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개방서생 (제2권)제1장 정(情)을 품은 여인

오늘의 쉼터 2016. 5. 31. 11:46

개방서생 (제2권)


제1장 정(情)을 품은 여인

 

천마존의 수하에 혈살방(血殺幇)과 잔인교(殘忍敎)가 있음은 강호의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네 개의 극비조직을 지니고 있었으니..

<천살령(天殺令)>
<천신령(天神令)>
<천기령(天機令)>
<천독령(天毒令)>

이들 조직의 고수들은 명칭이 다른 만큼 임무도 각각이었으며

두가 신분이 극비(極秘)에 붙여져 있어,

그들 외엔 오직 천마존만이 상세한 내용을 알 뿐이었다.

천살령!

영주(令主)를 비롯하여 삼십육 명의 고수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무는 천마존의 명을 어기거나 반역하는 자를 제거하는 일이다.

개개인의 무공은 하나같이 절정에 달했으며,

특히 이들이 펼치는 삼십육천강천살대진(三十六天剛天殺大陣)은 

혈살방이나 잔인교의 전 고수가 공격해도 깨어지지 않을 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천신령!

영주와 다섯 명의 강호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무공은 천살령과 상당한 격차가 있으나 개개인의 재주는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특히 투(偸)와 도(盜), 역용(易容) 등 잡술에 능했고

무공으론 경공(輕功) 및 금나술(擒拿術)에 일가견이 있어

주로 강호에 산재한 대소방파(大小幇派)의 기밀을 탐지하거나 연락을 신속히 취하는 임무를 맡았다.

천기령!

천수제갈 유연의 부친인 천수진인(千手眞人) 유진산(兪珍算)이 영주였다.

영주와 열두 명의 고수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공은 사대밀령 중 가장 떨어지나 건축기관(建築機關)과 화기제작(火器製作),

복진법(埋伏陣法) 등에 있어 강호인 중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천수장 역시 이들의 걸작이다.

천독령!

완전한 독인(毒人)으로 독물(毒物), 독약(毒藥) 등

만독(萬毒)을 다루는 영주와 독(毒)을 다루는 데 있어 독보적이며…

독공(毒功)에도 능숙한 이십팔 명의 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독군(毒君)이란 명호를 지닌 백독곡주(百毒谷主) 사일악(史一惡)도

일개 천독령인에 불과할 따름이었으니….

천마존의 수하인 혈살방(血殺幇)과 잔인교(殘忍敎)의 고수들조차 
이 비밀 조직들을 두려워하여 배신이란 꿈도 꾸지 못했다.

사대밀령주의 비밀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한웅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치 그 모든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내심 그의 가슴 속엔 새로운 웅지(雄志)가 싹트고 있었다.

유연은 그의 모든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천환역골공(千幻易骨功)을 저토록 완벽히 펼치려면 특수한 근골을 지녀야 하는 외에도 

삼 갑자 이상의 공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완전히 끊지 않고서야 눈빛이 어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치 수십 년 간 면벽고행(面壁苦行) 끝에 득도(得道)한 고승과도 같구나.

그렇다면 실제 나이는 얼마나 될까?'

이 때, 냉한웅의 입가에 다시 한 줄기 마소(魔笑)가 흘렀다.

"그대가 몹시 궁금해하는 본존의 신상내력에 관해 들려 주겠소. 
하나 모든 것을 말해 줄 수는 없는데,

그것은 본존조차도 확실히 모르는 것과 아직 알아서는 안 될 것이 있기 때문이오."

이어 그의 입술이 달싹이기 시작했다.

"……."

그의 전음은 거의 일식경(一食頃) 가까이 펼쳐졌고, 유연은 격동을 못 이겨 계속 몸을 떨었다.

냉한웅을 올려다보는 유연의 두 눈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빛을 띠고 있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경이(驚異)와 놀람 등….

