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12장 사대밀영주(四大密令主)

오늘의 쉼터 2016. 5. 31. 10:35

제12장 사대밀영주(四大密令主)

 

"와아아……!"

혼례식장 한가운데에는  높이 이 장의  연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주위엔 승(僧), 도(道), 속(俗) 등 각양각색의 수많은 인물들이 몰려 있었다.

연무대 정면에는 각기 홍(紅), 청(靑), 백(白), 황(黃)의 주대(主台)가 있었는데….

홍대(紅台)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은 화려한 예복 차림의 절세가녀(絶世佳女)로,

그녀의 화용은 실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아, 태검장의 낙양일색(洛陽一色) 팽지연(彭芝燕).

지난 삼 년 동안 그녀의 미모와 몸매는 더욱 성숙해져 있었다.

팽지연의 곁에는 부친인 태검신노 팽소환이 꽤나 기쁜 듯 만면에 웃음을 짓고 서 있었으며,

태검장의 식솔 여럿이 더 있었다.

그 나머지 인원은 청대(靑台)에 몰려 있었다.

태검신노의 수제자이며 당금무림의 후기지수 중 으뜸인 비룡서생(飛龍書生) 남궁진악(南宮眞岳).

그도 활짝 웃고 있다.

혼례식을 마치면 낙양은 물론,

중원을 통틀어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여인과 태검장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니…

당연한 일 아닌가?

선량해 보이는 미소, 그런 미소를 띄운 사람 가운데 악독한 마음을 지닌 자가 많다.

남궁진악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서 덕담을 늘어놓고 있는 사이 좋은 네 명의 사형제들….

냉한웅에게 모욕과 학대를 아끼지 않던 그들 역시 늠름하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음악(陰惡)한 기운이 흐르는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황대(黃台)에도 호사스런 옷차림의 청년이 점잔을 빼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용모가 팽지연에는 못 미치나,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남녀와 나이 든 남녀가 희열에 들뜬 모습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강북에 일월문에서 온 신랑 측으로,

강북일남(江北一男) 하충(河忠)과 그의 누이동생인 강북월녀(江北月女) 하미미(河美美), 
그리고 이들의 부모인 일월문주 부부였다.

부친인 일월풍류객(日月風流客) 하웅봉(河雄鳳)은 나이가 오십 줄을 넘긴 지 오래였으나, 

명호 그대로 여인들 깨나 울렸음직한 준수함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모친인 연화옥녀(蓮花玉女) 진미령(眞美玲) 역시 오십 줄에 가까웠으나,

그의 바람기를 잠재울 정도로 나이에 비해 매우 젊고 아름다워 보였다.

마지막으로 백대(白台), 이 곳이야말로 가장 화려해 보였다.

하충과 일찍이 정혼했던 천수공녀(千手公女) 유화영(兪華英)이

녀같이 곱게 차려 입은 모습으로 친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 곳이 천수장인 만큼 그녀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법석거렸는데…

특히 남루한 차림새에 술 취한 듯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는 노인이 시선을 끌었다.

그는 유화영의 주위를 맴돌면서 계속 주절댔다.

"이젠 질녀의 선녀 같은 모습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군.

하지만 너무 섭섭해 마라. 내가 일월문을 자주 방문할 테니…."

이 말을 들은 유화영이 질겁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그머니, 숙부님께서 일월문을 들락날락하시면 질녀는 소박맞게 될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지?"

노인의 게슴츠레한 눈이 아연한 빛을 띠었을 때, 그의 등 뒤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그걸 몰라 묻는 거냐? 네가 일월문을 세 번 이상 출입한다면,

그 곳의 밥그릇조차 남아 나지  않을 게다. 천하에 그 누가 귀수신투(鬼手神偸)를 환영한다고…."

뒤돌아보지 않아도 음성의 주인을 알 만했다.

감히 천중사기(天中四奇) 중 한 명인 귀수신투(鬼手神偸) 왕한상(王漢湘)의

체면을 마구 구겨 놓을 작자가 철지영개 말고 또 누구겠는가?

왕한상은 왈칵 성을 냈다.

"그래도 냄새나는 거지보다는 환영받는다.

노괴(老怪), 네가 화영의 숙부였다면 일월문주가 파혼을 하자고 달려들었을 게다."

"무슨 소리? 그래도 도둑질보다는 비럭질이 훨씬 더 고상한 직업 아닌가?"

"어허, 공밥이나 얻어먹는 거지가 어찌 투(偸)의 도(道)를 알 리요?"

"흥! 네놈의 도란 것이 신속정확하게 남의 물건을 터는 거지, 별거더냐?"

"지저분하고 무식하기가 개 발바닥보다 더한 위인! 이러니, 평생 거지 신세를 못 면하지."

왕한상이 경멸의 미소를 흘리자, 철지영개도 열받아 삿대질까지 해 댔다.

"그래, 네놈은 깨끗하고 유식하기가 곰  발바닥 같아서 양상군자(梁上君子)란 말을 듣는구나!

자기 질녀에게조차 환영 못 받는 놈이 뭐 잘났다고…."

이들의 설전(舌戰)에 백대에서는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우하하하……!"

"하하……!"

"푸핫하하……!"

보다 못해 성수마의(聖手魔醫) 여소량(呂紹梁)이 나섰다.

"이러다간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다퉈도 승부가 나지 않겠군.

