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중원출도(中原出道)
옥봉루는 저잣거리(市場) 마냥 혼잡스러웠다.
점원들은 부서진 기물들과 야차객들의 시신을 치우고 바닥에 흥건한 피를 닦아 내는 등 분주해 하고,
주객(酒客)들은 큰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기웃거렸다.
어디 주객들 뿐이겠는가?
주변에 사는 어른, 아이들까지 잔뜩 몰려와 문 앞을 메우다시피 했다.
이 와중에 유유히 옥봉루 문턱을 넘는 금의공자(錦衣公子)가 있었다.
비단에 금실로 수놓은 화복(華服)에 각종 보석들로 장식된 요대(腰帶),
수중에 쥐고 있는 섭선은 일견하기에도 진귀한 백옥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왕손공자(王孫公子)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토록 호화롭게 치장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것들도 그의 용모에 비하면 오히려 소박하게 느껴질 것이다.
백옥 같은 피부, 별빛을 발하는 듯 영롱한 광채가 이는 봉목(鳳目)에 오똑 솟은 콧날이며
붉은 입술은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으니…….
전신에 흐르는 기품은 우아하고 고고하다 못해 천군(天君)을 방불케 했다.
몰려든 구경꾼들의 관심은 일순, 그에게로 돌려졌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내 머리에 털 나고 처음 보네.
자도(子都)나 반안(潘安), 송옥(宋玉)이 환생한다 해도 부끄러워 얼굴을 못 내밀 정도일세그려."
"혹시 키 큰 미녀가 남장을 한 것 아닐까?"
"천하 어느 미녀를 데려다 놔도 저 모습만은 못할걸.
피부를 좀 봐. 마치 백옥을 다듬어 놓은 것 같지 않나?"
"이런 모자란 친구들! 저 떡 벌어진 어깨와 목의 후골(喉骨)을 보고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 못하겠나?"
그러나 금의공자의 표정이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추호도 지니지 않은 듯,
담담하다 못해 냉랭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여, 구경꾼들은 접근할 엄두를 못 냈다.
천존비동(天尊秘洞)의 새 주인, 냉한웅(冷恨雄).
이제 그는 천하인들이 꿈 속에 그리는 모든 것들을 다 소유했으나,
항시 무심(無心)한 표정만은 바꾸지 않고 있었다.
풀리지 않은 한(恨),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멍청한 놈, 또는 밥만 축내는 식충(食蟲)이라며 괄시받던 지난 날의 아픔과 시련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냉한웅이 복잡한 심정으로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넋 나간 듯 그를 지켜보던 점원 한 명이 기겁을 하며 막아 섰다.
"공자님, 아직 안… 됩니다."
냉한웅이 말없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자, 점원은 움찔 몸을 도사리며 설명했다.
"좀 전에 이층에서 살인사건이… 미처 다 치우지 못했으니…."
순간, 냉한웅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죽음이란 사람을 치졸하고 천하게 만든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양면성(兩面性)도 지니고 있지."
그는 멀뚱멀뚱 눈알만 굴리는 점원을 흘낏 바라보곤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냉한웅의 시야에 난장판이 된 이층 내부가 들어왔다.
점원으로 보이는 장한 두 명과 경장 차림의 중년인 서너 명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바닥엔 아직도 핏물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냉한웅이 아랑곳 않고 창가에 자리잡자, 점원과 경장중년인들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주시하였다.
"여기 간단히 요기할 음식을 가져다 주게."
"공자님, 이렇게 불결한 데서 어찌… 아래층에서 드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비교적 나이 어려 보이는 점원이 다가와 난처한 표정을 짓자, 냉한웅은 실소를 흘렸다.
"나를 그토록 생각해 주니, 고맙군. 이런 관심은 보여 준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니…."
품안에서 한 움큼의 전표를 꺼낸 그는 잡히는 대로 한 장을 뽑아 내밀었다.
"자, 받게."