어느 순간이 지나자, 유연은 고개를 떨구며 폐부 깊숙이에서 치솟는 감동의 외침을 토해 냈다.

"천마존!"

하나, 냉한웅의 눈빛은 변함없이 무심하기만 했다.

천수장(千手莊)의 명물이며 금역(禁域)인 구유명부탑(九幽冥府塔).

장원의 정중앙에 위치한 이 구층 탑(塔)은 천수장 사면팔방을 요원하게 감시하며 

전 기관과 매복을 발동시키는 중추신경(中樞神經)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천수장의 중요 시설을 장악 통제하는 구유명부탑 주변에는 철통 같은 경비망이 펼쳐져 있었는데,

다른 날과 달리 더욱 삼엄하였다.

탑 주위를 돌며 경비를 하고 있던 위사들 중 한 명이 전면을 손가락질했다.

"저기 누가 오고 있는데?"

그와 조를 이루고 있던 친구가 잘 아는 척 긴 말을 늘어놓았다.

"태검장에서 온 빈객(賓客)들이야.

태검신노의 진전을 이어받아 무공이 대단하다더군. 대체 무슨 일로 오는 걸까?"

그들이 의혹의 눈길을 던질 때.

휘익-!

일진의 소성과 더불어 흑의노인이 탑 안에서 쏜살같이 튀어 나왔다.

뱁새 눈에 얄팍한 입술을 지닌 매우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탑주(塔主)!"

위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외쳤다.

흑의노인이 바로 천수장의 서열(序列) 두 번째인 구유명부탑주 신산묘인(神算妙人)인 것이다.

그는 황급히 손짓을 하였다.

"어서 모이거라."

탑 주변을 지키던 위사들이 모여들자, 그는 빠른 음성으로 물었다.

"태검신노의 제자들이 결코 좋은 마음을 품고 오는 것 같지 않다. 
너희는 그런 느낌이 안 드느냐?"

그의 다급한 태도에 위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자들이 왜 자신들의 사매가 혼례를 치르는 경사스러운 날을 택해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위사들 중 한 명이 되묻자, 신산묘인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나의 능력이 비록 유장주에게는 못 미치나, 그만한 안목은 있다. 
저 자들에게서 살기가 짙게 느껴지는 걸로 미루어, 뭔가 일을 저지를 속셈이 분명하다."

위사들도 안력을 돋구어 십 장 안으로 접근한 태검신노의 제자들을 살폈다.

그러나 부드러운 미소와 산책하듯 걷는 모습 등 살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돼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신산묘인의 일갈(一喝)이 터져 나왔다.

"어서 입구를 봉쇄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

위사들은 어쩔 수 없이 입구를 뒤로 하고 물러섰다.

이 때 훤칠한 네 청년은 그들의 일 장쯤 앞에 멈춰 선 채 포권지례를 취했다.

"형장들, 수고 많습니다. 천수장과 태검장은 허물없는 사이이니, 그리 경계하지 마십시오."

태검신노의 제자들 중 둘째인 풍운협사(風雲俠士) 천우상(千雨商)이 느긋하게 말을 걸자, 

위사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중년무사가 포권으로 답례하며 외쳤다.

"이 곳은 천수장의 금역(禁域)이외다. 소협들께선 그만 발길을 돌려 주십시오."

막내인 독보절객(獨步絶客) 서성구(徐成九)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사 형제는 초대를 받고 왔소. 손님 대접을 이리 해도 되는 거요?"

"천수장이 여러분을 초대했지만 구유명부탑의 출입마저 허락한 것은 아니외다."

중년무사가 잘라 거절하자, 월아검(月我劍) 악빈(岳彬)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흘렀다.

"친구는 잘못 알고 있군. 우린 구유명부탑주께서 불러서 왔는데… 
이러면 탑주께서 서운해 하시지 않겠는가?"

위사들은 그의 돌변한 태도와 말투에 노해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며 외쳤다.

"당치 않은 소리 말고 어서 물러가시오!"

