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2장 기인(奇人) 상봉(相逢)

오늘의 쉼터 2016. 5. 31. 01:04

제2장 기인(奇人) 상봉(相逢)

 

유복(儒服) 차림에 두툼하고 묵직해 보이는 팔척장신(八尺長身)의 청년.

부리부리한  호안(虎眼)과 태산준봉(泰山俊峰)같이 툭 튀어나온 코,

그야말로 기개(氣槪)가 헌앙(軒昻)한 장부(丈夫)였다.

다만 입가에 어린 얄팍한 미소가 그의 성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예시하고 있었다.

이 청년의 곁에는 새벽 이슬을 머금은 풀꽃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운 두 소녀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녀들 중 우측의 소녀는 노란 비단 옷에 금빛 찬란한 명화대(明花帶)를 두르고,

발에는 당혜(唐鞋)를 신고 있었다.

화사한 차림새에 상냥한 느낌을 주는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채에 화월잠(花月簪)을 꽂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좌측 소녀의 서늘한 봉목(鳳目)에 움푹 패인 보조개는 귀엽고 아름다워,

꽉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이들은 부영폭포 입구에서 낙양일색 팽지연을 기다리는 강북일월문(江北日月門)의

하충, 하미미 남매와 천수공녀(千手公女) 유화영(兪華英)이었다.

지나치던 유람객들이 이 수려한 일남이녀에게 자주 시선을 던졌다.

그 중에는 추파를 던지는 몰염치한 남녀들도 있었다.

이 때, 강북월녀(江北月女) 하미미(河美美)가 섬섬옥수를 치켜들었다.


"저기… 연언니가 오고 있어요."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는 하충의 눈빛이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태검장의 팽낭자가 틀림없군."


사뿐히 걸어오는 팽지연의 용모는 주위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모았다.

일남일녀에게로 다가온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흘리며 먼저 인사했다.


"소매(小妹)가 제일 늦었군요."


유화영이 재빨리 양 손을 그녀의 겨드랑이에 끼워 넣어 간지럽혔다.


"지연이는 갈수록 더 예뻐지네.

이러다간 삼 년 후에 개최되는 강호명화대회(江湖名花大會)에선 적수가 없어지는 것 아닐까?"


강호명화대회(江湖名花大會)!


무림에 몸담은 여협(女俠)들 중 미색(美色)과 기예(技藝)가 가장 출중한 이를 뽑는 이색적인 군웅대회다.

이 대회는 미녀가 많기로 소문난 항주에서 열리는데,

초기에는 단순히 용모의 아름다움만을 겨루는 것이었고 규모도 작았다.

이것이 대규모로 시행케 된 것은 이십여 년 전이다.

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강호.

사소한 시비에도 목숨을 거는 무림인의 이목을 집중하기 위해서 

구파일방 장문인들이 모여  짜낸 묘안이 천하군웅대회(天下群雄大會)!

당시 이 대회에는 강호 대소문파(大小門派)의 장문인 및 제자들과 
무림세가(武林世家)의 고수들 등 수만 명을 헤아리는 군웅이 참석하였다.

몇십 년 간 은거하던 이인들까지도 관심을 가졌으며,

정(正)과 사(邪)의 구분 없이 대결을 벌이던 이 대회에서 논의된 것 중 하나

항주성의 미녀 선출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강호 평화를 지향하는 대회의 목적에 걸맞는 의식이 아닐 수 없었다.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그 명칭을 정하길 강호명화대회(江湖名花大會).

대회를 주관하는 이들로는 당금무림을 이끌고 있는 정사 양 파의 수뇌들로 정하였다.

그로부터 이년 후에 정파(正派)인 구파일방의 장문인 열 명,

파(邪派)와 녹림(綠林)의 거두 일곱 명,

중원의 남칠북육(南七北六) 십삼 개 성에서 추대된 무림명숙 십삼 명이 주관하는

첫번째 대회가 치루어졌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뽑힌 네 명의 재녀에게 각기 호칭이 주어졌는데,

다음과 같다.

강호제일화(江湖第一花),

중원명화(中原名花),

강북화(江北花),

강남화(江南花).

