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기인(奇人) 상봉(相逢)-3
그
매혹적인 음성에 냉한웅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눈이 부신 듯 느껴졌다.
천향국색(天香國色)!
빙기옥골(氷肌玉骨)!
침어낙안(侵魚落雁)!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묘사하기 부족할 만큼 아름다운 궁장소녀가 서
있었다.
궁장에
수놓아진 용 무늬는 그녀가 황족의 신분임을 알렸으며,
치장된
패옥(佩玉)은 하나같이 한 성(城)을 살 만큼이나 귀한 보물들로
보여졌다.
하지만
사치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궁장소녀에게
있어서는 그만한 장식물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만약
다른 여인들이 이런 것들로 치장하였다면, 오히려 역겨워 보였으리라.
또한
그녀의 기품은 어떠한가?
인간의
것이 아닌 듯 신비롭기까지 한…….
목전(目前)의
궁장소녀는 이 가엾은 소년의 넋을 일순간에 앗아 가
버리고 말았다.
가슴은
심하게 두방망이질치고, 얼굴은 불에 데인 듯 화끈 달아오르는
등…….
냉한웅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랜 감정이 되살아나려 할때,
땅바닥이
갈라지듯 메마른 음성이 그의 고막을 울려 댔다.
"냉큼
무릎을 꿇어라!"
동시에
냉한웅은 양 무릎 부위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윽!"
그는
비명을 토하며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은 후 고개를 들어 보니,
눈앞에
초로(初老)의 금의인(錦衣人)이 어른거렸다.
그는
매우 근엄한 표정으로 냉한웅을 주시하였다.
"보아하니
천민(賤民)인 듯싶은데, 불순한 생각을 지닌 자가 아니고서야
감히
소연군주(素蓮君主)님의 안전에서
이토록 무례할 수 없다."
냉한웅은
가슴이 섬뜩했지만 변함없는 표정으로 금의인을 올려다봤다.
"……."
"무슨
목적으로 군주님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냉한웅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소인…
은 다만 그… 냥……."
그가
입을 열자, 소연군주가 미간을 찡긋거렸다.
그녀의
곁에 있던 법운대사와 두 명의 시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짐작대로
귀머거리가 아니었구나. 뭔가 속셈을 지닌 놈이 분명하다."
금의인은
계속 호통을 치자, 냉한웅도 오기가 일어 마주 외쳐 댔다.
"소인은
소연군주님이 뉘신지조차 모릅니다."
냉한웅은
소연군주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한심이라
불리우며 손가락질 받는 그에게 누가 황실에 관한 얘기를
들려 주겠는가?
소연군주(素蓮君主)
주예영(朱豫英).
그녀는
평성왕(平城王) 주붕원(朱朋元)의 금지옥엽이다.
평성왕은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 절강성(浙江省) 등을 관장하는
황족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호방하여 황제(皇帝)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딸인 소연군주로 인해 더욱 신임을 받고 있는 편이라
하는 것이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소연군주는
용모가 절하절색일 뿐만 아니라 재지(才智) 또한 출중해,
슬하에
공주가 없는 황제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니…….
소연군주의
미모와 총명함에 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중원각지로
퍼져 나가 삼척동자의
입에까지 오르내릴 정도였으므로,
금의인의
의심을 산 것은 당연했다.
"아무래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놈이구나. 여봐라!"
금의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건장한 체구의 사내 네
명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일견(一見)하기에도
소연군주를
호위하기 위해 변복(變服)을 한 위사(衛士)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금검대위사(金劍隊衛士)!
부르셨습니까?"
걸걸한
외침이 중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금검대위사라
불리운 금의인이 손가락으로 냉한웅을 가리켰다.
"저
놈의 몸을 뒤져 보아라. 암기(暗器)류를 지니고 있을 게 틀림없으니,
샅샅이……."
냉한웅은
위사들이 자신을 둘러싸자, 마음대로 뒤지라는 듯 두 팔을
벌렸다.
"이건……."
냉한웅의
보퉁이를 뒤지던 위사가 놀란 외침을 토하자,
금검대위사의
눈동자가 예리한 빛을 발했다.
"무엇을
발견했느냐?"
위사는
두 손으로 기름 종이에 싸인 물건을 내밀었다.