순간, 위사들의 뒤편에 있던 신산묘인의 쌍수(雙手)가 신랄하게 허공을 갈랐다.

놀랍게도 그의 악독한 수법은 구유명부탑을 지키고 있는 위사들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퍽- 퍼퍽-!

잔인한 음향이 터짐과 거의 동시에 참혹한 비명 소리가 핏줄기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크윽!"

"아악!"

누구로부터 당했는지조차 모른 채 대여섯 명의 위사들이 쓰러질 때,

태검신노의 네 제자들의 검집에서도 예리한 빛살이 튀어나왔다.

쉐엑- 파르륵-!

그들 역시도 위사들을 노리고 있었다.

천수장의 구유명부탑을 지키고 있던 위사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태검장의 방문객들이 순간적으로 돌변해 버린 것이 아닌가?

그들은 살인마가 되어 악귀 마냥 달려들었다.

"피해랏!"

"탑주가 반역을… 악!"

신산묘인과 태검장의 인물들은 마구 위사들을 베어 갔다.

살육전은 찰나지간에 끝나 버리고 말았다.

구유명부탑주이며 천수장주의 오른팔인 신산묘인이 자신들에게 살수를 쓸 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때문에 월등한 수적 우세와 그리 약하지 않은 무공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정적(靜寂).

피비린내를 실어 나르는 바람 소리만이 이는 가운데, 천우상이 중얼거렸다.

"비명 소리를 누가 듣진 않았을까요?"

"걱정할 것 없다. 이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져 있고, 사방 백 장 밖까지 금역으로 정해져 있으니…."

신산묘인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을 들은 천우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탑 안의 문제는 잘 처리되었습니까?"

"흐흐흐… 노부가 하는 일에 차질이 있을 수 없지.

여지껏 천수제갈(千手諸葛)에게 눌려 지내 왔으나, 오늘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널브러진 시신들을 숲 속의 구덩이로 옮겨 눈에 띄지 않게 한 후, 구유명부탑 안으로 들어갔다.

탑 내부는 기기묘묘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바닥은 주로 운석(雲石)이 깔려 있었고 벽면은 담색(淡色) 칠을 했다.

또한 여기저기 기묘한 조각들과 삐죽이 돋아난 기관장치도 보였다.

신산묘인은 네 명의 청년들을 맨 꼭대기인 구층으로 데려갔다.

그 곳은 톱니바퀴들이 복잡하게 얽힌 기관장치가 뼈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십여 명 가량의 인물들이 죽은 듯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눈알들이 이리저리 구르는 것으로 보아, 혈도를 제압당한 것이 분명했다.

여지껏 침묵을 지켜 왔던 신기수사(神技秀士) 장광우(張光優)가 입을 열었다.

"지난 백 년 간 신비에 싸여 있던 구유명부탑 안에 들어오게 되다니…

이 모두가 신산묘인의 덕입니다."

돌연, 신산묘인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아니다. 오늘의 일은 현 무림에 천마존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마존?"

네 명의 청년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외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천마존이란 이름은 강호상에서 얼마나 광오한 이름이던가?

태검장의 인물들은 의아한 얼굴로 신산묘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왜 갑자기 불귀해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전설의 마종지주(魔宗之主)를 들먹이는 걸까?

하지만 신산묘인은 그들의 궁금증을 모른 척 외면했다.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지만 감히 묻지 못하고 말았다.

신산묘인은 내심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경망스러움을 탓했다.

'만화(萬禍)가 입으로부터 시작된다던데… 입이 방정이다.'

만약 사대밀령주(四大密令主)의 비밀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그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신산묘인은 그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손짓을 했다.

"이리 와 여길 보게."

우르르 다가가 그가 가리키는 것을 본 네 명의 청년들 입에서 동시에 찬탄이 쏟아져 나왔다.

"아, 이건 마법이 아닌가?"

