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재임(再臨) 천마존(天魔尊)
청운보주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당금 중원무림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강한 무공을 지닌 사부,
북악신마 고륜이 단 한 마디에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그의 심정은 비참하다 못해 심장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듯 고통스러웠다.
이때 돌연, 냉한웅이 천존선을 돌려 그에게 뒷면을 보였다.
순간, 흰빛만을 발하던 곳에 또렷하게 글자의 형태가 나타났다.
<단이(斷耳)>
스스로 귀를 자르라는 뜻이 아닌가?
청운보주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는 사납게 눈을 부릅뜬 채 냉한웅을 노려보았다.
"천마존, 본 보주는 당신의 수하가 아니외다!"
하지만 냉한웅의 표정은 변함없이 무심하기만 했다.
"마존령을 거역하면 죽음뿐이다. 후회 않겠느냐?"
청운보주는 수하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그에게 모욕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조(自嘲) 섞인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쌍장을 휘둘렀다.
"철기신장(鐵氣神掌)-!"
청운보주, 철장(鐵掌) 금운비(金雲飛).
그는 태검장의 비룡서생(飛龍書生) 남궁진악(南宮眞岳)과 쌍벽을 이루는 후기지수였다.
쿠르르릉-!
그가 사력을 다해 쏟아 낸 장력은 실로 대단하여, 냉한웅은 내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단순히 후광(後光)을 빌어 젊은 나이에 보주가 된 것이 아니었구나. 하나, 마존령을 거역했으니….'
그 순간, 냉한웅은 꼼짝 않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예전의 신비로운 미소가 아니었다.
천존비동 사존부(邪尊府)의 아수라파천귀!
바로 그의 미소였다.
펑-!
장력이 그의 가슴에 격중하는 음향을 일으킨 다음 순간,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크으악…!"
모골을 송연케 하는 비명 소리가 허공을 쥐어뜯었다.
하지만 냉한웅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아니었다.
청운보주, 그의 양 팔이 간 곳 없었다.
팔이 달려 있어야 할 양쪽 어깨에서는 핏물만 콸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으아아악……!"
청운보주는 고통을 못 이겨 계속 비명을 질러 대며 땅바닥에 뒹굴었다.
냉한웅이 사극염라경에 수록되어 있는 사극무형강(邪極無形 )을 펼친 것이다.
무상보리신공(無上菩提神功)의 탄자결(彈字訣)처럼 상대의 공력을 되돌려 보낼 수 있는
무색투명한 강기(鋼氣)!
냉한웅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본존에게 대항하면 극형에 처한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잔인사황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오른손을 내뻗었다.
"섬(閃)-!"
소리가 없고(無音), 형태가 없으며(無形), 흔적이 남지 않는다(無痕) 하여
삼무지(三無指)라고도 불리우는 잔양수라지(殘陽修羅指).
그 중 빠름을 위주로 하는 섬전지(閃電指)였다.
거의 동시에 청운보주의 가슴을 지풍이 꿰뚫었다.
"큭!"
짤막한 비명이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피보라가 인 후였다.
그는 이렇게 사부인 북악신마의 뒤를 따랐다.
명성이 쟁쟁한 그들 사제가 순식간에 시체로 변하자,
청운보주의 수하들은 기겁을 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때, 혈살신마가 쌍수(雙手)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니, 노부를 원망 마라."
폭뢰수(爆雷手)….
혈살신마의 두 발은 굳게 땅을 딛고 서 있었으나,
장심에서 뿜어져 나온 장력은 수백의 장영(掌影)들로 나누어져 그들의 등짝을 개 패듯 후려쳤다.
퍽- 퍽- 퍽- 퍽-!
등뼈가 부러지는 기음(奇音)과 동시에, 비명 소리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으아!"
"크으윽……!"
잔혹하기 짝이 없는 광경.
솔
향기 그윽했던 숲 속이 피비린내 가득한 지옥으로 변했으나,
냉한웅의
표정은 추호도 변함없었다.
그가 마치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인 양 먼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을 때,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이 허리를 굽혔다.
"주군(主君)! 천마존의 율법에 따라 나머지 일을 처리토록 하겠습니다."
냉한웅은 그들의 의중을 짐작하고 있는 터라,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
"주군께선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
냉한웅의 입술이 움직였으나 음성은 흘러 나오지 않았다.
이어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은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속하들도 일을 마친 즉시, 주군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그들은 포권을 한 후, 꽂꽂히 선 자세 그대로 몸을 솟구쳤다.
그리곤 삼 장 높이 허공에서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화살처럼 쏘아져 날아갔다.
슉- 슉-!
정녕 탄복을 금할 길 없는 신법이었다.
그러나 냉한웅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도 않았다.
잿빛 하늘, 천공(天空)도 냉한웅의 눈빛만큼이나 무척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이때, 자갈 위를 구르는 수레 바퀴 소리 마냥 듣기 거북한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크흐흐흐… 이건 어느 고명한 분의 솜씨요?"
일신을 흑포로 감싸고 등에는 피풍(皮風)을 두른 괴인이 오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다.
그의 이마에 태양혈이 불끈 솟아 있는 것이 내가고수(內家高手)로 보여졌다.
냉한웅은 상대방을 슬쩍 훑어보곤 다시 시선을 허공으로 향했다.
