여안았다.


꿈에서 깨어날 수는 있지만, 냉한웅의 마소(魔笑)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팽지연은 이것이 자신의 운명(運命)이라면 순응하리라 마음먹기도 했으나,


현실의 냉한웅은 너무도 달랐다.


이것이 그녀를 남 모르는 괴로움에 빠뜨렸고,


속마음과는 반대로 냉한웅을 괴롭힌 원인이 되었으니….


팽지연은 앙칼지게 소리치며 우장(右掌)을 내뻗었다.


"독사(毒蛇) 같은 놈, 죽어라!"


하지만 그녀의 오른팔은 반쯤 내밀어진 상태에서 굳은 듯 멈춰졌다.


그녀의 등 뒤에서 능글맞은 음성이 들려 왔다.


"사형, 여기서 사랑 싸움만 하고 계실 거요?"


월아검 악빈이었다.


팽지연은 자신의 마혈(麻穴)을 제압한 자가 그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넷째 사형이…?"


"왜 아니겠느냐? 우리 모두 대사형과 뜻을 함께 하기로 했으니, 너도 얌전히 따르거라."


이어 나머지 세 명의 사형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팽지연은 얼이 빠진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친은 그들이 코흘리개적부터 가르침을 베풀었으며,


그들은 자신을 친동생처럼 다정하게 보살펴 주지 않았던가?


이 때, 기괴한 음성이 팽지연의 고막을 울렸다.


"이 계집이 태검신노의 여식이냐?"


흑의경장 차림의 노인, 천수장의 서열 이 위인 구유명부탑주 신산묘인이었다.


남궁진악은 그에게 공손히 읍(揖)을 하여 경의를 표했다.


"이번 공로로 중임(重任)을 맡게 되실 것이니, 신산묘인께 삼가 축하 드립니다."


하지만 신산묘인의 안색은 별로 밝지가 않았다.


"지금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다."


남궁진악은 고루인들이 공세를 펼치는 격전장을 흘낏 눈짓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마음에 걸리신단 말씀입니까?"


그러나 신산묘인의 시선은 구유명부탑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일말의 불안감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문득 독백을 하듯 입술이 달삭였다.


"천마존!"


경외와 공포의 상징.


신산묘인은 입술을 부르르 떨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순간, 남궁진악의 표정에 의혹의 그늘이 덮였다.


"설마… 천마존이 생존해 있단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글쎄……!"


신산묘인은 불안한 신색을 감추지 못하고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금고루(金高賜)는 어디 계신가?"


신산묘인이 황급히 얼버무리자, 남궁진악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보통 영악한 남궁진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추호도 내색 않고 서쪽을 손가락질했다.


"저기… 계십니다."


격전장에서 오십여 장 가량 떨어진 곳에 금광 번뜩이는 백골로 얼굴을 가린 고루인이 있었다.


그는 세 명의 은고루와 십여 명의 백골방 무사들에 에워싸여 있었는데,


특별히 시선을 끄는 인물은 금의화복(錦衣華服)을 입은 풍채 좋은 노인이었다.


백골 가면을 쓰지 않은 그는 금고루 곁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신산묘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백골마제도 방관만 하는군.


노부가 반평생을 몸담아 왔던 천수장의 세력이 겨우 이 정도였단 말인가?"


이 때 돌연, 화살처럼 한 줄기 흑영(黑影)이 땅에 내리꽂히며 냉소를 터뜨렸다.


"크흐흐흐… 천수장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쉬우냐?"


신산묘인은 생전 이토록 빠른 신법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혼비백산하여 뒤로 몸을 날리며 외쳤다.


"넌 누구냐?"


흑의중년인이었다.


냉풍이 감도는 듯한 싸늘한 인상에 삭막하다 
못해 무심하기까지 느껴지는 눈빛.


그는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매우 건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배신자는 죽는다. 그것이 천수장이건, 태검장이건 간에…."


"……."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신산묘인과 다섯 명의 청년들은 몸을 떨었다.


하지만 팽지연의 가슴은 두방망이질치고 있었다.


'저 눈빛… 어찌 저리도 닮았을까!'


냉한웅이 백 번을 죽었다 되살아나도 흑의중년인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마냥 흥분되는 여심(女心)을 어찌하랴.


냉한웅의 무덤을 발견한다면 파헤쳐 백골을 짓이겨 버릴 만큼 증오해 온 남궁진악,


그도 비슷한 느낌을 털어놓았다.


"당신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자와 너무도 흡사하오.


리고 그 자는 지금 백골로 변했소이다."


속된 말로 '까불면 죽인다'는 뜻을 명문의 제자답게 격식을 갖춰 드러낸 것이다.


순간, 흑의중년인의 오른쪽 소매가 떨쳐졌다.


샥-!


한 줄기 검광이 미묘한 음향을 일으켰다.


뭔가가 머리 아래로 떨어지자, 내려다본 남궁진악이 혼비백산했다.


"헉! 머리에 썼던 사건(絲巾)이…?"


혈살검법(血殺劍法) 중의 혈섬(血閃).


중원제일의 쾌검초(快劍招)라 불리울 만큼 빠르기 그지없는 이 초식은


멀쩡히 서 있는 신산묘인의 얼굴마저 사색(死色)으로 변하게 했다.


"이…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산묘인이 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을까?


혈섬이 지닌 위력보다 더 큰 두려움을 그에게 안겨 준 이유를 안다면 의문도 즉시 풀리리라.


당사자인 남궁진악은 오금이 저려 두 다리가 땅에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막내 사제인 서성구가 덮치며 검을 휘둘렀다.


"풍운유혼(風雲流魂)-!"


이에 동조하여 악빈과 장광우, 천우상도


태검장의 독문절예인 풍운칠절검법(風雲七絶劍法)으로 펼쳐 공세를 가했다.


쇄액- 슝슝슝-!


