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3장 환락(歡樂)의 밤

오늘의 쉼터 2016. 5. 31. 15:07

제3장 환락(歡樂)의 밤

 

심야(深夜).

어스름한 달빛에 휩싸인 후원(後園)은 풀벌레 울음과 스쳐 가는 바람만이 정적을 깨웠다.

이 때 상처 입은 짐승의 눈빛인 양 살의(殺意)가 번뜩이는 광망이 침실 창가를 더듬고 있었다.

"차라리 함께 죽어 버리고 말까?"

분노에 떨리는 음성을 토해 내는 중년거한(中年巨漢).

그의 등 뒤에 걸려 있는 대두도(大頭刀)는 보통 크기보다 배나 되어 무척 위맹해 보였다.

이토록 엄청난 몸집과 장도(長刀)를 지닌 무사는 중원무림을 뒤져도 또 없을 듯 싶었다.

하나, 무공을 전혀 모르는 무사이기도 했으니….

이런 인물은 중원무림이 아니라 천하무림을 몽땅 뒤져도 단 한 명만이 있을 뿐이다.

일도경혼(一刀驚魂) 강무웅(姜武雄).

그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옥봉루에서 허풍을 떨다가 청운보주에게 죽음을 당할 뻔했던 강무웅이

어찌해서 야심한 시각에 옥봉의 침실 주위를 배회하는 것인가?

만보공자(萬寶公子) 냉한웅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차가운 흙 속에 묻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온 데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기 때문일 텐데….

자신의 목숨을 던져 가면서까지 얻으려는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침실 내부는 호남(湖南) 및 중원 각지의 풍류객들 입에 오르내리

옥봉의 화명(花名)만큼이나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세밀하게 장식된 금옥(金玉) 장식품과 수백 년이 된 백향목(白香木)으로 짜여진 가구들…

서역(西域)에서 가져온 푹신한 융단이며 비단 휘장에 수놓인 자수(刺繡)는 

평(平), 광(光), 제(齊), 운(韻), 화(和), 순(順),  세(細), 밀(密)…

그 어느 것 하나 살아 있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특히 창가에 자리잡은 자홍색(紫紅色) 침상은 보기만 해도 가랭이 사이가 불끈 달아오르게 했다.

그러나 침실의 주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원탁 위에 놓인 청동 향로가 단향(檀香) 내음만 물씬 풍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 때, 안쪽 어디선가 고혹적인 음성의 권주가(勸酒歌)가 들려 왔다.

둘이서 잔 드는 사이 소리 없이 산꽃이 피어,
한 잔 한 잔 들자거니 다시 한 잔 먹자거니….
난 이대로 쓰러져 자고파 그댄 돌아가도 좋으리.
내일 아침 오고프면 부디 거문고 안고 오시라.

침실 문이 사르르 열리며 한몸인 양 밀착된 중년 남녀가 들어섰다.

그들은 술에 취한 듯 얼굴이 붉게 물들여 있었으며, 발걸음 역시 무거웠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삼십대의 농염한 미부(美婦).

갸름한 얼굴과 초생달처럼 휘어진 눈썹, 시선을 몽땅 빨아들일 듯 깊고 검은 눈동자,

그리고 매끈하게 솟구친 콧날 아래 조그맣게 자리잡은 상큼한 입술은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목덜미 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곡선,

특히 얄팍한 나삼 속에 숨겨진 듯 내비치는 쌍옥봉(雙玉峯)이야말로 최고의 무기라 할 수 있었다.

유백색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그녀의 가슴은 매우 큰 편이긴 하나,

꽃봉우리처럼 봉긋 튀어나온 유두(乳頭)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크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가히 조물주의 걸작이라 할 만한 여인, 침실의 주인인 옥봉이었다.

중년사내는 별로 걸출한 생김새가 아니었다.

하나, 눈빛은 심장을 꿰뚫을 듯 강렬했다.

그는 방 안을 휘둘러보며 마른 입술에 침을 묻혔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재물이나 무공, 양쪽 다 강호에서 행세 깨나 할 만큼 지니고 있으니… 뭐든 이루어 주겠소."

순간, 옥봉의 눈이 반짝 광채를 발했다.

그녀는 더욱 선정적인 몸짓으로 교소를 터뜨렸다.

"대협께선 정말 마음이 넓으시군요. 천녀는 그저 감복할 따름입니다."