점원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내밀었다.
전표는 적어도 은자(銀子) 수십 냥은 되어야 뗄 수 있다.
운이 좋아야 은자 부스러기를 구경할 수 있는 그에게 이건 꿈과 같은 일이 아닌가?
받아 든 점원의 눈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크게 떠졌다.
"어헉!"
입도 만두 두어 개가 한꺼번에 들어갈 정도로 벌어졌으나, 짤막한 기성(奇聲)만을 토해 냈다.
<은자 삼백 냥, 대국전장(大局錢莊).>
대국전장이라면 분점이 수백 곳에 달하며, 신용 면에서도 첫 손가락을 꼽는 중원 최대의 전장이다.
삼백 냥의 은자라면 그가 반평생 가까이 놀고 먹을 수 있지 않은가?
두 다리가 지진을 만난 양 후들거리는 점원을 향해 냉한웅은 미소지어 보였다.
"음식 계산은 따로 치룰 것이니, 부담스럽게 생각 말게."
마치 천만 송이의 꽃이 동시에 만개(滿開)하는 듯 아름답고 신비스런 미소!
이게 과연 사내의 얼굴일까?
점원은 완전히 넋 나간 듯했다.
보다 못한 냉한웅이 약간의 공력을 실어 기침을 하자, 점원은 비로소 본래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사건은 계속 이어졌다.
땅딸막한 체구의 다른 점원이 다가와 전표를 보고,
이 기이한 광경에 경장중년인들도 달려와 보고…
그들의 입에서는 한결같이 경악의 외침이 토해졌다.
이 때, 둥그스름한 얼굴의 경장중년인이 동료들에게 속삭였다.
"혹시 만보공자(萬寶公子)가 아닐까?"
만보공자(萬寶公子).
그에 관한 소문이 중원을 휩쓴 것은 불과 한 달 남짓으로,
동해(東海)와 인접한 항주(杭州)에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큰 포구(浦口)를 끼고 있는 성도(城都)들이 대개 그러하듯 항주 역시 수많은 기방(妓房)과
주루(酒樓), 도박장(賭博場)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환락(歡樂)의 물결에 휩싸인 곳이니만큼 전장(錢莊)들도 널려 있었다.
어느 날, 대국전장의 분점에 한 대의 사두마차(四頭馬車)가 찾아들었다.
마차엔 모두 세 명이 타고 있었는데…
두 명은 나이를 짐작키 어려운 노인들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눈부실 듯 잘생긴 청년이었다.
마차에 각종 진귀한 보화(寶貨)가 가득 담긴 커다란 상자를 싣고 온 그들은,
이것을 대국전장에 맡기고 수백여 장의 전표를 가져갔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금액이 적혀 있지 않은 무전표(無錢票)들이었으니….
누구든지 이것 한 장만 있다면 당장에 갑부가 될 수 있으리라.
대체 보화의 가치가 얼마나 되길래, 중원제일의 전장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했을까?
이 소문은 각 전장 직원들의 입과 귀를 옮겨 다니며 삽시간에 중원각지로 퍼져 나갔다.
또한 그들은 금의공자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만큼의 보화를 지녔다 해서,
만보공자(萬寶公子)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두 명의 점원 모두 넋 나간 듯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자, 냉한웅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음식을 먹을 수는 있는가?"
전표를 받은 점원이 화들짝 놀라며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 풍삼(風三)의 눈썹이 휘날릴 만큼 휑하니 다녀오겠습니다."
점원은 아직 정신이 덜 든 듯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 모습이 매우 우스꽝스러웠지만, 중인들 중 웃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놀람과 부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에서 그 무슨 웃음인들 우러나오겠는가?
이 때, 아래층에서 걸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대관절 이 집은 장사를 하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냉큼 이 어른을 모시거라."
냉한웅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누군지는 모르나 꽤나 성질이 급하군.
하지만 이런 사람치고 음흉한 성격을 지닌 자는 드물지.