장광우는 오른손으로 검법을 펼치는 동시에,


왼쪽 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십여 개의 비침(飛針)까지 날렸다.


삼 장(丈)도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으니,


눈 깜짝할 검기와 비침들이 흑의중년인의 요혈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남궁진악과 신산묘인의 얼굴에 희색(喜色)이 떠올랐다.


하나, 그들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유심히 살폈다.


장광우의 암기술은 쾌속 정확하기 그지없어, 비침들이 한 개도 벗어남 없이 요혈에 가 박혔다.


뿐만 아니라 네 자루의  검끝 역시 왼쪽 가슴 부위인 심유혈(心兪穴)과 기해혈(氣海穴),


명문혈(命門穴), 선기혈(璇璣穴)에 가 닿아 있었다.


그러나 흑의중년인이 냉소를 머금은 채 꽂꽂이 서 있는데 비해, 
네 명의 청년은 비지땀을 뚝뚝 흘리며 안간힘을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력을 끌어올려 안력을 돋군 남궁진악과 신산묘인의 거의 동시에 경악의 외침을 토해 냈다.


"아니? 저럴 수가?"


"으음, 역시……!"


하나, 의미는 각기 달랐다.


남궁진악의 외침이 비명에 가깝다면, 신산묘인의 외침은 신음에 더 가까웠다.


네 자루 검과 비침(飛針)들이 흑의중년인의 전신 한 치 앞에서


형의 벽에 가로막힌 듯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공에 뜬 채 머물고 있었으니….


"잔인귀염공(殘忍鬼閻功)! 최고의 경지까지 연성한 듯싶구나."


신산묘인의 중얼거림은 남궁진악을 또 다시 혼비백산하게 했다.


"그럼 저 자가 잔인사황(殘忍邪皇)의 전인(傳人)이란 말씀입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으련만…."


힘없이 고개를 젓는 신산묘인의 얼굴은 완전히 넋 나간 표정이었다.


이 때, 흑의중년인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멍청이의 손에 죽는 놈들이야말로 진짜 멍청이가 아니겠느냐?"


일순, 네 청년들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멍청……?"


"그게… 무슨 뜻이냐?"


다른 사형제들이  영문을 몰라할 때, 장광우가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네놈은… 한웅……!"


냉한웅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전음이 아니었다.


"하하하하… 신기수사(神技秀士)답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지만 그리 뛰어난 편은 못 되는 것 같군."


그가 등 뒤를 보란 듯 눈짓했다.


냉한웅의 시선을 따라 뒤돌아본 네 청년은 절망과 분노 섞인 외침을 토해 냈다.


"대사형이 우릴 버리고 달아나다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하자고 혈주(血酒)까지 나눠 마시게 하고서는…."


"천하에 가장 비열한 놈!"


냉한웅은 한풍(寒風)이 이는 음성으로 빈정거렸다.


"너무들 분해 마라. 곧 용의 껍질을 뒤집어쓴 독사를 잡아 지옥에 뒤따라 보내 줄 테니까."


천우상이 발악하듯 외쳤다.


"네놈이 냉한웅일 리가 없다. 그 멍청한 놈은 죽었다!"


냉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죽었을지 모르나, 한(恨)만은 생생히 살아 있다."


다음 순간, 그의 오른손에 검광이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츠츠츠츳-!


서른여섯 개(個) 방위를 동시에 노릴 수 있는 혈살(血殺).


살인 초식은 무형의 강기( 氣)에 사로잡혀


꼼짝할 수 없는 네 명의 목을 단 한 줄기 검기로 끊어 버렸다.


"크으윽……!"


"으악!"


선홍색 핏줄기와 비명이 뿜어져 나온 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몸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풍운협사(風雲俠士) 천우상(千雨商),


월아검(月我劍) 악빈(岳彬),


신기수사(神技秀士) 장광우(張光優),


독보절객(獨步絶客) 서성구(徐成九).


냉한웅은 목에서 떨어져 나간 네 개의 머리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우릴 이렇게 만든 걸까? 너희들이냐? 아니면 나란 말이냐?"


그 음성엔 왠지 애절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흐릿한 눈빛으로 네 구의 시체를 바라보던 냉한웅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는 곳은 고루대교의 금고루와 백골방의 방주, 백골마제가 자리잡은 동편이었다.


"멈춰라!"


세 명의 백골인이 앞을 가로막자, 냉한웅의 눈은 살기로 번뜩였다.


"혈살(血殺)-!"


일순 검기가 천하를 산산조각낼 듯 삼십육 방위를 모조리 휩쓸었다.


파팟-!


"크으악……!"


예리하게 공기를 가르는 음향과 세 마디 비명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살기가 한껏 치솟은 냉한웅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격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백골인이건 고루인이건, 눈에 띄는 대로 마구 살수를 펼쳤다.


"혈섬(血閃)- 혈살(血殺)-!"


그의 몸과 검은 전광석화와도 같이 장내를 휘저었으며,


처절한 비명 소리가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지옥으로 변했다.


목 위의 얹혀 있어야 할 것이나,


몸통에 붙어 있어야 할 것들을 잃은 시체들이 쏟아 내는 피가


땅바닥을 질퍽하게 할 정도였으니


하나, 적아(敵我)가 마구 뒤얽혀 있어 그도 마음놓고 살수를 쓸 형편은 못 됐다.


이 때, 여인의 뾰족한 음성이 튀어 나왔다.


"어맛!"


아직도 소녀 티가 가시지 않은 강북월녀 하미미였다.


그녀는 현숙하며 고귀한 모습이 난초(蘭草)를 연상하게 하는 천수공녀 유화영과 함께


한 명의 은고루를 상대하고 있었다.


은고루는 길이가 다섯 자에 달하는 사두련(蛇荳鍊)을 휘둘러 그녀들을 계속 궁지에 몰아넣었다.


우윙윙……!