"구유명부탑이 신비롭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놀랍게도 그 곳에선 천수장의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문 근처로부터 시작하여 객실(客室)과 대청(大廳),

그리고 임시로 혼인식장이 된 연무장의 구석구석까지 코 앞에 있는 듯했다.

신산묘인은 그들의 반응에 흡족한 미소를 띄웠다.

"천수장 안팎을 세밀히 감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내의 모든 기관을 마음으로 조정할 수 있다."

막내인 서성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곳의 위치가 가장 높아 모든 광경이 내려다보이는 건 이해가 가지만,

어찌 이리도 명확하게 보인단 말입니까?"

신산묘인은 그의 견문(見聞)이 너무도 부족한 것에 실소를 머금었다.

"자네들 눈앞에 있는 수정구(水晶球)가 바로 투경(透鏡)이란 걸세.

이 물건은 서역에서 들여온 것으로, 사물을 크게 확대해 보여 주는 역할을 하지."

그가 수정구를 이리저리 돌리자, 밖의 풍경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곤 했다.

이를 본 네 명의 청년들 입에서 다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 신기하군요!"

"만약 신산묘인께서 이번 일에 협조하지 않으셨으면,

그야말로 생명을 부지하기조차 어려웠을 겁니다."

이 때 장광우가 급히 수정구에 나타난 연무장 우측 귀퉁이를 가리켰다.

"저기를 좀 보십시오!"

그 곳은 수림(樹林)이 사이를 갈라 놓아 사람들의 왕래가 뜸했으며,

작은 집채만한 궤(櫃) 네 개가 놓여 있었다.

그 거대한 궤짝을 향하여 지금 두 명의 중년인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장광우를 비롯한 전원의 안면은 몹시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었다.

마치 남모르게 은밀히 진행되던 일이 발각당했을 때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중인들의 표정에 일제히 긴장감이 감돌았다.

"괜찮겠나?"

약간 마른 체구의 중년인이 머뭇거리며 묻자, 어깨를 마주하고 걷던 친구가 그의 등을 탁 쳤다.

"왕풍삼(王風三), 자넨 너무 겁이 많아. 지금 모두가 혼인식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염려 말게."

"하지만… 공형(孔兄)! 들켰다가는 즉각 목이 달아날 것이 아닌가?"

"들키지만 않는다면 우린 당장 태검장의 마부 신세를 면할 수 있을 걸세.

어디 그뿐인가?

어리고 예쁜 계집들을 종으로 부리며 호의호식할 만큼 부자가 될 텐데…."

"혹시 저기 구유명부탑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어."

"설마, 저렇게 먼 곳에서? 아마 두 개의 점(點)으로나 보일걸?"

왕풍삼은 그제서야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하기는… 그런데 저 궤들 속에 값진 물건이 들어 있긴 한 건가?"

공기오(孔其五)는 자신 있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저 궤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묻지조차 못하게 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저것들을 운반할 때를 생각해 보게."

"맞아. 네 대에 달하는 사두마차(四頭馬車)로 간신히 실어 왔었지."

"마치 사람을 다루듯 조심스레 옮기고 비밀로 할 만큼 귀중한 것인데다 저토록 많은 양이니,

우린 필시 성 내에서 몇째 안에 드는 갑부가 될 걸세."

사방을 휘둘러본 후 궤의 뒷면으로 돌아간 그들은 서둘러 날이 뾰족한 단척(短尺)을 꺼내 들었다.

공기오는 능숙한 솜씨로 단척을 궤의 틈새에 끼워 넣었다.

"에에잇!"

그가 궤의 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헤집어 댔다.

하지만 워낙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것이라 이마에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땀이 비 오듯 흐를 만큼 힘을 썼는데도 좀처럼 뜯겨지지를 않았다.

담이 작은 왕풍삼은 힐끔힐끔 주위를 살피기에 바빠 별로 도움이 되질 못했다.

"이봐, 소리가 너무 크잖아!"