서둘러
받아 든 금검사대위사는 뭉클한 촉감을 느끼며 기름 종이를
펼쳤다.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일순,
관심 있게 지켜보던 중인들의 입에서 쿡쿡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급기야 폭소(爆笑)로 변했다.
"와하하하……!"
금검대위사의
손바닥 위엔 노릇노릇 잘 구워진 오리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무안과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진 그의 얼굴은 중인들의 표정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런……!"
그는
힐끔 소연군주의 표정을 살폈다.
소연군주는
입가에 실같이 가는 웃음을 띄운 채 두 시녀에게 지시했다.
"어서
가도록 하자."
그녀가
살포시 옷자락을 끌며 옥보(玉步)를 옮기자, 금검대위사는 울화가
치밀었다.
소연군주
일행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보던 그가 냉큼 냉한웅의 입
안에 오리구이를 밀어 넣었다.
"네놈이나
실컷 처먹어라!"
"욱!"
자신의
얼굴보다 훨씬 더 큰 오리구이를 물고 있는 냉한웅의 모습에
중인들은
또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터뜨렸다.
"에잇,
재수 없으려니 별게 나타나 망신을 주는군."
금검대위사는
수하들에게 고갯짓한 후, 급히 소연군주의 뒤를 따랐다.
냉한웅은
오리구이를 입에 문 채 소연군주의 뒷모습을 넋 나간 듯 지켜보았다.
이때,
그의 귀에 약간은 노기(怒氣) 서린 법운대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시주는
이 곳이 신성한 불지(佛地)임을 모르오? 어서 떠나시오."
법운대사가
소연군주 일행이 사라진 방향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기자,
몰려
있던 향객들도 그에게 비웃음을 남기며 하나둘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냉한웅은
심신(心身)이 천만 근이 나가는 듯 무겁게 느껴졌다.
어떤
비웃음이라도 흘려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소연군주의 경멸 어린
미소만은…….
어째서
소연군주의 외면만은 이토록 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걸까?
'냉한웅아,
이 천하에서 제일 못난 놈아!'
폐부에서
강한 절규(絶叫)가 우러 나왔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삼켜
버렸다.
이때,
체격이 장대하고 광대뼈가 불쑥 튀어나온 중년화상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시주는
본사에 무슨 불만이 있소?"
냉한웅은
그제서야 오리구이를 뱉어 내고 고개를 흔들었다.
"……."
"그렇다면
당장 비린내 나는 음식을 가지고 떠나시오."
냉한웅은
아무런 대꾸 없이 오리구이를 집어 보퉁이 속에 넣었다.
내쫓기듯
대국사 정문을 나서는 그의 머리 속은 빙빙 도는 듯 어지러웠다.
무기력한
자신이 그토록 싫어질 수가 없었다.
"냉한웅,
너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뜨거운
오열(嗚咽)이 입 밖으로 토해진 그 순간.
"맞아,
너 같은 전혀 쓸모 없는 물건은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서 없어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음충맞은
음성과 함께 남궁진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냉소를 흘리며 계속 빈정거렸다.
"또
무슨 멍청한 짓을 저질렀느냐?"
"……."
남궁진악은
그가 입을 다물자, 언성을 높였다.
"사부님의
서찰을 법운주지에게 전하긴 하였느냐?"
"……."
"꼴을
보아하니, 알 만하다. 쓸모라곤 전혀 없는 버러지만도 못한 놈!"
"……."
그는
냉한웅이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눈으로 쳐다만 보자, 버럭
화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노괴(老怪)들을 놓쳐 울화가 치미는데, 재수 없는 놈!"
그는
고래고래 악을 쓰며 발길질을 하였다.
퍽-!
복부를
걷어채인 냉한웅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이 장 밖에
나뒹굴었다.
그
곳은 산길에서 벗어난 우거진 수풀 속이었다.
의식이
몽롱해져 가는 그에게 남궁진악의 중얼거림이 들려 왔다.
"성수마의…
그 노괴가 저 멍청한 놈의 생명이 반년밖엔 안 남았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일순,
냉한웅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아까
만났던 노인이 성… 수…….'
실낱
같은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 그는 그대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냉한웅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이때,
화사한 음성과 웃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 왔다.
그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나는 쪽으로 돌려졌다.