중년사내의 욕정에 타오르는 눈빛이 핥듯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따라 내려갔다.

탱탱하면서도 한없이 보드라운 듯한 젖가슴은 그를 미칠 듯 달아오르게 했다.

'이처럼 성욕을 자극하는 젖가슴은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소문보다도 훨씬 더한 요물이로군.'

그의 시선은 한참이나 옥봉의 가슴에 머무르다 더 아래로 내려갔다.

거기에도 탄력 있고 매끄러운 살결이 멋진 굴곡(屈曲)을 이루고 있었다.

세류요(細柳腰)의 가느다란 허리와 터질 듯 튀어나온 둔부,

허벅지 사이에 자리잡은 비경(秘境)은 얼마나 절묘한 것인지 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였다.

"옥봉의 부탁이라면 죽음도 불사할 것이니, 어서…."

중년사내가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를 토해 내자,

옥봉은 입김이 그의 입술에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했다.

"진심이시옵니까?"

순간, 향긋한 사향(麝香) 내음 어우러진 육향(肉香)이 중년사내의 코끝을 자극했다.

자극은 섬전처럼 아래로 내려꽂혀 가랭이 사이의 물건을 걷잡을 수 없이 팽창시켰다.

"물론이오. 손모(孫某)는… 약속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이외다."

손가 성의 사내는 와락 옥봉을 끌어안았다.

"어멋!"

옥봉이 교성을 지르며 쓰러지듯 품에 안기자,

손가는 그녀를 껴안은 채 침상 위로 몸을 날렸다.

금침에 등이 닿기 무섭게 옥봉은 양 팔을 뻗어 손천후의 허리를 힘껏 휘감아 당겼다.

더욱 거친 행동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자세.

이에 응답하듯 손가도 쫘악! 그녀의 나삼을 찢어 던져 버렸다.

손가는 옥봉이 내민 촉촉한 입술보다 아래로 고개를 숙여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러움에 파르르 떠는 유두를 얼른 삼켜 버린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내인 듯 느껴졌다.

손가는 계속해서 여인의 성역을 침범해 갔다.

땅벌처럼 그녀의 달콤한 입술을 탐닉하며 손으로는 두 개의 육봉(肉峯)을 우악스럽게 잡아 비틀었다.

"으흑!"

옥봉 역시 백사(白蛇)인 양 꿈틀거리며 연신 비음(鼻音)을 흘려 댔다.

그녀의 몽실몽실한 살 덩어리가 입 안을 휘저어 대자,

손가는 이룡희주(二龍戱珠)하듯 자신의 혀로 휘감아 상대했다.

"허억!"

드디어 손가의 손이 그녀의 비경을 향했다.

그가 비경을 숨긴 비단 조각을 민첩하게 뜯어 낸 순간, 옥봉은 사정없이 상대의 혀를 빨아들였다.

이어 하체 역시 무서운 흡입력으로 상대의 물건을 받아들여 절묘한 율동을 계속했다.

"으으음……!"

"흐으윽……!"

그녀의 흔들림과 손가의 난폭함은 갈수록 도가 더해져 방 안의 공기를 뜨겁게 팽창시켰다.

하나, 열락의 끝에 도달한 후엔 나른한 감각만이 그들의 전신을 엄습했다.

"……."

손가가 미끄러지듯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자,

옥봉은 부끄러운 듯 눈을 흘기며 금침을 끌어 덮었다.

"아이잉… 미워!"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손가는 다시 손을 내밀어 조물주의 걸작을 더듬었다.

"본 맹주의 힘이 그토록 좋았더냐?"

일순, 옥봉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맹주라니요?"

손가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를 보며 묘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움켜쥐더니 위로 낚아챘다.

순간, 매미가 허물을 벗듯 껍질이 확 벗겨지며 주름살 투성이인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손가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는 강남녹림의 총표파자인 탈혼비마(奪魂飛魔) 손학위(孫學爲)다.

부탁이 뭔지 말해 보거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옥봉은 찰싹 그에게 안기며 아양을 떨어 댔다.

"천녀가 강남녹림맹주를 모시게 되다니… 삼생(三生)의 영광이와요."

손학위는 거만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옥봉아! 천하에 내가 해 내지 못할 일이란 없으니, 어서 원하는 것을 얘기해라."