그가 안절부절 말까지 더듬을 때, 공기오가 득의의 미소를 흘렸다.

"이제 거의 다 되었네. 후후후…!"

바로 그 순간,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모두 곤두설 만큼 징그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크크큭… 맞아! 이젠 네놈들이 구천지옥에 떨어질 때가 된 게야."

귀신의 울부짖음과 같은 냉음은 분명 궤 안쪽으로부터 들려 온 것이었다.

"으헉!"

"누… 누구…?"

그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바지 가랭이를 축축이 적셨다.

공기오가 제법 담이 큰 척했지만 태검장 마부 노릇이나 하던 그에게 무슨 대단한 배짱이 있겠는가?

그들은 오금이 저려 도망칠 생각조차 못했다.

일순, 폭음과 함께 네 개의 궤가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그리고 궤의 파편들은 그들의 몸을 해일처럼 휘감아 버렸다.

아니, 갈가리 찢어 놓았다!

"으아악……!"

"윽!"

핏덩이로 변한 그들의 몸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곤두박질쳤다.

찍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네 개의 궤 안으로부터 이십여 개의 인영이 쏟아져 나왔다.

백골(白骨)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들.

손에 들려져 있는 귀두도(鬼頭刀)에선 인광(燐光)인 양 시퍼런 광채가 일고 있었다.

신성한 혼례식장에 의문의 괴인들이 출현한 것이다.

선두에 서 있는 인물은 한 쌍의 동발(銅鉢)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가면의 눈 구멍을 통해 형형한 안광을 뿜어 내며 명령을 내렸다.

"예정된 시각보다 빠르긴 하지만 할 수 없다. 정해진 대로 행동해라."

귀두도의 백골인들이 목청을 돋우었다.

"존명!"

백골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는 순간,

천수장의 경호무사들이 폭음을 듣고 나타나고 있었다.

"저기 침입자다!"

"아앗! 어서 내전에 알려라! 적이다!"

동발을 쥐고 있는 백골의 우두머리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흐흐흐… 백골방에서 축하를 하기 위해 왔으니, 혈주(血酒)를 올리거라."

"비발섬(飛鉢閃)-!"

파치치치직-!

두 개의 동발은 빛살처럼 두 위사의 허리를 갈라 놓고 회전하여 다시 그의 손에 쥐어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전개된 신묘하면서도 악독한 수법이었다.

"끄으악……!"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휘감았다.

이에 당황한 다른 위사들이  멈칫할 때,

십여 자루 귀두도들의 도기(刀氣)가 그물처럼 그들을 덮쳐 왔다.

"하나라도 놓쳐선 안 된다. 해치워라!"

"크악아악……!"

폭음에 이어 고함과 비명 소리가 폭죽 터지듯 연달아 울렸다.

수림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는 않으나, 연무장 안의 군웅들이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비명이 들려 오다니……?"

성미 급한 군웅들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려 했다.

백대에 머물던 고수들이 특히 그러했다.

"어떤 미친 놈들이 감히 천수장에 침입했단 말인가?"

귀수신투 왕한상이 말문을 열자, 개방 방주인 철지영개도 우악스런 외침을 토했다.

"노부의 흥을 깨 놓았으니, 몽땅 목을 비틀어 놓을 테다."

중원일괴 공문건도 때를 만난 듯 살광(殺光)을 내뿜었다.

"흐흐흐… 일이 재미있게 되어 가는걸? 손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잘 됐다."

이 때 까마귀 울음 같은 괴성과 함께 백골인들이 장내에 떨어져 내렸다.

"어리석은 놈들! 곧 황천에 보내 줄 테니 재촉하지 말아라."

순간, 연무장 안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혼잡스러워졌다.

"저 자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백골마제(白骨魔帝)가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군."

"뒈질려고 환장한 놈들!"

그 와중에서도 월녀개는 한 사내를 주시하는 걸 잊지 않았다.

