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11장 혼례식(婚禮式)의 불청객(不請客)

오늘의 쉼터 2016. 5. 31. 10:33

제11장 혼례식(婚禮式)의 불청객(不請客)

 

신양성 외곽에 자리잡은 천수장(千手莊)은 그 위용이 대단하지만, 
그보다도 안에 설치된 기관매복이 더 유명하였다.


- 지옥의  염왕부(閻王府)를 방문할지언정, 천수장의 담은 넘지 마라.


이런 말이 강호에 떠돌 만큼 위험이 도처에 도사린 그 곳에 흥겨운 가락이 울려 퍼졌다.

띠딩- 띵- 탕- 타당-!

오늘은 두 쌍의 원앙(鴛鴦)이 백년가약을 맺는 날이다.

제아무리 금성철벽(金城鐵壁)의 요새라 하나, 어찌 경사에 풍악(風樂)이 없을 손가!

천수장의 정문은 무림인들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군상(群像)들로 인파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 특히 바쁘게 움직이는 인물들은 금의화복(錦衣華服) 차림에 금검을 휴대한 수문위사들이었다.

끝없이 밀려드는 빈객(賓客)들의 신분 고하를 따져 적절한 영접을 하고,

관계없이 끼여들려는 자를 가려 내쫓아 버리는 일이야말로 잔치 일 중 가장 큰일 아닌가?

천수장 총관(總官)인 추풍검사(秋風劍士) 와룡웅(臥龍雄).

그는 빈객들 중 귀빈만을 영접했다.

하나 그 수 또한 만만치 않아 연신 웃어 보이며 포권지례를 취했으나, 눈가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노인이 멀리 보이는 정문을 향해 걸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깡마른 회의노인과 청수한 풍모에 학창의를 산뜻하게 걸친 노인.

삼 년 전 낙양 부영산에서 냉한웅을 두고 옥신각신했던 중원광인(中原狂人),

아니 중원일괴(中原一怪) 공문건(孔文建)과 성수마의(聖手魔醫) 여소량(呂紹梁)… 바로 그들이었다.

"오늘… 일이 터질 것 같지 않나?"

공문건의 물음에 여소량은 점잖게 수염을 쓸어 내렸다.

"태검장이라면 모를까? 그 자가 감히 천수장을 넘보지는 못할 게야."

"백골방(白骨幇)의 세력이 그토록 대단한 줄은 몰랐는걸."

"오죽하면 태검신노(太劍神老)가 자기 딸과 제자의 혼례를 남의 집에서 치르게 했겠나?"

공문건은 핏발 선 눈을 희번득거렸다.

"늙은 말이 풋콩을 더 좋아한다지만… 백골마제(白骨魔帝), 그 늙은 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노마(老魔)가 원하면 얼마든지 처녀 장가를 들 수가 있지.

그러나 가문 좋은 재녀(才女)에다 절색(絶色)을 겸한 처녀만을 욕심내니, 문제가 아닌가."

"하기사 양 다리 사이에 달린 것 온전한 사내치고 낙양일색을 탐내지 않을 이, 누가 있겠나?"

"예끼, 이 사람! 그럼 난 불구란 말인가?"

"크흐흐… 아니란 증거도 없으니… 어쨌든 어느 쪽으로 일이 벌어지건 간에 애석한 일이야."

공문건이 애석하다 한 말의 뜻이 뭔지 알고 있는 여소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태검신노가 그 자를 철석같이 신임하니…."

순간, 공문건의 안색이 냉랭하게 변했다.

"비룡서생인지 독사 새끼인지 하는 그 놈은 언젠가 세상에 큰 해악(害惡)을 끼칠 거야.

모두가 눈이 어두워 진면목을 보지 못하니, 안타까워 미치겠군."

"자네는 그토록 그 때의 일을 잊지 못하겠나?"

"……."

공문건이 그답지 않은 표정으로 침묵하자, 여소량은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잊어버리게. 냉한웅이란 애는 어차피 반년을 넘기지 못할 목숨이었으니까."