아마도 풍채 좋은 호걸풍(豪傑風)의 무림고수일 것이다.'
이렇듯 멋대로 상상하고 있을 때, 계단을 쿵쾅쿵쾅 울리며 장한 한 명이 올라왔다.
삼십대 초반쯤일까?
곰을 연상케 하는 거구(巨軀)며 부리부리한 호안(虎眼)에 두툼한 입술,
그리고 밤송이처럼 거칠게 보이는 수염 등….
모습이 영락없는 춘추전국시대(春秋全國時代)의 맹장(猛將) 익덕(益德) 장비(張飛)였다.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이층으로 올라온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거한은 관이 도착하지 않아 한 구석에 눕혀 놓은 흑의인들의 시체를 목격하기 무섭게,
인지를 꼿꼿히 세웠다.
이어 그는 인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하늘과 땅을 가리켰다.
이 괴이한 행동은 중인들의 시선을 한몸에 모았다.
그가 행동을 멈추고 비어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사락… 사락……!
옥봉이 또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그녀의 치맛자락 끌리는 음향은 묘하게 가슴을 울렁이게 하였다.
그녀는 추수 같은 눈망울을 사르르 굴려 거한을 바라보더니, 사뿐사뿐 맵시 있게 다가갔다.
"빈루(貧樓)의 주인, 옥봉이옵니다."
그녀가
향내 폴폴 나는 입김을 토하며 다소곳이 허리를 굽히자,
앞섶이
벌어지며 몽실한 젓가슴이 살짝 엿보였다.
아, 성숙한 여인의 육봉….
건들면 손가락이 톡 퉁겨질 듯 탄력과 윤기 있는 그것은 보기만 하여도 숨이 막힐 듯하였다.
거한은 옥봉이 상반신을 세운 후에도 귀신에게 홀린 듯 그녀의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옥봉은 살풋 미소를 지었다.
"대협은 거친 무림에 몸을 담고 계시지만, 무척 예의가 밝으시네요."
뼈 있는 애교에 거한은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듯 얼른 시선을 위로 했다.
하지만 시선이 옥선의 시선과 마주치게 되자, 더욱 당황했다.
"허… 흐음……!"
그가 헛기침으로 얼버무리려 하자, 옥봉도 그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대협께서는 뉘신지 존성대명(尊姓大名)을 밝혀 주시겠사옵니까?"
그제서야 거한은 신색을 회복하고 대꾸했다.
"나는 일도경혼(一刀驚魂) 강무웅(姜武雄)으로, 운남지방에서는 행세 깨나 하고 있소이다."
귀 기울여 엿듣고 있던 냉한웅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일도경혼? 이 곳까지 오는 동안 명성 깨나 떨치고 있는 고수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처음 들어 보는 명호로군.'
냉한웅은 쓴 미소를 머금으면서도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적어도 호쾌한 인물임은 틀림없다.
강호엔 자신의 실제 무공을 감추려는 고인들도 있으니까,
또 모르지. 신광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공력이 반박귀진(返璞歸盡)의 경지에 이른 절정고수일지도….'
이번에는 옥봉이란 여인에게로 초점이 맞춰졌다.
'저 여인이 은자나 반반한 용모를 탐했다면, 지금쯤 내 곁에 앉아 온갖 아양을 떨어 댔을 것이다.
그렇다면 높은 무공을 지닌 고수를…?'
이때, 그의 코앞에 점원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나한백옥권(羅漢白玉卷)과 초염루도(椒鹽樓桃)가 담긴 그릇들을 내려놓았다.
이어 각종 요리들을 가져왔는데…
어향가자(魚香茄子), 파채작동순(芭菜灼冬筍), 홍소배골(紅燒排骨), 당초육편(糖醋肉片) 등
탁자 위에 더 놓을 자리가 없자 옆의 탁자들을 붙여 가며 내려놓았다.