대에 점잖게 앉아 있는 비룡서생 남궁진악을 말이다.

장내의 인물들 중 표정이 변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남궁진악은 변함없이 태연자약했다.

심기(心氣)가 이 정도로 깊다면 그 내면을 파헤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월녀개의 영묘한 눈빛 역시 사냥감을 놓치지 않았다.

남궁진악의 눈알이 교활하게 구르는 걸 발견한 것이다.

'뭔가 있다!'

월녀개는 남궁진악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진악은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혼례식을 치른 후에 습격하기로 약속해 놓고… 이게 어찌 된 거야?'

남궁진악은 흘깃 구유명부탑을 바라보며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멍청한 놈들! 신산묘인의 말로는 멀리서도 보고 연락할 수 있는 장치가 저기에 있다고 했는데….'

이 때 천수장 총령인 대운도(大雲刀) 노경(盧敬)이 나서며 호통을 쳤다.

"너희가 불순한 뜻으로 찾아온 것은 알았으나, 그래도 강호 도의라는 것이 있다. 

혼례식 날을 택해 습격하다니, 이 무슨 비열한 짓이냐?"

왕한상도 게슴츠레한 눈을 휩떴다.

"백골방은 가면을 원래 사용하지 않는데, 그래도 일말의 부끄러움은 남아 있는 모양이군."

동발을 쥐고 있던 백골인이 무덤 속에서 울려오는 듯 으시시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으흐흐흐… 기회 있을 때 실컷 떠들어라.

잠시 후엔 그 주둥아리들이 관에 들어가게 될 테니."

"정녕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군.

왕모(王某)가 보기에 자네는 백골방 유골당주(幽骨堂主)인 백골마군(白骨魔君) 손휘천(孫熺闡)인 듯싶은데…."

"본군의 동발이 강호에서 사라진 지 반갑자(半甲子)가 흘렀는데, 
아직 기억하고 있군. 크하하하…!"

손휘천은 천중사기(天中四奇) 중 한 명인 그가 자신을 알아보자 기분이 좋아져 호탕하게 웃었다.

광인(狂人)으로 불리우는 공문건이 어찌 그 꼴을 못 본 척 내버려두겠는가?

그는 즉각 몸을 날려 노경의 곁에 내려섰다.

"백골마군! 이 어르신께서 참견할 생각이 있는 이상, 일이 뜻대로 이루지지 않을 게다."

손휘천은 그가 참석할 줄 예측 못했던지라 눈빛이 변했다.

"어? 중원일괴(中原一怪) 공형(孔兄)이 아니시오?"

"후후후… 아직 눈알은 썩지 않아 알아보는군.

그럼 이 늙은 거지의 타구봉이 중원일괴의 광기(狂氣)보다 

별로 얌전한 편이 못 된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는지?"

개방방주 철지영개도 몸을 날려 다른 두 명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손휘천은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다.

"세 분의 무림명숙께서 합세해 보잘것없는 본인을 가로막다니참으로 영광이로소이다."

이 때 군웅들 틈에서 낭랑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늙은 해골 바가지야! 넌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떠들어 대고만 있을 거냐?"

군웅들을 헤집고 나서는 비쩍 마른 거지, 바로 냉한웅이었다.

그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계속 빈정거렸다.

"지금 무슨 헛소릴하는 거냐고 화를 내려 한다면, 그거야말로 헛수고지.

예정했던 시각보다  앞서 일을 벌인 탓에

내통자(內通者)와 손발이 맞지 않고 있단 걸 알고 있으니까."

순간, 백골 가면에 감추어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개방에 너 같은 거지가 있단 소릴 못 들었는데… 네놈은 누구기에 주제넘게 끼여드는 거냐?"

철지영개는 또 한 번 개방의 위신을 세우게 되는구나 싶어,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개방에 천하제일의 재사(才士), 소걸군이 있단 소문을 아직 못 들은 모양이군."

