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1장 기동괴동(奇童怪童)

오늘의 쉼터 2016. 5. 31. 00:49

제1장 기동괴동(奇童怪童)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은 낙수(洛水)의 북방에 위치한 고진명읍(古鎭名邑)이다.

예로부터 많은 나라가 도읍으로  정한 이 곳은, 강북 문물의 교역지(交易地)이며 중심지이기도 했다.

또한 경관이 수려하여  유람객들의 발길이 잦았기에 주루(酒樓)와 기방(妓房),

도박장(賭博場)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이 곳 낙양시가(洛陽市街)에는 세 곳의 명소(名所)가 있다.


대국사(大國寺).

부영산(浮影山) 기슭에 자리한 이 사찰은 황족(皇族)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승려만도 삼백을 헤아릴 만큼 방대했다.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의 하원(下院)이라 각종 기예에 능한 고승들도 많아,

향객(香客)들로 항시 만원을 이루는 이 절은 낙양 삼대명물 중에서도 첫번째로 꼽혔다.


낙락원(樂樂院).

천하(天下) 산해진미(山海珍味)와  미주(美酒), 미기(美妓)들, 그 리고 도박장까지 갖춘

이 곳을 중원 최고의 환락처(歡樂處)라 불러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소문난 부호(富豪)가 아니라면 출입이 어려울 만큼 은자(銀子)가 많이 들어, 

대개의 풍류객(風流客)들은 문 밖에서 구경만 하다 돌아갈 뿐이었다.


태검장(太劍莊).

무림의 명숙(名宿)인 태검신노(太劍神老) 팽소환(彭召煥)의 장원으로,

이 곳이 낙양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이유는 세 가지였다.

풍운칠혼검법(風雲七魂劍法).

팽소환은 이 무공으로 화산제일검(華山第一劍)을 패배시켰으며, 
강호에 악명을 떨치던 독살객(毒殺客)과 흉귀삼마(凶鬼三魔)를 처치했다.


낙양일색(洛陽一色) 팽지연(彭芝燕).

태검신노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인 그녀의 용모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평해도 조금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방년 십칠 세인 팽지연을 사모하는 무수한 청년들 중엔

무예계 밖의 선비나 왕손공자(王孫公子)들도 있을 만큼 그녀의 미색은 중원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팽씨 부녀보다 더욱 태검장을 유명하게 만든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팽소환의 다섯 제자 중 맏이인 비룡서생(飛龍書生) 남궁진악(南宮眞岳)이다.

풍운칠절검법을 팔성(成)까지 연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 또한 보기 드물게  영준한 그는,

당금 후기지수(後起之秀)들 중에서도 첫번째로 손꼽힐 만큼 문무(文武) 양면에 걸출한 인재였다.

남궁진악은 내공 수위에 있어서도 선배 고수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는데,

이는 나이 칠 세에 천년자령지초(千年紫靈芝草)를 우연히 복용한 기연(奇緣) 때문이었다.

이 영초(靈草)는 일반인이 복용하면 무병장수(無病長壽)를 할 수 있고,

무림인이라면 일 갑자(甲子)에 달하는 공력을 얻을 수 있다.


일 갑자(甲子)!

일반 무림인이 여기에 달하는 공력을 쌓으려면

반평생(半平生) 면벽수련(面壁修鍊)해야 가능하지 않은가?


푸르른 잔디가 초원(草原)인 양 펼쳐진 태검장의 후원(後園)은

체를 드러낸 다섯 청년이 지르는 기합 소리로 채워지고 있었다.

삼진권(三進拳), 이룡쟁주(二龍爭珠),  야호출림(夜虎出林), 오형권(五形拳),

십형권(十形拳),  공자복호권(工字伏虎拳), 호학쌍형권(虎鶴雙形拳) 등

권법의 투로(套路 : 무술의 형)를 연마하는 한결같이 훤칠한 용모의 다섯 청년.


"야앗-!"

"호오!"