십여 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양인데도 점원이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자,
냉한웅은 비명을 지르듯 만류했다.
"그만 가져오게. 내가 열흘 굶은 돼지인 줄 아나?"
점원은 싱긋 웃으며 술병을 내려놓았다.
"이 술은 본 주루의 자랑으로 소흥주(紹興酒) 를 삼십 년 이상 숙성시켜 만든
특미의 화조주(花彫酒)입죠."
"음, 화조주란 독특한 향기와 함께 술독에 꽃무늬가 배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
대개가 십 년 정도 숙성시켜 내놓는데…."
점원은 그가 술의 가치를 알아보자, 신이 나 떠들어 댔다.
"오늘 술과 안주 값은 몽땅 이 풍삼(風三)이 계산하겠습니다.
그래 봤자 은자 열 냥을 넘지 않을 테니까요."
은자 열 냥이라면 외진 곳의 제법 살 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삼백 냥의 전표가 품안에 있지 않은가.
이제 그쯤은 안중(眼中)에도 없었다.
냉한웅은 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거절 않고, 상아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가 찐 새우를 집어 초간장에 찍는 순간, 일도경혼 강무웅의 우렁찬 외침이 쩌렁쩌렁 실내를 울렸다.
"장강어옹이라고? 강모(姜某)가 그 늙은 개뼈다귀를 두려워할 만큼 약하다면,
강호에 발을 딛지도 않았을 거요."
그에게 무공이 장강어옹과 상대할 수 있는 정도인지를 물었던 옥봉의 얼굴에
달덩이처럼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대협께선 장강어옹을 이길 수도 있겠네요?"
"으하하하… 장강어옹은 내 얼굴만 봐도 도망쳐 버릴 거요."
다음 순간, 옥봉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대협께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사옵니까?
수락해 주신다면, 천녀는 어떠한 요구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강무웅의 입이 그녀의 몸을 통째로 삼켜 버릴 만큼이나 크게 벌어졌다.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미녀의 청을 들어 주지 못한다면,
다리 사이의 물건을 당장 떼어 들개에게 먹여야 할 것이오."
그의 호언장담(豪言壯談)이 떨어지기 무섭게, 등 뒤에서 냉랭한 비웃음이 들려 왔다.
"친구는 꽤나 거들먹거리는군. 강호인들이 그 말을 들으면 청운보(靑雲堡)엔 사람이 없는 줄 알겠소."
강무웅은 성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인상에 입꼬리가 치켜올라가 매우 오만하게 보이는 흑의청년이었다.
이때, 시체 치우는 일을 거들어 주고 있던 세 명의 경장중년인들이 황망히 고개를 조아렸다.
"속하들이 보주(堡主)께 인사 올립니다."
냉한웅의 눈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약관(弱冠 :스무살)을 갓 넘긴 듯싶은데, 보주라니… 대단한 후광(後光)을 지닌 모양이군.'
강무웅은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했다.
"보주면 다냐? 어린 놈이 너무도 방자하구나."
"친구는 눈이 있되 보지 못하고, 귀가 있되 듣지 못하는 모양이군.
이곳 악양성은 본 청운보 관할 구역이다.
옛부터 강물은 우물물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속담을 모르는가?"
청운보주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듯 험악하게 변했으나, 강무웅은 코웃음쳤다.
"흥! 청운보가 용담호혈(龍潭虎穴)일지라도 일도경혼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도경혼이란 명호를 들은 순간, 청운보주는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본 보주가 별로 오래 살지는 않았으나,
그런 명호는 아직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무명소배(無名少輩)가 감히……."
그는 말을 채 끝맺지도 않고 일 장을 날렸다.
슈우웅-!
날카로운 기류가 강무웅에게 휘몰아쳐 갔다.
하나, 어찌 된 일인지 강무웅은 피하거나 맞받아 치려 들지 않았다.
그가 꼼짝 않고 서 있자, 냉한웅은 내심 감탄했다.