입이 근질근질해 기회만 엿보고 있던 추추귀개도 얼른 나서며 한몫 거들었다.

"개방에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많다는 것은 상식 아니냐?

고금의 학문(學文)을 두루 통달하였으며,

학식(學識)이 대학사(大學士)보다 높은 우리 삼소괴(三少怪) 중 한 명이지."

말잔치도 잔치는 잔치.

거지 근성 투철한 월녀개가 어찌 빠질 수 있으랴?

"너의 속셈 정도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신기묘산(神奇妙算) 소걸군이 아니다.

속 텅 빈 백골을 굴려 봤자 바가지 구르는 소리밖엔 안 날 터이니, 어서 무릎 꿇고 사죄 못할까!"

"신기묘산 소걸군이라고…?"

손휘천은 냉랭하게 코웃음치며 힐끔 구유명부탑을 살폈다.

이런 모습을 놓칠 냉한웅인가?

그는 얄밉도록 손휘천의 속마음을 긁어 댔다.

"너희가 이 곳까지 오는 동안 기관장치들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구유명부탑이 내통자들의 손에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군웅들이 왁자지껄 동요를 일으켰다.

꼭 찍어 먹어 봐야만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는가?

- 지옥의 염왕부(閻王府)를 방문할지언정 천수장의 담은 넘지 마라.

이런 말이 생긴 것은 침입자를 귀신처럼 찾아 내고 함정에 몰아넣는 구유명부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조용하기만 하니….

"그렇지 않다. 본군과 수하들은 예물 궤짝에 숨어 잠입한 것이다."

손휘천의 공력 실린 다급한 외침이 허공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냉한웅의 웃음소리가 즉각 뒤따랐다.

"하하하하… 바로 그것이야. 너는 비밀로 해야 할 수치스러운 짓을 스스로 털어놓았다.

여기에는 내 말을 부정해야만 할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잠시 숨을 죽였던 군웅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감탄과 의혹이 뒤섞인 수많은 시선들이 소걸군 한몸에 집중되었다.

그 때 황대에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 맑고 고운 음성이 툭 튀어나왔다.

"아버님, 저 젊은 거지가 한 말이 무슨 뜻이죠?"

강북월녀 하미미였다.

거칠 것 없이 자라난 요 깜찍한 소녀는 부친인 일월풍류객 하웅봉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순간, 하웅봉의 심각한 표정에 정겨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 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소걸군이란 인물의 박식함과 심기(心氣)를 천수전(千手殿)에서 식견한 바 있다.

 전에 그가 지적한 모순점과 지금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구유명부탑이 백골방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 틀림없다."

처가(妻家)의 치욕은 곧 자신의 치욕 아닌가!

천수장의 사위가 될 강북일남 하충은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구유명부탑은 인력(人力)으론 탈취할 수 없는 신기(神機)인데,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유명부탑에서 한 줄기 섬광이 치솟아 올랐다.

이어,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이 계속 울려 퍼졌다.

퍼펑펑-!

불꽃송이들이 하늘에 수를 놓으며 비산(飛散)하는 장관이 펼쳐지자,

어느 틈엔가 냉한웅의 곁에 와 있던 천수제갈 유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뇌전(雷箭)까지…!"

그의 태도로 보아 상황은 수습하기 힘들 정도인 듯싶었다.

하나, 냉한웅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중인들은 전혀 들을 수 없는 전음성이었다.

"뇌전이란 무엇이오?"

"저건 본장이 연락을 취할 때 쓰려고 만든 겁니다.

제작에 성공한 지 한 달도 채 안 돼 모두 합쳐 다섯 개밖엔 못 만들었는데…

떻게 백골방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냉한웅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대단한 효력을 지녔군. 금후에 여러 가지 용도로 쓸모가 있겠소."

유연도 전음으로 대답했다.

"더 많은 양의 화약(火藥)을 장전한다면 능히 수십 수백의 인명을 살상할 수도 있지요.