흑포괴인은 그의 오만한 태도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본부(本府)의 야차객(夜叉客)들을 저 모양으로 만들다니, 정말 겁이 없군."
흑포괴인은 눈짓으로 노송(老松) 아래에 쓰러져 있는 흑의중년인들의 시체를 가리켰다.
냉한웅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야차객들의 죽음을 보고도 나설 정도라면, 너는 지옥야차객이겠구나?"
일순, 흑포괴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노부… 에게 너… 라고…?"
하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 그는 눈에서 흉맹한 광채만 폭사시켰다.
"노여워하지 말고 어서 동행한 친구들이나 불러 내거라."
냉한웅이 계속 아랫것 대하듯이 하자, 흑포괴인의 양 볼따구니 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구유마혼(九幽魔魂) 백모(白某)의 머리에 털난 이후, 너같이 간덩이 부은 애송이는 처음 본다."
그가 오른손을 쳐들자, 숲 속 사방에서 십여 명 가량의 흑의인들이 뛰쳐나왔다.
휙- 휙-!
예리하게 바람을 가르는 신법으로 미루어, 하나같이 일류고수 측에 드는 무공을 지녔음이 분명했다.
"우리들은 저기 죽은 자와 같은 야차부 소속의 호위인들이 아니라 지옥야차부의 야차전 고수들이다."
구유마혼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물었다.
"네놈의 짐작대로 지옥야차객이시지. 저 자들은 누가 죽인 거냐?"
"나는 모른다."
"네놈이 발뺌한다고 해서 살려 줄 것 같으냐?"
냉한웅의 눈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무엄하기 짝이 없는 작자로군."
"이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구유마혼이 이를 갈며 쌍수를 치켜들었을 때,
냉한웅을 포위하고 있던 지옥야차객들 중 한 명이 경악의 외침을 터뜨렸다.
"이… 잔… 북악신마!"
지옥야차객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리로 집중되었다.
이때, 또 다른 음성이 그들 사이에서 토해졌다.
"저 시체들은 청운보주와 수하들이 아닌가?"
구유마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북악신마의 무공 수위는 우리보다 한 단계 위인데…
더구나 청운보 인물들까지 한꺼번에 해치우다니!'
냉한웅은 그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지옥야차객들을 훑어봤다.
"지옥야차부에 이토록 많은 고수들이 있을 줄은 몰랐군.
하지만 본존의 비위를 거슬렸으니, 살려 보낼 수는 없는 일…."
담담한 어조였으나, 지옥야차객들은 등골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촤르르륵-!
냉한웅이 수중의 섭선을 펼친 순간, 그를 둘러싸고 있는 눈들이 일제히 휩떠졌다.
"천… 존선(天尊扇)이…!"
"마존령……!"
천마존이 중원에서 사라진 지 팔십여 년이 지났지만, 어느 누가 그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때, 그를 포위하고 있던 지옥야차객들 중 매우 약삭빠르게 생긴 자가 동료인
구유마혼을 제치고 나섰다.
좁은 이마에 쥐눈, 작달만한 키에 비쩍 마른 몸이 석 달 하고도 열흘은 더 굶주린 모습이었다.
그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시리 꽤나 크고 두터운 박도(朴刀)를 지니고 있었다.
"천존선을 냉큼 이 어르신께 바치거라."
일순 냉한웅의 눈에 살기가 스쳐 갔으나, 탐욕에 눈이 먼 그는 계속 침을 튀겼다.
"어린 놈이 진귀한 보물을 지니고 있으면 횡액(橫厄)을 당하기 십상이다.
하나, 대흉귀(大兇鬼)에게 넘기면 액운을 면하리라."
대흉귀.
냉한웅은 흉명을 떨친 마두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대흉귀는 그 중에 끼인 자였다.
화적(火賊) 출신인 그는 광동성 나부산(羅浮山) 근방에서 남녀노소를 불문(不問)하고
수백여 명의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하지만 무공이 일류고수들조차 상대하기를 꺼릴 만큼 강했고,
그의 폭뢰도법(爆雷刀法)은 지극히 패도적이라 누구도 비위를 거스리려 들지 않았다.
그런 자가 겨우 야차전의 일 인으로 머물러 있다면,
지옥야차부의 실세는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어쨌거나 냉한웅의 입에선 단지 한 마디만이 흘러 나올 뿐이었다.
"본존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는 죽는다."
- 죽는다(殺).
이 말은 누구나 흔하게 사용하기에 별로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냉한웅의 입에서 나왔을 땐 느낌이 전혀 달랐다.
오싹 한기를 느낀 대흉귀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구유마혼을 바라봤다.
하나, 그 역시 두려움에 질린 표정이었다.
구유마혼도 대흉귀의 눈빛에 접하자, 본연의 신색을 되찾았다.
'저 애송이가 기연(奇緣)을 얻어 광세의 절공을 연마했다 하더라도, 우린 십여 명이 아닌가?
게다가 하나같이 당금무림의 일류고수들인데, 설마….'
그는 양 어깨에 힘을 준 뒤 목청을 뽑았다.
"네놈은 천존선을 어떻게 수중에 넣었느냐?"
"천마존이 천존선을 지닌 게 어찌 이상하단 말이냐?"
구유마혼이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천마존이라고? 백모(白某)가 일 갑자 가까이 대강남북(大江南北)을 종횡했으나,
너처럼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지껄이는 놈은 처음 본다."