'저토록 대단한 장력을 몸으로 받아 내려 들다니…
철포삼(鐵布衫)이나 십삼태보횡련(十三太保橫練)과도 같은
외문무공(外門武功)을 극에 달하도록 연마한 걸까?
아니면 호신강기를 터득한……?'
하지만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펑-!
지극히 듣기 거북한 음향.
강무웅은 장력이 가슴에 부딪치기 무섭게, 가죽공처럼 퉁겨져 벽까지 날아갔다.
그리곤 등짝이 벽을 때린 순간, 앞으로 엎어지며 코뼈가 부서지는 듯한 묘음(妙音)을 일으켰다.
"저… 럴 수가……?"
중인들은 일제히 넋 나간 표정으로 변했다.
심지어 단 일 장에 그를 해치운 청운보주마저…….
냉한웅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얼마나 기가 막혔던지 약간 입술이 벌려져 있었다.
'무공을 전혀 모르면서 어쩌자고 일류고수 행세를 했단 말인가?'
다음 순간, 왠지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흘렀다.
'그래도 저 친구는 그럴 듯한 허우대라도 지녔지.
난 닭 한 마리 잡을 힘조차 없는 주제에 신비이객(神秘二客) 중의 하나인
분광월아도(分光月牙刀) 행세를 했었으니…….'
문득 삼 년 전, 부영산 절봉과 불귀해에서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청운보주는 죽은 듯 쓰러져 있는 강무웅의 거구를 툭 걷어차 보았다.
그래도 꼼짝 않자 그는 옥봉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을 맡기려면 먼저 상대의 능력부터 파악해야 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소?"
이때, 냉한웅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강무웅에게 접근했다.
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있던 청운보주의 눈에 살광이 번뜩였다.
"친구는 지나치게 대담하군. 죽음이 두렵지도 않은가?"
순간, 냉한웅과 시선이 마주쳤다.
"……."
청운보주는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냉한웅은 그가 보이지도 않는 듯 시선을 거두어 강무웅의 상세를 살폈다.
이 일련의 동작은 매우 완만하였고, 별다른 특이성이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다른 이들은 청운보주가 맛본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슬그머니 물러난 청운보주는 수하들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저 자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그의 태도와 음성이 심상치 않게 느껴진 수하들은 당황해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 중 눈치 빠른 한 명이 얼른 나섰다.
"아마도 만보공자(萬寶公子)인 듯싶습니다."
"으흠, 짐작대로 내력이 범상치 않은 자로구나."
청운보주는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린 후, 수하들에게 눈짓했다.
"일단 보로 돌아가자."
냉한웅은 그들이 사라지든 말든, 전혀 관심없는 듯 강무웅의 전신을 주물렀다.
추궁과혈(推宮過穴) 수법을 펼치는 그의 손놀림은 지극히 빠르고 유연해,
마치 악기를 탄주(彈奏)하는 악사와도 같았다.
일다경(一茶頃)쯤 흘렀을까?
강무웅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오던 피가 멈추었으며, 잿빛이었던 안색은 불그스레 핏기를 띠었다.
시체나 다름없던 그를 되살려 내는 신기(神技)를 옥봉과 두 점원은 넋 나간 듯 바라볼 뿐이었다.
냉한웅이 몸을 일으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은 후에야 옥봉은 정신이 든 듯, 점원에게 눈짓을 했다.
"저분을 내실에 눕히도록 해라."
점원들이 황급히 강무웅을 들어올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옥봉은 다시 입술을 살포시 벌려 꽃봉오리가 터지듯 향기를 뿜어 냈다.
"공자께서 천하제일의 부자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토록 신기한 재주를 지니셨을 줄은 몰랐사옵니다. 혹시 절세고수가 아니신지요?"
냉한웅은 다섯 가지 기름으로 튀긴 개구리 요리 초염루도(椒鹽樓桃)를 먹으며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나는 그저 범부(凡夫)일 뿐이오. 이렇게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것을 보면 모르겠소?"