이 대회는 천하군웅대회의 압권을 이루었다.

강호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세인들의 지대한 호응과 관심까지 끌어모았으니,

그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겠는가!

이후 오년마다 강호명화대회가 개최되었고,

지난 네 번의 대회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진행되었으나 매번 대성황을 이루었다.

제오차 강호명화대회는 삼년 후에 개최되며, 

그 장소는 동정호(洞庭湖)을 끼고 있는 하남성(河南省)의 악양(岳陽)!

그러나…….


팽지연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표정이 묘했다.


"천수공녀의 지혜와 아름다움은 천하가 알고 있는데, 내가 어찌감히 그런 욕심을… 킥킥……!"


이때, 하미미가 향음(香音)을 토해 냈다.


"두 언니 모두 양보할 생각이신 모양인데,

그렇다면 강호제일화의 영예는 욕심 많은 소매 차지가 되겠네요."


그녀의 치기 어린 말투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호호……!"


"호호호……!"


세상의 어떤 시름도 섞이지 않은 밝고 명랑한 웃음들이었다.

듣는 이들의 마음마저 청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한 소년만은 그렇지 못했으니,

비지땀을 흘리며 겨우 뒤따라온 냉한웅이었다.

강북일남 하충은 거만한 시선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너는 누구냐?"


"……."


냉한웅은 묵묵히 팽지연을 응시하였다.

팽지연은 싸늘한 눈빛을 던지며 외쳤다.


"어서 대국사에 다녀오지 않고 왜 자꾸만 냄새 맡은 강아지 마냥 따라오느냐?"


그녀의 가시 돋친 말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듣더라도 절로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으나, 

무심(無心)한 냉한웅의 표정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곁에 있던 천수공녀 유화영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연이답지가 않군. 어째서 저 소년을 저리도 가혹하게 대하는 걸까?'


유화영은 천중사기 중 지혜가 뛰어나기로 이름난 천수제갈의 여식이다.

따라서 총명이 범인(凡人)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의혹을 품었으나, 하충의 냉랭한 음성이 이런 생각마저 깨 버렸다.


"이 놈아, 팽낭자의 말씀이 들리지 않느냐?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대국사로 떠나거라."


냉한웅은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으나,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등에 진 음식물이 무거운 듯 휘청거리자, 유화영은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무거운 모양인데,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어떻겠느냐?"


냉한웅의 발길이 즉시 멈추었다.

자신이 지고  있는 보퉁이의 음식물은 그들 남녀가 먹을 것인데, 뭐하러 대국사로 가져가는가?

그는 서둘러 음식물을 꺼내 놓으려 했다.

하지만 팽지연의 음성은 또 그를 괴롭혔다.


"우리더러 대신 그것을 지키란 말이냐? 네가 그걸 갖고 대국사에 들렸다가 오너라."


팽지연은 냉한웅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로 옮겨지자,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저 애는 꽤나 어리벙벙하네요."


하미미가 까르르 교소를 터뜨리자, 하충도 거들었다.


"보아하니, 저 놈은 몸이 매우 허약한데다 머리까지 모자란 것 같군. 꼴에 오기는 있어 가지고……."


냉한웅의 표정은 변함없었으나 꽉 깨문 아랫입술에서 피가 났다.

몸을 돌려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는 냉한웅.

그의 뒷모습을 아프게 바라보는 팽지연의 눈빛을 유화영은 놓치지 않았다.


"음식물인 것 같은데, 그 안에 고기도 있겠지?"


그녀의 물음에 뼈가 있음을 눈치챈 팽지연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 그뿐인가? 술도 있는걸."


다음 순간, 유화영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그 소년을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하충이 박장대소(拍掌大笑)했다.


"사찰 내에선 육식(肉食)과 술(酒)을 금하니, 보퉁이를 풀었다간… 푸하하하……!"


하미미와 팽지연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유화영은 멀어져 가는 냉한웅의 모습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팽지연도 웃음소리를 내었으나, 시선은 냉한웅의 모습에 꽂혀 있었다.

하나, 이런 미묘한 심사를 그 누가 알아챌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