다음 순간, 냉한웅의 두 눈이 살광을 띠었다.
"천존유섬단(天尊幽閃斷)-!"
벽력 같은 외침과 함께 천존선이 비단폭 같은 선영(扇影)을 그려냈다.
츠츠츠츳-!
선영은 여인의 옷자락인 양 너울너울 춤추며 사면팔방의 공기를 갈랐다.
아니, 공기 뿐만이 아니었다.
"크아악……!"
선영에 휘감긴 구유마혼의 몸도 공기처럼 갈가리 찢어 놓았으니…….
단 일 초에 걸레 조각처럼 변한 그의 시신을 본 지옥야차객들은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찌 저럴 수가……?"
"……!"
구유마혼(九幽魔魂) 백일기(白一麒).
그는 사도의 절정고수로 강남녹림맹주(江南綠林盟主)인
탈혼비마(奪魂飛魔) 손학위(孫學爲)도 격패시킨 적이 있지 않았던가.
대흉귀(大兇鬼)가 눈알을 좌우로 굴려 댔다.
"타앗-!"
그는 박도를 뽑아 들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냉한웅이 서 있는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이를 신호로, 다른 지옥야차객들도 앞다투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모두가 일류고수들인데다 생사사활(生死死活)이 걸려 있어,
신법의 빠르기가 마치 유성(流星)과도 같았다.
이 때 만약 그들 중 누군가가 뒤돌아보았다면 놀라 숨이 멎어 버렸으리라.
냉한웅의 전신에서 핏빛 기류가 감돌며 두 눈에서는 화염과 같은 살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아, 잔인귀염공(殘忍鬼閻功).
사공(邪功)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것으로 소문난 이것은,
내적으론 극열(極熱)의 양강지기(陽强之氣)를 지니고 있으나 외적으론 음한지기가 표면을 덮고 있어…
상대로 하여금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묘용이 있다.
또한 양강지기의 위력은 중원의 그 어떤 양공(陽功)도 비교하지 못할 만큼 대단하였으니…
천마존을 제외한 상대 모두가 숯처럼 검게 타 버리거나, 아예 한 줌의 재로 변하였다 하지 않았던가.
지옥야차객들이 오십여 장쯤 멀어졌을 때, 냉한웅의 광소(狂笑)가 천지를 질타하듯 허공에 울려 퍼졌다.
"크하하하……!"
붉은 빛살처럼 치솟아 오르는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신비롭기 짝이 없는 마소(魔笑)가 아니었다.
극악한 표정!
그것은 바로 천존비동의 삼존부(三尊府) 중 사존부 입구에 세워진 아수라파천귀의 미소였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폭갈이 튀어나왔다.
"천존마극참(天尊魔極斬)-!"
어느 새 핏빛으로 물들어져 있는 천존선도 기음과 선영(扇影)을 함께 쏘아 보냈다.
츠- 츠- 츠- 츳-!
수십, 수백 개의 화살인 양 선영은 공기를 꿰뚫으며 날아가
지옥야차객들의 뒤통수에 위치한 뇌호혈(腦戶穴), 옥침혈(玉枕穴),
또는 그 아래 풍부혈(風府穴)이나 아문혈( 門穴)… 또는 등짝이나 팔과 다리 등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이어 무수한 핏줄기와 비명 소리들이 허공을 할퀴며 떨어져 내렸다.
"크윽!"
"아아악……!"
"으아아……!"
혈우(血雨)와 함께 떨어진 육신들은 피비린내를 짙게 풍기는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침묵(沈默).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숲 속에 냉한웅은 묵묵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야수의 고독함이랄까?
인간적인 삶을 포기해 버린 데서 오는 무심함일까?
하나, 그의 눈빛은 무언가를 애타게 갈구하고 있었다.
또한 무정(無情)과 회의(懷疑)의 그늘이
어둠보다도 짙게 드리워진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쏴… 쏴아……!
굵은 빗줄기가 혼탁한 대지 구석구석을 씻어 내려는 듯 기승을 부려 댔다.
하늘도 더욱 난폭해져 번쩍이는 섬광과 더불어 천둥을 계속 울려 댔다.
우르릉- 쾅- 콰쾅-!
지은 죄 큰 이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살벌한 광경이었다.
이 때, 비 속에서 투덜거리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제기랄, 갑작스럽게 웬 폭우(暴雨)람? 갈아입은 지 석 달도 되지 않은 의복이 다 젖었잖아."
그는 중년의 거지였다.
짝이 맞지 않은 신발에 누덕누덕 기운 마의(麻衣),
그나마 군데군데 찢겨 나가 맨살이 드러난 부분도 꽤 많았다.
차림새가 거지 중의 상거지였지만, 생김새 역시도 지독히 자유분방했다.
털 다 빠진 빗자루 마냥 듬성듬성한 눈썹에 새우눈, 빗물이 새어 들어갈 듯 홱 뒤집어진 들창코,
그 아래 수박이 통째로 들어갈 만큼 엄청나게 큰 메기입…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게다가 목욕을 한 지 수 년이 넘은 듯 전신에 시커먼 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의 곁에는 또 다른 거지가 있었다.
왜소한 체구의 소화자(小化子).
그 역시 거지답게 남루한 차림새였으나 중년거지와는 달리 옷은 깨끗하게 빨아 입었으며,
찢겨져 맨살이 드러나 보이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특히 한 쌍의 봉목(鳳目)은 푸르게마저 느껴질 만큼 맑아 보였다.