그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담담히 뇌까리자, 옥봉은 쓴 미소를 머금었다.
'이분의 성품은 분광월아도와 너무도 흡사하구나.'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공이나 무림인에 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듯싶은 그녀가 어떻게 분광월아도를 알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비단 치맛자락 끌리는 음향과 여인의 향기만을 남겨 놓은 채 아래층으로 사라져 갔다.
냉한웅은 화조주 한 모금을 넘기며 흘낏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혀끝을 진동시키는 향미(香味)… 그녀가 남긴 여운만큼이나 아릿한 맛이었다.
옥봉루에서 나온 냉한웅은 급히 관도를 벗어났다.
천천히 걸으며 상점 구경을 하고 싶었으나, 주위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아졌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더구나 무슨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계속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니….
악양성 외곽의 숲 속 소로(小路)로 접어든 그는 풍겨 오는 피비린내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수령(樹齡)이 백 년도 넘었을 듯 거대한 노송(老松) 아래 두 구의 시체가 버려져 있었다.
흑의중년인들이었다.
그들은 가슴이 날카로운 것에 의해 뚫려 있었는데, 결코 병기에 의한 상처가 아니었다.
'강기( 氣)로 살해하다니… 누군지는 모르나 무공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보다
결코 하수(下手)가 아니겠구나.'
이 때, 멀리서 장소성(長嘯聲)이 들려 왔다.
우우……!
곧이어 한 줄기 바람처럼 인영이 날아와 그의 머리 위를 넘어 내려섰다.
허공에서 재주를 넘어 방향을 바꾸는 몸놀림.
날짐승 못지않은 참으로 멋진 신법이었다.
잿빛 장삼에 방립(方笠)을 쓰고 있는 인물.
그러나 방립 아래까지 내려온 흰 수염은 그의 나이를 어느 정도 짐작케 했다.
냉한웅이 담담한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뼈를 씹는 듯 냉혹한 음성을 토했다.
"듣던 대로 애송이가 꽤나 대담하구나."
순간, 냉한웅의 얼굴에 노기가 번졌다.
"무례한 놈! 감히 누구에게 그 따위 소리를 내뱉느냐?"
방립인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약관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는 상대가 오히려 자신을 아랫것 꾸짖듯 하다니….
"당장에 찢어 죽여 버리겠다!"
살갗이 뒤집어지는 듯 분노한 그는 호통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맥문을 찍어 가는 그의 손속은 전광석화와도 같이 빠르고 신랄하였다.
냉한웅은 경멸의 미소를 흘리며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천축(天竺) 밀교(密敎)의 비전신법인 대나이신법(大羅理身法)이었다.
방립인은 상대의 완맥을 낚아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엔 아무것도 쥐어진 게 없었다.
"어… 떻게……?"
그는 삼 장 밖에 뒷짐 진 채 서 있는 냉한웅을 벌레 씹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몇 개의 신형이 질주해 오는 것을 발견한 냉한웅은 안력을 돋구었다.
"청운보주가 뭔가 하는 버릇없는 것과 그 수하들이로군. 너와는 어떤 관계냐?"
이 말은 다시 방립인을 격노케 했다.
"노부더러 너라니? 네놈은 정말 사는 데 염증을 느낀 모양이로구나."
그가 고래고래 악을 쓸 때, 청운보의 무사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사부님, 어째서…?"
의혹을 느낀 청운보주가 질문의 말꼬리를 흐렸다.
사부가 지나치게 흥분했기 때문이었다.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백 년 가까이 살아온 노부에게 함부로 욕설을 퍼붓고 하대를 하였느니라."
냉한웅은 흥분한 방립인이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해 대자, 눈에 살기를 띠었다.
이때, 청운보주가 일문의 종사다운 태도로 그를 타일렀다.
"친구는 큰 우(愚)를 범하였소.