눈까풀이
반쯤 가린 눈동자에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담겨졌다.
소연군주와
두 시녀, 그리고 법운대사와 금검대위사 외에 여러 명이
더 있었다.
그들
중엔 비룡서생 남궁진악도 끼여 있었는데,
소연군주의
곁에 바짝
붙어 연신 호기로운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호쾌한 모습이나, 그의 입은 아부의 말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군주님의 옥용(玉容)를 직접 대하다니, 삼생(三生)의
영광이로소이다."
이어
소연군주도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옥음(玉音)을 흘렸다.
"본
군주가 아녀자이긴 하나, 무림의 일에 관심이 많아요.
때문에,
소협의 드높은 명성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요."
"황공하옵니다.
군주님께서
비천한 소생을 그토록 높이 치켜 주시니,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들
남녀는 누가 보아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찬사(讚辭)를
주고받으며 하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냉한웅의 눈에
뜻 모를 이슬이 맺혔다.
아,
냉한웅…
얼음보다도
차갑게 식어 버린 그의 가슴 속에도 아직
불씨가 남아 있더란 말인가?
"소…
연… 윽!"
힘겹게
토해 내며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마음의 고통은 육신의 고통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가을
바람 맑아 달이 더 밝다.
어느
새 천공 높이 걸린 둥근 달.
휘영청
밝은 달이 사위(四圍)를 환히 밝혀 주었으나, 이는 오히려 또
다른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휘윙-
윙-!
컹-
커엉-!
바람에
실려 오는 짐승의 울부짖음, 그리고 뒤로 스며드는 앙금 같은
정적(靜寂)!
그러나
냉한웅은 두려움 없이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비참한
삶을 끝내기로 작정하고 황폐한 산중을 찾아드는 중이었으니,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 모두 자신과는 무관한 듯 느껴질 뿐이었다.
의도했던
대로 산봉우리를 밟은 그는 갑자기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후각을
자극하는 피비린내…….
고봉(高峰)에
어찌하여 이런 냄새가 진동하는가?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나,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피식 실소(失笑)를 머금었다.
'내
목숨을 끊을 사람이 바로 나인데…….'
곧
죽을 목숨이니, 호기심이나 채워 보자는 생각에 더듬더듬 피내음을
따라 나아갔다.
"엇?"
무엇인가
발에 걸려 다시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즉각
멈춰 서서 내려다보니, 그것은 피범벅이 된 시신(屍身)이었다.
'으…
누가 이토록 잔혹한 살상을……?'
그는
진저리를 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려
일곱 구의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두운
탓에 시신들의 용모와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무림인들인
것만은 확실했다.
시신들을
살피던 냉한웅의 눈에 반짝이는 물건이 보였다.
그것은
기형(奇形)의 도(刀)였다.
도신(刀身)이
마치 몸매가 유려한 여인의 호선(弧線)인 양 아름답게
휘어진…….
냉한웅은
마력에 이끌린 듯 도를 집어 들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오른
신비한 미소!
아,
그것은 마소(魔笑)였다.
그의
눈과 입가에 흐르는 미소는 매혹의 도를 넘어선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었으니…….
만약
이를 낙양일색 팽지연이나 소연군주(素蓮君主) 주예영(朱豫英)이
보았더라면,
그녀들의
태도가 반대로 달라졌을 것이다.
냉한웅은
어찌하여 신비한 미소를 이제야 흘리는가?
그것은
자신에 대한 불신과 비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소를
떠올릴 만한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던 냉한웅.
그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미소를 되찾은 것이다.
이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더불어 두 인영이 냉한웅의 눈앞에 떨어져
내렸다.
어느
방향으로부터 왔는지조차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신법이었다.
좌측
인영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튀어나왔다.
"분광월아도(分光月牙刀)!"
이어
우측 인영이 신음처럼 무거운 음성을 흘렸다.
"뜻밖이군.
분광월아도가 이토록 어리다니……."
냉한웅은
그들의 음성을 들었으나,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우측의
인물은 사십 세 가량의 흑의중년인으로,
허리에
녹피(鹿皮)로
만든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또한
녹피 장갑을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독극물을 다루는 고수인
듯 보였다.
좌측의
인물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회의노인이었다.