또한 영롱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꿈과 그윽한 정감(情感)이 담겨져 있었다.
아, 진실된 눈빛!
하지만 그것을 몰래 지켜보는 또 다른 눈빛은 무심하기만 했다.
이런 무심한 시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아니, 단연코 그런 눈빛의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다.
이 때, 왜소한 거지가 오 장쯤 떨어진 눈앞의 관제묘(關帝廟)를 손가락질하였다.
"다 왔어. 형제들이 먼저 도착했는지 모르겠네."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이 낡고 음산한 묘(廟)였다.
그들은
서둘러 안으로 달려갔다.
휘이잉-!
덜컹- 덜커덩-!
비바람에 반쯤만 걸려 있던 문짝이 덜컹이고, 주위의 잡초들은 현란하게 춤을 추어 댔다.
중년거지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새우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노인네가 망령이 드셨나? 하필 이런 날을 택해 모이라고 하실 게 뭐람."
소화자도 맞장구를 쳤다.
"죽을 때가 가까워졌단 증거지, 뭐."
투덜거리며 관제묘 안에 들어선 그들 눈에 제일 먼저 뜨인 것은 타오르는 모닥불과
꼬챙이에 꿰인 채 구워지고 있는 커다란 진흙덩이들이었다.
"으와… 부귀계(富貴鷄)!"
중년거지의 입에서 죽은 조상을 본 듯 반기는 음성과 군침 줄기가 함께 흘러내렸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진흙덩이들을 굽고 있던 세 명의 거지들이 벌떡 일어나 포권지례를 취했다.
"삼결제자(三結弟子)들이 장문제자(掌門弟子)께 인사 올립니다."
중년거지는 진흙덩이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손을 흔들었다.
"제기랄, 거지 주제에 무슨 얼어죽을 놈의 격식인가? 냉큼 저거나 갖다 바쳐라."
그가 흠뻑 젖은 몸을 말릴 사이도 없이 서두르자, 세 명 중 가장 털이 많이 난 거지가 싱긋 웃어 보였다.
"저희도 도착한 지가 얼마 안 돼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했습니다.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에잉, 때맞춰 이루어지는 일이 하나도 없군."
중년거지는 허리춤에 걸려 있는 술병을 집어 벌컥벌컥 몇 모금 마신 후, 소화자에게 던져 주었다.
모닥불에 겉옷을 말리고 있던 소화자가 반기듯 받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소맷자락으로 입술을 쓱 문질렀다.
그가 먼저 와 있던 거지들에게 술병을 던져 주며 물었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터진 모양이군."
세 명의 거지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를 뒤집어 놓다시피 한 사건이 터졌는데, 월녀개(月女 )는 아직 소식을 못 들었소?"
털보 거지가 묻자, 월녀개라 불리운 소화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반년 동안 사형이 무공 수련에 방해된다고 다른 형제들을 만나는 것조차 허락 안 했으니까,
소문이 내 귀까지 흘러들 리 없지."
중년 거지는 월녀개가 자신을 향해 눈을 흘기자, 어깨를 으쓱했다.
"노인네가 우리를 급히 불러 낸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흥! 소문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긴…."
월녀개가 여전히 뾰로통하자, 중년 거지는 싹싹 두 손바닥을 비벼 댔다.
"사매(師媒)의 귀만 막은 것이 아니잖아. 나 자신의 귀도 막고 같이 무공 수련했는데 뭘?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추추귀개(醜醜鬼)란 별호를 떼어 버리겠어. 내 맹세하지."
사매?
그렇다면 월녀개는 명호 그대로 여인이란 말인가?
"칫, 그 별호는 사형이 지독히도 싫어하는 거잖아.
또다시 그런 일이 있을 경우, 죽을 때까지 떼어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구!"
"사매! 어찌 그렇게 잔혹한 말을…."
추추귀개(醜醜鬼 )와 월녀개(月女 ).
이들은 바로 구파일방 중 그 방대함과 조직력에 있어 제일인 개방 제자였다.
또한 신분이 방주(幇主)인 철지영개(鐵地靈 )의 직전제자라, 일신 무공은 상승의 경지에 이르렀다.
몰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무심한 시선이 다시 월녀개의 얼굴에 머물렀다.
'추추귀개라… 생김새나 성격이 거지 노릇에 더할 수 없이 적합한 인물이군.
하지만 월녀개는 저들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신비의 인물이 궁금해하는 건 당연했다.
누덕누덕 기운 너절한 의복을 걸치고 빌어먹는 무리에 미모의 소녀가 끼여 있으니….
하지만 내력을 알고 나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당금 개방 방주인 철지영개는 한 마디로 괴걸이었다.
그가 개방이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계집을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십이 년 전의 일이었다.
무호(武湖) 근처 갈대밭을 지나던 철지영개는 어디선가 들려 오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이 황량한 곳에, 그것도 삼경(三更)이 넘은 시각에 계집아이의 웃음이라니…?'
그는 즉시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까르르르……!"
그 곳엔 대여섯 살 정도의 계집아이가 홀로 달빛과 숨바꼭질을 하듯
이리저리 갈대숲을 헤집으며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계집아이는 천공(天空)에 걸린 만월(滿月)을 움켜쥐려는 듯
두 팔을 하늘을 향해 세운 채 앙증맞은 손가락을 연신 꼬무락거렸다.