본 보주의 사부께선 당금 구파일방의 장문인들보다도 높은 배분과 무공을 지니신 분이외다."
"흥!"
냉한웅이 코웃음치자 청운보주는 꾸짖는 듯한 어조로 말하였다.
"사부께서 강호에 명성을 떨치셨을 때, 친구의 할아버지는 어미의 뱃속에 있었을 거요.
버릇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냉한웅의 입술이 벌어지며 살벌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더 이상 입을 놀린다면 평생 후회할 기회마저도 잃을 것이다.
등에 관짝의 싸늘한 촉감을 느끼고 싶지 않거든, 당장 입을 다물어라."
청운보주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노성(怒聲)을 터뜨리려는 순간, 그가 손을 내저었다.
"한 마디만 더해도 죽는다."
천만 근 무게로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음성.
청운보주는 기겁을 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때, 방립인이 나섰다.
"애송아, 네놈의 간덩이가 얼마나 부었는지 노부가 직접 봐야겠다."
방립인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아수라지옥에서 들려 오는 듯 음랭한 음성이 날아왔다.
"크흐흐흐… 애송아, 너야말로 간덩이가 부었구나."
거의 동시에 두 인영이 그의 앞에 내려섰다.
이들의 신법이 얼마나 절륜했던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았다.
옷깃 한 조각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실로 경이로운 신법이었다.
홍의노인과 흑의노인
그들은 한결같이 냉막한 표정이었으며, 특히 흑의노인은 전신에 음침한 사기(邪氣)가 번들거렸다.
일견하기에도 내력이 심상치 않은 노인들.
아, 불귀해의 천존비동에 백의노인과 함께 있었던 바로 그들이 아니던가.
방립인은 기가 막히고 치가 떨려 당장 숨넘어갈 지경이었다.
"노부더러 애송이라고……?"
그가 쌍장에 전신 공력을 모으고 있을 때, 흑의노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고가(高哥) 애송아! 경망되게 날뛰지 말라 경고했거늘,
지금 네가 끌어올리고 있는 패혈광혼신공(覇血狂魂神功)은 고통만을 불러들일 뿐이다."
순간, 방립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가라 불리운 그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걸 어… 떻게…?"
흑의노인은 언성을 높여 꾸짖었다.
"네 사부인 광혼자(狂魂子)도 노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륜, 네가 감히 주군(主君)께 무례를 범했으니… 결코 편하게 죽지 못할 것이다."
방립인이 오마(五魔) 중의 한 명인 북악신마(北嶽神魔) 고륜(高輪)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이를 백 살이나 먹은 그에게 애송이라 부르는 흑의노인은 대관절 누구란 말인가?
고륜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존가(尊哥)… 께선 뉘… 시온지……?"
상대의 배분과 무공이 훨씬 높지 않다면
이렇듯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으면서도 안중(眼中)에 없는 듯 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홍의노인은 그가 자신을 못 알아보자, 살기 찬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머리 나쁜 어린 놈아! 노부를 기억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혈살방(血殺幇)도 기억 못하겠구나?"
잔인교(殘忍敎)와 함께 무림을 지배했던 마방(魔幇), 혈살방.
불현듯 고륜의 뇌리에 한 인물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팔십여 년 전, 소년인 그가 사부인 광혼자를 따라 혈살방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방주인 혈살신마(血殺神魔) 앞에 사부가 무릎꿇는 것을 보고 내심 얼마나 우러러보았던가.
"마황(魔皇)!"
고륜은 방립을 벗어 던지며 무릎을 꿇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같은 오마 중의 무산괴마 여량보다도 더 흉악해 보였다.
그래서 방립을 쓰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놀람과 두려움에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실로 인간의 것이 아닌 듯 무시무시하였다.
"일 갑자가 지나고도 이십여 년이 더 흐르도록 옛 모습 그대로이실 줄은…
제가 눈이 멀어 몰라뵈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홍의노인이 진정 혈살방 방주였던 혈살신마란 말인가?