공문건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독사 새끼가 그 애를 태검장까지만이라도 데려다 놓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었지 않은가?"

여소량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그의 눈을 마주 응시하며 위로했다.

"다시 만났더라면 더욱 가슴이 아팠을 걸세."

"그랬을 테지. 죽어 가는 모습을 봐야 했을 테니.

하지만 그 애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만난 두 명의 불가사의(不可思議)중 하나이네."

"다른 한 명은 누구인가?"

공문건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대답해 줄 수 없네.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끔찍스러운 일이니…."

순간, 그의 전신에서 광기 어린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째서 그가 누군지 물으면 매번 흥분하고 광기를 일으키는 걸까?'

여소량은 핏발 선 그의 눈과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이 때 천수장 정문 앞에 서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는 인물이 눈에 들어오자, 오른손을 들어 가리켰다.

"공가(孔哥)야, 저길 좀 봐라."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공문건의 표정이 반가운 듯, 골치 아픈 듯 묘해졌다.

"개방의 노화자(老化子)가 아닌가?"

"괴개(怪 )가 이토록 신나는 일에 빠질 리 없지."

"두 명의 소괴(少怪)들은 어쩌고, 혼자 온 걸까?"

"글쎄, 하지만 이런 자리에 빠질 위인들이 아니니… 틀림없이 올 거야."

철지영개는 총관인 추풍검사 와룡웅을 붙잡고 떠들어 대느라

이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줄조차 몰랐다.

"이 바짝 마른 가죽이 기름에 흠뻑 젖을 만큼 먹을 생각인데,

과 안주를 너무 많이 축낸다고 내쫓지는 말 게나."

그에게서 나는 악취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한데 누더기옷까지 훌쩍 들춰 두껍게 때가 덮인 뱃가죽을 내밀자, 
와룡웅은 아침에 먹은 회과육(回鍋肉)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르는 듯했다.

와룡웅은 구역질을 참으며 두 손 싹싹 빌었다.

"방주님, 제발 들어가 주십시오. 모든 게 풍족하니, 원하시는 만큼 드시다 가십시오."

"으흐흐흐… 고마우이. 내 귀여운 제자 놈들은 도착했는가?"

와룡웅은 푹 고개를 숙여 찌그러진 표정을 감추며 대답했다.

"개방제자들은 아직 한 명도 오지 않았습니다."

"어허, 그럴 리가? 아마 소걸군 때문에 늦는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두 소괴(少怪)들의 잽싼 발걸음으로 이토록 늦을 리가 없지."

순간, 와룡융은 기겁을 해 벌떡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추추귀개나 월녀개 말고도 다른 괴물이… 아니, 제자가 있단 말입니까?"

"아암, 경사는 천수장에만 있는 것이 아닐세.

새로 맞이한 제자야말로 괴개 중의 괴개라 할 수 있지. 

명호는 소걸군(少乞君)!"

와룡웅의 표정은 아예 사색(死色)으로 변했다.

'소걸군이라고? 이건 또 얼마나 끔찍스런 괴물일까? 세 명의 괴개만으로도 벅찬데…….'

이 때, 철지영개가 명령을 하듯 침을 퉁겼다.

"총관, 소괴들이 도착하는 즉시 후원으로 데려와 주게."

와룡웅은 그가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뒷덜미에 대고 소리쳤다.

"직접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본장의 곳곳에는 위험한 기관들이 설치되어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이히히히… 맘에 없는 말 말게. 속으론 이 노괴(老怪)가 기관을 잘못 건드려 죽었으면 좋겠지?"

철지영개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대꾸하며 안쪽 깊숙이 사라져 갔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공문건과 여소량도 흘낏 마주 보곤 와룡웅에게 다가갔다.

와룡웅은 성수마의 여소량과 안면이 있는지라 크게 반가워했다.

"여대인(呂大人), 장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드십시오."

여소량은 빙긋 미소지어 답례했다.