그들 중에서도 비룡서생 남궁진악의 탈속영준(脫俗英俊)함은 특히 돋보였다.


"하반신에 좀더 충실하여, 발을 한 번 내딛는 것이 마치 땅에 발도장을 찍는 듯하게 하라.

동작 하나하나에 용맹하고 표한(彪悍)한 아름다움을 표현해야 양강지미(陽剛之美)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남궁진악은 사부를 대신해 사제들을 지도했다.

이때, 넷째 제자인 월아검(月我劍) 악빈(岳彬)이 두리번거렸다.


"휴우, 지독히도 덥군. 물을 가지러 간 멍청이 놈은 어찌 된 거야?"

"보나마나 뒤뚱뒤뚱 오리 새끼처럼 걸어오고 있는 중이겠지."


둘째 제자인 풍운협사(風雲俠士) 천우상(千雨商)의 대꾸에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웃음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누각(樓閣) 뒤로부터 초라한 몰골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십사오 세 가량 되었을까?

누덕누덕 기운 옷에 안면이 땀 투성이인 그는 천우상의 말대로 매우 어색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물통이 몹시 힘겨운 모습이었다.

평범한 용모에 나약해 보이는 소년.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기이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무표정!

힘겨워 하는 소년의 얼굴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추호도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었다.


냉한웅(冷恨雄).

오 년 전, 부영산 기슭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그의 모습

대국사를 다녀오던 태검신노의 눈에 띄었다.

냉한웅은 태검신노가 다가가 동정 어린 말을 건넸으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단지 무심한 시선으로 태검신노를 올려다보았을 뿐…….

태검신노는 어린 소년의 인내력에 감탄하며 태검장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그는 선천적으로 병약하여 힘든 일을 하지 못했다.

태검신노가 자신과 교분이 두터운 명의(名醫)를 불러 진맥한 결과, 오음절맥(五陰絶脈)!

대개가 십팔 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다는, 극히 희귀한 병이었다.

대신 오음절맥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범인(凡人)과는 비교가 안되게 총명한데,

이런 걸 공평하다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냉한웅은 총명하곤 거리가 멀었다.

천자문(千字文)을 완전히 깨우치는데만 해도 삼 년이 흘렀을 정도이니…….

냉한웅은 태검장의 잡부로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절맥을 지닌 터라 일하는 게 서툴렀다.

태검장의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손가락질하고, 때로는 매질까지 했다.

- 밥만 축내는 쓸모 없는 놈!

- 빨리 죽어 다른 사람 고생 좀 덜 시켜라!

그들은 냉한웅을 한심한 놈이라 하여 냉한심이라 불렀다.

하지만 냉한웅은 태검장을 떠나지 않았다.

멸시와 학대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지난 오 년 간을 버텨 온 것이다.

셋째 제자인 신기수사(神技秀士) 장광우(張光優)가 빈정거렸다.


"식충(食蟲)아, 네놈이 길어 온 물로 밥을 해 먹으려다간 굶어 죽기 꼭 알맞겠다."


악빈이 코방귀를 날렸다.


"흥! 보나마나 물은 반 통도 채우지 않았을걸?"


그의 말대로 물은 겨우 통의 절반을 채우고 있었다.

오는 도중에 쏟아 버렸던 것이다.

냉한웅은 그들의 비웃음을 못 들은 척 담담한 눈빛으로 허공만을 응시했다.

악빈은 시선을 대사형(大師兄)인 남궁진악에게로 돌렸다.

순간, 그의 눈빛은 더할 수 없이 부드럽게 변했다.


"대사형, 먼저 드시지요."


아첨이 깃든 음성이 마음에 든 듯 남궁진악이 싱긋 미소를 띄우자,

막내 사제인 독보절객(獨步絶客) 서성구(徐成九)가 얼른 물을 떠 바쳤다.


"여기……."


이때, 남궁진악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물에 어찌 이 따위 것이 들어 있느냐?"

그의 손가락이 물통 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린애 손가락 마디만한 작은 풀잎 하나가 살풋 떠 있었다.