쇠사슬은 영사(靈蛇)인 양 그녀들이 뿌리는 검화(劍花)를 희롱하다 슬쩍 옷자락을 스쳐 지나가곤 했다.


은고루는 공세를 펼치며 음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흐… 이번엔 몽실몽실한 젖가슴을 조심하거라."


유하영과 하미미는 얼굴을 붉히며 마주 욕설을 퍼부어 댔다.


주둥이로 겨루는 싸움이라면 천하에 고수 아닌 계집이 없지 않은가?


"강호의 도의도 모르는 소인잡배!"


"하오문의 무리도 너보다는 백 배 점잖을 게다."


순간 그녀들의 검세가 느슨해지자, 은고루는 신속하게 팔을 뻗었다.


"탈혼련(奪魂鍊)-!"


파라라락-!


쇠사슬이 두 자루의 검을 휘어감아 허공으로 퉁겨 올렸다.


이어 당황한 나머지, 몸이 굳어 버린 하미미의 유근혈(乳根穴)을 노리고 짓쳐 들었다.


"악!"


하미미는 비명을 토해 내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젖가슴이 쇠사슬에 짓뭉개질 찰나, 어디선가 낭랑한 외침이 들려 왔다.


"혈참(血斬)-!"


일섬(一閃)의 검기가 허공에 예리하기 짝이 없는 마찰음과 불꽃을 일으켰다.


쨍-!


"크윽!"


동시에 은고루가 가슴에서 짙붉은 혈전(血箭)을 뿜으며 뒤로 넘어졌다.


검기는 만년한철(萬年寒鐵)로 주조한 쇠사슬을 끊고


그 여세로 은고루의 심장마저 관통해 버린 것이다.


아, 검강(劍 )!


이기어검술(以氣御劍術)과 더불어 검의 최고 경지라는


이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신공을 대체 누가 시전했단 말인가?


하지만 두리번거릴 필요조차 없었다.


땅 속에서 불쑥 솟아난 듯 그녀들의 눈앞에 흑의중년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지옥의 문턱에서 벗어난 하미미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흑의중년인을 올려다보았다.


먼저 심신을 가다듬은 유하영이 포권지례를 취했다.


"구명지덕(救命之德)을 베푸신 대협(大俠)께 감사드립니다.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


흑의중년인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들을 흘낏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하미미는 꿈에서 덜 깬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너무도 다르군. 무공도 전혀 모르면서 입만 까진 말라깽이하곤…."


유하영은 그녀의 엉뚱한 소리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누굴 말하는 거지?"


하미미는 콧잔등을 앙증맞게 찡그리며 대꾸했다.


"개방의 거지, 소걸군… 신기묘산(神奇妙算)이라며 으스대다 달아나던 꼴이란… 후훗……!"


유화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순간, 하매가 어째서 전혀 관계도 없는 소걸군을 떠올린 것일까?'


다섯 걸음쯤 옮겼을까?


등 뒤에서 들려 오는 그녀들의 대화가 마음에 걸린 냉한웅은 고개를 돌려 하미미를 응시했다.


"……."


하미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은 어째서 절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공연히 얼굴이 달아오르잖아요."


냉한웅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피식 실소를 흘렸다.


"낭자는 세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구려."


예상외의 말에 하미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의 장점이 뭐죠?"


냉한웅은 그녀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삼 년 전, 부영산(浮影山)에서의 괘씸한 행동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음성이 싸늘해졌다.


"첫째는 공포를 빨리 잊는 점이오."


하미미는 깜짝 놀랐다.


확실히 자신은 조금 전 은고루에게 죽을 뻔했을 때의 공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그렇네요. 다음 장점은 뭐죠?"


"낭자의 화사한 용모에 어울리는 밝은 성격이오."


성격에다 용모까지 끌어 붙여 칭찬해 주는 이런 말엔 어떤 여인이든 수줍은 듯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하나, 목전의 그녀는 전혀 달랐다.


"전 모르겠는데 남들이 그러데요.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예쁘다고…."


순간, 냉한웅은 너무도 기가 막혀 말이 더 나오질 않았다.


'월녀개보다 한 수 더 뜨는군.


아무리 비꼬아 얘기해도 몽땅 칭찬으로 받아들이니, 정말 환장하겠네.'


하미미는 생글생글 웃어 가며 재촉했다.


"이토록 기분을 줄겁게 해 주다니…


당신은 보기완 달리 성격이 따뜻한 분이군요. 마지막 장점은 뭔가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던가?


냉한웅도 자포자기(自暴自棄)해 전혀 마음에도 없는 칭찬으로 마무리지었다.


"관찰력이오. 낭자는 참으로 명석한 지혜와 안목을 지니고 있소."


사실 이 말은 그녀의 곁에 있는 유하영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었다.


하미미는 솜털구름 위를 마구 뒹구는 듯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대협께선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셨나요?"


호칭까지 변하자, 냉한웅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인상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신비인인 소걸군의 실체를 한눈에 파악한 것으로 미루어 판단한 거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미미는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소걸군이 강호제일의 겁쟁이란 말만은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요.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버텨야 할 사내 대장부가 적의 음성만 듣고도 달아나다니…."


냉한웅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입이 가볍기가 바람보다 더한 계집아!


신분내력도 모르면서 어찌 사람을 함부로 평하려 드느냐?'


일순, 그의 몸이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듯 가볍게 솟구쳐 올랐다.


"낭자에겐 단 하나의 단점이 있소. 그건 자신의 분수를 모른다는 점이오."


하미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땐, 흑의중년의 모습이 허공에서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


그의 태도가 돌변한데 의혹을 품은 하미미는 생각에 잠겼다.


곧 그녀의 표정이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


"이제 보니, 여지껏 날 칭찬한 것이 아니라…."


쌕쌕-!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그녀의 몽실한 젖가슴이 눈에 뜨일 만큼 들쑥날쑥했다.