하지만
눈빛이 칼날 같고 태양혈이 불끈 솟아 있어, 내공이 매우 깊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방을
살피던 회의노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북해칠혼살(北海七魂殺)이……!"
그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첫번째 천하군웅대회였다.
북해를
대표해 참석했던 그들은 신세력인 강북검파(江北劍派)의
신검수사(神劍秀士)
백강휘(白强輝)와 사소한 시비를 벌이게 되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별다른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앙심을
품은 북해칠혼살은
천하군웅대회의 막이 내려지자,
강북검파를
찾아가 처참한
대살육전을 벌였다.
그들이
강북검파의 제자 삼백여 명을 몰살시킨 후 북해로 도주하자,
중원무림은
무척 소란스러웠다.
무림첩을
발송해 북해로 쳐들어가자는 등 분노의 외침이 들끓었으나,
자신의
일이 아니어선지 흐지부지 세월만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북해칠혼살이 시체로 변해 황량한 고봉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회의노인이
경악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
시신들이 북해칠혼살이 확실합니까?"
흑의중년인이
따라 놀라며 묻자, 회의노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노부는
천하군웅대회에서 이들을 만난 적이 있었지."
그는
냉한웅에게로 고개를 돌린 후, 포권을 해 보였다.
"손모(孫某)는
평소 대협을 흠모해 왔는데, 이렇게 뵙게 되다니 꿈만
같소이다."
그의
재빠른 처신술에 흑의중년인은 실소를 머금었다.
'탈혼비마(奪魂飛魔),
저 능구렁이 같으니! 하긴, 분광월아도의 눈
밖에 나서 이로울 일은 없겠지.'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냉한웅은 묵묵히 이들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분광월아도로
짐작되는 상대가 굳게 입을 다문 채 바라만 보자, 탈혼비마는
내심 더욱 애가 탔다.
"이 몸은
강남녹림맹(江南綠林盟)을 총괄하는 손학위(孫學爲)외다."
탈혼비마
손학위는 장강 이남의 산채(山寨)와 수채(水寨)를 양 손아귀에
쥐고 있는 녹림의 거두(巨頭)였다.
하지만
상대가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곁에 있는 흑의중년인을
가리켰다.
"이
친구는 백독곡(百毒谷) 곡주인 독군(毒君) 사일악(史一惡)이외다."
독군
사일악은 손학위 못지않게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일신 무공은 별로 뛰어나지 않으나, 독물(毒物)을 다루는 데 있어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때문에
그의 음침하고 악랄한 성격에 피해를 입은 많은 강호인들은
이만을 갈 뿐,
어쩌기는커녕
똥을 보듯 피해 버리는 입장이었다.
사일악은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망할
늙은이! 혼자서는 분광월아도를 상대하기 어려우니, 날 끌어들이려는
속셈이로군.'
독물(毒物)인
자신을 소개해도 상대가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자, 사일악은
등골이 오싹했다.
'마치
태산과 같구나. 저 자의 무공과 심기를 따를 강호인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는
간사한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북해칠혼살을
모조리 처치하다니…
대협의
분광혈섬도법(分光血閃刀法)은
정녕 명불허전(名不虛傳)이오."
손학위는
그가 동참할 뜻을 보이자, 두려움이 반감(半減)되었다.
"중원에
분광월아도가 나타난 지 반년 남짓 하지만,
그 위명은
사해팔황(四海八荒)을
뒤흔들고 있소이다. 사문을 알려 주실 수는 없소이까?"
그제서야
냉한웅은 다소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무…
슨 말씀… 인지 이… 제야……."
그의
입에서 더듬더듬 당황한 음성이 흘러 나올 때,
맞은편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와 말을 가로막았다.
"으흐흐흐…
겨우 여기로 도망쳐 오다니… 어쨌든 잘 되었다."
귀신의
호곡(號哭)인 양 징그럽기 짝이 없는 음성과 함께 한 명의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린
달빛 아래 서 있는 괴인의 형상은 조금 전의 음성보다도 더욱
징그러워 보였다.
해골에
마른 가죽만을 씌어 놓은 것 같은 얼굴에 두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코는 간 곳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빠꼼하게 두 개의 시커먼 구멍만이 뚫려 있을 뿐이었다.
특히
얄팍한 입술을 비집고 나온 두 개의 송곳니는… 으으……!