"으흥… 성미도 급하시긴…."

옥봉이 뜸을 들이자, 노강호인 그는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했다.

"어서 대답 못할까?"

이어 옥봉의 결연한 음성이 뒤따랐다.

"죽여 주십시오."

"누구를?"

"장강어옹(長江漁翁)!"

찰나, 손학위는 퉁겨지듯 상체를 일으켰다.

"안 돼! 그 자만은 손댈 수가 없다."

그 바람에 옥봉의 눈부신 상반신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강남녹림맹주의 신분이시라면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요?"

옥봉이 따져 묻자, 손학위는 주섬주섬 옷을 걸치며 고개를 저었다.

"장강어옹을 해치우는 것은 쉽다.

하지만 지옥야차부의 호위를 받고 있으니… 다른 것을 요구해라."

"강남녹림맹주께서 이토록 담이 작으실 줄은 몰랐어요."

"뭐래도 좋다.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녹림맹을 점창파와 같은 치욕을 당하게 할 수 없지 않느냐?"

대의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지옥야차객에게 자신의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 두려워서임이 뻔했다.

옥봉은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애원했다.

"평생을 몸 바치라고 해도 따르겠습니다. 제발 천녀의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손학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한 결과를 예상치 못한 건 아닐 텐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흥! 너는 이미 노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 유혹한 게 아니었느냐?"

그의 비웃음에 옥봉의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진면목이 아니라는 건 눈치챘습니다만…."

손학위는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앙큼한 계집! 변명은 필요 없다."

순간, 창살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인영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더러운 늙은이!"

분노의 일갈(一喝)에 손학위는 당황했다.

자신의 신분을 알면서도 대들 정도라면 결코 하수일 리 없지 않은가?

더구나 상대의 엄청난 몸집과  장도(長刀)는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대체 누굴까? 이 정도 위풍 있는 인물이라면 결코 무명지배는 아닐 텐데?'

상대의 살기 찬 시선에 압박감을 느낀 손학위는 음성으로라도 누를 셈으로 고함쳤다.

"너는 누구길래, 감히 노부의 일에 끼여드는 거냐?"

강무웅도 마주 고함을 내질렀다.

"쓸개 빠진 네놈 따위는 알 자격도 없다."

자기가 제멋대로 지어 낸 일도경혼(一刀驚魂)이란 명호를 댔다가는 또 들통날까 봐,

이번엔 한 술 더 떠 거드름을 피워 댄 것이다.

손학위는 가슴이 섬득했으나 체면상 쉽게 물러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비를 베푸는 척 허세를 부렸다.

"정녕 간덩이가 부었구나. 하나 옥봉의 방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으니, 어서 물러가거라."

가히 난형난제(難兄難弟)의 입씨름 아닌가?

강무웅은 태산처럼 버티고 선 채 눈을 부라렸다.

"버러지만도 못한 늙은 놈의 말에 물러설 이 어른이 아니시다. 네놈이나 빨리 꺼져라."

이런 모욕을  당하긴 평생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막내 아들 정도밖에 나이가 안 들어 보이는 놈에게….

살갗이 뒤집어질 지경으로 화가 난 손학위는 비호처럼 몸을 날리며 쌍장을 휘둘렀다.

"네놈은 관을 보아야만 눈물을 흘리겠구나!"

순간, 자지러지는 경악의 외침이 실내를 뒤흔들었다.

"안 돼요!"

그러나 이미 장력은 발출된 후였다.

다음 순간, 강무웅의 가슴 복판에서 가죽 북 울리는 음향이 일었다.

펑-!

"우욱!"

그의 거구가 핏물과 신음을 함께 토하며 주르르 밀려나 바닥에 벌렁 나자빠졌다.

"강대인(姜大人)!"

옥봉은 널브러진 강무웅의 몸 위를 덮쳤다.

그녀는 손학위가 계속 공격을 가하지 못하게 자신의 나체로 그를 덮은 채 울먹였다.

"무공이라곤 눈꼽만큼도 모르시는 분이…  어찌 이리도 무모하세요?"

옥봉의 말에 손학위는 어깨를 움츠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조차 없더라니….'

강호 경험이 풍부한 그로서도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십 성 장력에 격중당했으니, 필시 절명할 것이다. 아무래도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좋겠군.'