이 때, 유화영이 가볍게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분은 하매가 너무도 귀여워 장난을 친 걸 거야. 더구나 목숨을 구해 준 은공(恩公)이잖니?"


"치잇, 구명지은을 베풀었다 해도 그는 은고루와 다를 바 없이 무지한 소인배에 불과해요.


인상도 갓 무덤에서 나온 시신처럼 차갑더라니만…."


하미미가 좀처럼 화가 풀리지 않는지 계속 씨근덕거리자, 유화영도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똑같이 닮았네."


"어머, 소매가 그 무시무시하게 생긴 사내를 닮았다고요?"


하미미가 더욱 열을 받아 대들자, 유화영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하매 말고… 신기묘산(神奇妙算) 소걸군!"


유화영, 그녀는 천기령주의 여식답게 안목이 날카로웠지만 오직 느낌이었을 뿐,


연결시킬 만한 증거는 전혀 없었다.


하미미도 흑의중년인의 눈빛을 본 순간, 소걸군을 떠올렸었지 않은가?


그녀는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속마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싸잡아 쫑알거렸다.


"언니 말에는 일리가 있어요. 둘 다 예의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우인(愚人)들이에요."


그래도 화가 풀어지지 않자, 그녀는 만만한 상대를 골라 격전장에 다시 뛰어들었다.


절정고수인 은고루에는 크게 못 미치나, 하미미의 무공도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공이 떨어진다고 판단된 백골인을,


것도 천수장의 위사들과 분전 벌이는 자만을 골라 등 뒤에서 마구 장력을 날려 댔다.


"풍뢰교격(風雷交擊), 직구천문(直邱天門), 석파천경(石破天警)-!"


무림 명가의 여식답게 공력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입으로는 엉뚱하게 검초(劍招)의 이름을 크게 읊어 댔으니…


퍽퍽펑-!


미처 뒤돌아볼 겨를이 없던 백골인들은 우왕좌왕 손발이 어지러워


그녀의 장력에 격상당하지 않으면 상대의 병기에 목숨을 내놓고 말았다.


냉한웅은 금고루 일행의 삼 장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진악은 그를 발견한 순간,


마혈을 제압당한 팽지연을 꽉 끌어안은 채 비실비실 몇 걸음 물러났다.


신산묘인도 몸서리를 치며 금고루에게 속삭였다.


"조심하십시오. 저 자의 무공은 입신조화(入神造化)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누군지 짐작도 하지 않고 그의 내력이 어떠하리라는 것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금고루는 빠꼼히 뚫어진 두 개의 구멍으로 형형한 안광을 폭사했다.


"흥! 본좌는 이미 중원의 무학을 충분히 견식한 터다.


강해 봤자 얼마나 더 강하겠는가?"


그가 묘어(苗語)를 사용하자, 냉한웅도 묘어로 대꾸했다.


"그것은 지난날의 중원무림일 뿐이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본존이 있으니…."


금고루는 상대의 너무도 정확한 발음에 놀라 한어(漢語)를 뱉어 냈다.


"너는 묘족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냉한웅은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너의 한어도 묘족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군. 너는 한족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금고루가 곁의 백골마제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방주, 저 자에 대해 아는 것이 있소?"


백골마제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비슷한 인물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금시초문이외다."


금고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태도로 보아 백골방주인 백골마제도 금고루의 지시에 따르는 신분이 분명했다.


"백골방이라면 중원에서 결코 작지 않은 조직인데, 묘강의 개(犬) 노릇을 하다니… 


네놈은 진짜 백골로 변해야만 정신을 차리겠구나."


냉한웅이 야멸차게 비웃자, 백골마제는 노성을 지르며 일 장을 후려쳤다.


"이런 찢어 죽일 놈!"


그의 장심으로부터 음랭한 기류가 사납게 뿜어졌다.


때를 같이하여 여덟 명의 백골인들도 귀두도를 휘두르며 짓쳐 들었다.


"백골진천하(白骨震天下)-!"


쉬익- 쉭-!


파파파팟-!


장력과 도기(刀氣)가 일으키는 굉음과 그들이 일제히 지르는 기합 소리가 뒤섞여 천지를 뒤흔들었다.


찰나지간, 냉한웅의 눈에서 혈광(血光)이 폭사됐다.


사공(邪功)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것으로 소문난 잔인귀염공(殘忍鬼閻功)!


"크하하하……!"


그는 사기(邪氣)가 물씬 풍기는 광소를 터뜨리며 몸을 바람개비처럼 돌렸다.


우우웅……!


노도와 같은 경력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와 회오리치며,


주변의 모든 것이 그 안에 흡수해 들었다.


"으윽!"


"으아악……!"


장력과 도기, 그리고 백골인들의 목숨마저…


백골팔혼살(白骨八魂殺)이 한순간에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걸레 조각처럼 찢긴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자, 백골마제는 아연실색했다.


"네놈은 누구기에…?"


냉한웅은 다시 담담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본존을 거역하는 자는 죽는다."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음성에 백골마제는 등골이 오싹했다.


"……."


백골마제는 구원해 달라는 눈빛으로 금고루를 바라봤다.


하지만 금고루는 못 본 척 시선을 허공에 두며 중얼거렸다.


"그가 원하는 것이 본좌의 목숨이 아닌데, 목숨 걸고 싸울 필요가 있겠는가?"


백골마제는 흑의중년인보다도 방관만 하는 금고루가 더 이 갈리게 미웠다.


'이 놈은 대체 어느 편이야? 교주께선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자를 보냈을까?'


냉한웅이 천천히 허리에 찬 검을 빼어 들자, 백골마제도 전신의 공력을 쌍장에 모았다.


이를 본 냉한웅은 다시 검을 제자리에 꽂으며 냉소를 흘렸다.


"본존이 어찌 빈손인 자에게 무기를 사용하겠느냐?"