달을 너무도 좋아하는 계집아이.
그 애는 철지영개의 물음에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철지영개는 개방 장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집아이를 제자로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젠 성숙한 여인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소녀로 성장했다.
월녀개가 작은 입을 벌려 새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대체 어떤 사건이 일어났기에 이 소동이야?"
이번에도 털보 거지가 대답했다.
세 명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기 때문이었다.
"사건들은 모두가 지난 한 달여 사이에 일어났소.
첫번째는 만보공자(萬寶公子)라 불리우는 금의청년이오."
털보 거지는 금의청년의 행적과 그가 대국전장(大局錢莊)에 맡겨 놓은
엄청난 보화들에 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늘어놓았다.
숨까지 죽여 가며 경청하는 월녀개의 눈동자에도 보석처럼 영롱한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얘기가 끝나자 그녀는 꿈 속을 헤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잡으려던 달님이 땅에 내려왔어. 여지껏 기다려 온 보람이 있었군."
"기다려 온 보람이라니…?"
추추귀개가 의혹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자, 월녀개는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사형은 몰라도 돼."
월녀개의 말이나 행동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상하(上下) 누구에게나 예의를 차리지 않았는데,
이는 사부인 철지영개의 손에 의해 키워졌기 때문이었다.
강호에서 좋게 말하면 괴걸(怪傑), 나쁘게 말하면 괴물(怪物)로 통하는 철지영개.
그의 영향을 받은 추추귀개나 월녀개의 품행이 괴이(怪異)함은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때문에, 무림인들은 이들 사제를 가리켜 개방삼괴( 幇三怪)라 불렀다.
"사매는 이제 보니, 좋은 꿈을 꾸고 있었군. 하지만 현실은 냉정한 것.
그 자가 사매의 지금 모습을 본다면, 아마 꽁지가 빠져라 달아날걸."
추추귀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약을 올리자, 월녀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가 달님이라면 월녀개의 참모습을 환히 비춰 줄 거야. 그러니, 겉모습은 문제될 게 없지."
순간, 추추귀개는 할 말을 잃었다.
'사매의 냉철하면서도 현기 어린 판단은 항상 나를 궁지에 몰아넣곤 했지.
이번에도 사매의 예측이 맞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사매가 좋았다.
그는 쓴웃음을 흘리며 말문을 돌렸다.
"두 번째는 어떤 사건인가?"
이번에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건장한 체구의 거지가 대답했다.
"악양의 청운보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습니다."
"청운보라면 당금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철장(鐵掌) 금운비(金雲飛)가 보주가 아니더냐?
더구나 그의 사부는 오마 중의 하나인 북악신마 고륜인데…."
"그것도 단 두 명에 의해 모조리… 심지어 기르던 말이나 개들까지도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 합니다."
월녀개도 놀라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틀림없이 두 명이야?"
"청운보와 관계없는 인물은 손끝조차 다치지 않았기에, 목격자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흑의노인과 홍의노인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신분이 뭐지?"
"목격자들 중에 노인들의 얼굴을 아는 자가 한 명도 없어서…."
"북악신마가 복수하겠다고 나서진 않았어?"
"북악신마 역시 제자인 청운보주와 함께 피살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악양성 외곽의 숲 속에서. 그 곳에 청운보의 무사 시체 세 구도 있었지요.
"……."
들을수록 섬칫한 내용이라, 월녀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추추귀개의 표정도 일그러졌으나, 워낙 흉한 몰골이라 거기서 거기였다.
그는 가벼운 신음을 흘리며 질문을 이어 갔다.
"다른 무엇이 또 있었느냐?"
"그 곳으로부터 오십 여 장 가량 떨어진 지점에 참혹하게 피살당한 지옥야차객들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혹시 북악신마와 청운보주가 수하들과 함께 그들과 접전을 벌이다 동귀어진(同歸於盡)한 것이 아닐까?"
찰나, 천둥 소리와 같이 우렁찬 음성이 거지들의 고막을 울렸다.
"어리석은 제자야!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겠느냐?"
동시에 인영이 한 줄기 바람처럼 안으로 날아들었다.
백발동안(白髮童顔)의 노화자(老化子)였다.
옷은 추추귀개보다도 더 많이 기워 입었으나, 별로 더럽지는 않았고 인상도 좋은 편이었다.
호안(虎眼)에 주독(酒毒)이 올라 빨갛게 변한 코끝.
하지만 입은 여인처럼 작았고, 입술 또한 미인의 것처럼 예뻤다.
이 때, 추추귀개와 월녀개가 희열에 들뜬 음성을 토해 냈다.
"괴사부(怪師父), 그 동안 뒈지지 않으셨군요!"
이들의 사부라면 바로 철지영개(鐵地靈 )가 아닌가?
철지영개는 제자들의 막돼먹은 말투가 정겨운 듯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소괴(少怪)들이 나섰으니, 강호가 다시 소란스러워지겠구나."
다른 개방제자들은 그 자리에 부복하였다.
"제자들이 방주님을 뵈옵니다."
철지영개는 손을 흔들어 그들을 일어나게 한 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북악신마나 제자인 청운보주는 모두 내가고수로 병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옥야차객들은 모두 예리한 기물(奇物)에 당했으니…."