그는 슬쩍 신법을 전개해 부서진 창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 침실 안에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자신이 나체(裸體)인 줄 조차 깨닫지 못한 옥봉과

목숨이 경각에 달린 강무웅뿐이었다.

"이 못난 계집이 뭐 그리 좋다고, 곁을 떠나지 않다가 이런 변을 당하시나요. 흐흑흑…!"

강무웅은 힘겹게 손을 들어 흐느끼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내리며 웃어 보였다.

"꿈에 그리던 옥봉의 가슴에 안겨 죽어 가다니… 여한이 없소. 다만…."

무공 말고도 별로 배운 것이 없어 말투가 지나치게 솔직했지만, 
그 진실한 감정만은 옥봉의 가슴을 마구 헤집었다.

그는 옥봉의 정(情) 어린 시선을 받자,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으흑… 엉엉…!"

하지만 설움이 복받쳐 통곡을 터뜨린, 변한 옥봉을 두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강무웅은 눈에 힘을 주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음성도 더욱 또렷해졌다.

"소림 삼십육대 제자인 법명대사(法明大師), 무당파의 상명진인(尙明眞人), 신옥검객(神玉劍客),

혈풍상괴(血風商怪), 운창수사(雲昌秀士)…

당신은 그들을 몸으로 유혹했소. 하지만 남은 것은 무엇이오?"

"그만해요!"

옥봉이 뾰족하게 외쳤으나 그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마지막 부탁이니, 이제 그런 짓은 그만 둬 주시오."

명문정파의 불제자와 도인까지 관계했다니… 실로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대로 죽으시면 안 돼요. 옥봉의 죄는 어쩌라고…."

옥봉은 작고 보드라운 입술로 피로 얼룩진 그의 입술을 마구 부벼 댔다.

순간, 강무웅은 와락 그녀를 끌어안고 마주 입술을 빨았다.

옥봉의 교구가 으스러지는 듯 강한 포옹이었다.

더구나 그녀를 안은 채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으니….

"아니? 당신…?"

옥봉이 기쁨과 놀람, 그리고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니…

강무웅 역시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돌연 그가 대갈일성을 토하였다.

"만보공자(萬寶公子)!"

"갑자기 만보공자는 왜 찾는 거죠?"

"내가 청운보주의 장력에 당했을 때 구원해 주신 분이 만보공자라 하셨잖소?"

"그래요."

"내가 무공을 익히지 못했으나 강호를 오래 돌아다녀 주워 들은 풍월은 꽤 많소.

사실 그 날 이후 발걸음과 몸이 나는 듯 가볍게 느껴지긴 했지만…"

강무웅은 갑자기 무학의 대가로 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호낭중(江湖郎中 : 떠돌이 의원)에게 들은 말과 비교해 보니, 
나는 인간의 생사마저 초월하는 관문(關門)이라고 하여,

생사현관(生死玄關)이라 불리우는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타통된 것이 틀림없소.

조금 전 그 늙은이의 장력에 맞는 순간에도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저절로 그 곳으로 몰려 막아 내 준 듯한 느낌이었소."

아마 이 말을 다른 무림인이 들었더라면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임독양맥을 타통시키려면 희세의 영물(靈物)이나 영약(靈藥)을 복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삼 갑자 이상의 공력을 지닌 고수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스스로의 노력으로 타통시키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상승 내공과 삼 갑자 이상의 공력을 지닌 인물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기연을 얻기 전엔 도달이 불가능한 내공의 최고 경지가 아닌가?

옥봉은 표정을 안 보이려 살풋 고개를 숙인 채 실소(失笑)를 베어 물었다.

옥봉주루는 무림인들이 항시 들끓는 곳이라

그녀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생사현관 타통에 관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하나, 감정이 크게 격동된 강무웅은 이런 기색을 전혀 눈치 못 채고 계속 떠들어 댔다.

"석년(昔年)에 장백산에서 천 년이 훨씬 넘은 산삼(山蔘) 세 뿌리를 발견하여  먹은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만보공자께서 강모(姜某)를 치료하실 때 체내에 산삼의 약효가 잠재되어 있음을 아시고 
그걸 이용해 생사현관을 뚫어 주신 듯하오."

옥봉도 은근히 가슴이 설레였다.

