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2장 기인(奇人) 상봉(相逢)-2

오늘의 쉼터 2016. 5. 31. 01:10

제2장 기인(奇人) 상봉(相逢)-2

 

알 길 없어라, 대국사 가는 길은.


몇 리를 들어가도 구름 덮인 산이로고.


나무는 길이 넘고, 인적도 끊겼는데…….


깊은 산 어드메쯤 들려 오는 종소린가?


흐르는 물 소리는 돌에 걸려 흐느끼고,


산 깊어 푸른 솔에 햇볕도 서늘하다.


해설피 여울물 소리만 들려 오는데…….


선정에 드니, 알 길 없어라.



냉한웅은 대국사로  향하는 비탈진 산길을  헐떡이며 오르고 있었다.


빈 몸으로도 힘든 산행인데, 무거운 음식 보퉁이까지 등에 지었으니…….


홀연 그의 입에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토해졌다.


"휴, 악독한 것들. 그렇지만 냉한웅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냉한웅은 평탄하지 않은 산길을 빨리 오르려 애썼지만,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이 때,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들려 왔다.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잠시 쉬었다 가노라면 수월할 일을, 


왜 그리 서둘러 고통을 자초하느냐?"


모습이 너무도 딱해 보여 동정 어린 충고를 해 준 모양이었으나, 


냉한웅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도 끈덕지게  발걸음을 계속하자, 예의 그 음성이 또 들려 왔다.


"네놈은 귀가 먹었느냐? 아니면 그 물건이 네 목숨보다도 소중한 거냐?"


이번에는 조금 화가 난 듯 억양이 거칠었으나, 냉한웅은 못 들은 척 멈춰 서지 않았다.


휘릭-!


옷자락이 바람을 스치는 경미한 음향과 함께 회의노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놈은 사는데, 염증을 느낀 모양이구나!"


회의노인은 예리한 시선으로 쏘아보며 노성(怒聲)을 터뜨렸다.


하나, 그는 곧 자신의 눈빛이


냉한웅의 무심한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묵직한 신음 소리를 흘렸다.


"으음……!"


공포!


말없는 두려움이 일순, 회의노인의 전신을 엄습했다.


'생애 두 번째로 만나는 괴인이로다.


저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 속에 숨겨진 고통을 노부 말고 천하 그 누구가 알아볼 수 있을까?'


냉한웅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회의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비켜 주십시오."


그러나 회의노인은 바위처럼 꿈쩍 않은 채 물었다.


"너는 무슨 연유로 그리 기를 쓰고 산을 오르느냐?"


"……."


"네놈이 노부에게 이토록 대담하게 나오는 것은 그만큼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리라."


회의노인의 오른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냉한웅의 완맥을 거머쥐었다.


무섭도록 빠른 수법.


"으윽!"


냉한웅이 고통에 찬 신음을 뱉어 내자, 회의노인은 으시시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린 놈이 불경하기 짝이 없어 버릇을 고치려는 것이다.


네놈은 혹, 공문건(孔文建)이란 함자(銜字)를 들어 봤느냐?"


중원일괴(中原一怪) 공문건(孔文建).


정사(正邪)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은 기인으로,


무공의 높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공문건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괴팍한 성격 때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아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는 이유만으로 때려 죽였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중원일괴는 중원광인(中原狂人)으로 별호(別號)가 바뀌었다.


그것이 벌써 삼십 년 전의 일.


그동안 천하를 떠돌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 온 중원광인 공문건이 부영산에 홀연히 나타날 줄이야.


강호 소식에 관한 한 귀머거리나 다름없는 냉한웅이 그를 알 리 없었다.


설사 목전(目前)의 그가 당금무림의 맹주라 하더라도 모를 것이다.


"……."


냉한웅의 무표정한 얼굴을 노려보던 그가 냉랭한 코방귀를 뀌었다.