그의 표정이 무겁게 돌변하자, 추추귀개와 월녀개는 당황한 빛을 띠었다.
사부인 철지영개는 태산이 무너진다 해도 좋은 구경 났다고 낄낄거릴 괴인(怪人)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괴이한 것은 북악신마다.
그 마두는 천령개(天靈蓋)가 박살나 죽어 있었는데, 자신의 오른손으로 내리찍은 것으로 보여졌다."
철지영개의 말을 들을수록 추추귀개는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남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자일수록 제 목숨은 더욱 아끼는 법.
북악신마의
높은 무공과 성격으로 미루어, 결코 자결했을 리 없다.
사매의 생각은 어떤가?"
그러나 월녀개는 고개를 저었다.
"자결한 것만은 틀림없어. 북악신마를 해치울 만한 절세무공을 지녔다면,
보복 따위를 두려워해 자결한 것으로 꾸밀 리 없잖아?
내가 오마 중의 일 인인 북악신마를 해치웠다면, 자랑하고 다닐 거야."
한순간, 관제묘 안은 정적에 휘감겨 들었다.
바깥에서 들려 오는 광풍폭우(狂風暴雨)의 사나운 외침과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의 몸부림치는 소리만이 무거운 가슴들을 할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때 돌연, 철지영개가 먼지 쌓인 제단을 노려보며 냉음을 토했다.
"어느 방면의 고인이 비렁뱅이들의 흥을 깨는 거요?"
다음 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제단 뒤에서 들려 왔다.
이어 평범하고 야윈 얼굴 하나가 불쑥 제단 밖으로 튀어나왔다.
"고인이 아니라 죄송하오."
낡은 유복(儒服) 차림에 닭 한 마리 잡을 힘 없이 비실비실해 보이는 모습이
낙방서생(落榜書生)인 듯싶었다.
아, 냉한웅!
태검장에서 멸시와 학대를 당할 때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 때보다 더 성장한 얼굴과 체구이긴 했지만, 틀림없는 그였다.
절세미장부의 풍모가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가?
비단에 금실로 수놓은 화복(華服)이며 각종 보석들로 장식된 요대(腰帶) 등은…?
어찌 되었건 냉한웅의 태도는 여전히 냉막했다.
그가 태연자약하게 다가와 모닥불을 쬐자, 월녀개가 삿대질을 했다.
"왜 쥐새끼처럼 숨어 우릴 엿본 거야?"
냉한웅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보다시피 비를 피하고 있었을 뿐이오.
엿본 게 아니라 자연히 눈에 띈 거고. 그게 뭐 잘못이오?"
추추귀개가 인상 안 써도 충분히 흉악한 얼굴을 우그려뜨렸다.
"아암, 큰 잘못이지. 강호에선 타 문파의 비밀 회합을 엿보면 죽음을 당해도 할 말 없는 게야."
냉한웅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목청을 돋우었다.
"이 곳에 먼저 들어온 사람은 소생이외다.
당신들이 늦게 와서 서로 떠들어 대곤 그 책임을 전가시키다니… 이건 어느 세상의 도리(道理)요?"
냉한웅이 추호도 두려운 기색 없이 따지고 들자,
철지영개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의 아래위를 훑었다.
"도리까지 들먹이는 걸 보니, 문사(文士)가 분명하군.
그런데 뭘 믿고 대드는 건지부터 설명해 주겠는가?"
냉한웅은 담담한 눈빛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그걸 꼭 소생의 입으로 말해야만 알겠소?"
이건 평범한 문사라면 도저히 취할 수 없는 태도였다.
일순 거지들의 얼굴에 당황과 의혹, 경계(警戒)의 기색이 떠올랐다.
'혹시 이 자의 공력이 반박귀진(返璞歸盡)의 경지에 이르러 신광을 외부로 노출치 않는 걸까?'
'관제묘 주위에 조력자들을 매복시켜 놓은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혼자 몸으로 어찌….'
월녀개가 코웃음쳤다.
"흥! 얼마나 대단한 걸 믿는지 모르겠지만, 본방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
철지영개도 상대의 침착한 행동에 일말의 동요를 느꼈다.
"대관절 자네가 믿는 게 뭔가?"
냉한웅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왕법(王法)이외다!"
다음 순간, 거지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왕법……?"
"아이고, 무서워라."
강호무림에서 도검(刀劍)이 왕법보다 훨씬 위란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그들은 이 순박한 백면서생이 딱하다 못해 귀엽게까지 느껴졌다.
"푸하하하……!"
"하하……!"
"푸흐흐흐……!"
그들이 허파에 바람이 든 듯 정신없이 웃어 대자, 냉한웅은 머쓱한 표정으로 따라 웃었다.
"하하하하……!"
지금의 냉한웅은 만보공자(萬寶公子)나 천마존(天魔尊)의 화신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백면서생일 뿐이었고, 나름대로 솔솔한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 때, 추추귀개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의 비쩍 마른 몸집이 내 마음에 드는군."
"소생도 당신의 못생긴 얼굴이 과히 싫지가 않소."
냉한웅이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 들자, 월녀개가 슬쩍 끼여들었다.
"글쟁이들이란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뜬다더니…."
"소생이 과거에 낙방하고 부평초(浮萍草)처럼 떠도는 몸이나, 입심만은 아직 건재하다오."
한(恨)이 너무도 깊어 무심(無心)하게 변해 버린 냉한웅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그는 점차 변하고 있는 것인가?