선제공격이 상책이라 생각한 백골마제는 즉각 쌍장을 뒤집었다.


"백골염시강(白骨閻屍 )-!"


순간, 흑기(黑氣)가 코를 짓이기는 듯한 악취를 풍기며 냉한웅을 덮쳤다.


크르르륵-!


음향조차도 먹은 것을 토해 내는 건지, 싸는 건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위력이야 어떻든 간에 세상에서 가장 구역질나는 무공을 꼽으라면 단연 선두일 것이다.


냉한웅도 비스듬히 좌장(左掌)을 뒤집어 유사한 흑기를 뿜어 냈다.


"백골수라빙혼무(白骨修羅氷魂舞)-!"


이 냄새 또한 지독하기가 이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양측의 두 가지 냄새가 뒤섞이자, 그 조화란 오묘의 극치마저 넘어선 듯했다.


"크윽!"


주위의 모든 인물들은 코를 움켜쥐고 도망치듯 멀찌감치 몸을 날렸다.


펑-!


그들은 지축을 가르는 듯 두 줄기 흑기가 충돌하는 굉음을 듣고서야 겨우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으으……!"


백골마제의 혈색 좋던 얼굴이 밀랍처럼 변했고,


입가로부터 선혈이 길다란 홍선(紅線)을 내리긋고 있었다.


또한 쓰러지진 않았으나, 흔들흔들 중심을 잃은 다리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드러내 보였다.


하나, 이 광경을 목격한 중인들은 예측했던 대로라는 듯 추호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냉한웅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시선은 금고루에게 향했다.


"본존을 거역하는 자는 죽음뿐이다."


금고루는 뜻밖이라는 듯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토록 살기(殺氣)를 억제하는 이유가 뭐냐?"


왜 백골마제를 죽이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냉한웅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너는 이렇게 물어야 했다. 살기를 억제할 수 있는 힘이 뭐냐고…."


즉 강한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대답이었다.


일순, 금고루의 전신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놈!"


그는 음성을 낮게 토해 내며 품안에서 두 개의 동환(銅環)을 꺼내 나눠 쥐었다.


쨍-!


합장을 하듯 두 손을 모으자, 동환이 부딪치는 소리가 예리하게 중인들의 고막을 자극했다.


은근히 자신의 공력을 드러내어 상대방을 겁을 주려는 속셈이었다.


'음, 내력이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른 듯싶군.


환음(環音)에 공력을 실어 보내는 솜씨로 미루어,


무학의 깊이도 일문(一門)을 이루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냉한웅은 금고루와 같은 자를 수하로 부리는 고루교주가 어떤 인물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하나, 그에게는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쇄육참(碎肉斬)-!"


금고루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들자 냉한웅은 양 발을 갈 지자 형태로 움직여 미끄러지듯 옆으로 비켜 섰다.


쉬이잉-!


순간, 동환은 방향을 꺾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혈섬(血閃)-!"


중원제일의 쾌검초(快劍招)답게 발검(拔劍)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타타타탕-!


고막을 짓이기는 듯한 파열음과 더불어 불꽃이 일었다.


다음 순간, 세 걸음을 물러선 금고루가 불규칙한 호흡과 음성을 동시에 토해 냈다.


"삼 갑자(甲子)에 달하는 공력을…?"


냉한웅의 표정은 담담했다.


하나, 내심 크게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를 두 걸음이나 물러서게 하다니…


어떤 종류의 신공을 연마했는지 모르겠으나,


강기의  위력이 결코 잔인귀염공(殘忍鬼閻功)에 뒤지지 않는구나.'


이 때, 금고루에 입에서 뜻밖의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너와 같은 고수가 파악되지 않았다니… 그 동안 헛일을 하였군."


그 말은 냉한웅의 뇌리에 섬광처럼 파고들었다.


냉한웅의 입꼬리에 미묘한 웃음이 걸렸다.


"후후후… 지옥야차부(地獄夜叉府)가 고루대교와 한통속인 줄은 몰랐었는데…


가르쳐 주어 고맙다."


"지나치게 넘겨짚었단 생각은 안 드느냐?"


금고루가 음랭한 눈알을 휘번뜩이자, 냉한웅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지옥야차부는 살수(殺手)와 호위인이 있으니


중원무림의 요인(要人)들에 관한 자세한 명부(冥府)도 있겠지. 


본존의 예측은 아직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


그의 자신 있는 대꾸에 금고루는 신음을 흘렸다.


"으음, 그렇게 믿고 있다면 부인해 봐야 소용 없는 일이지.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금고루의 눈에서 폭사하는 살기를 느낀 냉한웅은 피식 비웃음을 베어 물었다.


"죽는다는 것이냐?"


"그렇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과 동시에 금고루의 몸이 동환과 함께 쏘아졌다.


"쇄육삭혼(碎肉削魂)-!"


일순, 냉한웅도 사극무형강을 끌어올리며 검을 열 십자로 그었다.


"잔혼(殘魂)-!"


잔혼도법(殘魂刀法)의 첫 초식.


혈살(血殺)과 같이 서른여섯 개(個) 방위를 동시에 노릴 수 있다.


하나 검(劍)이 베고 가르는데 비해 도(刀)는 찍고 쪼개는 것이었으니,


위맹함에 있어선 단연 앞섰다.


냉한웅은 상대의 공력이 예상외로 높고,


강기 또한 독특한 위력을 지니고 있어 검으로 도법을 사용한 것이다.


차르르릉-!


십이 성의 공력 외에 잠재력까지 동환은 공기를 진동시켜


상대의 정신을 혼미케 하는 묘음(妙音)을 일으켰다.


이와 반대로 냉한의 검은 천둥 번개가 먹구름을 가르는 듯 정신 번쩍 들게 하는 폭음을 내었다.


콰르릉- 쿵-!