"알았네. 계속 수고하게나."

그가 공문건과 더불어 안으로 사라진 뒤, 와룡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오늘은 천중사기가 모두 모이겠군. 그런데 같이 온 노인은 누굴까?"

이 때, 정문 앞의 인파가 매우 술렁였다.

"드디어 개방의 두 소괴들이 나타났네그려."

"앞으로 볼 만한 구경거리가 계속 벌어지겠군. 그나저나 다른 한 명은 누구지?"

"허리에 찬 매듭을 보니, 일결제자인걸. 나이가 많아야 약관(弱冠) 전후인 듯싶은데 어떻게…?"

"뭔가 남다른 능력을 지닌 것만은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나이에 일결매듭을 두를 수는 없지."

물결이 갈라지듯 사람들이 급히 길을 내주었다.

때가 덕지덕지 낀 거지들이 악취를 풍기며 밀고 들어오는데, 어찌 안 비키고 배길 것인가?

지독히도 못생긴 추추귀개(醜醜鬼 )와 개방 유일의 여거지 월녀개(月女),

그리고  마른 명태 마냥 여윈 소걸군은 확실히 좋은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추호도 거리낌없이 중인들의 이목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즐기듯 여유 있게 걸어오고 있었다.

와룡웅은 얼른 수하들을 제치고 나섰다.

세 명의 소괴들을 대단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시끄러워짐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어서 들어가시지오. 귀방의 방주께서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귀빈을 대하듯 맞이하자, 추추귀개는 흐뭇해 입을 크게 벌렸다.

"으허허허… 총관께서 이렇듯 환대해 주시니, 저희 사형제는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월녀개는 꼴 같지 않게 점잖을 빼는 추추귀개의 모습을 보며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사형이 이렇게 점잖아지셨으니, 아무래도 오늘 일이 평탄치 못하겠네."

오늘 일?

혼례식이 평탄치 못하다?

제대로 치뤄지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경사스러운 날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월녀개의 말은 의미심장했으나, 이를 새겨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추추귀개는 새우눈을 바짝 휩뜨며 그녀를 나무랐다.

"본 협개(俠 )는 본시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 아니더냐?

남들이 들으면 누구 마냥 군자인 척한다고 오해하겠다."

"흥! 사형이 군자라면, 월녀개는 구천선녀(九天仙女)다."

이들이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를 않고 입씨름만 벌이자, 냉한웅이 끼여들었다.

"좋아하지들 마라. 총관은 우리들이 귀찮은 존재라 빨리 처리하려는 것뿐이야."

"……."

추추귀개와 월녀개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노려보자,

와룡웅은 얼굴을 붉히며 극구 변명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오. 귀방의 방주께서 특별히 당부를 하셨기에……."

"말이 길어지는 만큼 양심을 더 속이게 되니, 그만 입 다무시오."

냉한웅은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들며 정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추추귀개와 월녀개도 서둘러 뒤따라가며 키들키들 웃었다.

혼란스런 눈빛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와룡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자가 소걸군인가? 두 소괴보다도 상대하기가 훨씬 까다롭겠는걸.'

다음 순간,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수하에게 명을 내렸다.

"개방제자들을 천수전(千手殿)으로 안내하거라."

"지금 천… 수전이라 하셨… 습니까?"

수문위사는 크게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

그럴 것이, 천수전은 최상빈(最上賓)만이 묵는 영빈관이었기 때문이다.

일파 종주나 배분 높은 무림인들만이 묵는 그 곳에 개방방주의 직전제자들이라곤 하나, 거지들을……?

와룡웅은 단호한 음성으로 그를 꾸짖었다.

"어서 천수전으로 모시지 않고 무얼 하는 거냐?"

와룡웅은 황급히 달려가는 수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울창한 수림(樹林)에 둘러싸인 정전(正殿)은 웅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장정 두 사람이 양 팔을 벌려 껴안아야 겨우 손이 맞닿을 거대한 기둥들.