철지영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야위었더라니만, 그간 고초가 무척 심했던 모양이군."
냉한웅도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맞장구를 쳐 댔다.
"그걸 어찌 다 말로 하겠소? 몸도 허약한 데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공맹(孔孟)을 외우는 것밖에 없어,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소이다."
"이봐, 글쟁이! 당신이 본방에 투신한다면 먹을 것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월녀개가 킬킬 웃으며 말하자, 냉한웅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게 무슨……?"
"어느 방면의 친구들이라도 개방의 거지는 괄시 못하지. 적어도 끼니만은 절대로 거르지 않는다구."
"소생더러 비렁뱅이가 되란 말이오?"
냉한웅의 안색이 변하자, 추추귀개가 목에 힘을 주었다.
"비렁뱅이 짓은 우리만을 위한 일이 아니지. 생각해 보게.
우리가 구걸 안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적선하는 기쁨을 누리겠나?"
이번엔 철지영개가 나섰다.
"적선은 공덕을 쌓는 일이요, 공덕이 높이 쌓이면 천당에 갈 것이니…
사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적선을 하는 셈이다."
냉한웅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중얼거렸다.
"거지가 이토록 필요한 존재였다니… 선업(善業)의 윤회(輪回)로다."
이어 그는 철지영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에 투신하겠소이다. 하나, 조건이 있소이다."
무심히 뱉은 말이지만 그 의미는 대단한 것이었다.
천마존 냉한웅이 개방의 제자가 된다는 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철지영개는 말 안 해도 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마른 장작깨비 같은 널 본 방주의 제자로 받아 달란 말이지? 그건 절대로 안 된다."
냉한웅도 지지 않고 노갈을 터뜨렸다.
"소생 역시 당신 같은 술귀신을 사부로 모실 생각, 추호도 없소!"
일순, 철지영개의 눈동자가 기광(奇光)을 발했다.
"사부로 모시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본 방주는 널 꼭 제자로 삼아야만 하겠다."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려 세 명의 거지들에게 호통쳤다.
"이 놈들아, 왜 이리 눈치가 없느냐? 어서 오결제자께 예를 올려라."
개방방주의 직전제자는 자동적으로 오결당주의 신분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거대 조직인 개방의 최고 우두머리 눈에 들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런데 철지영개는 냉한웅과 첫 대면을 한 지 불과 일다경(一茶頃)도 안 되어
제자로 맞이한다는 결정을 내렸으니….
세 명의 거지들은 혼란스런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을 살폈다.
털보 거지는 두 아우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모아지자,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주님, 직전제자는 후대 개방과도 중요한 연관이 있으므로 장로회의를 거치는 게 상례 아니옵니까?"
이어 두 명의 거지도 힘을 얻은 듯 급히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았다.
"지금은 그리 긴급하게 결정을 내릴 상황도 아니니, 순서를 밟아 받아들이시는 것이…."
이 때, 추추귀개가 벼락같이 호통을 쳐 말을 끊었다.
"네놈들이 감히 방주님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항명죄(抗命罪)는 사형이니,
내 당장에 쳐 죽여 버리겠다."
냉한웅이 설레설레 손을 흔들고 나섰다.
"그럴 필요가 없소. 소생은 추호도 직전제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월녀개는 그의 행동이 계속 자신의 예측에서 벗어나자, 흥미 어린 눈빛을 발했다.
"이봐, 글쟁이! 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소생이 얘기해 봤자, 낭자는 들어 주지 못할 거요."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철지영개의 눈에 살광이 번뜩였다.
"더 이상 물을 필요조차 없다. 내 당장 저 놈을 타구봉으로 개 패듯 패서 없애 버릴 것이니까.
퉤퉤, 비켜라. 오랜만에 피 냄새 좀 맡아야겠으니까."
철지영개는 손바닥에 침까지 뱉어 가며 나섰다.
그는 짐짓 분통이 터진 듯 행동하였다.
하지만 냉한웅은 변함없이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소생을 직전제자로 받아들이려 함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소?
방주께서 보물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면, 부숴 버리는 어리석음을 결코 범하지 않을 게요."
일순, 철지영개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어리다 지워졌다.
"네놈의 골통은 확실히 범상치 않구나.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봐라."
"소생은 단지 개방의 일결제자 신분을 원할 뿐이오."
"……."
너무도 뜻밖의 대답에 거지들은 하나같이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깊은 혜지를 지닌 월녀개….
그녀도
목전의 백면서생이 비범함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하나
그의 요구가 이토록 황당할 줄은 짐작조차 못했으니, 다른 거지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이 때 철지영개의 표정은 심각하다 못해 무섭게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사부의 이런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추추귀개와 월녀개도 긴장되어 숨을 죽였다.
이윽고 철지영개가 힘들게 입술을 움직였다.
"허… 락한… 다!"
냉한웅은 오래간만에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우후후후……!"
잔잔하게 흐르는 냇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우스꽝스러워서였다.
누덕누덕 기운 더러운 옷은 그나마 너무도 헐렁해 여윈 그의 몸을 허수아비처럼 보이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며 허리에 질끈 동여맨 개방 일결제자의 표식과 거기에 달린
작은 호로병 등….
거지 족보에 오른 티를 역력히 드러냈다.
이 때, 월녀개가 그의 등을 툭 쳤다.