"흥! 네놈에겐 받들어 올리는 경주(敬酒)보다 벌주(罰酒)가 제격이겠구나."


그는 허리춤에 매단 조그만 술 호로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한웅의 서른여섯 군데 요혈을 빠르게 짚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냉한웅은 전신에서 은근한 아픔이 스물스물 피어 오름을 느꼈다.


그것은 순식간에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고통으로 변했다.


일신의 뼈 마디마디가 퉁겨져 나가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


맥이 토막토막 절단되어 나가는 듯…….


냉한웅은 인상을 무섭게 일그러뜨리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노인이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성격이 괴이악랄(怪異惡辣)한 노인을 원망할 뿐이었다.


고통은 갈수록 커져 이젠 원망할 여유조차 없었다.


입이 떡떡 벌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한웅은 초절하기 짝이 없는 인내력을 보였다.


신음이나 비명을 삼켜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흘리지 않은 것이다.


공문건의 냉랭한 표정에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짐작했던 것 이상의 물건이군.'


                                 


냉한웅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끝없는 어둠의 나락(奈落) 속에 빠져든 순간,


이들의 곁에 한 줄기 신형이 표연히 날아 내렸다.


학창의(鶴 衣)를 걸친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중원광인 공문건에 비해 추호도 손색없는 예리한 눈빛을 지녔으나,


표정은 부드러웠고 행동 또한 유유했다.


"공가(孔哥)야!"


그가 매우 친숙한 말투로 부르자, 공문건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또 무슨 참견을 하고 싶어 그러는가?"


"네 나이가 몇인데, 저런 어린애를 상대로 장난질이냐?


설마,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을 잊지는 않았겠지?"


공문건의 입가에 의미 있는 미소가 번졌다.


"어찌 잊었겠느냐? 나는 다만 요 어린 놈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야."


그제서야 청수한 노인도 혼절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냉한웅에게 시선을 돌려 자세히 살폈다.


"정신 나간 자네의 마음에 들었다면, 이 애 역시 정상은 아니겠군."


"으흐흐흐… 바로 맞혔네. 하늘이 공모(孔某)를 가엾게 여겨 보내 주신 선물이지.


요 어린 놈에게 분근착골(分筋 骨)의 맛을 보여 주었는데, 인내력이 인간의 것이 아니었어."


청수한 노인은 공문건이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자, 더욱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자네가 저 애를 제자로 삼겠다면 가만 있을 수 없지.


나도 저 애에게 한 가지 절기를 전수해 주겠네."


"그게 진심인가?"


"내가 허언(虛言)하는 걸 본 적 있는가?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겠네."


"역시… 여가(呂哥), 자네야말로 진정한 친구야!"


공문건은 기쁨을 금치 못해 그를 껴안으려 했다.


하지만 청수한 노인은 그를 슬쩍 피한 후, 냉한웅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 애의 골격을 살핀 후에 기뻐해도 늦지 않아."


"하긴 성수마의(聖手魔醫)보다 이 방면에 더 뛰어난 이는 천하에 없으니, 세세히 좀 살펴 주게."


아, 이 청수한 노인이 바로 팽지연이 그토록 찾기를 바라던


성수마의(聖手魔醫) 여소량(呂紹梁)이었단 말인가?


더구나 상대를 치료해 주는 조건이 까다롭기 짝이 없는 그가 스스로 나서다니…….


그러나…….


정신을 잃고 있는 냉한웅의 전신을 살펴 가던 여소량의 표정이 차츰 굳어 가기 시작했다.


일다경(一茶頃)쯤 흘렀을까?


그의 입에서 돌연 경악에 찬 외침이 튀어나왔다.


"음양태령절맥(陰陽太靈絶脈)!"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전신이 경련을 일으켰다.


여소량의 이런 모습에 덩달아 놀란 공문건의 두 눈도 볼 만하게 휩떠졌다.


"음양… 태령절… 맥이 뭐길래……?"