손학위와
사일악은 동시에 경악의 외침을 내질렀다.
"오마(五魔)……!"
"무산괴마(巫山怪魔)
여량(呂凉)!"
무영독마(無影毒魔)
추용극(秋用剋),
흡혈인마(吸血人魔)
유람(劉嵐),
필살검마(必殺劍魔)
천장한(千長恨),
북악신마(北嶽神魔)
고륜(高輪),
무산괴마(巫山怪魔)
여량(呂凉).
이
다섯은 이미 일 갑자(甲子) 전에 악명을 떨쳤던 노마두(老魔頭)들이다.
각기
절세신공을 지닌 이들 오마는 강호에 혈우성풍(血雨腥風)을 일으키며
떠돌다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
중 무산괴마 여량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여량은
마른 나뭇가지같이 앙상한 손을 쑥 내밀었다.
"내놓아라."
손학위가
흘낏 냉한웅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후배들도
아직 그것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여량의 시선도 냉한웅을 향할 수밖에.
순간,
안하무인(眼下無人)이던 그의 태도가 신중해졌다.
'노부
앞에서 저토록 태연할 수가! 어린 놈의 기도(氣道)가 실로 범상치
않구나.'
일세를
혈풍으로 뒤덮었던 노마두는
자신을
무시하듯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냉한웅의 모습에 경각심을 높였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음성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어린
놈아, 어서 내놓아라."
냉한웅은
그의 말뜻을 전혀 알아챌 수가 없었지만,
그가
어린 놈 운운
하자 특유의 오기가 치솟았다.
죽기로
작정한 몸이 무엇인들 겁나겠는가?
"무얼
달란 말이오?"
냉한웅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음성은 산 사람의 것이 아닌 듯 경직되었고,
차가웠다.
듣기에
따라선 지극히 반감(反感) 서린 말이었으니…….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여량은 가슴이 서늘했다.
겉모습으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곳이 괴사(怪事)가 많은 강호 아니던가?
보기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소년이지만, 실제는 비슷한 연배의 기인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됐든 다른 무림 후배들이 빤히 보고 있는데, 기죽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터.
"네놈이
권주(勸酒)는 안 마시고 벌주(罰酒)를 들려 했으니, 노부를
원망 마라."
여량이
음랭한 외침을 터뜨림과 동시에, 곁에 있는 거목(巨木)에 일격을
가했다.
우웅……!
음산한
음향이 일며 거목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심지어
나뭇잎 하나 떨어뜨리지 못했으니…….
여량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위로 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쳐다본 손학위와 사일악이 경악성을 토해 냈다.
"낭심귀견수(狼心鬼見愁)!"
"절전된
줄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푸릇푸릇 생기를 발하던 나뭇잎들이 노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량이 슬쩍 떠민 순간, 거목이 가볍게 밀려 넘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또한
땅바닥에 부딪칠 때 쿵! 하고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나야 할 터인데,
수
퇘지
불알로 만든 가죽공이 퉁겨지듯 펑! 하는 음향이 일었다.
하나,
냉한웅은 여전히 담담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여량은 거목을 들어올려 안쪽을 보여 주며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것은
결코 속임수가 아니다.
침추경(枕墜勁
: 아래로 가라앉는 힘)과
전사경(廛絲勁 : 비트는 힘)을 터득하면
이러한
침투경(浸透勁)이
생겨난다.
지금
노부가 사용한 기술은 적의 몸과 나의 손이
전혀 거리가 없는 상태에서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분경법(分勁法)인
것이다."
여량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우수(右手)를 거목의 안쪽에 푹 찔러 넣었다.
그리고
다시 쑤욱 뽑은 순간, 푸시시 부수어진 나무 조각들이 한 움큼
쥐어져 나왔다.
안쪽
부분이 음경(陰勁)에 의해 잘게 파괴된 것이었다.
그래도
냉한웅의 눈빛은 추호도 변함없었다.
무심(無心)…….
중인들은
그저 혀만 차며 냉한웅의 다음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낙엽은
모였다 또다시 흩어지고,
놀란
까마귀 깃을 감돈다.
산중의
밤은 빨리도 찾아들었다.
이십여
년 전에 중원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칠 인의 마두(魔頭) 북해칠혼살(北海七魂殺).
오마(五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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