"소걸군(少乞君), 무엇이 그리 우습지?"
소걸군(少乞君).
개방 방주인 철지영개가 지어 준 별호로, 그가 냉한웅의 황당한 요구를 받아 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소걸개(少乞 )라 불리우던 개방의 십결종사(十結宗師)!
개방( 幇)이라는 기상천외(奇想天外)의 문파를 세운 그는 바로 중원의 상권(商權)을 장악했던
천하거부(天下巨富) 홍소야(紅少爺)이자 절세고수인 일월공자(日月公子) 사마협진(司馬俠眞)이다.
철지영개가 냉한웅이 천하거부인 만보공자(萬寶公子)이며
천존비동의 절세무학을 터득한 고수라는 것을 알 리 없다.
하지만 육감(六感)이랄까?
그는 냉한웅에게서 자신이 존경하는 개방의 종사, 소걸군을 느꼈던 것이다.
냉한웅은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아, 마소(魔笑)…!
얼굴이 마주친 순간, 월녀개의 가슴은 열풍(熱風)에 녹아 버리는 듯했다.
"……."
그것은 달빛이었다.
어린 그녀가 손을 들어 잡으려 했던 달님의… 신비로운 미소였다.
'소걸군, 너였구나! 여지껏 애타게 기다려 온 달님이….'
그녀가 넋 나간 듯 냉한웅을 바라보고 있을 때, 추추귀개가 신나게 떠들어 댔다.
"신양에서 신나는 일이 우릴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마냥 노닥거리고 있을 거야?
어서 가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먹고 마시자구."
냉한웅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한 상 잘 얻어먹을 수 있다고 해서, 따라나서긴 했지만… 대체 무슨 잔치야?"
"낙양 태검장의 비룡서생(飛龍書生) 남궁진악(南宮眞岳)과
일월문(日月門)의 강북일남(江北一男) 하충(河忠)이 절세미녀들과 성혼(成婚)을 한다더군.
그러니 볼거리도 많을걸."
냉한웅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어찌 그 자들을 잊겠는가?
"상대는 누군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반추(反芻)하는 그의 음성도 자연 낮아졌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추추귀개의 음성은 반대로 높아만 갔다.
"미녀
중의 미녀로 소문난 낙양일색(洛陽一色) 팽지연(彭芝燕)과
미녀 중의 재녀(才女)인
천수공녀(千手公女) 유화영(兪華英)이지."
낙양일색 팽지연,
천수공녀 유화영.
그녀들의 아리따운 자태가 환영이 되어 스쳐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한웅은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일순간에 냉한웅의 눈빛에서 감정의 흔적이 사라졌다.
무심(無心)… 천대 받던 날들의 그 표정으로 돌아간 것이다.
한심이로 놀림당하던 그 시절로.
월녀개는 이런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소걸군이 그들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의 신분은 평범한 낙방서생일 리가 없다.'
다음 순간, 그녀는 내심 크게 경악했다.
어느 새 냉한웅의 얼굴이 히죽히죽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토록 다양한 변화는 그만큼 깊이 감춰야만 할 비밀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저 웃음으로 속이려 든다면, 천하라도 속여넘길 수 있으리라.'
그녀의 시선이 뜨겁게 느껴진 냉한웅은 슬며시 고개를 들어 구름을 보는 척했다.
문득 그의 입술을 비집고 가느다랗게 공자행(公子行)이 흘러 나왔다.
"천진교하양춘수, 천진교상번화자, 마성회합청운외, 인영요동록파리…."
다리 아랜 봄 싣고 흐르는 물 소리,
다리 위엔 귀공자의 발자국 소리.
말 울어 구름 밖에 멀리 사라지고,
물가엔 오가는 사람 그림자 잦다.
물결에 씻기는 조약돌 옥 같고,
구름은 흩어져 바로 비단결이구나.
늘어진 버들에도 애끓는 마음이여!
복사꽃도 애달파 서러운 것을.
즐거워라! 이 날을 젊은 아가씨,
노래하며 춤추며 때를 보내리.
울금향같이 사뭇 예쁜 아가씨,
귀공자 옆을 따라오고 가느니.
주렴엔 햇볕 눈이 부시고,
옥안엔 단장도 더욱 곱구나.
꽃 따라 짝지어 나는 나비들,
못가엔 원앙이 오고 가는데…….
한무제도 한때는 이리 보내고,
초야왕도 한때는 이리 보내고.
고래로 고운 얼굴 원하는 것을,
항차 서로 보는 이 날에서랴.
원컨대 옷이 되어 그대 허리 감으리,
아니면 거울 되어 그대 얼굴 비추리.
서로 만나 가까운 우리들이라,
일평생 이대로 살아지이다.
소나무로 한 천 년 살아지이다.
뉘라서 무개꽃을 원하오리까?
백 년을 이대로 살고 지고,
천추만세 후엔 북망의 티끌 되리.
흥취가
절로 솟은 냉한웅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품안에서 퉁소를 꺼내 들었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하나, 특별한 점은 발견할 수 없는….
그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퉁소의 이름을 밝혔다.
"마정소(魔情嘯)라 하지."
이어 마정소의 애절한 음률이 미인의 치맛자락인 양 미풍(微風)에 살랑였다.
삘릴리리… 삘리……!
유선곡(遊仙曲)이었다!
그가
몽롱한 의식 속에서 들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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