"……."


여소량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직접 보기는 처음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의 의술로도 못 고치는 절증(絶症)인 것만은 확실하네."


순간, 공문건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럼 치료가 불가능하단 말인가?"


여소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수마의가 못 고치는 병을 천하의 그 누가 고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반문에 공문건의 양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이나 해 주게."


여소량 역시 김 빠진 음성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외부로 드러난 증상은 오음절맥(五陰絶脈)이지."


"오음절맥이라면 천만 명 중에 한 명이 걸린다는 희귀한 병 아닌가?"


공문건의 표정에서 혹시나 하는 기색마저 사라지자, 여소량은 불쾌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자넨 성수마의의 의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군.


까짓 오음절맥증을 치료하는 거야, 누워 식은 죽 먹기라구."


"그런데 왜……?"


"혹시 태양신맥(太陽神脈)이나 태음신맥(太陰神脈)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나?"


"음, 그것은 오음절맥이나 구양신맥(九陽絶脈)보다도 더욱 희귀한 병이지."


"그렇다네. 태양신맥이나 태음신맥을 지니고 태어나는 이는 천하를 통틀어 백 년에 한 명이나 될까?"


"……."


"만일 이러한 신맥을 지닌 사람이 병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아마 그 무공의 성취도는 끝이 없을 걸세. 절대지존(絶代至尊)의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지."


"열통 터지게시리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대체 그 신맥과 음양태령절맥이 무슨 관계가 있어?"


공문건이 언성을 높였으나, 여소량은 차분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음양태령절맥은 바로 태양신맥(太陽神脈)이나 태음신맥(太陰神脈)이 합쳐진 상태로,


전설로만 알려진 절증인데……."


"뭐가 어째? 어떻게 한 사람 몸에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단 말이야?"


"나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걸세."


여소량이 고개를 내젓자, 공문건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제기랄, 어째서 하늘은 공모(孔某)를 이다지도 희롱하지?


완전히 미쳐 버리기를 바라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의 외침은 기묘한 여운을 남기며 퍼져 나갔다.


지은 죄 없이 죄 지은 느낌에 휩싸인 여소량은 기어가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여모(呂某)는 태양신맥과 태음신맥 중 그 어느 것조차도 치료 못하네.


그러니 어찌 치료할 엄두인들 내겠나?"


화풀이할 상대가 없는 공문건은 표정을 잔뜩 우그러뜨린 채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태양신맥이나 태음신맥을 지닌 무림인을 알고 있나?"


여소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백여 년 전, 중원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을 차례로 굴복시켜


그 위명을 천하에 떨친 동해무성(東海武星)이 태양신맥을 지녔다더군."


공문건은 금시초문(今始初聞)이라는 듯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 사실이 무림에는 왜 안 알려졌을까? 그렇다면 태음신맥은 혹시……."


그의 심중을 짐작한 여소량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이백여 년 사이에 나타난 절대지존(絶代至尊)은 단 두 명뿐, 또 누가 있겠는가?"


"아, 천마존(天魔尊)!"


그렇다.


마종지주(魔宗之主)라고도 불리우던…….


하지만 그 역시 어느 날 갑자기 강호상에서 자취를 감추지 않았던가?


여소량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냉한웅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음양태령절맥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무림 역사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불세지존(不世至尊)의 위치에  를 수도 있을 텐데… 안타깝군."


이때, 영준한 용모에 기개 비범한 청년이 산길 아래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쓰러져 있는 냉한웅을 보자, 움찔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한심이가 왜 저기에……?'


그는 바로 팽지연을 찾아 대국사로 향하던 비룡서생 남궁진악이었다.


남궁진악의 좋지 않은 눈빛을 발견한 여소량은 그를 주시하였다.


"자네는 이 애를 잘 아는가?"


그의 반말에 기분이 상한 남궁진악은 떫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노인은 뉘십니까?"