사실은 연락용이라기보다는 무기로 사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뇌전들을 지금 누가 지니고 있소?"

"본인이 세 개, 그리고 탑주인 신산묘인이 나머지를…!"

전음술로 대화를 나누던 유연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며 입을 다물었다.

냉한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고개를 돌려 격전을 지켜봤다.

성질 광폭한 공문건이 선수를 쳐 손휘천과 한 판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공문건은 적수공권(赤手空拳)만으로 천중사기(天中四奇)와 비슷한 연배인

손휘천의 동발을 여유 있게 막아 내었다.

그가 천중사기에 비해 명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무공은 두어 수 위임이 확실하였다.

하나 천중사기의 명성이 무공보다 기관진법(機關陣法), 투도술(偸盜術), 도박술(賭博術),

의술(醫術) 등 다른 방면에서 얻어진 것을 생각하면 조금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공문건은 사량파천근(四兩破千斤 : 넉 냥 정도의 적은 힘으로 천 근의 위력이 있는 힘을 막아 냄) 수법으로

슬쩍슬쩍 동발을 쳐내며 도덕경(道德經)을 읊어 댔다.

"천하의 모든 것은 그것이 아름다움을 알고 아름답게 하면, 그것은 악이다.

그것이 선함을 알고 선하게 하면, 그것은 선함이 아니다.

고로 유무(有無)는 서로 잘 맞고, 난이(難易)는 서로 잘 어울리며, 장단(長短)은 서로 비교하고, 

고하(高下)는 서로 기울고, 음성(音聲)은 서로 합치되며, 전후(前後)는 서로 따른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처함에 할 일이 없고, 행함에 가르칠 말이 없으매…."

손휘천을 회개(悔改)시키려 도덕경을 읊어 대다니…

중원일괴, 아니 중원광인(中原狂人)다운 행동이었다.

뒤질세라 뛰어든 철지영개와 두 제자들,

왕한상과 노경은 각자 손휘천의 수하 대여섯 명씩을 맡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쳐랏!"

"몽땅 해치워라!"

군웅들의 수가 수백 명이 넘었다.

하지만 거의가 정파 무림인인지라 소수인 백골인들을 합공하는 짓은 벌일 수가 없었다.

대다수 군웅이 강호 규범을 지키기 위해 지켜보고만 있었으나 피 튀기는 싸움이 어디 가겠는가?

혼례식장은 차츰 아수라장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이 때 돌연, 어디선가 우렁찬 장소성(長嘯聲)이 울려 왔다.

"우우우……!"

일 갑자(甲子) 이상의 내공을 지니지 못한 이들은 기혈이 들끓음을 느껴야 할 만큼 가공한 위력이었다.

공력이 크게 떨어지는 일부 군웅들은 자신의 양쪽 귀를 두 손으로 막은 채 뒹굴었으며,

그들의 입가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군웅들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한 시선으로 소리가 들려 오는 먼 곳을 응시하였다.

이 와중(渦中)에 냉한웅은 수림을 향해 냅다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팔보간섬(八步間蟾)과 같이 기본적인 경공조차 펼칠 줄 몰라

두 다리만 고생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황대에 있던 하충이 냉한웅의 뒷덜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저 입만 까뒤집어 놓은 놈! 제일 먼저 줄행랑을 치는군."

하미미도 곱게 눈을 흘겼다.

'본 낭자를 실망시켜도 분수가 있지. 아버님이 극찬했지만 실상은 볼품없는 소인배야.'

이들 남매가 비웃음을 흘리자, 하웅봉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을 그토록 쉽게 평가해선 안 된다. 소걸군은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못한 자가 무림에 뛰어들다니…

그런 의미에서라면 범상한 인물이 아니지요."

하충이 말을 돌려 또 비웃자, 하미미도 맞장구쳤다.

"무공을 지니지 못해 겁을 내는 거니, 비겁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다만 불쌍할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