연 누구의 직업이 더 훌륭한지 집주인인 유형(兪兄)에게 가려 달라는 게 어떻겠소?"

그의 친우인 중원일괴(中原一怪) 공문건(孔文建)도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천수제갈(千手諸葛)이라 불리울 만큼 박학다식하니,

양쪽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해답을 마련해 줄 걸세."

이 때, 천수장 총령(總領)인 대운도(大雲刀) 노경(盧敬)이 끼여들었다.

"유장주께선 천수장에서 나온 이후 종적을 감추셨습니다.

대관절 어디로 가셨기에 찾을 수조차 없는지…."

순간, 철지영개의 눈이 광채를 발했다.

이 기회에 자기 편을 심판으로 내세울 요량으로 그는 마구 떠들어 댔다.

"요럴 때 천수제갈이 안 보이다니, 애석하군. 그렇다면 소걸군에게 묻도록 합시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의 박학다식함이야말로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으며,

여러 방면에서 걸출하니… 더 이상 적합한 인물을 어디서 찾겠소?"

하지만 한곁에 묵묵히 서 있던 추추귀개가 김을 빼놓았다.

"사부께서 사랑하시다 못해 존경하는 소걸군도 함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는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가 있음을 암시하였으나, 철지영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요 소괴는 또 어디로 샜을까? 에잉!"

하나, 월녀개는 추추귀개의 암시를 즉각 받아들였다.

'소걸군이 천수장주와 함께 사라졌단 뜻인데…

그의 정체가 뭐던 간에 이번 혼사와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천수장의 혼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냉한웅의 반응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순, 그는 얼마나 냉막한 표정을 지었던가?

당시 상황을 떠올린 월녀개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 속의 인물들에게로 향했다.

먼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천수공녀 유화영를 바라봤다.

'백합과 같은 낭자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우아하여 모든 남자들이 아내로 맞아하고픈 여인의 이상형이야."

다음은 시선이 비룡서생 남궁진악이 있는 청대로 향했다.

바로 그 순간

"아…!"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발견한 것이다!

남궁진악의 눈가에 가늘게 흐르는 교활한 미소와 의미 모를 그 무엇을….

월녀개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저건 혼례를 기뻐하는 신랑의 웃음이 아니다. 무슨 음모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이 때, 남궁진악은 네 명의 사제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예물(禮物)을 보여 줄 때가 되었다. 준비는 틀림없이 되었겠지?"

"대사형, 염려 마십시오. 한 치도 틀림없이 시행될 것입니다."

사제들이 총총히 청대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궁진악의 미소.

그 순간, 월녀개의 시선이 가 닿았던 것이다.

밀실(密室).

천수장 지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곳은 오직 천수제갈 유연만이 이용하는 장소였다.

내부엔 별 장식이 없고 튼튼하게 만든 사각 탁자와 네 개의 의자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바닥에 빈틈없이 호피(虎皮)가 깔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하였다.

냉한웅과 유연이 탁자를 사이에 둔 채 마주 앉아 있었다.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듯 분위기가 숙연했다.

"기화가 유성반월도가 아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유모(兪某)를 제외하곤 천하에 단 한 명뿐이오.

그것이 뭘 뜻하는지 알겠소이까?"

"모르겠는데, 그 한 명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알려 주시길 바라오."

냉한웅의 태도에 유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모른다면 유모도 대답해 줄 수 없소이다.

이것은 천수장을 세운 부친의 뜻이니,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유연이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표정으로 일어서자, 냉한웅은 씨익 웃었다.

"서둘지 마시오. 우장주께서 말씀하시는 한 명이란 혹시 이 물건의 주인을 뜻하는 게 아니오?"

그가 품안에서 꺼내 든 물건은 바로 천존선이었다.

찰나, 유연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천존(天尊)!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셨구려.

천존시하의 천기령주(天機令主), 감히 주군을 배알하오이다."

냉한웅은 인간의 감정이란 추호도 없는 듯 무심한 눈빛으로 유연을 내려다보았다.

"천기령주란 무엇을 뜻하는 거요?"

그의 물음에 유연은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천존께서 어찌 사대밀령주(四大密令主)를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냉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꾸짖었다.

"그대는 묻는 말에만 대답토록 하오."

싸늘한 어조에 유연은 몸을 움츠렸다. 하나, 죽은 듯 움츠려 들지는 않았다.

"유모(兪某)가 자격은 크게 부족하나, 부친의 유언에 따라 천기령주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마종지주(魔宗之主)의 신물을 지니시게 된 연유를 듣지 않고서는

명에 따를 수 없습니다."

"심정을 이해하겠소. 그럼 고개를 들어 본존을 바라보오."

유연은 기다렸다는 듯 얼른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의 입에선 경악의 외침이 터졌다.

"이럴 수가…?"

평범한 얼굴에 삐쩍 마른 몸의 거지가 간 데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천계의 신군(神君)인 양 두 눈에서 햇살 같은 신광을 폭사하는

미장부(美丈夫)가 미소짓고 있었다.

아, 신비한 마소(魔笑)!

세상 어느 미녀도 흉내 못 낼 아름다움과 성(聖)스러운 기품을 간직한 모습은

전설의 천마존이 재림한 것 이상의 충격으로 와 닿았다.

유연은 격동을 주체치 못해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속하의 불충과 무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어 그는 사대밀령주에 관한 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