곡선으로 휘어진 처마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았고,

지붕의 유리 기와는 어찌나 매끄러운지 햇살을 퉁겨 냈다.

정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으나, 수림에 발을 들여놓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기관이나 기진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수문위사는 냉한웅과 추추귀개, 월녀개를 정원(庭園)으로 안내했다.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가 제 철마저 잊은 채 만발한 그 곳은

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다시 봐도 기막히게 훌륭하군. 마치 신의 조화 같아."

추추귀개가 연신  침을 튀기며 극찬하였지만,

냉한웅과 월녀개는 묵묵히 걷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으나, 생각은 각각이었다.

월녀개의 머리 속은 소걸군에 관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냉한웅의 머리 속엔

과거 자신과 악연을 맺은 인물들을 어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추추귀개는 입으로는 열심히 떠들어 대고 있으나,

눈알은 쉴새없이 전후좌우로 굴리는 것이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후원(後園)으로 통하는 월형문을 지나자,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그 곳엔 사람을 별로 찾아볼 수 없었고,

포릉포릉 날며 지저귀는 새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안으로 좀더 깊숙이 들어가니,

정전만큼 웅대하지는 않았으나 화려함은 훨씬 더한 전각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칠을 한 현판에 새겨진 필체가 용사비등(龍蛇飛騰)했다.

<천수영웅전(千手英雄殿)>

장주인 천수제갈(千手諸葛) 유연(兪蓮)의 거처이자 영빈관인 것이다.

좌우 양쪽에는 금의위사(錦衣衛士)들이 위용 있게 도열해 있었다.

괴개 일행을 안내해 온 수문위사가 그들 중 거구의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저분들은 최상빈(最上賓)입니다."

중년인은 의혹 어린 표정으로 흘낏 괴개들을 바라본 후, 물었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총관대인께서 속하에게 분명 천수전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그것도 영웅전(英雄殿)이 아니라 천수전으로…."

중년인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는 정중하게 괴개들을 맞이했다.

"원로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부디 편히 쉬시다 가시길 바랍니다."

그가 포권지례를 취하자, 추추귀개도 황급히 포권을 해 답례하며 말을 걸었다.

"천수장에 명성 높은 일검(一劍), 일도(一刀)가 있단 말을 들었는데…

혹시 대운도(大雲刀) 노경(盧敬) 대협이 아니시오?"

"노모(盧某)가 대운도임은 맞으나, 명성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짐작대로 천수영웅총령(千手英雄總領)이시군요. 이 거지는 추추귀개라 하오."

"아, 개방방주의 직전제자이신… 그럼 곁에 계신 여협은 월녀개이시겠군요?

그런데 노모의 눈이 어두워 또 한 분은 알아보지 못하겠으니,

존명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냉한웅이 입을 열려는 순간, 월녀개가 재빨리 가로챘다.

"소걸군이에요. 우리도 더 이상은 모르니, 묻지 마세요."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이었으나, 노경은 빙그레 미소지을 뿐 더 묻지 않았다.

노경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피며 냉한웅은 내심 거듭 감탄했다.

'총관과 총령, 모두가 걸출하구나. 강장 밑에 약졸은 없는 법.

러니 천수제갈의 위인됨은 얼마나 대단할꼬?'

월녀개의 표정도 전에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예상 밖이야. 천수장의 인물들도 생각했던 것보다 범상치가 않고…

사형은 무슨 이유로 저토록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걸까?'

노경의 안내로 천수전 안에 들어선 순간, 그들 일행에게 의혹 어린 시선이 모아졌다.

"개방의 소귀(少怪)들이 아닌가?"

"저 괴물들을 여기까지 끌어들이다니…."

"그보다 저 젊은 거지의 허리를 보게. 일결제자의 매듭이 걸려 있는데, 누군지 아나?"

이렇게 천수전 안이 술렁이고 있을 때, 상석에 앉아 있던 금포노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노총령, 어찌 된 일인가?"