순간, 공문건이 불호령을 터뜨렸다.


"이놈아, 어르신들이 묻는 말에 공손히 대답이나 하거라."


심기가 몹시 상해 있던 그는 두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강호에서 비룡서생이라면 선배들도 한 수 접어 주는 터인데, 이 늙은 것들이…….'


남궁진악도 은근히 노화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매우 영악한 위인이라 상대를 모르고는 먼저 손을 쓴 적이 없었다.


"소생은 태검장의 남궁진악이라 하오이다.


강호 친구들이 비룡서생이란 과분한 명호를 지어 주었지요."


그는 우선 자신의 신분부터 밝혀 상대의 반응을 탐지하려 했다.


"네놈이 비룡인지 비사(飛蛇)인지 노부가 알 바 아니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공문건이 닭 잡듯 계속 몰아세웠지만, 남궁진악은 오히려 더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지요. 이 아이는 본장의 하인인데, 노선배님들께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습니까?"


그를 자세히 훑어본 여소량은 내심 탄식했다.


'애석하게도… 보기 드문 기재이긴 하나, 소인배로다.


바르지 못한 심기를 숨기는 재주 또한 뛰어나니, 차후 강호에 큰 해악을 끼칠 자로다.'


공문건 또한 풍진이인(風塵異人)이 아니던가?


그 역시 남궁진악의 사람됨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태검신노의 맏제자가 인중지룡(人中之龍)이라더니, 헛소문이었군. 겨우 뱀새끼를 가지고……."


남궁진악이 머리에 털 난 이후, 언제 이런 모욕을 당해 봤던가?


그는 끓어오르는 울화를 삼키느라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 늙은 것들의 사지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들개 먹이로 던져 주리라.'


그는 살심(殺心)을 품었지만 그런 기색을 추호도 드러내지 않았다.


"소생 따위가 어찌 용의 흉내인들 낼 수 있겠습니까?


선배님의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두고두고 반성하겠습니다."


공문건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속마음을 통채로 까발겼다.


"속만 더 뒤집어질 뿐이니, 간살 그만 떨어라!


네놈이 강호의 소문대로 정인군자(正人君子)였다면


쓰러져 있는 저 애의 상세부터 먼저 살펴보았을 것이다."


정곡을 찌르는 이 말엔 영악하기 짝이 없는 남궁진악도 당황치 않을 수 없었다.


남궁진악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냉한웅을 훑어보았다.


이때 돌연, 우측 숲에서 한 줄기 흑영(黑影)이 쏘아지듯 날아올라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경공의 조예로 미루어 절정고수임이 틀림없었다.


"엇?"


이토록 빠른 신법을 전에 본 적이 없는 남궁진악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순간, 공문건이 다급한 외침을 터뜨렸다.


"여가(呂哥)야, 여기서 더 꾸물대다간 냉수 한 방울 못 얻어먹겠다."


"이미 많은 친구들이 냄새 맡고 몰려든 것 같은데, 빨리 가자."


공문건은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한 듯 냉한웅을 바라봤다.


"그럼 이 애는 어쩌지?"


여소량은 흑영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며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어차피 반년을 넘기지 못할 목숨이니, 포기하게."


공문건은 남궁진악에게로 고개를 돌린 후, 외쳤다.


"노부가 반년 안으로 태검장을 방문할 테니, 그 때까지 이 애를 잘 보살펴 주거라!"


말이 떨어진 순간, 그의 몸은 여소량과 간발의 차이를 두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남궁진악은 아연한 눈빛으로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 노괴(老怪)들의 무공은 좀 전에 본 흑영보다도 한 수 위인 듯 싶군.


오음절맥은 십팔 세까지는 괜찮다고 하던데…


얼마나 의술에 자신이 있기에 한심이가 겨우 반년밖엔 못 살 거라 단언한 걸까?'