현란한 검광(劍光)이 두 개의 동환과 부딪치자, 폭죽이 터지듯 무수한 빛의 파편을 뿌려 댔다.


그 순간의 눈부심이여!


"크윽!"


광채에 휩싸인 두 개의 신형 중 한쪽에서 고통에 찬 비명 소리를 토해 냈다.


금고루, 그는 이번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만 키가 약간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아니, 발목까지 땅 속에 박혀 그렇게 보인 것이다.


입가에 약간의 혈흔이 있을 뿐, 겉보기엔 별로 심한 상처를 입은 듯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기실 오장육부와 전신의 뼈란 뼈는 모두 부수어져 있어,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구해 주기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 건 잔혼… 도법인 듯싶은데……?"


죽음을 맞이한 순간까지도 그는 상대의 무공에 호기심을 보였다.


냉한웅은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는 금고루의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초절하기… 짝이 없는 도법(刀法)을… 평범한 검으로 그토록완벽히 펼치다니… 누구기에……?"


이 때, 냉한웅의 입술이 달싹였다.


"……!"


다음 순간, 금고루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그러나 생명의 불꽃이 꺼지기 직전의 현상만은 아니었다.


그의 눈빛엔 평소 원해 왔던 승부를 했다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


그는 주먹만한 핏덩이와 마지막 외침을 허공에 토해 냈다.


"혈시악살(血屍惡殺)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어 고맙소!"


동시에 중심을 잃은 몸이 무너져 내리듯 쓰러졌다.


일 갑자 전에 중원을 종횡하던 오마(五魔)보다도 한 배분 높은 혈시악살 마간(馬干).


그는 백여 명에 달하는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의 원정을 흡수해


양천욕유혼공(陰陽天慾幽魂功)을 익힌 것이 탄로나 무림의 공분을 샀다.


당시 강호칠기의 추적을 피해 새외를 방황하다 고루대교에 몸을 의탁하였는데,


오늘 하늘처럼 우러러보던 천마존의 화신에게 당하다니…


궁금증을 풀어 준 냉한웅의 처사는 그의 죄과에 비추어 확실히 자비스러운 것이었다.


휘이익-!


한 줄기 날 선 바람이 백골마제의 옷깃을 스쳐 갔다.


냉한웅을 향한 그의 동공은 두려움과 존경, 애원 등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당신은 왜 도망치지 않았소?"


냉한웅은 신산묘인과 남궁진악이 도망치는 것을 못 본 척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좀더 긴 고통을 안겨 주기 위해.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골마제가 무릎을 꿇었다.


"주인으로 모시게 해 주십시오. 


머지않아 흙 속에 묻힐 몸이오나 견마지로(犬馬之勞),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


잠시 침묵을 지킨 냉한웅이 격전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본존을 거역하는 자는 죽소. 


하나 승복하는 자에겐 자비를 베푸니, 어서 수하들에게 손을 멈추도록 명하시오."


"분노가 극에 이른 듯한데, 저들도 우릴 용서해 주려 할까요?"


"천수장주에게 정사마천궁주(正邪魔天宮主)의 명을 받들어 항복한다 전하시오.


그럼 죄과를 묻지 않으리다."


"주인께서 정사마천궁주시옵니까?"


그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문파명에 의혹의 눈빛을 던질 때, 냉한웅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지며 아득한 허공에서 음성만이 들려왔다.


"고금을 막론하고 천하에 본존 외엔 정사마천궁의 주인이 될 수 없으리라."


전설처럼 전해지는 능허이형환위(凌虛移形換位)와 만리육합전성술(萬里六合傳聲術).


이것이 동시에 펼쳐지자, 


백골대제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하며 땅거미가 내려앉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쉬익-!


야조(夜鳥)처럼 천수장 담장을 넘던 냉한웅은


삼십여 장 밖에 풍처럼 달아나는 유복(儒服) 차림의 중년인을 발견했다.


순간, 그의 입가에 살기 어린 냉소가 번졌다.


"금가(金哥)야, 멈춰라!"


쌍비검(雙飛劍) 금운성(金雲星)은 갑자기 눈앞에 피칠을 한 흑의 중년인이 떨어져 내리자,


질겁을 해 몸을 세웠다.


"헉!"


냉한웅은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대화산파(大華山派)의 장로가 죽음이 두려워 홀로 도주하다니…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무척 재미있어들 하겠는걸?"


금운성은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무슨 소리냐? 나는 도망자를 추적해 온 것이다."


"추적이라… 고루인이나 백골인들은 우세한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그들은 아닐 테고?


대체 누가 도망을 쳤단 말인가?"


일순, 금운성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넌 누구길래, 쌍비검에게 시비를 거는 거냐?"


"정사마천궁주(正邪魔天宮主)!"


"흐흐흐… 내 나이 불혹(不惑)을 넘겼지만 정사마천궁은 금시초문이다.


무명지배(武名之輩)가 감히 화산장로의 앞을 가로막다니…
"…."


스르릉-!


그가 야릇한 실소를 머금으며 쌍검을 뽑아 들자, 냉한웅의 전신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본존에게 대항하는 자는 죽는다."


순간, 쌍검이 바람개비처럼 검기를 회전시키며 냉한웅을 덮쳤다.


"쌍비검은하(雙飛劍銀河)-!"


"염라천존수(閻羅天尊手)-!"


상대가 맨손으로 자신의 검에 부딪쳐 오자, 금운성은 벼락 같은 호통과 함께 후려쳤다.


"미친 놈, 죽어라!"


찰나, 번쩍 불꽃이 튀기며 금속끼리 맞부딪치는 듯한 음향이 일었다.


쨍-!


금운성의 동공(瞳孔)이 고통과 불신으로 메워졌다.


"으윽!"


그는 자신의 보검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력(餘力)으로 자신의 심장까지 꿰뚫고 들어온 상대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당신의 교만과 위선이 자신을 해친 것이다."


팍-!