홍안(紅顔)에 자애로운 미소가 감돌고,

눈부신 은염(銀髥)이 가슴을 덮은 그를 향해 노경이 황망히 허리를 굽혔다.

"총관이 이분들을 최상빈으로 모시라 했기에 따랐습니다."

천수장의 총령이 상전으로 대하는 인물이라면 장주인 천수제갈(千手諸葛) 유연(兪蓮)밖에 더 있는가?

일순, 유연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는 거만함이 추호도 섞이지 않은 음성으로 빈 자리를 권했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 많았소이다. 어서 앉아 쉬도록 하시지요."

추귀개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신분을 밝혔다.

"후배는 추추……."

이 때, 어디선가 벼락같이 호통이 튀어나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괴야, 네놈의 추한 상판을 보고도 누군지 못 알아차릴 사람은 장님밖엔 없을 게다.

꼴같잖게시리 예의바른 척 말고 어서 이리 오너라."

철지영개의 익살에 사방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괴사부(怪師父), 그렇게 꼭 무식한 티를 내어 유식한 제자 망신 줘야겠소?

거지란 이래서 평생 도움이 안 된다니까."

추추귀개의 자기는 거지 아닌 듯한 말투에 장내엔 다시 웃음보가 터졌다.

그가 입을 비쭉이며 철지영개의 곁으로 가자, 월녀개와 냉한웅도 그 곳에 자리를 잡았다.

냉한웅은 자리에 앉은 후, 내부를 휘둘러 보았다.

화려함과 품격이 고루 어우러진 꾸밈으로 구석구석까지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바닥에 깔린 털융단은  발목까지 빠져들 만큼이나 푹신했고,

탁자와 의자들도 백향목(柏香木)을 섬세하게 조각하여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냉한웅의 시선을 붙잡아 둔 것은 동편과 서편 벽을 장식한 서가(書架)였다.

동편 서가에는 무가(武家)답지 않게 고서(古書)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는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 좌씨춘추전(左氏春秋傳), 황청경해(黃淸經解), 

왕양명어록(王陽明語錄),  한비자(韓非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등의 병가집(兵家集)과

묵자(墨子),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도가집(道家集)등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온갖 책자가 총망라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편 서가에는 귀곡자(鬼谷子)의 귀곡진해(鬼谷眞解)와 천문지리(天文地理),

기관건축(機關建築), 토목지학(土木之學), 진법(陣法) 등에 관한 책자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냉한웅은 내심 혀를 찼다.

'저 많은  책자들이 하나같이 표지의 필체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독특한 점으로 미루어, 일반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절대로 아니다.

천수제갈, 역시 대단한 위인이로군.'

쓰윽-!

동서 편을 훑어보는 사이, 책자들의 표지에 적힌 글씨들을 읽고 필체까지 분석한 것이다.

오나가나 그의 행동을 주시해 온 월녀개가 어찌 이런 반응을 눈치 못 챌 것인가.

'문사(文士)라 해도 이런 경우엔 좌중의 인물부터 살피는 것이 상례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허공에 걸린 달을 움켜쥐려 애쓰던 계집아이.

이젠 손을 뻗으면 뻗은 그만큼 더 높은 곳에 떠 있는 것이 달임을 알게 된 그녀는

애타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 때 황색 가사에 단목묵주(丹木默珠)를 목에 건 노승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유시주께서 어서 빈승의 안목을 높여 주시길 바라오."

백미(白眉) 꼬리가 귀밑까지 내려온 그는 눈에도 청량한 느낌을 주는 신광(神光)이 어려 있어,

무척 고아(高雅)해 보였다.

철지영개가 냉한웅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소림사(少林寺) 장경각주(藏經閣主)인 법성대사(法成大師)이다. 
네가 잘 사귀어 놓으면 후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처럼 가느다란 음성.

전음(傳音)을 들은 냉한웅이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철지영개의 시선은 천수장주인 천수제갈에게 향해 있어, 
아무도 이를 발견치 못했다.