이때, 그의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미친 개처럼 날뛰던 늙은이가 다른 친구를 여가(呂哥)가 불렀지? 
무공이 절정에 달한 데다, 뛰어난 의술을 지닌 강호인으로 여가 성을 가졌다면…….'


그는 힐끗 냉한웅을 바라보았다.


'천중사기 중 일 인인 성수마의(聖手魔醫) 여소량(呂紹梁)이 틀림없다.


삼십여 년 간이나 종적을 감추었던 그 노괴가 무슨 일로 이 곳에……?'


호기심이 인 남궁진악은 냉한웅을 그냥 내버려둔 채 그들이 떠나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마저 떠나자, 냉한웅의 주위엔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잠시 후,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냉한웅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냉한웅은 서늘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부시시 상체를 일으킨 그는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앙칼지게 호통칠 팽지연의 모습이 떠오르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서둘러 갔다 와도 이만저만 늦지 않을 텐데… 큰일났군.'


그는 기를 쓰고 산길을 올라갔다.



<대국사(大國寺)>


대문짝만한 현판의 글씨가 읽혀질 만큼 가까이 도달했을 때,


또랑또랑한 눈빛의 사미승(沙彌僧)이 다가왔다.


"시주께선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그가 예의 바르게 합장하며 허리를 굽히자, 냉한웅은 크게 당황했다.


"주지… 스님을……."


지난 오년 동안 '밥만 축내는 식충이!' '멍청한 놈!'이란 욕설에 
매질까지 당해 온 그로서 당연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사미승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주지스님을 만나러 오셨군요? 그럼 소승(小僧)을 따라오십시오."


겨우 팔구 세쯤 되었을까?


소사미(少沙彌)였지만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불문제자답게 으젓하였다.


냉한웅은 그의 뒤를 따르며 내심 한탄하였다.


'한웅아, 너는 어찌 그리도 못났느냐? 이처럼 어린아이도 제 앞가림을 손색없이 하거늘…….'


이 때 갑자기 앞서 가던 소사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십여 장 가량 떨어져 있는 대웅전(大雄殿)을 가리켰다.


"소승은 지객헌(知客軒)에 볼 일이 있어 함께 가질 못하니, 시주께선 양해해 주십시오.


저기 대웅전을 끼고 돌면, 주지스님이 거처하는 죽영원(竹領院)이 보일 겁니다."


냉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법명(法名)을 가르쳐 줄 수 있겠소?"


이것은 그가 타인에게 묻는 최초의 말이었다.


그만큼 소사미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이다.


소사미는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다시 합장을 했다.


"소승에게는 아직 법호가 없습니다. 그럼 이만……."


냉한웅은 총총히 걸어가는 소사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자신이 급히 처리해야 할 일조차 잊은 듯…….


돌연, 사방이 웅성거리며 일련의 소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냉한웅은 넋 나간 듯 소사미가 걸어가는 방향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때, 거친 음성이 그의 고막을 후려쳤다.


"넌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이냐?"


냉한웅은 흠칫 놀랐으나,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두려움이 깃든 음성이 들려 왔다.


"이보게, 경치기 전에 어서 그 자리에 부복( 伏)하게."


냉한웅은 직감적으로 지체 높은 이의 행차가 있는 것을 알아챘으나,


못 들은 척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이렇게 비참하게 이어 가느니,


차라리 맞아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저 애, 귀머거리 아냐?"


"꼼짝없이 목숨을 잃게 생겼군. 쯧쯧!"


주위의 쑥덕거림 속에 위엄과 부드러움이 어우러진 늙수그레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시주는 어찌 이리도 무례하오. 어서 등을 돌리시오."


냉한웅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갔다.


귀에 익은 음성.


태검장에 몇 번 들린 적 있는 법운대사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혼마저 앗아 가 버릴 듯한 교성(嬌聲)이 뒤따랐다.


"보아하니 귀머거리인 듯한데, 그냥 내버려두세요."