냉한웅이 중얼거리며 좌수(左手)를 뽑아 내자 핏줄기가 화살처럼 뿜어져 나와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이어 금운성의 몸이 주저앉듯 땅바닥에 쓰러졌다.


휘둥그레 뜬 두 눈.


냉한웅은 손을 내밀어 공포와 의혹 어린 눈망울을 덮어 주었다.


장력으로 구덩이를 만들어 시신을 넣은 후, 냉한웅은 천천히 밤길을 걸었다.


'목숨을 빼앗지 않고도 굴복시킬 수 있었는데… 꼭 살수를 써야만 했을까?'


그의 심정은 매우 어지러웠다.


하지만 보폭이 일정하였고, 몸가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냉한웅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 백영(白影)이 유령처럼 그 자리에 나타났다.


준수하고 훤칠한 모습의 백의서생,


그의 품에는 꽃들도 시샘할 만큼이나 아리따운 여인이 안겨 있었으니….


신산묘인과 함께 도주했던 비룡서생 남궁진악이었다.


"강호란 무공보다 지모(智謀)가 더 유용하게 쓰이는 곳.


네놈이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고루대교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이 때, 등 뒤에서 나직한 비웃음이 들려 왔다.


"으흐흐흐… 그건 본존의 입장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지."


남궁진악은 퉁겨지듯 앞으로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회전하여 시선의 방향을 바꾼 그는 기절초풍할 듯 놀라 뒤로 주춤주춤 몇 걸음 더 물러섰다.


"너는……?"


떠나간 줄만 알았던 흑의중년인, 즉 정사마천궁주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가리와 꼬리를 감춘다고 본존의 이목(耳目)에서 벗어나리라 생각했느냐?"


"이런 음흉한……."


"맞았다. 뿐만 아니라 본존의 잔악함 역시 고루교주보다 덜하지 않을 게다."


냉한웅은 남궁진악의 이마에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을 보며


더욱 효과적으로 그를 괴롭혀 줄 방법을 궁리했다.


순간, 남궁진악의 눈알이 교활하게 굴렀다.


"존가(尊哥)께서 이 몸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지금쯤 시체로 변해 있을 겁니다.


달리 무슨 뜻이 있으신지 밝혀 주시면……?"


발바닥이라도 핥을 듯 가련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자, 냉한웅도 짐짓 음성을 부드럽게 했다.


"다른 사형제들과 금고루처럼 되지 않으려면 지금의 태도를 계속 유지토록 하게."


남궁진악은 상대의 태도가 부드러워지는 듯싶자, 허리를 나긋나긋하게 굽혔다.


"하명(下命)해 주시면 따르겠으니, 당장에 어떤 분부든지 내리십시오."


그러나 다음 순간, 냉한웅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를 어리둥절케 했다.


"그 여인을 사랑하는가?"


남궁진악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품안에 늘어져 있는 팽지연을 살펴보았다.


발그레한 홍조를 띤 채 쌔근쌔근 잠자는 모습은 선녀 같다는 말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십전십미(十全十美).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미운 곳이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매혹의 극치!


남궁진악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인은 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보물입니다."


냉한웅의 눈썹이 찡긋 위로 치켜졌다.


"수혈(睡穴)을 풀어라."


남궁진악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 자의 의도가 무엇이길래…?'


그가 머뭇거리자, 냉한웅의 음성이 냉멸차게 떨어졌다.


"반복해야겠는가?"


살기를 느낀 남궁진악은 다급히 봉쇄된 혈도를 풀어 주었다.


"음……!"


팽지연은 박속 같은 치아를 드러내며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다음 순간, 그녀가 놀란 새처럼 화들짝 남궁진악의 품을 벗어났다.


"독사 같은 놈!"


분노의 일갈을 터뜨리며 즉각 공격 태세를 갖춘 그녀를 남궁진악은 바라보지조차 않았다.


그는 신경과 시선은 오로지 냉한웅에게 쏠려 있었다.


반면에 냉한웅은 남궁진악과 팽지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심한 듯 보이는 눈빛이지만 그의 가슴 속은 증오의 불길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


총명한 팽지연이 어찌 이런 이상한 분위기를 못 알아차릴 것인가?


그녀도 덩달아 남궁진악과 흑의중년인을 살피며 사태를 주시하였다.


"저 여인을 진정 사랑하는가?"


냉한웅의 같은 물음에 남궁진악도 은근한 노기를 띠었다.


"그렇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팽지연이 보는 앞에서 똥개 다루듯 물어 대니,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 냉한웅은 그의 가슴에 또 한 번 무형(無形)의 비수를 찔러 넣었다.


"저 여인을 포기한다면 너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 그 말에 따르겠느냐?"


일순, 남궁진악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


실룩실룩 안면 근육만이 폭풍을 만난 듯 흔들릴 뿐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팽지연이 양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앙칼지게 외쳤다.


"누구를 갖고 흥정하는 거죠? 당신은 누구예요?"


남궁진악은 흑의중년인이 생각을 바꿀까 두려워 다급히 끼여들었다.


"정사마천궁주이시다. 다른 사형제들도 모두 궁주의 손에 죽음을 당했으니, 입조심 하거라."


"아……!"


팽지연의 연한 입술을 비집고 탄성이 튀어나왔다.


기쁨과 슬픔.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수정 같은 눈물이 고였다.


대검장을 배신한 패륜제자(悖倫弟子)이긴 하나, 


그래도 십 년이 넘게 동고동락(同苦同樂)해 온 정분이 있지 아니한가?


"대협의 의협심(義俠心)은 존경스러우나, 방법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냉한웅은 싸늘한 표정으로 코웃음쳤다.


"흥! 본존은 낭자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으니, 헛된 기대는 마라."


"그럼 무슨 이유로…?"


냉한웅은 계속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단지 한(恨)을 풀기 위해서다."


한(恨)!