'저이의 허풍이 워낙 세긴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강남녹림맹주의 전력을 다한 일 장을 맞고도 저토록 멀쩡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당장 만보공자를 찾아 나섭시다. 그분이라면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게요."

강무웅은 옥봉을 안은 채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순간, 그녀는 기겁해 비명을 질렀다.

"옷 좀 입고 가게 해 주세요."

두 사내.

새벽의 여명(黎明)이 움트는 외진 관도(官途) 상에서 정해진 운명(運命)인 듯 마주쳤다.

조용한 미소와 고고한 기품.

어느 한 군데 흠잡을 데 없는 백의미청년(白衣美靑年)과

때에 절고 누덕누덕 기운 옷차림에 비쩍 마른 체구의 평범한 얼굴 등,

대와 너무도 대조적인 청년 거렁뱅이.

신분과 갈 길 또한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각자 미녀를 한 명씩 안고 있었으니…

결코 우연으로만 돌릴 수 없단 느낌이 들지 않은가?

청년 거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여인이군. 하나, 내 여인보다는 떨어지는구려."

이어 그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해설피 구름은 성가에 떠돌고,
까마귀는 왜 이리도 자꾸 울어 대는가?
베틀에 진천 아가씨 오늘도 베를 짜네.
혼자만의 속삭임으로 푸른 실 엮어 가다,
물레북 손에 든 채 떠난 님 생각하니,
홀로 밤을 지새우는 규방(閨房)에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진다오.

그의 천박한  태도가 신경에 걸리는지 백의청년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백의청년이 계곡을 굽이치는 옥수(玉水)인 양 청량(淸莎)한 음성으로 물었다.

"보아하니 개방의 장로(長老)인 듯싶은데, 무슨 문제가 있소이까?"

청년 거지는 자신의 허리에 매어 있는 매듭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본 거지는 개방 일결제자인 소걸군이라 하오."

"소걸군, 당신이 안고 있는 여인은 독에 중독된 듯 보이는구려. 
하지만 특이한 제혈법(制穴法)을 사용하여 혈맥을 봉쇄한 것이오."

냉한웅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당신은 의리(醫理)를 깊이 깨우친 고인이군.

맞소, 이 여인은 원한을 심어 준 사내에게 보복을 당하였소."

순간, 백의청년의 전신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여인에게 복수를 하다니? 그 자가 누굽니까?

백일기(白一奇)는 그 치졸하고 비겁한 자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해 둘 것이오."

백일기(白一奇).

냉한웅도 이 이름을 기억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되받아 쳤다.

"정사마천궁주(正邪魔天宮主)요.

그러나 그의 무공과 지혜는 천하에 비교될 인물이 없는데, 어찌 상대할 것이오?"

"그 자의 무공과 지혜가 얼마나 뛰어나든 간에

힘없는 여인에게 저토록 악랄한 짓을 저지른 것으로 미루어, 졸장부임에 틀림없소. 
백모(白某)는 그 자에게 사내 대장부가 가야 할 길을 기필코 가르쳐 주고야 말겠소이다."

도리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는 말과 정기(正氣) 넘치는 태도였다.

냉한웅은 그와 친교를 맺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을 것 같소.

지금 안고 있는 여인을 자세히 보여 줄 수는 없소?"

백일기는 다소 차가운 눈길을 던졌지만 여인을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당신이 안고 있는 여인만큼은 아름답지 않소.

하지만 용모로 여인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오."

냉한웅은 그가 오해를 한 듯싶자, 바보처럼 히죽 웃었다.

"그게 아니라, 어디서 본 듯해서…."

여인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보기 드문 미녀였다.

특히 백합과도 같다 할까?

전신에 배어 있는 고결한 기품은 용모 이상의 매력을 느끼게 했다.

"어흠, 본 거지가 관상을 좀 볼 줄 아오이다.

이 낭자는 필시 담백청순(淡白淸純)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지녔을 게요.

이런 여인이라면 잊혀질 리가 없는데… 누굴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지켜보던 백일기는 그가 뻔한 소리를 늘어놓자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전혀 모르는 여인이오?"

사실 답답하기는 냉한웅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떠오를 듯 아물아물거리면서도 확 와 닿는 것이 없었으니….

"본 거지의 기억력이 신통(神通)의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생각 안 나는 것으로 미루어, 착각인 듯싶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의술이라면 그녀를 깨어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어떻소?"