남궁진악은 물통을 걷어찼다.

퍽-!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한 물통이 산산조각 나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자,

네 명의 사제들은 놀라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러나 냉한웅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이 멍청한 놈아! 빨리 돌아가 물을 길어 오지않고 뭐하는 거냐?"


남궁진악의 고함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자, 냉한웅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좀더 빨리 걸어라!"


천우상이 머리를 쥐어박았지만 맞은 것조차도 못 느낀 듯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섯 청년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후원에 왜소한 인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흡… 으흡!"


신들린 듯 팔다리를 휘두르며 가쁜 호흡을 내쉬는 냉한웅이었다.

그러나 몸에 돌을 매단 듯 동작이 매우 둔했으며, 기(氣)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그가 동작을 멈추고 탄식을 내뱉었다.


"냉한웅아, 너는 어찌해 이리도 자질(資質)이 부족하단 말이냐?"


그의 음성엔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일 듯한 비애가 담겨 있었다.

그가 다시 땅바닥에 양 발바닥을 딱 붙이고 사평대마(四平大馬) 자세를 취했을 때,

등 뒤에서 조소 어린 음성이 들려 왔다.


"한심이 놈, 이젠 별 짓 다 하는군. 달밤에 오도방정까지 떨어 대고……."


여섯 명, 태검신노의 다섯 제자들 외에 회의경장 차림의 소녀 한 명이 끼여 있었다.

달빛에 드러난 그녀의 자태(姿態)는 실로 혼백을 앗아 갈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갸름한 얼굴에 초생달 같은 눈썹, 보석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망울 하며,

오똑 솟은 콧날,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

백옥보다 더 희고 깨끗한  살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알맞은 키, 
흑단(黑檀)처럼 검고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얼굴은 물론 신체 각 부분 단 한 곳도 흠잡을 수 없는 그 아름다움을 어찌 일설(一說)로 표현하랴?

월궁의 항아가 하강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답다 못해 신비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녀는 버들잎 같은 허리를 흔들며 교소(嬌笑)를 흘렸다.


"남궁오라버니, 소매의 말이 맞죠?"


신기수사 장광우가 끼여들어 맞장구를 쳤다.


"연매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기막힌 구경을 평생 못할 뻔했군.

신이 육갑 떤다는 말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어."


"푸하하하……!"


그들의 앙천광소는 예리한 비수가 되어 냉한웅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팽지연, 넌 왜 나를 이토록 미워하는 것이냐?'

하지만 냉한웅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이때 월아검 악빈이 묘한 미소를 띄운 채 장광우를 바라보았다.


"장사형(張師兄)! 한심이가 무공을 익히는 것은 바로 형을 상대하려는 속셈인 것 같은데……."


장광우는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화살의 방향을 풍운협사 천우상에게로 돌렸다.


"말도 안 돼! 우형(愚兄)은 겨우 갈빗대 두 대 부러뜨린 일밖에 없는데,

저 병신이 가장 큰 원한을 품은 사람이야말로 천사형(千師兄) 아니겠어?"


천우상도 익살맞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저 놈이 우형(愚兄)의 발길에 채여 한 달 이상 자리에 누운 적이 있긴 하지만,

대사형에게 당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구."


비룡서생 남궁진악의 싸늘한 미소가 냉한웅에게 던져졌다.


"네놈이 내게 앙심을 품고 있다면 당장 자결하는 편이 더 나을 게다.

평생 동안 무공을 연마하더라도 내 발가락의 때조차 벗길 수 없을 테니까."


이어 모두가 배를 움켜쥐고 웃어 댔다.

어찌나 신나게 웃는지 하늘의 별들과 후원의 잔디, 돌멩이까지도 웃는 듯하였다.

하지만 단 한 명, 냉한웅의 무표정한 얼굴만은 추호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남궁진악의 눈가에 살기가 어렸다.


"네놈의 그런 표정을 지난 오 년 동안 줄곧 보아 왔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반항의 뜻이냐?"