그렇다면 곁에 있는 흑의노인이 누구인지는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천마존의 수하가 된 잔인교(殘忍敎) 교주, 잔인사황(殘忍邪皇).
이 때 냉한웅의 시선은 먼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천존비동(天尊秘洞)에서 그의 두 손을 꼬옥 움켜쥐고 절규하던
백의노인은 그가 짐작했던 대로 영령천의(靈靈天醫)였다.
동해무성의 안배에 따라 사 갑자(甲子)에 달하는 세월을 살아온 그의 목적은
오로지 냉한웅이 지닌 음양태령절맥(陰陽太靈絶脈)을 치료하는 데 있었다.
영령천의는 냉한웅이 천존비동을 떠나기 전날, 소임을 마쳤다는 안도의 미소를 띄운 채 세상을 떠났다.
결국 그에 이르러 정(正), 사(邪), 마(魔)의 세력을 일통(一統)시킬 임무를
양 어깨에 걸머진 천상천하유아독존인(天上天下唯我獨尊人)이 태어난 것이다.
냉한웅이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혈살신마의 노성(怒聲)은 끊이지 않았다.
"네놈은 광혼자에게서 교육을 어떻게 받았기에 이토록 천지분간(天地分揀)을 못한단 말이냐?"
"그건 무… 슨 말씀… 이신지… 요?"
이때, 잔인사황이 냉한웅의 옆으로 비켜 서며 고륜을 노려보았다.
"여기 새로운 천마존(天魔尊)이 계시다. 정(正), 사(邪), 마(魔)를 일통(一統)시키실…."
그의 음성은 냉랭하기가 만년한빙곡(萬年寒氷谷)에서 불어 오는 바람 소리 같았지만,
무한한 공경심이 어려 있었다.
"천마… 존……?"
고륜은 숨이 넘어갈 듯 말을 토해 내며 냉한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목전의 젊은이가 새로운 천마존이라니…?
눈을 부릅뜨고 상대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비범한 사람이었다.
다시 그를 보았을 때 고륜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비범, 그 이상의 무한한 잠력을 지니고 있음을!
찰나, 냉한웅이 수중의 섭선을 힘있게 펼쳤다.
촤르르르르-!
천존선(天尊扇)이 기음을 발하자, 고륜의 눈동자에 아수라파천귀의 형상이 새겨졌다.
아, 천지를 가를 듯 뿜어져 나오는 사기(邪氣).
냉한웅의 입에서 짤막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자결하여라."
일순, 고륜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마(魔)… 존(尊)… 령!"
그는 어찌나 놀랐던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강호인들이 귀신과 부딪치는 것보다도 더 두려워하던 북악신마(北嶽神魔) 고륜(高輪).
누가 그에게 오늘과 같은 날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고륜은 힐끔 청운보주의 넋 나간 듯한 표정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제자를 잘못 둔 죄로 죽는구나.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리?"
그는 다시 냉한웅을 바라보았다.
"북악신마, 마존령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륜은 이마를 땅에 찍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신의 오른팔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마치 그의 행동은 어떤 무형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듯 이뤄지고 있었다.
다음 순간, 교륜의 오른손이 자신의 천령개(天靈蓋)를 향하여 내리찍어 갔다.
중인들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순간이었다.
퍽-!
둔탁한 음향과 붉은 피가 사방으로 뿜어 흩어졌다.
이어 그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눈 깜박할 사이에 펼쳐진 상황이었다.
그토록 빨리 삶을 포기하리라곤 예상 못한 청운보주와 수하들은 마치
자신의 목숨이 끊어진 듯 경악의 외침을 터뜨렸다.
"사부!"
"아앗!"
하지만 냉한웅의 표정은 나뒹구는 나무 토막을 바라보듯 무심하기만 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인하여 장내는 숨막힐 듯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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