백일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물론이오. 하지만 옷을 모두 벗겨야만 하오. 여인의 몸을 어찌…."

이토록 앞뒤 꽉 막힌 사내가 또 있을까?

냉한웅은 너무도 기가 막힌다는 듯 마구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 이유가 단지 여인이기 때문이란 말이오?"

"여인들을 함부로 다루어선 안 된다고 배웠소이다. 더욱이 청백한 여인은…."

냉한웅은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청백해 보았자 밥 먹고 똥 싸기는 매일반이지.

그렇다면 의도(醫道)에 약간의 조예가 있는 본 거지가 대신 발가벗겨 치료해 주리다."

백일기는 노해 얼굴을 붉혔다.

"백모(白某)는 당장 숨이 끊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행동을 묵과하지 않을 거요."

냉한웅은 불쑥 품안의 여인을 내밀었다.

"당신이 그토록 여인을 아끼니, 내 것도 좀 부탁하겠소.

신분은 태검장주의 금지옥엽인 낙양일색 팽지연이오."

백일기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냉한웅의 신색을 살폈다.

"여인을 귀찮게 여기다간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길 거요.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는 게 어떻소이까?"

"그만… 그만하슈. 난 앉은 채 소피 보는 족속들의 비위 맞추는 일은 취미 없다구!"

냉한웅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 나왔으나 얼굴엔 신비로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순간, 백일기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마소(魔笑)… 천봉밀니(天鳳蜜尼)의 소혼술(笑魂術) 못지않은 위력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왼팔을 내밀어 팽지연의 교구를 받아 안았다.

그 때 냉한웅은 흘낏 그의 오른팔에 안긴 미녀를 다시 한 번 살폈다.

가물가물 떠오르려다 아스라이 사라지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

하나, 만일 남장을 시켜 놓았다면 단박에 깨달았으리라.

기걸(奇傑) 만통자(萬通子)의 제자이며 분광월아도(分光月牙刀)와 더불어 

신비이객(神秘二客)으로 불리우는 무풍신룡(武風神龍)임을!

하유정(河柳庭)이 그녀의 본명이었다.

일찍이 양친을 잃은 그녀는 강호칠기 중의 한 명인 만통자의 손에 거두어졌다.

혈혈단신이었던 만통자는 그녀를 혈육처럼 애지중지 키웠고, 그 정성 탓인가?

그녀도 문무(文武) 다방면으로 출중한 재녀(才女)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강호 경험을 쌓기 위해 출도한 그녀는 남장을 한 채 무풍신룡이란 명호를 사용해 왔다.

항상 신비롭게 행동하며 사마의 무리들을 탕멸해 온 그녀는

또 하나의 신비괴객인 분광월아도를 부영산 고봉(高奉)에서 대면하게 되었다.

분광월아도가 아닌 냉한웅의 신비로운 미소!

그것을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활화산처럼 타올랐고, 그와 더불어 대귀선을 타고 불귀해로 떠났다.

불귀해에서 정인(情人)을 잃은 그녀의 분노는 천망(天網)의 재료를 빼돌린 장강어옹에게로 쏘아졌다.

삼 년 후, 옥봉루(玉鳳樓)에서 장강어옹의 목숨을 노린 그녀는

리어 독상(毒傷)을 입고 지옥야차객들에게 쫓겼는데….

그렇다면 지옥야차객들을 강기( 氣)로  해치운 인물이 바로 백일기란 말인가?

백일기는 변함없이 정중한 음성과 태도로 작별인사를 하였다.

"소생이 별 능력은 없으나, 신명을 다하여서 팽낭자를 보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냉한웅은 두 팔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당신처럼 예절 밝았다간 위아래 달린 것들 몽땅 굶어 죽겠소."

"……."

"예절만 밝은 거지 입에 식은 밥덩이인들 제대로 들어가겠소?

한 언제 돈 모아 계집을 살 것인가? 하하하하…!"

냉한웅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백일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준미하고 예의 바르며 문무 뛰어난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두 미녀.

그녀들에게 이보다 더한 기쁨도 없고 좋은 일도 없으리라.

다만 의식이 없어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일 뿐….

우두커니 서서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냉한웅이 뜻 모를 깊은 숨을 토해 냈다.

"으휴우…!"

안도의 한숨인지, 아니면 서운함에서인지 자신조차 분간할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