유연은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을 향하자, 의미 모를 미소를 띄웠다.

그는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폭(幅)이 거의 일 장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그림이 그 곳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림이라고 하기보다는 무슨 도형(圖形) 같았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원과 복잡한 선의 흐름….

유복(儒服) 차림의 중년인이 더 참을 수 없는 듯 다급한 외침을 토해 냈다.

"유장주(兪莊主), 여기에는 그것을 알아볼 사람이 없으니… 어서 속시원히 알려 주십시오."

그는 쌍검을 교차하여 매고 있었는데, 눈매가 매처럼 날카로웠다.

유연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오신 분도 있으니, 금대협께서 조금만 더 참아 주시는 게 어떠하오?"

금대협이라 불리운 중년인은 힐끔 철지영개 쪽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저분들은 음식에 더 관심이 있을 터이니, 신경 안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말투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장내가 조용해졌다.

중인들 앞에서 면박을 당하자, 평소 노괴(老怪)로 통하던 철지영개의 표정조차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미녀처럼 작고 예쁜 입술이 좌우로 실룩였고,

부리부리한 호안(虎眼)에서는 강렬한 광망이 폭사됐다.

이것은 소괴들인 추추귀개와 월녀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냉랭한 눈빛으로 금대협이라는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한데, 소걸군이라 불리우는 냉한웅의 표정은 남의 집 불 구경을 하듯 여유작작했다.

돌연,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뉘집 개(犬)인지 모르겠으나 너무도 시끄러우니,

끌어다가 요리해 먹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하지만 머리통은 방주께서 드시오. 
거기에는 더러운 아가리가 달려 있어서…."

장내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금가 중년인은 학질 걸린 사람 마냥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치미는 분노를 누를 수 없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순간, 냉한웅의 음성이 또 들려 왔다.

"난 아랫부분은 절대로 먹지 않을 거요. 지린내가 무지하게 날 테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연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소괴의 입이 노괴보다도 험하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본 장주 역시 두 손 들었소이다."

장내의 중인들 중 노강호(老江湖) 아닌 자가 어디 있는가?

그들은 여량이 험한 국면을 넘기기 위해 짐짓 대소를 터뜨리자, 
따라서 연신 웃음을 토해 냈다.

"와하하하……!"

"어허허허……!"

유연의 재치로 분위기가 되살아났지만 한 사람, 금가 중년인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아니, 콧구멍에서 연기가 푹푹 쏟아질 만큼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쌍비검(雙飛劍) 금운성(金雲星)이 누구인가?

사십대의 젊은 나이에 대문파(大門派) 화산(華山)의 장로가 된 고수가 아니던가?

한데, 강호에 명성을 떨치는 인물들만이 모인 자리에서 봉변을 당하다니….

이런 심중을 헤아린 여량은 분위기를 더욱 고양시킬 목적으로 음성을 높였다.

"여러분이 그토록 원하시니, 이젠 기화(奇畵)에 관해 설명토록 하겠소이다."

이 때, 냉한웅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금 전에 어느 무식한 인물의 주둥이에서 본방을 비웃는 망언(妄言)이 나왔으니,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금운성은 이 자리가 함부로 성질을 부릴 곳이 아닌 까닭에, 울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하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말라빠진 소괴(少怪)! 네가 그럼 저 그림의 내력을 안단 말이냐?"

냉한음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눈짓으로 월녀개를 가리켰다.

"그 정도 식견도 없이 어찌 천하대방(天下大幇)인 개방의 일결제자 노릇을 하겠느냐?

저쯤은 오결제자도 알 만한 상식이니, 월녀개가 대신 대답해 줄 것이다."

순간,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월녀개에게로 쏟아졌다.

월녀개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나, 낭패한 기색은 나타나지 않았으니….

사실 그녀는 그림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걸군, 어느 새 나의 표정을 읽었단 말인가? 그는 정말…!'

사매의 혜지가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있는 추추귀개는 때를 만난 듯 떠들어 댔다.