"……."


일순, 서성구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대사형께 치도곤 당한 이후, 흉심을 품은게 틀림없어요.

지금 당장 이 쓰레기를 치워 버리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워낙  멍청한 놈이라  아직도 태극권(太極拳)의 기초조차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는데……."


천우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웅얼거릴 때, 팽지연이 또 끼여들었다.


"소매가 일러 주지 않았더라면, 한심이가 흉심을 품고 있는 것조차 사형들은 전혀 몰랐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가라앉아 가던 분위기가 다시 고조되었다.


"맞아, 이 놈은 단단히 혼줄을 내야 해!"


서성구가 다짜고짜 일격을 가했다.


"으……."


냉한웅은 몸이 거의 일 장 가량이나 땅바닥에 나뒹굴 만큼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 피가 나도록 입술을 악물었다.

이어 장광우가 냉한웅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저승길이 아직 멀리 있으니, 엄살 부리지 마라."


그의 주먹이 냉한웅의 복부를 내질렀다.

요혈을 피해서, 그리고 죽지 않을 만큼 힘을 조절해 고통을 가하

그들은 계속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천우상의 오른발이 나자빠진 냉한웅의 가슴을 누른 순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듯 신음이 외부로 새어 나왔다.


"크윽!"


무표정한 얼굴도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냉한웅의 입술을 비집고 흐르는 핏줄기를 본 남궁진악은 흉성(胸性)이 더욱 발동했다.


"네놈의 뼈다귀가 얼마나 단단하지 두고보겠다."

그가 음충맞게 지껄이며 가볍게 일 장을 격출하자,

냉한웅의 몸이 공처럼 허공에 퉁겨져 올랐다 떨어졌다.

쿵-!

이번의 충격은 허약한 몸이 견뎌 내기엔 너무도 컸다.

냉한웅은 그대로 혼절하여 시신처럼 사지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이 순간, 팽지연도 입술을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그녀의 젖은 눈빛이 물결처럼 흔들렸고, 어여쁜 입술에는 핏방울이 맺혔으니…

이게 무슨 연유인가?

악랄한 사형제들을 불러 내 냉한웅에게 고통을 가하게 한 그녀가 왜……?

그들은 실신한 냉한웅을 내버려둔 채 발길을 돌렸다.


바라보아도 떠난 이 없고,
돌아보아도 오는 이 없고,
천지는 태고처럼 하냥 조용한데……
달빛만이 슬퍼하여 홀로 눈물 흘리나니.

아, 달빛만이 보듬는 한 소년의 가슴.

그 곳에 새롭게 심어진 한(恨)을 팽지연은 알고 있을까?


고열(高熱)에 시달리던 냉한웅이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열흘 후였다.


그를 보살피던 태검장의 노복(老僕) 황칠(黃七)이 끌끌 혀를 찼다.


"그러길래 내가 공자님들에게 고분고분하라고 당부하지 않았느냐? 
멍청하기 짝이 없는 녀석!"


"……."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황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가자, 냉한웅은 부시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윽!"


전신의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근육이  찢겨져 나가는 듯 고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체내(體內)에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진 않았다.


'참으로 이상하군. 내상을 심히 입었을 텐데…….'


이러한 일은 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억세게 얻어맞더라도 앓고 난 후엔 매번 무사히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냉한웅은 침상에 걸터앉은 채 후원에서 당했던 상황을 곱씹었다.


순간, 그의 눈동자에 섬뜩한 살기가 번졌으나 그것마저도 무기력한 눈빛일 뿐이었다.


"으휴!"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에 
창 틈으로 스며든 가을 햇살이 짙은 음영(陰影)을 드리웠다.



별다른 치장 없이 약 내음만이 진동하는 실내.


선명한 인상에 금포를 걸친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오락가락하였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로다.  태검단(太劍丹)을 제조하기 위해 구입한 약재가 이토록 줄어들다니…….'