전혀 예상밖의 말에 팽지연은 한 걸음 주춤 물러섰다.


"소녀 비록 선녀처럼 착하게 살아오진 못했으나, 남에게 원한을 살 만한 행동을 한 기억이 없는데…."


"오해가 아니란 말이오! 남의 가슴에 한을 심어 준 사람은 잊어도, 당한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소."


"……."


남궁진악은 팽지연이 과거의 일을 기억해 내려 입을 다물자, 슬쩍 나섰다.


"정사마천궁주께서 결코 허언(虛言)을 할 인물이 아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짐작한 냉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존의 일언(一言)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 결정한 바를 말해라."


"팽낭자를 포기하겠습니다."


순간, 팽지연은 치를 떨었다.


남궁진악이 야욕에 불타 태검장을 배신하였으나 그래도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깊다고 여겼는데,


그마저도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으니….


창백해진 그녀의 안색을 힐끗 바라본 냉한웅은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응당 통쾌해야 할 마음이 왜 이리도 텅 빈 듯 느껴지는 걸까?'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남궁진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거라. 그러나 이후론 오늘과 같은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궁진악의 신형이 야공(夜空)을 갈랐다.


쉬익-!


비룡이란 명호답게 그의 경공은 쾌속하기 이를 데 없어 잠깐 사이에 모습이 달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달빛만이 남아 있는 듯 장내는 적막과 공허함만이 감돌았다.


두 남녀는 있는 듯 없는 듯 숨소리마저 죽인 채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일다경(一茶頃)쯤 흐른 후, 팽지연이 침묵을 깼다.


"소녀가 언제 당신께 죄를 지었죠?"


"……."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으니, 죽이기 전에 알려 주시겠어요?"


"본존은 낭자를 죽일 생각이 없다."


"그건 왜죠? 다른 사형제들에겐 살수를 뻗치고선!


혹시 소녀 개인이 아니라 본장에 원한이 있는 게 아닌가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소."


"그럼 대사형, 아니 그 죽일 놈은 어째서 놓아 준 건가요?"


"후후후… 죽일 놈이기에 놓아 준 거요."


핵심을 묘하게 피해 가는 대답에 팽지연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사실 가슴이 답답하기는 냉한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참을 수 없어 비탄 어린 웃음을 달빛에 실어 보내고야 말았다.


"푸후후후… 더 정확히 말해 당신의 가슴에 사랑을 파괴당한 아픔을 새겨 주고 싶었소."


순간, 팽지연의 얼굴에도 자조(自嘲)의 미소가 번졌다.


"당신은 잘못 선택했어요."


"과연 그럴까?"


"소녀가 그 자와 결혼하려던 이유는, 단지 아버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서였어요.


진실로 사모하던 이는 소녀에게 실망만을 안겨 주고 떠나 버렸죠."


팽지연은 볼을 붉게 상기시키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왜 그에게 이런 비밀까지 스스로 털어놓는지 이해가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냉한웅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낭자의 정인은 누구요?"


"왜요? 그 사람마저 찾아 내 해치려는 건가요?"


팽지연이 노화(怒花)가 번뜩이는 시선으로 노려보자, 냉한웅은 능글능글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물론이오. 낭자 혼자라면 보복의 의미가 적으니까."


"후훗… 당신은 영원히 그를 찾지 못할 거예요. 영원히…."


웃음소리를 내었으나, 그녀의 양 볼은 어느 새 눈물로 적셔져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눈을 감았다.


누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냉한웅이 수혈을 짚었던 것이다.


성수마의(聖手魔醫) 여소량(呂紹梁)은 뒤늦게 도착한 마의괴걸(麻衣怪傑) 육공명(陸空明)과 함께


행방불명이 된 팽지연을 찾아나섰다.


육공명은 잠든 여인을 껴안은 흑의중년인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가 말을 낮추어 묻자, 냉한웅도 짤막하게 대답했다.


"정사마천궁주!"


순간, 육공명의 흐릿한 두 눈에서 신광이 폭사됐다.


"고얀 놈! 노부가 이 갑자(甲子)의 나이를 먹도록 너같이 버릇없는 애송이는 처음 본다."


마의괴걸 육공명.


그는 바로 오마(五魔)보다도 한 배분이 높은 강호칠기(江湖七奇)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니 어찌 열을 받지 않겠는가?


이 때 여소량이 얼른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노선배(老先輩), 혈시악살을 해치운 신비인이 바로 저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격이 격하기로 소문난 육공명의 귀에 제대로 와 박힐 리 없었다.


"이 놈아! 저 애송이가 혈시악살을 해치웠다 하더라도 감히 노부에게…


으잉? 지금 혈시악살이라고 했느냐?"


그는 대경실색하여 여소량에게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석년에 강호칠기는 황산에서 혈시악살을 상대로 합공을 펼친 적이 있었다.


혈시악살이 간신히 몸을 빼내 새외로 도망쳤지만 그들의 피해도 가볍지 않았다.


'혈시악살이라면 우리 칠기 중 두 명이 상대해야 평수를 이룰 만큼 높은 무공을 지녔는데…


어떤 내력을 지닌 자일까?'


다시 흑의중년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육공명은 자지러질 듯 놀랐다.


그가 어디론가 깜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무슨 신법을 터득했기에…?"


여소량도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정사마천궁주가 마음을 달리 먹는다면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이 놈아! 그건 또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


심기가 불편한 육공명이 핀잔을 주자, 여소량은 구덩이 속을 손가락질했다.


"저 시체는 화산파 장로인 쌍비검 금운성입니다.


그리고 정사마천궁주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바로 태검장주의 영애였습니다."


육공명은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마구 살수를 써 대다니… 아무래도 친구들을 모두 불러 내야겠군."


호탕하고 해학에 차 있는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매우 의기소침해 있었다.


여소량의 심정도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절정고수답지 않게 무거운 발걸음으로 묵묵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