"개방 거지들이 모르는 것이 천하 어디에 있는가?

나도 알고 있지만, 사매가 대신해 저분들의 식견을 좀 넓혀 주어라."

월녀개는 원망과 감탄이 뒤섞인 시선으로 냉한웅을 흘긴 뒤,

고개를 획 돌려 벽에 걸려 있는 기화를 바라봤다.

"저 기화는 혹시 천화자(天畵子)의 유성반혼도(流星返魂圖)가 아닌지요?"

일순, 유연의 눈가에 경악의 물결이 스쳐 지나갔다.

"어허! 오백 년 전의 화성(畵聖)인 천화자와 그가 그린 유성반혼도를 알다니…

낭자의 박식함에 노부도 진정 탄복했소."

하지만 맞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쩍 하면 입맛이라고, 평생을 강호 밥 먹은 중인들이 이 점을 놓칠리가 없었다.

"맞은 것이요, 아니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어 대자, 유연은 씁쓰레한 미소를 흘렸다.

"기실 이 기화는 유성반혼도와 흡사하오. 하지만 그것은 아니외다."

이 때, 기다렸다는 듯 금운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금모(金某)는 이럴 줄 알았소이다.

거지 계집이 어디서 천화자의 유성반혼도란 말은 귀동냥 해 듣고선…."

그의 말이 너무도 지나치다 싶게 느껴진 중인들은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이 때, 냉한웅이 손을 흔들며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아직 좋아하긴 이르다.

월녀개가 날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비슷하게 틀린 대답을 한 것이니까."

"흥! 누가 거지 아니랄까 봐 거지 발싸개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군."

금운성이 코방귀를 뀌었으나, 냉한웅은 못 들은 척 설명을 시작했다.

"저 기화는 틀림없이 천화자가 그린 것이오. 

하나, 이름을 따로 붙이지 않은 무명도(無名圖)로 유성반혼도는 이후에

이것을 참고로 다시 그린 것이외다."

다음 순간, 유연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이를 본 노강호(老江湖)들은 감탄 어린 시선으로 냉한웅을 보며 웅성거렸다.

개방의 일결제자가 그들도 모르는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냉한웅은 주변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변함없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무명도엔 보다시피 두 개의 커다란 원과 일곱 개의 점,

그리고 조금 작은 열두 개의 원과 스물여덟 개의 선이 쌍극연환(雙極連環)의 형태로 얽혀 있소이다."

"네놈은 지나치게 시각을 끌고 있구나. 실제보다 많이 아는 척 포장하려는 속셈이 아니냐?"

금운성이 차갑게 비웃었으나, 약간은 풀 죽은 표정이었다.

냉한웅은 이마저도 무시해 못 들은 척했다.

그는 유유한 목청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저 두 개의 원은 태양(太陽)과 태음(太陰),

즉 해와 달을 가리키고 일곱 개의  점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좌표지요.

그리고 열두 개의 작은 원은 삼성구요(三星九曜)의 행로를,

나머지 스물여덟 개의 선은 이십팔숙(二十八宿)을 나타내는 겁니다."

냉한웅은 유연의 얼굴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또 사방엔 천살(天殺), 천기(天機), 천고(天孤), 천부(天富)를 나타내는 상징이 그려져 있으니… 

이는 천화자가 미래에 관한 예언을 그려 내려 했던 것으로 짐작되오이다."

이 때, 유연의 표정은 정말 볼 만했다.

경악과 흥분, 그리고 너무나 복잡한 감정으로 인해 점점 더 경직되어 가고 있었다.

격동한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의미는 정반대지만 금운성의 얼굴 역시 진홍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또한 이들과 다른 의미의 격동을 억누르는 여인 및

자신이 알아 낸 양 자랑스레 떠들어 대는 추한 용모의 거지 등 다양한 격동의 물결이 장내에 일렁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냉한웅만은 주위의 변화를 전혀 못 느끼는 듯 
무명도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