약실(藥室) 안의 각종 약재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는 금포노인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태검장에 침입해 노부의 약재를 훔쳐 갈 도둑이란 있을 수 없다. 
이건 내부인의 소행이 분명하다."


이 때, 옷자락 스치는 경미한 음향과 함께 낙양일색 팽지연이 들어섰다.


"아버님, 어인 일로 고심하시나요?"


"아무것도 아니다. 한데, 너야말로 무슨 일이냐?"


팽지연은 박속같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화사하게 웃었다.


"소녀가 아버님을 찾아 얼마나 헤맸는지 아세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애교에 태검신노 팽소환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연아가 또 무슨 일로 애비를 괴롭히려고… 우선 들어나 보자."


팽지연은 귀엽게 입술을 오물거렸다.


"부영산 경관도 구경할 겸 대국사에 다녀오고 싶어요."


딸의 부탁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팽소환이었다.


그는 걱정스런 기색을 떠올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대사형과 동행한다면 허락하마."


순간, 팽지연은 뾰로통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은 소녀의 무공을 너무도 업수이 여기세요.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아니 견녀(犬女) 없다는데……."


딸의 고집을 꺾어 본 적이 없는 팽소환은 씁쓰레한 미소를 흘렸다.


"그렇다면 황노인과 동행하거라. 마침 대국사의 법운대사(法雲大師)께 부탁할 것도 있고 하니……."


"어떤 부탁이죠?"


"전번에 보내 주신 약초와 같은 걸 더 보내 주십사 말씀드리거라."


팽지연은 춤추듯 빙글 교구를 틀어 그의 품에 안기며 더욱 애교를 떨었다.


"부영폭포에서 천수장(千手莊)의 화영(華英)과 강북월녀(江北月女) 하미미(河美美)를 만나기로 했어요.


본장이 부영산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음식을 마련해 가야 할 텐데…


황노인보다는 젊은 한웅이가 낫지 않겠어요?"


팽소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몸이 허약한 한웅이를 골라 힘든 일을 시키려 하다니……."


"아버님이 베푸시는 호의가 오히려 한웅이를 더욱 나약하게 만들고 있어요.


이번에 소녀가 데리고 나가 바깥 구경도 시킬 겸 단련 좀 시키겠어요."


팽소환은 딸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너에게는 못 당하겠다. 맘대로 하렴."


이어 그는 대국사의 주지(住持)인 법운대사에게 보낼 서찰을 적었다.


그는 서찰을 받아 든 팽지연이 방문을 나서자, 곧 시비를 남궁진악에게로 보냈다.


일다경(一茶頃)쯤 지났을까?


남궁진악이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부님, 제자를 부르셨습니까?"


팽소환은 맏제자를 대하면 항상 마음이 뿌듯했다.


그의 일생 중 가장 보람된 일이라면 아내 없이도 딸애를 훌륭히 성장시킨 것과


남궁진악을 제자로 둔 것이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소원이라면, 딸과 맏제자를 한 쌍으로 묶는 것인데…….


"연아가 강북월녀와 천수공녀를 만나러 부영산으로 가는데,


들키지 않게 따라가 그 애를 돌봐주도록 하거라."


남궁진악의 눈동자에 이채(異彩)가 떠올랐다.


"천수공녀라면 천중사기(天中四奇) 중의 한 분이신……."


"그렇다. 천수제갈(千手諸葛)의 영애(令愛)이니,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여라."


천중사기(天中四奇)는 각자 다른 방면에서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천수제갈(千手諸葛) 유연(兪蓮).


토목건축(土木建築)과 기관진법(機關陣法)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나,


남의 부탁을 좀처럼 들어 주지 않는 괴팍한 성격의 위인이었다.


때문에, 그의 손길이 머문 곳을 외지에서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천수장(千手莊)의 기관 배치는 귀신도 범접 못할 거란 소문이 강호에 떠돌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이 퍼졌겠는가?


- 지옥의 염왕부(閻王府)를 방문할지언정 천수장의 담은 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